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복 60년사4

1948년 1월 8일/ 유엔 한국위원단 내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감시 미국은 유엔의 감시 하에 인구비례로 임시 입법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국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이 제안을 거부하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여 남한 단독만으로 동일한 계획을 실행한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소련이 이를 거부하자 1947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는 것은 미․소간의 협정을 직접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며 적극 반대했으며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한반도 주민 스스로가 그 장래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유엔은 한반도의 선거를 감시할 위원단을 설치하고, 정부 수립 후 외.. 2009. 9. 4.
1947년/ 서윤복, 보스턴 마라톤 재패. 여운형, 장덕수 암살 2월11일/ 공민증제 실시 3월 1일/ 남대문 좌우익 충돌 시가행진 중인 우익 세력 1947년 3월 1일 15시 40분, 3.1절 28주년 기념식을 각기 따로 치른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남대문-서울역 간 도로상에서 충돌을 일으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좌익단체들은 남산공원에서 '삼일절 기념 시민대회'를치른 뒤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 쪽으로 시가행진을 하고 있었다. 반면, 우익단체들은 서울운동장에서 '기미 독립선언 전국대회'를 마친 뒤 종로를 출발, 광화문과 서대문, 서울역을 거쳐 남대문으로 행진하던 중이었다. 15시 30분, 마침내 양측의 행진은 남대문-서울역간 도로상에서 마주쳤다. 양측은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투석전까지 벌이며 격렬히 대치하다가 17시30분이 되어서야자진 해산했다. 양 진영.. 2009. 9. 3.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1월 18일/ 학병동맹 총격사건 모스크바 3상회의에 따른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찬탁과 반탁으로 좌우익의 투쟁이 한창이던 1946년 초 찬탁파인 좌익계 '학병동맹원(學兵同盟員)'들이 반탁을 외치며 시위하던 우익계 학생단체인 '반탁 전국학생총연맹(위원장 이철승)'계 학생들을 습격하여 2∼3일간 서로 습격전을 벌여 사상자를 낸 좌우익 충돌사건이다. 1946년 1월 18일 '반탁 전국학생총연맹'은 서울 정동교회에서 '반탁 시국강연회'를 개최한 뒤, 약 600여 명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자, 미리 잠복해 있던 좌익계 학병동맹원들이 무기와 곤봉 등을 가지고 시위 학생들을 습격, 40여 명의 학생들이 부상을 입고, 그 중 몇 명은 중상을 입어 입원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학병동맹이란 일제강점기 말에 학병.. 2009. 9. 2.
1945년. 광복 8월12일. 38선 설정 얄타회담에서 전후 대책을 논의하는 미·영·소 연합국 수뇌들.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얄타 비밀회담 이후 5개월이 지난 1945년 7월 17일에서 8월 2일에 제2차 세계대전 중 마지막 연합국 수뇌회담이 포츠담에서 열렸다. 이때 미국은 시험에 성공한 원자폭탄의 사용에 대해 협의하였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소 양측의 군사대표들은 한국, 만주, 동해를 두 개의 작전지역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발전시키고 이때 한반도의 작전경계선으로 38도선과 유사한 선이 고려되었다. 이렇게 직접 38선이 언급되기 이전에 미국의 전쟁성 합동정보처에서는 1945년 5월, 한반도 내 40도선을 소련군의 남하를.. 2009.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