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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38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숭례문(5) 숭례문 복구 조감도 숭례문 복구의 여섯 가지 원칙 숭례문의 응급한 화재수습을 마무리하고, 2008년 5월 20일 숭례문 복구의 기본방향, 추진계획 등을 담은 ‘숭례문 복구 기본원칙’가 발표되었다. 복구방향은 숭례문 중건과 변천과정을 면밀히 고증조사하여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으로 복구, 수도서울의 랜드마크로 다시 설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며, 국민의 상실감 치유와 자긍심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복구의 기본 원칙은 여섯 가지로 정하였다. (1) 성문은 화재 전 모습대로 복구 (2) 기존 부재는 최대한 재사용 (3) 고증과 발굴을 통해 일제 때 철거, 변형된 좌우측의 성곽과 지반을 원형대로 복원 (4) 중요무형문화재 등 우리나라 최고의 기술자가 참여하여 전통기법과 도구를 사용하여 복구 (5) 학계전문가로 구성.. 2013. 5. 6.
숭례문-복구를 위한 노력(4)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조사 착수 숭례문 화재는 여러 방면에서 우리나라 문화재 수난 역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숭례문 이전까지 목조문화재에 화재가 발생하면 완전히 타서 없어지는 ‘전소(全燒)’였다. 숭례문은 신속하게 출동한 소방대원의 진화 활동과 화재 이전에 기둥 등 주요 부위에 살포되었던 방염제 효과로 인하여 다행히도 1층의 90%가 살아 남았으며, 문화재 방재 역사상 화재가 중간에 진압된 최초의 사례다. 따라서 화재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어디에 위치한 부재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한 조사가 가장 먼저 추진되었으며, 이어 화재 진압으로 인한 구조물의 안전성 검토 등에 대한 연구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다음 표는 화재 이후 2008년 5월부터 시작된 관련 고증 연구와 연구 용역을 .. 2013. 5. 6.
숭례문 화재가 남긴 것(3) 지난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이 불타고 있다.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방화사건이었다. 한 노인의 방화로 상층부 90% 훼손 숭례문 화재는 2008년 설날의 마지막 연휴의 저녁에 발생했다.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의 어처구니없는 방화에서 비롯되었다. 방화의 상황을 살펴보면,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오후 8시50분경 숭례문 주변도로를 지나던 택시기사가 숭례문 2층 누각 좌측에서 연기가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여 119에 최초 신고한 화재로, 방화자인 채모씨가 8시 47분경 사다리로 서쪽의 문루 담장에 사다리를 대고 넘어가 문루의 계단을 통해 2층 누각에 침입하였다. 누각 2층 중앙에서 미리 준비한 시너 1.5리터 3병 중 2병을 세워놓고 1병을 흘려 1회용 가스.. 2013. 5. 6.
숭례문 - 수난의 역사(2) 1904년 무렵 외국 잡지에 실린 숭례문의 모습으로, 두 개의 전차선이 부설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을사오적, 숭례문 성곽을 제거하자는 상소 올리다 숭례문은 조선 후기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898년 12월에는 종로에서 용산을 잇는 전찻길이 생기면서, 숭례문 홍예를 관통하는 선로가 부설되었다. 1904년에는 숭례문 앞에서 다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또다른 선로가 부설되었다. 이로써 숭례문 홍예는 사람, 마차, 말, 전차 등이 뒤섞여 매우 복잡한 통행로가 되었고, 달리는 전차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게 되는 사고가 연이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차를 없애자거나 운행을 방해하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교통은 성곽을 철거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1907년 4월 .. 2013. 5. 6.
숭례문 건립과 수난의 역사 (1) 현재까지 알려진 숭례문의 가장 오래된 사진(1890년대, 조선국진경.) 숭례문, 1398년 태조 7년에 건립되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종묘와 사직, 궁궐, 도성의 순으로 도시 기반을 건립함으로써 수도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도성의 공사는 태조 4년(1395)에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태조 5년(1396) 1월 9일 민정 11만여 명을 징발하여 작업구역을 할당하고, 도성개기(都城開基)의 제사를 치르면서 시작되었다. 숭례문에는 별도의 성문제조(城門提調)를 두어 성곽공사와 구분하여 숭례문 공역의 중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숭례문 공사는 태조 7년(1398) 2월 8일 태조가 직접 숭례문을 둘러봄으로써.. 2013. 5. 6.
5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5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김시습(1435~1493)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읽고 3세 때 글을 지었으며 5세에 , 을 배워서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보고 정말 기특한 재주라 칭찬하고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부르고 지신사 박이창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먼저 써 내려갔다.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창공을 춤추는도다" 김시습이 대구를 맞추었다. "성주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공중에서 끔틀거립니다"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릎 위에 앉히고 여러 번 시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좋은 시를 척척 지어 내었다. 세종은 직접 김시습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소문이 나는 .. 2010. 4. 21.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일등공신-배극렴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 일등공신- 배극렴 배극렴(1325~1392)의 자는 양가量可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여러 번 문하좌시중에 이르렀고, 청렴하고 근검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양왕 4년(1392) 6월 16일에 조준, 정도전 등 대소 신료들과 함께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유하여, 태조가 드디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 신의왕후는 청주 한씨이다. 6형제를 낳았는데 정종이 둘째이고 태종이 다섯째이다. 또 둘째 왕비 신덕왕후 곡산 강씨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방번이 일곱째 왕자이고, 방석이 여덟째이다. 어느 날 태조가 배극렴과 조준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세자 책봉을 상의하였다. "평화 시대엔 맏아들이 우선이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2010. 4. 21.
`사문난적`이 될지라도-윤휴 ‘사문난적’ 이 될지라도… 송시열의 숙적, 백호 윤휴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반기 든 학자… 조선의 위기에 대한 복고적 해법에 반대하여 다원 사상 체제를 주창 양란(兩亂·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지배층의 무능을 여실히 목도한 피지배층들은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체제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의 완화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사대부 계급은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 1653년 윤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서인 학자들이 모였던 죽림서원.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인 영수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한 세력은 주자학 유일사.. 2010. 1. 19.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 유수원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경종에 대한 충성을 간직하다 영조 때 사형당한 실학자 유수원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했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한다. 상공업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314쪽) » 유수원은 나주벽서 사건에.. 2010.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