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예종

싯딤 2010. 1. 18. 12:08

독살설의 임금, 예종 / 쿠데타의 업보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같은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태종은 공신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 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예종은 이 공신 집단을 해체하지 않는 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예종이 왕 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양자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육신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의 시신을 몰래 이장하면서 조성되었다. 세자 예종은 공신들의 노리개로 떨어진 사육신 가족들을 석방시켜야 세조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중기의 역관 조신(曺伸)이 쓴 『소문쇄록』에는 세조와 한명회·신숙주가 함께한 술자리 이야기가 나온다.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으면서 자신의 팔도 잡으라고 말했는데 신숙주가 힘껏 잡는 바람에 세조는 “아프다. 아프다(疼疼)”라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를 본 세자의 낯빛이 변하자 세조는 세자의 이름(晃:황)을 부르며 “나는 괜찮지만 너는 이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밤이 늦어 귀가한 한명회는 청지기를 신숙주의 집으로 보내면서 “범옹(泛翁:신숙주)이 평일에 많이 취했어도 술이 조금 깨면 반드시 일어나 등불을 켜고 책을 본 후 다시 취침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즉시 잠을 자라고 전하게 시켰다. 청지기가 보니 과연 신숙주는 책을 보고 있기에 한명회의 말을 전했다.

소문쇄록은 “임금이 술이 깨자 내시를 보내 신숙주의 집을 살펴보았더니 과연 잠을 자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술이 취했는지 일부러 그랬는지 의심해 내시를 보낸 것이다. 이 일화는 세조 정권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쿠데타로 즉위한 세조는 권력을 공신 집단과 나눌 수밖에 없는 모순에 처해 있었다. 더구나 상왕 단종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이 발생하자 세조는 공신 집단과 더욱 강하게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육신의 사당인 의절사 숙종 7년(1681)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으며, 정조 6년(1782)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사육신은 정조 때 국가 제사 대상인 배식단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급기야 세조는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면서 공신들을 법 위에 있는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왕조 국가의 기본질서인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이로써 무너졌다. 세조는 사망 1년 전인 재위 13년(1467)에 원상제(院相制)를 실시했다. 백옹(白<9852>)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원상제의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을 실세 공신들이 장악하게 한 것이니 왕권이 둘로 나뉜 셈이었다.

세조 후반으로 갈수록 공신들의 권한은 더욱 강해져 재위 14년(1468) 3월에는 “분경(奔競)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이었다”면서 분경까지 허용했다. 분경은 인사청탁인데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라고 호도하며 공신들에게 관직 매매를 허용한 것이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은 이렇게 국가의 기본적인 공적 체제마저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조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한명회가 세웠다는 한강가의 압구정.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은 현실의 권력을 누렸으나
조선시대 내내 시비에 휘말렸다. 간송미술관 제공
재위 14년 7월 19일. 세조는 고령군(高靈君) 신숙주, 능성군(綾城君) 구치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 등 공신들을 불렀다.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변 직후 책봉한 정난(靖難)공신, 단종을 쫓아내고 즉위한 직후 책봉한 좌익(佐翼)공신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병석의 세조가 “내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모든 공신이 “전하께서는 곧 병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습니다”라고 반대했다. 국왕이 전위하고자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관례지만 반대의 또 다른 요인은 세자와 권력 분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었다. 세조와 공신들이 함께 다스리는 집단 지도체제를 세조 사후에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했다. 공신들은 세자 즉위 후 자신들의 권력이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을 왕권 강화 지시로 해석한 세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신들이 전위에 반대하자 세조는 대신 대리청정을 시켰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리청정과는 달리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행랑)에서 고령군 신숙주, 영의정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제한적 대리청정이었다.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계기로 형성된 구공신(舊功臣:정난·좌익공신)의 대표이고 이준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新功臣:적개공신)의 대표였다.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이 구공신의 핵심이고, 이준·남이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대리청정을 맡게 된 세자는 부왕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예종의 「지장(誌狀)」에는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이 나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에 있어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왕의 병을 낫게 하려면 하늘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대사령(大赦令)이었다. 세자는 대리청정 다음 날 대사령을 내려 7월 20일 이전의 죄는 대역(大逆)·모반(謀叛), 조부모·부모 살해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했다. 그러나 세조의 병은 차도가 없었고 세조는 8월 1일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에게 수릉(壽陵)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무덤이 수릉인데 『세조실록』은 이때 “세조가 눈물을 뿌렸고, 이 사실을 들은 여러 재추(宰樞:재상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권력무상의 회한인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생의 애착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대사령을 내린 지 한 달여 만인 8월 27일 다시 대사령을 내렸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세자는 납부하지 못한 세금을 탕감하거나 깎아주고 내전(內殿)에 불상을 모셔놓고 기도도 올렸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여서 9월 들자 병세가 악화되는 가운데 황충(蝗蟲)이 추수를 앞둔 들판을 습격하고 혜성까지 나타났다.

드디어 세자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세조가 만든 업보(業報)를 푸는 것이었다. 계유정변과 상왕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석방하는 문제였다. 16년 전인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변 때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고, 13년 전인 세조 2년(1456)의 사육신 사건 때는 성삼문·유응부 등의 가족들을 나누어 가졌다.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 집의 여종이 되고 성 노리개가 된 이들의 원한을 풀지 않고서는 대사령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자는 그해 9월 3일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정인지·정창손·신숙주·한명회·홍윤성·김질 등의 공신들은 계유정변 관련자 친족들의 방면(放免)은 찬성했으나 사육신 사건 관련자 친족들에 대해서는 “병자년(丙子年:세조 2년)의 난신(亂臣)의 일은 세월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급히 논(論)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세자는 “만약 난신에 연좌된 자를 모두 방면한다고 하면 어찌 세월의 오래되고 가까운 것을 논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사육신 사건 관련자의 친족들도 모두 방면하자는 뜻이었다. 세자는 “공노비가 된 자는 석방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공신에게 나누어준 자도 방면한다면 대신들이 싫어할까 염려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세조실록』 14년 9월 3일)”라고 덧붙였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는 괜찮지만 공신들의 재산으로 전락한 사육신의 친족들을 석방하려고 하면 공신들이 싫어할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자 사위 김질에게 사육신 사건을 고변시켰던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방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세자는 계유정변과 사육신 사건 피해자의 친족 일부를 석방했는데 그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좌익 3등 공신 좌의정 박원형(朴元亨)은 동부승지 한계순에게 계유정변 때 사형당한 양옥(梁玉)의 누이 의비(義非) 대신 다른 여종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세자는 “일이 이미 의논하여 정해졌는데 되돌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거절했다. 9월 7일 세조는 다시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발표했고 두 달 전처럼 공신들이 반대했으나 세조는 “운이 간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데 너희들이 내 뜻을 어기려고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며 꾸짖었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세조는 이날 면복(冕服)을 직접 세자에게 내려주며 “오늘 당장 수강궁(壽康宮:창경궁)에서 즉위하라”고 명했다. 세조 14년(1468) 9월 7일 세자가 수강궁에서 즉위하니 피로 점철되었던 세조 시대가 가고 예종 시대가 막이 열렸다. 다음 날 세조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전 세자의 후궁이었던 한백륜(韓伯倫)의 딸 소훈(昭訓) 한씨를 왕비로 삼으라고 명했으니 그가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예종은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왕위에 올랐으나 세종과는 전혀 다른 정국이었다. 태종은 숱한 비난을 들어가며 대부분의 공신을 대거 제거해 깨끗한 조정을 물려준 반면 세조는 거대한 공신 집단이란 짐을 고스란히 예종에게 넘겨주었다. 이 짐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예종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계속>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남이의 죽음’ / 新-舊 공신 권력투쟁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에게 공신은 필요악이었다. 재위 후반 세조는 신(新)공신, 구(舊)공신과 삼각 축을 형성했다. 세조는 공신들과 권력을 나눌 수밖에 없는 숙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종은 이를 거부했다. 예종은 신구 공신을 상호 견제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공신들을 직접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이 남이의 옥사였다.

남이 장군 부부 묘와 남이 장군 초상 남이 장군 부부 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왼쪽 사진). 남이의 부인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한 권람의 딸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용산구 용문동 사당에 걸린 남이 장군 초상화다(오른쪽 사진). 매년 10월 1일 사당에서는 남이 장군 대제를 연다. 남이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모셨다.
세조는 사망 넉 달 전인 재위 14년(1468) 5월 공신들과 술을 마시면서 “누가 원훈(元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구훈(舊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신훈(新勳)인가? 귀성군(龜城君)이로다”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구훈은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의 구공신이고, 신훈은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이었다. 진압 사령관이었던 귀성군 이준(李浚)과 대장이었던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국왕과 구공신, 신공신은 권력의 삼각 축이었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 때 한명회와 신숙주가 모반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나오자 둘을 가둔 적이 있었다.

세조는 구공신과 신공신을 적절하게 대립시켜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예종은 현실을 무시하고 ‘모든 권력은 국왕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원칙에 집착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정사(政事:인사권)는 나라의 큰 권한인데, 사사로운 곳으로 돌아가 공(公)을 폐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공신들의 인사 관여를 금지시켰다. 그는 백관의 감찰을 맡는 사헌부 관리를 정청(政廳:인사관청)에 참여시켜 인사 청탁을 뿌리 뽑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자광의 글씨 ‘봄이 오니 강촌에는 일마다 새롭다’며 자연을 노래했던 유자광은 남이를
모함했다는 혐의에다 서자에 대한 질시까지 겹쳐 대대로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앞으로 위장(衛將)이 2부(部)를 거느리고 인사에 대한 모든 분란을 금지하라. 정청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비록 종친·재추(宰樞:재상)·공신일지라도 즉시 목에 칼을 씌워 구속하고 나중에 보고하라. 만약 숨기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족주(族誅)하겠다.”

인사에 관여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구속할 것이며 이를 숨기면 족주(온 집안을 죽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의정 귀성군 이준과 우의정 김질이 함께 나서 “족주하는 법은 너무 과합니다”고 항의했고, 예종은 “족주를 극형(極刑)으로 바꾸어라”고 한발 물러섰다. 신공신 이준과 구공신 김질이 공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공동 대응한 것이다. 그런데 예종은 구공신보다 신공신, 그중에서도 남이를 싫어했다. 세조는 죽기 한 달 전인 재위 14년(1468) 8월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는데,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李廷馨)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세조가 벼슬을 뛰어넘어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더니 당시 세자였던 예종이 그를 몹시 꺼렸다”고 전하고 있다.

예종은 “남이는 병조판서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한명회의 재종형인 중추부지사 한계희(韓繼禧)의 말을 듣고 즉위 당일 남이를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좌천시켰다. 예종 즉위 당일부터 남이에 대한 구공신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공세는 예종 즉위년 10월 24일에 발생했다.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 유자광(柳子光)이 밤늦게 승정원에 나타나 ‘급히 성상께 계달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입직승지였던 한계희의 동생 한계순(韓繼純)은 즉시 예종과 만남을 주선했다. 유자광은 예종을 만나 남이를 고변했지만 모호한 고변이었다. 이날 저녁 남이가 유자광의 집을 방문해 “혜성(彗星)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는데 너도 보았느냐?”고 묻기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세조 와병 때 생긴 혜성은 예종 즉위년에도 사라지지 않아 장안의 화제였으므로 유자광이 보지 못했다는 답변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신(유자광)이 『강목(綱目)』을 가져와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석에 ‘광망(光芒)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친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남이가 탄식하면서 ‘이 또한 반드시 응함이 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혜성의 의미를 『강목』에서 찾아 ‘장군이 반역한다’고 해석한 인물은 남이가 아니라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조금 후에 남이가 ‘내가 거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남이가 기다렸다는 듯 ‘거사’를 말했다는 것인데, 유자광은 “신이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이미 취했다’면서 마시지 않고 갔습니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술기운에 이 말 저 말 했다는 뜻이다. 유자광의 고변은 의문투성이였으나 예종은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한밤중에 자신을 불러낸 거대한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못했다. 예종은 남이가 군사라도 몰고 쳐들어 오는 듯 군사를 동원해 도성을 지키게 하고 한계순에게 남이를 체포하게 했다.

시간은 이미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에 접어들었지만 주요 종친들과 대신들을 수강궁 후원 별전(別殿)으로 급히 모이게 했다. 종친과 대신들이 도열한 가운데 끌려 나온 남이는 왜 끌려왔는지 영문을 몰랐다. “근래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느냐?”는 예종의 질문에 남이는 “‘신정보(辛井保), 이지정(李之楨)과 만나 북방(北方)에 여진족이 준동하면 내가 진압하러 가게 될 것’이라는 등의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또 유자광의 집에 가 이야기하다가 곁의 책상에 『강목』이 있기에 혜성이 나타나는 구절 하나를 보았을 뿐 다른 것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강목』에서 ‘장군이 반역한다’는 주석을 뽑은 유자광이 남이를 반역으로 꾄 혐의가 있었다.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예종은 유자광을 불렀는데 그제야 유자광이 고변자란 사실을 알게 된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이 본래 신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무고한 것입니다. 신은 충의지사(忠義之士)로 평생 남송(南宋)의 악비(岳飛)를 자처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부르짖었다. 악비는 금나라에 맞서 끝까지 싸운 남송 장수로서 한족(漢族)에겐 충의의 대명사였다. 남이가 부인하자 예종은 남이의 측근 무장들을 신문했다.

순장(巡將) 민서(閔敍)는 “남이가 ‘천변(天變:혜성의 출현)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나는 먼저 주륙(誅戮)을 받을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간신이 누구냐’고 묻자 ‘상당군 한명회’라고 답했다. 남이는 세조 사후 구공신 세력이 자신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남이는 ‘왜 한명회를 언급했느냐’는 질문에 “한명회가 일찍이 신의 집에 와 적자(嫡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에 그가 난(亂)을 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고 답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백이었다. 한명회가 말한 적자는 예종이 아니라 고(故)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종은 한마디로 일축하고 남이의 측근 장수들을 계속 고문했다. 그들 대부분이 역모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껏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가 심한 고문 끝에 ‘남이가 국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자백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여진족 출신의 무장 문효량(文孝良)이 혹독한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남이가 ‘산릉에 나아갈 때 중로에서 먼저 한명회 등을 없애고, 다음으로 영순군(永順君)·귀성군에게 미치며, 다음에는 승여(乘輿:임금)에 미쳐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자백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심한 고문 끝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남이는 혐의를 시인하고 같은 신공신인 강순을 당류(黨類)로 끌어들였다. 인조 때 박동량(朴東亮)이 쓴 『기재잡기(寄齋雜記)』나 광해군 때 김시양(金時讓)이 쓴 『부계문기(<6DAA>溪聞記)』에는 강순이 ‘왜 나를 끌어들였느냐’고 따지자 ‘당신이 수상(首相)이 되어 나의 원통함을 알면서도 한마디도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원통히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당여(黨與)를 대라고 심한 매질을 당하던 79세의 노인 강순이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라고 항의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무리수가 많은 옥사였다. 『부계문기』는 아직도 남이가 죽은 죄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예종은 남이·강순·문효량 등을 능지처사에 처하고 남이 계열의 무장들에게 수사를 확대했다. 남이가 여진족 건주위를 칠 때 종사관이었던 조숙(趙淑)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한 충신이 죽는다”고 소리 지르다 죽어갔다. 예종은 “참형된 사람의 부자는 모두 사형으로 연좌하라”고 지시해 그 부친과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 37명의 익대(翊戴)공신을 책봉했다. 1등공신 다섯 명은 유자광·신숙주·한명회·신운(환관)·한계순이었다.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는 한명회·신숙주가 1등 공신에 책봉된 것은 이 옥사의 배경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남이·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 달라고 주청했고 그 재산과 70여 명의 처첩을 익대공신이 나누어 가졌다. 옥사의 배후가 자신임을 드러낸 셈이었다. 남이의 옥사는 구공신의 신공신 토벌작전이었다. 예종은 신공신을 몰락시킴으로써 훗날 구공신이 자신에게 칼을 겨눌 때 견제할 세력을 스스로 제거한 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종이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자 구공신은 반발했다.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개혁은 당위성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명분뿐만 아니라 개혁 대상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고 있어야 성공하는 것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의 해체라는 분명한 개혁 목표와 실천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적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제거한 결정적 하자였다.

신숙주의 영정 이상(理想)을 택한 사육신에 비해 현실을 택한 신숙주의 여유롭고 부귀한 모습이 잘 드러난 영정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시대 내내 사육신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신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보장하는 각종의 정치·경제·사회적 제도를 갖고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관직을 매매하는 분경(奔競)과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면죄(免罪) 특권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공신전(功臣田)과 세금 납부 대행권인 대납권(代納權)이 있었다. 예종은 공신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이런 제도적 장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종은 즉위 초 이런 특권에 손을 댔다. 즉위 직후 종친·공신들의 분경을 금지시키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族誅)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귀성군 이준과 김질의 항의를 받고 본인만 극형(極刑)시키는 것으로 물러섰으나 이후에도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는 사헌부의 서리(胥吏)와 조례(<7681>隷: 관청 소속의 하인)들을 보내고, 무신들의 집에는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드나드는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사헌부 관리들은 예종보다 공신들이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렸다. 반면 무인들은 우직하게 국왕의 명령을 수행했다. 예종 즉위년(1468) 10월 19일 공신들의 집에 드나드는 분경자들을 대거 체포한 것은 무인인 선전관들이었다. 고령군 신숙주의 집에서는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朴徐昌)이 보낸 김미를 체포하고, 우의정 김질의 집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이 보낸 주산(周山)을 체포했다. 귀성군 이준과 병조판서 박중선(朴仲善), 이조판서 성임(成任)의 집을 드나드는 인물들도 체포했다.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 분경하는 것도 선전관이 체포한 것을 지적하면서 “분경을 금하지 못한 것은 사헌부의 책임”이라면서 사헌부 지평(持平) 최경지(崔敬止)를 의금부에 하옥했다. 사헌부가 공신들의 눈치를 봤다는 뜻이었다.


①김홍도의 밭갈이 백성들은 1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지어도 공신들의 대납권 때문에 몇 배의 세금을 더 내고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②정인지의 詩句 정인지는 공신이자 왕가의 사돈(아들 현조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으로서 그 위세가 국왕을 웃돌았다.
신숙주는 ‘박서창이 글을 보내 위문하면서 표피(豹皮) 한 장을 보내기에 받지 않았으나 김미가 체포된 것’이라면서 예종에게 사과 겸 해명을 했다. 예종은 “경은 무엇을 혐의하는가? 다만 박서창의 과오이다”라고 달랬으나 신숙주는 큰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더구나 예종은 이 사건을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김미를 비롯한 분경자들을 친국(親鞫)했다. 김미는 박서창의 반인(伴人: 수행원)이었으며 주산은 지방 관청의 서울 사무소에 근무하는 경저인(京邸人)으로서 기껏해야 이서(吏胥) 아니면 서인(庶人)에 불과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천인들에 불과했는데 국왕이 직접 친국한 것이다.

예종은 특히 함길도 관찰사가 신숙주에게 뇌물을 보낸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함길도는 1년 전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던 곳이다. 이때 신숙주·한명회가 이시애와 연결되었다는 증언이 나와 두 사람이 투옥되었던 적이 있었다. 예종은 함길도의 이런 특수성을 거론하며 김미를 꾸짖었다.

“네가 임금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진상물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또 무슨 물건을 가지고 권문(權門)을 섬기느냐? 작년에 그 도(道: 함길도) 사람들이 신숙주·한명회 등이 몰래 불궤를 꾀한다고 말해 여러 사람들이 의혹해 관찰사·절도사 및 수령들을 다 죽여서 인심이 편하지 못한데, 네가 이를 알면서도 지금 다시 이렇게 해서 인심을 흉흉하게 하느냐?(『예종실록』, 즉위년 10월 19일)”

형식은 김미를 꾸짖는 것이지만 내용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꾸짖는 것이었다. 예종은 관찰사 박서창을 체포해 국문하고 그 자리를 한치형(韓致亨)으로 교체했다. 병조판서 박중선의 집에서 체포된 김산이 깨진 그릇을 고치는 칠장이(漆工)라는 사실을 알고 석방시켰으며, 이조판서 성임(成任) 집에서 잡힌 여종 소비(小非)는 수륙재(水陸齋: 불가의 제사)에 쓸 과실을 빌리러 갔다는 말을 듣고 석방시켰다. 예종이 이들을 직접 국문한 것은 사헌부나 의금부에서 공신들의 위세 때문에 부실 수사를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예종이 천인들을 친국했다는 사실에 공신들은 경악했다. 공신을 직접 벌하지는 않았지만 국왕이 천인까지 직접 국문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분경하기는 어려웠다.

예종은 공신들의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세금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인데, 적은 경우가 배징(倍徵), 곧 두 배였고 보통이 서너 배였다. 개인의 세금을 대납하는 것이 아니라 『예종실록』에 “대납하는 무리들이 먼저 권세가에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에게 청하게 하면서 후한 뇌물을 주면, 수령들은 위세도 두렵고 이익도 생각나 억지로 대납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군현 단위로 대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액수가 막대했다.

예종은 즉위년 10월 16일, “대납은 백성들에게 심하게 해로우니, 이제부터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를 물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하고, 가산은 관에 몰수한다. 공사(公私) 모두 대납을 금한다”라고 선언했다. 『예종실록』은 “대납(代納)하여 쌀로 바꾸는 것은 모두 거실(巨室)에서 하는 짓이었으므로, 능히 혁파할 수가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세조가 공신과 종친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장함으로써 자신을 지지하게 한 제도였다. 대납의 폐해는 막대했다.

“대납으로 말미암아 (권세가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여염(閭閻: 민간)에서 고통스럽게 여기고,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예종실록』 1년 1월 27일)”
몇 배의 세금을 내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악정 중의 악정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런 대납을 금지시켰으니 『예종실록』이 “임금이 즉위 초에 먼저 대납의 폐단을 제거하니, 선정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라고 평가한 것이 과언이 아니었다. 예종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대납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10월 21일에는, “이제 대납을 금했는데도 수령이 전과 같이 수렴(收斂: 받아들임)한다면 더욱 가혹한 것으로서 능지(凌遲)함이 가하다”라고 선포했다. 수령이 전처럼 대납을 허용하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납이 없어지지 않자 예종은 방을 붙여서 대납 금지의 뜻을 널리 알렸다.

“지금부터 대납하는 자는 즉시 극형에 처해서 민생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입법의 본뜻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다고 진달하는 자가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하는 자는 마땅히 목을 베겠다.(『예종실록』즉위년 12월 9일)”

대납 금지에 대한 예종의 뜻은 확고했다. 그러나 공신들의 반발도 거셌다. 이들은 선납했으나 아직 받지 못한 대금이 있다고 주장했다. 호조에서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예종 1년 1월 27일 ‘이미 대납하고도 값을 다 거두지 못한 자는 기한을 정해 거두도록 하자’고 요청했다. 예종은 윤2월 그믐까지 한시적으로 받으라고 허용했다. 『예종실록』은 “임금이 즉위 초에 특별히 대납을 없애게 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매우 기뻐했는데, 이때에 이런 명령이 있자 백성들의 바람이 조금 이지러졌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윤2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연장한 것이었다. 대납을 매년 저절로 막대한 이득이 보장되는 가업처럼 여기던 종친·공신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상황에서 예종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재위 1년 4월에는, “금후로는 무릇 군무(軍務)를 잘못 조치한 데에 관련된 자는 공신이나 의친(議親: 임금의 친척)을 물론하고 죄를 주게 하라”고 명하고,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이 되게 한 자는 종친·재신·공신이라도 본율(本律)에 의거하여 처벌하라고 명했다. 공신들의 면죄권에도 손을 댄 것이다. 양민을 천민으로 만든 자는 교형(絞刑: 교수형)이었다. 재위 1년 5월에도 예종은 “관찰사의 소임은 본래 1도(道)를 통찰하는 것인데, 지금은 공신·의친·당상관에 구애된다. 앞으로 민생에 해를 미치는 자는 공신·의친·당상관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직단(直斷)하여 가두고 국문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분경은 근절되지 않았다.

예종 1년(1469) 11월 사헌부 조례들이 하동군 정인지의 집을 드나드는 자를 체포하려 하자 정인지의 가동(家<50EE>: 종)이 사헌부 조례의 옷고름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헌부의 정인지 국문 요청에 대해 예종은 “공함(公緘: 서면질의)으로 탄핵하라”고 명령했다. 예종과 공신 세력은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구공신의 견제 세력을 스스로 무너뜨린 예종으로서는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급서 미리 안 듯, 일사천리로 구체제 복귀 / 거대한 음모
국왕 독살 여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후 체제를 살펴봐야 한다. 거대 정파와 대립하던 국왕이 급서하는 것으로 갈등이 해소되고 거대 정파가 권력을 독차지할 경우 독살설의 신빙성은 높아진다.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탄생한 공신집단들은 예종이 자신들의 특권을 제한하려 하자 크게 반발했다. 예종과 공신집단 간의 갈등은 예종의 급서로 해소되고 구체제로 회귀했다.
 

예종의 창릉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 계비 안순 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와 합장묘다. 원부인이었던 장순 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생존했다면 예종도 더 오래 왕위에 있었을지 모른다.
예종이 분경(奔競: 인사청탁)을 금지시키라고 보낸 사헌부의 서리(書吏)와 조례가 정인지의 가동과 몸싸움을 벌인 날짜가 재위 1년(1469) 11월 4일이었다. 다음 날 예종은 “금년 겨울이 아주 추우니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면서 의금부와 형조에 전지를 내려 11월 5일 새벽을 기준으로 중대 범죄 이외의 죄수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공신들을 압박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임금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개혁 대상으로 몰린 공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반발할 명분이 없었다. 백성들은 즉위 초부터 시작된 분경 금지, 대납 금지, 공신 특권 제한에 크게 환호하고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예종은 재위 1년 11월을 넘기지 못하고 급서했기 때문이다. 『예종실록』에 그의 병명이 처음 등장하는 날은 예종 1년 11월 18일이다.

“내가 족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내가 무사는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사는 문예(文藝)를 시험하되, 한나라와 당나라 이래의 고사를 가지고 책문(策文)하려고 하는데, 경 등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종은 자신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이틀 전(16일)에는 후원에서 입직한 군사들을 직접 열병했다. 사흘 전(15일)에는 전라·경상·충청도의 관찰사와 절도사 등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근자에 무뢰배들이 휘파람을 불며 산야에 모여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부도한 일을 자행한다. 빨리 계책을 내어 체포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자. 네 번째 줄에 “왕이 훙서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왕의 옥체가 이미 변색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예종의 급서와 자을산군의 즉위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족질로 정사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말한 다음 날(19일)에는 교태전으로 환어했고, 20일에는 기인(其人)제도에 대해서 한명회·신숙주와 의견을 나누었다. 21일에는 도승지 권감이 속미면(粟未<9EAA>)을 올리자 음식을 내려주었고, 22일에는 간부(奸婦)와 짜고 본 남편을 죽인 정금(鄭金)을 사형시켰다. 24일에는 호조에서 경기도 양주 고을의 미곡(米穀)을 채워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랐고, 25일 예조에서 누각(漏刻: 물시계)을 제조해 관상감에 내려달라고 청한 것도 그대로 따랐다. 이처럼 예종은 정사를 놓은 적이 없음에도 18일자에는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다. 신숙주·한명회·최항 등의 공신들이 편찬한 『예종실록』의 수수께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26일자에 비로소 “임금이 불예(不豫: 임금의 병환을 뜻하는 말)하니 새벽에 서평군(西平君) 한계희와 좌참찬 임원준 등을 불러 입시하게 했다”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의학에 정통한 문신이었다. 이날에야 예종이 아픈 줄 알았다는 듯이 백관들과 정희 왕후의 족친들이 문안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다음 날인 27일 예종은 귀화한 여진족 낭장가로(浪將家老)가 다른 여진족 마금파로(馬金波老)를 접대할 음식을 적게 준비했다는 이유로 예조 정랑(正郞) 신숙정(申叔楨)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북평관(北平館) 동구(洞口)에서 낭장가로를 기다렸다가 체포해 가두되 마금파로에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구체적인 명을 내렸다. 비록 같은 날짜에 “임금이 불예(不豫)하므로 승지 등이 모여서 직숙하겠다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는 기사가 있지만 위독한 상태의 사람이 이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종은 그 다음 날(28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한 날의 『예종실록』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일이 착착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①임금의 병이 위급하므로, 한계순과 정효상을 내불당에 보내 기도하게 하다→②승지 및 증경 정승과 의정부·육조의 당상이 문안하다→③죄인을 사면하고 여러 도의 명산대천에 기도하다→④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임금이 자미당에서 훙(薨)하다→⑤승정원에서 장례의 모든 일에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쉬운 물품을 쓰게 하다→⑥권감이 여러 재상과 의논해 당일에 (신왕이)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할 것을 의논하다→⑦미시(未時: 오후 1~3시)에 거애하다→⑧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임금(성종)이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다(『예종실록』 1년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했으므로 조정은 발칵 뒤집혀야 했다. 그러나 조정은 정해진 일정표가 있는 것처럼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당일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켰다. ⑥번 기사의 세부 사항은 도승지 권감이 “대저 제복(除服)하고 널(柩) 앞에서 즉위하는 것이 전례지만 지금은 이런 전례를 따를 수 없으니 마땅히 당일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여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라며 사왕(嗣王)이 당일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문종은 세종 승하 엿새 후에 즉위했고, 단종은 문종 승하 나흘 후에 즉위했다. 문종과 단종은 세자였음에도 즉위까지 여러 날 걸렸는데 예종에게는 세자가 없었다.

『예종실록』은 예종 사망일 새벽 승정원에 8명의 원상(院相)이 모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숙주·한명회·구치관·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정전(思政殿)으로 가자 미리 짠 듯 승전(承傳: 왕명을 전함) 환관 안중경(安仲敬)이 예종 사망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원상들과 도승지 권감은 정인지의 아들이자 세조의 딸 의숙 공주의 남편인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태비 정희 왕후 윤씨에게 “주상(主喪: 차기 국왕)을 빨리 정해야 한다”고 아뢰게 했다. 느닷없이 정인지의 아들이 등장해 원상들의 의견을 대비에게 전하고 명을 받는 승지나 환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정희 왕후가 원상들에게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고 묻자 원상들은 정희 왕후에게 공을 넘겼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이나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 중 한 명이 후사가 되어야 했다. 네 살의 제안대군이 불가하다면 16세의 월산군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뜻밖에도 월산군의 동생 자을산군을 거명하면서 “그를 주상(主喪)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당연히 큰 술렁임이 일어야 하는데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진실로 마땅합니다(允當)”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속 조치를 논의할 때 신숙주는 대비 정희 왕후에게 “외간(外間)은 보고 듣는 것(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뒤뜰로 나가서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사정전에서 보고 들을 사람은 승지나 사관(史官)밖에는 없었으니 이는 기록으로 남으면 안 되는 의논이란 뜻이었다. 이 날짜 『성종실록』은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을산군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을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고 전하고 있다. 정희 왕후와 공신세력 사이에 사전 조율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희 왕후와 공신들은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을 세우기로 미리 합의했던 것이다.

의문은 계속된다. 이틀 후인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신숙주·한명회·홍윤성 등 9명의 원상(院相)과 승지 등은 염습을 마친 후 빈청에서 대왕대비에게 “어제 염습할 때 대행왕(大行王: 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훙서(薨逝: 국왕의 죽음)한 지 겨우 이틀인데도 이와 같은 것은 반드시 병환이 오래되었는데도 외인(外人)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라면서 어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시신의 변색은 약물 중독 때 생기는 현상임에도 정희 왕후는 어의 권찬(權<6505>) 등을 옹호하고 나섰다. 원상들의 어의 처벌 주청은 형식에 불과해서 다시는 어의 처벌을 주청하지 않았으나 사헌부에서 계속 어의 권찬 등의 처벌을 요청했다. 정희 왕후는 모든 책임을 죽은 예종에게 돌렸다.

“대행왕이 일찍이 발병을 앓고 있어서 의원이 뜸질로써 치료하기 위해 ‘두 발을 함께 뜸질을 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대행왕은 ‘병 나지 않은 발까지 함께 뜸질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의원이 또 약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대행왕이 굳이 거절한 것이니 권찬 등은 실상 죄가 없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3일).”

사헌부에서 거듭 올린 처벌 요청을 정희 왕후는 묵살했다. 놀라운 것은 불과 두 달 후인 성종 1년(1470) 2월 7일 권찬을 가선대부 현복군(玄福君)으로 승진시켰다는 점이다. 이때는 성종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정희 왕후가 원상들과 상의해 정사를 처리하던 섭정 때였다. 권찬의 파격 승진은 예종 급서의 배후를 말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조가 만든 공신 지배구조를 해체하려던 예종은 이처럼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공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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