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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설교평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 ...김동호 목사

by 싯딤 2009. 11. 26.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



- 김동호 목사의 연속설교 "천국의 열쇠"를 말한다 -


이길용 목사
딴지걸기?
나는 높은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존칭은 약하고, 이하 '김 목사'로 줄여 부르겠음)와 개인적으로 안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상으로도 아주 최근에 접했다. 어떤 지인으로부터 김 목사가 주일 공동예배 시에 같은 본문으로 열 다섯 번에 이르는 연속 설교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설교원고를 출력해서 정독했으며, 몇 편은 동화상으로 직접 시청했다. 평소 설교 비평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 읽기를 마친 후에 과연 비평의 글을 써야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약간 망설였다. 가장 큰 이유는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은 높은뜻 숭의교회가 한국교회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교회가 침체되고 있는 마당에 나름대로 21세기의 대안교회로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는 교회를 공연히 '딴지걸기' 식으로 흔든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 둘째 이유는 아무리 정당한 설교비평이라고 하더라도 높은뜻 숭의교회 신자들의 신앙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준다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셋째, 김 목사는 한국 교회의 목사로서 찾아보기 드물게 자기 성찰에 철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분의 설교를 비평한다는 게 썩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다. 넷째,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 설교의 내용이 비평의 대상이 될 만큼 충실하지 않다는 것도 내가 비평 글쓰기를 주저하게 된 이유였다. 문학 평론가들의 비평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대상 작품이 어느 정도의 문학적 품격을 갖추었을 때만 시도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좌고우면하지 않고 일단 비평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김 목사의 설교에서 한국교회 강단이 안고 있는 장단점을 모두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설교를 비평함으로써 설교 일반에 대한 비평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비평은 그의 목회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숭의교회 홈페이지를 잠시 훑어보기만 하면 김 목사의 목회가 매우 건전할 뿐만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다만 그의 설교만을, 그것도 '천국의 열쇠'라는 제목의 열 다섯 편의 설교만을 대상으로 삼겠다. 이런 비평작업은 '비평을 위한 비평'으로 흐르거나, 또는 전체적인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것에만 집착할 염려가 있는데, 이 글을 쓰는 동안 이 점을 명심하겠다.

감동의 이면
앞으로 청중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하고 싶은 후배 목사가 나에게 온다면 여기 김 목사의 설교를 유심히 들어보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그럴 정도로 그의 설교는 청중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김 목사의 설교에 그런 감동, 또는 은혜가 없었다면 아무리 기발한 목회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순식간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그의 설교에는 무슨 힘이 있는 것일까?

김 목사의 외모가 호감을 준다거나 설득력 있는 언변을 타고났다거나 생생한 예화를 사용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여러 장점을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뚜렷하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너무 건방진 말씀이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만해질까봐, 도를 넘어설까 봐 절제하지만 저는 정말 그렇게 말하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2, 이하 괄호 안의 쪽수는 김 목사 설교의 순서임).


김 목사가 선포하는 설교의 메시지는 남에게서 전해 듣거나 신학 공부를 통해서 얻은 정보 차원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삶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진한 감동으로 전달된다. 이런 부분은 그의 탁월한 능력이자, 곧 하나님의 은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모든 설교자가 배워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토록 확신에 찬 어조로 선포한 그 신앙의 내용이 왜 그렇게 빈약한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다. 그의 설교에서는 평신도 수준의 신앙 간증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김 목사가 설교를 끌어가는 능력은 아주 뛰어나기 때문에 나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설레는 마음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며 설교를 읽고 들었다. 그런데 인내심을 갖고 열 다섯 편을 다 읽은 다음에도 그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열 다섯 편의 설교가 믿음으로 천국의 열쇠를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을, 그리고 죽어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을 적당한 예화를 사용해서 반복적으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김 목사 자신이 설교의 내용을 심화시키는 것보다는 가능한 단순한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설교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 같았다.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어리석게 회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설교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강단에서 선포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교인들에게 학습되지 않는 것입니다."(1). 기독교 교육을 전공했다는 김 목사의 말대로 반복의 학습 효과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옛날 장터에서 볼 수 있는 만병통치 약장사들의 반복적인 연설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깨달음의 심화과정에 훨씬 가까운 게 아닐까?

어쨌든지 나는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김 목사의 설교에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 별로 없는데도 청중들이 감동을 받고 있다는 이 현상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그게 무얼까?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이 현상에는 분명히 선동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 선동은 예컨데 히틀러나 박정희 같은 독재자들의 고유한 연설방식이다. 가능한대로 문장을 짧게 끊는 방식으로 강렬하게 전함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가치 판단을 무디게 만든다. 간혹 사이비 교주들에게서도 이런 방식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 얼마 전에 물의를 빚었던 영생교 교주의 설교 장면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내가 김 목사를 독재자나 사이비 교주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일반 목사들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열려있고, 신앙적으로도 역시 정통적이다. 다만 그의 설교만 놓고 볼 때 그런 선동기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데, 바로 그것이 새겨 들을만한 별다른 내용이 없지만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는 김 목사 설교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사족으로 전락한 하나님의 말씀
설교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사실과 전달 방식이 선동적이라는 사실은 서로 맞물려 있는 사태이다. 내용이 풍부하다면 선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무언가 '아우라' 같은 것으로 내용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김 목사에게 나타난 이런 선동의 성격을 주로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겠다. 하나는 본말(本末)을 뒤집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김 목사의 설교에 이런 현상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해명하는 것이 내 글의 목적이다.

반드시 본문설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설교는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숙고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김 목사의 경우에는 그게 너무나 부실했다. 김 목사는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을 본문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반복의 효과 운운하더니 청량리 중앙교회 이야기, 숭의교회 이야기, 그 이외에 여러 예화를 참으로 솔깃하게 전했다. 그 이야기에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깃거리였다고 하더라도 김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교 끝 부분에 한 두 마디 언급으로 그칠 뿐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신앙고백은 한 마디로 말씀드려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그 믿음의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면 그 교회는 반석 위에 세운 좋은 교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이 김 목사의 첫 번 설교에 등장하는 본문과 연관된 모든 언급이다.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바르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교회와 자신의 삶을 반석 위에 세우는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1).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열 다섯 편의 설교로 이어질 첫 설교에서 본문에 대한 그 어떤 해명도 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만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첫 설교만 그런 게 아니라 열 다섯 편 모든 설교가 대개 이런 식이다. 안타깝게도 김 목사의 설교에서 본(本)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말(末)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사족 역할만 할 뿐이다.

설교자의 인생관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이렇듯 김 목사의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이 사족으로 전락한 이유는 김 목사의 모범적인 인격, 또는 그의 분명한 인생관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가 인격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교회관도 기본적으로 그의 인격에 의해서 매우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에게 교회는 일종의 부적입니다. 이번 주일도 교회를 나왔기 때문에, 헌금을 좀 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좀 했기 때문에 장사도 잘 되고 몸도 건강하고 차도 안 뒤집히고 불도 안 나겠지 생각합니다. 미신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정말 치명적인 착각입니다."(6). 물질 문제를 다룰 때도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영지주의에 기울이지 않는, 김 목사의 독특하고 건강한 인생관과 신앙관이 설교 곳곳에 베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육의 부활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한 기독교의 구원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저는 기복주의자들과 같이 물질과 세상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3).

더군다나 자기를 철저하게 상대화하는 그 진솔한 모습은 그의 인격이 어느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자리에 서게 되면서, 조금씩 세상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고, 어려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것의 위험성, 조금씩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것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낍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지겠구나'하는 불안감을 느낍니다."(10). 이런 종류의 언급은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접어두자.

그런데 설교에서 김 목사의 훌륭한 인격과 삶에 대한 직관은 나타나는 데 정작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실종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 목사의 겸손과 자기 반성과 뚜렷한 인생관은 확연히 드러나는데 바르트가 표현대로 '성서의 놀라운 세계'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설교자가 좋은 인격과 교양을 갖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역설적으로 김 목사의 경우에는 그의 인격이 오히려 말씀을 가로막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김 목사가 의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바탕에 바로 대중을 선동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존재와 구원과 생명의 신비를 구도자적 자세로 접근하고 풀어내야 할 설교자가 자신의 작은 경험과 인생관과 철학을 앞세운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바로 선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지나칠 때는 흡사 교양강좌 강사처럼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찌푸린 얼굴을 펴세요. 처진 어깨 올리세요. 눌린 마음과 가슴을 펴세요. 생각을 바꾸세요. 말과 말투를 바꾸세요.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버리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천국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지 말고 누리세요."(15). 이것은 곧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처세술과 마인드 콘트롤 기술을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다.


천국 문을 열고 닫는다?
앞에서 선동의 두 번째 성격을 '사실왜곡'이라고 지적했는데, 나는 이제 김 목사가 어떤 부분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선동적인가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내가 본 바로는 이에 대한 증거가 그 설교 안에 두 대목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비판하고 있는 어떤 사상에 대한 것이다.

첫 증거는 다음과 같다. 김 목사는 베드로가 받은 천국의 열쇠로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나는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선택한 성서 본문 중에서 9절 말씀은 이렇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받았다는 열쇠는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그런 열쇠가 아니라, 앞으로 베드로가 초대 기독교에서 지도자로서 활동하게 된다는 뜻이다.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그런 열쇠는 재림하실 예수님에게만 있을 뿐이다(계 1:18 참조). 설령 천국 문의 열쇠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 김 목사는 본문의 "매고 푼다"는 말씀을 "열고 닫는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 같다. 매고 푼다는 관용어는 율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주지 않을 수 있는 랍비의 사명에 관계된 것이지(마 18:18 참조)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내용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평범한 바클레이 주석만 잠시 펼쳐보아도 간단히 드러나는 것들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무엇에 근거해서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갖고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 그렇게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일까? "저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가 이 면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 속에는 영적인 것만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육적이고 물적인 것까지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3). 그는 왜 성서의 가르침을 전하지 않고 자기의 개인적인 생각을 전하는 것일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천국의 열쇠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돈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얻게 하였습니다."(6).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천국의 열쇠를 욕심내신다면, 이 땅에서도 천국을 열고 닫으며,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 외의 모든 끈을 끊으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7). "그와 같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상으로 주시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열고 닫으며 사는 복을 받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11). 믿음을 갖기만 하면 우리도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다? 이게 말이 될까? 그게 참으로 김 목사의 설교를 읽으면서 내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만약 김 목사가 본문에 대한 공부를 약간만 했다면 그의 설교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천국의 열쇠'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는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게 단순한 착각이며 실수였을까? 성서에 나오는 숫자나 이름을 잘못 기억했다면 몰라도 작심하고 열 다섯 번의 설교를 한 본문의 핵심 부분을 오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처사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한국 교회 강단에서 종종 일어난다. 자신이 워낙 설교의 베테랑이기 때문에 성서의 세계를 꿰뚫고 있다는 자만심이 부르는 잘못이다. 늘 이렇게 막 나가는 부흥사들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지성과 교양과 덕성을 골고루 갖춘 김 목사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안다고' 생각하는 그 분에게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믿음 지상주의
설교자도 경우에 따라서 본문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서 김 목사의 이런 실수를 더 이상 꼬집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지 '실수'로 덮어버리기에는 찜찜한, 훨씬 근원적인 문제가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 무의식적이었든, 또는 의식적이었든지 김 목사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고 싶다는 청중들의 '가열찬 욕망'을 자극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아주 간단한 본문 말씀을 경솔하게 자기 방식으로 해석(왜곡)해버린 것 같다. 사람은 평소에 마음먹은 대로 사물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말씀을 가리는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선동적인 설교자는 자기의 주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이런 일에 게으르다.

둘째, 김 목사가 이렇게 성서 본문을 왜곡시키면서까지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일종의 '믿음 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즉 그의 설교에는 믿음도 역시 욕망의 대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믿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즉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무조건 '믿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네가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알게 한 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본다면 베드로의 이 진술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에게 대한 정확한 '인식'을 의미한다. 또는 그것을 전제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확한 인식이 바로 초기 기독교의 토대인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더 나아가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3:13).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이며 따라서 상대적인 차원이지만, 사랑은 하나님 존재 자체이며 따라서 절대적인 차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모두 '믿음 일원론'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 믿음의 다층적 의미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이다. 믿음은 인식이며 동시에 신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다림이고 침묵이고 놀람이다. 즉 믿음은 천국의 열쇠를 얻겠다는 욕망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미래를 맡길만한 분이라는 인식과 신뢰라는 말이다.

그런데 평신도들이 김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이런 예민한 차이를 분별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에는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씀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으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을 삼고 사는 것입니다."(7). "사도바울은 우리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믿음의 핵심이 된다고 확신합니다."(8).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지만 이 모든 진술의 그 밑바닥에는 천국의 열쇠를 -청중들 중에는 강남의 고급 아파트 열쇠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법 한데- 향한 인간의 집요한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물질적인 탐욕만 탐욕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탐욕도 역시 탐욕이다. 이런 믿음 지상주의가 극단화되면 사이비로 흐를 위험에 노출된다.

열린 천국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
김 목사의 설교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두 번째 증거는 그가 '열린 천국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김 목사가 14편의 설교 제목을 '천국의 열쇠'로 잡더니, 마지막 설교만 다른 제목으로 잡은 이유를 처음에는 정확하게 짚어낼 수 없었다. 누가 '열린 천국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인가? 그의 설교에는 이에 대한 명시적인 대답이 없다. 나름대로 논리적인 설교를 하시는 분이 왜 이 부분에서는 설교의 주제를 에둘러 가셨을까? 김 목사는 이 마지막 설교에서 시종일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열린 천국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본인이 딱 부러지게 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설교의 문맥을 보면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방식의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비일비재 하는 전형적인 선동이다. 진보주의가 무엇인지 충분하게 이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일방적인 잣대로 재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흡사 예수님을 그 당시의 유대 고위층에서 '신성모독자'라고 몰아붙인 것과 비슷한 행태이다. 안타깝지만 대중은 선동에 약하다.

나는 그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가 과연 진보주의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는 자살이라는 주제를 끌어들이면서 진보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첫째, 자살의 원인이 과연 사회적인 구조에만 있는 것인가? 둘째, 사회적인 구조는 과연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셋째, 사회적인 구조가 바뀌면 자살의 문제는 과연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인가?"(15). 아, 얼마나 순진하고 단순한 사유인가?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의 역학관계는 신대원 1년만 다녀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문제인데, 김 목사가 이렇게 초보적인 문제를 들고 나온다는 것은 순진한 건지, 또는 노회한 건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김 목사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들도 사회구조가 개혁되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가 어떻게 역사내재와 역사초월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지 생명과 존재의 신비 가운데서 투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진보주의자를 얄팍한 행동주의자, 역사낙관주의자, 혹은 낭만주의자로 예단해버리는 것일까? "우리들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진보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로 보고 사회적인 구조가 바뀌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낭만적인,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다분히 인간적이고 비신앙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15). 나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지평에 대해서 신학적 논의를 펼칠 생각이 없다. 이것은 또 하나의 다른 주제가 되기 때문에 지면이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김 목사의 관심과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보주의의 영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매도하는 김 목사의 무책임한 행태가 바로 전형적인 선동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물론 김 목사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선동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김 목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적인 편견과 영적 자만심이, 그리고 기독교 계시와 역사의 깊이에 대한 신학적 몰이해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사태라 할 수 있다.


예언자적 영성
끝으로, 이 글이 높은뜻 숭의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적으로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 목사께서도 이 글을 읽을 기회가 있다면 너그럽게 받아줄 것으로 믿는다. 나는 그분이 아직까지는 하나님 말씀의 깊이보다는 인간학적 바탕에서 선동적인 설교를 하지만, 방향을 바꾸면 예언자적 설교를 할 수 있는 토대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여기서 예언자적 설교는 단지 정치 사회적 비판이나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사회, 실존과 구조, 인간과 생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을 포괄하는 역사와 거기서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생명의 신비에 생각을 열어둔다는 뜻한다. 말하자면 창조와 종말의 영성에 천착하는 설교이다. 김 목사가 "열린 천국에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영성 안에서 고민하고, 자기를 성찰하며, 미래를 열어 가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주의자는 예언자이며, 다른 한편 진보주의자라고 나서지는 않더라도 이런 예언자적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진보주의자이다. <기독교 사상, 2003년 11월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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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완>

김동호를 떠올리면 청부론, 깨끗한 부자,억대연봉,브랜드 목사,CEO형 직업 목사,목회자 세금납부와 교회재정 공개,목사 임기제 와 장로 임기제도 도입...등등의 단어가 떠오릅니다.이후에 또 어떤 걸 유행시킬지는 모르지만 김동호와 관련하여 좋은 글이 있어 옮겨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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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론을 입에 올리는 김목사는, 한때 개혁적인 행보로 교계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던 인물이다. 헌데 이 분의 연봉이 1억2천여만 원에 이른다는 교회 성도가 게시판에 올린 글은, 그 이미지를 무색하게 했다. 이 문제가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건, 소위 교회 개혁을 내세우는 목사의 앞뒤 안 맞는 이중성이었다.
그러나 이 분의 경우, 그 후의 해명 글에서 보이듯, 목사도 직업이고, 능력 있는 직업인은 거기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인 듯하다. 대중목회자들이 세속적으로 누릴 건 다 누리면서, 성직은 일반 직업과는 다른 양, 위선적인 권위를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분은 차라리 솔직하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거룩을 빙자하여 적은 월급 주려고 한다면 용감하게 항의하겠다' '목회자라고 프라이드 타고 월급 130만원 받으면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하는 편견과 싸우고 싶다' '월급 이외에 아무런 수입이 없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회와 교인들은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박봉에 시달리는 것은 막아 보고 싶다'

이 분의 말에는, 자못 상식을 벗어나는 듯한 어떤 소신의 과잉이랄까,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한 오만함 마저 느껴진다. 그런 많은 돈을 받으면서, 교회가 거룩을 빙자해 적은 월급을 주려고 하면 용감하게 항의하겠단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설교가 대교회를 이루고 그만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데 대한 대중목회자들의 일반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교회와 교인들은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박봉에 시달린다는 것도, 소수의 경우이고 맞지않는 얘기다. 이 나라 대다수 교회와 교인들은 가난하거나 보통 수준의 삶을 산다.

이 분은 청부론 논란을 불러 일으킨 당사자로서, 한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청빈은 누구나 설명 안 해도 훌륭하다는 것 다 안다. 그런 면에서 청부론 자는 핸디캡이 있다. 청빈론은 훌륭하다. 그러나 극단으로 흐르면 잘못이다. 청빈 그 자체만 가지고 기독교 윤리와 철학을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청빈론의 한계를 느껴서 청부론을 얘기하게 됐다'

대관절 누가 그 청빈, 자체만 가지고 기독교 윤리철학을 말한다는 것인가. 금욕주의가 성서의 진리에서 벗어나 있듯, 청빈론 또한 그 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와는 별개라는 걸, 은혜 안에 있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수긍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가난한 자'는 청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헌데 이 분은 이렇듯, 그 전제에서부터 본질을 흐린다. 이 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도 가난도 은사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은사를 받은 목사보다는 부자 은사 받은 목사가 되길 원하고, 큰 교회 목사가 되길 바라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주셨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스타 목사'로서 자부심이 넘치는 대목이다. 그는 실질적 부자이면서도 '영적인 부유함- 의인된 삶'이 가능함을, 구약의 욥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두 부자가 있다. 소유 지향적 부자가 있고, 존재 지향적 부자가 있다. 욥이 성경의 모델이다. 그는 소유가 무너졌을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 소유한 사람, 부자였으나 영적인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 중에도 소유형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소유형인데 기회가 오지 않고 능력이 없어서 그냥 가난할 뿐이다. 정말 존재 지향적으로 살기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 있지만, 솔직히 몇 안 된다.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특별한 은사 가진 사람의 경우를 보편적 진리인 것처럼 얘기하면 세상이 다 무너진다. 가난한 사람은 다 의롭고 부유한 사람은 다 불의 한가. ...레위기 19장 15절을 참 좋아한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에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 찌며’ 가난하다고 편들지 말라는 것이다. 가난이 정의는 아니다'

누가 가난한 자를 선한 자라 한다는 것인가. 누가 그들을 정의라 한다는 것인가. 나는 앞에서 A급 대중목회자와 그들을 지향하는, B급 C급의 대중목회자들이 있다 했다. 소유 지향적인 부자와 소유 지향적인 가난한 자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소유 지향적 가난한 자도, 똑 같은 죄인이며, 선한 자도 의인도 아니다. 그런저런 것을 떠나 성도는, 무능력 때문이든,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 때문이든,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그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거기에 예수의 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그들을 진정 사랑 할 수 있나? 부자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나?

이것이, 신앙 안에서 부자의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일례를 들어 보자. 이웃에 아이에게 우유를 먹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가 있다. 애 아버지는 소유지향적인, 가난한 술주정뱅이라고 하자. 그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도, 부자 은사를 받은 이 땅의 성직자나,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식들에게 온갖 좋은 음식을 먹인다. 부자의 삶은, 이렇듯 본질적으로 이기적이요,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입으로 천국의 복음을 전한다 해도 소용없다는 거다. 예수는 이들을, 천국 백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게 정답인가?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게 정답일 것이다. 땀 흘려 노동을 해 돈을 벌되, 선하고 의로운 삶,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문제는, 가난한 자야 가진 것도 없으니, 누리는 것도 없다. 그러나 부자는, 그와는 달리 앞의 예에서 보듯, 위선과 기만적인 삶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건, 그 부를 이루고 지탱하는 그 인간의 본질성과 관련이 있다.

그가 부자라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기에 부자인 것이다. 그들은 능력으로든, 또는 정치적으로든 경쟁에서 이겨 그 자리에 있으며, 그걸 누리는 자가 부자인 것이다. 가난한 자는, 무능력이든 정치적인 패자이든, 소외되고 눌린 존재들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의 부자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로 보다는, 그들을 누르고 올라선 자이다.

부자된 자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면 어떻게 나타날까. 예수의 가르침, 그 은총의 질서에 의하면, 새롭게 거듭난 그 순간, 그 부자는 자신의 세속적인 부귀 영화가, 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던 그 모든 것을 분토만도 못하게 여기며 한없이 부끄러워한다. 이제 그는 자신이 가진 거 다 내놓고,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벌되 선한 일에 다 쓴다. 얼마를 놔두고 얼마를 쓰는 문제가 아니다. 버러지 같은 자신을 통해 많은 굶주리는 이들이 한끼 밥을 먹을 수 있다는데 무한히 감사한다. 또한, 그 선한 열정은 불의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은, 선하고 의롭게 사는, 그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이다.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다. 자식을 출세시키려는 집착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허영심도, 모두가 죄요, 부질없는 짓이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백합화 하나만 못하다'는, 예수의 가르침, 그 자유함 안에 있는 천국 백성의 정체성은, 불의한 세상 속에 있으되, 기쁨으로 그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복음, 그 성도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은총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굳이 가난(청빈)이나 청부에서도 자유롭다. 실은, 그런 현란한 언구들 자체가 은총 밖에 있는 현상들인 것이다.

이 분은 자발적 가난한 자, 그 존재 지향적 특별한 은사 받은 이의 경우를 보편적 진리로 얘기하면 세상이 무너진단다. 그래서 영락교회에서 작고한 한 경직 목사를 모셨을 때도, 모든 기준을 그 분에게 맞추니까 대한민국에 목사는 하나도 없더라는 것이다. 한 경직 목사의 존재도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은사라는 게 이 분의 주장이다. 모든 기준을 거기에 맞추면 심각한 문제가 생겨, 목사도 그냥 직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이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은 성서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부요한 자들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사람들의 경우를 보편적 진리로 얘기하면 세상이 무너진다니. 그런데 참 이상하잖은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나라에 신실한 목사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은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훌륭한 분들이 있다. 오히려 이 분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거기, 굽은 것을 펴고자 하는 치열하고도 선한 열정, 죄에 대한 미움, 불순종에서 돌아서 복음에 순종하는 것, 비록 자신이 부족하더라도 그런 훌륭한 분을 존경하고 본받는 것, 그 길을 가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각오하는 결단이며, 그런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세상의 빛과 소금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인가. 헌데 이 분은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걸 피해, 모나지 않게 적당히 타협했다는 걸로 들린다. 그렇다면 이 분이 전하는 복음은 어떤 것이란 말인가.

이 분은 '가난이 싫다'고 말한다. 그리고, '(돈은) 깨끗하게 벌어야 한다. 유산을 안 남겨야 한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부자가 되었다면 기복적 물질관에 합류하지 말고 부를 나누라. 부는 복이 아니라, 책임이다. 삭개오 처럼 하라. 내가 책(<깨끗한 부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그 것이다'

이 분이 '가난이 싫다'고 털어놓는 대목은, 솔직해서 좋긴 하나, 가난한 자들을 진실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성직자의 마음은 와 닿질 않는다. 가난한 자는 언제나 있었고, 그 자리는 누군가 대신할 것이다. 아마 세상의 어떤 사람도 가난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청부론이 논란이 된 건, 그 것이 성직자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아닌 일반 사회에도, 그런 삶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다.

이 분의 주장이나 논리가, 성직자로서보다는, 그런 일반 사람들의 입장과 비슷해 보인다는 건,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이 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그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어쩔 수 없다. 성직자도, 교인들도 부자로 사는 게 성경적이 아니라는 부정적 관념이나 비판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 것도 하나님이 준 은사인 이상, 깨끗하게 벌어 잘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연봉이 1억이 넘은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엄밀히 부자로 살아선 안되는 것이다.

부유한 성도는 성서의 진리에 비추어, 그 양심의 찔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바로 거기에서 성도로서의 신앙이며 그 지향이 가능할 것이다. 부나 누림을 그런 식으로 단순 명료하게 정리해, 자신부터 자유로워지고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것 자체가 성서적이 아닌, 대중목회자들의 타락이요, 실은 그 저급한 상품 신학의 일종이 아닌가.

사실 이런 청부론이야말로 심하게 말하면, 물신주의, 그 우상의 변형인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오직 능력 있는 자만 살아 남는다고 주술을 외듯 하는 이 잘못된 시대에, 성서의 핵심인 예수의 복음은 제껴 놓고 구약의 욥기를 들어, 매우 그럴 듯하게 현혹하는 이런 는 물타기는, 생명의 복음과는 상관 없는 것이다.

(참고로 고액 연봉이 거센 논란이 된 이후, 이 교회는 목사 호봉제를 도입해 담임 목사의 연봉을 5700만원으로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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