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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31

낭만 대우자동차 근무 시절(1980년), 안양유원지 대우자동차에 다닐 때 우리 입사 동기 몇 명은 친했다. 익산 함열이 고향인 수정이, 무안이 고향인 경규와는 유독 친했다. 그 시절, 수정이 매형의 여동생이 부천 한국화장품에 근무하여 화장품 회사 여직원들과 안양 유원지로 놀러 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 로 사귀게 되고 생일날엔 함께 모여 생맥주 파티를 하고 디스코장엘 갔다. 수정이는 착하고 예쁜 영숙이를 좋아했지만 아쉽게 소원해졌다. 한번은 퇴근 후 수정이와 함께 부천 송내역 부근에서 영숙이 자취하는 집 근처에서 기다렸다 마주쳤는데 부끄러워하며 아직 어린 나이라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고 한 것 같은데 며칠 후 수정이가 그냥 안만나고 있다고 했다. 홍근이는 옥수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더니 결국 결혼하여 딸 둘, .. 2015. 1. 2.
대학 진학 대우자동차에 특례보충역으로 근무 중, 틈틈이 공부하여 대학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늦게 군입대 이 무렵 해마다 발행되는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단편소설집을 모두 읽었다. 김승옥, 한승원, 박범신, 김주영의 소설을 빼놓지 않고 모두 읽었는데 한승원의 남도 어촌 포구의 삶을 그린 한서린 소설들은 어릴 적 상포, 곰소 외가를 떠올리게 하였다. 포구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모습을 방언체로 실감나게 그렸다. 한승원씨는 곰소중 교사도 지내셨는데, 기력이 쇠하셔서 누워계시는 일이 잦아진 어머니 곁에서 나는 한승원의 '홀엄씨'를 읽어드렸다. 2015. 1. 2.
대우자동차 근무, 4년... 대우자동차 근무, 4년.. ^ 1979년 4월, 대우자동차 입사 농업고를 졸업한 2년 후인 1979년 봄, 직업훈련원에 다니던 중, 인천 부평에 있는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론 잘 해 낼 수 있을 지 불안하기도 했다. 1주일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공무부 전기과에 동기 9명과 함께 기능직 사원으로 배치되었다. 나에겐 공장 내 모터를 수리하는 일이 주어졌다. 모터 수리작업을 혼자 해 온 부서 형이 경력이 없는 나에게 스스로 체득한 권선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소손된 모터를 주로 권선하는 작업이었지만, 소형 직류모터에서부터 100kW가 넘는 대형 모터 등을 포함하여 모든 전기기기들을 수리했다.입사 첫 해의 급여가 99,000원이었는데 잔업수당을 포함하면 실제 급여는 12만원 정도 됐다... 2010. 7. 27.
`電氣`를 배우다 '전기電氣'를 배우다 / 전주직업훈련원 시절 ^ 전주직업훈련원 재학시절, 기숙사에서(1978) 전경 모집에 지원했다가 신체검사에 불합격하고는 흥덕 집에 가려고 전주터미널로 향했다. 아침에 나올때 어머니가 챙겨 줬던 고구마를 먹으며 차비를 아낄려고 낯선 시내를 1시간 넘게 걸어 터미널에 거의 도착할 무렵, 도로변 한 게시판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직업훈련원이 개원하여 올해 첫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문의처 등 주요 사항을 메모한 뒤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곰곰히 생각하니 나에게 기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훈련원에 전화하여 원서 교부장소, 필기시험 수준, 취업율 등을 문의한 뒤 면사무소에 가 응시원서를 받아 왔다. 전기과에 지원하는 원서를 써 등기우편으로 발송한 후 국어 수학 .. 2010. 7. 24.
제주도의 겨울바람 제주도의 겨울바람 ^ 건업사에서 잠시 일하던 시절(1977), 만동 형과 제주항 방파제에서. 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 , 나는 제주도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큰 형한테 갔다. 제주도에는 우리 동네에서 이사 간 만동이 형 가족도 살고 있었는데 나는 형과 함께 건업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일하게 된 일터였다. 만동 형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입학만 하고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집은 지붕 처마가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낮았고, 저녁 밥 지을 때가 되어도 형네 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굶는 게 일상이었다. 형의 어머니는 허리는 반으로 굽고 반백의 헝클어진 머리에 입에는 항상 긴 담뱃대가 물려 있었다. 그.. 2010. 7. 21.
고교시절 고교시절 ^고3 소풍 때 (1976) 농업고에 응시하던 날, 국어 선생님은 정읍까지 오셔서 오전 시험 치루고 나온 우리학교 서너 명 애들을 데리고 가서 짜장면 한 그릇을 사 먹였다. 흥덕에서 정읍까지는 16km인데, 버스로 통학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통학비 때문에 자전거 한 대를 사 주었다. 키가 작아 자전거 패달이 완전히 닿지를 않았지만 자전거 타는 즐거움으로 며칠 간은 신이 났다. 그러나 한달도 못 돼 힘이 들어 자전거 통학을 포기해야 했다. 40리길을 가는데, 차가 쌩쌩 달리고 언덕이 계속 이어져,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넘어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 중 코피가 주루룩 흘러내리곤 했다. 버스타고 통학하라는 어머니 말씀이 고맙긴 했지만 내 차비를 어떻게 마련하려고 그러실까 생각하면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 2010. 7. 20.
중학시절 중학교 시절 ^ 중3 (1973년),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1971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무시험전형 입학제도가 전국에 순차적으로 도입되면서 무시험 입학이 적용된 첫 해였다. 알파벳도 한 번 안써보고 진학을 한 탓에 음악노트처럼 줄이 그어진 노트에 알파벳 쓰는 연습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등잔 밑에 엎드려 볼펜 윗 쪽에다 펜촉을 끼워 잉크를 찍어 쓰는 펜글씨는 노트에 박히기 일쑤였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정읍에 나간 길에 하늘색 만년필을 하나 사왔는데 다음날 학교에 가서 잃어 버렸다. 아버지가 알기 전 어머니가 비슷한 걸로 사왔다. 질이 떨어진 거였는 지 잉크가 잘 나오질 않았다. 나의 영어 성적은 유난히 안좋았다. 1학년 담임이 영어선생님이었는데 유독 나를 미워했다. 학교 옆이 우리 밭이었는데 아버지는.. 2010. 7. 19.
ww 2010. 7. 16.
어머니 어머니 (1) 어머니는 1922년, 질마재가 있는 고창 서해바닷가 상포마을에서 태어나, 88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해인 1987년, 6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결혼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안 때는 나이 서른을 넘겨,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영등포 이 모한테 전해들은 여동생으로부터였다. 어머니는 고창의 권세있는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갈 때 시댁에서는 친정에 전답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두 분은 동네에서 금슬 좋기로 소문이 났고, 어머니는 안방마님으로서 남부러움 없는 신혼을 보냈다 한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어도 애가 들어서는 소식이 없자, 결국 시부모는 모처에 첩을 두어 아들에게 들락거리게 하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보내려 했다. 이것을 안 아들이 어느 날 약을 마시고 세.. 2010.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