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 경종

싯딤 2010. 1. 18. 12:14

독살설의 임금-경종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숙종, 이이명 독대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元子)가 되거나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 된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론은 이런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자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노론 영수 이이명의 초상. 이이명은 숙종 43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아래 사진은 이이명이 쓴 39소재집39
숙종 43년(1717) 7월 19일. 전염병이 크게 번져 조정은 중신(重臣)을 보내 전염병 귀신에게 여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7월 초9일에는 폭우가 내려 물가의 가옥이 태반 무너져 내리는 수해가 발생했다. 이날 숙종은 안질 때문에 문서를 읽기가 어렵다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는 장님이 되는 것을 재촉하는 격이니 변통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좌의정 이이명이 ‘발음이 분명한 사람에게 문서를 읽게 하자’고 제안하면서, “왕세자를 곁에 두고 참견하게 함으로써 정무(政務)를 분명히 익히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권고했다.

노론 영수 이이명이 세자의 정사 참여를 제안한 것은 의외였다. 노론이 장희빈 소생의 세자 이윤(경종)을 자신들이 지지하는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훗날의 영조)으로 교체하려고 한다는 건 다 알려진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즉각 “당나라 태종도 말년에 병이 위중하자 변통시킨 일이 있지 않았는가?”라고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이이명은 “먼 곳의 고사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국조(國朝: 조선)에서도 세종대왕이 미령(未寧)하실 때 문종대왕께서 별전에 출어하셔서 대신들과 국정을 결단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세자의 국정 참여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추후 대신들과 다시 의논해 결정하기로 하고 오전 회의를 끝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경에 숙종은 다시 희정당으로 나가서 좌의정 이이명의 입시를 명했다. 승정원의 승지 남도규와 실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 권적 등이 관례에 따라 함께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내시가 좌의정 혼자만 입시하라는 분부라는 숙종의 말을 전했다. 이이명과 독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승지·사관은 물론 이이명도 당황했다. 승지와 사관의 배석 없이 독대했다가 구설수에 오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이명은 승지 남도규를 돌아보며“일이 상규(常規: 관례)와 다르니 승지와 사관은 입시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함께 들어가자고 청했다. 하지만 승지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이명만 불렀는데 왕명이 없는데 들어갔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창릉동에 있는 장희빈의 대빈묘. 노론은 장희빈이 사사 당시 세자(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불구로 만들었다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퍼트릴 정도로 장희빈을 저주했다. 사진가 권태균
사관 권적은 “죄벌을 받더라도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며 이이명의 뒤를 따랐다. 승지 남도규는 몇 걸음 따라가다가 권적을 돌아보며 “대신(大臣) 혼자 입시하라고 명하셨는데, 우리들이 먼저 품부(稟復: 윗사람의 뜻을 물음)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사체(事體: 일의 체통)에 어떠한지 모르겠다”고 주저했다. 사관 권적이 문을 열어젖히려 하자 남도규가 다시 잡으면서 “승전색(承傳色: 명을 전하는 내시)에게 청하여 품지(稟旨)를 거친 후에 들어가자”고 말렸다. 그 사이 독대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려 한다는 승전색의 전갈에 숙종은 답을 하지 않았다.

숙종은 독대가 끝난 후에야 승지와 사관의 입시를 허용했다. 이 날짜 '숙종실록'사관은 “이때 이이명은 이미 물러나와 자기 자리에 부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 임금과 나누었던 말은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숙종 43년 정유년의 ‘정유독대(丁酉獨對)’다.

독대 직후 숙종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자 야당인 소론은 발칵 뒤집혔다. '당의통략'에서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은 것처럼 소론에서는 세자의 실수를 기다려 연잉군으로 교체하려는 의도로 여겼다. 사헌부 장령 조명겸(趙鳴謙)이 “대신의 독대는 잘못된 거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이이명의 견책을 주장한 것처럼 ‘독대 비판론’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82세의 노구로 와병 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관을 들고 상경해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 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43년 7월 28일) 소론은 숙종과 이이명이 세자 교체와 연잉군 추대를 밀약했다고 의심했다. 윤지완의 상소에 분노한 숙종은 “임금에게 고하는 말도 함부로 하였고, 좌의정에 대해서는 바로 ‘사신(私臣)’이란 한마디로 단정해 망측한 누명의 구렁으로 몰아넣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소론의 이런 반발은 세자를 교체하려는 숙종과 노론의 밀약이 실행되는 데 큰 장애가 된 것이 사실이다.

장희빈이 세자를 낳았던 1688년(숙종 14)만 해도 숙종은 장희빈과 세자를 반대하는 서인(노론의 전신) 정권을 갈아치우고 남인들에게 정권을 줄 정도로 갓 낳은 왕자를 총애했다. 그러나 재위 20년(1694) 4월 정권을 다시 서인에게 주는 갑술환국을 단행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장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민씨가 다시 복위한 데다 그해 9월 숙빈 최씨가 연잉군을 낳으면서 세자에 대한 총애는 급격하게 식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죽이거나 쫓아내는 숙종의 성격으로 볼 때 세자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세자가 스스로를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작은 꼬투리도 잡히지 않는 것뿐이었다.

'경종대왕 행장(行狀)'은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민씨의 와병 때 세자의 행위를 적고 있다. 민씨가 오라비 민진후(閔鎭厚)에게 영결하는 말을 하자 민진후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는데, 세자는 슬픈 용태를 드러내지 않다가 문 밖에 나와서 민진후의 손을 잡고 크게 울었다는 것이다. 그해 8월 인현왕후가 승하해 시신을 발인했을 때는 교외에서 궁중에 이르도록 통곡을 그치지 않아 도로의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해 10월 숙종은 희빈 장씨를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죽이는데 모친이 죽던 날의 세자의 정경에 대해 '당의통략'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 세자의 나이 13살인데 글을 올려 “신(臣: 세자)의 어머니가 그릇된 일을 하는데 신이 알지 못할 리 없으니 함께 죽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면서 궁문 밖에 거적을 깔고 울며 여러 신하들에게 “나의 어머니를 살려 주기를 원하오”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좌상 이세백(李世白: 노론 영수)은 옷을 털어 피했으나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소론 영수)은 “신이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숙종이 마침내 희빈에게 죽음을 내리고 다시 장희재와 업동 및 여러 장씨들을 국문하여 모두 베어 죽이니 이것은 다 이세백이 찬성한 것이었다.('당의통략')

장희빈 사사에 가담한 노론에서 세자 대리청정을 먼저 주청하고 나온 의도는 명백했다. '당의통략'은 “세자가 어머니의 변고를 당한 뒤부터는 근심하고 조심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더니 잠을 자는 것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노론에서는 세자의 자질을 낮춰보고 대리청정을 시키면 숙종의 분노를 살 만한 큰 실수를 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실력을 감춘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경종대왕 행장'은 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여러 업무를 재결(裁決)하는 것이 모두 사리에 합당했으며 일을 당하면 모두 위에 품한 뒤에 행해서 감히 마음대로 독단하지 않음을 보였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 스스로 대리청정이 부왕과 노론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만든 자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청정하던) 첫봄에 팔도에 유시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넉넉히 진대(賑貸)하도록 했으며, 유포(流逋: 유랑)하는 자에게는 자산(資産)을 주어 향토(鄕土: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역질(疫疾)을 앓는 자에게는 양식과 약품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고, 병으로 죽은 자가 있으면 곧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도록 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의방(醫方)을 알아서 사람을 병에서 구해 주었거나 사재를 들여 길에서 굶어 죽은 자의 시신을 묻어 준 사람이 있으면 위에 계문하여 시상하도록 허락하였다.”('경종대왕 행장')

노론의 희망과 달리 세자는 우매하지 않았다. '행장'은 “신료를 예(禮)로써 대우하였고, 종친은 은혜로써 대접하였으며, 대신이 죽으면 반드시 위차(位次)를 마련하여 곡(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당의통략'에서도 “노론 또한 그의 잘못을 찾을 길이 없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쫓아낼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숙종이 재위 46년(1720) 만에 세상을 떠나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드디어 즉위하게 되었다. 이렇게 경종 시대가 열렸으나 노론은 그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왕조 국가에서 특정 당파가 헌법 질서에 의해 즉위한 임금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택군(擇君)하려는 불행한 사태가 시작된 것이다.

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 허수아비 임금

헌정 질서를 부인하는 세력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많은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경종은 세자 대리청정을 거쳐 국왕이 되었지만 집권 노론은 경종을 부인했다. 노론에 경종은 자신들이 죽인 모친 장희빈과 한 몸이었다. 화해의 정치 대신 증오의 정치, 한때 국모였던 여인을 죽인 과거사가 현실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불행한 상황이었다.
연행도 중 조양문 조선 사신들이 베이징 조양문을 향하고 있다. 이이명은 사신으로 가면서 6만 냥을 가져가 청나라 관리들을 매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숙종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반쯤 전인 재위 46년(1720) 4월 24일. 『숙종실록』은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성상의 환후는 복부의 팽창이 더욱 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경화나 간암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날 숙종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한탄한다. 그토록 숱한 사람을 죽였던 제왕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웠던 것이다. 숙종이 회생할 가망이 없어지자 노론 영수 이이명(李<9824>命)의 관심사는 이미 숙종을 떠나 있었다. 이이명은 “소신(小臣)이 진달한 바는 비단 일시적인 병의 치료(調) 방도뿐만 아니라, 반드시 국세(國勢)를 지탱하고 만백성을 보안(保安)하는 것임을 유념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비단 일시적인 병의 치료 방도(不但一時調病之道)’보다 중요한 ‘국세를 지탱하고 만백성을 보안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이명은 또 “정신이 조금 나으실 때 대신들을 불러 보시고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헤아리신 것이 있으시면 하교하소서”라고 덧붙였다. 소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의 사관(史官)은 “동궁(東宮)의 대리청정에 억조창생이 희망을 걸어 백성과 나라가 보전되어 근심이 없었다”고 전제하면서 “이이명이 급급하게 이런 말로 위태롭게 동요시킨 것은 독대를 한 후 스스로 (죄를) 면하지 못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관은 “은연중에 말명(末命:유언)이 어떠한가 여부로 요행을 바랐다”면서 ‘불단(不但)이란 두 글자를 세밀히 따져보면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비난했다.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라는 유언을 바랐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승길이 어른거리는 숙종은 세자 교체에 관한 유언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세자 교체에 실패한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데 당력을 걸었다. 비록 즉위했지만 경종의 왕권은 미약했다.

김창집 글씨 영의정 김창집은 청나라 사신에게 경종의 동생 연잉군의 신상 자료를 건넸다가 숱한 비난을 받았다.
경종 즉위년(1720) 7월 21일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어머니가 아들로써 귀하게 되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라면서 경종의 모친 장씨의 명호(名號)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희빈의 신원을 주장한 이 상소에 노론은 발칵 뒤집혔다. 사헌부 집의 조성복(趙聖復)은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이처럼 속이는 말을 제멋대로 입밖에 낼 수가 있겠습니까”라면서 엄하게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중우는 혹독한 국문을 받고 귀양 가다가 평구역(平丘驛)에 이르러 물고(物故:죄지은 사람이 죽음)되었다. 기세를 잡은 노론은 역공에 나섰다. 같은 해 9월 성균관 장의(掌議:학생회장) 윤지술(尹志<6CAD>)은 숙종이 신사년(1701)에 장희빈을 죽인 것과 관련, ‘그 처변(處變)이 도에 합당한 것’이자 ‘정도(正道)를 호위한 것’이라며 이를 숙종의 지문(誌文)에 넣어 영원히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사년의 처분은 선왕께서 국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전후 장주(章奏:상소)의 비답에 성의(聖意)를 보이신 것이 해와 달같이 밝으니 전하께서 감히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도리에도 당연한 일입니다.”(『경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경종은 자신의 생모를 죽인 것이 ‘해와 달같이 밝은’ 선왕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태학생 윤지술을 처벌할 수 없었다. 윤지술의 유배를 명하자 성균관의 노론계 학생들이 권당(捲堂:동맹휴학)했으며, 노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까지 “사기(士氣)를 꺾는 것이 옳지 않다”고 동조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생모를 신원하자는 주장은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고, 생모를 죽인 것이 선왕의 업적이라는 주장은 ‘선비의 사기’로 추앙받는 상황이었다. 경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모든 권력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불안했다. 자신들이 죽인 여인의 아들이 임금으로 있는 것 자체가 불안했던 것이다. 이런 불안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 경종 즉위년 9월 포도대장 이홍술(李弘述)이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장살(杖殺:곤장을 때려 죽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사신(史臣)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현은 추수(推數:운명학)에 능해 김창집이 처음에는 친하게 지냈으므로 음사(陰事)를 말해주었으나 돌아서서 그 말을 누설할까 두려워 이홍술을 사주해 박살(撲殺:때려 죽임)함으로써 멸구(滅口:입을 막음)했다. 계획적으로 속이고 감추려는 정상에 사람들이 다 의혹을 품었다.”(『경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훗날 이 사건의 재조사를 통해 김창집의‘음사(陰事)’는 경종을 모해하려는 역모로 결론지어졌다. 경종을 압박하는 사건이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청의 사신이 숙종의 치제(致祭)를 위해 왔는데 “세자(世子:경종)와 그 아우 등을 만나보겠다”는 말이 있었다. 사신이 국왕의 동생을 만나겠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소론으로 갓 우의정이 된 조태구(趙泰<8008>)는 사신의 국왕 동생 면담은 사리에 어긋나는 실례(失禮)이므로 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큰 논란이 되는 와중에 영의정 김창집은 연잉군의 신상에 관한 자료를 사신에게 주었고 사신은 이를 문서로 만들었다.

“조선국 세자(경종)는 금년에 33세인데 자녀가 없고, 동생이 있는데 금년 27세로서 군수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모친은 최씨이고 현재 자녀가 없다.”(『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김창집이 조태구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 사신에게 왕제(王弟)의 신상을 적어 준 것은 큰 물의를 낳았다. 『숙종실록』 사신(史臣)은 김창집의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저들이 비록 입으로는 황지(皇旨:황제의 지시)라고 일컬었으나 칙서(勅書)에는 이런 말이 없었으니, 우리가 만약 황지에 없는 말은 사신(使臣)이 물을 바가 아니라고 사리에 의거해 엄하게 거절했다면 저들도 반드시 이치에 굽혀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김창집은 이렇게 하지 않고 그들의 말만 따라 임금에게 품지(稟旨)도 하지 않고 독단으로 써 주었다. 김창집은 수상(首相)의 몸으로 국가에 욕을 끼치고 저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청나라 사신들은 왜 관례를 깨고 연잉군을 보겠다고 나섰을까. 『숙종실록』의 사신(史臣)은 “혹자는 ‘이이명이 사신으로 갈 때 은화(銀貨)를 많이 가지고 가서 저 나라에 뇌물을 주었다’고 말한다”고 그 배경을 시사했다. 이이명이 청나라에 가서 막대한 뇌물을 써서 청나라가 연잉군을 지지하는 것처럼 일을 꾸몄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사신(史臣)은 “이는 비록 의심하고 저해(沮害)하는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무렵 호차(胡差:청나라 사신)가 거짓으로 황지(皇旨)를 빙자해 전례가 없던 일을 발설했으니, 인심의 놀람과 의혹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라며 이이명에게 원인 유발의 책임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경종에 대한 노론의 압박이 계속되자 경종 즉위년 12월 11일 충청도의 유학 이몽인(李夢寅) 등이 상소문을 들고 상경해 대궐문에 엎드렸다. 병조의 당상과 낭청이 꾸짖으며 입궐을 막자 이몽인 등은 도끼와 상소문을 들고 궐문으로 난입했다. 병조에서는 군졸을 시켜 소함(疏<51FE>:상소문을 넣은 상자)을 깨뜨리고 소본을 찢어버린 뒤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이몽인 등 세 사람을 옥에 가두었는데, 『경종실록』은 “김창집이 먼저 계책을 쓴 것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몽인 등의 상소는 장희빈을 죽인 것이 숙종의 큰 업적이라고 주장한 윤지술에 대해 인륜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하고, 청나라 사신에게 연잉군의 신상을 써준 김창집의 행위도 크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당의통략』은 이몽인이 “독대(獨對)한 대신이 6만 냥을 훔쳐갔다”고 비난했다고 전하는데 이이명이 이 6만 냥으로 청나라 사신을 매수했다는 비난이었다. 노론이 경종을 내쫓고 연잉군을 세우려 한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은 소두(疏頭:상소문 우두머리) 이몽인과 소하(疏下) 심득우(沈得佑)·조형(趙瀅) 등에게 곤장을 친 후 변방으로 충군(充軍)하거나 유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경종은 모든 일에 노론의 뜻을 따랐지만 노론은 경종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않았다.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것만이 자당의 이익을 영구히 보존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할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경종 1년(1721) 8월 20일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71BD>)의 상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33세 임금을 굴복시킨 ‘한밤의 날치기’ / 연잉군, 왕세제 옹립
과정과 결과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면 결과의 정당성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 노론은 ‘경종 축출과 연잉군(영조)’이라는 당론을 결정했는데 노론의 당력은 그만큼 막강했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몰아내고 특정 인물을 추대하려는 구상은 심한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눈이 먼 노론은 이를 강행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내에 있다. 왼쪽으로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능이 보인다. 인원왕후는 원래 소론가였으나 남편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다.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한다는 인원왕후의 수찰을 받아 쿠데타의 안전판으로 삼으려 했다.
경종 1년(1721) 8월 20일 사간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71BD>)가 상소를 올린 것이 신호탄이었다. 이정소는 “지금 우리 전하께서 춘추가 왕성하신데도 아직 저사(儲嗣: 왕의 후계자)가 없으시다”면서 경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지적했다. 이정소의 상소는 곧바로 핵심을 파고들었다.

“방금 국세는 위태롭고 인심은 흩어져 있으니 마땅히 나라의 대본(大本: 세자)을 생각하고 종사의 지극한 계책을 꾀해야 하는데도 대신들은 아직껏 이를 청하지 않으니 신은 이를 개탄합니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동 마북동에 있는 유봉휘 청덕애민비. 유봉휘가 용인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해 숙종 31년(1705) 새긴 것인데 영조 즉위 후 유배갔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남아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아들이 없는 임금에게 건저(建儲: 세자를 세움)를 청하지 않았다고 대신들을 꾸짖는 상소였다. 잘 짜인 한 편의 각본이었다. 정6품 사간원 정언이 발의하면 배후의 대신들이 처리에 나선다는 각본이었다. 아들이 없는 33세의 임금에게 후사를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임금으로 모실 의중의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태종 때 같으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일이었지만 이때는 달랐다. 이정소 독단으로 올린 상소가 아니었다. 이정소는 ‘경종 축출과 연잉군(영조) 추대’라는 노론 당론을 야당 몰래 기습 발의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었다.

이정소는 “사직의 대책(大策: 세자 결정)을 정하시는 것이 억조(億兆) 신민의 엄숙한 소망(<9852>望)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억조 신민이 아니라 노론만의 ‘엄숙한 소망’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무력화시키려는 이 상소에도 경종은 ‘대신들과 의논해서 품처하라’고 심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노론은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경종수정실록』의 이 날짜 기록은 인현왕후의 오라비 민진원(閔鎭遠)의 입을 빌려 경종 즉위 직후부터 ‘건저(建儲) 의논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호조판서 민진원은 ‘즉위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건저 하면 의혹이 생길 것’이라면서 국상이 끝나는 3년 후에 의논하자고 주장했고 영의정 김창집도 동조했다는 것이다.

국상 중에는 부부관계도 자제해야 했기에 3년 후를 기약한 것이었으나 병조판서 이만성(李晩成) 등은 ‘당장 의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년 후’와 ‘지금 당장’으로 갈라졌던 노론 내부는 이정소의 상소가 나오자 바로 통일되었다. 이날 김창집이 빈청(賓廳: 회의 장소)으로 가면서 민진원에게 “3년 뒤에 하려고 했는데 이미 말이 나왔으니 극력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자 민진원은 이렇게 답한다.

“이 의논이 이미 나온 후에는 한 시각도 지연할 수 없으니 반드시 오늘 밤에 극력 진달해서 대책(大策)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지연된다면 종사의 변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경종수정실록』 1년 8월 20일).”

아들 없는 임금의 후사를 ‘반드시 오늘 밤’에 결정해야 한다는 말은 ‘3년 운운’이 노론의 계획적인 쿠데타라는 비난을 희석시키기 위한 면피용 수사에 불과했음을 말해준다. 훗날 이정소의 집은 서덕수·김창도·김성행 등 경종을 죽이려 한 혐의로 사형당한 노론 대신들의 아들·조카들의 단골 회의 장소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서도 계획적 쿠데타임을 말해준다. 숙종이 재위 14년 만에 후궁 장씨에게서 난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인현왕후가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극력 반대했던 노론이었다. 그때 인현왕후는 스물둘인 반면 이때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노론은 ‘이날 밤 안으로 후사 결정’이란 당론 관철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일단 궁궐문을 닫지 못하게 유문(留門)시켰다.

『경종실록』의 사관(史官)이 “당일 대신들은 조정에 모여 발의하지 않았고, 또 교외(郊外)에 있는 대신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라고 전하는 대로 소론 대신들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 변란이라도 일어난 듯 밤 2경(二更: 오후 9~11시)에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호조판서 민진원, 병조판서 이만성, 형조판서 이의현 등 노론 대신들이 급히 면담을 요청했다. 소론에 속한 우의정 조태구, 이조판서 최석항 등은 배제되었다. 시민당(時敏堂)에서 경종을 만난 노론 대신들은 빨리 후사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 승지 조영복(趙榮福)은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니, 속히 윤종(允從)하소서”라고 가세했다.

경종은 “윤종한다”고 수락했으나 김창집과 이건명은 ‘자전(慈殿: 대비)의 자지(慈旨: 대비의 지시)가 있어야 봉행할 수 있다’면서 대비 인원왕후의 수필(手筆)을 얻어오라고 요구했다.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대비까지 끌어들여 사후 안전판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경종실록』은 “임금이 대내(大內: 대비전)로 들어갔는데 오래도록 나오지 않자 김창집 등이 승전 내관을 불러 구계(口啓: 말로 아룀)로 임금을 재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의통략』은 “김창집 등이…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인원왕후 김씨는 소론 김주신(金柱臣)의 딸이었으나 김주신이 국구(國舅: 국왕의 장인)가 된 후 당색을 멀리했으며, 인원왕후도 남편 숙종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지만 소론 편을 들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경종은 날이 밝아 새벽 누종(漏鍾: 물시계)이 친 후 낙선당(樂善堂)에서 다시 노론 대신들을 만났다. 경종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봉서(封書)는 여기 있다”고 말하자 김창집이 뜯어보니 대비의 친필 두 장이 있었는데 한 장은 해서(楷書)로 ‘연잉군(延<793D>君)’이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한 장은 한글 교서였다.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은 다만 주상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소? 내 뜻은 이와 같음을 대신들에게 하교함이 옳을 것이오.”

『경종실록』은 “여러 신하들이 다 읽어보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밤의 날치기가 성공한 데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만백성과 소론은 전혀 모르는 가운데 하룻밤 사이에 차기 국왕이 연잉군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노론이 축제 분위기에 싸여 있던 8월 23일 소론의 행(行: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붙는 말) 사직(司直) 유봉휘(劉鳳輝)가 상소를 올려 문제를 제기했다.

“나라에 있어 건저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한강 밖에 나가 있는 시임(時任: 현직) 대신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처음 불러서 나가지 않은 사람은 다시 부르지도 않고…(『경종실록』 1년 8월 23일).”

먼저 절차상의 잘못을 지적한 유봉휘는 노론이 내세운 논리의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 전하께서는 중전을 다시 맞이하셨으나 약을 드시며 계속 상중에 계셨으니 후사(後嗣)의 있고 없음을 아직 논할 수도 없습니다. 전하의 보산(寶算: 나이)이 한창 젊으시고 중전께서도 겨우 계년(<7B53>年: 15세)을 넘으셨으니 나중에 종사(<87BD>斯: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의 경사가 있기만을 바라는 것이 온 나라 신민들의 엄숙한 소망(<9852>望)입니다.”

유봉휘는 ‘병환이 있다면 의약에 정성을 쏟아야 하지만 이를 신경 쓴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의약은커녕 병이 있는 임금에게 철야를 시킨 노론이었다. “비록 그 성명(成命)은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군부를)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이하의 범죄를 저지른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謝過)해야 합니다(『경종실록』 1년 8월 23일).”

그러자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유봉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창집 이하 대신들은 늦은 밤까지 청대해 국청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종실록』 사관이 “그(유봉휘)의 뜻은 김창집 무리들이 경종에게 무례했기에 스스로 경종을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평하면서 유봉휘도 당론에 따른 것이라는 양비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노론의 행위는 명백한 쿠데타였다. 노론은 일제히 유봉휘의 처벌을 주청했는데 『경종실록』은 그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때 삼사(三司)는 날마다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고, 대신은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엄한 국청을 열어야 한다고 계청했으며 종실(宗室)과 관학(館學: 성균관) 유생들도 상소했다. 화색(禍色)이 날로 급해졌는데도, 유봉휘는 의금부 앞 거리에 짚자리를 깔고 대명(待命: 명을 기다림)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도성 사람들이 다 모여서 구경했다고 한다(『경종실록』 1년 8월 25일).”

이때 소론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를 올려 ‘그 뜻만은 나라를 위하는 붉은 마음(赤<5FF1>)으로 결코 다른 마음이 없었다’면서 유봉휘의 국문을 반대했고, 경종이 “경의 차자를 보니 국청 설치를 명한 것이 잘못임을 알겠다”고 받아들였다. 유봉휘는 사지(死地)에서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연잉군의 세제 책봉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노론은 두 달이 채 못 된 경종 1년(1721) 10월 10일 경종을 무력화시킬 두 번째 정치 일정에 들어갔다.
대리청정 요구 노론에 소론 중용으로 ‘반격의 칼’ / 신축환국
노론이 경종 축출과 연잉군 추대의 당론을 정한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이 국왕을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곧 역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론은 강한 당세를 믿고 이런 당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권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젊은 국왕을 공개적으로 내쫓으려는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김일경 단소(壇所:시신 없이 고인을 기리는 특별한 장소). 경북 예천군 감천면 내성천 근처에 있다. 김일경은 노론 4대신을 4흉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면서 사형당하게 된다.
노론이 한밤의 기습 날치기로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만든 지 한 달 반쯤 지난 경종 1년(1721) 10월 10일. 노론은 두 번째 정치일정을 시작했다. 사헌부 집의 조성복이 상소를 올려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조성복은 세제가 “서정(庶政)을 밝게 익히는 것이 당면한 급무”라면서 경종이 모든 국사를 처리할 때 세제와 그 가부를 상확(商確:서로 의논해 정함)하라고 주청했다. 조성복은 또한 이 일에 대해서도 “자지(慈旨:대비의 교지)를 청하라”면서 대비를 또 끌어들였다. 1년 전 유학(幼學) 조중우가 장희빈의 명호(名號)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상소했을 때 ‘신자(臣子)가 어떻게 이런 말을 제멋대로 입 밖에 낼 수 있느냐’고 성토해 국문을 받고 죽게 만든 장본인이 조성복이었다. 신자 운운하던 조성복이 국왕의 왕권을 빼앗으려 나선 것이었다.

이 놀라운 상소에 경종은“진달한 바가 좋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즉각 수락했다. 경종은 당일 저녁 비망기를 내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년 이래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며 “세제는 젊고 영명하니 만약 청정한다면 국사(國事)를 의탁할 수 있고, 내가 편안하게 조양(調養)할 수 있을 것이니 크고 작은 국사를 모두 세제에게 재단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승지 이기익(李箕翊), 응교(應敎) 신절(申<6662>) 등이 즉시 청대해 반대했다.

경종의 친필.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의 효사(爻辭)를 풀이한 글이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지 겨우 1년이고 춘추가 한창이시며, 또 병환도 없고 기무(機務)도 정체되지 않고 있는데 어찌 갑자기 이런 하교를 하십니까? 신 등은 비록 죽을지라도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

서른셋의 국왕에게 스물일곱의 세제를 대리청정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이기익 등은 “지금 대궐문이 이미 닫혔기 때문에 이처럼 고요하지만 조정이 장차 반드시 함께 일어나서 힘써 다툴 것이니 온 나라의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예견했다. 노론은 세제 책봉 때처럼 저녁을 이용해 상소를 올렸는데 이번에는 소론도 무작정 당하지는 않았다. 좌참찬 최석항이 유문(留門:궁문 개폐를 막는 것)하며 입대를 요청한 것이다. 『당의통략』은 ‘승지 이기익이 깊은 밤이라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최석항이 강요해 임금에게 아뢰자 특명으로 접견했다’고 전한다. 최석항이 눈물을 흘리며 환수를 호소하자 경종은 명을 거두었다. 소론은 연일 조성복을 공격해 진도로 귀양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종은 대리청정 명을 환수한 지 사흘 뒤 시·원임대신과 2품 이상 고위 신료, 삼사를 소집해 다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 느닷없는 명령에 소론과 노론 모두 당황했다. 경종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흘간의 정청(庭請:백관이 특정 사안의 전교를 기다리는 것)에도 경종이 명을 거두지 않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연명 차자를 올렸다. 이 소식에 놀란 소론 우의정 조태구가 선인문(宣人門)으로 달려가 청대를 요청했는데 승지 홍석보(洪錫輔)와 조영복 등이 ‘조태구는 탄핵을 받았으므로 들어갈 수 없다’면서 면담 주선을 거부했다. 세제 책봉을 비판한 유봉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갑자기 경종이 “우상(右相)이 왔다고 하니 들어와 보게 하라”고 입시를 명했다. 승지들은 할 수 없이 만남을 주선했는데 영의정 김창집도 따라 들어가 조태구와 함께 명의 환수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리청정 명은 환수되었다. 『경종실록』 사관이 “이때 김창집·이건명 등이 주상으로 하여금 정무를 놓게 만들려고 조성복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고 상시(嘗試:속마음을 떠봄)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고 비판한 대로 노론이 경종을 쫓아내려 한다는 사실만 만천하에 공포한 셈이었다.

경종을 쫓아내고 세제(연잉군)를 추대하려는 노론의 정치 행위에 반발이 일었다. 행 사직(行司直) 박태항 등은 상소에서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안다(其心所在, 路人所知)’고 조소했다. 그러나 현실은 노론의 것이었다. 행사과(行司果) 한세량이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라면서 “남의 신하가 되어서 감히 몰래 천위(天位:왕위)를 옮길 계책을 품었다”고 공격하자 승정원과 노론 대신들이 일제히 공격했고 경종은 그를 절도로 유배 보내야 했다. 국왕을 옹위하면 귀양 가는 상황이었다.

『당의통략』은 승지 홍석보가 “오늘 우상이 온 것을 전하께서 어떻게 아셨느냐”고 재삼 따져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 경종이 대답하지 않자 대간에서는 ‘조태구가 내시와 통해 몰래 뵙기를 청했다’면서 ‘조태구와 내시를 처벌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경종은 “내가 진수당(進修堂)에 앉아 있는데 합문(閤門) 밖에서 길 인도하는 소리를 듣고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을 뿐 내시는 죄가 없다”고 변명해야 했다. 경종은 여전히 노론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 1년(1721) 12월 6일 사직 김일경(金一鏡)을 소두(疏頭:상소의 우두머리), 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정해(鄭楷)·서종하(徐宗廈) 등을 소하(疏下)로 한 연명 상소가 올라왔다. “강(綱)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으뜸이 되고, 윤(倫)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머리가 되는데···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무너짐이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신축소였다.

김일경 등은 “조성복이 앞에서 불쑥 나왔는데도 현륙(顯戮:공개처형)하는 법을 아직 더하지 아니하였고, 사흉(四凶:노론 4대신)이 뒤에 방자했는데도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할 것을 청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했으니, 임금의 형세는 날로 외롭고 흉한 무리는 점점 성합니다…적신(賊臣) 조성복과 사흉(四凶) 등 수악(首惡)을 일체 삼척(三尺)으로 처단해 조금도 용서하지 마소서”(『경종실록』 1년 12월 6일)라고 했다.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 노론을 역당(逆黨)으로 모는 초강경 상소였다. 노론에서는 즉각 총 반격에 나섰고 승지 신사철·이교악 등이 ‘(김일경 등을) 엄하게 통척(痛斥)해 간사한 싹을 끊어 없애고 형벌을 쾌히 베풀어 나라 일을 다행하게 하소서’라고 주장했다. 대부분 김일경 등이 국문 받다 죽거나 절도에 유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경종은 ‘나의 천심(淺深)을 엿본다’고 꾸짖으며 승지들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켰다.

경종은 서소위장(西所<885E>將) 심필기(沈必沂)를 가승지(假承旨)로 삼고, 훈련대장 이홍술(李弘述)을 ‘간흉하고 윤리가 없으며 몰래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서 문외 출송하고 병부(兵符:군사동원패)를 빼앗아 소론 윤취상에게 주었다. 이홍술은 포도대장이던 작년 김창집의 사주를 받아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때려죽이고도 훈련대장으로 승진한 노론 무관이었다.

병조판서에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한 소론 최석항을 임명해 군사권을 모두 소론에게 넘긴 경종은 이조판서 권상유(權相游)를 남인 심단(沈檀)으로, 이조참판 이병상(李秉常)을 소두 김일경으로 삼아 인사권을 주었다. 은인자중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경종이 반전의 칼을 뽑은 것이었다. 후속 조치는 전광석화 같았다. 신축소의 소하(疏下) 박필몽을 사헌부 지평(持平), 이명의를 사간원 헌납(獻納), 이진유(李眞儒)를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삼아 백관에 대한 탄핵권을 주었다. 예조판서 이광좌, 형조판서 이조, 호조판서 김연, 대사간 양성규, 도승지 이정신 등 소론들을 대거 등용해 정국을 순식간에 뒤엎었다. 이것이 소론이 일거에 정국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인데, 당일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했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공묵(恭默)하여 말이 없고 조용히 고공(高拱:방관함)해서 신료를 인접(引接)하여 더불어 수작하지 않고 군하(群下)의 진달하고 계품하는 것을 모두 허락하니, 흉당(凶黨)이 오만하고 쉽게 여겨 꺼리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중외에서 근심하고 한탄하며 질병이 있는가 염려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천자가 정사를 스스로 재결함)을 크게 휘둘러 군흉(群凶)을 물리쳐 내치고 사류(士類)를 올려 쓰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했으므로, 군하가 비로소 주상이 숨은 덕을 도회(韜晦:재덕을 숨기어 감춤)함을 알았다.”(『경종실록』 1년 12월 6일)
극적인 반전으로 경종의 친정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경종 시해 시나리오 ‘목호룡 고변’으로 발각 / 노론 4대신
최소한의 공존의 틀마저 무너뜨리면 상대방만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다. 작용이 반작용을 부르는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론이 경종 제거를 당론으로 삼아 실행에 옮긴 것은 왕조국가에서 각 당파가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틀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이 무리한 처사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수많은 비극이 양산되었다.
왼쪽부터 ‘노론 4대신’인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초상. 노론 영수인 이들은 경종을 제거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던 노론 당론을 추진하다 목호룡 고변 사건으로 모두 사형당했다. 영조가 즉위한 후 모두 복관되는데 노론 쪽에서는 이를 신축·임인년에 발생한 선비들의 화(禍)라는 뜻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렀다.
노론에서 경종을 끌어내고 연잉군(영조)을 추대하려는 시나리오를 짜던 경종 1년(1721) 여름은 가뭄 끝에 태풍이 덮쳐 기근이 우려되던 때였다. 좌의정 이건명은 이를 임금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했다.

“임금 사복(嗣服:즉위) 초에 작은 흠도 없는 정사를 펼쳤음에도 근래 드물게 큰 가뭄과 풍재(風災)가 심했고, 궁궐의 정문(正門)도 무너졌으니, 이는 인자하신 하늘의 경고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경종실록』1년 7월 20일)

경종이 묻힌 의릉.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고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95년 안기부가 옮겨 간 뒤 다시 일반에게 공개됐다.
정작 임금에게는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생과는 무관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밀어붙인 정당이 노론이었다. 왕세제 책봉은 성공했으나 대리청정 기도가 실패하고 되레 김일경의 ‘신축소’로 정권이 소론으로 넘어가면서 정국은 폭풍전야처럼 긴장되었다. 드디어 경종 2년(1722) 3월 27일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긴장을 깨면서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성상(聖上)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왕을 쫓아냄)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경종실록』 2년 3월 27일)
이것이 삼급수(三急手) 고변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목호룡 고변 사건이다. 삼급수란 칼, 독약, 폐출의 세 가지 수단을 동원해 경종을 죽이거나 내쫓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 중 대급수(大急手)는 숙종의 국상 때 자객을 궁중으로 보내 세자(경종)를 죽이는 것이고, 소급수(小急手)는 은(銀) 500냥을 궁중의 지상궁(池尙宮)에게 주어 경종의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는 것이고, 평지수(平地手)는 숙종의 유조(遺詔)를 위조해 경종을 폐출시키는 것이었다. 목호룡은 이들이 만든 교조(矯詔:위조된 숙종의 교서)에 ‘세자(世子) 모(某:경종)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구절이 있는 것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목호룡의 말대로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내용들이었다. 더구나 목호룡은 당초 이 모의에 깊숙이 가담했던 인물이란 점에서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臣:목호룡)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虎口)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하는 것입니다.”(『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은 남인가의 서자로서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였는데, 감여술(堪輿術:풍수지리)에 능해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정해 준 대가로 속신(贖身)돼 왕실 소유의 장토(庄土)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당초 연잉군 쪽에 줄을 섰다가 세제 대리청정 기도가 실패하고 신축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고변 쪽으로 돌아섰다. 이 사건에 가담했다고 목호룡이 고변한 인물들은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자 이이명의 조카인 이희지(李喜之),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민택(金民澤), 김만중의 손자이자 이이명의 사위인 김용택(金龍澤), 김춘택의 사위 이천기(李天紀) 등 노론 명가자제가 대부분이었다. 자제들이 하는 일을 부모들은 몰랐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긴장은 더했다.

목호룡은 용문산에 들어가 묏자리를 구하다가 이희지를 만났고 그를 통해 이기지·김용택 등을 만났다고 진술했다. 이기지·이희지 등은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참으며 혐의를 부인하다 맞아죽는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고, 고문을 못 이겨 “지상궁을 통해 독약을 쓰는 것이 소급수”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죽은 김용택 같은 인물도 있었다. 목호룡은 이들 자제뿐만 아니라 이이명까지 직접 끌어들였다.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심사(心事)를 표현하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다른 사람들은 신(信)·의(義)자 등을 썼는데 백망(白望)은 양(養)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천기만 그 뜻을 알고 크게 웃었는데, 이는 이이명의 자(字)인 양숙(養叔)을 뜻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이이명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은 목호룡의 의도된 과장이겠지만 이이명은 결국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해야 했다.

그가 사형당하던 경종 2년 4월 17일자 실록의 사관은 “이때에 이르러 목호룡이 상변(上變)했는데 이희지 등 여러 역적이 모두 이이명의 자질(子姪)과 문객(門客)에서 나오고, 흉모(凶謀)·역절(逆節)이 낭자하여 죄다 드러나자, 온 나라의 여정(輿情)이 모두 분완(憤<60CB>:분노와 탄식)을 품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 43년(1717) 정유독대 이후 그가 경종을 쫓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므로 그의 비극적 죽음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같은 날 영의정 김창집도 사형에 처해지는데, 그는 숙종 15년(1689)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 때 사형당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란 점에서 대를 이은 가문의 비극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건명과 조태채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하는데 이들을 ‘노론 4대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목호룡의 고변 또는 임인옥사인데 사형당한 이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杖殺)된 이가 30여 명,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집안의 몰락을 보다 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도 9명이었다.

이 비극적 사건의 뿌리는 헌정질서에 의해 즉위한 국왕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노론 당론(黨論)에 있었다. 보다 직접적 계기는 세제 대리청정이 무산된 데 있었다. 세제 대리청정이 무산되면서 노론은 반대당파로부터 ‘남의 신하가 되어 천위(天位)를 몰래 옮길 계책을 품었다’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안다’는 공격을 받게 되자 당황했다. 이 난국 타개의 계책을 제시한 인물이 이천기가 ‘진정한 노론의 혈성(血誠)’이라고 불렀던 환관 장세상(張世相)이었다.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정우관(鄭宇寬)은 장세상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자백했다.

“하루는 장세상이 저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청정(聽政)하는 일을 노론이 봉행(奉行)하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아니한 것이다. 장래에 노론은 반드시 씨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를 도모해 얻는 즉시 궁성을 호위(扈<885E>)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제 막 이 일을 서덕수(徐德修)에게 언급하였다.”(『경종실록』 2년 5월 15일)

경종이 세제 청정을 명했을 때 노론 대신들이 우유부단하게 눈치를 보다 시기를 놓쳤다는 비난이었다. 그러면서 환관 장세상이 제시한 방안은 다시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는 비망기를 얻어내 그 즉시 군사를 동원해 궁성을 호위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서덕수는 세제 연잉군의 처제(妻弟:영조 즉위 후 정성왕후의 사촌동생)였는데 그 역시 국문에서 “청정(廳政:대리청정)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노론은 장차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또한 그는 김창집의 재종제 김창도가 “(대리청정을 허용하는 경종의) 비망기가 내려진다면 즉시 궁성을 호위하여 안팎을 엄하게 끊고, 또 상소하여 시끄럽게 다투는 근심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고도 자백해 그 역시 깊숙이 가담했음을 시인했다. 경종의 비망기가 다시 내리면 즉시 군사를 동원해 계엄 상황을 만들어 일체의 상소를 봉쇄하고 대리청정을 강행하면서 경종을 끌어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비망기를 다시 얻어내는 작업은 실패했고 도리어 김일경이 신축소를 올린 날 『경종실록』 사관의 표현대로 경종이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천자가 정사를 스스로 재결함)을 크게 휘둘러’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으로 갈아치우자 거꾸로 목호룡의 고변이 나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임인옥사가 지닌 가장 큰 폭발력은 사건 판결문인 「임인옥안(獄案)」에 세제 연잉군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처제 서덕수가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드러난 데다 서덕수의 추대 제의를 연잉군이 거절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신하가 자신을 임금으로 선택했다는 ‘택군(擇君)’을 수락한 것으로서 역모 가담 혐의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경종이 선왕의 유일한 혈육인 연잉군의 보호를 선택함으로써 겨우 무사했지만 이 사건 이후 연잉군의 처지는 궁박해졌다. 소론 집권하에서 연잉군의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왕에게 毒을 먹이고도 수사망 빠져나간 궁인 / 세가지 의혹
헌정 질서를 무시하는 세력이 권력 장악에 나서면 격렬한 투쟁이 발생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는 권력욕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주는 명분도 이미 사치이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집안에서는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학자들이 정치 현장에서는 시정잡배도 주저할 수단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유교 정치체제는 이렇게 붕괴의 길을 걸었다.
경종의 초상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부터 서인(노론)의 격렬한 반감을 사다가 36세에 급서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무성했다. 초상화에 먹물이 스며든 것은 독살설을 암시한다. 경종의 초상은 전해지는 게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의 초상화와 장희빈의 외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참조해 그린 것이다. 우승우(한국화가)


‘목호룡 고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독약으로 독살하려는 소급수(小急手)가 실제 시도되었다는 자백이 나와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김창집의 친족 김성절(金盛節)이 세 차례의 형문(刑問:고문하며 묻는 것) 끝에, “장씨(張姓) 역관(譯官)이 (중국에서) 독약을 사가지고 왔는데, 김씨 성의 궁인(宮人)이 성궁(聖躬:임금)에게 시험해 썼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자백한 것이다. 이때도 역시 환관 장세상이 등장한다. 김성절은 “장세상이 수라간(水刺間)의 차지(次知: 담당자)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했는데, 김 상궁이 많은 은화를 요구하고는 한 차례 성궁(聖躬)에게 시험해 썼으나 곧바로 토해 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성절은 “이기지(이이명의 아들)의 무리가 ‘약(藥)이 맹독이 아니니, 마땅히 다시 은화를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독약을 사다가 시험해 보았으나 경종이 죽지 않자 더 강한 약을 사오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경종이 독약을 마셨다는 날짜를 『약방일기(藥房日記)』에서 찾아 보니 경종 즉위년(1720) 12월 15일 ‘어제 거의 한 되나 되는 황수(黃水)를 토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입시한 약방제조(提調) 한배하(韓配夏)가 “그날 수라를 진어(進御)하신 뒤에 즉시 구토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경종은 “그렇다”라고 답했다. 그날의 구토가 독약이 든 음식이 든 결과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독살하려 한 노론의 정치행위는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노론 당인(黨人)들은 국왕보다 노론이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은 우홍채(禹洪采)에게 “노론은 천지와 더불어 무궁한 길이 있다(老論有與天地無窮之道)”라고 말했는데 국왕은 유한해도 노론은 영원하다는 이런 자신감이 비정상적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한 원동력인지도 몰랐다.

이상한 것은 경종의 태도였다. 당초 국청(鞫廳)에서 독약을 올렸다는 김성(金姓:김씨 성) 나인의 조사를 요청하자 당연히 허용했다가 돌연 “김성 궁인을 조사했으나 그런 인물이 없었다”면서 수사를 중지시킨 것이다. 국청에서 계속 사사를 요청하자 “나인을 조사해 밝히는 것(査出)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노론(老論)을 타도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니 앞으로 이런 문자는 써서 들이지 말라(『경종실록』 2년 8월 18일)”고 거부했다. 독살 기도 사건이 노론 타도 계책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경종실록』의 사관은 “인정(人情)이 독약을 쓴 궁녀를 찾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겼는데, 뜻밖의 비답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의혹해 했으나 그 단서를 알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숙종 43년(정유년) 북경에 갔다 온 역관 중에 장씨 성의 역관이 없자 국청에서 김성절을 다시 추궁했는데 그는 진짜 범인(元犯人)은 ‘역관 홍순택(洪舜澤)’이라고 지목했다. 지난해 이이명의 집에 갔을 때 이희지와 역관 홍순택이 뒷방에서 나누는 밀어(密語)를 들었다는 것이다.

“홍순택이 이희지에게 ‘약값이 부족해서 내가 자비(自費)로 많이 보탰다고 말하자, 이희지가 ‘일이 성사되면 그대가 자비로 낸 돈을 어찌 보상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 앉으니 이희지는 즉시 말을 중지했는데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

김창집의 서종형제(庶從兄弟) 김창도(金昌道)의 사돈 이정식(李正植)도 “김창도가 약을 쓸 곳을 말했는데 곧 상궁(上躬:임금)을 가리켰습니다”라고 자백했고, 김창도는 “홍성(洪姓) 역관에게 약을 사서 장세상에게 들여보냈다”고 시인했다. 또한 왕세제의 처사촌 서덕수가 모두 이 흉모에 동참했다고 자백했다. 역관 홍순택은 부인했으나 그가 북경에 갈 때 데려갔던 종 업봉(業奉)은 ‘북경에서 계란만 한 황흑색(黃黑色)의 환약(丸藥) 두 덩이를 구입했다’고 자백했다. 이처럼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경종은 김성(金姓) 나인에 대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해를 거듭 넘기면서까지 계속 요구했으나 경종은 거부했다.

그러던 경종 4년(1724) 4월 인원왕후 김씨가 이 사건을 거론하고 나섰다. 숙명공주(淑明公主)의 아들 심정보(沈廷輔)의 아내 이씨에게, “김성 궁인이 진실로 의심스럽다면 주상께서 어찌 불허하겠는가? 나 역시 어찌 분명히 조사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궁중에 실지로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것이다(『경종실록』 4년 4월 24일)”라고 말했다. 이는 경종의 수사 중지 지시가 대비의 압력 때문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삼사는 계속 수사를 요청하고 경종은 거부하는 사이 경종은 약방(藥房:내의원)의 입진(入診)을 받게 되었다. 경종 4년 8월 초부터 한열(寒熱)에 시달렸고, 설사 기운이 동반되었다. 한열 때문에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는 가운데 시령탕(柴<82D3>湯), 육군자탕(六君子湯) 등 여러 처방이 올려졌으나 환후가 허하고 피로가 중첩되었다.

그러던 8월 20일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 밤 경종은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서 의관을 불러 입진했다. 그런데 그날 밤의 흉통(胸痛)과 복통(腹痛)이 그날 낮에 있었던 의문의 사건 때문임이 드러났다.

“여러 의원들이 어제 게장(蟹醬)을 진어하고 곧이어 생감(生<67FF>)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8C49>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했다.(『경종실록』 4년 8월 21일)”

의가에서 금기로 치는 게장과 생감을 와병 중인 임금에게 진어했다는 것이다. 훗날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 때 신치운(申致雲)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따지자 영조가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게장과 생감을 보낸 인물이 대비 인원왕후이고 이를 진어한 인물이 세제(영조)라는 주장이었다. 경종이 게장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식사를 했는데 다시 생감을 올리려고 하자 어의들이 서로 상극이라며 반대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올렸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어의들은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두시탕(豆<8C49>湯)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처방했으나 복통과 설사는 더욱 심해졌고 22일에는 황금탕(黃芩湯)을 올렸으나 역시 효과가 없었다. 24일에도 세제는 처방을 두고 어의 이공윤(李公胤)과 다투었다. 『경종실록』은 이공윤에 대해 “그의 의술은 대체로 준리(峻利:강한 처방)를 위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8월 24일 세제가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라”고 명하자 이공윤이 “내가 진어한 약을 복용하신 후 삼다(蔘茶)를 진어하면 기를 운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기를 운행하지 못한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세제가 이공윤을 꾸짖었다.

“사람이 본래 자기 견해를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려고 삼제(參劑)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인가.(『경종실록』 4년 8월 24일)”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제는 인삼과 부자를 올렸고 경종은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지는 등 증상이 개선되는 듯하다가 다시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그날 새벽 3시쯤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4년2개월, 만 36세의 한창 나이였다. 대비가 옹호한 김성 궁인의 독약 사건, 대비전에서 올렸다는 게장과 생감, 어의와 다투어가며 올린 인삼과 부자, 이 세 사건은 모두 경종의 죽음과 일련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대비와 연잉군이 경종을 살리기 위해 게장·생감·인삼·부자를 올렸는지, 아니면 죽이려고 올렸는지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어한 것은 의혹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경종이 사망한 후 약방도제조 이광좌는 “신이 어리석고 혼미하며 증세와 환후에 어두워서 약물을 쓰는 데 합당함을 잃은 것이 많았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울며 자책했다.

그러나 세제의 태도는 달랐다. “병환을 시중드는데 무상(無狀)하여 이 지경에 달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도는 비록 때가 지났으나 속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왕이 위독하면 산천에 기도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때까지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위독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갑자기 증세가 악화되어 산천에 기도할 틈도 없이 사망한 것이었다. 이렇게 경종의 시대가 끝나고 영조의 시대가 열렸지만 경종 시대의 유산이 계속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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