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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이해찬, 추미애 님 추모 글.

by 싯딤 2009. 8. 30.

“민주주의 큰 기둥 잃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고동락한 이해찬 전 총리 인터뷰



이해찬 전 총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오래 함께 해 온 ‘정치적 동반자’이자 ‘민주화의 동지’관계였다. 이 전 총리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지금까지 30년 동안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이어왔다. 이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과 재야민주화운동 10년, 정치활동 20년을 동고동락했다. 이 전 총리는 특히 불과 3개월여 만에 오랜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마저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영결식장에 참석, 햇볕이 내려쬐는 데도 2시간 가까이 있었다. 그게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친노그룹의 좌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이해찬 전 총리를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누구보다 마음이 아플텐데.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불과 100일도 안 돼 또 한 분의 큰 지도자를 잃게 돼 섭섭한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 남북화해, 민생경제를 잘 발전시키는 데 있어 (필요한) 큰 기둥을 잃었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30년 동안 모셨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1980년에 구속돼 재판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석방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에 돌아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활동하다가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 국민운동본부는 정치권, 재야운동권, 종교·시민단체 등 연대의 틀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1987년 대선이 끝나고 대선 패배와 후보 단일화 실패의 책임이 김 전 대통령에게 전가됐다. 이 때문에 당시 평화민주당은 와해 위기에 처하게 됐다.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평민당이 와해될 경우 영남에서 여당과 야당을 독식하고 호남에는 정치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후 평민당을 살리기 위해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를 만들어 1988년 2월에 입당했다. 문동환, 박영숙, 임채정 등이 이때 함께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평민당은 예상을 뒤엎고 김영삼 총재가 이끄는 통일민주당보다 10석을 더 얻어 제1야당이 됐다. 호남과 수도권에서 표가 많이 나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 이후 20년 동안 정당정치를 했고, 앞에 10년 동안 재야민주화 운동을 한 것을 포함하면 30년 동안의 인연이 된다.”

김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나.
“김 전 대통령을 모시고 당 정책위의장을 세 차례 했다. 새정치국민회의(1996년)와 새천년민주당(2000년) 때 4년 동안 했다. 다른 것보다 김 전 대통령과 정책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책 마인드가 굉장히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견실하고 꼼꼼했다. 김 전 대통령은 보고를 하면 모두 기록했다. 내가 수첩을 쓰게 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기록 습관 덕분이다. 김 전 대통령은 생산적 복지 확립,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탈출, 시장경제 정착 등을 이뤄냈다. 그 전까지 우리 경제는 관치경제였다. 재벌이 은행 차입금 기업을 운영하는 관치경제였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부채를 줄이고, 금리도 한 자릿수로 낮춰 정상적인 기업경영의 토대를 만들었다. 특히 정보통신(IT)산업 육성은 국가적으로 성공한 정책이었다. 자동차, 철강, 전자 등 중공업이 발전한 것도 모두 IT기술 덕택이다. 김 전 대통령 때 집중적으로 육성해 IT분야가 세계적으로 선두그룹에 위치하게 됐다. 인터넷은 더욱 그렇다. 인터넷 뱅킹이 일반화되고 온라인을 통해 교육 받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김 전 대통령은 전통산업 사회에서 지식기반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행사에서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이라고 했다. 이 규정에 동의하나.
“최근에 충격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경찰국가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 정권은 모든 것을 경찰공권력으로 해결하려 한다. 실제로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사건 때 경찰특공대로 진압했다. 근래 15년 사이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거리 집회도 전경을 동원해 진압하고 있다. 전경의 진압은 방어가 아닌 공격적 작전이다. 집시법이 적용되지 않는 1인 시위도 통제하고 있다. 심지어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포털사이트에 있는 조문 리본을 청와대에서 줄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부가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독재 발상이다.”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모두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의 3대(민주주의·서민경제·남북관계) 위기를 걱정했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다. 전체적으로 역사 발전에 역행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시대를 열었고, 남북관계도 대결에서 공존의 관계로 변모했으며, 민의를 반영한 선거제도가 정착되는 등 정치도 안정화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집회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도 침해되고 있고,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6000달러로 떨어졌으며, 국가부채도 100조원 가까이 늘었다. 현 정부가 토건국가를 목표로 하다 보니 교육·기술 개발 예산이 줄었다. 남북관계에서도 억류된 선원들조차 데려오지 못하고 있으며, 유성진씨도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에서 데려왔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원내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를 허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측면도 있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에 몇 번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은 나라가 총체적으로 위기에 빠진 것과 정부가 역주행하고 있는 것을 굉장히 걱정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나의 반쪽이 무너진 것이다’고 했다. 또 남북관계가 너무 나빠진 것을 우려하고 8·15쯤에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이명박 정부에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방안을 준비하다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중단됐다. 김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햇볕이 내려쬐는데도 2시간 가까이 참석했을 때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또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그토록 처절하게 치욕을 당했더라면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게 치욕을 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분노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잇따른 서거가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두 분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주개혁적인 정부, 즉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만들어냈다. 우리 역사상 1800년 정조대왕 이후 1997년까지 한 번도 민주개혁 진영이 집권하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집권한 10년 동안 민주화 사회를 만들고, 특권과 권위주의를 없애고, 개혁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또한 앞으로 남은 사람들이 민주개혁 진영을 추슬러 발전시켜 나갈 과제다. 지금은 이쪽 진영의 정당이든 시민단체이든 하나하나 역랑이 모자라기 때문에 연대를 통해 거대 여당, 족벌 언론, 독점 재벌에 대응해야 한다. 거대 권력에 대응하기 위한 연대기구를 만들어서 10월 재·보선을 비롯해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총선 및 대선에 대비해야 한다.”

민주개혁 진영이 구심점을 잃었다. 특별히 이들을 대체할 만한 정치적 리더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
“리더십은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은 오랜 민주화운동과 정당활동 등 시련을 통해 강고한 지지기반을 형성했고, 노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와 기득권을 버리는 정치활동을 통해 리더십이 생겼다. 지금은 그만한 강력한 리더십이 나올 만한 지도자가 없다. 우선은 민주개혁 진영이 연대를 통해 국면에 대응하다 보면 그 중에서 좋은 판단과 헌신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으로 리더십이 모아질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책 마인드가 굉장히 자유민주주의 틀 속에서 견실하고 꼼꼼했다. 김 전 대통령은 보고를 하면 모두 기록했다. 내가 수첩을 쓰게 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기록 습관 때문이다.”


이 전 총리를 ‘대장부엉이’로 뽑아 지지하는 카페가 눈길을 끈다. 회원들을 자주 만나나.
“지난 6월에강연 요청하러 왔을 때 만났다. 20대 여성들이 강연을 요청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 이후 충격을 더 받고, 이 나라의 방향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발전과 민주주의, 민생문제, 남북관계에서 여권에 대항해 당당하게 펼칠 사람으로 나를 주목했다. 회원이 1800명으로 시작한 이 카페는 두 달여 만에 9300명이 넘었다. 이들은 이번 김 전 대통령 서거 때도 분향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노 전 대통령 기념사업재단 사업은 어떻게 돼 가나.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유족들과 비서진이 추모기념사업회를 만들기로 했다. 추모사업회 준비위원장으로서 추모사업회 발족을 책임지고 할 것이다. 9월 말에 준비위를 발족시킬 예정이다.”

‘노무현 스쿨’을 대학원대학 과정으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몇 가지 형식으로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다. 1차적으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연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유시민 전 장관, 문성근씨 등이 강사로 참여한다. 궁극적으로는 케네디스쿨처럼 공공정책대학원을 만들어 전문적 교육과 리더십 교육을 통해 정치인, 시민사회운동가를 양성할 계획이다.”

민주당을 탈당해 당적이 없다. 민주당 복당 등 앞으로 정치할 생각은 없나.
“정당정치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다. 정당정치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폭넓은 시민정치 활동을 할 필요를 느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무브온’ 같은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과거에는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공간이 없었기에 경직된 조직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포털사이트가 발달해 온·오프라인에서 함께하면서 넓은 시민사회 정치활동을 하려고 한다.”

‘친노진영’의 일부가 최근 창당 선언을 했다. ‘친노신당’의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친노진영의 스펙트럼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 한명숙 전 총리처럼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그룹, 둘째 유시민 전 장관 같은 민주당도 신당도 참여하지 않는 그룹, 셋째 신당추진 그룹, 넷째 ‘대장 부엉이’ 카페 회원처럼 그동안 친노는 아니었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노 전 대통령에게 호감이 있는 그룹이다. 네 개 그룹이 일사분란하게 민주당이나 신당 등 어느 한 쪽으로 통합하는 것은 어렵다. 이 네 개의 스펙트럼을 하나로 관통하면서 이것이 허브가 돼 넓은 의미의 시민정치활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전체적인 민주개혁 진영의 힘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막상 ‘친노신당’ 이 창당되면 선거에서 선거연대 또는 후보단일화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거에서 후보단일화가 전에는 잘 안 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당, 시민단체 등 각 진영의 힘이 약화되다 보니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자각으로 후보연대까지 하자고 나오고 있다. 경기도 교육감 후보의 단일화와 지난 울산 재·보선에서의 후보단일화 등이 대표적인 예다. 진보 진영에서는 앞으로 지방선거에서 서로 강한 지역을 인정해 주면서 후보연대를 모색하면 전국적인 선거연대가 가능하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제는 개혁 진영의 사고가 유연해져 후보연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오는 10월의 경남 양산 재·보선에 ‘친노진영’에서 누가 나가야 할지 격론이 있는 것 같다.
“양산 선거에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출마한다. 단순한 보궐선거가 아닌 상당히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됐다. 현지 분위기는 박희태 대표가 국회의장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마한다는 소문이 퍼져 양산지역에서는 거부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쪽에서 후보를 놓고 여러 협의를 진행 중이다. 조만간에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민주개혁 진영 입장에서는 내년 지방선거가 중요한 선거가 될 것 같다. 공교롭게 지방선거가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와 맞물려 있다.
“아무래도 노 전 대통령 서거에 이명박 정부와 검찰의 잘못된 행태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문객 분위기나 여론을 보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표로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겠다는 것이 강했다. 국민들로서는 집회해도 안 되고, 항의해도 안 되니까 결국은 투표로 힘을 보여주겠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국민들이 역주행 정부에 제동을 거는 의미에서 표로 심판할 가능성은 높다. ”

내년 지방선거의 관심은 아무래도 서울시장 선거가 될 것 같다. 야권에서는 누가 후보로 나올 것 같은가.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 한명숙 전 총리와 유시민 전 장관이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지금은 실제로 이길 가능성이 많이 생겼다. 김상곤 후보가 경기도 교육감이 되는 것을 보고 그런 조짐을 느꼈다. 당선이 어려울 것으로 봤으나 끝나니까 의외로 표차가 많이 났다. 국민들의 마음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18대 총선과 17대 대선에서 표를 찍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로 봐서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로 한명숙·유시민 두 사람 중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 당연히 그 두 분을 도와주는 것이 내 몫이다. ”

‘포스트 노무현’ 구상과 관련해 앞으로 민주개혁 진영과 천민수구독재 진영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이명박 정권이 천민수구독재 진영인가.
“보수는 기본적으로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은 지난 대선 때 자기 당 후보로 인기가 높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선출하지 않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내세웠다. 이유는 자기들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화당은 정권교체를 당했다. 보수에 엄격한 도덕이 없으면 천민적 보수주의가 된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가치 지향적이지 않은 데다 토목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물질주의에 빠진 보수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정책들을 국민들은 합리적으로 보지 않는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덜 걷고, 돈이 부족하면 빚을 내며, 4대강 사업에 타당성 조사 없이 30조원이나 쏟아붓고 있다.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시장경제 시각에서 보면 합리성이 전혀 없다. 게다가 현 정부는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 최근의 언론통제 발상과 집회의 자유 제한을 보면 알 수 있다.”<위클리경향. 글·권순철 기자 .사진·김석구 기자 >

영원한 선생님을 보내며

‘정치적 딸’ 추미애 의원 추모글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8월18일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를 찾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태백산맥이 무너지는 것 같다”며 애통해했다. 3선 의원으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인 추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딸’이라고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대구 출신으로 잘 나가던 판사생활을 접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95년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추다르크’ 추미애 의원이 에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위클리경향. 편집자주>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국상의 황망함 속에서도 오늘 공개된 김대중 대통령님의 일기에서 당신이 즐겨 말씀하시던 철학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깊은 감회를 느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 당신의 삶도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대통령님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95년,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며 필생의 도전을 준비하시던 때였습니다. 대통령님의 권유로 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시대과제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아는 법조인들이나 대구의 학교 친구들은 많이들 궁금해 했습니다. 왜, 얌전한 여판사가 어느 날 정치인생으로 바꾸게 되었는지, 그것도 전혀 연고가 다른 정당에서 험난한 길을 가게 되었는지 물어보곤 합니다.

전두환 정권 말기 공안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무렵, 춘천지방법원에서 초임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100권이 넘는 책을 불온서적이라며 압수하려던 영장을 기각하는 등 공권력 남용에 수시로 제동을 걸었습니다. 어느 날 법원장이 저를 호명하더니 “당신, 김대중 정치운동하는 판사냐?”고 비아냥대듯 야단쳤습니다. 양심과 법률에 따른 초임판사의 열정이 그렇게 묵살 당했습니다. 당시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암울한 시대에 금기와 편견의 상징이었고, 불온의 대명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에게 ‘김대중’의 이름이 씌워졌지만 그 분과는 생면부지였습니다. 실제로 인연이 맺어진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995년 8월 한여름.
‘다시 태어나도 판사’라고 생각할 정도로 법관직에 대한 소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제가 느닷없이 정계 입문을 권유 받았습니다. 새로운 정당을 준비하던 김대중 총재로부터였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간의 고민 끝에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중국 음식점에서 김대중 총재 내외분과 우리 부부의 이른바 ‘정치맞선’ 자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물도 안 넘어갈 정도로 여러 날 정치 참여에 대한 치열한 번민으로 좀 야위어 보였을 때입니다.

당신께서 “어! 채시라 닮았네?” 하는 말씀으로 어려운 분위기를 풀어주시는데 정작 저로서는 얼른 걱정부터 들었습니다. 저런 노구의 몸으로 다시 정치를 이끌고 재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세 시간 가량의 만남을 통해 그런 걱정은 곧 기우가 되었습니다. 신념과 기력이 충만한 대정치인의 면모를 느꼈습니다. 당신께서 지난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어려운 고비를 넘겼는지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셨습니다. 정의가 이겨야 한다는 당위가 실현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 당시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정의가 아닌 강한 힘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50년을 독점해온 보수 기득권 정당이 계속 집권을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대화에 열중하는 동안 밀린 음식 접시는 당신이 다 비우실 정도로 식욕이 좋으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한 사람의 젊은이에 불과한 저를 건성이 아니라 성의껏 진지한 대화로 대해 주시는 대정치가의 모습은 자석 같은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그때 결심이 섰습니다. 정의가 이길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순수한 동기로 인생의 대전환을 받아들였습니다. 장래가 불투명하고 어렵고 힘든 야당을 선택한 것은 ‘노력과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서 여성 최초로 서울의 지역구에 도전해 바람을 일으키자고 함께 계시던 정대철 의원님 부부와 함께 의기투합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정치 10년째. 지지세력이 갈라진 가운데 치러진 총선에서 저에게도 낙선의 고비가 닥쳤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 퇴임하신 대통령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엄마 손이 그리운 아이들을 한 달 이상 떼놓고 고향 대구에 내려가 대선 운동하던 당시를 기억하시며 미안해 할 정도로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당신처럼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남편의 안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정치적 험로에 맞닥뜨린 제게 스승처럼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당신도 총선에서 네 번, 대선에서 세 번 떨어졌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1년간 유학을 더 연장하기로 하고 도중에 다시 찾아뵈었을 때는 약간 노기를 띠고 계셨습니다. “정치인에게는 자신을 이해하는 지지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지금은 지지세력에게 역할을 할 때”라며 “당장 정치무대로 돌아와야 한다”고 나무라셨습니다. 그러나 길게 보고 한반도 문제의 공부와 연구활동으로 미래를 준비하기로 한 제 계획을 밀고 나갔습니다. 나중에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퇴임 이후 당신께서도 외롭고 힘든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유리할 때 편승하고 불리할 때 멀리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발전시켜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그리웠을 것입니다. 외롭고 힘든 상황은 대북송금 특검이나 민주당의 분당 같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일생의 철학으로 설계하고 추진한 ‘햇볕정책’의 동요와 후퇴에서도 비롯되었습니다. 급기야 2006년 추석 무렵, 북한의 핵실험으로 햇볕정책이 당시 정부로부터도 외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당신이 직접 나서서 햇볕정책을 지켜야 했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통해 흔들리던 정부를 다시 햇볕정책으로 견인했습니다. 외신을 통해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질타했습니다. 그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부시 공화당은 참패했고, 대북 강경정책이 후퇴하면서 6자회담이 재개되었습니다.

저도 햇볕정책을 지키고 계승하겠다고 나섰지만 미력했던 활동은 다시 생각해도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 이제 민족의 고비마다 적확한 진단과 방책이 절실할 때 대통령님이 늘 그리울 겁니다. 한반도에서도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역사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듯이 평화통일도 반드시 이루어낼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어떠한 어려움을 겪더라도 끝까지 노력한다면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일기에 남기신 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그로 인해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벌써부터 그리운 김대중 대통령님이시여!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한 선생님으로 불꽃처럼 살아계실 것입니다.***


평민으로 ‘왕’이 된 최초의 사람

비주류가 천하의 길로 나선 과정은 실로 가시밭길,

시대의 고난을 대중과 역사의 근육으로 바꿔내다

» 지난 2000년 청와대를 방문한 전국 35개 분교 학생들을 만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부부가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격려하고있다. 김대중은 이렇게 외떨어진 비주류들의 주류이자 아버지였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는 아버지였고, 스승이었고, 민주사회에서는 드물게 ‘군주’였다. 민주화 역정을 거치면서 ‘군사부’ 일가를 이룬 유일한 사람. 시련을 뚫고 살아오는 의로운 생불, 활불이었다. 평화와 통일의 수도사이자 전도사였다. 한국 사회에서 ‘천형’인 호남 출신에, 학력 별무로,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무엇보다 그는 단군 이래 ‘평민’으로 처음 왕이 된 자였다. 그는 모든 비주류의 대표였다. 그는 모든 패배에서 일어서, 쓰러진 자들의 아우라이자 사표였다.

박정희의 지원을 돌파하고 국회의원으로

그는 세 가지의 신산스런 원죄와 득죄를 뒤섞인 운명으로 뒤집어쓴 채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팔자였다. 섬에서 태어난 소작농 출신의 아들로, 고졸 학력에, 돈도 사회적 배후도 없는 이에게 미래는 잘해야 쓰라린 오늘의 반복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식민지 시대 성장기 경험이 그에게 남겨준 건 고향 하의도의 토지 수탈, 조선어 교육 폐지 등에서 형성된 저항감이었다.

세 번 국회의원에서 떨어지면서 첫 아내가 죽었다. 어렵게 보궐선거(인제)에서 당선했지만 5·16 쿠데타가 일어나 사흘짜리 국회의원으로 경찰에 끌려갔던 그는, 한 번 더 출마해서야 정식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7대 국회의원 선거(1967)에서 박정희는 백범 암살 당시 경교장을 지키던 헌병 대위에서 헌병감을 거쳐 체신부 장관이 된 김병삼을 김대중의 대항마로 목포에 내세웠다. 그 포구에 다른 지역보다 빨리 ‘다이얼 전화기’가 등장하게 된 건 오직 그 선거 덕이었다(물론, 박정희 정권이 설치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남녘 포구에 내려와 주재하면서까지 공화당 후보를 지원했지만 김대중은 이를 돌파해내고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의 삶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승리다운 승리였다. 요컨대 정치인 김대중에게 정치라고 하루아침에 성공을 가져다준 건 결코 아니었다는 뜻이다.

대통령 선거도 4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억할 만한 해외 정치 지도자 가운데 대권에 네 번씩 도전한 이가 있다는 걸 듣지 못했다. 그에게 쉬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도전한 거의 모든 것에서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진흙을 묻힌 채 기꺼이 몸을 일으켰다. 비주류인 그가 천하의 길로 나서는 과정은 실로 가시밭길이었다.

의문의 교통사고, 도쿄 납치 사건,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사형선고 등 알려진 대로 그는 다섯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투옥, 망명, 연금이라는 끔찍한 상황들이 그에게서는 차라리 소박해 보일 지경이었다. 빨갱이라는 너울은 그가 세상을 뜬 이 순간에도 그를 공격하는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분단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인들에게 씌웠던 이념의 용수갓을 반대자들은 한 번도 벗겨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늘 지역감정을 밑밥으로 깔고 음모적 계략을 은닉한 채 덮쳐왔다. 여기에는 비주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출신과 성장 배경, 그리고 전라도는 그 자체로 거대한 비주류였다.
그러므로 상처 입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 맺히고, 버림받은 자들이 그와 동일시하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자연인이든 정치인이든 김대중이 겪고 당한 것들은 힘없는 저자의 백성들에게 강한 설득력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그는 삶 자체가 설화였다. 동시에 이는 그를 가장 증오하게 만드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모순과 깊은 저주의 골짜기 사이에 핀 꽃이었다. 그 꽃의 이름이 인동초다. 따라서 그의 영광은 언제든 쓰디썼고, 불행히도 저주의 새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게 바로 변치 않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꿈꾸는 세계와 가치를 향해 고난에 찬 역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술자리에만 앉아도 부르고 싶은 ‘선상님’

그가 연금되면 한국 민주주의도 막혔고, 그가 외치면 함께 울부짖고, 그가 노래하면 따라 합창했다. 그가 고통받는 만큼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해갔다. 그는 살아서 이미 순교자였다. 박해와 수난이 거듭될수록 인권에 대한 그의 의지와 신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심장 박동으로 민주주의의 시계 소리를 들었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곧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일치한다.

나아가 그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타자기’였다. 그의 발언이 찍힌 자리에 새로운 민주의 이정표가 들어섰다. 돌이켜 읽어도 생동하는 어록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세계인들은 그의 언행에서 아시아 민주주의의 발전과 변화를 읽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신념이자 삶인 민주·통일·평화가 무너지는 일은 견뎌내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한국 대중에게 김대중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형성되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은 아버지와 스승이 부재한 한국인들에게, 특히 지지자들에게는 술자리에만 앉아도 부르고 싶은 ‘선상님’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는 때로 종교보다 거룩했다. 열성 지지자들이 그의 모순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그 모순마저 사랑해버렸다.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겪은 고난을 이겨내줄 존재로 그를 신념화해 투사(投射)하면서 일어난 현상었다. 그들 사이에서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군주였다. 그가 군주가 되고자 한 게 아니라 지지자들이 저마다 자기 주군으로 삼아버렸던 것이다. 1985년 망명에서 돌아온 김대중이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아가 엎드려 울면서 이를 ‘하해와 같은 사랑’이라고 한 건 그걸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한국사는 신라 이후 고작해야 세 번 정권 교체가 이뤄졌을 뿐이다. 왕씨의 고려 개창, 이씨의 조선 건국, 일제 강점에 이은 대한민국이란 공화정 수립이 전부였다. 실로 한반도에서는 혁명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봉기를 조직하고 싸울 수 있는 배후나 기지가 없었고 외세의 영향이 강한 점, 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장악력이 높은 통치계급의 변동이 미미했던 점 등이 주요한 이유라고 해도 잘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 권력 교체는 기본적으로 지배집단 내의 변동이었다고 봐도 어긋나지 않는다. 요컨대 평민이 중심이 된 변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선출직 임기제 ‘왕’이랄 수 있는 역대 대통령들의 특성에서 평민성이나 민주성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이승만은 정치와 언행과 사람을 대하고 부리는 것 등으로 봐 공화제를 형태로 갖춘 봉건적 왕에 가까웠다. 스스로 즐겨 말했듯, 그 자신 왕족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정치를 했다기보다 총통적 방식으로 권한을 집행했다고 하는 게 타당할 게다. 전두환은 민주주의는커녕 ‘대화와 소통’이란 점에서 보자면 끝내 정치인이 아니었다. 김영삼은 그 둥지 안에 민주주의의 알을 낳고자 했지만 성공작은 못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김대중이야말로 한국 역사상 진정한 의미에서 네 번째 권력 교체를 이뤄낸 사람이다. 배경이나 지지자로 봐 평민으로 처음 ‘왕’이 된 자였던 것이다. 근래 일단의 부류들이 건국절 운운하고 있는데 굳이 말하자면 그의 집권으로 한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건국절 논란은 기본적으로 비뚤어진 정치관이 낳은 비정상적 현상이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승리를 일궜듯

김대중은 시대의 고난을 대중과 역사의 근육으로 바꿔낸 연금술사였다. 그는 모든 패배를 궁극적으로 승리로 바꿔냈다. 그는 먼저 왔고, 먼저 갔다. 오래도록 그를 지지해온 사람들은 이제야 ‘늙은 고아’가 되었다. 그가 남기고 간 민주·통일·평화의 유산을 온전히 계승하려면 스스로 아버지가 되고, 스승이 되고, 군주가 되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마침내 승리를 일궈냈듯. 서해성 소설가·한신대 외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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