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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31

주영, 영수 두 자녀.. 결혼한 이듬해인 1991년 여름, 주영이가 태어났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안양으로 이사한 후, 인덕원고등학교와 가천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직장에 다닌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쾌활하게 잘 자라, 2020년 결혼, 가정을 이루었다. 둘째는 1994년 태어나, 안양-백영고-한양대 화공학과를 졸업한 후 관련회사에 다닌다. 전곡 최전방 GOP에서 의무병으로 군생활을 했는데, 세어보니 제대할 때까지 외출, 휴가합쳐 14번을 차로 태우러 갔었다. 둘째는 성격이 좀 특이한 면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학급 문예지에도 반 친구들이 쓴 글을 보면, “우리반에는 좀 특이한 애가 있다.. 수학박사다. 가방에 짱구 만화책이 있고, 쉬는 시간엔 성경책을 본다. 애들을 잘 놀린다“ 라고 친구들이 언급한다. 유치원 때.. 2021. 11. 19.
네비게이토와 주안장로교회 복학 후 2학년 어느날, 교정 농구장 근처,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데 홍겸형제가 다가와 처음 듣는 쉬운 기독교리로 전도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구원의 교리가 쉽게 이해되었다. 이후로 네비게이토 선교 모임을 10여년 함께 했다. 성경구절을 외우고, 주말에는 성경공부 모임을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훈련받았다. 주일에는 주안장로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제자성경공부 1년과정 땐 성경 한권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3, 40대의 삶은 전체가 믿음생활이었다. 주안장로교회에서 안수집사 직분을 받은 뒤, 어느날 안산 인도네시아 외국인직장인 쉼터를 찾아 전도를 했다. 부평 미군부대 자리에 큰 성전을 지어 이사가는 시점에 우리는 안산으로 이사했다. 안산의 광림교회에서 믿음생활을 몇 년 한 뒤, .. 2021. 11. 19.
아내를 만나다 1989년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 둔 늦가을 어느날.. 오후 강의 휴강으로 집에 일찍 돌아와 골방에 누워 상념에 빠져 있는데 동생이 방문을 두드렸다. 앳된 미 소녀가 신앙계에 실린 내 글을 보고 몇 번 글을 보냈지만 무소식이자 찾아 왔다고 했다. 우리 집은 옛날 기와집의 허름한 주택이라 커피 한 잔 마실 분위기가 아니라서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부평역으로 나갔다. 우리는 부평역이 보이는 3층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내의 첫 인상은 천사같았다. 예쁘고 곱고 가냘펐다. 어느 부잣집 외동딸이 세상 물정 모르고 훌쩍 집을 나온 느낌이었다. 전남 광주에서 지리도 모른 채 고속버스를 타고 무작정 올라왔다고 했다. 인천 숭의동 터미널에서 계산동까지 오는 길도 만만치 않은데 찾는데 힘들었을 걸 생.. 2016. 12. 25.
1987년, 어머니.. 숙이를 만난 그 해 가을,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태해지셨다. 어머님이 입원한 지 2개월여 지난, 어느 가을 날 늦은 오후, 교내 방송에서 어머님이 계신 병원으로 가보라는 멘트가 있었다는 얘길 듣고 급히 부평 연합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을 찾아 가늘어진 어머니 손을 감싸니, 나를 알아보고 주루룩 한 줄기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 가족은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날 밤, 자정을 10여분 남기고 어머님은 눈을 감으셨다. 평생 고생만 하시고 효도 한 번 못받아 보신 어머님.. 네비게이토 동아리 학우들이 3일 동안 함께 해 주었다. 숙이도 이틀간 설겆이 등 궂은 일을 거들어 주었다 어머님이 떠나신 후, 해마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심란해진다. 어머님이 떠난 후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창고를 개조.. 2015. 2. 2.
1987년 여름.. 1987년, 어수선했던 1학기가 지나고 하기방학을 하면서 인천 경인에너지 내, 야외수영장을 관리하는 알바를 했다. 이 시기, 알바가 그렇게 활발한 편은 아니었는데, 정부가 시위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알바 채용을 정책적으로 권장했다. 첫 날, 남학생 넷, 여학생 여섯명이 안내받은 장소에 모였다. 남학생 넷 중 한 명은 우리 학교 기계과였고, 둘은 고대, 체대.. 여학생들은 인천대, 인천교대, 성심여대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사무보조, 남학생들은 회사 내 야외 수영장 관리일을 맡았다. 남학생 네 명은 사내 수영장에서, 개장시각 전 물 교체, 약품 투여, 개장 후 안전관리 일을 했는데, 회사의 수영장을 여름방학동안, 직원 가족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이 때 인연이 되어 숙이를 알게 되었다. 숙이는 전남 나주 출.. 2015. 2. 2.
1987년.. 1987년은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 해이다. 나에겐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 해이고, 군 제대 후 2학년에 복학한 뒤 여러 일이 있었던 잊을 수 없는 해이다. 2학년에 복학했는데, 학기 초부터 교내 시위가 계속되고 어수선했다. 전국 대학들이 직선제 개헌 데모를 하면서 학교재단 투명성 요구, 부정 입학 등의 학내 민주화 요구의 회오리가 세차게 일었는데, 우리 학교도 교내 인경호에 있던 학교 설립자 이승만 동상이 학생들에 의해 철거되고,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회에 의해 부정입학자 명단이 공개되면서 총장, 재단 퇴진 요구 등 시위가 커져 갔다. 우리 전기과도 교수들의 강의 수준, 보직교수 대신 시간강사에 의한 강의 등으로 불만이 쌓여 있던 중, 전기공학과 교수 가운데 모교 출신의 교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교.. 2015. 2. 2.
군생활(3) 1985년 크리스마스 이브, 회식을 마치고 잠자리에 든 내무반에서.. 상병 말부터 병장 계급을 달고 내무반장을 10개월 동안 했다. 이 무렵 선임하사가 수시로 나에게 하사관 복무 또는 군무원으로 근무하기를 권고했다. 학교는 원주로 편입하여 근무하면서 다닐 수 있다고 했다.실제로, 여군 하사관을 비롯한 몇 명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사령부 관제부서에 군무원과 그 따님이 함께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나를 데리고 가 인사를 시킨 뒤, 한 참 나의 장점을 들려 주며,"미스 리, 송병장 어때? 둘이 사귈래? 미스 리 좋다고만 하면 내가 군무원으로 잡아 놓을테니까.." 이 후 제대할 때까지 두어 번 원주 시내에서 만나 데이트를 했다. 그럼에도 내가 제대한 이유는 원주에서 대학 졸럽하고 평생 군에 몸.. 2015. 1. 2.
군생활(2)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직 후 내무반에서..일병 때(1984년) 내가 소속된 본부사령실 시설대 중대 내무반에는 병장 대여섯, 상병 둘, 일병 10여명 등 20여명 가량이 있었는데 6개월 만에 들어온 이등병인 나는, 쫄병 생활을 길게 했다. 나의 군 시절은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는데, 자대 배치된 시점이 정용진 1군사령관이 소준열 사령관 후임으로 온 지 4개월 된 시점이었는데 자대 배치 15일 만에 사령관 한남동 자택을 개보수하는 데 파견되었다. 한 달여 파견 근무 후 부대로 돌아오니 15일의 포상휴가가 주어졌다. 내무반장이 나를 불러 아직 이등병이니까 1주일만 다녀오라고 했다. 이 후 나의 군 생활엔 1군사령부 내 전기시설 보수업무가 주어졌다. 전기설비 담당은 군무원 두 분, 사병 5명이 있었는데, 공관 형.. 2015. 1. 2.
군 입대 원주 1군사령부 본부사령실 시설대 자대배치 후 얼마 안 된 이등병 시절 늦게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3년여 근무했던 직장을 그만두고 1학년을 마친 1983년 12월 5일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머리를 빡빡 밀고 입대하던 날, 수원역에서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가려진 창 밖의 생소한 풍경을 말없이 응시하며 30개월의 군 복무를 생각하니 착잡했다. 군용열차 옆자리에 프로야구 청보핀토스의 이철성 선수 등 몇몇 선수가 자리했다. 훈련소에 도착하니 양세종 선수도 입대해 있었다. 조교가 양세종 선수에게 돌로 저만치에 있는 나무를 맞춰보라고 했다. 첫번째는 실수, 두번째에 맞추자 박수가 터졌다. 이후 신체검사에서 양세종은 돌아갔고 후에 제대해 보니 면제로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1983년 한 겨울, 28연대에서의 4.. 2015.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