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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39

김대중 누구도 그처럼 목숨을 걸지 않았다 ▲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지난 2000년 6월 13일 오전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한국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영남'과 '진보주의자'라는 단어가 김대중과는 얼마나 어색한 관계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경주가 본관인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19년을 보냈고 대학생이던 1992년 대선 때는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을 했으니 정서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김대중과는 가깝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김대중에 대한 영남의 저주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19년을 그 속에서 살았다. 빨갱이에 사기꾼은 기본이고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부산 사람들부터 몰살시킨다는 소문도 .. 2010. 4. 19.
`두 명의 어부를 잃은 텅 빈 마음...` 2009년 거대한 치욕의 해, 두 명의 어부를 잃은 텅 빈 마음이 텅텅 울리다 신문기사를 건성으로 읽었고 영결식 방송도 보다 말았다.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적이 없으니 존경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이가 대통령이 되고,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적이 없으니 민주주의의 숭고함을 알 길이 없는 자들이 권력을 나눠가진 지 1년 반 만에,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된 두 생(生)이 쓰러졌다. 생각이 불길한 쪽으로 뻗어가려 했다. 말하자면 저 두 죽음과 더불어, 희생과 헌신 앞에 머리 숙일 줄 모르는 후안무치한 이들은 그들의 ‘잃어버린 10년’을 결국 되찾은 것인가, 그로써 우리는 저 10년을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2009년은 거대한 치욕의 해인.. 2009. 9. 27.
정부 반대로 청와대 못 들르고 떠나... [한겨레21. 2009.09.04 ] ‘DJ 운구’ 정부 반대로 청와대 못 들렀다 이희호 여사 간절한 소망 좌절… 노제에 민감한 정부, 서울광장 문화제 지원도 거부 운구 행렬은 빨랐다. “선상님” “대통령님”을 외치며 오열하는 이들 앞에서 머물 듯 머물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할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이른 것은 8월23일 오후 4시50분이었다. 예상보다 1시간10분이나 이른 도착이었다. 텔레비전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한 조문객은 “뭐 저리 마음이 급하나”라고 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조문객은 “만장(輓章) 하나도 걸리지 않은 장례식이 무슨 국장이냐”고 아쉬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당시 서울시청 앞부터 서울역까지 길을 가득 메웠던 만장과 길가를 까맣게 물들인 리.. 2009. 9. 27.
벗겨드려야 할 DJ에 대한 오해 DJ를 보내드리기 전 벗겨드려야 할 오해 5가지 최재천 전 의원 민주당 최재천 전 의원이 ‘DJ를 보내드리기 전 벗겨드려야 할 오해 5가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남겼다. 최 전 의원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문턱까지 갔던 내란음모사건의 2004년 재심 무죄판결 당시 변론을 맡은 것을 맡은 바 있다. 그는 “김대중 시대의 공과 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시작되고 있다”며 “당파성을 떠나 역사의 법정 앞에서 바르고 공정하게 평가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보수세력의 극단적 왜곡으로 (DJ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평가가 유통되는 것 같다”며, DJ에 관한 5가지 오해를 다음과 같이 풀어나갔다. ◆“햇볕정책이 북한의 핵무기를 만들었다?”-웃기는 소리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대.. 2009. 9. 2.
박지원 전 비서실장/인터뷰 “DJ 병실 지키며 불안과 거짓말 속에서 보냈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병세 위중함에도 “곧 일어나실 것” 얘기 정부와 큰갈등 없었지만 ‘노제’ 놓고 이견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켜봤던 박지원 의원은 “굉장히 침작하신 이희호 여사가 병원에서 갑자기 뜨개질을 하시는 걸 보고, 여사님도 이제 대통령 서거를 준비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7월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8월23일 영결식을 치를 때까지 42일간, 김 전 대통령에 관한 모든 일을 도맡아 한 사람은 박지원(67) 민주당 의원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엔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고, 퇴임 뒤엔 동교동 비서실장 구실을 했던 그는 ‘디제이의 영원한 비서실장’으.. 2009. 9. 2.
연방제 통일론 계승하자 » 셀리그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DJ의 연방제 통일론 계승되어야 /셀리그 해리슨나는 1969~70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주 만났다. 그때도 그는 통일을 향한 첫걸음으로 남과 북의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방안을 이야기했다. 나는 (의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71년 한국 대선을 담당했고, 유세장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을 생생히 기억한다. 유세 기간에 그는 북한과의 화해를 부르짖었다. 그때 많은 외신기자들이 “선거가 광범위한 부정으로 얼룩졌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면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는 기사를 보냈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대선 패배 뒤, 미국 망명 기간 동안 그와 연방제에 대한 많은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의 연방제 제안에는 ‘남북한 군대의 통합’이라는 .. 2009. 9. 2.
이해찬, 추미애 님 추모 글. “민주주의 큰 기둥 잃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고동락한 이해찬 전 총리 인터뷰 이해찬 전 총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오래 함께 해 온 ‘정치적 동반자’이자 ‘민주화의 동지’관계였다. 이 전 총리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지금까지 30년 동안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이어왔다. 이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과 재야민주화운동 10년, 정치활동 20년을 동고동락했다. 이 전 총리는 특히 불과 3개월여 만에 오랜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마저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영결식장에 참석, 햇볕이 내려쬐는 데도 2시간 가까이 있었다. 그게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정신적으로.. 2009. 8. 30.
김대중 전 대통령을 되돌아 본다(3) 8. 2009 여름 다시 거리에 서다 역류의 시대가 거인을 쓰러뜨렸다노무현 장례식 ‘3시간 뙤약볕’ 결정타…입원 직전까지 ‘북핵’ 강연·인터뷰 강행군2009 여름, 다시 거리에 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역 분향소를 직접 찾아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고, 5월29일 영결식에 참석해 크게 오열했다. 민주주의·인권·평화를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하다 급기야 7월13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그를 다시 거리로 불렀는가. » 역류의 시대가 거인을 쓰러뜨렸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불가에서는 죽음을 시사(時死)와 비시사(非時死)로 나눈다. 시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해 자연스레 죽는 것을 뜻하고, 비시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어떠했는가. 여든다섯 .. 2009. 8. 29.
김대중 전 대통령을 되돌아 본다(2) 5. 1985~1996 고배를 마시다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군사정권의 탄압 이데올로기로 시작돼 민주 진영 분열·수구언론 공세 심해진 87·92년 대선 거치며 노골화1985~1996 고배를 마시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가택연금 속에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 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호남당 총재, 대통령병 환자, 거짓말쟁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질기게도 괴롭힌 ‘주홍글씨’다. 권위주의 시대 집권 세력은 ‘반독재 야당 투사’ 김 전 대통령에게 이런 낙인을 찍었다. 낙인이 통했던 배경은 지역주의였다. 정확히 말하면 ‘.. 2009.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