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역사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 이광사

싯딤 2010. 1. 19. 09:48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않으리  

당쟁에 휘말려 평생을 유배 속에서 산 이광사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서예가이자 <원교필결>(圓嶠筆訣)과 <원교서결>(圓嶠書訣)이란 서예이론서를 저술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는 그를 박하게 평가하는데 대부분 추사 김정희의 악평(惡評)에 기반한 것이다.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초의(草衣) 선사에게 쓴 편지에서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전(大雄殿) 편액(扁額)에 대해 혹평했다.

  “원교가 쓴 대웅편(大雄扁)을 다행히 관람하며 지나쳤는데 이는 후배의 천박한 자들이 판별할 만한 것은 아니나 만약 원교가 자처하는 것으로 논한다면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아 조송설(趙松雪·조맹부)의 형식(?臼) 속으로 타락했음을 면치 못했으니 나도 모르게 아연하며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초희에게 드립니다’, <완당집>)


김정희는 왜 이광사를 비웃었나

 

»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 새벽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에서 물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김정희는 ‘잡지’(雜識)에서도 “옛 선백(禪佰)이 이른바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이를 보라’는 말도 있는데, 동쪽 사람들이 원교의 필에 묶여 있고, 또 왕허주(王虛舟·청나라 서예가) 등 여러 거장이 있는 것을 모르고 함부로 붓을 일컫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한 번 웃음이 나온다”라고 비판했다. 왕허주를 예로 든 데서 알 수 있듯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었던 김정희는 청에서 습득한 서예이론으로 이광사를 비평했던 것이다. 또한 이광사는 소론이었던 데 비해 김정희는 노론으로서 반대 당파에 대한 당파심도 개재되어 있었다. 8년간의 유배생활을 제하면 순탄하고 화려한 인생길을 걸었던 추사로서는 전 인생이 쓰라렸던 이광사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삶을 이해하지 못하니 글씨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광사는 조선 2대 임금 정종이 성빈 지(池)씨 사이에서 낳은 10남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서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이고 부친도 대사헌을 지낸 이진검(李眞儉)인 명가였으나 당쟁에 휘말리면서 집안이 요동쳤다.

  경종이 즉위하자 거대당파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압박하는 무혈 쿠데타를 자행했다. 경종의 왕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자 소론 강경파였던 김일경(金一鏡)이 소두(疏頭·상소문의 우두머리)로서 세제 대리청정을 강요하는 이이명(李?命) 등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모는 강경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광사의 백부였던 이진유(李眞儒)가 박필몽(朴弼夢)·서종하(徐宗廈) 등 여섯 명과 함께 소하(疏下·상소문의 연명자)가 되었다. 신축소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진유는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나 경종이 독살설 끝에 세상을 떠나고 노론이 추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영조 즉위 뒤 김일경은 사형당하고 이진유는 귀양길을 전전하다 영조 6년(1730) 서울로 끌려와 다시 국문을 받는데 <영조실록>이 “곧 역적 김일경의 소하의 역적들이었다”라고 쓴 대로 경종의 충신이었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곤장을 맞다가 물고(物故)하고 만다. 글씨에 뛰어났던 이광사의 부친은 영조 즉위 뒤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 3년(1727) 죽고 말았다. 이후 이광사 가문에는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가문 몰락의 계기가 된 영조 즉위(1724) 당시 이광사는 만 19살이었다. 역적 집안으로 몰리면서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자 이광사는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영조 8년(1732)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를 찾아 강화도로 가는데, 정제두는 유일사상이던 주자학에 맞서 양명학을 공부한 학자였다(639호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참조).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鄭厚一)이 이광사의 부친과 친했던 세교(世交)가 있어 이광사도 정제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광사는 정제두에 대해 “나는 학식이 얕아서 선생이 이르신 도가 어느 지경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은 밖의 유혹은 떨쳐버리고 실리(實理)만을 간직했을 뿐 그 밖의 경지는 없다”라고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영조 12년(1736)에 온 가족을 이끌고 강화로 향했으나 갑곶이 나루(甲津)에 이르렀을 때 정제두의 부음을 들었다. 그 뒤 이광사는 영조 28년(1752) 정제두의 막내손녀를 자신의 막내아들 이영익(李令翊)의 아내로 맞아 사돈관계로 발전시켰다.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당대의 명필이자 동국진체의 계보였던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정제두의 아우 정제태(鄭齊泰)의 사위이자 정제두의 문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되자 부인 자결

 

» 이광사의 초상. 소론이었던 그의 집안은 영조 즉위와 함께 몰락했고, 그는 평생 유배지를 떠돌아야 했다.

과거를 포기한 채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하던 그는 만 50살 때인 영조 31년(1755) 발생한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위기에 빠진다. 나주 객사에 영조의 치세를 비판하는 벽서가 붙으면서 시작된 것이 나주벽서 사건인데, 벽서의 작성자 윤지(尹志)는 곧 체포되고 만다. 윤지는 영조 즉위 뒤 소론 강경파로 몰려 김일경과 함께 죽은 훈련대장 윤취상(尹就商)의 아들로서 연좌죄에 걸려 31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인물이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영조는 수많은 관련자를 사형시키는데, 윤지는 물론 그의 아들 윤광철(尹光哲)도 능지처참했고, 이미 사망한 소론 강경파 대신들에게 역률을 추가하고 이미 죽은 소론 온건파는 관작을 삭탈했다. 이광사는 윤지의 아들 윤광철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나주벽서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들이었으나 이성을 잃은 국문에서 그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영조실록> 31년 3월6일자는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광사 등을 신문하였는데, 그들이 윤지와 서로 교통한 자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사는 이진유의 조카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이광사는 이사상(李師尙)의 손자 이수범(李修範)이 국청에서 맞아죽기 전 “윤광철과 이광사는 서로 뜻이 맞는 절친한 사이였다”라고 자백했으므로 살아날 가망이 거의 없었다. 그가 3월6일 체포되자 그달 12일 부인 문화 유씨가 마흔둘의 나이로 두 아들 긍익(肯翊)·영익과 일곱 살짜리 딸 하나를 두고 자결한 것도 이런 절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3월30일 이광사를 감사(減死)해 유배형에 처한다. 다음날 대간(臺諫)에서 “죄인 이광사는 역적 이진유의 조카로서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供招·자백)에 나왔고, 윤광철과 서로 얽히고 친밀한 정상은 또한 윤광철의 일기에도 실려 있다”며 국문을 계속해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영조는 거부했다. 영조가 그를 왜 살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종친의 후예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겨우 살았다고 좋아할 것도 없었다. 친형제와 종형제 대부분이 유배형에 처해져 가문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이광사의 다섯 형제 중 막내형 이광정(李匡鼎)만이 살아 있었는데 이광사가 체포되자 그는 금오문(金吾門·의금부) 밖에서 울부짖었으나 그도 투옥되었다가 동생의 생사를 모른 채 함경도 길주로 귀양 갔다. 길주에서 이광정은 매일 새벽 하늘에 절하며 동생의 목숨을 건져달라고 빌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광사가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면서 길주에서 상봉하기도 했다. 이광사는 유배를 떠나며 ‘죽은 부인을 애도함’(悼亡)이란 시를 써서 부인의 영혼을 달랬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라/ …/ 내 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 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토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이광사는 부령에 유배되었으나 의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는 ‘두만강의 남쪽’(斗滿江之南)이란 뜻의 ‘두남’(斗南)으로 자호(自號)하고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부령 근처 갑산에 유배된 종형 이광찬(李匡贊)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광사가 양명학에 기초해 주자를 비판하자 이광찬은 “공자의 뜻은 주자가 얻었으니 그가 곧 공자이고, 주자의 뜻은 후인이 얻었으니 그가 곧 주자”라고 꾸짖기도 했으나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전 편액(왼쪽).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이광사의 시.

 

장남은 <연려실기술> 지은 이긍익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늘그막에 낳은 막내딸을 얼마나 예뻐했는지를 절절하게 토로하면서 “아! 이승에서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헤어진 후의 뒷이야기를 모두 다 들려주겠다”라는 편지를 쓰고, ‘딸에게 주는 편지’(寄女兒言)에서는 식사 예절 등을 자세하게 일러준 뒤 “그런 다음 한글 두 줄과 한자 한 줄을 베껴 쓰는데, 벼루는 항상 같은 자리에 놓아라. 두 오빠에게 문자를 약간씩 가르쳐달라고 하고, 바느질 등 배운 것을 복습하여라”라고 당부하는데, 딸에게도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는 데서 기존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이 느껴진다.

  그는 영조 8년(1732) 진도로 이배된다. 그의 문집인 <원교집선>의 ‘은혜에 대해 서술하다’(述恩幷序)에 따르면 지평 윤면동(尹冕東)이 장계를 올려 “북쪽 변방에 있는 이광사가 사인(士人)들을 다수 모아 글씨를 가르친다”며 “민심을 선동할 우려가 있으니 작은 절도(絶島)로 이배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변경의 유배객에게 수많은 문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영조실록> 38년(1762) 7월25일자는, “이광사는 진도(珍島)에 안치하고 그 학도들은 부사(府使)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했다”라고 이광사는 이배되고 그의 제자들은 곤장을 맞았음을 알려준다. 진도를 거쳐 신지도(薪智島)로 이배되면서 다시 친형 이광정을 만나는데, 이것이 형제의 영이별이 되었다. 이광정은 영조 49년(1773) 유배 19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광사도 정조 1년(1777) 유배 23년 만에 신지도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글씨에 대한 일화는 여럿 남아 있다. 전남 구례의 ‘지리산 천은사’는 원래 이름이 감로사(甘露寺)인데 숙종 때 중건하면서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이 사라졌다고 해서 ‘샘이 숨었다’는 천은사(泉隱寺)로 개명했다. 그 뒤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일자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는데, 이광사가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智異山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고 써준 글을 일주문에 건 뒤부터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새벽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에서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또한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가객(歌客)에게 노래를 시켜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이면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쓰고, 평조(平調)이면 글씨도 평조의 분위기로 썼다고 전한다. 그만큼 그는 글에는 온몸과 영혼이 실린 신기(神氣)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역사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국조(國祖) 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은 ‘동국악부’(東國樂府)를 지었는데,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정약용은 ‘해동악부(海東樂府) 발문’에서 “문장이 깨끗해서 즐길 만하다”라고 호평했다. 이광사의 장남이 방대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인데, 연려실(燃藜室)이란 호는 이광사가 서실 벽에 써준 것으로 한(漢)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명아주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긍익이 평생을 고초 속에 산 부친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알 수 있다. *

 

 

가운은 기울어 역사가를 낳다

폐족 가문에 태어나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 <연려실기술> 남긴 이긍익

  이긍익(李肯翊·1736(영조 12년)~1806(순조 6년))은 이광사(李匡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6년 전인 영조 6년(1730) 소론 강경파였던 백조부 이진유(李眞儒)는 귀양지에서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그는 “오직 우리 숙종(肅宗)을 섬기는 도리로써 경종(景宗)을 섬겼고 경종을 섬기는 도리로써 성상(聖上·영조)을 섬겼으니, 평생에 힘쓴 바는 충의와 명절(名節)이었습니다”라고 항변했으나, <영조실록>이 이진유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의 역적들이었다’라고 쓴 대로 선왕(先王·경종)의 충신이었던 그는 영조의 역적으로 몰려 장사(杖死·곤장 맞다 죽음)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자식은 물론 조카들도 과거 응시가 금지된 폐족(廢族)이 되었는데, 이긍익의 부친 이광사(李匡師)가 과거 응시를 포기한 채 집에서 학문과 글씨 연마로 세월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긍익에게도 한때 희망은 있었다.

  비극의 근인을 탓하지 않다

내가 열세 살 때 선군(先君·이광사)을 모시고 잘 때, 꿈에 임금이 거둥하셨기에 아이들과 길가에서 바라보는데 임금께서 홀연히 연을 멈추시고 특명으로 나를 앞으로 오라고 하시더니, “시를 지을 줄 아느냐?”라고 물으시기에 “지을 줄 압니다”라고 답했더니 “지어 올리라”고 명하셨다.(<연려실기술> 의례(義禮))

 

»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일체의 당파성을 배제했다.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모두 수록해 ‘사료로 말한’것이다.

이긍익은 ‘운(韻)을 내달라’고 요청했고, 영조는 ‘사(斜)·과(過)·화(花) 석 자를 넣어 지으라’고 명했다. 잠시 후 시가 완성되었느냐는 영조의 질문에 이긍익은 ‘두 자가 미정이어서 감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영조가 ‘그냥 말하라’고 하자 미완성의 시를 읊었다.  

“비가 맑은 티끌에 뿌리는데 임금 타신 연(輦)이 길에 비끼니/ 도성 사람들이 육룡(六龍)이 지나간다고 서로 말하네/ 미천한 초야의 신하가 오히려 붓을 잡았으니/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雨泊淸塵輦路斜 都人傳說六龍過 微臣草野猶簪筆 不羨□□學士花)

  이긍익이 짓지 못한 두 자에 대해 영조는 “거기에 ‘배란’(陪??)이라고 넣어 ‘임금 수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로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일화는 이긍익이 13살 때 이미 수준 높은 시를 지을 정도로 학식이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이 꿈은 집안에 희망을 주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부친 이광사는 ‘길몽’이라고 기뻐했고 이긍익도 “훗날 어전에서 붓을 가질 징조라고 생각했다”.

  이때가 영조 24년(1748) 무렵인데, 이긍익이 스무 살 때인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집안은 오히려 멸문(滅門) 위기에 휘말린다. 나주벽서 사건의 주모자 윤지·윤광철 부자와 부친 이광사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투옥된 것이다. 이긍익의 모친 문화 유씨는 마흔둘의 젊은 나이로 자결했고, 이광사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 갔다. 졸지에 모친이 자결하고 부친이 유배 간 상황에서 이긍익은 동생 영익을 부친에게 보내 시중 들게 하고 자신은 7살짜리 여동생을 데리고 가계를 꾸려야 했다. 이긍익은 이때 채마밭을 일궈 생계를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이 모든 비극의 근인(近因)은 백조부 이진유였지만 그의 집안은 이진유를 비판하지 않았다. 부령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자식과 조카들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 집안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백부(이진유) 때문이지만 사실은 가운(家運)일 뿐이다”라고 백부를 비난하는 대신 가운을 탓했다. 이광사도 이진유의 행위를 선왕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음을 시사하는데, 경종이 독살설 속에 세상을 떠남에 따라 가운이 기운 것이지 이진유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인 것이다.

  이광사는 유배지 부령에서 편지를 보내 “가세가 뒤집어지고 멸망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자제(子弟)들은 마땅히 효도와 우애에 더욱 독실해야 하고 예의를 서로 격려해야 한다”(‘자식과 조카에게 주는 편지’(寄子姪書))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긍익은 서울에 남은 한 살 위의 종형 이문익(李文翊)과 치심(治心)의 방도에 대해서 토론한다. 이문익의 부친 이광현(李匡顯)도 경상도 기장에 유배 중이었는데 동생 충익(忠翊)이 봉행하고, 문익은 서울에서 모친을 모셨다. 며칠 굶은 문익에게 모친이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배고픔을 잊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라고 답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의 궁핍 속에서 이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치심(治心)의 근원에 대해 서로 토론했다. 이광사는 이때 이긍익에게 편지를 보내 “마땅히 먼저 사물(四勿)을 행해야 한다”고 훈계한다. 사물이란 공자가 안회(顔回)에게 가르친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네 가지 계율을 말하는데,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것이다. 유배와 곤궁 속에서 치심을 논하고 사물을 논하는 데서 이 집안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사료로 말하는 ‘기사본말체’

  이런 상황에서 이긍익이 천착한 것은 바로 역사였다. 이긍익은 13살 때 꿈 이야기의 뒷부분을 이렇게 결말지었다.

  “그 후 내가 궁하게 숨어 살게 된 뒤로는 그 꿈을 전연 잊어버렸다. 요즘에 와서 문득 생각하니, ‘초야의 신하가 붓을 잡다’(草野簪筆)란 시 구절은 늙어서 궁하게 살면서 야사를 편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어릴 적에 꿈으로 나타난 것인 듯하니, 실로 우연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운명으로 미리 정해진 것일게다.”(<연려실기술> 의례)

  이긍익이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부친 이광사의 영향이 컸다. 이광사는 <동국악부>(東國樂府)에서 국조(國祖) 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을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부친의 역사에 대한 이런 관심이 이긍익에게도 이어져 조선 후기 3대 역사서의 하나로 손꼽히는 방대한 <연려실기술>을 편찬한 것이다. ‘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의 호인데, 의례에서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사모하던 유향(劉向)이 옛글을 교정할 적에,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붙여[燃] 비춰주던 고사를 사모했는데, 선군으로부터 ‘연려실’(燃藜室)이란 세 글자의 큰 수필(手筆)을 받아 서실의 벽에 붙여두고 그것을 각판하려다가 미처 못했다. 친지들이 서로 전하기를, “그것이 선군의 글씨 중에서 가장 잘된 글씨라고 서로 다투어 모사(模寫)하여 각판을 한 이도 많았고, 그것으로 자기의 호를 삼은 이도 있다” 하니,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책이 완성된 후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짓는다.(<연려실기술> 의례)

 

» 부친 이광사는 이긍익이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광사의 초상.

놀라운 것은 <연려실기술>에 일체의 당파성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역사 기술의 객관성을 그만큼 중시했던 것이다. 영조 때의 일은 제외하고 태조(太祖)부터 숙종 때까지만 저술한 이유도 집안이 직접 관련된 영조 때의 일을 서술하면 객관성을 해칠까 우려한 것이다. 폐고(廢固)된 집안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데 대한 우려도 있었다. 이긍익이 의례에서 “처음 내가 이 책을 만들 때 나와 가까운 친구가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권고하기도 했다”고 밝힌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때 이긍익은 “남이 이 책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면 만들지 않는 것이 옳고, 만들어놓고서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면 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만큼 객관성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연려실기술>은 연대순으로 엮는 편년체(編年體) 사서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이다. 그는 해당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수록함으로써 ‘사료로 말하게 하는 저술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각 조에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혔으며, 말을 깎아 줄인 것은 비록 많았으나 감히 내 의견을 붙여 논평하지는 않아 삼가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述而不作)’는 공자의 뜻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는데, ‘술이부작’(述而不作)은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가 “나는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는 않았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서 사료만 제공하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저술 방법이다.

  세력 움직임이 영화처럼 환하네

  이긍익이 이런 편찬 방법을 택한 것은 극심한 당쟁 때문이었다.

  “동서 분당 이후로 피차의 문적(文籍)이 헐뜯고 칭찬한 것이 서로 상반되어 있으나 사료를 싣는 자가 한 편으로 치우친 것이 많았다. 나는 사실 그대로를 모두 수록하여 뒤의 독자들이 각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하려 한다.”(<연려실기술> 의례)

  일기나 문집, 또는 개인 저술의 야사 등 모두 400여 종의 다양한 사료를 인용하면서 일일이 출처를 밝힌 것도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이 책에 이긍익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료를 제시한다고 해도 해당 사건을 선택하는 것은 이긍익의 몫이다. 이긍익은 사건 설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숙종 시대를 보면 ‘갑인년(현종 15년·1674)과 을묘년(숙종 1년·1675) 사이의 시사(時事)’라는 항목에서 예송 논쟁에 대한 서인과 남인 사이의 견해를 모두 싣고 있다. ‘장희빈이 원자를 낳다’라는 항목에서는 장희빈의 출산이 왜 극심한 당쟁의 이유가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사료를 취사선택해서 실었다. 그런데 사료 기재 방식이 아주 재미있다. 예를 들어 “10월 소의(昭儀)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 당시 장씨의 어머니가 뚜껑 있는 가마를 타고 대궐 안에 드나들었는데, 사헌부 지평 이익수(李益壽)가 보고 가마를 때려 부수고 불태워버리며 그 종을 다스리니, 임금이 ‘출입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아뢰지도 않고 제멋대로 형벌을 가하느냐’라고 말하고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금리(禁吏)와 소유(所由·사헌부의 이속)에게 죄 주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많이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라고 실었다. 남인계 여인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긴장한 서인들이 장희빈의 어머니를 핍박하는 장면인데, 장희빈의 왕자 출산을 둘러싼 궁중 각 세력의 움직임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환하게 드러난다. 이런 편집 방식을 통해 이긍익은 현실의 승자인 서인·노론뿐만 아니라 패자인 남인의 시각과 움직임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실의 승자인 노론 쪽에서 저술한 역사서밖에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노론과 다른 시각의 역사서 서술은 시대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긍익은 객관성이란 명분 아래 집권 노론뿐만 아니라 야당인 소론과 재야였던 남인의 견해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이 이긍익이 아니라 부친 이광사의 저술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전하는 필사본에 이긍익이 편찬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귀양지의 정약용이 아들 정학연에게 <연려실기술>을 읽으라면서, “이도보(李道甫·이광사의 자)가 편찬했다”라고 주석한 것, 홍한주(洪翰周)가 “원교(圓嶠·이광사의 호)가 편찬한 <연려실기술>만은 대개 기사본말체를 본뜬 것”이라고 기술한 것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광사는 정조 즉위년(1777)에 이미 사망했으나 <연려실기술> 의례의 “경술(庚戌·정조 14년·1790)에 금강산에 놀러 가면서 전질을 남에게 빌려주고 갔다”는 구절은 이광사가 편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많은 비문들이 인용되어 있고 어떤 비문들은 직접 가서 보았을 것인데, 유배지의 이광사가 답사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국악부>를 지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광사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에 유배 가기 전 많은 사료를 수집하거나 필사해놓았을 수는 있지만 이를 <연려실기술>이란 한 꾸러미에 꿴 이는 이긍익인 것이다.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다

  이긍익은 의례에서 “내가 자료를 얻어 보지 못하여 미처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은 후일에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역사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시대 모두의 것이란 열린 생각이다. 그래서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이긍익의 초야의 붓은 실로 ‘임금 수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이다. *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벌레다

이용후생으로 가난을 물리치려 했던 박제가의 꿈

  박제가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글씨 쓰기를 좋아해서 항상 입에 붓을 물고 있었다. 화장실에서는 모래에 글씨를 썼고, 앉기만 하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어린 때의 <맹자>를 읽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일곱 살 무렵인 영조 32년(1756) 청교동(을지로5가)으로 이사 갔는데 흰 벽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글씨 쓰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때문인지 어린 박제가는 나이보다 어려운 책들을 읽어 수재로 소문났다. 부친인 박평(朴坪)은 승정원 우부승지였는데, 박제가는 “선군(先君·돌아가신 부친)께서는 매달 종이를 내려주셨고 나는 날마다 종이를 잘라 책을 만들었다”라고 회상했다. 부친은 이 영특한 아이가 서자라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얼 출신 수재의 슬픔

 

» 박제가의 초상. 그는 사대부의 세계관을 뛰어넘어 청나라에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나마 부친이 살아 있을 때는 호시절이었다. 박제가가 열한 살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난이 밀려왔다. 어머니 전주 이씨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삯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묵동과 필동의 셋집을 전전해야 했다. 주위 사람들이 박제가의 가난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머니가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데는 자신 때문에 뜻을 펼칠 수 없는 영특한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박제가는 곧 세상이 자신 같은 서류들에게 문을 닫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박제가는 “어려서는 문장을 배웠고, 커서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학문(經濟之術)을 좋아했으나 수개월을 귀가하지도 않고 공부해도 지금 사람은 알아주지 않는다”(<소전>(小傳))라고 말했던 것처럼 폐쇄의 나라 조선에서 그의 학문은 세상을 위해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 않았고, 세상에 아첨하지도 않았다. “뜻이 높고 고독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번화(繁華)한 사람과는 스스로 멀리하니 뜻에 맞는 이가 없이 늘 가난하게 산다”(<소전>)라고 스스로를 평가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런 박제가와 뜻이 같았던 선배·친구들이 바로 백탑파(白塔派)였다. 현재 서울 탑골공원 자리의 백탑(원각사지십층석탑) 부근에 사는 지식인 그룹이 그들인데, 영조 43년(1767)에 서얼 지식인 이덕무(李德懋)가 백탑 근처로 이주하고, 이듬해에 양반 출신 박지원(朴趾源)이 뒤따라 이주하면서 백탑파라는 하나의 유파가 형성되었다. 백탑파는 조선의 주류 양반들과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달랐다. 박제가는 영조 44년(1768) 18·19살 무렵 서른 셋의 장년의 박지원을 찾아갔다.

  “내 나이 18·19세 때에 미중(美仲·박지원) 선생이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명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 북쪽에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선생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옷도 채 입지 못한 채 나와 맞으며 옛 친구처럼 손을 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더니 읽어보라고 하시고, 직접 쌀을 씻어 다관(茶罐)에 넣고 밥을 하셨다. 흰 주발에 가득 담아 옥소반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백탑청연집’(白塔淸綠集序) 서문)

  박지원의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경기감사·병조참판·돈녕부지사를 역임한 노론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박지원이 어린 서자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사 버선발로 맞이하고 직접 밥까지 해 대접했던 것이다.

  이들의 남다른 처신은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은 정신세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의 일반적 지식인들은 그때까지도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숭명(崇明) 사대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매년 청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를 보내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사대하는 이중 처신이었다. 그러나 백탑파는 달랐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한 현실을 인정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와 <박초정한양성시전도가>.

  정조의 서얼 우대로 관직에 올라

  박제가가 자신의 이런 생각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 때는 정조 2년(1778)이었다. 사신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것이다. 백탑파인 이덕무도 함께 갔는데, 이 여행에서 박제가는 평소 자신들의 생각이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 뒤 박제가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랑캐’(胡)라는 한 글자로 천하의 모든 것을 말살하고 있지만, 나만은 ‘중국의 풍속은 이래서 좋다’고 말한다”(<만필>(漫筆))라고 써서 중국의 풍속 중에 배울 것이 많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청나라의 장점을 흡수해 국부 증진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북학의 서문’에서 박제가가 “무릇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은 하나라도 닦지 않으면 위의 정덕(正德)을 해치게 된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용후생으로 국부를 증진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청나라와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주장하는 세력을 북학파라고 지칭하게 된 것은 <북학의> 때문이었다. 원래 ‘북학’이란 <맹자>(孟子)에 남쪽 지식인 진량(陳良)이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는 뜻에서 나온 용어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쓸 때만 해도 일개 재야 학자의 주장에 불과했으나 정조가 즉위 뒤 서얼 우대정책을 쓰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조는 즉위 원년(1777) 1월 “조정의 진신(縉紳)들이 반드시 모두 어진 것은 아니고, 초야의 인물들이 반드시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라며 서얼들도 벼슬길에 등용할 수 있는 법제를 만들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그해 3월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이 제정되어 서류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나아가 정조는 재위 3년(1779)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4명의 서얼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전격 임명해 고식에 젖은 조선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란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사상계를 주도했던 것이다.

  서얼 출신이었던 이들은 기존의 가치관에 경도되지 않았다. 박제가는 기존 사고틀을 깨야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조가 재위 10년(1786) 신하들에게 국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히라고 명하자 6품 전설서(典設署) 별제(別提)로 있던 박제가는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한마디로 가난입니다”(‘전설서 별제 박제가 소회(所懷)’)라고 진단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가난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중국과의 국제 무역이 백성들의 가난을 물리치고 국부를 증진시키는 첩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사족들에게 장사를 시킬 것도 주장했다.

  “무릇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로 증가하는 것은 사족(士族)이 날로 번성하는 데 있습니다. …신은 수륙(水陸)을 교통하며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에 사족의 입적을 허락할 것을 주청합니다.”(‘전설서 별제 박제가 소회’)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개념에 젖어 상업을 천시하는 사대부들을 상업에 종사시키자는 주장이었으니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박제가의 주장은 채택될 수 없었다. 대신 정조는 박제가에게 다시 청나라 여행 경험을 주었다. 재위 14년(1790)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보냈고, 다시 원자(순조)의 탄생을 건륭제가 축하한 데 대한 답례사의 일원으로 또 보냈던 것이다. 이때 정조는 박제가를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승진시켜 별자(別咨)를 가지고 가게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 박제가가 그린 <목우도>. 박제가는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고 무과에 급제할 만큼 무예에도 능했다.

  문관의 길 막히자 무과에 급제

  박제가는 이런 경험들을 조선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려고 밤낮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눈병이 도져 정조 16년(1792) 검서관직을 사직해야 했다. 박제가는 서유구(徐有榘)에게 쓴 편지에서 “5년 전부터 계속 밤을 새웠더니 불행히도 왼쪽 눈이 어두워져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안경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금 검서관의 용도는 눈에 있는데 눈이 어두우면 물러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내한(內翰) 서유구에게 주다’)라고 눈병 때문에 검서관에서 물러나는 소회를 말했다.

  정조는 그를 부여 현감에 임명했다. 직접 백성들을 다스려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호서 암행어사가 박제가에게 불리한 보고를 해서 파직됐다. 이때 정조가 “다른 관료는 너그럽게 처리하고 세력 없는 서류에게만 가혹하게 법을 적용할 수 없다”(<일성록> 정조 16년 7월6일)라고 박제가를 옹호한 데서 알 수 있듯 어사의 보고는 서얼 출신 지방관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없지 않았다.

  문관의 길이 막히자 박제가는 무과로 방향을 전환해 정조 18년(1794) 무과별시에 응시해 급제한다. 그는 4년 전인 정조 14년(1790) 이덕무·백동수 등과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했는데, 그의 무과 급제는 그가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 무예에도 능했음을 말해준다. 이때 그는 정3품 오위장에 임명됐다가 정조 19년(1795) 경기도 영평(永平) 현령으로 나간다. 지방관으로 백성들과 부대끼던 중 정조가 재위 22년(1798) 농서(農書)를 널리 구한다는 윤음을 반포하자 ‘북학의를 올리는 응지상소’를 올려 20년 전 <북학의>에서 주장했던 내용을 다시 피력했다. 이 글에서 박제가는 자신이 지방관으로 직접 목도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 정경을 생생히 적은 뒤 “이제 농업을 일으키시려면 반드시 먼저 농업에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한 후에 다른 말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라면서, 첫 번째로 “유생을 도태시켜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일하지 않는 유생들을 도태시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 박제가는 ‘수레 유통’을 주장했다. “무릇 농사는 비유하자면 물과 곡식이요, 수레는 비유하자면 혈맥”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둔전(屯田) 시행을 주장했다. 둔전이란 일종의 병농일치제인데 박제가가 주장하는 둔전은 서울 근처에 일정한 땅을 마련해 농업 전문가를 두고 농사꾼 수십 명을 뽑아 농사 지휘를 받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농사꾼들이 최고의 농업 전문가가 되면 다시 전국에 파견해 한 사람 당 열 명씩 농업 지도를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 농사꾼이 전문가가 되어 농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리라는 것이었다. 정조가 수원 화성에 대유둔이라는 둔전을 만들어 큰 효과를 본 것은 박제가의 이 건의를 실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 사후 유배 당해

  정조 21년(1797) 종3품 오위장을 맡고 있던 박제가는 노론 정권의 실세였던 동지경연사 심환지(沈煥之)와 부딪쳤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박제가가 호상(胡床·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심환지가 수하를 시켜 나무라자 발끈한 것이다. 심환지가 박제가의 파직을 요청하자 정조가 “뭐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라고 옹호해 무사히 넘어갔으나 정조가 재위 24년(1800) 6월 갑자기 승하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듬해 박제가는 사돈인 윤가기(尹可基)가 시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흉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아무런 물증도 없이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함경도 종성에 유배된다. 박제가는 유배지에서 장남에게 “삼사(三司)의 논란함이 준엄하니 너희들은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또 기미를 보아 은밀하게 공격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니 진실로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편지했을 정도로 삼사로부터 계속 사형을 주장받아 목숨이 풍전등화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이 편지에서 “천지에는 오히려 공론(公論)이라는 것이 있으니 나의 억울함은 위관(委官·조사관) 이하가 모두 잘 알 것이다”라고 자신의 결백함을 거듭 주장했다. 박제가는 3년 뒤인 순조 4년(1804) 방축향리(放逐鄕里)의 명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3월 사면됐으나 한 달 뒤인 1805년 4월 56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서얼로 태어나 이용후생으로 국부 증진을 꿈꿨던 경세가의 죽음이었다. *

 

그건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요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킨 활달한 문장가, 유몽인

  유몽인(柳夢寅)은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던 선조 22년(1589) 서른한 살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에서 장원급제함으로써 관직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장원급제한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야사집을 펴낸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었다. 문장가로 자처한 그가 문장에 대해 논한 글을 보면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수광을 전송하는 글’에서 “시(詩)에는 귀신이 있는데 이름이 마(魔)이다. 그 성질은 가난, 곤궁, 질병, 방랑 등은 좋아하지만 화려, 부귀, 자신만만하고 득의에 찬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호 역시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홍만종은 <순오지>(旬五志)에서 “김시습의 청한자(淸寒子)나 유몽인의 어우자(於于子)는 자신들이 숭상하는 것을 호(號)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어우(於于)란 <장자>(莊子) ‘천지’(天地)조에 나오는 말로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 아닌가(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를 비웃은 장자의 한 구절로 자호(自號)한 데서 그의 기질이 우뚝하다.

 

» 유몽인이 파직된 뒤 머무른 금강산 유점사와 그가 지은 <어우야담>.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잃지 않았다.

광해준 즉위에 일조하며 승승장구

유몽인은 15살 때 판관 신식의 딸과 혼인했는데, 신식의 며느리가 우계 성혼(成渾)의 딸이었기 때문에 잠시 성혼에게 가서 공부한다. 성혼은 서인들이 종주로 삼는 학자로서 유몽인으로서는 서인이 될 기회였지만 그에게 성리학은 잘 맞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유몽인이 “젊었을 때 성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가르침을 잘 지키지 않고 행실이 경박하자 꾸짖고 끊어버렸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장자처럼 활달한 처신이 성리학자의 눈에는 경박하게 보였을 것이다.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만에 임진왜란을 맞았을 때 그는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가 있었다. 귀국 뒤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정6품)로서 광해군을 보좌해 적진을 헤집고, 암행어사로서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 생활도 돌본다. 임진왜란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형이 일본군에게 죽는 큰 아픔도 이때 겪지만 나아가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가 <어우야담>에 양반뿐만 아니라 많은 평민·노비들의 이야기와 함께 기독교에 관한 기록인 ‘기리단’(伎利檀)에 대해서도 쓴 것은 이때의 충격이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의식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선조 32년(1599) 유몽인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임명되는데, 이때 사관은 ‘문장이 단아하고 도량이 있었다’(文雅有餘)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 35년(1602) 경연 시강관(侍講官)으로 있던 그에 대해 사관은 “문재는 있으나 식견과 역량이 없었다’(有文才, 而無識量)라고 정반대로 평하고 있는데, 이는 당론의 시각에서 적었기 때문이다. 정작 유몽인은 이정귀(李廷龜)가 북경에 갈 때 써준 글에서 “조정의 사론(士論)이 나뉜 뒤부터 붕우의 도를 평생 보전할 수 있게 되었는가? 벗 사귀는 도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둘로 나뉘었는가? 둘도 불행하거늘 어찌하여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는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당론에 비판적이었다. 유몽인은 선조 41년(1608) 1월28일에 도승지가 되어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 일조한다. 다음달 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데, 이 무렵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세자 광해군 대신 어린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고 획책하면서 조정에 큰 파란이 일고 있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영경이 “오늘의 전교는 여러 사람들의 뜻밖에 나온 것으로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대하고 군사를 동원해 궁궐 안을 호위하며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상시국에 유몽인은 도승지로서 세자시강원 때부터 여러 번 모셨던 광해군이 즉위하는 데 일조한다.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시?

  이런 연유 때문인지 광해군 시절 유몽인은 집권 북인(北人)의 유력인사로서 승승장구한다. 예조참판, 대사간 등의 요직을 역임하던 그는 광해군 7년(1615) 이조참판이 되어 광해군 10년(1618)까지 인사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집권 대북(大北)이 인목대비 폐위에 나서면서 그는 다른 길을 걷는다.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에서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鄭蘊)이 사제의 연을 끊으며 폐모론에 반대하는데, <당의통략>은 이때 ‘유몽인이 정온을 도와서 중북(中北)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인 중에서는 영의정 기자헌 정도가 폐모론을 반대하고 귀양길에 올랐고, 대부분의 북인들이 이른바 대론(大論), 또는 대절(大節)이라는 명분으로 폐모를 밀어붙일 때 유몽인은 반대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10년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고 있던 유몽인이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인목대비 폐모 이후 인심이 흉흉해져서 역모 고변이 잇따르는 상황에서였다.

  안처인(安處仁)·안후인(安厚仁) 형제가 관련된 역모가 고변되어 시끄럽던 그해 4월 유몽인은 처사촌 정회(鄭晦)와 남산 기슭에 올라 봄 경치를 즐겼다. 술 마시며 놀다가 소녀가수인 은개(銀介)를 불러 노래를 듣는데, 하인이 달려와 추국(推鞫)에 참석할 시간이 되었다고 일렀다.

  “이처럼 좋은 시절에 어떤 도깨비 같은 자가 감히 익명(匿名)으로 고변하여 나에게 이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유몽인은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가면서 중얼거리던 시를 국청에서 붓으로 옮겨썼는데 이 시가 문제였다.

 

» 유몽인위성공신교서. 조선 광해군 5년(1613) 3월에 임진왜란 때 왕세자인 광해군을 보좌한 공으로 유몽인에게 위성공신 3등을 내린 교서이다.

  “성 안에 가득한 꽃, 버들과 봄놀이 즐기는데/ 옥같이 고운 손, 잔을 놓고 백주장을 부르네/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짚고 일어서/ 취중에 늙은 간신의 머리 찍으려 하네.”(滿城花柳擁春遊, 玉手停盈唱栢舟, 壯士忽持長?起, 醉中當斫老姦頭)

  문제의 시어는 ‘백주’(栢舟)와 ‘늙은 간신’(老姦)이었다. 백주는 <시경> ‘용풍’에 위(衛)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어 부모가 그 처 공강(共姜)을 개가시키려 하자 ‘백주’(栢舟)를 지어 절개를 맹세했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백주지통(栢舟之痛), 백주지절(栢舟之節) 같은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나왔다. 즉 유몽인이 폐모된 인목대비의 고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늙은 간신은 인목대비 폐위를 밀어붙인 대북의 대신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유학 이시량(李時亮)이, ‘백주(栢舟)의 비유와 노간(老奸)의 설(說)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자세히 조사하여 부도한 죄를 다스리고, 패거리를 곡진히 비호하며 즉시 신문할 것을 청하지 않은 양사(兩司·사헌부, 사간원)의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유몽인은 광해군에게 백주는 자신이 아니라 은개가 부른 것이며, 늙은 간신은 변을 일으킨 안처인 형제 등을 일컬은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동시에 자신이 현재의 옥사(獄事)에 대해 살펴보니 대단한 것은 아닌 듯했다면서, “어떤 자가 이런 재앙을 만들어내어 100명씩이나 연루되는 옥사가 이루어졌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광해군에게 토로했듯이 대북 일당 전제의 경색된 정국에서 잇따르는 옥사에 불만을 가졌음도 시인했다. <연려실기술>은 유몽인이, “숟가락이 남보다 조금 큰 것만 보면 반드시 고변했다”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은 사직을 청하는 유몽인에게 “아경(亞卿·참판)은 건성으로 처리할 직임이 아니고 국청은 시를 짓는 장소가 아니다. 일이 해괴하기 그지없으니 물러가 공의(公議)를 기다리라”라고 일단 유보적인 조치를 취했다.

  양사에서는 계속 유몽인의 파직을 요청했고 결국 그해 7월 체차되고 말았다. 광해군 12년(1620) 8월 원접사(遠接使) 이이첨(李爾瞻)이 김상헌·장유 등 서인계 인물들과 함께 유몽인이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나다’며 다시 등용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예문관 제학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비변사에서는 광해군 13년(1621) 8월 “유몽인을 출사시키든지 체차하든지 어떠한 조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라고 양자택일을 요구했고, 유몽인에게 마음이 떠난 광해군은 체차시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달 유몽인은 63살 고령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는 “신선과 부귀를 모두 갖기는 어렵네/ 세월은 흐르고 인간 세상의 계책은 어그러졌네”(神仙富貴兩難諧 流水人間計較乖)라고 속세를 떠나 출가하는 심정을 밝히는 시도 썼다. 금강산에서 혹독한 병을 앓으며 한겨울을 난 유몽인은 이듬해(1622) 서쪽의 보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해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했다. 유몽인은 이때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 가을 구월 내가 금강산에 들어온 것은 노년을 마치고자 함이었다. 지난 10월에 집안사람들이 서울에서 산사로 온 것은 나의 위중한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4월 금강산을 떠나 서쪽으로 온 것은 식량 때문이다. …도중에 구군(舊君)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내가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보개산 영은사의 두 승려에게 주는 글’)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킨다

  광해군 때 배척받았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 벼슬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달랐다. 영은사의 두 승려가 “지금 새로운 성군께서 나라를 다스리자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시장에 몰려드는 것 같은데, 왜 중로에 배회하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산에 들어온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라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지금 산을 떠나는 것은 관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며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으로 출사만을 거부하는 것으로 광해군에게 절개를 바친 것이 아니었다. 인조 즉위 석 달 뒤인 인조 1년(1623) 7월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로 내려가 있던 유몽인에게 금부도사가 들이닥쳤다. 그의 아들 유약 등과 함께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혐의였다. 유몽인은 국문에서 아들이 자신이 지은 ‘청상과부의 탄식’이란 ‘상부탄’(孀婦歎)을 좋아해 일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키는구나/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데/ 무궁화 꽃 같은 멋진 남자였네/ 여사의 시 자주 들었기에/ 태임(太妊·주 문왕의 모친)·태사의 훈계 조금은 알았지/ 흰 머리에 젊은 얼굴로 단장한다면/ 어찌 분가루에 부끄럽지 않겠는가.”(七十老孀婦, 單居守閨?, 人人勸改嫁, 善男顔如槿。 慣聽女史詩, 稍知妊?訓,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는 ‘무궁화 꽃 같은 남자’지만 자신은 끝내 광해군에게 절개를 지키겠다는 뜻의 시였다. 조익(趙翼·1579~1655)의 문집인 <포저집>(浦渚集)에는 이때 묘당(廟堂·조정)에서 만든 통유문(通諭文)이 실려 있다.

  “지난해 7월에 역적 유전 등이 맹약한 글이 고발되었을 적에, 그 글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이름이 거의 40명에 달하였는데, 기자헌(奇自獻)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그중에 유몽인은 도망쳤다가 잡혀왔는데, 형신을 많이 받지 않고도 모의한 사실을 일일이 자복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시를 공술하면서 폐주(廢主)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사형된 뒤 정조 때에야 복권돼

  유몽인에게 인조반정은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일 뿐이었다. 자신은 비록 광해군 말년 조정을 떠났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것은 삼강(三綱)의 군위신강(君爲臣綱)이나 오륜(五倫)의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평생 장자를 좇았던 그가 불의한 현실에 유자의 사생관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반정정권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유몽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괄의 난을 겨우 진압한 인조 2년(1624) 11월 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가 인조에게, “유몽인이 한 번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이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서인들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인사들은 유몽인이 백이숙제처럼 광해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유몽인은 정조 18년(1794)에야 복권되는데, 정조는 유몽인에 대해 “혼조(昏朝·광해군) 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하였고, 반정(反正)한 후에도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국조보감>)라고 그 절개를 높이 사고 있다. 한마디로 참선비의 처세란 뜻이다. *

 

 

사대부여 왜 발해를 무시하는가

역사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이룬 서얼 지식인 유득공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가 다시 서기를 갈망했으나 끝내 명나라가 다시 서지 못하자 조선이 작은 중국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중화 사상을 일부에서는 문화적 자부심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 사상은 사대주의의 극치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작은 중국이 되겠다는 것으로서 자신의 몸은 물론 영혼까지 중국인이라는 사대주의 중의 사대주의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소중화 사상 속에서 민족사의 영역은 극도로 협소해졌다. 과거 중국에서 동이족(東夷族)의 범주로 한 묶음으로 보았던 만주(여진)·몽골·거란·숙신족 등은 오랑캐가 되었고, 그들의 활동 무대인 만주는 오랑캐 땅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오랑캐들의 땅을 우리 강토로, 오랑캐들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통일신라가 아니라 남북국 시대

 

» 서얼 출신이었던 유득공은 관직의 길이 막혀 있었으나 정조 즉위 뒤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된다. 이곳에서 15년을 보내자 돋보기 없이는 작은 글씨를 쓸 수 없을 만큼 눈이 나빠졌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고씨가 북쪽에 거주했으니 곧 고구려이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백제이고,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신라인데,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으니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이것이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발해고> 서문)

  신라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라고 인식하던 시절 유득공(柳得恭)은 그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유득공이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북방 강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이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은 마땅히 빨리 발해사를 지어서 이를 가지고 가서 여진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는가. 발해의 영토는 곧 고구려의 영토이다’라고 말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어 거두어들였으면 토문강 이북 지역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가지고 거란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는가. 발해의 영토는 곧 고구려의 영토다’라고 말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거두어들였으면 압록강 서쪽을 다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했다.”(<발해고> 서문)

  유득공의 이런 인식은 만주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는 “여진은 말을 ‘모린’(毛鄰)이라 하는데, 이것은 모린위(毛鄰衛)라는 장소를 취해서 이름 붙인 것이다. 우리말로는 말을 ‘몰’(沒)이라 하니 발음이 모린과 가깝다”(<만주어>)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만주어와 우리말의 유사성을 찾은 것인데, 언어의 유사성은 곧 민족의 유사성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혁명적 역사 인식의 소유자 유득공의 유년 시절은 불운했다. 영조 25년(1749)에 태어난 유득공은 출생 직전에 돈 전염병으로 가족이 여덟 명이나 사망하는 참화를 겪었다. 그는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서얼이었다. 게다가 부친 유춘(柳瑃)은 그가 다섯 살이 되던 27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유득공까지 죽을지 모른다고 우려한 모친 남양 홍씨는 “큰물은 피하는 것이 좋다”면서 그를 데리고 남양 백곡의 친정으로 내려갔다. 모친의 외가는 무인(武人) 집안이었는데 유득공이 외가에서 무술만 익히자 모친은 “너희 집은 여러 대에 걸쳐 문필을 일삼았다. 비록 문필에 능하지 못하더라도 무(武)로써 부귀를 취하겠느냐”라며 열 살의 유득공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 모친은 남산의 본가가 아니라 경행방(慶幸坊·낙원동 일대)에 터를 잡았는데 고관들이 많이 사는 이곳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유득공이 지은 모친의 행장(<선비행장>(先妣行狀))에 “내게 서책을 끼고 서당에 나가 배우게 하셨는데 의복이 미려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빈한한 집안의 아이인 줄 알지 못했다”라고 나올 정도로 어머니는 아들을 배려했다. 한번은 밤늦게 독서하던 유득공이 무슨 구절을 발견하고 기뻐서 펄쩍 뛰다가 등잔을 엎지르는 바람에 기름이 어머니의 삯바느질감인 비단을 적셨다. 크게 놀란 어머니가 옷주인에게 두 배의 삯바느질을 해주겠다고 말하자, 옷주인은 “비단은 우리 집에 부족하지 않으니 괜찮다”라고 말하며 면제해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책을 보다 기뻐 펄쩍 뛰었을 정도로 유득공은 독서를 좋아했는데 이는 부친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관례를 올린 유득공이 아버지의 친구에게 인사드렸더니 “아름답도다. 아버지를 닮았구나”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유득공은 ‘선부군묘지’(先父君墓誌)에서 “눈물을 흘리며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지은 책 16권을 찾아 엎드려서 읽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26살 때인 영조 49년(1773) 생원시에 급제하는데,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얼 출신이던 영조가 서얼허통을 실시해 과거 응시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서얼 출신들은 문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그의 삶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이덕무가 붓을 던지며 크게 탄식하기를, ‘서울에는 온갖 물건을 고치는 수선공이 있어서 깨진 쟁반과 깨진 솥뚜껑, 찢어진 생가죽신과 찢어진 망건을 말끔히 고쳐 생계를 꾸린다. 나나 그대나 나이가 들면 글솜씨도 거칠어질 것이니, 어찌 앉아서 굶어죽기를 기다리겠는가? 붓 한 자루와 먹 하나를 가지고 서로 필운대와 삼청동 사이를 오가며 ‘잘못된 시’(破詩)를 고치라고 외치면 어찌 술과 안주를 얻을 수 없겠는가?’라고 말해 서로 크게 웃었다.”(‘시 땜장이’(補破詩匠))

  해학은 해학이되 슬픈 해학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덕무와 유득공은 이미 조선 전체는 물론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지식인이었다. 유득공이 29살 때인 영조 52년(1776) 유득공의 숙부 유련이 서호수(徐浩修)의 막관(幕官·참모)으로 북경에 가면서 유득공·이덕무·박제가·이서구의 시 399편을 추려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으로 엮은 다음 북경에서 <황화집>(皇華集)의 저자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의 시평을 받았다. 이 일로 유득공 등의 이름은 북경까지 알려졌으나 조선은 서얼 출신인 그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정조는 서얼 출신이 아니었으나 서얼과 노비, 북쪽 사람들 등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재위 1년 서얼허통절목을 만들어 서얼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법제화했다. 하지만 정조가 부르기 전 그의 생계는 어려웠다. 정조 즉위 초 유득공은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탐독하고 ‘스물하나 도읍지를 시로 읊다’(題二十一都懷古詩)라는 역사시를 남기는데 여기에 그의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유명 지식인, 가난에 고통받다

  “회고하면 무술년(정조 2년)에 종강(鐘崗)의 쓰러져가는 낡은 세 칸 집에 살았는데, 붓·벼루와 칼·자들이 뒤섞여 고통스러웠다. 자주 작은 남새밭 옆에 앉으니 콩과 부추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다녔다. 비록 끼니는 자주 걸러도 기색은 태연자약했다. 때로 <동국지리지>를 보고 시 한 수를 지어 읊으며 하루를 보냈다. 어린아이와 어린 계집 종이 듣고 외웠으니 매우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정조 2년(1778) 심양에 가는데 “무릇 요동은 천하의 큰 벌판이다”라는 만주 벌판에 대한 인식은 이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정조 3년(1779)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면서 그의 인생이 꽃피게 된다. 이덕무·박제가·서리수 등 다른 서얼 학자들과 함께 발탁됐는데, 이때부터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란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하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 교서관동(명동·저동 일대)으로 이사하는데, 그는 “기해년(정조 3년) 이후 성주(聖主)의 은혜로 7년 동안 일곱 번 관직이 바뀌었는데, 녹봉은 입고 먹기에 족하고 집은 붓과 벼루를 늘어놓기에 족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지방 관직들을 겸임하게 해주었다. 그는 금정찰방을 비롯해 정조 10년(1786)부터 포천현감·양근군수·가평군수·풍천부를 두루 역임했는데, 지방관으로 내려가서는 양반 사대부들과 많은 갈등을 빚는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양역(良役)을 피해 양반 사대부 집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노동력의 대가는 양반 사대부가 모두 가져가고 국가에는 세금 한 푼 안냈다. 이를 은정(隱丁)이라고 하는데, 유득공은 이를 찾아내 명부(名簿)에 등재했다. 양반 사대부의 사실상 노비에서 일반 백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포천현감 시절 이들을 찾아내 국가의 양정(良丁)으로 되돌리자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무릇 백성들이 곡식을 받아 나가는 데 신역(身役)의 유무를 묻고 문서를 살핀 뒤에 있으면 패를 주고 없으면 꾸짖고 그 잘못을 쓰게 했다. 그래서 100여 명을 되찾았다. …읍민들은 귀신이라 여겼고 사대부들은 원한을 품었다.”(<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정조의 배려로 관직에 올라

  양근군수로 있을 때는 양반도 법을 어기면 매를 때렸다.

  “양근군수가 되었을 때였다. …호족은 백성들에게 기쁘면 술을 주지만 화가 나면 명분으로 꾸짖고 사사로이 묶고 마음대로 때렸다. 이를 비통하게 여긴 나는 법으로 바로잡았다. 한 연장자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 ‘자네가 다스린 지 수십 일에 양반 여덟을 태형에 처했으니 잘못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나는 ‘나랏일을 보는 데는 <대전통편>(大典通編) 하나가 있을 뿐인데 그 책에서 양반만을 위한다는 구절은 못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근의 호족들이 매우 두려워했다.”(<고운당필기>)

  그가 파직까지 당하는 등 지방관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던 것은 양반 사대부들과의 이런 마찰 때문이었다. 지방관을 위협할 정도의 호족들이면 중앙에 일가붙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일이 유득공에게는 맞지 않았다. 비록 몸은 고되지만 규장각 검서관이 그의 체질에 맞았다.

  그는 <발해고> 서문에서 “나는 규장각에 있으면서 비장(秘藏)된 책을 쉽게 읽어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책들을 읽으며 우리 역사에 대한 혁명적 인식의 전환을 이룩했던 것이다. <발해고>뿐만 아니라 ‘스물하나 도읍지를 시로 읊다’(題二十一都懷古詩), 한사군 역사를 다룬 ‘사군지’(四郡志) 등이 그가 남긴 역사 저술들이다. 또한 24절기에 따른 세시(歲時)에 맞춰 각종 의례 풍속을 다룬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京都雜志)도 저술했다. 조선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농부로 생을 마치다  

이렇게 그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직하면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사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규장각의 검서관 15년을 보내자 돋보기 없이는 작은 글씨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렀다. 정조는 특별히 입직과 글 베끼는 일을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재위 23년(1799) 유득공과 박제가를 종신 규장각 검서로 임명했다. 평생 규장각 서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정조가 독살설 끝에 사망하면서 운명은 뒤바뀌게 된다. 순조가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조의 정적이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한다. 정조 때 성장한 세력들에 대한 정치 보복이 자행되는데 남인들은 천주교 신자로 몰려 대거 사형당하고, 유득공과 가까웠던 박제가도 유배를 가게 된다. 유득공은 비록 유배가지는 않았지만 풍천부사에서 파직됐다. 순조 1년(1801) 유득공은 내각(內閣·규장각)으로부터 북경에 가서 <주자서> 선본(善本)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는다. 고령의 어머니 때문에 망설였으나 모친은 이 명에 따르는 것이 유득공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적극 권유했다. 사은사 조상진(趙尙鎭)의 사행 행렬을 따라간 유득공은 북경에서 친분이 있던 <사고전서>(四庫全書) 책임자 기윤(紀昀)에게 <주자서>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자서>를 보지 않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정조 사망 이후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했던 것이다. 귀국 뒤 유득공은 더 이상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다. 그는 순조 7년(1807)에 사망하는데, 이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글이 있다.

  “나는 농사일이야말로 수고롭되 원망하지 않고 즐겁되 지나치지 않아서 부드럽고도 도타운 이치를 깊이 체득한 시도(詩道)와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야 물러나 거처하며 몸소 밭을 갈아 시인이 읊조리는 작품 속의 한 농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전원잡영서’(田園雜詠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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