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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숭례문(5)

by 싯딤 2013. 5. 6.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온 숭례문 숭례문, 그 600년의 변화 (5): 숭례문 복구 작업    

 

숭례문 복구 조감도 <사진: 문화재청 제공>

 

숭례문 복구의 여섯 가지 원칙

 

숭례문의 응급한 화재수습을 마무리하고, 2008년 5월 20일 숭례문 복구의 기본방향, 추진계획 등을 담은 ‘숭례문 복구 기본원칙’가 발표되었다. 복구방향은 숭례문 중건과 변천과정을 면밀히 고증조사하여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으로 복구, 수도서울의 랜드마크로 다시 설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며, 국민의 상실감 치유와 자긍심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복구의 기본 원칙은 여섯 가지로 정하였다. (1) 성문은 화재 전 모습대로 복구 (2) 기존 부재는 최대한 재사용 (3) 고증과 발굴을 통해 일제 때 철거, 변형된 좌우측의 성곽과 지반을 원형대로 복원 (4) 중요무형문화재 등 우리나라 최고의 기술자가 참여하여 전통기법과 도구를 사용하여 복구 (5) 학계전문가로 구성된 ‘숭례문 복구자문단’을 구성, (6) 국가직영 추진방식으로 예산, 기술지원, 공사시행 등은 문화재청에서 담당 하는 등의 원칙이 그것이다.1)

 

2008년 5월30일 화재수습을 마무리하고, 복구를 위한 고증 및 발굴조사, 설계, 각종 연구 등을 통하여 완벽한 복원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추진하였다. 2009년 말에는 복구에 참여할 중요무형문화재 각 분야의 장인을 선정하였다. 장인은 목공사를 담당할 대목장, 성곽 등 석공사를 담당할 석장, 단청작업을 담당할 단청장, 기와제작을 담당할 제와장, 지붕 기와잇기를 담당할 번와장 등 5개 종목의 여섯 분으로 선정방법은 각 장인의 제안서를 바탕으로 문화재위원회 및 숭례문 복구자문단에서 심의 검토하여 선정하게 되었다. 복구를 담당할 조직으로 숭례문복구단을 구성하였는데, 단장은 문화재보존국장으로 하고, 기술, 고증, 행정지원의 세 개의 팀으로 구성했다.

 

복구 작업은 2010년 2월 10일 화재 2주기를 맞아 착공식을 거행함으로써 3년여의 복구작업의 시작을 알렸다.

지난 2010년 2월 10일 복구공사 착공식 모습 <사진: 문화재청 제공>

 

현대의 기계작업을 버리고 전통방식을 따르다

 

성곽공사는 문루복구와 함께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의 하나이다. 옛 사진자료와 지적도, 투시도법을 통해 원래의 선형을 확인하였고, 남아 있는 도성의 축조양식을 고증하였다. 복원범위는 도로 등으로 복원이 어려운 부분을 제외한 최대한 복원토록 하였다. 동측으로는 당초 88m를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남대문시장으로 연결된 지하보도가 구조적으로 취약하여 더 이상 복원할 수 없어 53m까지 복원하였고, 서측으로는 70년대 지하철 1호선이 서측 바로 앞까지 접근해 있어 16m 정도를 복원하게 되었다.

석재의 수급은 원 석재의 성분분석을 통해 가장 유사한 포천석을 사용하게 되었고, 가공의 과정은 옛 전통방식을 따랐다. 큰 돌에 쐐기를 박아 쪼개는 작업부터 정다듬을 통해 형상을 만들어갔다. 특히 인근에 대장간을 만들어 정 끝이 마모된 것을 불에 달구어 벼르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현대에 사용하는 정에는 정 끝에 중석을 박아 끝이 무뎌지지 않도록 하였으나, 끝이 날카로운 가공이 되지 않도록 숭례문 현장에서는 중석이 박힌 것을 사용하지 않았고, 일일이 정을 벼려가면서 작업하게 되었다. 직접 성벽 쌓은 돌을 가까이서 보면 그 느낌이 자연스러움을 알 수 있다.

 

숭례문 대장간의 모습. <사진: 문화재청 제공>

 

전통방식의 석재 가공. <사진: 문화재청 제공>

 

가장 중요한 재료 소나무 150여명의 국민이 기증 의사 밝혀

 

문루는 타다 남은 구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면서 파손된 부분의 목재를 새로이 수급하여야 했다. 화재 직후 문루 복구에 가장 중요한 재료인 소나무를 150여명의 국민이 기증의사를 밝혔다.

자체적인 수급을 우선하였으나,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 의사를 뿌리칠 수 없었다. 일일이 전화 확인과 현지조사를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대부분은 사용이 어려웠다. 벌채가 불가능하거나, 산중 깊은 곳으로 운반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소나무의 직경이 너무 작아 활용도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 10여 곳의 목재를 수급하게 되었다.

자신의 관 제작에 쓰려고, 집을 지으려고 준비한 재목을 기꺼이 내어 놓고, 집 앞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꼭 써달라고 하면서 문화재청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본인이 직접 베어 숭례문에 가져다 놓겠다는 분들도 있었다. 또한 문화재청에서 직접관리하고 있는 삼척의 준경묘(태조의 5대조묘) 주변에는 길고 곧게 뻗은 큰 소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 곳 목재 10주를 베어 오기도 했다.

목재조사와 벌채 작업. 많은 국민들이 기꺼이 소나무 기증의 의사를 밝혔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이렇게 수급한 큰 소나무는 원목 그 자체로 처음부터 기계를 사용하지 않은 전통방식으로 가공해 나갔다. 거피칼로 껍질을 벗겨내고 3년여를 그늘에서 건조하였다. 문루의 목재 조립에 앞서 새롭게 사용되는 목재는 일일이 확인하여 규격에 맞게 만들어 내야 했다.

판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켜기톱으로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작업을 하였다. 옛날에는 인거장이라 하여 목수와는 별도로 목재를 켜내어 제공하는 역할을 한 장인이 있었다. 원목 등의 큰 규격의 부재도 도끼, 톱, 자귀 등을 이용하여 다듬었다. 목공사도 현대에 기계화가 많이 되어 좀 더 손쉽게 할 수 있었으나, 사라져가는 전통기법을 전승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인거와 자귀질은 할 수 있는 장인이 많이 없어 전통기법의 계승에도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전통 기법에 의한 목재 켜기 작업 <사진: 문화재청 제공>

전통방식의 목재 가공 <사진: 문화재청 제공>

전통 기와와 단청을 살리기 위한 노력들

 

숭례문 복구에서 가장 되살리고픈 것 중의 하나가 전통방식의 제작 기와이다. 근래의 문화재 수리는 대부분이 공장에서 제작한 기와이다. 프레스기로 찍어내어 공극이 없고 강도가 필요이상으로 높다. 그러나 무게가 전통기와에 비해 2배 가까이 무겁고 차가운 느낌이다. 옛 멋을 느낄 수가 없는 단점이 있다.

전통방식으로 제작한 기와는 그동안 싸고 강도가 좋은 공장제 기와에 밀려 그 명맥이 단절위기에 있는 상태였다(중요무형문화재 제와장으로 한형준선생이 유일하며, 85세로 활동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전통기와의 사용은 단지 단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재료로써의 충분한 기능을 유지하는지가 중요하다.

특히 공극이 많아 습기를 머금고 겨울에 얼어 동파가 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이러한 문제점을 우선 해결해야 사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제와장이 만든 기와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극한의 조건으로 실험하고, 현장에 2년간 야외에 노출하여 문제점을 검토하였다. 다행히 결과는 아주 양호하게 나타나 숭례문의 지붕에 전통기와를 사용하게 되었다.

수키와 잇기 모습

암키와 잇기, 와정을 박아 기와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다.

 

한편 전통 기왓가마를 고증에 따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부지 내에 2기를 만들었다. 인력뿐 아니라 굽는 과정도 전통 방식을 적용하였다.

숭례문 복구용 전통 기와 생산을 위한 전통 기왓가마의 모습 <사진: 문화재청 제공>

 

이와 잇기 작업1

 

이와 잇기 작업 <사진: 문화재청 제공>

한편 단청 안료는 그동안 화학안료를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 환경오염으로 인해 단청이 퇴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화학안료가 도입되었다. 이후 보편화 되면서 전통안료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 설계부터 전통안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정하였으나, 그 과정은 험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안료를 생산하는 곳이 없어 중국, 일본 등 현지조사를 통해 품질과 수급 여건을 검토하게 되었다.

 

전통 단청안료 풍화시험 <사진: 문화재청 제공>

시험 채색하는 모습<사진: 문화재청 제공>

일본은 전통방식으로 안료를 만들어 주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품질의 안정성이 인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제품을 숭례문 복구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많았다. 하여 국산화의 가능성도 검토하게 되었다. 문헌상에 나타난 포항 장기(뇌록안료의 수급처)를 직접 조사하여 그 채취가 이루어졌던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 양이 적고, 채석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석간주(기둥 등에 칠하는 붉은색의 안료)와 호분(조개껍질을 원료로 만든 흰색 분말) 정도만이 국산화가 이루어 졌다. 단청은 예로부터 일부 안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하였다. 숭례문에 일본산 안료를 사용한 것은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향후 이러한 단청안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내에서 직접 가공 생산할 수 있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밖에 전통철물의 제작 및 사용, 기와잇기와 미장 등도 최대한 전통기법을 적용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홍예 천정의 용문양 <사진: 문화재청 제공>

숭례문 복원, 일제 해방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수리

 

숭례문은 일제에서 해방 이후 단일 건물로 가장 큰 규모의 수리였다. 공사관계자들, 참여 장인들, 공사를 직접 운영하는 문화재청에서 우리나라 문화재 수리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목재 조립 모습

 

2013년 3월 공사중인 숭례문.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와 국보 1호의 위상을 당당히 보여주길 많은 국민들이 기다려왔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아직도 전통기법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전통재료와 전통기법을 알 수 없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이번 숭례문 복구가 우리나라 문화재 수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를 통해 앞으로의 문화재 복원 연구와 노력들이 더욱더 박차를 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글 조규형 /문화재청 시설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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