누가 왕을 죽였는가(5)- 제 18대 현종
5장
예송 시대에 가려진 죽음
제18대 현종 1641-1674년. 재위 1659-1674
<현종실록> 15년8월16일
임금의 증세가 여전히 위급하여 오직 가끔씩 인삼차만 복용하였는데 종일토록 혼미하고 지쳐서 잠자는 것 같기도 하고 잠들지 않은 것 같기도 하였다.
<현종실록> 15년8월17일
영의정으로 제수받은 허적이 충주에서 올라왔다. 승정원에서 “영상이 방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영상의 직책은 감히 받을 수 없으므로 사은숙배는 못하고 임금의 환후가 이렇게 편찮으시므로 바로 약방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고 아뢰니, 임금이 “부른다고 즉시 전하라” 명했다.
<현종실록> 15년8월18일
임금의 병이 크게 위중해지더니, 이날 밤 해시에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효종의 어필과 정태와의 간찰>
복통과 뜸 치료
현종은 그다지 많이 알려진 임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재위 15년간도 '현종'이란 이름보다 ‘예송논쟁’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흔히 예송논쟁은 '쓸데없는 정쟁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런 논리는 일본인 학자들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기 때문이지 사실 예송논쟁은 그렇게 쓸데없는 정쟁만은 아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그 결과에 따라 당시의 집권세력이 교체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특히 현종 15년(1674년)에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50년간 집권한 서인 지배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현종은 실제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2차 예송논쟁을 이끌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 당시 국왕보다 더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그 추종세력을 정연한 논리로 몰아붙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현종의 정연하고 단호한 공세에 당황했다. 그리고 결국 이 논쟁으로 사실상 국왕의 위에 있던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등용되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2차 예송논쟁 와중인 재위 15년 8월 8일에 갑자기 현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현종의 병명은 복통이었다. 현종이 최초로 치료를 받은 것은 7월 24일로, 남인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는 침을 맞았다고 되어 있으나, 서인들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뜸 치료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종은 계속 뜸 치료를 받는데, 8월 7일에는 복부가 당기고 아픈 증세는 조금 덜 했으나 극심한 피곤을 느낀다.
인삼차를 계속 들었으나 대신들을 인견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해졌다. 같은 날 오후에는 맥박이 빨라지고 살갗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요통 증세까지 있어, 약방에서 해열제를 올렸다. 그 후 8월 9일에는 열이 나는 증세가 학질 같다 하여 침을 맞고, 다음날인 10일에는 열이 계속 나는데다가 헛배가 부어 오르고 대변이 묽고 잦으며 소변이 안 좋아 약방에서 분리제分利劑를 썼으나 열과 설사 등의 증세는 차도가 없었다. 이후 인삼차만 가끔 들 뿐 종일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약방에서 시령탕柴苓湯을 올렸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편찮은데도 현종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면 영의정으로 제수한 허적이 충주에서 언제 도착하는지를 물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 와중에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남인 허적을 임명하여 집권세력을 교체하고 있었다. 드디어 8월 16일 허적이 서울에 올라오자 현종은 거의 혼수상태에서도 관복을 입고 예의를 갖춰 만났다. 그때가 8월 17일, 현종이 부왕 효종처럼 못다 한 일을 남기고 승하하기 하루 전이었다.
허적이 설사 증세가 좀 덜하냐고 묻자 현종은 덜한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 약방에서 시약청을 개설하자고 청하자, 현종은 약방이 가까운 곳으로 옮겨 왔으니 시약청까지 개설할 필요는 없다며 거절하다가 재차 아뢰자 허락했다. 이때 허적이 영의정으로서 약방 도제조를 겸하자마자 승지를 시켜 왕비에게 전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상의 병세가 저런 데도 곁에서 모시는 자가 환관뿐이어서 증세의 경중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청풍부원군 김우명, 예조판서 장선징, 청평위 심익현이 오늘부터 좌우에서 모시게 하소서."
현종의 병상을 지키는 환관들을 믿을 수 없으니 장인 김우명과 매제 심익현, 그리고 남인 장선징으로 하여금 병실을 지키게 하자는 요청이었다. 허적은 현종의 급작스런 병세에 분명 서인들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현종을 알현한 다음날 이런 주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현종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백회혈百會穴에 뜸을 떴으나 효력이 없어 오후 서너시경에는 병세가 매우 위독해졌다.
현종은 하얀 겹모자에 하얀 옷차림으로 하얀 평상에 부들자리를 깔고 하얀 요에 이불을 덮은 채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워 있었다.
영의정 허적이 평상 앞에 꿇어앉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인삼차를 드시옵소서."
눈을 뜬 현종이 허적임을 알고 일어나 앉으려 하자 손으로 부축해 일으켰다. 현종은 인삼차를 손수 들어 다 마셨다. 허적이 물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별로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숨이 차서 목소리가 분명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심익현이 인삼차를 냉약冷藥에 타서 올리자 조금 들더니 대신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밤 10시경 창덕궁 재려에서 현종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15년, 34살의 한창 나이로 부왕 효종처럼 큰 일을 추진하는 와중에 한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복제
현종의 부왕 효종은 죽어서도 편안히 저승에 가지 못했다. 시신보다 작은 관과 장지 논란의 파문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그의 재위 10년보다 더 긴 15년 간의 예송논쟁이 지리하게 전개되게 한 것이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살아 있던 것이 1차 예송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논쟁의 발단은 효종의 국상 때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국상의 복제는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국왕이 승하했을 때 어머니인 모후가 입는 복제에 대해서는 규정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1차 예송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인조는 첫 부인 인렬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3년 후 영돈녕부사 양주 조씨 창원의 딸과 재혼했는데, 그녀가 바로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다. 국혼 당시 인조는 만 43세였고, 조씨는 아들 효종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린 만 14세였다. 그런데 효종이 만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법적인 어머니 조씨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효종이 사망한 1659년이 기해년이라 해서 이를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부르기도 하고, 상복 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己亥服制’라 하기도 한다.
식민지시대 일본인 학자들은 이 예송논쟁을 당파싸움 망국론의 중요한 근거로 이용해 우리의 민족성을 비판했다.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형식적인 문제로 논란을 일삼았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예송논쟁은 형식적인 문제만도, 실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송논쟁은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가'라는 지극히 민감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장장 15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왕위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으니, 이는 일본으로 따지면 일왕 다이쇼가 메이지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한가에 관한 논쟁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어찌 형식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송논쟁이 격화된 데에는 조선 후기 들어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예학으로 수구화한 사상적 배경도 한몫을 했다. 조선 중기까지는 동인의 정치이념인 이기이원론과 서인의 이념인 이기일원론의 대립에서 보여지듯이 사상의 흐름이 사회의 발전 방향과 보조를 같이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신분제 해체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 강해지자, 신분질서를 강화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층의 의지가 예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불교이념을 극복하고 조선을 개창한 조선 성리학 사상의 자기 부정이기도 했다.
신분제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 예학을 집대성한 인물이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이란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후 조선 예학은 그의 제자 김장생과 장생의 아들 김집, 그리고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주도하는 산당의 이념이 되어 양송 때에 와서는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된다.
이처럼 예학이 중시된 조선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효종의 죽음으로 야기된 1차 예송논쟁의 핵심은, 효종을 맏아들로 대우할 것이냐 아니면 둘째 아들로 대우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조선의 예법은 조선의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 그리고 중국의 <주례>, <주자가례> 등을 복합해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상복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3년복인 참최와 3년 또는 1년복인 재최, 9개월복인 대공, 5개월복인 소공,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가 그것이다.
부모상에 자녀가 3년복을 입는 것은 당연했지만, 반대로 자식이 죽었을 경우 부모의 상복은 장자냐 아니냐에 따라 달랐던 것이 논쟁의 시작이었다. 맏아들인 장자 상에는 부모도 3년 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차자次子 이하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인 조선에서는 후사를 잇는 장남을 그만큼 우대한 것이다. 며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장자부(맏며느리)의 상에는 1년 복을 입게 되어 있으나 중자부(맏며느리 이외의 며느리)의 상에는 9개월 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를 따라 3년 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차자의 예를 따라 1년 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고, 15년 후의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장자부의 예에 따라 1년 복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부의 예에 따라 9개월 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부모가 자식 상에 3년 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이유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장례를 주관했던 예조판서 윤강이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해 물은 것이, 장장 15년 간에 걸친 예송논쟁의 시발이 될 줄은 윤강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자의대비께서 상복을 입으셔야 하는데 <국조오례의>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혹은 3년복이라 하고 혹은 1년복이라 하는데, 결정할 만한 예문이 없으니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케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당시의 현종의 나이 만 18세였다. 현종은 갑작스런 부왕의 사망에 경황이 없었고, 또 자기 주장을 내세울 만큼 예론에 대한 식견도 없었으므로,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해 아뢰라고 명했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돈녕부사 이경석 등의 대신들이 복제 문제를 논의한 후 현종에게 헌의했다.
"신 등이 옛 예법에 능통하지는 못하지만 시왕時王의 제도로 생각해 보니 대왕대비께서는 1년복을 입으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이 아니라 1년복이 맞다는 주장이었다. 현종은 3년복이 아니라 1년복이라는 데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반박할 만한 이론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시열과 송준길에게도 의논하게 했다.
양 송의 견해는 과거로 등과한 신하들보다 우대받았던 터였다. 그러나 이들 유신들도 "선왕(효종)께서 비록 왕통을 이었으나 다음 적자 서열이니 이번 국상에 대왕대비께서 입으실 복제는 1년을 넘을 수 없다."며 1년설을 지지하고 나섰다. 효종이 왕통을 이었더라도 장자가 아닌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3년복이 아닌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렇듯 대신들과 유신들이 모두 1년복을 주장하고 나서자 자의대비의 복제는 1년복으로 굳어졌다. 이 때 남인 윤휴가 1년설을 비판하며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파란의 예송논쟁이 시작되었다. 1년설을 주장한 대신과 유신들은 대부분 서인이었는데, 남인 윤휴가 이를 비판하고 나서면서 예송논쟁은 당파간 논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윤휴는 1년설을 찬성한 서인 이시백에게 편지를 보내 1년설에 반대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의례주소> 가씨 주에 '장자가 죽으면 적처嫡妻 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워 역시 장자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대왕대비께서는 당연히 3년복을 입으셔야 마땅합니다."
장자 소현세자의 뒤를 이은 효종은 차자가 아니라 장자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효종이 장자가 되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당연히 3년복이 되어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의정 정태화는 예론의 대가로 인정받던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의논했다. 이 자리에서 송시열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견해인 문제의 '4종지설四宗之說'을 거론한다. 4종지설은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경우를 뜻하는데, 그 중에는 신하로서 발설할 수 없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 네 가지 경우란 첫째, 장자가 병이 있어 제사를 받들 수 없는 경우, 둘째 서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 셋째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은 경우, 넷째 적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를 말한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된 것은 셋째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은 경우였다.
이를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 하는데 비록 후사(體)는 이었지만 서자이므로 정正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태화는 송시열이 '체이부정'이란 말을 입에 담자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국왕에게 서자 운운하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든 발언이었다. 정태화가 놀라자 송시열은 여기서 말하는 '서자'란 첩의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 이외의 여러 아들, 즉 중자를 뜻한다고 설명했으나, 경위야 어쨌든 신하로서 국왕에게 '서자', '부정'운운한 것 자체가 가져올 파장은 심각했다.
가슴이 서늘해진 정태화는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예로부터 왕가의 일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데서 비롯되더라도 나중에는 큰 화를 이룬 것이 한둘이 아니오. 만일 훗날에 간사한 자가 나타나 '체이부정'이란 말을 가지고 화단禍端을 만든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화를 당한 후에도 나랏일이 어디에 이를지 알 수 없소."
정태화의 다음 말은 그의 두려움의 근저에 소현세자가 있음을 보여 준다.
"예법이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어찌 감히 체이부정으로 예를 논하겠소. <경국대전>에는 모든 아들의 상사에 부모가 다 1년복을 입었으니 이를 근거로 1년복으로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 좋겠소."
굳이 장자냐 차자냐 따질 필요없이 모든 아들의 상사에 1년복을 입기로 되어 있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1년복으로 결정하자는 절충안이었다. 이 주장에 대해 송시열은 <대명률>(명나라 법전)에는 1년복으로 되었으니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인용해 1년복으로 결정하자고 동의했다. 송시열은 '체이부정'을 내세우다가는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한다는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인용해 1년복을 주장하는 편법으로 한 발 후퇴한 것이다. 체이부정을 근거로 하든 <경국대전>을 근거로 하든 자의대비의 복제는 1년복이 되는 것이니 그 효과는 같았다.
<중국 명나라 형법전인 대명률과 조선시대 근본법전인 경국대전>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정태화와 송시열의 합의는 집권당인 서인의 당론으로 확정되었고 당시 만 열여덟에 지나지 않았던 현종으로서는 다른 의견을 낼 만한 확고한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1년복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했던 윤휴는 1년복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의례주소>의 "내종은 외종과 같다"는 소疏를 인용해 송시열의 1년설을 반박했다.
"내종은 다 참최복(3년복)을 입으니 대비의 복은 마땅히 3년복이어야 합니다."
이제는 송시열도 물러설 수 없었다.
"내종의 부녀는 모두 신하다. 따라서 임금에게 감히 촌수를 계산하지 못하고 모두 3년복을 입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왕대비는 선대왕(효종)께서 신하로서 섬기던 분이다. 어찌 신하인 내종의 다른 부녀들처럼 참최복을 입는단 말인가? 당연히 1년복을 입어야 한다."
윤휴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나라 무왕은 어머니이자 문왕의 비인 문모文母를 신하로 삼았다."
주나라 무왕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은 예가 있다는 말이었다. 윤휴가 무왕의 예를 들자 송시열은 주자의 말을 인용했다.
"주자께서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고 말했다."
윤휴 또한 지지 않았다.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국왕의 예는 일반 사대부가와 다르므로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이란 주장이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현종은 우선 <경국대전>에 의거해 1년복으로 결정했고, 현종이 서인의 1년설을 지지함으로써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현종과 서인의 속마음은 서로 달랐다. 현종은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효종이 적통과 종통을 모두 이었다는 전제하에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여겼다. 즉 적통에 따라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자위했던 것이니, 내심으로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기 때문에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여겼다. 즉,현종과 달리 서인은 겉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했으나 실제로는 차자의 복인 고례를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1년복을 놓고 이렇듯 서로 다른 생각을 한 것이 15년 후 2차 예송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예론을 금하노라”
자의대비의 복제가 1년복으로 결정될 무렵 남인 논객 허목이 또다시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파란이 재연된다. 게다가 윤휴와 허목에 이어 3년설에 가세한 남인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는 상소를 올리면서 조정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차장자가 왕위를 이었다 해서 어찌 별도로 적통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명과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를 계승했는데도 적통이 다른 사람(소현세자)에게 있다면, 이는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섭정황제란 말입니까? 또 왕위에 오른 차장자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석견)에게는 임금 노릇을 못하며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왕위에 오른 차장자에게 신하 노릇을 못한다는 말입니까?"
윤선도의 논리대로라면 송시열의 1년설은 효종의 종통과 정통성을 부인한 역적의 의논이었다. 효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즉 소현세자의 살아 있는 3남 석견을 적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이는 서인들이 효종이 아니라 석견을 임금으로 여기고 있다는 주장이었으니 서인들이 역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송시열이 종통은 종묘사직을 계승한 임금(효종)에게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소현세자)에게 돌리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종통과 적통이 갈라져서 둘이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고 신하(송시열)에게 있습니다."
윤선도의 이 과격한 주장에 송시열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서인 전체가 크게 놀랐다. 이는 송시열을 역적으로 처단하라는 상소와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와 같은 당으로 1년설을 주장한 유신들 모두를 역적으로 모는 것이었다.
이 상소로 서인들은 남인들의 거듭된 문제제기가 단순한 예론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 공세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밀리면 정권을 잃을 판이었다.
서인들은 당력을 집중해 윤선도를 공격했다.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서인의 집요한 공세에 결국 윤선도는 머나먼 삼수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것으로 파문은 일단락되었으나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2년 후 심한 가뭄이 들자 현종이 내외에 널리 구언했는데, 이때 전 판중추부사 조경이 응지상소를 올려 이를 재론하고 나섰다. 그는 "윤선도의 죄라는 것은 적통, 종통 논의에 있어 효종대왕을 두둔한 것뿐" 이라며 윤선도를 옹호하고 나섰다.
복제 문제가 또다시 시끄러워지자 현종은 비로소 단안을 내린다.
"차후에 다시 예론을 논하는 상소가 있으면 비록 많은 선비들의 상소라 해도 용서하지 않고 중형으로 다스리겠다. 이 뜻을 널리 중외에 반포하라."
현종은 예론 자체를 재론할 수 없는 금법으로 만들었다. 현종으로서는 효종의 종통 문제가 재론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었다. 효종이 적통이 아니면 현종도 적통이 될 수 없었다. 현종은 예론 자체를 금법으로 만듦으로써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현종이 금지했다고 해서 금법이 될 수가 없었다. 단지 현종의 명에 따라 땅속에 묻혀졌을 뿐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채 잠복해 있었으며, 누구든지 불씨만 붙이면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자의대비보다 여섯 살 많은 현종의 모후이자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생존해 있는 상황이었다. 자연적으로 보더라도 며느리 인선왕후보다 자의대비가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많았으므로 이 경우 1차 예송논쟁 때와 똑같은 상황, 즉 효종비인 장자부냐 아니면 차자부냐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1차 예송논쟁 15년 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며느리 상喪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1674년(현종15년) 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장씨는, 자신보다 여섯 살 어린 시어머니 자의대비 조씨를 모시다가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때 50살의 자의대비 조씨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예송논쟁이 재연될 수밖에 없었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효종이 승하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에 관한 논란이었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기간에 관한 논란이었다.
이는 15년전에 벌어졌던 1차 예송논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즉 효종을 장자로 보면 인선왕후도 장자부이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 즉 중자로 보면 중자부이므로 9개월복을 입어야 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1년복으로 정해 올렸고 현종도 이의가 없어서 그대로 시행하게 되었는데, 예조에서 다시 당초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자인하고 나섬으로써 2차 예송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예조판서 조형과 참판 김익경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의정한 다음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신 등이 어제 상복에 관한 절목 중에서 대왕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올렸으나 <가례복도>와 명나라 제도를 보니 큰며느리의 상복은 기년(1년)이고, 그 외 며느리의 복은 대공(9개월)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효종대왕 국상 때 대왕대비께서 이미 중자의 상복인 기년복을 입으셨으니 지금의 복제는 9개월이 맞는데 경황이 없어 경솔하게 1년으로 아뢰었으니 황공합니다."
예조는 9개월복으로 절목을 고쳐 바쳤다. 현종이 대답했다.
" 알았다. 성복成服 때에도 이런 잘못이 있을지 염려되니 담당인 예조정랑을 잡아다가 죄를 정하라."
고증을 잘못한 탓으로 돌려진 이 사건은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이를 단순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았다. 남인들에게 이는 효종의 장례 때와 마찬가지로, 서인들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남인들은 자의대비의 복제가 장자부의 1년복이 아닌 차자부의 9개월복이 된 데 분개했다. 그러나 현종 2년의 금법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자의대비는 9개월복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대구의 한 유생이 이 금법을 깨고 9개월복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나섬으로써 예론이 재연되었다. 인선왕후 사후 5개월 만인 그 해 7월, 대구의 유생 도신징은 상소를 올려 서인들의 9개월복을 통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대왕대비 복제를 기년(1년)으로 정했다가 다시 대공(9개월)으로 고친 것은 무슨 전례에 의한 것입니까? 효종대왕 국상때 자의대비께서 입으신 1년복은 <국제>(경국대전)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국제>에도 없는 대공이란 복제가 갑자기 나왔습니다. 15년 전에는 효종대왕을 장자로 여겨 1년복을 입었다면서 지금은 인선왕대비를 차자부로 여겨 대공복을 입으니 어찌 그 전후가 다릅니까."
효종 상사 때 '체이부정'의 위험성 때문에 장자나 중자 모두 1년복으로 되어 있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1년복으로 정한 편법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그때는 효종을 장자로 대우해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왜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해 9개월복을 입느냐는 반론이었다. 현종의 금법을 깨면서 집권당인 서인의 이론에 정면 도전한 이 상소는 일개 유생인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만약 15년 전에 1년복을 의정한 서인의 이론과 9개월복을 의정한 서인의 이론이 같았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신징의 주장은 서인의 이론적 모순을 정확히 지적하였고 현종도 이 점을 의문스러워했으므로, 금법은 자연히 사문화되고 논란이 재연되었다. 현종도 이제 서른네 살의 장년이었고 그 동안 예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스스로의 의견을 갖게 되었다. 현종의 생각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정했다가 다시 9개월복으로 고친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이는 효종비를 차자부로 여기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나아가 15년 전에도 서인들이 부왕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
현종은 좌부승지 김석주를 불렀다. 김석주는 현종의 장인 김우명의 조카로 현종과는 외사촌인 외척이었으며, 또한 효종 때 대동법 실시를 놓고 송시열, 송준길과 치열하게 다툰 김육의 손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육을 장사지낼 때 왕가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수도隧道를 썼다고, 송시열이 김석주의 부친 김좌명과 김우명을 공격한 일이 있어 두 집안은 구원舊怨이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김석주는 서인이면서도 남인과 가깝게 지냈다.
현종은 김석주에게 1차 예송 당시의 각 의논에 대해 물었는데 김석주는 허목의 상소와 윤휴가 3년설의 근거로 삼은 <의례주조>의 <참최장> 등을 정리해 보고했다. 이는 모두 남인들의 주장이었으므로 사실상 1차 예송 때 남인들이 주장한 3년설이 맞다고 보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왕 효종을 장자로 규정한 남인들의 주장이 현종의 마음에 든 것은 당연했다.
현종은 서인들이 부왕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혔다. 현종으로서는 서인들의 내심대로 효종을 중자 자리에 두면 그 자신의 정통성도 불분명해질 뿐 아니라 만약의 경우 이들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을 추대해 쿠데타를 감행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를 방치해 둘 수 없었다.
현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의대비의 복제를 바꿔놓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집권당인 서인과 한판 승부가 불가피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현종은 침착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가 대신들을 불러 복제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것은 도신징이 상소한 1주일 후였다. 현종은 먼저 영의정 김수홍에게 물었다.
"대왕대비의 복제를 1년복에서 갑자기 9개월복으로 바꾼 것은 무슨 곡절 때문인가?"
"기해년 선대왕 국상때에 이미 1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하지만 고례가 아닌 <국제>를 써서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9개월복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
김수홍이 대답했다.
"그때 송시열의 의견은 '고례는 마땅히 이렇지만 당시는 <국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김수홍의 대답이 지닌 모순을 놓치지 않았다. 고례의 기년복은 장자가 아니라 중자의 복이었다. 반면 <국제>는 장자와 중자의 구분없이 기년복으로 되어 있었다. 즉 중자의 복이었던 것이다.
"기해년에 영상 정태화가 '마땅히 <국제>를 써야 한다'고 하여 판중추부사 송시열과 의논해 1년복으로 결정했었다.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
답변이 궁색해진 김수홍이 겨우 대답했다.
"고례로 하면 9개월복입니다."
"기해년에는 <국제>를 쓰고 지금은 고례를 쓰니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린가?"
"기해년에도 고금의 예법을 참조했고 지금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때는 <국제>를 썼는데 그 뒤 문제가 되어 다툰 것은 고례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현종은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15년 전 경황없던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민유중이 김수홍을 지원하는 발언을 했다.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참고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민유중의 발언을 무시하고 김수홍에게 다시 물었다.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
김수홍의 답변은 궁색했다.
"<국제>에 장자부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종의 추궁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가 <국제>와는 어떤 관계에 있단 말인가? 이는 놀라운 일이다.
기해년에 대비께서 1년복을 입은 것은 <국제>이지 고례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기해년에 <국제>를 인용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에서 무엇을 인용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서인들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국제>에 따르면 장자부의 복은 기년복이라고 말해놓고, 지금의 대공복이 <국제>라고 말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민유중이 나서서 김수홍을 구원하고자 했다.
"<국제>가 우연히 그러했습니다. 기해년에 대신들이 의논할 때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시행한 것은 고례였을 뿐입니다."
막중한 국사가 '우연히' 결정되었다는 민유중의 대답은 자기 모순이었다. 이들은 1차 예송때 내부적으로는 고례의 '체이부정'에 따라 1년복을 주장했으나, 그 파장을 우려해 공식적으로는 <국제>에 따른다면서 1년복으로 정한 것이었다. 현종은 이제 이 모순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연륜을 쌓은 국왕이었다.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좇은 것이다."
김수홍도 모순된 의견에 가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
김수홍이 1차 예송논쟁 때 고례를 썼다고 주장하자 현종은 그 주장을 역습의 재료로 사용했다.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
영의정 김수홍은 헤어나기 어려운 늪에 빠졌음을 알았으나 국왕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최 3년복입니다."
서인 영의정 자신의 입으로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실토한 셈이다. 이는 곧 1차 예송 당시 서인들이 겉으로는 <국제>의 장자복인 기년복을 적용해 효종을 장자 대접한 듯 해놓고, 속으로는 고례의 중자복인 기년복을 적용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가, 서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스스로 모순을 자백한 후에야 김수홍에게 내보였다. 김수홍은 집권당을 궁지에 빠뜨린 한 시골 유생의 상소를 상기된 모습으로 받아 읽었다. 김수홍이 다 읽고 나자 현종이 물었다.
"기해년에 과연 차자로 의논해 정했는가?"
이 때 비로소 좌부승지 김석주가 나섰다. 그는 처음부터 송시열을 직접 겨냥했다.
"송시열의 수의收議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허목이 논쟁한 것입니다."
현종은 예조판서 조형을 꾸짖었다.
"예조는 기해년의 일을 자세히 상고한 다음 증거를 대고 고쳤어야 하는데 함부로 대공복으로 고쳤다.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조형이 대답했다.
"바빠서일 뿐만 아니라 며느리의 상에는 대공복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고쳐서 들인 것입니다. 기해년에 왜 1년복으로 정했는지는 망각하고 상고하지 못했습니다."
김수홍은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기해년의 일을 자세히 상고한 다음에 여쭈어 처리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현종은 서인들이 배후의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공동대처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해 시간을 재촉했다.
"사체가 중대하므로 예조만 단독으로 의논해서는 안된다. 육경이 반드시 오늘 안으로 모여 의논해야 할 것이다."
민유중이 너무 급한 것 같다며 시간의 촉박함을 말했으나, 현종은 "지연되면 안 되니 빨리 하라"고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의정 김수홍, 판중추 김수항, 이조판서 홍처량, 병조판서 김만기, 호조판서 민유중 등이 긴급히 모여 의논한 후 그날 밤 현종을 찾았다. 선왕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의 문제였으니 그만큼 민감하고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기해년 복제를 정할 때 대신들이 전후 순서를 <실록>에서 상고해 보았더니, 정희왕후(세조의 비)는 덕종과 예종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었고 문정왕후(중종의 비)는 기록이 없었습니다.
<국제>에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되어 있으며 기해년에 처음 복제를 의논할 때도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3년복이란 반론이 나오면서 논의가 분분해졌으나 여러 번 회의한 끝에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장자와 중자를 구별해 장자에게는 최참복(3년복)을 입고 중자에게는 기년복을 입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제>입니다. 기해년에 처음부터 <국제>를 쓰기로 했는데 후에 고례를 주장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역시 <국제>대로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계사의 설명은 길었지만 정작 현종이 알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현종이 알고 싶은 것은 자의대비의 이번 복제가 기년복인가 대공복인가였다. 물론 듣고 싶은 대답은 "장자부의 복인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는 말이었다.
서인들도 현종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15년 전 기년복으로 정한 원죄때문에 기년복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면, 15년 전의 기년복은 잘못된 것이 되고 3년복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서인 중신들이 진퇴양난에 빠진 가운데 현종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한가지로 분명히 정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김수홍 등 서인 대신들의 답변은 궁색했다.
"신들은 다만 기해년 복제를 정할 때 어떤 전거를 썼는지 알아보라는 분부만 받았으므로 지금 대왕대비의 복제에 대해서는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현종은 가장 중요한 지금의 복제를 빼놓은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대왕대비께서 대공복을 입으시는 것이 미안하여 의논하라고 하교한 것이다. 기해년 복제에 관한 것만 물을 것 같으면 예방승지에게 시켜 기록을 찾으면 될 것을 왜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했겠는가."
현종은 소신을 정리했으므로 뚜렷한 논리가 서 있었다. 반면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한 서인들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하교받을 때, 그 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다만 기해년 복제만 상고해 아뢰었던 것인데 거듭 하교를 받으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처음 하교 했을 때는 내 뜻을 명확히 몰랐다 할지라도 지금은 알았을 터인데, 아직도 명백히 아뢰지 않는 뜻을 모르겠다. <국제>대로 한다면 대왕대비께서는 무슨 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 하교를 받았으나 너무 중한 예라 감히 입으로 아뢸 수 없으므로 글로 써서 아뢰겠습니다."
김수홍은 일단 자리를 모면해 서인들과 논의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현종이 자의대비의 복제를 9개월복이 아닌 1년복으로 바꾸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의 당론은 대공복이었고, 당시는 임금의 명령보다 당론이 더 중했던 당쟁의 시대였다.
현종은 김석주를 불렀다.
"내 의견으로는 기해년에 <국제>를 사용했으니 이번 회의 때는 이러이러하므로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논의하든지, 아니면 저러저러하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논의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재차 올린 계사를 보면 몇마디 말로 그럭저럭 책임을 때우고 말았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또 대공복을 입어야 될 듯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매우 이상스럽다. 예조에서 한 일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죄 주기를 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비호하려고 하니, 빈청이 하는 짓도 놀랍다."
현종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서인들은 현종의 분노가 두려웠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물러서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 김수홍과 민유중 등 서인 대신들은 빈청에 모여 현종에게 말했다.
"<국제>를 상고해보니 아들 밑에는 다만 '1년'이라고 썼을 뿐,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래 장자부에는 '1년'이라 쓰고 중자부에는 '9개월'이라고 썼을 뿐이며 승중여부는 적지 않았으니 대왕대비의 복제는 9개월로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중한 예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으니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예전의 경우를 고증하게 하십시오."
서인들은 여전히 대공복이란 당론을 변경하지 않았다.
"<국제>에 장자부와 중자부의 구분은 있으나 '중자부 9개월복'이란 말 이외에 따로 승중했으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말은 없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왕대비의 복제가 9개월복이란 것이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결국 서인들은 "대왕대비께서 9개월복을 입으시는 것이 미안하다" 는 현종의 바람을 무시했다. 이는 현종과 맞서보자는 말에 다름아니었으니 현종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기해년 복제 때는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감히 중자부이기 때문에 9개월복이 마땅하다고 하는구나. <국제>에 '승중'에 대한 조목이 없는 것은 제도의 미비함인데 <예경>을 참조해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를 빌미로 9개월복을 주장한다면 이런 회의는 무엇하러 하는가? 다시 살펴 아뢰도록 하라."
현종은 분노했고 서인들은 기로에 섰다. 현종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기년복으로 수정하든지, 아니면 기해년에 송시열이 제기했던 '체이부정'을 거론해 정면 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인들은 결국 현종과 정면대결하기로 결정했다. 서인 대신들은 15년 전 송시열이 거론했다가 정태화의 만류로 우회했던 문제의 사종지설을 거론했다.
"신들은 <국제>만 참고하고 고례는 참고하지 않았지만 이제 고례를 참고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사종지설이 나오는데 그 세 번째가 '체이부정'으로서 서자를 세워 가계를 잇게 한 경우입니다. 여기에 '서'자를 쓴 것은 장자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자는 첩의 아들이요,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은 중자인데 여기에서 둘을 함께 서자라고 이름한 것은 장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또 며느리에 관한 조항을 보면 '무릇 부모가 아들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적통을 전중傳重(선조의 제사를 후손에게 전하여 있게 함)할 수 없는 것이니 전중한 자는 적통이 아니어서 복제를 모두 서자, 서부庶婦와 같이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러 조목을 상고해본다면 지금 대왕대비께서 9개월복을 입는 것이 고례의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사오나 그 정밀한 뜻은 신들의 짧은 견식으로는 감히 정할 바가 아닙니다.”
"부모가 아들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적통을 전중할 수 없다."는 말은 적통 계승의 권한이 종법에 있는 것이지 부모나 시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는 결국 인조가 효종을 선택해 적통을 물려준 것은 천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효종이나 인선왕후는 장자, 장부의 복을 입을 수 없으니 자의대비의 복제는 대공이 맞는다는 말이다. 고례로 따져봐도 효종과 인선왕후는 적통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이 말은 곧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 계사에 현종이 격분한 것은 당연했다.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매우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효종)의 은혜를 입었거늘, 지금에 와서 감히 '체이부정'이란 말로써 오늘의 예법을 결정짓는다는 말인가. <의례>에는 '장자가 죽으면 적처가 낳은 차자를 세워 장자라 한다.'고 했다. 경들은 이 조항은 무시하고 다른 조항을 꺼내어 이치에 맞지 않는 어그러진 말로써 예법을 정해 선왕을 '체이부정'이라고 지목하는구나.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란 힐난은, 충성을 바쳐야 할 임
금에게는 박하면서 대신인 송시열에게 후한 신하들이라는 꾸짖음이 함축되어 있었다.
현종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내 이를 심히 못마땅히 여긴다. 막중한 예법을 자기 당의 영수(송시열)에게 붙은 의논으로 정할 수 없으니 이번 복제는 처음 결정한 대로 <국제>에 있는 기년복으로 정하라."
신중하고 온화한 성격의 현종으로서는 이례적인 단안이었다. 현종은 조선의 임금 중 드물게 명성왕후 김씨 외에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았고, 재위기간 동안에도 대신들과 싸우며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은 서인들이 의정한 9개월복을 1년복으로 바꾸는 단안을 내렸지만, 집권당인 서인은 끝까지 맞섰다.
현종은 서인들이 임금보다 자기 당의 영수인 송시열을 더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후속 초치를 신속하게 취했다. 먼저 예론의 주무 부서인 예조의 판서, 참판, 참의, 정랑 모두를 하옥하고, 9개월설을 주장한 영의정 김수홍을 춘천으로 귀양보냈다.
신중한 현종의 이례적인 신속한 조치에 가만히 물러날 서인들이 아니었다. 서인들은 근 50여 년 이상을 집권해 온 정당이었다.
먼저 서인 승지 이단석과 교리 조근이 입대入對를 청했다. 그러나 입대를 청한 이유를 짐작한 현종이 거절하면서 꾸짖었다.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들은 이 점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단 말인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승정원의 승지와 홍문관 교리가 국왕이 아닌 자당을 위해 국왕을 압박하는 지경이었다. 현종이 입대를 거부하는 데도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차지를 올려 노론 영수 김수홍을 변호하고 임금을 비난했다.
"장자와 중자에 관한 의논은 오늘 처음 나온 말이 아니고, 또 이 말이 옳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으시면 그만인데 이로써 대신을 귀양보내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보좌해야 할 승지와 교리가 임금보다 당론을 추종하자 현종은 분노했다.
"차자의 말은 내가 매우 놀랍게 여긴다. 기해년에 갑과 을이 다투어 변론할 때 조정에서 <국제>를 사용하였으나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그렇게 처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해년에 갑과 을이 변론한 것들을 주워 모아 대왕대비의 복제를 강등하려고 꾀하였다."
승지와 교리의 차자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양사가 나서서 현종을 압박했다. 장령 이광적과 지평 유지발이 예조에 대한 심문과 김수홍의 중도부처를 취소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종이 분노하며 말했다.
"너희들의 계사에 내가 심히 놀랐다. 양사의 대간은 마땅히 엄한 말로 예론을 그릇 이끈 자들을 죄 주기를 청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죄인을 구하려고 하는구나. 지금의 양사는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들인데 어찌 낯을 들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겠느냐. 이들을 함께 삭직해서 내쫓으라."
현종이 이처럼 강력히 나가는 데도 서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승정원과 삼사의 주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좌의정 정지화가 직접 나서 김수홍을 옹호했다. 지금껏 배후에서 젊은 서인들을 조종하던 중진이 직접 나선 것이다. 현종이 정지화의 청마저 거부하자 판중추 민유중, 좌참찬 이상진, 김만기등 서인 중진들이 줄줄이 나서서 김수홍을 옹호했다.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란 현종의 힐난이 이유있는 비난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 와중에서 서인 대사간 남이성이 현종에게 직접 도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예론에 있어 을의 설(1년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나라에 충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갑의 설(9개월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 임금에게 박한 것도 아닙니다. 만일 전하께서 노여움을 잊고 용서하신다면 지금 대신들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남이성은 ‘사종지설'을 인용하여 자의대비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적통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듯 조정을 장악한 서인들이 모두 당론을 따르면서 현종은 고립되었다. 왕권에 도전한 대신들을 탄핵해야 할 대간의 장관이, 대신들을 편들고 국왕에게 대드는 판이었다. 현종이나 서인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현종은 대사간 남이성이 올린 상소의 맹점을 공격했다.
"갑과 을의 설이 절충되지 못했을 때에는 그 후한 의논(1년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박한 의논(9개월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감히 박한 의논을 좇아 대신에게 아부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는 자의 말이다. 멀리 절도로 귀양 보내라."
현종이 남이성을 진도로 귀양 보내자 삼사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남이성을 옹호했다. 15년 전 윤선도가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고 신하(송시열)에게 있습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현실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을 데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서인의 빈 자리를 남인들로 채우기로 결심했다. 현종이 당시 향리인 충주에 있던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곧 집권당을 교체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남인을 영의정으로 삼은 이 조치에 서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자리도 아닌 영의정 자리를 남인이 차지한 것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현종이 서인에게 극도의 반감을 품은 데다가 남인들이 정권마저 차지한다면 서인들의 처지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현종의 갑작스런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이런 와중에 현종이 갑자기 병석에 눕고 만다. 현종의 병명은 음식에 의한 독살의 혐의가 있을 때 흔히 나타나는 복통이었다. 재위 15년 7월 24일 이후 현종은 침과 뜸을 맞았는데 8월 7일부터는 극심한 피로까지 느끼게 된다. 현종은 기운이 없어 대신들의 접견을 연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와중에도 영의정 허적이 언제 오는지를 물었다.
현종이 사망하기 이틀 전 서울에 도착해 약방 도제조를 겸하게 된 허적이, 승지를 시켜 왕비에게 전한 말은 현종의 증세에 대한 남인 측의 의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적은 현종의 곁에 있는 사람이 환관들 뿐이어서 증세를 알 수 없다며 현종의 장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남인 예조판서 장선징, 그리고 같은 남인이자 왕실의 외척인 청평위 심익현에게 병상을 지키도록 했다.
허적은 현종 곁의 환관들이 서인들에게 매수당했을 가능성을 의심하여 이런 주청을 한 것이다. 복통이나 극심한 피로 등은 독약이나 몽혼약에 의한 증세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 33살의 건장한 청년이 갑자기 피로를 느낀다는 것은 평상이의 상황은 아니었다.
허적의 이런 주청은 적절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현종은 심익현이 냉약에 타서 올린 인삼차를 조금 드는 듯 하더니 그날 밤 10시경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로 현종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후 조선의 정세는 달라졌을 것이다. 현종같이 온건한 성격의 인물이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확신은 조선이 더 이상 '서인들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은 국왕과 백성들의 나라이지 서인이란 특정 당파의 나라가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혼수상태 속에서도 거듭 허적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던 것은 현종의 이런 확신이 머릿 속 깊이 자리한 관념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종 역시 부왕 효종처럼 큰일을 추진하던 와중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은 아직도 '서인西人의 나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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