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 중3 (1973년),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1971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무시험전형 입학제도가 전국에 순차적으로 도입되면서 무시험 입학이 적용된 첫 해였다.
알파벳도 한 번 안써보고 진학을 한 탓에 음악노트처럼 줄이 그어진 노트에 알파벳 쓰는 연습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등잔 밑에 엎드려 볼펜 윗 쪽에다 펜촉을 끼워 잉크를 찍어 쓰는 펜글씨는 노트에 박히기 일쑤였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정읍에 나간 길에 하늘색 만년필을 하나 사왔는데 다음날 학교에 가서 잃어 버렸다. 아버지가 알기 전 어머니가 비슷한 걸로 사왔다. 질이 떨어진 거였는 지 잉크가 잘 나오질 않았다. 나의 영어 성적은 유난히 안좋았다. 1학년 담임이 영어선생님이었는데 유독 나를 미워했다. 학교 옆이 우리 밭이었는데 아버지는 수시로 학교 화장실 변통을 열어 지게로 길어다가 밭에 뿌렸다.
그 때마다 온 학교에 냄새로 진동했다. 담임선생님은 찌푸리며 나에게 ‘야! 니 아버지 담에 푸라고 해라. 가서 일요일 하라고 해라!’ 라며 나를 밭으로 보냈다. 반 애들도 웅성거리며 욕설도 해댔다. 선생님도, 영어도 싫어졌다. 2학년 때는 영어를 가르친 여 선생님이 임신으로 휴학하여 학기 초, 몇 시간을 빼고는 거의 1년간 교생이 임시로 가르쳤는데 배운게 없는 것 같았다. 3학년 땐 다시 1학년 때의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입학 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5일장에 가서 까만 교복을 사 입혔다. 3년동안 입어야 하니 낙낙한 걸로 사야 한다며 소매가 손을 덮을 정도로 내려오는 큰 걸로 샀다. 학교 빼지가 달린 교모는 머리를 푹 덮을 정도로 크고 헐렁거리고 시야가 모자 창에 가렸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교복을 입고 어색한 모양으로 첫 등교하던 날, 교문에서 규율부한테 걸렸다. 검정 스파이크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데 파란색을 신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운동화를 바꿔오려고 읍내에 나갔다가, 이미 신은 거라 교환을 안해준다며 대신 까만 잉크물을 사 왔다. 파란 운동화에 몇 번 칠하니 까맣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갔다 돌아오니 양말에 까만 잉크가 배고, 얼마 안가 운동화도 다시 파란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교문에서 걸려 기합을 받았다.얼마 뒤, 이번에는 등교하다가 여자 핸드볼부가 연습 도중 던진 공이 내 머리로 날아와 교모 창이 부러져 나갔다. 수난 속에 시작된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래도 국어, 수학 등은 나름대로 재밌었고 성적도 좋았다.
한번은 기술선생님이 제도시간에 필요한 30cm 삼각자 두 개를 구입하라고 했다. 가난한 시골 학생들에겐 꽤 부담스런 액수였는데, 어느 날 점심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는다고 하여 교무실에 불려갔다. 같은 동네 사는 우리반 선중이와 그의 어머니가 선생님과 함께 있었다. 선중이가 어제 구입한 삼각자를 내가 훔쳐갔다고 말해 학교로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고, 돌려주던지 사 주라는 질책을 받았다. 나도 아직 삼각자를 못 산 형편인데 억울하고 분했다. 선중이한테 계속 따져 물으니 삼각자 산다며 탄 돈을 군것질 등으로 다 쓰고나서는 내 핑계를 댔다고 했다. 선중이는 골치덩어리로 소문이 난 애였다. 학교 간다며 중간에서 놀다가 수업이 끝나면 우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였고, 성적은 항상 꼴찌였다. 그나마 가끔이라도 출석하던 애가 3학년 땐 아예 나오질 않았다. 부모님들은 선중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중학교 졸업 앨범에는 선중이 혼자 유일하게 교복을 안입은 모습의 사진이다. 비록 그런 선중이였지만 마음은 여려 또래를 괴롭히거나 손버릇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중 3 때 나의 성적은 그런대로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었다. 모의고사에서 중3 전체 190여명 중 7등을 한 적도 있었다. 시험공부 때 참고서 한 권 제대로 없어 옆집 누나한테 빌려다 몇 시간 보고 바로 갔다 주곤 했었다. 당시 참고서로, 완전정복(동아출판사), 필승(교학사)이 있었는데 국어, 수학 참고서와 자습서 몇 권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어렵게 헌 거라도 구입한 것이었다. 참고서 없는 과목은 친구들한테 미리 부탁하여 빌려와 볏가마 쌓아둔 작은방 등잔 밑에 엎드려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축농증이 있다.
중3 진학상담 때 담임선생님은 아버지께 정읍 학교라도 보내실 것을 권하셨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못보낸다고 외면하셨다. 한번은 국어 선생님이 나를 불러 이리(익산)에 선생님 동생이 사는데 ‘이리고등학교’에 응시하여 그 곳에서 다니라며, 오늘 수업 끝나면 교무실로 와서 아버지 뵈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나를 독려하며 기분좋게 우리 집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선생님은 나를 자식처럼 여기듯 진심으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선상님께 폐 끼치는 일 해서 안되고 내 자식 내가 알아서 하겠다' 며 거절했다.
이후 어머니는 눈물로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전기 인문계 입시전형이 끝난 뒤 후기 실업계 학생모집 시점에, '학비가 저렴한 농업학교라도 지원해 보라' 했다. ‘농업학교라도 갈라믄 가그라’, ‘내자식 내가 알아서 하겠다.’ 는 말이 가슴 속에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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