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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연방제 통일론 계승되어야 /셀리그 해리슨
나는 1969~70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주 만났다. 그때도 그는 통일을 향한 첫걸음으로 남과 북의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방안을 이야기했다.
나는 (<워싱턴 포스트>의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71년 한국 대선을 담당했고, 유세장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을 생생히 기억한다. 유세 기간에 그는 북한과의 화해를 부르짖었다. 그때 많은 외신기자들이 “선거가 광범위한 부정으로 얼룩졌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면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는 기사를 보냈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대선 패배 뒤, 미국 망명 기간 동안 그와 연방제에 대한 많은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의 연방제 제안에는 ‘남북한 군대의 통합’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디제이도 비현실적이라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연방제 제안 대신 두 군대를 현 상태로 두는 ‘느슨한 연방제’를 북쪽에 제안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두 체제가 좀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디제이는 남과 북의 인구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 동일한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고 했다. 87년 8월15일 연설에서 그는 ‘독립국가 연방’을 꺼내들었다. 두 체제가 각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방이 제한된 권위와 기능만을 수행하는 개념이다. 89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제안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도 이 개념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성명에도 들어 있다.
디제이는 연방제를 얘기하는 데 극도로 조심했다. 98년 5월2일, 나는 그에게 ‘왜 취임연설에서 연방제 방안을 언급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선 남한내의 대중적 지지를 얻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그 첫 임무는 강경보수파로 둘러싸인 남한내의 정치세력·관료·언론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사람들은)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디제이를 만난 사흘 뒤, 나는 김영남 북한 외무성 부상을 만났다. 그는 “김대중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실망했다. 취임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다 똑같다”고 말했다.
99년 5월4일, 나는 디제이에게 “연방제에 대한 침묵이 북한내 강경파들을 강화시키고 있다. 비록 만족할 만한 결과를 못 얻더라도 연방제 논의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디제이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북한은 안보 불안감이 너무 커 아직 연방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리스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보단 먼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한다”라고.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남북관계는 여전히 북-미 관계에 의존한다. 남한은 선택해야 한다. 미국의 세계정책, 미국의 핵 헤게모니 아래 영원한 종속변수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한반도 통일에 우선순위를 둔 디제이의 길을 존중할 것이냐다. 비핵화는 정상화의 전제가 아니라, 정상화 이후에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비록 디제이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비난했지만, 그는 통일한국이 지금의 일본과 똑같은 선택권을 가지길 원했다. 92년 5월1일, 디제이가 야당 지도자일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이 통일됐을 때, 우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 설치를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핵협정에 있어서)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협정과 우리가 아무런 차별이 없어야 한다. 통일이 되면,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도 상황이 변했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는다”라고. 셀리그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복지국가 길을 연 김대중 시대 / 구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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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이전, 복지국가를 대표한 영국에는 윌리엄 베버리지가 있다. 그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의 이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피폐한 영국인들의 가슴에 희망을 심었다. 미국 복지제도의 발전은, 1930년대 대공황의 고통 속에서 발휘된 루스벨트 대통령의 결단력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국 복지의 역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도력을 빼놓고서 얘기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수호자, 남북화해의 주도자로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복지국가의 길을 연 개척자로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종종 묻혀버린다. 그의 ‘생산적 복지’는 꽤 귀에 익은 얘기가 되었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복지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복지제도는 1960년대 이후의 개발독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료보험 등 주요 복지제도가 이때 시작되었고, 평생고용 등 기업 단위 복지 혜택도 여간 쏠쏠치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복지란 게 경제성장을 위한 보조적인 수단 이상은 아니었다. 복지 혜택 중 많은 것이 억압적인 노사관계 유지를 위한 당근으로 활용되어,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와 공무원 등 비교적 안정된 계층에 집중되었다.
민주화가 개발독재의 한 기둥을 무너뜨린 1990년대 이후 시대적 과제는 성장우선주의에 짓눌린 복지의 회복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이 취약계층까지 확대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어 현대적 복지국가의 얼개가 갖추어졌다. 참여정부에서도 그 뒤를 이어 분배정책과 사회서비스 혜택을 늘렸다. 이 10년간의 시기를 거치며 평등과 연대를 목표로 내걸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참된 의미의 복지가 한국 사회에서 시작되었다.
김대중 시대 복지에 대한 눈길이 곱지만은 않다. 분배정책 때문에 양극화가 생겼다는 우파적 비판은 다소 잦아들었지만,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자법 등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말미암아 비정규직이 늘었다는 좌파적 비판은 여전하다. 이 시기 비정규직의 대다수는 파견근로 때문에 생긴 게 아니었고 퇴직 근로자 중 정리해고자는 예외적 소수일 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칼날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보호법의 불철저함을 공격하다 이명박 정부의 원조 신자유주의 앞에서는 그 법을 방어해야 하는 현실에 놓였다. 하지만 처지를 뒤바꾼 경험을 하고서도 이들의 생각이 현실에 다가서지는 못하였다.
이제 김대중 시대에 대한 우파 비판자들은 시장근본주의 이념을 넘어서 실용적 친서민 행보로 일보 전진하고 있다. 하지만 좌파들은 여전히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이념적 잣대에 사로잡혀 있어, 이들에게 민생 문제를 끌어안는 현실주의적 정책 대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떠나갔지만, 갓 태어난 복지국가를 발전시켜 나갈, 김대중 시대 이후의 새로운 과제를 떠맡을 구심점은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자유시장 만능주의이건 국가개입 지상주의이건, 민생을 놓치는 이념과잉의 세력에게 미래는 없다. 새로운 시대의 준비는 바로 이런 자각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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