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김대중 전 대통령을 되돌아 본다(2)

by 싯딤 2009. 8. 29.

5. 1985~1996 고배를 마시다

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

군사정권의 탄압 이데올로기로 시작돼 민주 진영 분열

·수구언론 공세 심해진 87·92년 대선 거치며 노골화

1985~1996 고배를 마시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가택연금 속에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 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

호남당 총재, 대통령병 환자, 거짓말쟁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질기게도 괴롭힌 ‘주홍글씨’다. 권위주의 시대 집권 세력은 ‘반독재 야당 투사’ 김 전 대통령에게 이런 낙인을 찍었다. 낙인이 통했던 배경은 지역주의였다. 정확히 말하면 ‘반호남 정서’였고, ‘김대중 죽이기’ 전략이었다.

처음부터 먹힌 건 아니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에 맞설 대항마로 김대중 신민당 대선 후보가 선출됐다. 5·16 쿠데타 이후 10년 동안 독재 정권에 시달렸던 국민은 대중경제론, 주변 4개국의 남북전쟁 억제 보장, 향토예비군제 폐지 등을 내세운 ‘김대중 후보’에게 열광했다.

김대중 죽이기 전략으로 동원된 지역주의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의 유세에 20만 명이 몰려들었고, 부산 유세엔 50만 명이 운집했다. 선거를 9일 앞두고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 유세엔 100만 명이 모였다.

초조해진 박정희 전 대통령 쪽은 그가 호남 출신이라는 데 주목했다. 영남 유세 때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우리 지역이 단합해 몰표를 몰아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낼 수 없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효과는 없었다. 직전 대선인 1963년 박 전 대통령이 영호남에서 골고루 55% 안팎의 득표를 할 정도로 지역감정이 보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광주역 광장에서 투명 방패로 보호를 받으며 유세를 하고 있다. 노 후보 쪽은 야당 후보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지역감정을 유발해 자신의 유세를 방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연합

개표 부정, 무효표 조작 등 부정선거 의혹을 받으면서도 박 전 대통령은 94만7천여 표 차이로 힘겹게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부산·경남 지역에선 직전 대선 때 같은 당 윤보선 후보가 얻었던 것보다 각각 12.45%포인트, 2.52%포인트 더 득표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직전 대선보다 부산에서 8.56%포인트 줄었다.

지역주의가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계기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사정권을 상대로 한 오랜 민주화운동 끝에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이었다. 공민권을 박탈당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86년 10월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면 다음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압박했다.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동지이자 ‘40대 기수론’의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거들고 나섰다. “김대중씨가 복권되면 차기 대통령 후보를 김씨에게 양보하겠다”고 했다.

1987년 6·29 선언 뒤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는 실현되지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후보가 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을 겨냥했다. 영남과 호남으로 출신 지역이 다른 민주 진영의 두 사람이 갈라서는 바람에 군사정권의 후예가 대통령이 되고, 지역주의가 심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풀이도 있다. 그해 11월1일 김대중 후보의 부산 유세가 끝난 뒤 숙소 앞에서 ‘신원미상자’ 300여 명이 난동을 부렸다. 같은 달 14일 이번엔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가 군중 난동으로 무산됐다. 두 당 사이에 공방이 오갔지만, 곧 지역감정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집권 세력의 농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지역감정에 좌우되는 것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도와주는 것”이라며, 상대 후보가 자신의 연고지에서 유세를 할 경우 유세 방해 행위를 막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언론 보도는 ‘유세장 폭력’에 초점이 맞춰졌고, 노태우 후보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민정당은 잇따라 논평과 성명을 내어 두 사람이 권력을 잡으려고 지역감정을 유발한다고 맹비난했다.

민주화 이슈를 지역으로 덮은 <조선일보>

» 1999년 1월24일 경남 마산역 광장에서 한나라당이 대규모 정부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정부가 한나라당 기반인 영남 죽이기에 나섰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조선일보>도 지역주의를 이용해 공격에 나섰다. 그해 8월2일치 ‘김대중 칼럼’은 “지역감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노골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 유권자들에게 가장 잘 먹혀 들어가는 한마디는 ‘전라도에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다”라고 썼다.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지역주의를 고찰한 저서 <만들어진 현실>에서 “<조선일보>는 1987년 민주화 정초선거 훨씬 이전부터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동원하는 한편, 선거 경쟁에 참여하게 될 야당의 3김에 대해 매우 직설적인 반대 담론을 조직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 후보를 제외한 정당 후보들은 지역주의를 동원하지 않았다. 민주화와 정권 교체를 선호하는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조건에서 이들을 두 야당 후보 지지로 양분시키는 것은 (집권당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고, 지역주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동원됐다”고 지적했다. 민주화라는 선거 이슈를 야당 후보의 지역주의 경쟁으로 덮는 한편, 지역 변수와 무관하게 ‘안정’을 바라는 보수적 유권자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민정당과 이들의 집권 연장을 바라는 세력이 지역주의를 전략으로 선택했다는 얘기다.

1992년 대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역감정 때문에 패배했다”고 자평할 만큼 반호남 정서가 노골화됐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가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해.” 1992년 12월11일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이 한 발언이다. 이 자리엔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 등 부산 지역 기관장이 모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논의했다. 바로 ‘초원복집 사건’이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집권당에 편입해 호남 고립 구도를 만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자당은 이렇게 대선에서도 지역주의를 철저히 활용했다.

대선에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부터 1995년 복귀 때까진 끊임없는 ‘정계 복귀 논란’의 형태로 지역주의가 동원됐다. 진원지는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언론이었다. 이 때문에 1993년 말 노무현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을 놓고 아무 근거 없이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며 이런저런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민주당을 자생력이 없는 지역당으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의 음해”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킨 1997년 대선에서도 그를 겨냥한 지역주의 공격은 계속됐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1997년 11월1일치 칼럼에서 “많은 사람들이 3김 청산을 얘기해왔다. 우리는 왜 30~40년을 3김씨에게 묻혀 헤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고 ‘참신’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참신’이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뜻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칼럼을 비롯해 ‘3김=지역주의’란 등식으로 ‘3김 청산론’도 힘을 얻었다.

흥미로운 것은 1987~97년 세 차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호남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영남에서도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상승했다는 점이다. 부산은 9.14%→12.52%→15.28%, 대구는 2.63%→7.82%→12.53%, 경남은 4.50%→9.23%→11.04%로 늘어났고, 경북도 2.38%→9.62%→13.66%로 증가했다. 이는 집권 세력과 언론의 지역주의 공격에 영남 유권자들이 그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같은 시기 여당 후보의 호남 득표율은 광주 4.81%→2.13%→1.71%, 전북 14.13%→5.67%→4.54%, 전남 8.16%→4.20%→3.19%로 계속 떨어졌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한’이라고도 표현한 바 있는 ‘반호남 정서에 대한 반발’이 표의 응집력을 계속 높여온 셈이다.

‘호남 지지 얻은 영남 대통령’ 나왔지만…

이어진 두 차례 대선에서도 영남 출신이 호남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독식하는 지역 구도는 지속되고 있다. 정당이 유권자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를 대표하고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역 구도에 의존하고, 유권자도 정당의 변별력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가까운 쪽의 손을 들어주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역 차별에 결코 승복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득을 보고 손해를 보는 차원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대구·경북 지역과 부산·경남 지역에서 소박한 애향심을 악용한 특권층이 혜택을 보는 것이다. 영남 농민이나 호남 농민이나, 영남 중소기업이나 호남 중소기업이나 똑같이 못산다.” 새삼스럽지만 누가 지역주의로 이득을 보는지 눈을 크게 떠보라는 당부로 들린다. 누가 내게 ‘빵과 장미’를 줄 수 있는지 가려내야 한다는 당부 말이다.

조혜정 기자

6. 1997~2002 위기를 넘기다

IMF 졸업했지만 IMF 체질화

빈 곳간 채우려 집안 통째로 개방

…정리해고·양극화 폐해 속 생산적 복지 확충

1997~2002 위기를 이기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속에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외환위기 극복에 매진해 임기 중인 2001년 8월23일 IMF 관리 체제를 벗어났다.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혹독했고 위기를 극복한 과정은 명암을 남겼다.

1997년 11월21일 밤 10시. 임창열 신임 경제부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20여 일 전만 해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여건)이 튼튼하다”(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던 김영삼 정부였다. 97년 12월3일 임창열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제금융을 위한 정책 이행각서에 서명한다. 그 뒤 ‘경제 주권’은 IMF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1997년 12월18일 김대중 후보는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의 당선에는 역설적으로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 대통령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제화’ ‘세계화’란 이름으로 규제 완화·민영화·시장개방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같은 정책의 이면에는 김영삼 대통령 임기 중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돌파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려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OECD는 가입 조건으로 자본시장의 자유화와 거시경제의 안정을 요구했다. 그 같은 과욕의 마지막은 ‘곳간의 거덜’이었다.

국민은 국가 부도의 위기를 야기한 정치 세력을 심판하길 원했다. 성장과 개발로 상징되는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한 것이다.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 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물려받은 건 외환보유고 단돈 39억달러, 원-달러 환율 1965원, 종합주가지수 379포인트였다. “우리에게는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1998년 2월26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 그는 취임 전후 외화 유동성 확보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김 대통령은 대표단 파견과 IMF 등과의 자금 지원 합의 등을 통해 취임 뒤 불과 한 달 만에 214억달러를 도입하는 성과를 거뒀다. 국가 부도 사태를 일단 막았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환율은 안정됐고 금리도 내려갔다.


계파·인맥 대신 능력으로 경제팀 구성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를 찾아 경제인·금융인을 만나 한국에 투자해달라는 설명회를 열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정을 끌고 나갔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다. 외환 유동성 위기라는 급한 불을 끈 김대중 정부는 바로 기업·금융·공공·노동 등 4대 부문에 걸친 강력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IMF는 구제금융을 주는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과 긴축재정 정책을 요구했다. 이에 김대중 정부는 은행 퇴출과 부실기업 정리, 빅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개선 등 사상 유례없는 구조조정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다.

»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1998년 1월12일 경기 일산 자택으로 조지 소로스 퀀덤펀드 회장을 초대해 만찬을 열었다. 당시 김 당선인은 국제경제기구와 금융계 인사들을 잇따라 국내로 초청해 활발한 경제외교를 펼쳤다. 사진 한겨레 자료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계파나 인맥보다 능력을 우선시한 인사를 했다. 당시 경제팀은 이른바 ‘DJP 연합’의 한 축인 자민련 몫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코드에 얽매이지 않았다. 1기 경제팀의 핵심인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오히려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진영을 도운 전적이 있었지만, 김 대통령은 이를 괘념치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국민들과 소통하면서 풀었다. 취임 전 ‘국민과의 대화’에서 김 대통령은 “금고가 비었다”고 고백했다. 과거 정권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외환위기 직전까지 펀더멘털을 얘기하던 김영삼 정부였다. 또 김 대통령은 “실업자가 1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나는 오랫동안 노동자를 위해왔지만 (정리해고는) 불가피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털어놨다. 대통령이 솔직하게 국민과의 소통에 나서자 국민도 호응을 보냈다. 장롱 속에 모아둔 돌반지·금반지까지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룹 총수 만나 재벌개혁 압박

김대중 대통령은 입으로만 경제를 나불대는 대통령과 달랐다. 김 대통령은 재벌 개혁이 미적거리자 “구조조정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에 넣을 수 있다”며 그룹 총수를 만나 압박했다. 그 뒤 ‘대마불사 신화’는 붕괴됐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몰락했다. 대북사업에 적극 나섰던 현대그룹이 쪼개졌다. 쌍용·해태·진로 등 재벌 그룹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과거 30대 그룹 중 16개가 퇴출됐다. 정경유착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호탄이 됐다. 무리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자취를 감췄고, 기업의 경영 방침도 성장 위주에서 수익 위주로 바뀌었다.

김대중 정부는 부실의 싹을 근본적으로 도려내기 위해 부실 정도가 심한 은행을 정리하는 한편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1998년 6월 자력으로 경영 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동화·동남·대동·경기·충청은행을 퇴출시켰다. 정부는 은행의 구조조정을 위해 99년에만 45조2천억원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보험사 등 비은행권 금융기관들까지 합하면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은 64조원에 이르렀다. 99년 정부예산과 국민총생산(GNP)이 각각 80조원과 486조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 투입한 공적자금은 막대한 규모였다. 공적자금은 97년 외환위기 발생 이후 2006년까지 168조3천억원이 투입됐다.

» 1998년 1월 스포츠 스타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금고가 비었다”고 고백하며 국민과의 소통으로 IMF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곧바로 국민도 호응을 보냈다. 장롱 속에 모아둔 돌반치·금반지까지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진 한겨레 자료

이같은 노력으로 김대중 정부는 2001년 8월 IMF에서 빌린 195억달러 전액을 조기 상환함으로써 4년 만에 IMF 관리 체제를 탈피했다.

하지만 IMF의 성공적인 졸업 뒤에는 ‘신자유주의’라는 그림자도 드리워졌다. 김대중 정부는 규제 완화, 민영화, 시장개방, 정부 역할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를 외환위기라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신자유주의 물꼬 터줘” 비판받아

IMF가 남긴 명예퇴직과 이에 따른 중산층의 몰락은 사회문제가 됐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 물꼬를 허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IMF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자본시장을 개방해 한국을 글로벌 경제권에 본격적으로 편입시켰다. 김 대통령은 1998년 5월 자본 자유화와 외국인 투자 유치를 명분으로 내걸고 증권거래업과 선물거래업 등 21개 업종을 외국인에게 전면 개방했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철폐된 것도 이때다. 외환시장은 급속히 안정세를 찾았다. 연초 300선 밑에 머물던 주식시장도 그해 말 600선 부근까지 올랐다. 하지만 외국 자본들은 외환 자유화를 기회로 부도 위기에 몰려 헐값이 된 국내 알짜 기업들의 지분을 대거 거둬갔다.

1997년 12월23일, 대통령에 당선된 지 사흘 만에 김대중 당선인은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비밀리에 방한한 데이비드 립턴 미 재무차관을 만났다. 김 대통령은 새 정부를 못미더워하던 미국에 ‘정리해고’를 포함해 IMF 협약보다 더 강도 높은 개혁을 약속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은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한 의도가 강했다. 외국인들은 해고가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기업 토양으로 기업 구조조정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봤기 때문이다. 50년 정치 기반인 노동계가 결사 반대한 정리해고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외환위기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도 다각도로 펼쳐나갔다.

» 외환위기를 맞아 자영업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노숙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양극화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이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서 일자리가 노동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사 간 불신이 격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감소세를 보이던 노동쟁의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한국노동연구원 자료를 보면, 1994년 연 4만 명 수준이던 노동쟁의 참가자 수는 1998년 14만6천 명 수준으로 다시 증가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주로 임금 인상 목적의 쟁의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구조조정·고용안정·근로시간·복직 등이 핵심 이슈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도 “지금은 식민지 시대가 아니므로 외국 자본을 많이 들여올수록 좋다”며 신자유주의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섰고, 대우자동차의 해외 매각을 추진했다. 노동자 파업 때 정부 개입을 자제한 것 역시 외환위기 뒤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를 사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8월 현대차 파업 사태를 노무현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가 중재해 해결했을 때도 칭찬하는 대신 “정치권의 지나친 개입은 유감으로, 시정돼야 할 것”이라고 질책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시작은 경제위기가 불거지면서 흐물흐물 나온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적극 채택한 사례로는 흔히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꼽힌다. 두 나라 모두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에 헤맸을 때다. 국가 부도로 내몰린 우리나라 역시 신자유주의 해법을 마냥 외면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IMF의 고금리 정책으로 시중금리는 연 30%를 넘나드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살인적인 고금리 탓에 1998년 초 매달 3천여 개 기업이 부도로 문을 닫고 실업자가 하루 1만 명씩 쏟아지는 극한 상황이 전개됐다. 자영업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노숙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사회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반면 금융자산이 많은 고소득층은 자산을 계속 불렸다. 양극화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도, ‘80 대 20의 사회’가 도래한 것도 외환위기 직후부터다.

기초생활보장법 등 안전망 확대

» 김대중 정부 5년 경제지표

김대중 정부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노동의 유연성 등 신자유주의 기초를 마련한 건 노동법을 날치기하려던 김영삼 정부 때였다. 1997년 IMF는 한국 경제를 살릴 처방에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는 원론적으로 검토해보자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당시 이회창 후보와 조·중·동은 ‘김대중 때문에 IMF 지원을 못 받게 된다. 한국이 국가 부도를 맞게 된다’는 흑색선전을 했다. 결국 김대중 후보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면 이만큼의 복지정책을 지켜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랬다. 김대중 정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은 잊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복지정책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됐다. 외환위기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저소득층을 복지정책을 통해 끌어안으려는 시도였다. 경제 영역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현재 한국 복지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전 국민 단일 건강보험 등이 김대중 대통령 때 마련됐다. 1998년부터 3년 동안 20조원 규모의 실업대책이 쏟아졌다. 국민연금 확대 실시 등 사회 안전망을 확대하는 기반정책도 추진됐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생산적 복지란 시혜적인 복지가 아니라 능동적인 복지제도를 뜻한다. 사회적 약자를 사후 시혜적으로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할 기회를 더 만들어주고, 일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겐 교육과 훈련을 통해 복지를 제공한다는 개념이다.

가장 기본적인 복지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산적 복지 이념과 사회 각계의 합의를 바탕으로 1999년 9월 관련법이 제정돼 1년 뒤인 2000년 전면 시행됐다. 99년 1조원도 안 됐던 저소득층 생계비·의료비 지원은 이듬해인 2000년에 4조원으로 급증했다. 김대중 정부는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난 20년간 끌어온 의료보험 관리운영 체계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통합 의료보험제도를 출범시켰다.

»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한국 경제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복지재정과 그 수혜자가 크게 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인 1997년 보건복지부 예산은 2조8510억원으로 국가예산의 4.2%를 차지했으나, 2002년에는 7조7750억원으로 그 비중이 7.3%로 커졌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도 97년 37만 명에서 2002년 155만 명으로 늘어났다. 공무원의 대규모 감축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은 3천 명에서 5500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런 복지정책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전면적으로 막기엔 한계가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인 97년 1분기에 도시노동자 가구 상위 20%의 평균소득이 하위 20%의 평균소득보다 4.81배 많았는데, 2002년 1분기에는 5.40배로 벌어졌다.

DJ노믹스의 명암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을 일컫는 ‘DJ노믹스’의 기본 명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이다. ‘분배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추구했다. 시장은 철저하게 경쟁과 자율이라는 시장원리에 맡기고, 저소득층 지원은 복지정책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DJ노믹스의 고갱이였다.

김태동 교수는 “DJ 정부의 경제정책의 흐름은 ‘질서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적 자본주의’였다. 질서 자유주의는 나치 히틀러 체제 같은 전체주의적 경제를 지양하고 시장에 좀더 힘을 실어준다는 거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뒤 서독의 경제성장 발전을 모델로 한다. 인본주의적 자본주의는 서민 등 어려운 경제 주체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다”라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돋보인 경제·복지 정책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과 우리나라 복지체제의 바탕을 설계한 점이다. 하지만 미국식 시스템 도입으로 신자유주의 경제를 받아들였고 개혁의 피로를 빨리 느껴 재벌과 금융 개혁은 기대만큼 하지 못했다. 섣부른 규제 완화로 신용카드 위기를 방조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 시절 신용카드 대란으로 이어져 서민들이 고통을 받았는데, 이는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정보강국 도약 속 벤처 거품


재벌 중심 경제의 대안인 중소기업 육성 전략 주효했지만 ‘벤처 게이트’ 그늘도 남겨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지식정보화 강국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놓았고 벤처산업 육성을 통해 인터넷 산업이 오늘날 우리 경제의 한 축이 되는 기틀을 다졌다. 많은 인터넷 기업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 많은 빚을 지고 있다.”(국내 인터넷 관련 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보도자료, 8월19일)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벤처기업 육성정책은 빛과 그늘을 동시에 남겼다. 2000년 1월 서울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새천년 벤처인과의 만남’ 행사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보통신기술(IT)과 김대중.’ 독재에 맞서 오랜 민주화 투쟁을 해온 정치인 DJ와 관련해 ‘정보통신 대국의 기틀을 닦은 대통령’이란 평가는 어딘지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5년간 우리나라 정보기술 부문은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 1998년 1만4천 명에 불과하던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는 2002년 1040만 명으로 급증했다. 국내 IT 산업의 총생산액도 1997년 76조원에서 2002년 189조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에서 IT가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8.6%에서 2002년 14.9%로 확대됐다. 김대중 정부 초기 163만 명에 불과하던 인터넷 이용자는 5년 만에 2600만 명을 돌파했고, 정보통신 분야의 무역흑자는 97년 94억달러에서 2002년 168억달러로 늘었다. 이런 무역수지 흑자는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조기에 상환한 원동력이 됐다.

젊은 고학력 실업자들 흡수 목적

DJ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일성으로 ‘지식기반 경제’와 ‘정보 대국’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1998년 취임사에서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 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며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IT 강국의 초석을 닦은 대통령’이란 표현보다는 이른바 ‘벤처 공화국’이란 시각에서 김대중 정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벤처 시대는 DJ 취임과 동시에 도래했다. DJ는 취임하자마자 △향후 5년간 벤처기업 2만 개 창업 지원 △9천억원의 벤처 지원자금 마련 △창업 벤처기업에 3억원씩 지원 등 각종 벤처 육성정책을 쏟아냈다. 1998년 5월 ‘벤처산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개혁 시안’을 내놓은 데 이어 그해 6월에는 재정경제부가 파격적인 ‘코스닥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집권 초부터 막대한 벤처 지원자금이 뿌려졌다. ‘벤처기업 전도사’로 불리는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이미 김영삼 정권 말기에 코스닥 시장이 설립되고 벤처기업 육성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다만 벤처기업을 연구·개발한 YS는 이것이 대단한 정책인지 당시에 잘 몰랐던 반면, DJ는 실제로 생산과 마케팅을 주도한 격”이라며 “흥미롭게도 YS 정권의 차관급 이상 인물 중 DJ 정부 때도 계속 장·차관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정해주 전 국무조정실장 등 벤처 정책을 주도해온 관료들이었다”고 말했다.

DJ가 주도하는 벤처기업 육성 붐을 타고 벤처기업(2001년 기준)은 GDP의 3%(16조원), 총수출의 4%(56억달러), 총고용의 2%(34만 명)를 차지하는 등 급속히 성장했다. 벤처 창업도 봇물을 이뤘다. 벤처기업 수는 중소기업청이 벤처기업 인증 업무를 시작한 1998년 2042개에서 2001년 말까지 한 달에 500여 개씩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2001년 4월 1만 개를 돌파하면서 그 정점에 달했다.

DJ는 왜 벤처기업 육성에 나선 것일까? 한 가지 설명은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부 이규성 장관과 정덕구 차관을 중심으로 몇몇 경제관료들이 대량 실업의 타개책으로 벤처기업을 지목했다는 설이다. 젊은 고학력 실업자들을 대거 벤처로 흡수하려고 한 것인데, 그러려면 시중 돈이 벤처로 몰리도록 물꼬를 터야 했다. 또 다른 설명은 DJ가 평소에 갖고 있던 경제철학이 외환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당시 미국의 신경제 붐을 타고 ‘벤처’로 현실화됐다는 해석이다. DJ가 젊은 시절부터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체제’를 꿈꿔왔는데, 집권 초기부터 ‘모험·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갖춘 벤처기업’을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구상했다는 얘기다.

벤처 특성과 DJ 경제 논리 맞아떨어져

이와 관련해 김대중 정부 초기에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추준석 동아대 석좌교수는 “DJ는 기술력과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잘 발전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계셨다. 당시의 벤처 육성책에는 실업 대책의 일환이란 측면과 벤처를 통해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려는 DJ의 의지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장우 교수도 “당시 실업 대란 속에서 벤처 육성책이 나오긴 했으나 그 근저에는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창의적인 수많은 벤처기업들’을 생각하고 있던 DJ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DJ의 오랜 ‘중소기업 중심 경제’ 구상이 벤처 육성 모델로 가닥을 잡았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벤처기업의 특성과 DJ가 갖고 있던 시장경제 논리가 ‘역사적 복권’처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벤처 시장을 지배하는 법칙은 수많은 기업들이 세워지고 쓰러지고 또 살아남는다는 것인데, 이는 자유로운 ‘시장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체제와 맞닿아 있다. 국가 개입과 산업정책에 의해 성장하는 관치경제 시대의 재벌기업과 달리, 벤처기업은 DJ가 주창해온 민주적 시장경제를 구현할 수 있는 기업 조직이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천명한 DJ노믹스의 전면에 벤처기업이 배치됐다. DJ가 연일 벤처 이야기를 꺼내는 등 벤처기업에 온 신경을 쓰면서 대기업에서 벤처업계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도 많았다.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으니 그 흐름을 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크게 볼 때 DJ의 벤처 육성정책은 조기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신용카드 거품 속에서 벤처로 돈이 우르르 몰리면서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DJ의 벤처 정책은 금융과 산업 영역뿐 아니라 온 나라를 전방위적으로 흔들어놓았다. 가히 ‘벤처 공화국’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벤처 창업과 취업에 나섰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벤처 정신’이 외환위기의 암울함 속에서 활력소로 등장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테헤란밸리를 중심으로 ‘벤처 대박’ 신화가 연일 화젯거리가 되면서 너도나도 떼돈을 벌겠다며 벤처 투자에 뛰어들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묻지마 투자’였다. 벤처 육성정책이 실제로는 ‘벤처 투자 광풍’으로 왜곡돼버린 것이다.

코스닥 거품 꺼지며 고통

급기야 2001년부터 벤처기업들은 몰락의 길로 치달았다. 벤처 거품은 2000년 봄을 정점으로 급속히 붕괴됐고, 정치권력과 벤처기업인들의 ‘검은 공생’(이른바 벤처 게이트)이 잇따라 터져나왔다. 정부의 벤처 육성정책이 만들어낸 음습한 그늘이었다. DJ의 벤처 공화국은 측근인 권노갑씨의 구속 등을 거치면서 우울한 모습으로 종지부를 찍고, 대신 ‘게이트 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한 제2금융권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초기에 스타급 벤처기업인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코스닥에서 큰돈을 거머쥔 사람들이 정치권과 줄을 대면서 여권 정치인들도 당시 '돈 풍년'을 만났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외환위기는 DJ에게 한국 경제의 틀을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당시의 조급한 벤처 육성정책에 편승해 대다수 벤처기업들은 손쉽게 투자를 받거나 코스닥에서 큰돈을 벌었고, 결국 도전과 패기로 대표되는 역동적 벤처 정신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조계완 기자

신자유주의적인 평화·인권 대통령

오랜 정치 역정의 양면성…
인권 외치면서도 노동운동엔 적대적 태도 보이는 등 상반된 철학·이미지 공존

“정치 생활 30년 만에 텔레비전에 처음으로 웃는 모습이 나왔다.”

1996년 문화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를 연출한 김영희 PD는 당시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에게 들었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그렇게 정치인 김대중은 딱딱한 이미지로 굳어져 있었다. 1996년 30분간 방송된 ‘이경규가 간다’는 독재 정권이 만든 김대중의 30년 이미지를 단숨에 뒤집었다. ‘이경규가 간다’ 팀은 당시 경기도 일산에 살았던 DJ의 집을 새벽에 무작정 찾아갔다.

» 1997년 대선 전인 96년 12월 개그맨 최양락·팽현숙 부부를 만나는 DJ(왼쪽/한겨레 자료). 그의 이미지가 부드러워질수록 그의 노동정책은 강경해졌다. 2001년 대우자동차 해고자와 가족들이 경찰과 회사 정문에서 대치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딱딱한 투사’에서 옆집 할아버지 이미지로

다행히 DJ는 흔쾌히 촬영을 승낙했고, 마침 부부가 산책을 나가는 중이라 개그맨 이경규가 동행했다. 김 PD는 “1분도 사전에 상의한 적 없는 질문에도 유머 넘치는 답변을 해서 놀랐다”고 돌이켰다. 산책을 하면서 DJ 부부가 주고받는 농담은 이들을 비로소 ‘이웃집 할아버지·할머니’로 보이게 만들었다. 김 PD는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에 유명한 개그맨이 ‘김대중씨가 빨갱이인 줄 알았는데 방송을 보고서 부드러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고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DJ는 근엄한 선생님도, 빨갱이 투사도 아닌 ‘보통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 목요일 녹화가 끝나고 일요일 방송이 나가기 전에, 우여곡절도 있었다. 김 PD는 “당시 문화방송에 출입하던 안기부 직원이 방송사를 발칵 뒤집었다”며 “경영진·국장들이 녹화분을 보여달라, 내용이 무어냐 자꾸 물어서 곤욕을 치렀다”고 돌이켰다. 이미 녹화 사실을 김대중 총재 쪽에서 언론에 알려 차마 방송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됐지만, 어쨌든 방송의 파급 효과를 줄이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동안 정치인 김대중의 이미지가 딱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역으로 알려주는 일이었다. 김 PD는 “방송을 10분, 7분으로 줄이라는 얘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결국 방송은 원래대로 30분 동안 나갔다. 이렇게 딱딱한 정치인 김대중을 개그맨 이경규가 인터뷰하는 역발상은 ‘선생님’의 이미지를 확 바꾸었다.
그리하여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DOC와 함께 춤을〉을 개사한 노래 〈DJ와 함께 춤을〉에 리듬을 맞추는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로 거듭났다. 보수 세력의 색깔론으로 붉게 덧칠됐던 이미지가 비로소 달라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부드러운 행보는 계속됐다. 대통령 취임식에 마이클 잭슨을 초대했고, 이희호 여사와 함께 오락 프로그램 <21세기 위원회> 등에 나왔다. 그렇게 문화를 사랑하는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대통령은 개그맨이 사랑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개그맨 배칠수는 문화방송 표준FM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의 ‘3김 퀴즈’ 코너 등에서 11년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 성대모사를 해왔다. 배칠수는 “고인은 자주 ‘에~’ 하면서 말을 잇는데 아마도 즉흥 연설을 많이 해서 생긴 버릇 같다”며 “11년 전에 그분의 성대모사로 개그맨이 됐다”고 돌이켰다. 이어 그는 “스치듯 만난 자리에서 고인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며 “실제로 만나도 따뜻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당분간 그는 추모의 뜻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더구나 재임 시절엔 2002 월드컵 4강의 행운도 있었다. 이렇게 1970년대 독재 정권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정치인 김대중은 부드러운 통치자로 변해갔다. 그리하여 청년 김대중과 노년 김대중의 이미지가 조금은 다르다.

전 정권과 다를 바 없던 대미 관계·노동 정책

386 이전 세대가 DJ를 사자후를 토하던 투사로 기억한다면, 386 이후 세대에게 DJ는 인자한 할아버지 이미지에 가깝다. 1987년 당시에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아직도 보라매공원 집회를 기억한다. 그는 “당시에 김대중 후보는 민주 투사, 김영삼 후보는 정치인 이미지에 가까웠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그를 알았던 세대가 생각하는 느낌은 다르다. 지난해 청소년 기자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던 이건준(부산반여고3)군은 “성대모사 같은 걸로만 알았던 분을 만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며 “인터뷰가 끝나고 달려가 악수를 했는데, 연예인 만나는 것보다 짜릿했다”고 돌이켰다. 당시에 함께했던 옥다혜(부산외고2)양도 “‘햇볕정책이 퍼주기 정책이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불편한 질문에도 오히려 ‘관심을 보여줘 고맙다’는 말로 시작해 차분히 설명해줘서 정치인이 아니라 할아버지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두 명의 김대중이 있었다. 아니 여러 명의 김대중이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청년 김대중부터 보수 야당 총재를 지냈던 정치인 김대중을 거쳐 신자유주의 전도사로 비판받은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변신은 세상의 흐름을 좇아서 변해온 결과다. 장석준 진보신당 미래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세계사적 시간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온 여러 얼굴들”이라며 “다중인격보다는 오히려 미덕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해방 공간에선 좌우 합작을 추구했던 조선신민당 당원에서 건국 이후엔 자유주의 정당에 가담해 민주당 신파가 되었다. 장석준 실장은 “민주당 구파가 지주 세력과 연계됐다면, 신파는 신흥자본가 세력을 대변했다”며 “당시 그가 <사상계> 등에 기고한 노동문제 관련 글을 보아도 한국 자본주의가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한반도를 넘어선 세계사의 나침반을 읽었단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인이 세상의 흐름 좇아 변한 것”

이렇게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장고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정치인 김대중의 좌표는 변했다. 장석준 실장은 “신자유주의 김대중도 집권 이후에 갑자기 나온 변화가 아니다. 이미 80년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레이건의 초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며 “대외 개방론, 수출 입국론 등을 받아들인 결과가 <대중참여경제론>에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변화한 ‘DJ노믹스’는 집권 이후에 한국적 신자유주의로 나아갔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평화인권 대통령이었지만, 노동정책은 보수적이었다는 평가가 따른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민주노총 대변인을 지냈던 손낙구씨는 “DJ는 인권 대통령으로 불렸지만, 노동권 등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사회권 개념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사정이 있었지만,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비정규직 확대가 본격화된 것도 당시였다. 2009년 쌍용차 사태를 보면서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떠올리는 이들도 적잖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노동자는 사회의 기초가 되는 집단으로 노동운동을 배제하면 민주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며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대통령이 노동운동에 귀족 딱지를 붙이고 배제를 하니까 누구나 이들을 두드려도 되는 시대가 열렸다”고 비판했다. 실제 김대중 정권에서 구속된 노동자가 김영삼 정권 때보다 많았다.

미국에 대한 태도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주한미군 폭격장으로 쓰이던 매향리 소음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이 깔려 숨져도, 김대중 정부는 이전 정권과 별로 다르지 않은 대응을 보였다.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색깔론에 스스로 발목이 잡혔다”라고 말했다.

선비의 원칙과 상인의 감각을 동시에 품어

이렇게 DJ는 장구한 세월을 다양한 얼굴로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두 가지 지표를 지키고자 노력해왔습니다. 하나는 ‘행동하는 양심’이고, 다른 하나는 ‘실사구시’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란 서생의 희생정신이라 할 수 있고, ‘실사구시’라는 것은 상인의 현실감각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인간 김대중은 좌우로 흔들리는 한반도의 현대사 속에서 선비의 원칙과 상인의 감각을 동시에 품고 살았다.

DJ가 주례를 서준 영화배우 오정해

“내가 누구라고, 몇 년 전 약속 지키셨나”

» DJ가 주례를 서준 영화배우 오정해. 사진 연합
국악인이자 배우인 오정해씨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영화 <서편제>(1993년)를 통해 배우와 관객으로 처음 만났다. 오정해씨가 대학교 4학년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였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정해씨와 어머니를 한 번 더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높던 김 전 대통령은 “국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낮은데, 오정해씨 같은 이가 잘돼야 다른 국악인들에게도 희망이 될 것”이라며 “후학을 키울 수 있는 공부하는 소리꾼이 돼줬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그 뒤로도 오정해씨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김 전 대통령을 종종 찾았다. 그는 “선생님 내외가 딸처럼 아껴주셨다”며 “집에 돌아갈 때면 이것저것 챙겨주신 선물 때문에 가방이 묵직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붙잡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주로 외국 방문기였다. 오정해씨는 “인터뷰하듯 자세하게 들려주는 얘기가 알아듣기 어려워 괴로울 때도 있었다”며 웃었다. 한번은 1시간 이상 이야기를 듣다 배가 고파 “저기 배고프지 않으세요?” 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이 잘못 알아듣고 “너무 늦었지. 어서 가라”고 해서 얼떨결에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정가에서 주례를 서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딱 한 번 그 원칙을 어겼다. 1997년 오정해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면서 언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오정해씨는 “철부지라 몰랐는데 기사화된 것을 보고 엄청난 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며 “내가 누구라고, 몇 년 전 약속까지 지키며 이렇게 해주셨나 싶었다”고 했다.

동교동 집은 김 전 대통령을 만나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북적였다. 오정해씨는 “선생님은 그런 분들을 한 분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한번은 아침을 세 번 드시는 것도 봤다”고 회상했다. 노년의 김 전 대통령은 따뜻함이 넘쳤다.

김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도 오정해씨는 그를 ‘대통령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발길을 끊고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친분 있다며 나서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뵙는 것 자체가 민폐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도 직업이 국악인이라 공연을 통해 가끔 만났다. 오정해씨는 “선생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라 걱정만 하셨다”면서 “우리가 보낸 시간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정치인으로 오해를 샀던 부분을 떠나 인간적인 그분의 모습을 알리고 싶었다”며 경황이 없음에도 기자의 전화에 답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김미영 기자

유라시아 허브를 비추는 햇볕

DJ의 평화 구상은 개성공단 성공을 통해 남북이 ‘철의 실크로드’로 뻗어나가는 압록강의 기적

2000. 6. 15 남북이 손잡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필생의 목표였던 한반도 평화 통일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었던 화두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는 9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만든 국제회의인 CGI(Clinton Global Initiative) 제5차 연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뤄지게 될 공식 회의는 9월22일부터 25일까지였다. 김 전 대통령은 며칠 앞서 워싱턴을 방문해 오바마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북핵 문제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해법을 제시할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 구상의 일환이 7월14일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초청연설을 위해 준비했던 미발표 마지막 연설문에 담겨 있을 것이다. 연설문 제목은 ‘9·19로 돌아가자’다. 일관되게 주장해왔듯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 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위해 다자간 대화의 틀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9·19 선언의 골자이기도 하다.

“이 정부에 북핵 위기의식이 있는가”

한반도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이명박 정권 1년6개월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2008년 7월10일, 김 전 대통령이 평생 단골로 삼아온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정기이사회가 열렸다. 주제는 ‘북한의 핵 문제와 남북관계’. 외교안보 전문가의 발제가 있었다. “미국의 정책 조정기가 남북관계의 위기이자 기회다. 경제협력 등 개별 정책보다는 남북관계에 대한 근본적 입장 정리와 강력한 정치적 의지 표명이 시급하다. (김대중-김정일 간의) 6·15 공동선언과 (노무현-김정일 간의) 10·4 정상선언 등 정상 차원의 합의를 부인하는 건 국제관계상 있을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이 첫 질문을 던졌다. “과연 이 정부에 북핵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느냐.”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노벨상 수상 8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압록강의 기적을 이야기 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지난해 12월 말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는 김대중평화센터 임직원과 경호원, 경찰, 사저 식구들까지 함께 모여 김대중 전 대통령 초청 송년 오찬을 했다. 한여름 복날이면 식구를 불러모아 삼계탕 오찬 모임을 베풀던 것과 같은 취지였다. “나는 요즘 자다 깨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합니다. 독재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남북관계 등 나라의 상황과 중산층과 서민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어느 시대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며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시간은 흘러 2009년 4월, 김대중평화센터 정기이사회. 토론에 나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비핵화 의지와 미-중 관계의 변화에 대해 10분이 넘도록 준비해온 메모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설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곤 “최근 북한 쪽 사람과 접촉하고 온 외국 전문가를 만났는데, ‘북한이 앞으로 4년간은 남한 정부와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더라”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랬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른바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자신이 열어젖힌 남북 화해·협력의 시대가 다시 불신과 대결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그렇게 가슴 아파했다.

네 마리 코끼리에 둘러싸인 개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이슈, 특히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과 북핵 문제의 해결에 대한 관심과 원칙은 퇴임 이후에도 일관되게 지속됐다. 첫째, 북핵과 대량살상무기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둘째, 한-미 동맹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유지돼야 한다. 셋째,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말뿐 아니라 구체적 정책에서 우리 의견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둔 지정학적 고려가 출발이었다. 최근 수년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예일대 역사학자 폴 케네디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4대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네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에 둘러싸여 있는 개미와 같다. 네 마리 코끼리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제각기 뛰어다닐 때, 개미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당황하고 혼미스러울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강연에 나설 때마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그리고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역사와 지정학을 예로 들었다.

이런 생각은 이미 1970년대부터 정립되고 있었다. 2006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 간의 특별대담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6자회담이 당시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했던 역사를 이렇게 회고했다. “1971년 나는 ‘4대국 한반도 보장론’을 내걸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색깔론의 소재로 더 좋을 수 없었다.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는 ‘소련과 중국은 우리의 적성국가인데, 적성국가보고 우리의 평화를 보장하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런 적성국가들이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적으로 살도록 책임지고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분단시킨 책임자들 아닌가. 또 북한 배후에서 전쟁을 지원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까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져야 하고 또 우리는 그런 요구를 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때의 4대국에 남북한이 합해져서 6자가 되었다. ‘4대국 한반도 보장론’이 30년이 지나 6자회담의 상설화로 이어진 것이다.

» 지난 5월 중국 방문길에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부주석을 만나 환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 한겨레 자료

4대국 보장론이 6자회담 상설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하고 부시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미 간 양자 대화를 통한 관계 개선이 사실상 어려움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6자회담 상설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2004년 중국 방문길이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에게 6자회담의 구상을 설명했다. “6자회담을 상설화해 동북아 안보 및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기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반응은 신속했다. 바로 그날 밤, 함께 이야기를 들었던 탕자쉬안 국무위원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중국은 그 생각에 찬성한다”고 알려온 것이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6자회담이 열리게 됐고, 6자가 합의한 9·19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의 꿈은 ‘압록강의 기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끊임없이 외국의 정치가나 전문가들과 교류하고, 미국·유럽 심지어 압록강 건너편 중국 단둥시까지 방문했다. 한반도가 말만 반도이지 남쪽 부분은 유라시아 대륙과 철저히 고립된 섬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철저한 현장성과 실용성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열렸을 때, 우리는 세계 인구의 반이 넘는 시장에 빠짐없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의 물류 거점이 되어 서쪽의 파리·런던·암스테르담까지 연결되는 물류의 허브가 될 것입니다.”

언젠가 김대중 전 대통령께 ‘압록강의 기적’이란 표현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흔쾌히 허락했다. 얼마 뒤 개성공단의 남북쪽 관계자가 모인 자리에서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개성공단은 임진강의 기적이다. 이제 대동강의 기적, 청천강의 기적을 거쳐, 압록강의 기적, 두만강의 기적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들 좋아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은 살아남은 후손의 의무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늘 “통일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퇴임 이후에도 일관되게 “독일식 흡수통일도, 베트남식 무력통일도 반대한다”고 언명했다. 동·서독이 통합한 직후 독일 본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을 만났다. 이때 이미 독일식 흡수통일은 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그는 “우리는 점진적으로 평화공존하고, 평화교류해서 평화통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먼저 평화가 필요했다. 그 평화는 ‘분단 고착적 평화’가 아니라 ‘통일 지향적 평화’여야 했다. 2007년 발행된 퇴임 이후 연설 대담집 제목은 <통일 지향의 평화를 향하여>로 결정됐다.

내부적인 시련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대북송금에 대한 특별검사법이 발의됐다. 특검의 공소장이나 법원의 최종 판단은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가 아니라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에 대한 사업권’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송금의 편의는 정부 몫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6년 10월9일 미국 〈CNN〉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디즈레일리 수상이 수에즈 운하를 살 때 프랑스보다 영국이 먼저 샀는데 그때도 법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 수상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계약을 하도록 한 것과 같이 나도 북한에 장차 우리가 북한에서 발언권을 강화시키는 데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고, 그것이 지금 부분적으로 실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30~50년 동안 철도·항만·정보통신·관광시설 등을 확보했기 때문에 현대가 그러한 계약을 하는 것을 대통령의 특별 권한으로 승인해준 것입니다.”

“통일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어야”

그럼에도 6·15 남북 정상회담은 ‘퍼주기의 대가’였다는 추악한 공격에 시달렸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 퇴임 이후 두 차례의 북한 핵실험이 있었다. 수차례 장·단거리 미사일 발사도 있었다. 일부 보수 세력은 이 모든 것이 김 전 대통령 탓이라고 했다. 햇볕정책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핵 위기가 시작된 것은 1994년이고, 김영삼 행정부의 시절이었다는 점은 애써 외면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만능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대안이 있다면 비판자들이 명확히 내놓았으면 한다. 김 전 대통령은 한 보수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햇볕정책은 북한의 옷을 벗기자는 게 아닙니다. 따뜻한 태양 아래에 같이 햇볕을 받으면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자는 겁니다. 공동 이익의 기반 위에서 합의에 도달하자,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윈윈하자는 게 햇볕정책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필요한 것은 ‘윈윈’이다. 대화로 풀어가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이어가야겠다. “햇볕 따뜻한 양지에서 편히 쉬십시오. 남북화해·평화통일은 저희가 이어가겠습니다.” 최재천 김대중평화센터 고문

7. 평화를 새기다

DJ에 경탄했던 세계적 지도자와 석학들


바이든·시진핑 “존경하는 정치인”…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 울리히 벡, 앨빈 토플러 등 날카로운 질문에 놀라

2000. 12. 10 평화를 새기다

노르웨이 오슬로시청 중앙홀에서 노벨평화상을 받고,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역대 정치 지도자 가운데 가장 세계적인 인물이다.

8월19일 밤 9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인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 최경환 비서관이 “잠시 브리핑할 것이 있다”며 임시 기자실을 들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은 오늘 저녁 전세계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친구들 500~600명에게 장례 일정에 대해 전자우편으로 알렸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등 정치권에 있는 분들과 교수님 등입니다.”

‘김대중의 친구들’ 화려한 면면
‘김대중의 친구들’ 면면이 공개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해마다 세계 각국의 정상급 인사와 지도자들과 신년 우편을 주고받아왔다. 올해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비롯해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아키히토 일왕,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교황 베네딕토 16세,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황태자 부부, 미국 하버드대의 드루 길핀 파우스트 총장 등에게서 연하장을 받았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새해 선물을 보냈다. 르완다 여성들이 만든 전통 공예품인 ‘평화의 바구니’(Peace Basket)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지난 5월18일 방한해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그 공예품은 르완다 부족 분쟁에서 살아남은 르완다 여성들이 생산한 공예품이다. 그것을 보고 당신의 민주주의를 위한 생애, 민족 화해 노력이 생각이 나서 보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만찬을 마치고 떠나는 김 전 대통령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식탁에서 일어나 휠체어에 오르는 그에게 “다리가 불편하신 것은 ‘명예의 상징’이다. 얼마 전 남아공의 만델라 전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분도 20∼30년간 좁은 감옥 생활에서 다리 근육이 약해져서 크게 불편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지성인의 덕목으로 치는 영미계의 전통에서 비롯된 명예일 터이다.

» 지난해 9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서 ‘대화의 힘-공동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상호주의 대화’라는 주제로 연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연합

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이 때문에 존경하는 정치 지도자를 말할 때 김 전 대통령을 첫손으로 꼽아왔다. 두 사람은 1983~84년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에 첫 인연을 맺었다. 2001년 바이든 부통령이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시절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던 바이든 부통령이 “넥타이가 멋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럼 넥타이를 바꿔 맵시다”라며 넥타이를 풀어 건넸다. 김 전 대통령이 건넨 넥타이에는 오찬 때 스프가 흐른 얼룩이 있었다. 바이든 부통령은 이를 개의치 않고 중요한 행사 때 그대로 매고 나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매던 넥타이”라고 말하곤 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바이든 부통령이 임명됐을 당시 DJ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바이든 부통령의 폭넓은 이해와 자신과의 인연 때문에 많은 일들을 함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며 “그런 점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외교를 전담하면서 바이든 부통령이 보건복지 분야를 맡게 된 점은 조금 아쉬운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유럽에서도 그를 존경한다는 이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시대의 양심’으로 불리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김 전 대통령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친구를 넘어 인류애를 갖춘 인격자”라고 김 전 대통령을 평하곤 했다. 지난해 8월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람머트 독일 국회의장도 그 영향을 받은 이였다. 람머트 의장은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에서 당신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한국인)은 없다”고 거듭 말했다고 한다.

노르웨이 환경장관 “저의 개인적 영웅”

지난해 9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 개막식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중심에 있었다.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황태자는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그 자체를 살아오신 분”이라고 말했다. 에리크 손하임 환경개발부 장관은 “저의 개인적 영웅이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못했던 평화에 대한 많은 일을 하셨다”고 말했다. 마지막 토론자로 나선 세계적인 평화학자 요한 갈퉁 교수도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middle wing)이며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국제적으로도 큰 뉴스가 됐다. <뉴욕타임스>와 〈CNN〉 등 주요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인터넷판 머리기사로 전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제적 비중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라며 “한국이 아니라 전세계가 큰 지도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중요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민주화운동 전력 때문만은 아니다. 통찰력과 지성에 대한 감탄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이들은 늘 ‘한 수 배웠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지난 4월 중국 방문을 동행한 정세현 전 장관의 말이다. “중국의 차세대 주석으로 첫손 꼽히는 시진핑 국가 부주석을 비롯해 중국 최고의 학문기관인 사회과학원의 교수들과 이야기할 때도 김 전 대통령이 중국의 역사 저변에 흐르는 개념을 지금의 국제 정세에 대입해 듣는 이들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도입한 개념은 ‘천하태평’의 현대사적 의미였다고 한다. 딩시 대화의 일부다.

“여러분의 조상이 한나라 혹은 명나라, 송나라 시절이었을 때 중국 대륙이 천하였다. 당시의 최고 이상은 ‘천하태평’이었다. 이제는 지구를 하나의 천하로 보는 천하태평을 추구해야 할 때다. 중국이 먼저 동북아의 천하태평에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동아시아, 나아가 전세계의 천하태평을 이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중국은 미국과 양대 세력이 되었다. 미국과 중국이 잘 협력하면 세계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잘 안 되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1년 청와대에서 조지프 바이든 당시 미 상원의원과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때 매고 있던 넥타이를 바이든 의원에게 선물했다. 사진 연합
시진핑 부주석은 “각하의 높은 식견에 감사하고 귀중한 의견들을 신중히 검토하겠다. 앞으로도 귀한 의견 들려주시기 바란다”고 답했다. 그는 앉는 순간부터 “대학 초년 시절부터 존함을 익히 들었다. 도쿄 납치사건 이후로 사선을 넘나들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건 정치인으로 존경해왔다”고 인사했다고 한다. 시 부주석은 한국으로 치면 72학번(1953년생)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셈이다. 실제로 시 부주석은 지난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 시절에도 김 전 대통령을 공식적으로 초청한 바 있다.

지난해 4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나눴던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사회학)도 대화 중간중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당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포용정책부터 시작해 빈부 격차로 인한 지구촌의 남북 갈등, 기후변화 문제를 거쳐 중국 민주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벡 교수는 “분명한 분석(precise analysis), 설득력 있는(convincing) 주장에 놀랐다. 많은 정치가들을 만나보았으나 이렇게 명확한 비전을 가진 분은 만나지 못했다” “완전히 설득당했다” 등의 감탄을 연달았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앤서니 기든스 등과 함께 현대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 교수다.

특히 김 대통령이 “중국에서도 부정부패, 빈부 격차는 자본주의 때문이니 이를 폐지하고 계획경제로 돌아가자는 신좌파도 있지만, 이를 민주주의의 부재 때문으로 보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면 투명성을 보장하는 제도, 감시 체제가 마련돼 오히려 더 빨리 해결할 수 있다는 신우파도 있다. 그들은 나아가 일당 지배가 아니라 복수당을 지향해야 하며 종국에는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후진타오 주석도 이런 주장에 찬성했다고 한다”고 말하자 벡 교수는 “유럽에도 당신과 같은 비전을 가진 정치가가 있었으면 한다”며 말을 맺었다. 비슷한 시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미 당시 만난 드루 길핀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도 ‘감명’을 받은 인물로 통한다.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도 감명

파우스트 총장을 만난 김 전 대통령은 대화 막바지에 “총장께서 미국 역사를 전공하셨으니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질문은 이랬다. “링컨이 남북전쟁 후에 남부 사람을 처벌하는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겠느냐. 당시 미국은 결국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았을까?” 파우스트 총장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흥미로운 질문이다. 언제나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흥미롭고 어려운 문제다. 링컨이 없었다면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김 전 대통령은 웃으며 이 말을 되받아 “미국의 남북전쟁은 과거의 얘기지만 한국은 지금도 분단돼 있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링컨의 교훈을 배우고자 질문해봤다”고 배경까지 설명했다. 미국 남부 역사, 특히 남북전쟁을 전공한 파우스트 총장을 해당 분야의 질문으로 놀랜 것이다.

비슷한 일화는 지난 2007년 5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의 면담 때도 이어진다. 김 전 대통령은 “언젠가는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때가 올까. (역사학자) 토인비에 따르면 인간이 육체와 관련해서 의학 연구를 해온 것은 수천 년 전부터이지만, 인간의 내면이나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를 해온 것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프로이트나 융의 연구를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극히 최근 일이고, 심층심리학 등은 (아직) 어린이 단계라고 할 수 있지만, 몇백 년이나 1천 년씩 연구를 해나가면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정작 토플러 박사는 “그런 논쟁은 1천 년이 지나도 계속되지 않겠느냐”며 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논쟁적인 저작인 <만들어진 신>이 미국에서 출간되고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외교안보 분야에서 보좌해온 한 전문가의 말이다.

“당분간 공백 메우기 힘들 것”

“지난 2월 방한했던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출국 전 기내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전화한 당시의 일이다. 제가 ‘바빠도 잠깐 들르면 될 것을, 왜 기내 전화로 하냐’고 하자, 김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클린턴 장관의 판단’이라고 설명하셨다. 국제법상으로 전용기의 기내는 그 나라의 영토이므로, 미국의 영토인 기내에서 전화한 외교상의 전략이었다는 설명이다. 국제법에 달통했다는 저인데, 그 혜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이는 쉽게 나오기 힘들 것”이라며 “한국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태희 기자 *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