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역사에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어서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 사적 제200호로 지정됐으나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정묘호란 때인 인조 5년(1627) 1월 만 15세의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로 향했다. 능한(凌漢)산성을 함락당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하면서 세자를 전주로 보낸 것이다. 정묘약조 체결 후 상경한 세자는 그해 11월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혼인했다. 그해 12월 4일 인조는 숭정전(崇政殿)에 나가 세자빈 책봉례를 행했다. 긴 악연(惡緣)의 시작이었다.
세자와 강빈(姜嬪)은 전운이 감돌던 인조 14년(1636:병자년) 3월 원손(元孫)을 낳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인조는 12월 17일 홍서봉을 청군 진영으로 보내 강화 협상을 지시하면서 “먼저 전날의 실수를 사과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전날 능봉군(綾峯君) 이칭(李稱)을 인조의 동생이라고 속여 강화 대표로 보냈으나 사실이 탄로나 함께 갔던 무신 박난영(朴蘭英)이 청군에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정묘호란 때도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고 속여 후금군 진영에 보낸 적이 있었다. 청장(淸將)이 “너의 나라(爾國)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번에는 진짜 왕제인가?”라고 추궁한 결과 가짜임이 드러난 것이다.
청군은 강화 대표로 세자를 요구했는데, 인조는 전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보내면서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동궁(東宮:세자)을 청한다 한들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인조실록』은 “이때 세자가 상(上:성상)의 곁에 있다가 오열을 참지 못해 문 밖으로 나갔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강화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조선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나 세자 자신이 비국(備局:비변사)에 봉서(封書)를 내려 결자해지(結者解之)했다. 세자는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인조실록』 15년 1월 22일)라면서 인질을 자청했다. 청이 육경(六卿:판서)의 아들까지 인질로 요구하자 강화 대표의 한 명이던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병을 핑계로 사직해 인질을 피하려는 상황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결단이었다.
인조 15년(1637) 4월 세자는 개국 이래 처음 인질로 끌려갔다. 세자 일행은 조선관(朝鮮館)이라고도 불린 심양관(瀋陽館)에서 거주했는데, 정조 14년(1790) 부사로 다녀온 서호수(徐浩修)의『연행기(燕行紀)』는 심양성 동쪽에 조선관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명·청(明淸) 교체기라는 대륙 정세의 변화 한가운데에서 소현세자는 한편으로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종일관 조선의 국익을 지켜냈다.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해야 했으며, 반청 행위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보호해야 했다.
심양 남탑(南塔) 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도 있었다. 소현세자 측에서 조정에 보고한 『심양장계(瀋陽狀啓)』 인조 15년 5월조는 ‘조선 노예들의 속환가(贖還價)가 수백,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전한다.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했던 심양관의 유지 비용도 큰 문제였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근처 4곳에 모두 600일갈이(하루갈이는 장정이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의 농토를 제공했다.
조선 측은 ‘세자를 영구히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며 거부했으나 세자는 이를 받아들여 농사를 지었다. 『심양장계』는 인조 20년에 3319석을 거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는 이 곡식으로 포로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을 속환시켜 농사를 지었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곡식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심양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인조 22년(1644) 3월 역졸(驛卒) 출신의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은 목매어 자결했다. 총병(摠兵) 오삼계(吳三桂)가 지키는 산해관의 병력이 명(明)의 마지막 무력이었다. 『청사고(淸史稿)』 세조 본기는 “(북경 함락 소식을 들은) 오삼계가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동원해 적(賊:이자성)을 토벌하자고 청했다”고 전한다. 청의 섭정왕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은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명목은 연합군이었으나 오삼계가 성을 나와 항복서를 바친 데서 알 수 있듯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다이곤은 북경으로 남하하면서 명의 멸망을 목도시킬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대동했다. 인조 22년(1644) 4월 산해관을 떠난 청군은 질풍노도의 속도로 한 달 만에 북경에 입성했고 이자성은 도주했다. 세자는 일단 심양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9월 다시 북경에 와서 약 70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 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사상의 큰 변화를 겪는다. 세자는 성리학 이외에 서학(西學)이란 사상과 서양이란 문명세계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세자는 성리학만이 조선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북경 남(南)천주당의 신부였던 황비묵(黃斐묵)은 그의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세자와 아담 샬의 교류를 전하면서 “세자가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 갔고 샬 신부도 자주 세자의 관사를 찾아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두 사람은 깊이 뜻을 같이했다”고 전한다.
그해 9월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나라는 더 이상 인질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조 23년(1645) 2월 세자는 만 8년 만에 영구 귀국길에 올랐다. 세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해 전인 인조 22년(1644) 정월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전례가 있었다. 인조는 세자가 청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의심했다.
인조 22년 3월 세자가 청으로 돌아간 직후 반정 1등 공신 심기원(沈器遠)은 군사를 일으켜 인조를 축출하려 했다. 심기원은 ‘인조가 반정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추존하여 상왕(上王)으로 삼고 세자에게 전위(傳位)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심기원은 호란 이후 인조가 청에 유화적이어서 불만을 품은 것인데, 실제로는 ‘세자를 받들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 했다. 회은군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잡힌 15세의 딸이 청 황실의 시녀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광해군에게 향했던 칼날이 자칫 인조에게 향할 뻔한 일이었다. 심기원 등은 사형당했으나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심기원이 세자를 추대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세자의 귀국을 환영할 리 없었다. 인조는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조차 막을 정도로 냉대했다.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가 발병 사흘 만에 급서했다. 34세의 건장한 세자가 급서하자 독살설이 잇따랐다. 『인조실록』의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외인(外人)들은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인조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을 비호했고, 장례도 박하게 치렀다. 세자의 후사도 종법과 달리 아들이 아니라 동생으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인조가 몰랐다고 볼 수는 없다. 소현세자가 즉위하여 새로운 사상에 기반한 현실적 개혁정책을 펼쳤다면 인조반정으로 야기된 모든 내란과 외환은 새 시대의 출산을 위한 산고쯤으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세자를 죽인 칼날은 부인 강빈과 그 아들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亂賊)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남은 세자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급서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학질 환자에게 사흘 동안 침만 놓았던 어의 이형익(李馨益)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세자 사망 다음날인 인조 23년(1645) 4월 27일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는 “세자께서 한전(寒戰:오한)이 난 이후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며 이형익 등의 국문을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국문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인조는 이형익 보호를 위해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의 봉입을 금지시켰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의 아들 김광현(金光炫)이 대사헌으로서 계속 이형익의 처형을 주청했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었다. 세자 죽음의 배후가 차차 드러났다. 인조는 관에 재궁(梓宮:임금의 관)이란 호칭 대신 사대부·서인에게 쓰는 널 구(柩)자를 쓰게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園)자 대신 묘(墓)자를 썼다. 장남의 상사(喪事) 때는 부모도 삼년복을 입어야 했으나 영상 김류(金류), 좌상 홍서봉(洪瑞鳳) 등은 기년복(일년복)으로 의정해 올렸고 인조는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를 실시해 12일간으로 정했다가 7일 만에 끝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세자시강원 필선(弼善:벼슬 이름) 안시현(安時賢)은 세자 사부(師傅)가 아무도 세자빈 강씨에게 조문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안시현은 인조 23년 5월 6일 세자의 장남인 원손(元孫) 이석철(李石鐵)을 “세손(世孫)으로 정하셔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소서”라고 상소했다. 종법(宗法)대로 장손을 인조의 후사로 삼으라는 주청이었다. 인조는 “이런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며 꾸짖고 쫓아냈다. 이상 조짐이 계속되었다. 인조는 술관(術官:풍수가)들이 영릉(英陵:세종과 부인의 능) 동쪽이 길지(吉地)라고 천거했지만 인조는 ‘길이 멀고 폐단이 크다’며 효릉(孝陵:인종과 부인의 능) 등성이로 결정했다. 이의를 제기한 술관 장진한(張鎭漢)은 국문에 처했다.
세자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장례일이 자오(子午)가 대충(對沖:방위가 서로 마주침)되어 원손에게 불리하다”고 불평했다. 정북(正北:자)과 정남(正南:오)이 맞서는 날 장례를 치르면 원손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조짐을 간파한 안시현은 5월 27일 상소를 올려 ‘예관(禮官)이 원손을 세손으로 삼자고 주청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윤6월 2일 인조는 조정의 주요 대신을 모두 불러 속셈을 털어놓았다. “나는 숙질(宿疾)이 이따금 심해지는데 원손은 저렇게 미약하다. 금일의 형세를 보건대 어린아이가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장남이 사망할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종법이었다. 그래서 대다수 신하도 모두 원손의 사위(嗣位)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청나라에 물든 소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지만 산림(山林) 송준길(宋浚吉)이 ‘억만 겨레 신민의 희망이 원손에게 있다’며 척화파 김상헌에게 원손의 보도(輔導)를 맡기자고 주장한 것처럼 원손은 잘 교육시키면 반정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 임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인조실록』은 신하들이 원손 교체에 반대하자 “임금의 분노가 심했으므로 좌우에서 다 감히 말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영의정 김류는 “만약 상(上: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의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발 물러섰다. 인조는 당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 영중추부사 심열(沈悅)은 “국본(國本:세자)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당일 원손은 교체되고 차자(次子) 봉림대군이 후사로 결정되었다.
원손은 졸지에 차기 임금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인조는 재위 23년(1645) 8월 강빈의 궁녀들을 내옥(內獄)에 가두고 국문시켰다. 저주했다는 혐의였다. 인형 따위에 바늘 등을 꽂아 저주하는 것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일이었다. 인조의 목적은 저주의 배후가 강빈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인조 23년(1645) 8월과 9월 원손의 보모(保姆)였던 상궁 최씨와 강빈의 궁녀 계향(戒香)·계환(戒還) 등은 심한 고문 끝에 강빈의 이름을 대는 것을 거부하고 죽어갔다. 이 저주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죽었으나 인조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24년(1646) 1월 인조는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고 주장하며 정렬(貞烈) 등 강빈의 다섯 궁녀와 어주(御廚:주방) 나인 세 명을 또 국문했다. 『인조실록』이 “임금이 궁중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겨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형세였다(24년 1월 3일)”고 쓴 것처럼 인조의 억지였다.
인조는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가두고 문에 구멍을 뚫어 물과 음식을 주게 했다. 궁녀 난옥(難玉)은 고문사했고 강빈이 신임하던 정렬(貞烈)·유덕(有德)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살을 지지는 것)을 받고 죽었다. 아무도 강빈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는 재위 24년(1646) 2월 3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억지를 부렸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바꾸려고 몰래 도모해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왕비 복장)를 마련해 놓고 참람하게 내전(內殿)이라 칭호했다…이런 짓을 차마 하는데 어떤 일인들 못하겠는가?”(『인조실록』 24년 2월 3일)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수종자들이 저들(彼人:청인)이 보고 들으라고 세자를 동전(東殿), 세자빈을 빈전(嬪殿)이라 칭한 것이지 세자와 빈이 자칭한 것은 아니라고 부기했다. 그러나 인조는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는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하루도 숨을 쉬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는 율문을 상고해 품의해 처리하라”고 명했다. 강빈을 사형시키라는 뜻인데 공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시역(弑逆)이 어떤 죄인데 짐작만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대한 것처럼 무리한 요구였다. 인조는 강빈의 사형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성문 밖으로 내쫓고 병조판서를 숙직시키며 경호를 엄하게 하게 했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은 “강빈을 폐할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강빈을 죽이시려면 신을 먼저 죽이신 연후에야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다가 귀양 갔다.
인조는 24년(1646) 2월 29일 강빈의 두 오빠 강문명(姜文明)·강문성(姜文星)을 장살(杖殺:곤장을 쳐 죽임)시키고 3월 15일에는 강빈을 덮개 씌운 검은 가마(屋黑轎)를 이용해 사저로 내쫓고 당일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인조실록』은 세자빈이 쫓겨날 때 “길가에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했다”며 “중외(中外)의 민심이 모두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강빈을 죽인 인조는 과거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강빈이 죽어 버린 상황에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고문자의 의도대로 강빈의 이름을 댔고 인조는 안사돈인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인조 25년(1647) 7월 12세의 어린 석철은 동생들과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사관(史官)은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소현세자의 영혼이 어두운 지하에서 어찌 원통해하지 않겠는가”(25년 8월 1일)라고 개탄했다. 사관의 예견대로 석철은 다음해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고 말았다. 둘째 석린도 석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비난에 직면한 인조는 나인 옥진(玉眞)에게 책임을 지워 고문해 죽여 버렸다. 시대착오적인 쿠데타의 끝은 가족 참살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인조는 재위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초 그의 묘호(廟號)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仁祖)로 고쳤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죽인 인물에게 쓴 어질 인(仁)자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내란과 외환으로 점철되었던 한 시대는 역사에 숱한 어두움을 드리우고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