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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김대중 전 대통령을 되돌아 본다(3)

by 싯딤 2009. 8. 29.

8. 2009 여름 다시 거리에 서다


역류의 시대가 거인을 쓰러뜨렸다

노무현 장례식 ‘3시간 뙤약볕’ 결정타

…입원 직전까지 ‘북핵’ 강연·인터뷰 강행군

2009 여름, 다시 거리에 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역 분향소를 직접 찾아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고, 5월29일 영결식에 참석해 크게 오열했다. 민주주의·인권·평화를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하다 급기야 7월13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그를 다시 거리로 불렀는가.

» 역류의 시대가 거인을 쓰러뜨렸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불가에서는 죽음을 시사(時死)와 비시사(非時死)로 나눈다. 시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해 자연스레 죽는 것을 뜻하고, 비시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어떠했는가. 여든다섯 나이의 영면을 창졸지간의 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삶의 궤적에서는 아직 못다 한 일에 대한 한들이 깊이 남아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전까진 건강

»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요 활동 일지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지난 5월까지 그는 ‘건강’했다. 월·수·금요일로 세 번씩 있는 투석을 마친 뒤면 각종 수치는 정상에 가까워졌다. 매주 월요일 오후 4시면 박지원 민주당 의원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과 함께 ‘주간 정세분석’을 했다. 정세현 전 장관이 국제 정세와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해, 박지원 의원이 국내 정세에 대해 만든 보고서를 같이 읽고 토론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구두보고를 받지 않고 보고서 내용을 직접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3~4시간을 꼬박 토론했다. 한 달에 두 번꼴로 외부 강연이나 언론 인터뷰를 했다. 모든 원고는 직접 작성했다. 질문지나 강연 청탁서를 보고 사흘 정도 생각을 가다듬은 뒤 비서관에게 구술했다. 타이핑된 원고는 직접 윤문을 하고, 임동원 통일문화재단 이사장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게 보내 의견을 들었다. 돌아온 의견의 내용에 따라 원고를 바꾸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주재했다. 일반인 식사량의 1.5배를 넘는 특유의 대식도 여전했다. 김대중 평화센터 주관의 공부 모임도 두세 달에 한 번씩 이뤄졌다. 한반도 정세와 외교 현안을 다루는 발제부터 토론 종결까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비극의 시작은 5월23일이었다. 독일의 유력지 <슈피겔>과의 인터뷰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충격을 받은 그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다. 이때부터 식욕부진이 시작됐다.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그를 보좌하던 한 전직 장관의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이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말씀하신 며칠 후 대통령을 뵈었을 때 ‘대단히 멋있는 표현이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게 멋지라고 한 말이 아니오’라며 정색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전한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이대로 가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험해서, 내가 늘 우려하던 3대 위기가 터질 것 같아서, 노무현 대통령과 둘이서 손잡고 조만간 전면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소. 같이 목소리를 내자고 하던 참이었소. 박정희 정권 때의 DJ와 YS처럼 함께 투쟁할 생각이었소. 그런데 그가 돌아가셨소. 그건 진심이었지 멋있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오.”

서울역에 설치된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이명박 정부가 추도사를 못하게 막은 것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도, 장례식에서 3시간이 넘게 자리를 지키다 노 전 대통령의 유가족들을 붙잡고 오열한 것도 그 절절함에서 비롯된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뙤약볕 아래서의 강행군이 결정타였다. 지난 10년간 대통령을 돌봐온 정남식 연세대 교수(심장내과)는 “계속해서 뙤약볕에 오래 계신 것이 무리였다. 그때 우리 의료진들도 굉장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일 당시 주치의팀에 있었던 한 내과 전문의는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심한 고관절 통증으로 앉아 있기 힘든 상태였는데, 3시간 넘게 불편한 의자에 앉아 계시다 심한 후유증을 얻게 되셨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대통령을 만나온 정세현 전 장관은 “그 이후부터 점차 목소리가 약해지셨다. 나중에는 귀를 가져다 대도 알아듣기 힘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1시간 넘게 인터뷰하고 연설문 직접 구술

그럼에도 일정을 그대로 소화했다. 입원(7월13일)하기 사흘 전인 7월10일에도 영국의 〈BBC〉와 1시간 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7월12일에도 이틀 뒤에 있을 유럽연합 상공회의소 연설문을 직접 구술하고 밤 9시에는 임동원 이사장에게 전화해서 “원고를 봐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왜 이렇게 무리했을까. 조금이라도 고삐를 늦췄으면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세현 전 장관의 말이다.

» 지난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권양숙씨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반쪽을 잃은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9월 미국 방문을 통해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면 사전에 국제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미국 언론을 직접 상대하기 전에, 먼저 유럽을 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슈피겔> 〈BBC〉 같은 영향력 높은 유럽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정부의 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국제 여론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상공회의소 연설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5개국 유럽연합 소속 주한대사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슈피겔>의 빌랜트 바그너 기자는 6월호 인터뷰 기사에 이렇게 썼다. “동아시아의 위기 고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걱정스럽게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슈피겔>을 서울의 자택으로 다시 한번 초청했다.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핵 위협을 심각하게 봐야 한다는 긴급한 호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느낀 의무감은 무거웠다. 김성재 김대중 도서관장도 “7월 초에 저를 부르셔서 ‘남북관계가 이렇게 안 풀리니, 김대중 도서관도 앞으로 이 남북관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당부 말씀을 하셨다. ‘건강이 회복되면 우리 함께 열심히 합시다’라고도 하셨다. 굉장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국지전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강한 위기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난 4월 목포를 방문했을 당시 “전쟁하면 파멸이다. 유엔군 사령부 추계를 보면, 전쟁 나면 하루에 수도권에서 150만~200만 사상자가 생긴다. 핵무기 안 써도 장사정포와 미사일은 부산까지도 가고 일본도 간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서세(逝世) 이튿날, 빈소인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영원한 비서’ 박지원 의원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9월에 있을 미국 방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이를 대비해 면밀한 준비를 하시다 결실을 맺지 못하셨다”고 말을 흐렸다.

5월 초의 중국 방문과 6~7월의 유럽 언론 인터뷰 및 대사들 접촉을 바탕으로 9월에 미국에서 제시할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유고가 된 유럽연합 상공회의소 연설문에 그 단서가 있다. ‘9·19로 돌아가자’는 제목의 원고를 잠시 보자.

“21세기는 세계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세기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시대가 출현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동안 세계는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였습니다. 세계는 미국과의 친소관계, 이해관계, 종교적 차이 등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친소와 원근에 상관없이 대화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그동안 이분주의에 고통을 겪다가 정치·경제·종교·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오른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가 그 키워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마바 정부 출범 이후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세계정부론’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세계’라는 전 지구적인 평화 개념을 가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 2009년 정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찾아 덕담을 듣는 민주당 지도부. 사진 국회사진기자단

‘세계시민’을 바탕으로 하는 칸트의 세계정부론은 ‘영구평화론’으로 이어진다. 냉전 시대 이후 세계의 유일 극으로, 전세계 국가들을 ‘우방’과 ‘불량국가’로 일방적으로 분류했던 부시 행정부의 종식과 함께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판단을 내린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에게 설명한 ‘천하태평론’도 그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은 중국 강역을 ‘천하’로 규정하고, 그 땅 아래서의 안빈낙도를 추구한 ‘천하태평’을 전세계적으로 확장시킬 책임이 중국에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절박감에 시달린 듯

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3억 명의 미국 인구 중에서 그간은 1억7천만 명의 백인들만 주류였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나머지 1억3천 명의 유색인종들도 주류가 됐다”고 미국 사회 전체의 ‘주류화’를 이야기한 바 있다. 차이와 구분을 넘어 하나가 되는 과정을 특유의 논리로 풀어내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은 오마바 시대의 미국이 이런 세계정부와 영구평화로 가는 토대를 쌓아야 하는데, 유독 한반도 문제,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해서만 무관심하고 그간의 정부 간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는 건 모순이라는 논리를 제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설 제목이 ‘9·19 선언으로 돌아가자’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9·19 선언은 지난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된 것으로,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 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 원고에서 “오바마 정권은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고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태도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북한은 극단적인 반발 자세로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남북 간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6월11일에 있었던 6·15 선언 9주년 기념식의 연설 제목도 ‘6·15로 돌아가자’였다.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6·15 남북 공동선언의 정신만 이행해도 지금과 같은 위기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문제는 현재 정책을 펼 수 있는 정부의 지도자들이 이를 외면한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나이와 점차 악화되는 건강에도 그의 지적 활동과 대외 활동이 중단되지 않은 것은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터뷰를 담은 책의 서문에 이렇게 쓴 글이 결국 남은 이들에게 남긴 유언이 됐다.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대로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함)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매주 DJ 만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북한과의 약속을 정확하게 지켜라”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이틀째 밤을 새우고 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나, 입원하기 전 매주 만나왔던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근황에 대해 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 전하려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만났을 때도 거듭 말씀하신 것이 있다. 한·미 정부가 북한과 했던 약속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북-미 간에 한창 기싸움이 오가면서 북한은 자극적인 말들과 행동으로 미국을 자극했고, 미국도 오바마 대통령답지 않은 정책으로 나서고 있었다. 미국의 대북 강경 조처로 인한 무력 충돌, 전면전은 아니래도 국지전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 정부의 정책과 태도를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셨다. 북한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레버리지(수단)와 카드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이셨다. 북한도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셨다.

-한반도 정세를 우려한 것인데.

=김 전 대통령은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낙관주의자셨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낙관주의자지만, 김 전 대통령에 비하면….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에 한국외대 강연과 서울역 기자회견에서 ‘늦어도 가을에는 북-미 간의 직접 대화가, 6자회담이 이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는 9월쯤이라고 하셨는데, 8월인 지금 보라. 이미 현실이 되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지고 외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최근 새롭게 천착한 개념이 있다면.

=언젠가 철학자 칸트의 세계정부론과 영구평화론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대통령을 가만히 뵈면 (사색적이고 규칙적인) 칸트와 비슷한 면모가 많았다. 물론 더 현실적이셨다. 대통령은 망원경 같은 시야로 내다보면서 현미경적인 시각으로 미세한 흐름을 살펴야 하고, 사상가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태희 기자

“이는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자신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민주주의·남북관계·서민경제 원칙의 훼손에 단호한 반응

“우리나라는 지금 민주주의 위기,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에 처해 있다. 민주주의 없이는 투명하고 건전한 경제, 서민을 위한 경제가 이뤄질 수 없다. 남북관계도 민주정부만이 국민 지지를 받고 반대파를 설득해가면서 발전시킬 수 있다. 5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문당하고 피 흘려가며 민주주의를 얻었다. 그러나 최근 민주주의가 역주행하고 있다. 매우 우려스럽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등 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모두 종식시켰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6월1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6·15 9주년 기념식에서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민주주의 후퇴를 지적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남북관계 의도적으로 파탄내려 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월15일 서울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그리고 한반도 평화 정착은 김 전 대통령이 평생을 건 과제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생시인지 꿈인지 모를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일”(지난 1월1일 국민의 정부 관계자 신년하례식 발언)이 벌어졌다. 자신이 이룩한 성과가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무너져내리고, 그 가치마저 부정당하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재직 당시 청와대 국정홍보비서실 국장을 지낸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김 전 대통령은 다른 정치적 사안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서민경제의 원칙이 훼손되고 그 성과들이 무너지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했다.

처음 그가 ‘3대 위기론’을 거론하며 이명박 정부를 공개 비판한 것은 지난해 11월27일 북한을 다녀온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를 만난 자리였다. 남북관계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는 상황이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북 사이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통일하는 게 최후의 궁극적 목표”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북한이 “북침 의도”라고 비난하며 11월24일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 교류협력사업 중단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가) 의도적으로 파탄내려고 하는데, 성공 못한다. ‘비핵개방 3000’ 정책은 핵을 포기하면 도와주겠다는 것인데, 부시 정부가 실패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의 최대 소원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인데, 이를 받아줄 오바마 정권이 나왔다. 이명박 정부가 (이런 흐름에) 역행한다면 김영삼 정부 시절의 통미봉남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쓴소리도 했다.




» ‘3대 위기’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 발언록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남북 화해는 김 전 대통령이 “온갖 박해와 참을 수 없는 중상모략을 견디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일생을 바쳐왔다”(2008년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강연)고 자평할 만큼 소중히 여기는 가치였다. <우리의 소원>이 금지곡이던 1970년, 누구도 ‘통일’이란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던 그 시절 신민당 대선 후보로 나선 그가 첫 기자회견에서 꺼낸 주제가 통일정책이었다. 그 결과 마침내 2000년 6월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금강산·개성 관광이 가능해졌고, 개성공단을 비롯해 경제협력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후임인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북한을 방문해 ‘10·4 정상선언’에 사인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이후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9월1일 “따뜻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을 벗지는 않고 옷을 벗기려는 사람이 옷을 벗었다”고 말하는 등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여러 차례 비난했다. 지난해 3월26일 통일부 업무보고 땐 “가장 중요한 남북한 정신은 1991년 체결된 기본합의서”라며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보수 세력의 ‘퍼주기’ 비난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지난 10년간 막대한 돈을 지원했으나 그 돈이 핵무장하는 데 이용됐다는 의혹이 있다”며 근거 없는 의혹도 제기했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결정으로 북한을 더욱 자극하기도 했다.

29년 전 성명과 비슷한 6월11일 발언

자신이 이룩한 남북 화해·교류의 성과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 그 가치마저 부정당하자 김 전 대통령은 결국 “‘퍼주기’라는 말은 사실을 왜곡하는 부당한 비방”이라며 자기방어에 나섰다.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7월10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제2의 냉전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쪽이 북한을 도와 핵무기가 개발됐다는 주장은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 외에는 합리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북한이 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고, 내가 북한과 접촉한 것은 2000년으로 6년 차이가 있다. 우리 정부는 북한에 현금을 준 적이 없다. 매년 20만~30만t씩 식량·비료 지원을 했는데, 그런 것으로 핵은 못 만들지 않느냐”고 사실관계도 강조했다.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 해법으로 이 대통령에게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 이행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아리는 없었다.

“만일 현 정부가 국민 전체가 바라지도 않는 것을 성급히, 그것도 국민의 의혹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추진하거나 혹은 도리어 국민이 원하는 것을 고의로 지연시키든가 하면, 정부는 스스로 정국을 불안정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게 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1980년 3월1일 낸 성명이다. 여기서 ‘정부’는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등을 지칭한다. 29년 뒤인 지난 6월11일 김 전 대통령은 또 한 번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만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지금과 같은 길로 계속 나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해진다.”

»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을 준비하던 2007년 1월2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찾아 김 전 대통령에게 인사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국회사진기자단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4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55차례 가택연금당한 그의 삶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투쟁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이명박 정부는 “20~30년 전으로 역주행해 민주주의 위기를 부른” 장본인이자 “독재정권”이었다. 특히 용산 참사 이후에도 정부가 ‘법치 확립’을 내세워 철거민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는 상황을 두고 그는 “불법만 내세워 사람을 잡아갈 생각만 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며 통탄했다. 지난 1월22일 민주당 지도부와 함께한 신년하례식에서 그는 “민주주의가 반석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내가 (반독재 투쟁을 하다)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에 갔을 때 독재자 편에 섰던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보면서 안타깝고 분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김 전 대통령의 비판은 더욱 거세진다. 이는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이명박 정권의 ‘정치 보복’으로 해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5월28일 서울역 앞 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뒤 한 발언을 보면 그런 인식이 드러난다. “일가친척들을 저인망 훑듯이 훑었고, 소환되고 나서는 20여 일 동안 증거도 못 댔다. 노 전 대통령이 느꼈을 치욕과 좌절, 슬픔을 생각하면 나라도 이런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반대로 읽지 못한 추도사에서도 그는 검찰 수사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사형 구형 뒤 최후진술서 반대했던 ‘정치 보복’

1980년 9월17일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최후진술에서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드리고 싶다”고 했던 김 전 대통령이다. 그런데 민주화 동지이자 대북 포용정책 계승자인 노 전 대통령이 ‘독재정권’의 부당한 수사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억울함과 분노는 ‘국민의 힘’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정권 때 자주 썼던 “행동하는 양심”이란 말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6월11일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해야 한다”며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린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호소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격앙된 민심을 선동하는 것으로 여긴 탓일까.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국민 화합에 앞장서 국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셔야 할 전직 국가원수가 적절치 못한 발언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비난했다. “김대중씨는 침묵을 지키는 게 대한민국을 돕는 길”(안상수 원내대표), “아프리카 후진국 반군 지도자냐”(장광근 사무총장)는 한나라당의 상식 이하 반응도 이어졌다.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 당시 37억불에 불과한 빈 금고를 물려받았지만 전 국민의 노력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국민의 정부가 1400억불, 노무현 정부가 2200억불의 외화를 쌓았다. 이명박 정부는 역대 최고 외환보유고, 건전기업, 은행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중소기업·비정규직·서민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원조 경제 대통령’인 김 전 대통령이 지난 1월1일 신년하례회 때 한 ‘경제위기’ 얘기다. 그는 지금 경제위기의 핵심을 ‘양극화’라고 봤다. 부자 감세, 규제 완화를 핵심으로 하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런 양극화를 더욱 심화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엔 국민의 정부가 계획보다 3년이나 빨리 구제금융 체제를 벗어났고 노 전 대통령 때도 지표가 좋아졌는데, 이명박 정권이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로 자신들을 ‘무능 세력’으로 낙인찍는 데 대한 불쾌감도 깔려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규제 완화, 부자 감세가 핵심이던 레이건·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은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지금은 식품쿠폰, 물품구매권 등 서민 손에 쥐어주는 정책을 통해 돈이 밑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 기초생활보장, 서민 소비 확대와 경기 부양 등을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행동하는 양심에서부터

김 전 대통령은 지금 상황을 “억울하고 분하다”고 했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다.

“옛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갈 때에 비하면 지금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국민들은 역사마다 독재정권을 좌절시켰고, 우리들은 매번 이겼다. 지난 촛불시위의 의미가 아주 크다. 누가 선동하거나 조직하거나 권유한 것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이런 국민 앞에서 민주주의를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국민 앞에서 어떻게 독재가 있을 수 있겠나. 일시적 반동은 있겠지만 절대 후퇴는 없다.”(지난해 11월27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면담 발언)

전제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정부를 끊임없이 감시·비판하고, 좋은 정당·좋은 정치인을 기억하고 가려내고 투표할 정도의 양심. 조혜정 기자

DJ와 노무현, 전생에 형제간이려나

올해 잃은 ‘두 별’의 관계…
대북송금 특검·민주당 분당으로 서운했으나 “우리는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서거 직전까지 ‘독재자’라는 표현을 써가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지만, ‘평생 민주화 동지’로 여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인 2002년 12월23일 청와대를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국회사진기자단

김대중과 노무현, 두 사람의 인연은 1997년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5년 정계 복귀 이후 민주당에서 분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든 뒤였다. 당시 민주당은 1990년 1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민정당·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했을 때 합류하지 않은 ‘꼬마 민주당’과 김 전 대통령의 신민당이 1991년 통합해 만든 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분당 국면에서 새정치국민회의에 곧바로 합류하지 않는다. 분당은 야권 분열만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DJ와 선긋기’ 거부한 노무현

하지만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 때부터 정치적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제정구·이부영·이철 전 의원 등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후신 한나라당에 투항하자,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3당 합당의 후예보다는 정권 교체와 동서 통합의 명분을 지닌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이 낫다고 봤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 정치적 비주류였던 그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해 행정 경험을 쌓도록 해줬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때는 노 전 대통령을 보이지 않게 지원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단 한 번도 배반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한 말이다. “물론 제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선을 그으며 어떤 공격적 정치 행위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안 한다고 해서 개혁이 안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차별화는 사실 개혁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거에서 표를 얻을 수가 없을 뿐이지요. 사실 그게 우리의 고민입니다.” 2002년 6월25일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내놓은 발언이었다.

같은 해 3월 광주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정치적 아이콘으로 떠오른 노 전 대통령이지만,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선 후보로 결정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비리 사건이 차례차례 터지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당선은 고사하고 후보 자리를 유지하기도 힘겨워 보였다.

정치권과 언론은 그에게 ‘DJ와의 차별화’에 대한 입장 표명을 사실상 강요했다. 부패한 정권으로 낙인찍힌 국민의 정부와의 선긋기에 나서라는 요구였다. 심지어 당시 노 전 대통령 선거 캠프에서도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노 전 대통령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는 그때마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만큼만 정치를 할 수 있다면 성공한 것”이라며 차별화를 거부했다. “(김 전 대통령은) 철학이 있는 유일한 지도자였다”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의 주장이었다.

정치권과 언론이 두 사람의 관계를 조명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사건이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이다. 2003년 초 시작된 대북송금 특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2004년 총선 직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은 호남의 분열을 촉발했다.

현실적 한계 때문에 받아들인 특검

두 사건을 고리로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애증의 관계’로 해석하려는 시각도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다. 참여정부 시절 초대 의전비서관을 지낸 서갑원 민주당 의원은 “언론에서 보는 것처럼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 사태가 두 전직 대통령의 신뢰 관계에 결정적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며 “대북송금 특검이나 민주당 분당이 노 전 대통령의 의지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김 전 대통령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받아들인 것은 2003년 3월15일이었다. 하루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이 문제를 놓고 청와대 참모진 회의와 국무회의를 거듭했다. 대북송금 특검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의 심정은 이진 전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이 쓴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에 소개돼 있다. 특검안 수용 여부가 논의된 최종 국무회의에서 정세현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 한명숙 환경부 장관, 지은희 여성부 장관 등 거의 모든 국무위원은 수용 거부를 건의했다.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은 국무회의 장면을 이렇게 소개했다.

“노 대통령은 국무위원들과 눈을 맞추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용을… 하십시다.’ 순간 정세현 장관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돌았다. 노 대통령은 정 장관을 보며 말했다. ‘우리들 모두 통일부 장관께서 걱정하시는 문제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통일부에서 반대를 안 해주시면 직무유기입니다. 반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참여정부 핵심 관계자는 “당시 노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면서도 한나라당의 특검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수 여당 출신 지도자로서의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며 “이 일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직접 방문해 경위를 설명드리겠다고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전례는 없었다’며 사양해 청와대 회동으로 대신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은 4월22일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물론 이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 사태에 대한 섭섭함을 내비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노무현 전 대통령 개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된 박지원 실장 등에 대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운 민주당 관계자는 “두 전직 대통령 사이에 오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선택이 당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할 때 불가항력적이었다는 현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옳은 건 옳은 것, 당당하게 나갑시다”

표면적으로나마 잠시 갈등 관계로 비쳤던 두 전직 대통령 사이의 관계가 다시 완전히 회복된 계기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경제·복지 정책에서도 국민의 정부와 철학을 함께했지만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노 전 대통령 스스로 햇볕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노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아 회담 성과를 설명한 사람도 김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찾은 김 전 대통령은 “1차 정상회담 때 뿌린 씨앗이 크게 성장했다”며 “우리 민족에게 다행스러운 일이고 노 대통령이 재임 중 큰 업적을 남겼다”고 치켜세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6월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나하고는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전생에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형제간”이라고도 했다. ‘닮은 점’에 대해 노 전 대통령 본인이 밝힌 적도 있다. “선거전이 불리해진다고 해서 우리가 옳다고 주장했던 것까지 뒤엎어야 합니까? 우리에게 불리한 거지만 또 옳은 건 옳은 게 아닙니까. 당당하게 나갑시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소개한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이다. 1992년 민주당과 정책연합을 하던 ‘국민연합’이 보수 진영으로부터 좌경용공으로 공격당하자 민주당 안에서 ‘선긋기’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던 때 김 전 대통령이 보인 반응이었다. 최성진 기자

9. 2008.8.18.13:43 서거하다

DJ의 열망, 민주개혁 세력의 통합

서거 직전까지 병상에서 ‘민주당의 역할’ 강조…
이후 치열한 모색 과정에서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주목도 높아질 것

2009, 8, 18, 13:43 서거하다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마지막 눈맞춤을 나눈 뒤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대를 계승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가 후대 앞에 놓여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민주개혁 진영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까?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정치적 고아’라는 표현을 썼다. 정 대표는 8월19일 서울시청 앞 광장 분향소에서 민주당 지도부와 조문을 마친 뒤 “김 전 대통령은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정치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모든 분의 아버지였다”며 “김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 민주당은 이제 고아가 됐다”고 말했다.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불과 석 달 만에 모두 잃은 민주당의 아픔이 배어 있는 비유였다.


2007년 ‘민주개혁 연합론’의 참담한 실패

»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마지막 눈맞춤을 나눈 뒤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대를 계승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가 후대 앞에 놓여 있다. 사진 연합

하지만 대중의 눈물에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민주개혁 진영을 대표해온 두 정치 지도자의 죽음은 민주당과 민주개혁 진영에 풀어야 할 숙제를 남겼다. 민주당은 당장 ‘DJ식 정치모델’에 대한 창조적 해답을 내놓아야 할 처지다.

무엇보다 집권 전략에 대한 논쟁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민주개혁 진영이 대선에서 이긴 경험은 1997년과 2002년 딱 두 번이었다. 두 차례 대선 모두 민주개혁 진영이 자체 역량만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1997년 대선에서는 세 가지 변수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DJP 연합과 보수 진영의 분열, 외환위기 사태였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연합으로 충청권 표심 장악에 성공했다면, 보수 진영에서 이인제 후보가 독자 출마한 사건은 영남표 분열로 이어졌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터진 외환위기 사태도 김 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다.

2002년 대선 때도 상황이 비슷했다. 민주당은 우선 국민참여경선으로 흥행몰이에 성공했고,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할 때는 정몽준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켜 재반전에 성공했다. 정 후보와의 단일화는 부동층이 많던 충청 민심을 노 후보 쪽으로 돌렸다.

김 전 대통령이 주창한 ‘민주개혁 연합론’은 지역적으로는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을 거점으로 충청권을 아우르고 영남의 분열을 꾀하는 전략이었다. 여기에 민주화 세력과 시민사회 세력이 힘을 보태야 비로소 민주 진영이 정권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개혁 연합론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은 2007년 대선이었다. 민주당은 흥행은커녕 이른바 ‘박스 떼기’ 논란만 부르며 정동영 후보를 고집했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와의 소연합마저도 실패했다. 정동영 후보와 민주당은 보수 진영이 이명박-이회창으로 분열되는 상황에서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 연합이 아예 이뤄지지 않았으니 민주개혁 연합론이 실패로 끝났다는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설령 연합이 성사됐다 하더라도 결과가 달라졌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민주개혁 진영이 처한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개혁 연합론이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돼왔던 것은 사실이다. 영남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반호남 지역주의’와 언론·사법·행정 등 사회 각 분야를 지배하는 보수 기득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소수파의 연합과 연대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논리다. 이낙연 민주당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면서도 ‘호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정책적으로는 진보 세력을 포용했지만 DJP 연합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정치적 유연함은 현실적 고민을 반영한 결과”라고 말했다.

“연합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

민주개혁 연합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열망은 서거 직전까지 식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 비서실장인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통해 전해진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메시지 역시 민주개혁 진영의 통합이었다. 서거 전 병상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민주개혁 진영 통합에 앞장서야 한다”며 “민주당이 제일 큰 정파니까 과감하게 양보할 건 양보하고 어떻게든 통합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당의 역량이다. 김 전 대통령이 끝까지 강조한 민주개혁 연합론이 과거 DJP 연합이나 2002년 대선 때 이뤄진 노무현-정몽준 연합처럼 일시적 ‘연대’의 형태가 아니라 세력을 아예 합치는 ‘통합’을 의미한다면, 난이도는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현재 민주당의 정치력으로는 민주당 중심의 민주개혁 통합을 주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민주 정부가 지지층의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과, 민주개혁으로 통칭되는 세력의 넓은 이념적 간극이 통합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2007년 대선 실패에 이어 지금까지 민주개혁 진영이 위축돼 있는 것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 정부 10년을 거치며 신뢰를 잃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종배 시사평론가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주문은 민주당 주도로 민주개혁 진영의 외연을 확대하라는 것인데, 지금의 민주당 틀을 유지한 채 민주당 중심으로 통합을 시도한다면 해법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민주개혁 진영은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새로운 과제를 받아들었다. ‘DJ식 정치모델’에 대해 민주개혁 진영이 해답을 내놓을 차례다. 1997년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대선후보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며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사진 왼쪽과 오른쪽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박태준 전 의원. 한겨레 자료사진

‘반MB’에 좀더 섬세한 접근을

지지부진한 ‘반MB 연합’이 좋은 사례다. 박상훈 대표는 “지난해부터 민주당 중심으로 반MB 연합 논의가 오갔지만 실제로 강력한 반MB 전선이 구축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명박 정부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내놓으면서도 정작 (서민의 실생활과 관련된) 경제 및 노동 정책에 관해 반MB 연합 주도 세력이 현 정부와 어떻게 다른지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민주개혁 통합의 주요 고리인 민주주의의 회복에 대해서는 민주개혁 진영 전체가 쉽게 동의하지만, 민주주의 ‘플러스알파’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며 “쉽게 말해 지금의 민주당은 수도권 개혁 세력의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민주당에 대한 수도권의 낮은 여론조사 지지도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민주개혁 진영이 손대야 할 과제로 통합뿐만 아니라 각 세력의 철학과 가치, 비전과 정책 전반에 대한 재정비를 강조했다. 통합이 중요한 과제이기는 하나 각 진영의 지지층이 왜소화된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지 않고 통합만 논의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다. 김 소장은 “민주개혁 진영의 지지층이 반MB연대에 기대한 것은 민주주의의 수호 못지 않게 이명박 정부가 구현하지 못하는 가치에 대한 대안이었다”며 “예컨대 대형 마트의 공세에 어려움을 겪는 영세 자영업자의 생존권 문제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고용 문제에 민주개혁 진영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에 대한 감성적 대응도 일정 부분 필요하지만, 민주개혁 세력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좀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리더십 부재에 대한 지적도 민주당으로서는 뼈아플 수밖에 없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잇단 서거로 발생한 ‘정치적 구심’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문제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화해라는 시대적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해온 지도자였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헌신해왔다”며 “반면 지금 민주당에는 두 전직 대통령처럼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논쟁이 부정적이기만 할까

리더십 부재의 문제는 당장 서거 정국이 지나간 뒤 찾아올 정치적 혼란기, 즉 ‘백가쟁명’의 시대에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야권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 과열된다 해도 무게중심을 잡아줄 지도자가 없는 현실이다.

민주당 안팎에서 ‘포스트 DJ’로 꼽히는 인물은 김근태·손학규·유시민 전 의원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정도다. 김근태 전 의원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오랜 기간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왔다는 이력을 바탕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곧잘 비교돼왔다. 고문 후유증과 정치적 실패로 시련을 겪었다는 이력도 비슷하다. 다만 대중 정치인으로서 인기가 다소 낮다는 사실이 약점으로 꼽힌다.

손학규 전 의원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중앙과 지방 행정을 두루 경험한 사실이 강점이다. 2009년 4월29일 재보선에서 인천 부평 국회의원 재선거 승리를 이끌며 만만찮은 수도권 득표력을 보여준 사실도 당분간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지만, 그에게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밖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인기가 크게 오른 한명숙 전 총리는 갈등과 반목의 시대를 어루만질 수 있는 섬세한 어머니 리더십이, 유시민 전 의원은 단단한 고정 지지층이 정치적 자산이다.

반면 정동영 의원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맞섰다는 소중한 경험이 있지만,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분당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약점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4·29 재보선에서도 그는 민주당 지도부의 뜻을 묵살한 채 전주 덕진에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민주당 실무 당직자는 “주요 정치 지도자라면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게 마련인데, 정동영 의원의 이미지는 분당과 분열”이라고 말했다.

서거 정국 이후 민주당 내 역학구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제기될 민주개혁 연합론에 대한 논쟁과 리더십 문제가 민주당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숙제지만, 이런 시련이 부정적인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니다.

» 민주당 안팎에서 ‘포스트 DJ’로 꼽히는 인물은 김근태·손학규·유시민 전 의원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이다(왼쪽부터). <한겨레> 김봉규, 강재훈 , 정용일 , 이종근 기자.

치열한 모색에서 리더십이 떠오를 것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 애널리스트는 “단기적으로 민주당을 포함한 민주개혁 진영의 혼란이 예상되지만, 이는 피해갈 성질도 아니고 피해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오히려 민주개혁 진영의 미래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모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갈등을 ‘발전적’으로 승화시켰을 때의 이야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가 민주당에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셈이다. 최성진 기자

진보정당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

김 전 대통령이 이룬 민주화의 수혜를 입어 탄생했지만 ‘민주연합론’에 앞길 막히기도…
그의 유언은 “나를 넘어서 가라”

장강의 앞물결은 이제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전라도 땅 신안군 하의도에서 시작되어 한국전쟁과 자유당 정권, 5·16 쿠데타와 유신독재, 광주항쟁과 사형선고, 망명과 가택연금, 6월 항쟁과 단일화 무산, 대통령 당선과 남북 정상회담을 거쳐 마침내 모든 물결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 최후의 안식처로 흘러 들어갔다. 외롭게 시작했으나 심산협곡을 거치며 세력을 이루었고, 세력을 이루었으나 때론 폭포가 되어 추락하고 때론 산을 감싸고 우회하면서 결국 원했던 자리를 다 채운 뒤 넘쳐흘러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물,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피와 눈물로 점철된 그의 역정은 역사가 되었고, 그가 겪은 간난신고는 전설이 되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8월18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맨 오른쪽),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 등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대중의 전설 들으며 진보정당 구상

누가 뭐래도 김대중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반민주 독재정치의 상징인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이어지는 박해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씨줄과 날줄이 되었다. 대학 캠퍼스엔 위수령이 내려지고 시인 김지하가 신새벽 뒷골목에서 남몰래 민주주의를 쓸 무렵, 인혁당의 8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18시간 만에 사법살인 당하던 때 정치권에선 ‘김대중’이란 이름의 봉홧불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1980년 광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도 이 봉홧불을 끄진 못했다. 전두환의 사법부는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사실상 국외 추방까지 했지만 민주주의의 횃불은 광야를 불사르듯 전국으로 번져갔다.

오늘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거의 대부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다. 그런 점에서 6월 항쟁에 이르는 반독재 민주화의 선봉에 서온 김대중에게 우리 모두는 정치적 빚을 진 셈이다. 물론 민심과 현실은 냉혹했다. 김대중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민주화 이후 10년이 지나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정부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일궈낸 최대 성과 중 하나라는 역사적 평가가 변하진 않는다.
김대중 정부가 이룬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남북 정상회담과 6·15 선언으로 표현된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이다. 탈냉전의 시대에 세계 유일의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를 평화지대로 전환시키는 가교 역할은 김대중 대통령의 경륜과 철학 없이는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앞장서 이룩한 민주화 시대에 이르러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나 역시 1990년 청주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부터 바로 옆방에서 수감 생활을 한 김대중의 전설을 들으며 출소 뒤 진보정당 건설을 구상했다. 갓 출발하는 허약한 진보정당은 김대중의 평민당과 민주당으로부터 ‘채혈’당하지 않으려 몸부림쳐야 하는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그러한 진보정당조차도 1987년의 민주화 없이는 존립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김대중 정부에 빚만 진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는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타고 넘어서야 할 산이기도 했지만, 그 거대한 산 앞에서 진보정당운동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래 한국 사회가 되돌릴 수 없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이후에도 민주 대 반민주의 낡은 대립 구도에 의존한 민주연합론은 사실상 진보정당 시기상조론, 아니 진보정당 무용론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앞길을 막아왔다.

불임의 ‘가장 나은 10년’

민주연합론이 낳은 비판적 지지는 비판 없는 지지로 전락했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진보정당운동에 나서겠다고 약속한 인사들은 민주정부의 기득권을 향유할 뿐 진보정당을 집권의 장애물로 취급하고 나섰다. 김대중·김종필의 DJP 연합이나 노무현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이 보여주듯이, 권력 경쟁의 정치공학만이 존재했을 뿐 진보정당 세력과의 파트너십은 단 한 번도 추진된 바가 없었다. 오히려 젊은 피 수혈론 등으로 인해 진보정치의 인적 자원은 민주정부의 낡은 취약점을 보완하는 데 차출당했을 뿐이다.

한편 여러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와 그를 이은 노무현 정부는 1948년 이후 한국에 등장한 정부 중에서 가장 나은 정부라고 분명히 규정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이래 한국의 민주주의는 빠른 속도로 정착됐으며, 남북관계 역시 획기적인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후 ‘가장 나은 10년’이 더 나은 정부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맞서는 반동의 시대를 초래한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의 그림자이며 한계가 아닐 수 없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김대중 시대가 그 이후 시대를 예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는 사실상 ‘3김 시대’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민주와 독재의 오랜 대립 구도에 이어 한국 정치를 점철해온 것은 3김 시대였고, 지역주의에 기반한 이 대립 구도가 김대중 정부를 끝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 점에서 3김 시대는 200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수명을 다하고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3김 이후 시대는 어떠한 시대여야 하는가? 한국 정치는 국민이 살아가는 방식을 놓고 정책 노선으로 다투는 진보와 보수의 새로운 대립 구도, 즉 선진국형 대립 구도를 중심으로 전개돼야 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정치 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제기한 것은 ‘포스트 3김 시대’를 내다본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여권 내부의 반발을 무력화할 정도로 의욕적으로 추진되진 못했다. 결국 3김 시대 이후에도 3김 없는 3김 시대가 과도적 현상으로 오늘까지 연장되고 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낳은 또 하나의 역설은 역사상 가장 나은 정부 아래에서 사회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김영삼 정부 이래 관철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총노선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더욱 강력하게 추진돼 이 10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가 두 배로 늘어나는 결과까지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역대 정부 중 가장 서민적이고 친노동의 이미지를 갖는 정부 아래에서 그전보다 구속 노동자 수가 더 늘어나고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정책이 연이어 실현됐다.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도약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를 겪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김대중·노무현을 넘어서는 일이다. 가장 소중했던 지난 10년의 성과 위에 발을 딛고 이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도약이 절실한 순간이다. 3김 없는 3김 시대의 막을 내리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까지 꽃피울 수 있는 정치 구도의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반대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전을 이룰 대안을 현실화함으로써 비로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전에서 나는 듣는다, 고인의 유언을. “나를 딛고 넘어서 가라!” 장강의 앞물결은 이제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바다가 되었다. 더 나은 삶, 더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10. 2009.8.23 영면하다

8월, 슬퍼할 힘밖에 없다

5월 반쪽이 무너진 뒤, 8월 다시 무너진 반쪽

…분향소엔 저항의 분노보다 애도의 정념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고작 87일이 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고 석 달도 안 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또다시 눈물로 젖었다. 시민들은 ‘데자뷔’를 느끼며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치러냈다. 그때와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었다. 지난 5월29일,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권양숙씨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김 전 대통령은 말했다. 지난 7월13일 그가 폐렴 증상으로 입원했을 때, 사람들은 나머지 반이 무너질까 염려했다.

» “편히 가십시오.” 서울시청 앞 시민 분향소.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예우의 차이, 규모의 차이

한 달간 뉴스는 ‘위독’과 ‘안정’ 사이를 오갔으나, 8월18일 오후 1시43분 끝내 모두 무너져내렸다. 서울광장 분향소로 모여든 조문객들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된 것과 마찬가지”라며 김연선(42)씨는 분향소 앞에서 흐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은 엄마가 울자 눈을 끔벅였다. 아이들은 아직 엄마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 김씨는 아이들을 보며 더 서럽게 울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지도자를 잃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답답해 잠도 안 온다”는 김씨에게 두 사람의 상실은 ‘미래의 상실’이다.

그러나 5월의 상실과 8월의 상실은 다르다. 5월,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는 항상 촛불이 있었다. 분향을 마친 이들은 경찰을 굳이 밀쳐내고 거리와 광장에 나서려 안간힘을 썼다. 8월, 김 전 대통령 분향소에 그런 안간힘은 없다.

서거 다음날인 8월19일, 정부는 서울광장에 공식 분향소를 열었다. 첫날에만 시민 1만여 명이 조문했다. 시민들은 대부분 분향을 마친 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광장을 떠났다. 촛불을 들지도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영정 사진을 보며 조용히 눈시울만 붉혔다.

5월의 열정과 8월의 차분함 사이에는 ‘예우’의 차이가 있다. 대학생 김민석(25)씨는 지난 5월, 분향을 마치고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국장으로 예우해주지 않는 정부가 미웠다. 이번엔 다르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8월19일 발표했다. “민주화의 상징인 큰 분이 돌아가셨으니 국장으로 잘 모셨으면 한다.” 김씨는 담담하게 분향소를 떠났다.

정부의 예우는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정부는 서울역에 공식 분향소를 마련했다. 이번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는 그때보다 3배 이상 넓다. 넓어진 공식 분향소는 ‘시민 분향소’가 들어설 여지를 밀어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토론 게시판에 “시청 앞으로 모이자”는 누리꾼들의 글이 올라왔다. 8월18일부터 이틀간 시청 앞 광장 한쪽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졌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했다. 시민들은 시민 분향소 옆의 공식 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 광주 옛 전남도청 분향소 게시판.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5월엔 분노, 8월엔 기억

‘김대중 팬클럽’ 회장이라고 밝힌 한 노인이 8월19일 오후에 찾아왔다. “한 곳에 두 개의 분향소가 있으니 좋지 않아 보인다. 옆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시민 분향소는 두세 차례에 걸쳐 구석으로 밀려났다. 시민 분향소를 지키던 10여 명의 시민은 이날 저녁 자진 철수를 결정했다. “어르신 장례를 국상으로 잘 치르는데 괜한 불협화음이 날까봐 치웠다”고 분향소 지킴이 엄아무개(44)씨가 말했다.

‘시민 분향소’의 쇠락은 저항의 정념과 애도의 정념 가운데 뒤엣것에 무게가 실렸음을 웅변한다. 지난 5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시민 분향소에는 일주일간 100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몰렸다. 지척의 거리인 서울역과 역사박물관에 ‘공식 분향소’가 있었지만, 한사코 대한문 앞에서 서너 시간을 줄서 있다 분향했다.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려 드는, 오히려 보란 듯이 해버리는 태도를 저항이라 부른다. 5월, 사람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조문을 통해 현 정부에 저항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그런 국면은 아니다. 나라의 큰 어른인 김 전 대통령이 고령이고 병원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국민이 차분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도와 저항은 원래 한 몸의 반쪽이다. 세상을 떠난 이를 슬퍼하는 마음은 그를 핍박했던 이에 대한 증오와 통한다. 5월에는 증오했으나 8월에는 그저 슬퍼하기만 한다. 어쩌면 슬퍼할 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난 5월, 사람들은 목청을 높였다. “MB 아웃(Out)” 구호를 외쳤다. 거리에서 민중가요도 불렀다. 문화제에선 록밴드가 전자음악으로 추모곡을 불렀다. 8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췄다. 노래 부르는 이, 구호 외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자리를 기대하고 나오는 이도 드물다. 대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5월에 꺼내든 것이 분노였다면, 8월에는 기억을 꺼내들었다.

전남대를 졸업한 현인(51)씨는 대학 2학년 때 5·18 민주화 항쟁을 겪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던 김대중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공장 해고자 남편을 따라 복직 투쟁에 참여했던 오미령(54)씨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회고한다.

기억은 역사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조문을 온 이수길(35)씨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5·18 민주화 항쟁과 관련한 비디오를 보여주시며 김대중 선생님 얘기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재용(24)씨는 “어릴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중학교 1학년인 김민희양도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것을 듣고서 조문을 왔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마도 그것이 저항보다는 애도, 분노 대신 기억을 이야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5월의 분향소를 찾았던 20~30대에게 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인’이었다. 8월의 20~30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전설’이다.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그를 추억하는 40~50대가 많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아무래도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1세대이다 보니 젊은이들 입장에선 노 전 대통령보다 조금 낯설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종산(48)씨는 “노 전 대통령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일꾼’ 같은 존재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생’과도 같았다”며 “노 전 대통령을 잃은 당시는 ‘동지’를 잃은 허탈함이었고, 지금은 ‘선생’이 사라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동지를 잃으면 복수한다. 어른이 돌아가시면 애도한다. 이 땅에 수천 년간 내려온 추모의 법도다. 2009년, 한국인들은 같은 추모의 정념, 조금 다른 법도를 따라 두 대통령을 차례로 보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 “편히 가십시오.” 조문객들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시민 분향소도 없고 촛불도 없고 100만 인파도 없으니, 서울시청 앞 경찰들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러나 데모가 없다고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선생을 애도하는 슬픔은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이명박 시절은 여기에 이르러 거대한 지표석 두 개를 갖게 됐다. 역사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세 명의 대통령을 기록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 지표석은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꽂혔다.

서울광장 분향소 한쪽에 어느 소녀가 붙였음직한 노란 쪽지가 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그 옆에서 펼침막이 펄럭인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것은 강력한 촉구가 되어 차분한 조문객들의 뇌리에 남는다. 신광영 교수는 “추모 분위기는 침착하지만, 민주화 1세대 지도자의 죽음이 사회 전체에 주는 울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보다)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특히 “이제부터 새 시대에 맞는 새 인물에 대한 담론이 촉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됐다”는 추모객의 흐느낌은 그래서 하나의 선언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버지를 찾아나설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끌 새 지도자를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볼 것이다. 임지선 기자*

“가시는 길에 머리가 많이 길었을 텐데”

전 대통령 전담하던 ‘동교동 이발사’ 주영길씨
“처음엔 무서웠지만 갈수록 편해져… 수심 젖은 최근 모습에 마음 아파”

서울 동교동 삼거리에서 500여m 떨어진 좁은 골목 안에 ‘우남이용원’이 있다. 누런 간판,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알루미늄 미닫이 문이 가게의 첫인상이다. 이용원은 22년간 이 동네를 지키며 늙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4개의 이용의자가 손님을 기다린다. 요즘 같아서는 비어 있는 시간이 더 긴 의자들이다.

8월18일 오후, 이발사 주영길(60)씨는 손님이 없는 가게 안에 화석처럼 앉아 있었다. 적막한 이용원을 시끄럽게 만드는 건 한쪽 구석의 텔레비전뿐이다. 텔레비전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속보가 흘러나왔다. 주씨는 4개 중 맨 끝 이용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지난 3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머리를 손질해온 ‘동교동 이발사’다.

» “진짜 이별이구나 싶습니다.” 지난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동교동 이발사’ 주영길씨가 ‘우남이용원’에 앉아 있다. 그는 자꾸 “목이 막힌다”고 했다.

3년 전부터 매주 화·금요일 자택서 머리손질

하필이면 화요일이었다. 8월18일 화요일 아침, 주씨는 허전한 마음에 검정색 ‘출장 가방’을 쳐다봤다. 평소 같으면 김 전 대통령의 머리를 해드리는 날이다. 주씨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 9시에 동교동 자택으로 ‘출장 이발’을 갔다. 지난 3년간,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출장’ 갈 생각에 분주했다. 하지만 이젠 다시 화요일이 오고 금요일이 와도 김 전 대통령의 머리를 손질해드릴 수 없다. 속보를 듣는 순간, 주씨는 ‘이것이 진짜 이별이구나’ 싶어 목이 메었다.

‘마지막 이발’은 지난 7월10일 금요일이었다. 아침 9시에 동교동 자택에 갔다. 문 앞에서 집을 지키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뿐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 이발실 문을 열었다. 2층 복도 끝에 3평 남짓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용 이용원’이 있었다. 가방에서 가위와 빗을 꺼내고 이용 준비를 하고 있으니 휠체어를 탄 김 전 대통령이 들어왔다. 이용의자에 옮겨 앉게 한 뒤 거품을 내서 면도를 했다. 많이 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눈을 감은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면도가 끝나면 머리를 감길 차례다. 허리가 좋지 않은 김 전 대통령은 허리를 앞으로 많이 숙일 수 없었다. 비서관이 도와 김 전 대통령을 부축한 채 머리를 감겼다. 손끝으로 지압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벌써 두 달째 이발실에 건너올 때도 휠체어를 이용했다. 어서 건강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을 손끝에 담았다.
그 다음, 주씨는 망설였다. 머리를 깎을 때가 다 돼가는데 오늘 할까, 다음주 화요일에 할까…. 주씨는 이발은 다음에 하기로 결정하고 드라이어로 김 전 대통령의 헤어스타일을 연출했다. 왼쪽으로 2 대 8 가르마를 타고 오른쪽 머리를 둥글게 띄운다. 그리고 그 위에 ‘물기름’(동백기름)을 바르면 끝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이발이 다 끝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다 끝났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13일, 김 전 대통령은 폐렴 증상으로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주씨는 그때 이발을 못해드린 게 마음에 걸렸다. 하루이틀,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1980년대 ‘각하의 이발사’는 검정색 자동차를 탄 채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에 비하면 주영길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만남’은 소박했다. 2006년 11월, ‘우남이용원’의 단골이던 한 신사가 “출장 이발도 하느냐”고 물었다. 주씨는 “예전엔 했는데 요새는 혼자 가게를 보니까 다른 손님이 허탕 칠 것을 생각하면 출장 가기 힘들다”고 답했다. 단골 손님은 명함을 건네며 좀더 생각해보고 연락을 달라고 했다. 명함에는 ‘김대중 대통령 비서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날 주씨는 그 번호로 전화를 했다.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발을 할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했죠.” 주씨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다. 2006년 12월, 주씨는 검정색 손가방에 가위와 빗만 달랑 넣고 가게를 나섰다. 동교동 자택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천천히 걸어도 15분이면 닿는 거리였다. 골목을 나서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주씨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앞뒤로 손가방도 흔들흔들했다. 19살, 고향인 경기 일산의 한 이발소에 들어가 ‘견습생’으로 고생하던 시절부터 떠올랐다. 그때는 김 전 대통령이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박정희 정권과 맞설 때였지만, 주씨는 먹고살기에 바빠 정치엔 관심조차 둘 수 없던 시절이었다. 주씨는 1999년엔 제3회 서울특별시 이용경기대회에 나가 고전형 부문 금상을 받기도 했다. 귀와 목 뒤를 깨끗하게 쳐내는 고전형을 연마한 것이 이렇게 훗날 김 전 대통령의 머리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임 이발사는 강원도로 떠나게 됐다고 했다. 첫날은 전임 이발사가 이발하는 모습을 견학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인사만 나눈 뒤 별 질문이 없었다. 그렇게 ‘동교동 이발사’ 생활이 시작됐다.

복도에 불 다 켰다가 불호령 떨어져

초창기, 김 전 대통령은 ‘무서운 존재’였다.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한동안 얼마나 덜덜 떨면서 살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말이 없다가도 잘못된 점은 바로 꾸짖는 스타일이었다. 처음엔 면도를 하러 김 전 대통령의 볼에 면도칼을 갖다 대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손을 보더니 김 전 대통령이 말했다. “떨긴 왜 떨어?” 그 말에 더 떨렸다. 머리를 감기다가 김 전 대통령의 윗옷이 다 젖어버렸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김 전 대통령은 “전임자는 안 그랬는데 왜 그러나”라며 주씨를 꾸짖었다. 주씨는 “이발 면허를 딸 때도 국가경진대회에 나갔을 때도 안 떨리던 손이 김 전 대통령 앞에서는 그렇게 떨리더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뒤 부쩍 휠체어 의지

이발 과정만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 자택 2층에 올라가 이발실로 들어서면서 복도가 캄캄하기에 김 전 대통령이 오는 길을 밝히려고 불을 모두 켜두었더니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가 복도에 전부 불을 켜놨느냐”는 호통이 들리더니 복도 끝에서부터 불 끄는 스위치 소리가 들렸다. 다가오는 김 전 대통령의 발소리를 들으며 주씨는 식은땀을 흘렸다. 양치질을 하고 가도 담배 피운 걸 알아채는 김 전 대통령 때문에 몇십년을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하지만 근래엔 수심에 젖은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자주 봤다. 이발실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일이 부쩍 잦아지던 넉 달 전, 김 전 대통령은 이발을 하는 주씨에게 “요즘 이발소가 잘 안 된다며?”라고 물었다. “요즘엔 남자 손님도 미장원으로 가는 바람에 이발소 수가 많이 줄었다”고 답하자 김 전 대통령은 “아, 세상이 바뀌었나 보다”라고 말했다.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는 더욱 말수도 줄고 표정도 어두워졌다. 5월26일 화요일에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주씨는 “서대문구청에 가서 노무현 대통령을 조문하고 왔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주씨는 예전 같았으면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과 알게 모르게 교감을 나누는 3년 동안 그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던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은 주씨를 바라보며 “아, 그런가”라고만 했다. 주씨는 “어르신의 착잡한 심경이 깊게 느껴지더라”고 돌이켰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뒤로는 이발실에 올 때마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 저녁, 주씨는 이발소 문을 닫고 동교동 자택을 찾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김 전 대통령도 부인 이희호씨도 거기 없었다. 뭐라도 도우려고 했지만 동교동 자택에서 할 일은 없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갔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는데 기력이 쇠진한 듯한 이희호씨가 부축과 경호를 받으며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차마 인사도 못하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단정한 모습의 영정 사진을 보는 순간 다시 목이 메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머리를 하는 중에 손님이 와도 최대한 단정한 모습을 보이는 걸 중시했던 분”이라고 주씨는 추억한다. ‘그런 분이 가시는 길에 머리가 많이 길었을 텐데….’ 걱정을 하자면 눈물이 난다. 늘 건강하고 김 전 대통령을 잘 챙겼던 이희호씨도 걱정이다. 종종 이발실에 들러 “요 옆머리는 좀 길게 두시구려”라며 코치를 하던 부인이다. 흑갈색 염색약도 직접 선택하던 이다. 주씨는 수척해진 이희호씨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 주영길씨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이 되면 허전한 마음으로 ‘출장 가방’을 바라볼 것이다.

허전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출장 가방’

다음날인 8월19일, 주씨는 가게 문을 닫고 장애인 재활시설인 서울 은평구 구산동 은평천사원을 찾았다. 한 달에 한 번 그가 봉사활동을 하러 찾는 곳이다. 착잡한 마음이었지만 ‘머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주씨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는 가위질을 멈추는 날까지 누군가를 위한 이발사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이 되면 허전한 마음으로 ‘출장 가방’을 바라볼 것이다. 정치고 뭐고 잘 몰랐지만, “남북관계도 좋게 하시고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노벨평화상까지 타신 분”과 함께 했던 3년은 그의 인생에도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 큰 어른을 모신다는 생각에 영광스러우면서도 늘 떨렸던 이발실의 풍경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남이용원’은 그렇게 한 시대를 보냈다. 글 임지선 기자·사진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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