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 이덕일
[한겨레21]에 연재된 이덕일의 역사 평론
영원한 주류, 그 오만과 편견
조선 후기 노론으로 시작해 한번도 기득권을 놓치 않고 역사를 망친 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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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주류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주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규정 없이 진행되는 논란이기에 조금은 혼란스럽다.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는 어떤 세력일까? 우리 역사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고려 멸망과 신흥사대부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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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첫 주류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른바 천강(天降)세력이었다. 환인(桓因: 하느님)의 서자 환웅(桓雄)의 아들인 단군이나, ‘광개토대왕비’에 천제(天帝: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세력이었다. 이는 정복세력이 자신들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조상을 하늘과 연결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고대사의 첫 주류는 정복세력인 셈이다.
통일신라의 주류세력인 진골귀족은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따라서 좀더 개방된 주류를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그 결과 후삼국의 혼란이 야기되고 새롭게 성장한 지방호족과 6두품 세력의 반발을 받아 신라는 붕괴된다.
이와 달리 고려는 비주류들을 광범하게 포섭했다. 왕건에게 무려 29명의 부인이 있었던 것은 고려가 이들 비주류, 즉 호족들의 연합에 의해 탄생한 국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들은 신라사회를 얽어매고 있던 골품제의 사슬을 과감하게 풀어버렸고, 이 점에서 이들의 집권은 역사의 진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역사의 주류가 신라의 폐쇄적인 진골에서 다양한 비주류 연합체로 바뀐 것이다.
고려는 문벌귀족사회였으나 무신정권과 몽고의 지배를 거치면서 주류의 성격이 변화한다. 일부 문벌귀족과 무신세력, 그리고 몽고에 붙은 친원배(親元輩)들의 집단인 권문세족이 주류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장악하고, 대규모 농장을 소유함으로써 정치·경제적 특권을 독점했다. 어떤 농장은 각지의 주(州)·군(郡)에 걸쳐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불과 70∼80여명에 불과한 권문세족이 정치·경제적 부를 독점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고 개혁요구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때 등장하는 개혁세력이 신흥사대부이다.
비주류였던 신흥사대부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주류 권문세족과 비주류 신흥사대부 사이의 대결은 결국 신흥사대부의 승리로 귀결지어진다. 역성혁명파 신흥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인 정도전이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이들은 조선 건국 2년 전인 공양왕 2년(1390)에 전국의 모든 공사전적(公私田籍), 즉 토지문서를 모두 불살라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린 뒤 조선을 건국한다. <고려사>는 이 불이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조처였고, 그만큼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500년 왕업이 무너지는데 농민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농민들이 조선개창을 적극 찬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론의 조선엔 임금마저 비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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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는 집권과 동시에 당쟁으로 돌입한다. 이는 조선 사대부정치 구조의 필연적인 분화로 사대부의 역사적 순기능이 다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 후기 역사의 비극은 이들 사대부들을 대체할 비주류 세력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 그나마 임진왜란 와중에 집권한 북인이 다른 당파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정치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인의 집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내는 인조반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쿠데타를 통해 서인들은 주류로 부상한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백성들은 광해군이 쫓겨나야 할 이유를 몰랐다. 그러자 서인들은 남인들을 어용 야당으로 끌어들여 정권의 외연을 넓혀갔다.
인조반정이 비극인 것은 당시 사회가 밑에서부터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는데도 반정 주도세력은 거꾸로 갔다는 점에 있다.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등은 신분제의 해체를 요구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주도세력은 이런 움직임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는 지배층 사이에 관념적인 문제로 당쟁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어용 야당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남인세력이 점차 국왕과 결탁해 정권 장악에 나서면서 서인과 남인은 정면충돌했다. 숙종(1674∼1720) 재위 초반 잠시 남인들이 승리했으나 서인들은 정치공작으로 정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가혹한 정치보복이 뒤따랐다.
이때 집권세력인 서인 일각에서 정치보복의 근절과 공작정치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서인도 분당을 맞게 된다. 이때 공작정치의 근절을 요구한 세력이 윤증(尹拯 1629∼1714)을 영수로 삼은 소론(少論)이었고, 공작정치를 합리화한 세력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영수로 삼은 노론(老論)이었다.
조선 후기는 노론이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남인이 인위적으로 제거된 정치판에서 소론은 야당의 역할을 대신했으나 그 세력은 미미했다. 집권 노론은 남인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한 숙종 20년(1694)부터 1910년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만 따져도 무려 216년을 집권하게 된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국왕도 비주류일 뿐이었다. 노론에 의해 제거된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노론이 반발하자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절규했으나 이는 비주류의 울분일 뿐이었다. 정조는 재위 24년간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정치개혁에 매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나라 팔고 뛸 듯이 좋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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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은 주류 노론이 국망(國亡)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노론은 아무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후작 여섯명, 백작 세명, 자작 스물명, 남작 마흔다섯명 등 총일흔여섯명에 달하는 인물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는데 대부분 노론이었다. 일제가 자의적으로 수여한 남작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수작(授爵)의 영광에 감읍했다.
합방공로작’ 수여 다음날에는 1700여만원의 거금과 이른바 ‘은사공채’(恩賜公債)가 내려져 경제적 보상이 뒤따랐다. 양반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창숙이 자서전에서 “그때에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비판하고 있듯이 당시의 주류였던 노론은 독립운동은커녕 일제가 내린 작위와 돈을 받고 뛸듯이 좋아하며 따랐던 것이다.
양반 중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쪽은 소론과 남인들이었다. 소론의 대표적 집안인 우당(右黨) 이회영 가문은 나라가 망하자 6형제 모두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나섰다. 서간도 유하현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는 이들 집안의 자금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양반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이상설, 이동녕, 이상룡, 김창숙, 김대락 등은 모두 소론이나 남인계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상하이 망명 시절 서로, “나라는 노론이 다 망쳤고, 우리는 권력의 곁불도 쬔 적이 없는데 고생은 우리가 다 한다”고 자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론이 일제 치하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린 반면 이들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불우한 최후를 맞았다. 이회영은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했고 그의 형 이석영도 상하이에서 병사하는 등 이시영을 제외한 일가 대부분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이상설은 소련령 니콜리스크에서, 이동녕은 쓰촨성에서, 이상룡은 지린성에서 병사하는 등 대부분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친일파와 반공주의의 환상적 결합?
우리 역사의 비극은 해방 이후에도 이들 독립운동가들보다 친일파들이 주류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데 있다. 일제시대 때도 지주의 지위를 계속 누릴 수 있었던 이들 친일파들은 해방과 동시에 한민당을 만들었고 국내 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과 결탁해 주류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 때의 악질 고등경찰 김태석이 해방 이후에는 좌익을 검거하러 다니는 경찰간부가 되었던 사실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성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 친일파가 반공세력과 손잡고 해방 50년간 우리 현대사의 주류로 행세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보수적 단면을 잘 말해준다. 중국은 한 고조 유방(劉邦)과 명 시조 주원장(朱元璋)이 저잣거리 출신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최하층의 인물들이 당대에 중원을 석권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권을 잡은 적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류는 영원하다는 오만한 믿음인지도 모른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영조와 맞선 김일경, ‘사초’를 위해 죽은 김일손, 상식을 뒤엎은 신채호…시대를 논리를 뛰어넘어 미래와 대화했던 역사의 선각자들을 만나보자
몇 년 전 받은 전화 한 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덕일 선생님이십니까? 저 아계 후손입니다.”
필자는 선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후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은 자꾸 경종과 영조 임금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학 세대가 아니라 호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아계의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봐 삼가면서 조선 후기에 아계라는 호를 썼던 인물들을 떠올려보았다. 한 명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의 후손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계 후손의 전화를 받다
‘아계(?溪) 김일경(金一鏡·1662~1724).’
조심스럽게 확인해보니 과연 ‘일자 경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필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김일경의 후손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김일경은 조선 후기 그 누구 못지않게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유명한 만큼 금기시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론 강경파이던 그는 경종 원년(1721)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을 달성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사형됐던 인물이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 <영조실록>의 사관이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8일)라고 부기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경종에게는 사육신 못지않은 충신이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됐다. 연좌된 그의 자식들도 절멸됐다. 게다가 영조 31년 나주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김일경의 아들 중에 혹시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모르니 찾아서 처단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역적 김일경의 종손 가운데 성명을 바꾸고 중이 된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자 발본색원을 지시할 정도로 김일경의 후손은 영조·노론과는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던 처지였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론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에 김일경은 신원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후손 중 한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노론은 조선 멸망에 협조한 대가로 일제시대 때도 그 세력을 온존했으며, 특히 역사학계는 노론 유력 가문의 후예로서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했던 한 사학자가 해방 이후에도 태두의 지위를 누리는 바람에 김일경은 학문적으로도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 저서를 보고 비로소 노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역사학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암에 걸려 있었던 그분은 2년쯤 뒤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역사의 붓을 잡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이켜보곤 한다.
필자 자신이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질 때문인지 필자는 역사의 음지에 가려진 시대와 인물들에게 더 큰 관심이 갔다. 그러나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가 판단 대상이다. 아계 김일경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든지, 백호 윤휴(尹?)처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든지, 명재 윤증(尹拯)처럼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하든지, 이가환·이승훈처럼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가 사형되든지, 소현세자처럼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든지 했어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노론의 나라를 떠난 정약종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쓰는 동안 수없이 내면에서 물어왔던 질문이 있다. 정약전·약종·약용 중에 누구의 인생을 살 것이냐는 질문이다.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에서 양반 윤지충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이 발생하자 정약용과 큰형 정약전은 천주교를 버렸지만 작은형 정약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조 사후 노론이 남인들을 천주교도로 몰아 멸절시키고자 설치한 죽음의 국청에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당당히 꾸짖고 형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노론의 나라를 떠나 하늘로 간 정약종의 인생은 범인이 쉽게 따를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정약용이 소내(苕川) 고향집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붙인 것은 그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노자>(老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은 그가 정조 없는 노론의 세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길에 오른 그는 세상과 절연하고 훗날 ‘다산학’이라 불리는 학문의 성을 쌓았다. 반면 정약전은 정약용이 ‘선중씨(정약전) 묘지명’에서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라고 쓴 것처럼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필자가 형제의 처지가 되었다면 정약용처럼 살았을까 아니면 정약전처럼 살았을까? 정약용의 반 정도 학문을 하고, 정약전의 반 정도 어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자답이 돌아왔다. 제대로 된 학자도 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어부도 되지 못할 필자의 한계임을 스스로 안다.
역사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종종 역사가를 생각한다. 그중 세 사람 정도가 마음을 흔든다. 한 사람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다. 사마천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된 이릉(李陵) 장군을 옹호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잘 알려진 대로 궁형을 받았다. 그는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치욕 중에 으뜸가는 것은 궁형을 받는 일입니다. 궁형을 받은 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습관은 까마득한 옛날부터입니다. …(저는)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벌금형으로 대신할 만한 재산도 없었고,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한마디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그가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고 살아남은 이유는 개인 사마천의 목숨보다, 사대부 사마천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후세에 <사기>(史記)를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이 두려워 궁형을 택한 것이 아님을 <사기> 본기의 순서는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한나라의 개국시조 고조 본기보다 그와 싸웠던 항우 본기를 앞 순서에 두었다. 임금도 아니었던 항우를 개국시조의 본기보다 앞세운 것은 승자의 자리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그의 시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을 궁형에 처한 무제를 미신이나 좋아하는 용렬한 군주로 그렸다. 역사가의 붓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죽음으로 지킨 ‘조의제문’
연산군 때의 사관 김일손(金馹孫)은 사림 영수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는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가 화를 입게 된다.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수양대군을 항우에 비유한 ‘조의제문’은 “신하(수양대군)가 임금(단종)을 찬시(簒弑·자리를 빼앗고 죽임)했다”는 기록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일손은 ‘조의제문’에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덧붙였는데, 이것이 유자광 같은 훈구 공신들에게 간파되면서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를 사화(史禍)라고도 쓰는 이유는 김일손·권경유·권오복 같은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청도군에서 지병인 풍병을 치유하다 의금부에 체포된 김일손은 “내가 잡혀가는 것이 사초(史草·실록의 기초기록) 때문이라면 반드시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사초는 사관의 목숨을 걸고 후대에 전해야 할 진실이었다. 김일손 역시 김일경처럼 모든 자손들이 연좌돼 멸절됐다. 김일경의 핏줄은 우여곡절 끝에 보존됐지만 김일손의 핏줄은 폭군 연산의 거듭된 추적으로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자식보다 소중하게 전하고자 했던 ‘조의제문’은 <연산군일기>에 그의 국문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단재 신채호는 식민사관의 틀을 깨고 우리 역사의 무대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를 가르쳐준 역사가이다. 게다가 그는 역사 기록의 한자 한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제의 실증사학자들 이상으로 입증한 사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에서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던 평양의 ‘한사군 낙랑군’을 최씨의 낙랑국과 구별해 부정한 기록을 보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료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사기>를 쓰기 위해 살아남은 사마천, ‘사초’를 전하기 위해 죽어야 했던 김일손, 상식을 뒤엎었던 신채호! 이 세 역사가의 공통점은 그 시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와 대화한 데 있다. 그 시대의 논리를 뛰어넘는 역사 인식이 세 역사가에게는 있었다. 역사의 진정한 몫은 이렇게 다음 시대와 대화하는 것이리라. 과거를 가지고 미래와 대화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질이다. 필자 역시 다음 시대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과거의 역사 인물들을 초대하고 과거의 사건들을 되새겨볼 것이다. 이를 통해 시대와 불화했던, 그래서 그 시대에는 버림받았던 인물들이 미래와 화해할 수 있다면 감히 바랄 수 없는 망외의 소득일 것이다.*
죽어서도 대동법을 외치다
효종 즉위년(1649) 9월 좌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모친상으로 사직하자 효종은 조익(趙翼)을 좌의정으로, 잠곡(潛谷) 김육(金堉)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김육은 와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은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사직서를 반려한 것은 절대 사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김육은 우의정 자리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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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는 그해 11월 자신을 쓰려면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하라는 내용의 상차(上箚)를 올려 대동법 정국을 열었다.
“신을 쓰시려면 대동법을…”
“왕자(王者)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군(人君)이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몸을 기울여 수성(修省)하는데 여기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뿐입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가 최고의 정치라는 뜻이다. 김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대동법이 어떤 법이기에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까지 말한 것일까?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을 대체한 법으로서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되다가, 인조 원년(1623) 강원도로 확대됐지만 더 이상의 확대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 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수입의 60%를 차지하는 주요 세원(稅源)이 됐으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종류가 수천 가지인데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뉘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됐다. 더 큰 문제는 불평등한 부과 기준이었다. 공납은 군현·마을 단위로 부과돼 가호(家戶) 단위로 분배되는데, 각 군현의 백성 수와 토지 면적이 달랐음에도 ‘공안’(貢案·공납부과대장)의 부과 액수는 비슷했다. 작은 군현과 작은 마을의 백성들이 불리할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한 군현·마을 안에서 대토지를 가진 양반 지주와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전호(佃戶·소작인)가 같은 액수를 부담하거나 가난한 전호들이 더 많이 부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정경유착의 원조라 할 방납업자(防納業者)들까지 농민 착취에 가세했다. ‘놓일 방’(放)자가 아니라 ‘막을 방’(防)자를 쓰는 이유는 공납업자들이 관리들과 짜고 농민들이 마련한 공물을 퇴짜 놓고 자신들의 물건을 사서 납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조 16년(1638) 충청감사였던 김육은 “공납으로 바칠 꿀 한 말(斗蜜)의 값은 목면(木綿) 3필(匹)이지만 인정(人情)은 4필”이라고 상소했는데, 인정이 바로 방납업자들의 수수료였다. 배보다 큰 배꼽인 인정은 모두 빈농들의 피땀이자 고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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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대신 지우는 족징(族徵)으로 대응했고,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지우는 인징(隣徵)으로 그 액수를 채웠다. 그 결과 마을 사람이 모두 도망가 텅 빈 마을도 적지 않게 됐고, 조정에서도 그 대책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숯 장사 하며 백성을 이해하다
공납폐의 해결책은 사실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이렇게 바꾸면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전호는 면제되게 된다. 대동법이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것은 남인 정객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 이원익이 경기도에서는 공납 대신 토지 1결당 쌀 12말을 걷는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는데,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왕의 교지 가운데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어 담당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7일)라고 전하고 있다. 대동법 주관 관청이 ‘백성들에게 은혜(惠)를 베푸는(宣)’ 선혜청(宣惠廳)인 것은 이 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경기·강원도에 이어 정작 농토가 많은 하삼도(下三道·경상, 전라, 충청)로 확대 실시하는 것은 어려웠다. 양반 지주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양반 지주들의 나라에서 양반 지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법을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김육의 대동법 상소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동법을) 양호(兩湖·충청, 전라)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이 일에 급급한 것은 이 일은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하여야지 흉년이 들면 또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세운(歲運)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편리함을 빌려준 것입니다. 명년의 역사(役事)는 겨울 전에 의논해 정하여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신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즉위 초에, 또 약간 풍년이 들었을 때 전격적으로 시행해야지 시간을 끌면 갖가지 명분의 반대론에 밀린다는 내용이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賜死)당했던 사림파 김식(金湜)의 증손자였던 김육은 성균관 유생이던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의 실력자 정인홍을 비판했다가 정거(停擧·과거 응시 금지) 조치를 당하고 경기도 가평에서 10여 년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숯을 팔아 생계를 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김육은 자신의 정치 인생을 일관되게 대동법에 걸었다. 이 상소 11년 전인 인조 16년(1638)에도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그는 “대동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 충청도)에 시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라면서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인조실록> 16년, 9월27일)라고 주장했다. 대동법 시행은 양반 지주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꺼렸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김육의 상소대로 ‘다시 징수하는 명목이 없을’ 정도로 투명해지기 때문에 부패의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인조는 충청도로 확대 실시하는 데 찬성했으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대동법 불가하면 나를 벌주라
그 뒤 와병으로 물러났던 김육은 효종 때 우의정에 제수된 것을 대동법을 다시 촉발시키는 계기로 삼기 위해 배수진을 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감히 별폭(別幅)에 써서 올립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따로 올린 ‘별폭’에서 김육은 대동법이 백성들뿐 아니라 국가에도 이익이라고 논증했다. “양호(兩湖·충청, 호남) 지방의 전결(田結)이 모두 27만 결로서 목면이 5400동(同)이고 쌀이 8만5천 석이니, 능력 있는 관료에게 조처하게 하면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서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役)에 역시 응할 수가 있습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그러면서 김육은 “다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그 색목(色目)이 간단함을 혐의하고 모리배들이 방납(防納)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이점이 염려됩니다”라고 반대파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했다. 대동법 시행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양반 지주들과 부패한 아전들, 그리고 방납으로 배를 불리던 방납업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명목을 들어 반대했다.
김육의 상소에 대해 효종이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원망하는 대소가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여러 신하들은 “소민의 원망이 큽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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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 즉 양반 지주들이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 즉 가난한 백성들이 원망한다는 뜻이다. 효종은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고 사실상 소민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비록 숫자는 적어도 반대하는 세력이 양반 지주들이기 때문에 그 확대는 쉽지 않았다. 효종 즉위년 12월 좌의정 조익이 대동법 시행을 주청하고 우의정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가세했으나 효종은 대답하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효종실록> 즉위년 12월3일).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던 효종이 대답을 않는 것으로 바뀐 것은 그사이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심했다는 뜻이다.
근대화의 씨앗을 뿌리다
대동법 반대세력은 김육이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말한 것이 방자하다며 일제히 공격했다. 방자하다는 명목으로 대동법 시행을 무산시키려는 것이었다. 효종 초의 조정은 이 문제로 둘로 갈려 집권 서인이 분당되기도 했다. 대동법 실시에 찬성하는 김육·조익·신면(申冕) 등 소수파는 한당(漢黨)이 되고, 반대하는 이조판서 김집(金集)과 이기조(李基祚)·송시열(宋時烈) 등 다수파는 산당(山黨)이 됐다. 김육 등이 한강 이북에 살고, 송시열 등이 연산(連山), 회덕(懷德) 등 산림에 살기 때문에 붙은 당명이었다.
조정 내에서는 반대론자들이 다수였지만 김육은 대동법에 대한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는 효종 2년(1651) 영의정에 임명되자 드디어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장 실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좌의정으로 물러났다가 효종 5년(1654) 다시 영의정이 되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해 대동법을 호남에 확대하려 했는데, 그 시행을 앞두고 효종 9년(1658)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 대동법은 전라도 해읍(海邑)에 확대 실시됐다가, 현종 3년(1662)에는 전라도 산군(山郡)에도 실시됐다. 드디어 숙종 34년(1708)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전국적인 세법이 됐다. 꼭 100년 만에 전국적인 세법이 된 것이다.
대동법 시행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됐다. 대동법에 반대하던 산당 영수 송시열도 대동법의 효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이를 말해준다. 효종이 “호서(湖西·충청)의 대동법을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라고 묻자 송시열은 “편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좋은 법이라고 하겠습니다”(<효종실록> 9년 7월12일)라고 답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국가경제도 발전시킨 대동법은 조선의 역사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조정은 과거 공납으로 충당하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새로운 물자공급 체제를 수립해야 했는데, 이런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직업이 공인(貢人)이었다. 관청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들은 선불로 받은 물품값으로 수공업자에게 자본을 대주고 제작게 하는 선대제(先貸制)를 실시했다. 이는 상업자본의 수공업 지배 형태로서 자본주의 발달사 초기에 나타나는 상업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대동법이 촉발한 이런 변화는 조선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 즉 근대화를 지향하는 씨앗이 생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들이 다른 요인들에 의해 굴절되면서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지만 조선 사회 내부에 세계사의 발전 흐름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대동법은 보여준 것이다.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잠곡 김육, 대동법의 경세가라고 불렸던 능력 있는 한 양심적 경제관료의 신념이 역사에 남긴 자취는 이처럼 컸던 것이다. 서민경제가 무너졌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어찌 김육 같은 경제관료가 그립지 않겠는가. *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청나라와 싸우자고만 외친 사대부에 맞서 주화론을 제기한 이경석…나라를 대신해 옥에 갇히기도 했으나 노론은 그의 신도비마저 없애
인조 14년(1636) 봄 후금(後金)은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마부대(馬夫大)를 사신으로 보내 양국 간의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척화론자, 즉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은 마부대를 죽이자고 주장했으나 전쟁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9년 전인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 때 불과 석 달을 못 버티고 항복했던 조선이었다. 마부대가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에게 “한(汗·청나라 황제)이 여러 왕자들과 항상,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라고 말하면서 웃는다”라고 말한 것은 뼈아픈 사실이었다. 사신의 목을 벨 경우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그 후과는 불 보듯 환한 일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입으로는 복수를 외쳤지만 군사력은 기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척화론을 배격하고 주화론(主和論)을 주청한 인물이 대사헌이었던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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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황제공덕비 비문을 떠맡다
“척화 일사(一事)가 어찌 정대하고 명쾌하지 않겠는가마는 국사와 민심이 한 가지로 믿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사세를 돌아보지 않고 강적에게 분을 돋우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이경석 행장’)
척화론이 아니면 사대부 대접을 못 받던 때 주화론 주창은 용기였으나 현실적인 그의 주장은 척화론에 묻혀버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의 한계이기도 했다. 광해군 폐위 교서의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는 구절이나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인조실록> 1년 3월14일)라는 구절이 이를 말해준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上國)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 외에 길이 없었다. 주화론은 광해군의 실리 외교가 옳은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반정(反正)의 자기 부정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향명대의(向明大義)를 위해 후금과 화(和)를 끊는다고 사실상 선전(宣戰)의 교서를 내리자 그해 12월 청 태종은 여진군 7만, 몽골군 3만 등 도합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인조는 정묘년에 그랬던 것처럼 강화도로 몽진(蒙塵)하려 했으나 이미 강화로 가는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겨울의 남한산성은 농성할 곳이 아니었다. 기다리던 명나라는 원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고, 자초한 전란에 의병의 봉기도 찾기 어려웠다. 40여 일 뒤 성내의 양식이 떨어지고 수많은 군사가 얼어죽자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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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637) 1월30일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구)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그리고 훗날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불리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 자리가 수항단(受降壇)인데, 청나라는 여기에 ‘대청황제공덕비’ 건립을 요구했다. 이것이 세칭 ‘삼전도비’(三田渡碑)인데, 누가 비문을 짓느냐가 문제였다. 사실 항복한 이상 비문 찬술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이런 외교 비문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이 짓는 법이었으나 마침 대제학이 궐위였다. 그래서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몇 명에게 비문 찬술을 명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를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인조실록> 15년 11월25일)
이경석의 글이 채택된 내막은 좀더 복잡하다. 인조는 세 글 중 일부러 조잡하게 쓴 조희일은 배제하고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조선에 와 있던 청나라 사신 편에 심양(瀋陽)으로 보냈다. 심양에는 명(明)나라 학사였던 범문정(范文程)이 있었는데, 그가 이경석의 글을 일부 개찬할 것을 조건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인조는 이때 이경석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명나라 선박 때문에 청나라에 구금돼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吳)나라의 신첩(臣妾) 노릇을 했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문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연려실기술> ‘현종조고사본말’)
국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경석은 비문의 일부를 개찬하고는 공부를 가르쳐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썼다. “수치스런 마음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라는 시는 그의 고통을 잘 말해준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비문의 찬술자로 비판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이경석은 비문 찬술을 이유로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부터 수많은 수모와 공격을 당했으니, 그야말로 소절(小節)이 대의(大義)를 꾸짖는 격이었다.
이경석이라고 청나라가 좋아서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밀파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인조실록>(19년 8월25일)에 따르면 조정에서 독보를 밀파한 이유는 ‘조선의 세력이 곤궁해서 청국의 통제를 받는 이유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경석 행장’은 이때 그가 두문불출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도 물리치고 하루 종일 울었는데 가족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고 전한다. 만약 밀사 파견 사실이 청나라에 감지되면 국체가 흔들거릴 사건이었다. 게다가 명나라는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기어코 함께 협공하자”는 답서를 보냈다. <인조실록>은 “그 일이 비밀에 붙여져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고 전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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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1595~1671)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으로서 부친의 임지인 제천 관아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10년(1618) 문과 별시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고, 인조 1년(1623) 다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왔다. 그가 평소에 지키려 한 덕목 중에 검덕(儉德), 불편부당(不偏不黨)과 함께 무무출(無廡出)이 있는 것이 그의 인격을 잘 말해준다. 무무출은 후실(後室), 즉 축첩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축첩이 일반화된 사대부 사회에서 특이한 일이었다.
그는 전란의 시대를 산 선비답게 국가와 고난을 함께했다. 인조 19년(1641)에는 세자 이사(貳師)가 되어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으로 가서 병자호란 포로 석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잠시 귀국한 뒤 인조 20년(1642) 다시 심양으로 갔는데 이때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정박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청나라에서 수사에 나선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잠상(潛商)이 우연히 정박한 것이라며 시종 조정의 연관 사실을 부인했으나 구금되었다. 만주 봉황성 등에 갇혀 있던 그는 8개월 만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복명하지 못하며 다시 용안을 뵙는다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신의 죄과가 더욱 무겁습니다. …종이를 앞에 대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인조실록> 20년 12월17일)라는 글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선조실록> 개수(改修) 작업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던 그는 인조 23년(1645) 영불서용 조처가 풀림에 따라 이조판서로 임용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같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해 한때는 그들의 주인(主人)으로 불렸다.
북벌계획의 책임을 모두 짊어지고…
효종 즉위년 김육의 대동법 확대 실시 상소 때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은 “신의 뜻으로는 먼저 홍청도(洪淸道·충청도)부터 시행하여 그 이해를 안 연후에 다른 도에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2월13일)라고 충청도 확대 실시를 지지했는데, 대다수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를 감안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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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1년(1650) 산림의 공세로 권력을 빼앗긴 김자점(金自點)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북벌 계획을 밀고하면서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북벌 계획이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효종이 밤새 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 이삿짐을 싸는 등 인심이 흉흉할 때 나선 인물이 이경석이었다. 이경석이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라고 말하자 효종은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효종실록> 1년 2월8일)라고 칭찬했다. 청천강을 건너며 지은 “한밤에 충신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니/ 이 마음 오직 귀신만 알 뿐이로다”(半夜直將忠信涉/ 此心惟有鬼神知)라는 시에 그의 심정이 잘 담겨 있다.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갇혀 앞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는데,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귀국 뒤 이경석은 광주(廣州)에 은거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등 정사에서는 한발 떨어져 지냈으나 효종이 자문하면 정성껏 도왔다. 효종 6년(1655)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이 서울에 있는 것을 질책함에 따라 아들의 임지인 안협(安峽)으로 피했다가 철원으로 이주하는 등 다시 시골을 전전했으나 효종은 그의 건의는 무조건 들어줄 정도로 그를 높였다.
청나라의 감시 때문에 명예직에 가까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같은 자리만 맡아 국사에 자문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거의 전부였으나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가 원로가 되었다. 74살이었던 현종 9년(1668)에는 궤장(?杖)과 잔치가 내려졌는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현종은 온양 온천에 거동하면서 이경석을 유도(留都)대신으로 삼았는데, 국왕이 없는 서울을 맡길 정도로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온양 행궁에 있는 현종에게 올린 상소가 뜻밖에도 송시열과 분쟁이 되면서 그는 시비에 휩싸인다.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현종실록> 10년 4월3일)
상소를 공격으로 오인한 송시열
당시 직산에 있던 송시열은 이 상소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해 이경석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옛날 송(宋)나라의 손적(孫?)은 ‘오랫동안 편하게 살아서(壽而康)’ 한 세상의 부러움을 샀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는 명성은 사지 못했으므로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손적은 송의 흠종(欽宗)이 금(金)에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靖康)의 변(變·1127년) 때 금나라의 비위에 맞는 글을 써준 대가로 ‘오랫동안 편하게 살았다’(壽而康)고 주희(朱熹)가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비난한 인물인데, 그를 이경석에 빗대어 공격한 것이다.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에 대한 야유였다. 그러나 이경석은 송시열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며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이경석은 현종 12년(1671) 취현동(聚賢洞)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숙종 28년(1702)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이경석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경석을 옹호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논란이 재연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은 아직 발표도 되지 않은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에 주희와 다른 경전 해석이 있다면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삭탈관작했다. 이 때문에 이경석의 신도비는 50여 년 뒤인 영조 30년(1754)에야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워졌으나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은 신도비를 갈아서 없애버렸다. 불편부당과 무비방(無誹謗)을 신조로 삼은 이경석도 노론의 당심(黨心)을 비켜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래 관리에게도 겸공(謙恭)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 9월23일)”라는 졸기가 그의 일생을 대변한다. *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주자학 유일 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양명학 지지를 밝힌 정제두…계급적 특권을 고집하는 사대부에 반대하며 강화학파의 전통 수립
조선 후기는 주지하다시피 주자학 유일사상의 시대였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주자학은 완전무결한 사상체계이자 정치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주자가 중세 학문계에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대학>이란 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대학>은 <논어> <맹자> 등과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지만 원래는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편찬한 <예기>(禮記) 49편 중 한 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학>은 주희(朱熹·주자)가 <대학장구>(大學章句)라는 주석서를 내면서 사서(四書)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대학> 자체보다 <대학장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시대에 주자를 비판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썼던 인물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였다. 정제두는 <대학서>(大學序)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간담이 서늘해질 주장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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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육경(六經)의 글은 해와 별같이 밝아서 아는 사람이 보면 절로 환한 것이라 주해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훈고(訓?)만 있고, 주설(注設)은 없는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주자(朱子)가 물리(物理)로써 해석을 하게 되니, 주(注)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고경(古經)이 변하게 된 까닭이다. 주자의 해석이 경문(經文) 본래의 뜻을 어기었으니, 또 고쳐 해설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주가 다시 지어진 까닭이다. …아! 변한 것이 없었으면 일이 없을 것을 변한 것이 있으니 되돌려놓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이것을 알면 나의 죄를 알아줄 것이다.”(<대학서>, 정제두)
‘친민’과 ‘신민’의 차이
주희가 대학에 주석을 붙이면서 경문(經文) 본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원래의 뜻을 되찾기 위해 글을 짓는다는 것이다. 정제두는 <대학> 본문도 주희와는 달리 읽는다.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과 친(親)함에 있으며(在親民), 지선(至善)에 그침에 있다. …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대학>, 정제두)
‘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원래 <예기>에 속해 있을 때 이 구절은 재친민(在親民), 즉 ‘백성과 친함에 있다’였는데, 정자(程子)가 “친(親)자는 마땅히 신(新)자로 써야 한다”면서 재신민(在新民), 즉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로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재친민과 재신민은 외형상 ‘친’(親)과 ‘신’(新) 자 한 자 차이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크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사대부 자신을 백성보다 우위에 놓고 백성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인 반면 ‘백성과 친함에 있다’는 사대부 자신과 백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민에는 인간을 존비(尊卑), 상하(上下) 관계로 구분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속뜻이 숨어 있다. 정제두는 신민을 다시 친민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제두가 이런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왕양명(王陽明·1472~1528)의 학설을 지지하는 양명학자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전습록>(傳習錄)에서 “백성의 모든 곤고함 중에서 내 몸의 절실한 아픔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에게 천하 백성은 자신과 둘이 아닌 하나였다. 왕양명은 같은 책에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천하의 인심이 곧 내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미친 자가 있는데, 내가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상심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찌 상심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왕양명은 <전습록 서애록(徐愛錄)>에서 주자학의 신민설(新民說)을 비판한다.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곧 친민으로서 친민에는 백성들을 교화하고 함양한다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지만, 신민은 한쪽만 강조해서 치우친 것이다”라는 비판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양명학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퇴계 이황(李滉)이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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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양명학자 선언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면서 조선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이란 일단의 학자군이 생긴다.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제두는 조선 후기에 유일한 외양내양(外陽內陽)의 선비였다.
정몽주의 11대손인 정제두는 종형이 영조의 부마이고, 부인이 윤선거(尹宣擧)의 종질이었던 서인 명가의 후손이었다. 이런 그가 시대의 이단이던 양명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고단했던 개인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16살 때는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주던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연보>는 백부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종손마저 어려서 그가 초상과 장례를 주관하여 치렀다고 전한다. 17살 때 맞이한 부인 윤씨는 23살 때 잃고 말았다. 어린 아들도 잃은데다 그 자신마저 병들었다.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4살 때 대과에 떨어지자 정제두는 모친께 과거 공부 폐지를 간청해 허락받는다. 동생인 정제태(鄭齊泰)는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며 “형제가 모두 이록(利錄)을 일삼는 것은 불가하다”는 명분이었으니 이미 세상 명리에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는 포기했으나 문명이 높아가자 32살 때인 숙종 6년(1680)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4살 때는 뒷일을 아우에게 맡기는 글을 쓸 정도로 병이 위독했다. 이때 박세채(朴世采)에게 남긴 유언 비슷한 편지에 정제두는 스스로 양명학자임을 밝힌다.
“제가 여러 해 동안 분발하면서 생각해두었던 것들을 선생님께 모두 보여드리고 바른 길을 구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생각해보건대 천리(天理)가 곧 성(性)이라고 하지만 심성(心性)의 뜻에 대해서는 아마도 왕문성(王文成·왕양명)의 학설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박세채에게 올리려던 글)
죽음을 앞두고 양명학자라고 선언한 것인데, 예상과는 달리 병에서 회복되자 양명학자를 자처한 그에게 수많은 시비가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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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유형은 다양했지만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54살 때인 숙종 28년(1702)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숙(大叔·박대숙)이 말한 글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대숙은 본설(本說)을 보지도 않고 한갓 자기 의견으로 억지로 논란한 것 같은데 이것을 어찌 명변(明辯)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왕씨(왕양명)의 설이란 것도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윤증에게 답하는 글)
정제두는 숙종 13년(1687)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난달 민언휘(閔彦暉·민이승)와 더불어 수일 동안 고양(高陽)에서 만나 서로 토론한 일이 있습니다. …언휘는 늘 말하기를, ‘양지(良知)의 학문(왕양명의 학문)은 심(心)과 성(性)과 천(天)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나 그의 이론을 듣고 저의 의혹을 좀 풀어볼까 했더니 정작 만나서 토론해보니 한마디도 요긴한 말이 없어 토론을 안 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언휘는 양지의 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박세채에게 보낸 편지)
다른 사상 용인하는 것이 학문의 자세
정제두의 <연보>에는 그가 민성제(민언휘)와 ‘우의가 돈독했다’고 적고 있지만 사실은 달라서 그는 정제두에게 위협적인 편지까지 보냈던 인물이다.
“책 끝에 주륙(誅戮)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여놓았는데, 지금보다 더 나은 명변(明辯)이 있다면 지당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죽이고 욕보이겠다고 화(禍)를 입히는 것이라면 나의 알 바가 아닙니다. 죽이고 욕보이는 것은 학문을 권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제가 아직까지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 도가 어떠한지를 모르는 것뿐입니다. 만약 그 도가 진실로 옳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학문을 논하다가 죄를 입어도 한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형은 어찌 나를 이렇게 낮춰보십니까?”(민성제에게 답하는 글)
다른 사상 용인하는 것이 학문의 자세
정제두는 양명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대신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하게 대들었다. 정제두가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른 사상들을 용인하자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학문의 자세라는 것이었다. 그가 민언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비록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혼자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너와 나의 구별을 될수록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시대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몰던 폐쇄된 시대였다. 숙종 22년(1696) 69살 노구의 윤증(尹拯)이 48살의 정제두에게, “전일(前日) 양명의 책들은 사우(士友)들이 걱정하던 바인데 지금은 혹 버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우려한 것은 소론 영수였던 윤증조차 이런 논란에서 자유스럽지 못했던 현실을 말해준다.
정제두는 자신에게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주자학자들에게 참다운 도가 무엇인지 논하자며 당당히 맞섰다. 그는 박세채에게 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싸움은 오직 그 의리를 위한 것이지 자기의 사욕 때문은 아닙니다. 공론(公論)의 결정은 옳고 그름에 달린 것이지 세력의 강하고 약한 것으로 정할 것이 아닙니다. …대저 힘으로 이겨봤자 천하의 의리를 공정하게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며 백 세 후의 시비를 바로잡는 데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박세채에게 답하는 글)
조선에서 양명학 연구가 억압되었던 진정한 이유는 양명학이 갖고 있는 사민평등(四民平等) 사상 때문이었다. 왕양명은 사민(四民, 사·농·공·상)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민의 역할에 대해서 이업동도(異業同道)라고 표현한다.
“옛날 사민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이 했으니(異業而同道),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선비는 마음을 다해 정치를 폈고, 농부는 먹을 것을 갖추었고, 장인은 기구를 편리하게 하였으며, 상인은 재화를 유통시켰다.”(왕양명, 절암방공묘표(節庵方公墓表))
중요한 것은 이런 직업이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각자는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그 마음 다하기를 구하였다. 이러한 직업들의 궁극적 목적은 생인(生人)의 도에 유익함이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동일할 뿐이다.”(왕양명, 절암방공묘표)
이상설·박은식도 강화학파의 후예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자학자들이 겉으로는 왕양명의 ‘심과 성과 천’에 대한 사상을 비판했지만 속으로는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인정하지 않는 철학사상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에게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은 하늘이 정해준 천경지의(天經之義)였던 것이다.
정제두는 정치를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섣불리 당쟁에 휘말렸다가는 그의 사상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초청장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천거로 몇몇 벼슬을 역임했지만 평택 현감으로 있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벼슬을 내놓고 안산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차지한 뒤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도리어 그는 61살 때인 숙종 35년(1709)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그의 <연보>는 이해 장손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해서 선조들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적고 있으나 이때는 노론 일당독재가 구축되고, 주자학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그는 학문의 자유를 위해 강화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 뒤 이광명(李匡明)·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인사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승되면서 그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스로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초기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던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등이 모두 강화학파의 후예였으니 한 선비의 진실 지향 정신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진리를 향한 구도의 열정뿐, 무욕(無慾)의 삶을 살았던 정제두가 젊은 시절의 잦은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88살의 장수를 누린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칼을 찬 선비, 칼을 품은 선비
명종 치하 ‘사화의 시대’에 제수된 벼슬을 한사코 거부한 남명 조식…“문정왕후는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소로 조정 흔들어
언제부턴가 선비와 칼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72)은 달랐다. <남명선생 별집(別集)> ‘언행총록’(言行總錄)은 조식이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이양원(李陽元)이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의 칼에는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었다.
과거를 버리고 학문을 얻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義內明者敬/ 外斷者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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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새긴 글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많은 사대부들이 형이상학을 논할 때 경(敬)과 의(義)를 새긴 칼을 차고 다녔다는 자체가 남다름을 말해준다. 증조부가 한양에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면서 조식의 집안은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그도 어린 시절 과거 공부를 했으나 곧 과거가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20살 때인 중종 15년 문과 초시에 합격했으나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선물한 <대학>(大學)의 책갑에 쓴 발문에 “과거 시험은 애초에 장부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19살 때인 중종 14년(1519)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발생하는데, 숙부 조언경이 함께 파직된 것도 과거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조식은 25살 때 친구와 산사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던 중 원나라 허형(許衡)의 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윤(伊尹)에 뜻을 두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에 숨어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이윤은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은(殷)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며, 안자(顔子), 즉 안회(顔回)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사자성어를 만들 정도로 가난을 선비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벼슬에 나가면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초야에 은거하면 가난 속에서 도를 찾는 선비가 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벼슬에 나가 이윤처럼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는 당시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부친과 모친의 권유로 몇 번 더 과거에 나가기는 했으나 <대학> 발문에, “문장이 과거문장(科文)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미 마음은 과거를 떠나 있었다. 30살 때 김해로 이주해 신어산(神魚山)에 산해정사(山海精舍)를 짓고 45살 때까지 거주했는데, ‘산해’(山海)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큰 학문을 하겠다는 뜻으로서 주자학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연보>에 따르면 조식은 37살 때인 중종 32년(1537) “세상의 도리가 어긋나고 시속이 흐려져 과거로 출세한다는 것은 곧 이에 가담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어머니께 예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 공부를 영영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바로 그해 학문을 가르쳐주기를 청하는 정지린(鄭之麟)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훗날 북인(北人)이란 당파를 형성하는 첫 제자였다.
세상사는 묘한 것이어서 과거를 포기한 이듬해부터 벼슬이 찾아왔다. 38살 때 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윤(伊尹)에게 뜻을 두고서도 그 뜻을 펼칠 수단인 벼슬을 포기한 것은 당시 정치 지형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다. 당시는 척신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하는 사화의 시대였다. 45살 때인 인종 1년(1545)의 을사사화로 여러 친구가 희생된다. 병조참의 이림(李霖)은 사사(賜死), 사간원 사간 곽순(郭珣)은 옥사(獄死), 성운(成運)의 형 성우(成遇)는 이들을 옹호하다가 ‘역적을 구원하고 공신을 모욕한다’고 장사(杖死)한다. 조식은 죽을 때까지 이들을 잊지 못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분노했다. 명종 2년(1547)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학>을 보내주었던 친구 송인수가 사사(賜死)당했다. 명종의 모후 문정황후와 그 동생 윤원형이 주도한 사화였다. 명종 3년(1548)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명종 6년(1551) 종부시 주부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거절한 것은 이런 정치 환경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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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어도 놀라운 단성현감 사직상소
조식의 거듭된 출사 거부는 뜻밖에도 퇴계 이황과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명종 8년(1553) 이황은 조식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을 사양한 데 대한(‘여조건중’(與曹楗仲))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식은 이황에게 답장을 보내 “식(植)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자신을 아껴서 그랬겠습니까?”라고 답하면서 “단지 헛된 이름을 얻음으로써 한 세상을 크게 속여 성상(聖上)에게까지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관직)을 훔치는 데 있어서겠습니까?(‘퇴계에게 답합니다’(答退溪書))”라고 덧붙였다. 퇴계 이황은 조식의 편지에 마음이 상했다. 사림의 종주인 자신의 천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두 사람의 이런 출사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조식이 명종 10년(1555)에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즉 ‘단성현감(丹城縣監) 사직상소’였다.
조식이 단성현감 제수를 사양하는 이유로 먼저 든 것은, 자신은 헛된 명성만 있지 벼슬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명종 즉위 뒤의 정사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평했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이는 명종의 10년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와 인심이 떠났다’는 말은 명종에게 천명이 떠났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한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당대의 금기였다. 조식의 친구들이 죽은 을사사화나 양재역 벽서 사건은 모두 문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명종 2년(1547) 경기도 광주의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 등이 권세를 종간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은 것이 양재역 벽서 사건인데, 조식의 친구 송인수를 비롯해 많은 사림들이 죽었고, 이후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 그런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칭하고, 명종을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라고 했으니 평상시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언급인데 하물며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한 사화 때였다. 그러나 윤원형과 문정왕후는 조식을 죽이지 못했다. 은거 선비의 사직 상소를 가지고 죽이는 것은 도리어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은거 처사 조식을 단숨에 전국 제일의 선비로 만들었다. 사관(史官)이 ‘사신은 논한다’에서 “유일(遺逸·은거한 인사)이란 이름을 칭하고 공명을 낚는 자가 참으로 많은데, 어질도다. 조식이여!”라고 칭찬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퇴계집> ‘언행록’에 따르면 이황은 오히려 조식의 상소를 비판했다.
“선생은 남명의 상소를 보고 사람에게, ‘대개 소장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뜻은 곧으나 말은 순해야 하고, 너무 과격하여 공순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은 정도를 지나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았으니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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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
그러나 조식은 척신 윤원형이 주도하던 명종 치하에서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보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사관은 조식의 상소를 둘러싼 논란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오늘날과 같은 때에 이와 같이 염퇴(恬退·고요하게 은거함)한 선비가 있는데, 그를 높여 포상하거나 등용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를 공손하지 못하고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니 세도가 날로 떨어지고 명절(名節)이 땅에 떨어진 것이 당연하며, 위망(危亡)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조식이 분개한 것은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하늘의 뜻이란 곧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민암부’(民巖賦)에는 이런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경>(書經) ‘소고’(召誥)의 “백성의 암험함을 돌아보아 두려워하소서”란 글에서 나온 ‘민암’(民巖)은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민암부’는 ‘단성현감 사직상소’가 평소 그의 소신임을 말해준다.
“…백성이 물과 같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어왔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한 사람의 원한과 한 아낙의 하소연이 처음에는 하찮지만/ 끝내 거룩하신 상제(上帝)께서 대신 갚아주시니/ 그 누가 감히 우리 상제를 대적하랴/ …걸(桀)왕과 주(紂)왕이 탕(湯)왕과 무(武)왕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부로서 천자가 되었으니/ 이처럼 큰 권한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다만 우리 백성의 손에 달려 있다/ …백성을 암험하다 말하지 말라/ 백성은 암험하지 않느니라.”
백성이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하고 천자가 되는 것도 백성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조식과, 백성은 사대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피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주자학자들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단성현감 사직상소’에서 “불씨(佛氏·석가모니)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라며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인물이 조식이었다.
조식은 45살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48살 되던 해에 삼가현 토동(兎洞)에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학문에 몰두했는데,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나오는 ‘뇌룡’은 ‘고요히 있지만 신비한 조화가 드러나고 천둥 같은 소리가 난다’는 뜻으로서 은거함으로써 세상을 움직이겠다는 의지이다. 이황이 “남명의 본 바는 실로 장·주와 같다”라고 비판한 것은 조식이 이처럼 장자의 학설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조식은 61살 되던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이주했는데, ‘산천’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밖으로 빛을 드러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는 갓 즉위한 선조가 교지로 부르자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사양하면서 개혁을 주문했다. 그리고 72살 때인 선조 5년(1572) 산천재에서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이 사후의 칭호를 묻자 “처사로 쓰는 것이 옳다. 만약 이를 버리고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사의 재야 정신을 죽는 순간까지 지녔던 것이다.
북인 제자들, 대거 의병장으로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제자이자 외손서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해 수제자(首門) 격인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 그리고 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하락(河洛)·전치원(全致遠)·이대기(李大期)·박성무(朴成茂) 등 쟁쟁한 의병장들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들로 형성된 북인은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처사 조식은 선조 36년(1602)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과 전란 극복에 힘쓰던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주요 인사들이 사형되면서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조식이 64살 때인 명종 19년(1564) 이황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퇴계에게 드립니다’(與答退溪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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