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1)
어머니는 1922년, 질마재가 있는 고창 서해바닷가 상포마을에서 태어나, 88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해인 1987년, 6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결혼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안 때는 나이 서른을 넘겨,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영등포 이
모한테 전해들은 여동생으로부터였다.
어머니는 고창의 권세있는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갈 때 시댁에서는 친정에 전답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두 분은 동네에서 금슬 좋기로 소문이 났고, 어머니는 안방마님으로서 남부러움 없는 신혼을 보냈다 한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어도 애가 들어서는 소식이 없자, 결국 시부모는 모처에 첩을 두어 아들에게 들락거리게 하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보내려 했다.
이것을 안 아들이 어느 날 약을 마시고 세상을 떴다.
어머니도 따라 죽으려 약을 먹었으나 죽지 못했다. 이후로 어머니는 오장육부가 상해 평생 해소기침을 달고 살았다. 내 어릴 적 어머니의 강그러지듯 숨넘어가는 기침소리는 그 때문이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주위의 권유로 아버지와 가정을 꾸렸다.
이즈음 아버지도 큰형을 낳은 아내를 잃고 혼자였다.
두 분은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면서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께 정을 두지 못한 것 같다. 우리 7남매 중 어머니 핏줄은 나와 동생, 둘이다.
형, 누나들이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알려 주셨다. 그즈음 초본을 떼었는데 어머니 성명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의아해서 아버지께 계속 물었더니 '그 이름은 네 큰어머니다. 애 낳은 뒤 내가 복어국을 끓여 주었는데 그걸 먹고 독으로 죽었다.' 고 하셨다.
어릴 적, 외갓집 가는 길은 멀기도 했다. 하루 한번 왕복하는 낡은 버스는 운행이 안되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타게 되면 황토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고장이 나기 일쑤여서 중도에서 걸어 해 질 무렵에야 외갓집에 도착하는 때도 있었다.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반가워해 준 사람은 외할머니셨다.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도 자주 오셨다. 밭일이 바쁜 농사철엔 단쑤시를 마디마디 잘라 한아름 이고 먼 길을 오셨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곱고 아름다웠다. 음식 솜씨가 뛰어나 동네에 큰 일이 있는 날에는 어머님이 음식 간을 보았다. 잘 사는 집 잔칫날에는 사람을 보내왔다. 잔칫날 불려다니는 어머니를 아버지는 못마땅해 했다. 늦은 밤, 잔치음식을 싸가지고 와 우리들을 먹이면 아버지는 마당 평상에 돌아 누워 뭐라고 혼자말을 하시곤 했다.
고추장, 간장도 잘 담가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장독대의 장이 익어갈 무렵이면 동네 누군가 몰래 장을 퍼 갔다. 어느 핸가 한번은 몰래 퍼 간 뒤 물을 부어 놓아 장맛이 변해 버렸다. 그 해 어머니는 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솥에 붓고 몇 번을 끓여내어 보았지만 제 맛을 낼 수가 없었다.
메주를 빚기 위해 종일 장작불로 메주콩을 쑤는 날에는 고구마를 얹어 함께 삶았다. 그 고구마는 정말 달고 찰졌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다가오면 고구마로 엿을 빚고 깨강정, 콩강정, 오꼬시를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바느질도 잘 하셨다. 우리 집엔 발로 돌리는 재봉틀이 있었는데 베게잇을 누비고 헌옷을 뜯어 다시 옷을 만들어 입히고 손바느질로 이불을 만들어 덮어 주셨다. 장에서 베를 떠다 아버지 두루마기를 손수 만들기도 하셨다. 눈이 희미해져 바늘귀에 실을 꿰지 못할 즈음 어머니는 나를 곁에 두고 시켰다.
세월이 더할수록 밤이면 해소천식으로 기침을 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잠자는 자식들이 깰까 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 걸걸 숨을 들이쉬며 참아냈다. 잠시 가라앉나 싶으면 봉초를 말아 피셨다. 한모금 빨자마자 애간장이 끊어지고 숨넘어갈 듯 강그러지게 기침을 해 댔다.
이무렵, 흥덕 5일 장날, 어머니는 전 남편의 시동생을 장터 식당에서 만나 안부를 묻고 눈물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19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인천으로 이사했다.
주름살이 많아지고 기력이 쇠퇴해진 어머니 곁에서 내가 한승원의 ‘홀엄씨’를 읽어주었을 때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 내가 늦게 대학을 가게 되고 자꾸 용돈이 필요하게 되자 어머니는 인천 병방리로 밭일을 나가셨다.
군에 입대하여 휴가 나올 때 나는 군대 담배를 모아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이런 나 때문이었는 지 어머니는 1987년, 65세를 일기로 일찍 돌아가셨다.
평생을 몰래 삭이면서 고생만 하신 어머니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무렵부터 ‘너 여의는 것 보고 죽어야 헐튼디..’ 하셨는데, 며느리 손자 못보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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