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김대중 전 대통령을 되돌아 본다(1)

by 싯딤 2009. 8. 29.

[출처]한겨레21.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특집호

1. 1924~1943 ,세상에 나오다

압제에 저항해온 ‘하의도 정신’ 이어받은 아이

‘소년 김대중’을 키운 고향 하의도…
조선시대 세도가·일본인 악덕 지주에 맞서 부당한 세금 거부 운동 일던 곳

1924~1943 세상에 나오다

전남 무안군 하의면(현 신안군)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하의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주한 뒤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 전남제일고)에 입학했다. 수줍고 겁 많던 소년이 어떤 파란만장한 운명으로 다가갈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압제에 저항해온 ‘하의도 정신’ 이어받은 아이

1945년 초가을, 야구장 두 개는 너끈히 들어갈 만한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 전남제일고) 운동장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일제 말기, 송정공업학교와 목포상업학교를 합병한 게 화근이었다. 해방 직후에 두 학교는 원상회복됐는데, 유능한 교사를 서로 데려가겠다고 고집하다 다툼이 일었다. 학생들이 나섰다. 송정공업 학생들이 병을 깨어 들고 목포상업 교정에 들이닥쳤다.

패싸움하려던 학생들 연설로 설득·제압

» 목포공립상업학교 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목포 북교 공립심상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목포상업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
바닷가에서 혈기방자하게 자란 학생들은 서로 으르렁댔다. 졸지에 운동장을 내준 목포상업 학생들은 흥분해 학교 무기고를 열었다. 일제는 교복 대신 군복을 입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시절 쓰던 총기가 그대로 있었다. 학생들은 실탄을 장전했다. 아수라장이 됐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교정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 학교 목포상업의 22회 졸업생이다. 학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난데없는 연설이었지만 누구도 가로막지 않았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나라의 재건을 위해 힘써야 할 젊은이들이 서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무기를 버리고 서로 손을 잡아라.” 연설은 20여 분간 계속됐다. 학생들은 깨진 병을, 그리고 총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무력과 폭력은 평화의 적이다. 조국의 앞날을 위해 서로 협조하고 병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공부와는 담을 쌓고 근육이나 기르며 지내던 목포상업 학생 권노갑은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훗날 회고했다.

씨근덕대던 학생들도 그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목포상업 22회 졸업생 김대중은 1939년 이 학교를 수석 입학했다. 목포 북교 공립심상소학교(현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직후였다. 목포항 반대편에 둥지를 튼 목포상업은 1920년에 개교했다. 5년제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과정을 아울렀다. 소년 김대중의 동급생은 모두 164명. 절반은 목포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였다. 나머지 절반을 두고 목포는 물론 호남 일대의 조선인 인재들이 경쟁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을 통틀어 그가 수석이었다.

김대중은 3학년 때까지도 1·2등을 다퉜다. 반장도 계속 맡았다. 어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인 역사 교사는 “조센징 김대중보다 일본 역사를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일본인 학생들을 야단쳤다. 노래는 못했지만 연설에는 소질이 있었다. 말 잘하고 공부 잘하고 연극반 활동도 하는 하얀 얼굴의 그는 여학생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쌍꺼풀 진 눈에 뒷머리가 납작하다. “집념이 강했지만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다”고 동창 김성남씨는 회고한다. 친구들과 광주까지 무전여행하던 김대중은 주민들에게 부탁하는 일이 싫어 노숙을 고집했다.

후배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게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목포상업 3학년 때, 청소를 감독하다 일본인 학생과 싸움이 붙었다. “상대를 넘어뜨려놓고도 막상 주먹질은 하지 못했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훗날 자서전에 썼다. 그러나 일본인 상급생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버릇없는 조센징 학생 김대중을 불러 몰매를 줬다. 결국 반장을 그만뒀다.

비슷한 시기에 ‘필화’도 겪었다. 맹자의 왕도정치와 당시 상황을 비교하는 일종의 리포트를 냈다.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 깃들어 있었다. 맹자는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당시 조선은 식민지였다. 호남평야는 쌀과 면화의 대량생산지였다. 목포는 쌀과 목화를 일본에 공출해가는 항구였다. 목포상업의 일본인 교장은 백성의 평안을 주장하는 그 리포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대중의 아버지 김운식을 학교로 불러 훈계했다.

학생 때 식민 당국 비판… 요시찰 인물 통보

수석 입학생 김대중의 성적은 4학년 때부터 급속히 추락했다. 졸업반이던 5학년 생활기록란을 보면 “독서를 좋아하나 사물을 비판적으로 보니 주의가 필요함”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164명 가운데 39등으로 졸업했다. 목포상업은 졸업생 김대중을 ‘요시찰 인물’로 목포경찰서에 보고했다.

» 지난 8월20일, 하의고등학교 학생들이 김 전 대통령의 생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은 하의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목표로 유학했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아버지 김운식이 처음 목포로 이사올 때만 해도 그런 수모를 예상하진 못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항구 근처 영신여관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었다. 여관이 들어선 ‘목포대’(木浦臺)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자리다. 1937년, 그는 아들의 교육 때문에 일부러 고향을 떠났다.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나 떨어진 하의도가 4남2녀 가운데 둘째아들인 김대중을 낳아 기른 곳이다.

길이 6km, 면적 34㎢의 작은 섬에서도 둘째아들은 공부를 잘했다. 목조 단층 건물인 하의공립보통학교(현 하의초등학교)를 다녔는데, 40명의 동급생 가운데 언제나 1등이었다. 4년제였던 이 학교 3학년 시절의 성적표가 남아 있다. 조선어·국어(일본어)·도덕·산수·국사(일본사)·지리 모두 10점 만점을 받았다. 체조가 8점, 미술이 7점이었다. 보통학교 동급생 정홍준씨는 “특히 산수 과목은 따를 자가 없어 일본인 교장에게서 여러 번 칭찬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하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서당을 다녔다. 학식이 높기로 인근에 소문난 초암 선생이 차린 덕봉 강당에서 그는 <천자문> <소학> <동몽선습>을 뗐다. 훈장은 옛날 과거 치르듯이 시험을 쳤는데, 일곱 살 김대중은 곧잘 ‘장원’을 했다. 외딴 섬 작은 서당에서 장원급제할 때마다 어머니 장수금은 이웃에 음식을 돌렸다. 목포로 이사가자고 남편을 설득한 것도 그였다.

아들 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술 취해 쓰러진 엿장수한테서 섬 아이들이 물건을 슬쩍했다. 철없던 아이 김대중은 아버지한테 드리려고 담뱃대를 골랐다. 어머니는 아들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리며 무섭게 야단쳤다. 우는 아이의 손목을 끌고 여전히 술 취해 자고 있는 엿장수를 찾아가 호통쳤다. “당신이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지만 왜 어린애가 물건을 훔치게 내버려두는 거요?”

어머니가 냉철했다면 아버지는 낭만적이었다. 아버지 김운식은 하의도에서 중농으로 통했다. 어부들을 상대로 객주업도 겸했다. 판소리 실력이 좋았다. 육자배기나 쑥대머리를 즐겨 불렀다. 1930년 무렵, 섬에서 처음으로 축음기를 집에 들여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놀러와 축음기 나팔에서 나오는 판소리를 들었다.

» 전남 신안군 하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 앞을 자전거를 탄 소년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어머니의 엄격함·아버지의 낭만이 그를 키워

낭만은 반항과 통하는 법이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앉혀놓고 조선왕조 계보도를 읽어줬다. 일본 왕을 지칭할 때는 존대하는 법 없이 “히로히토”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하의도라는 섬 자체가 고분고분한 곳이 아니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정명 공주에게 하의도에서 나오는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줬다. 공주는 당대 세도가인 홍씨 집안에 시집갔고, 이후 홍씨 집안이 하의도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받았다. 그 권리는 이리저리 팔려다니다 일제시대에는 악덕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다. 아버지 김운식은 그 부당함을 다투는 법정소송에 적극 나섰다. 1928년에는 하의도 농민조합까지 만들어졌지만, 일제는 농민조합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아이 김대중은 아직 ‘하의도 정신’을 몰랐다. 날이 어두워지면 측간을 가는 일이 두려워 번번이 누나의 도움을 받았다. 누나는 “사내 자식이…” 하며 동생 김대중에게 군밤을 먹였다. 개가 무서워 개를 기르는 집에는 심부름도 다니지 못했다. 친구들과 다투는 일도 없었다.

겁 많고 내성적이던 아들이 훗날 독재와 맹렬하게 싸우게 될 것을 부모는 알지 못했다. 수천 년간 임금과 지주와 일제에 핍박받아온 하의도 농민이 당했던 것처럼 그의 아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모진 탄압을 받던 시절, 부부는 세상을 떴다. 어머니 장수금은 1972년, 아버지 김운식은 1974년 사망했다.

이들이 생전에 살던 하의도 초가집에는 지난 8월19일 새벽 3시부터 분향소가 마련됐다. 한창 푸르게 자란 벼가 생가 앞에서 바람에 흔들린다. 20일 오후, 분향소에는 까마득한 선배를 추도하는 하의고등학교 학생 20여 명이 찾아왔다. 유영곤 교사는 “교육적으로도 수업의 연장이고, 당연히 와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주지 않아 주민들은 조금 실망했다. 김원인씨는 “폭염에다 육지도 아니고 해서 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육지 사람들의 사정을 살펴 말했다.

그래도 하의도 사람들은 옛 생각이 많이 난다. 면장을 지낸 주민 장명흠씨는 “천지가 거시기하듯이 만세 부르고 춤추었다”며 1997년 대선 때를 회고했다. 6촌 동생인 김영단씨는 “오빠가 어려서부터 참 예쁘고 잘생겼었는디.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재”라고 말했다. 그를 좋아했던 섬 소녀들은 이제 노인이 됐다. 일흔 살의 정덕진씨는 “인기가 좋았재. 나도 좋아했당께” 하며 살짝 웃었다. 보통학교 시절 싸움을 잘했으나 이제는 중풍으로 쓰러져 누운 박홍수씨는 “공부 잘허는 대중이는 안 때렸재, 이” 하며 잠시 어린 날로 돌아갔다.

수줍고 겁 많던 아이가 독재와 싸울 운명일 줄은…

1924년 1월6일, 그날은 소한(小寒)이었다. ‘대한(大寒)이 소한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죽었다’는 옛말처럼, 그해 소한은 유난히 추웠다. 섬에선 추위만큼이나 모진 압제가 번지고 있었다. 그날 전남 무안군 하의면(현 신안군) 후광리 초가집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떤 목표를 정하면 한눈을 팔지 않는 놀라운 인내심을 가졌으며, 최후의 승리를 조용히 준비하는’ 염소자리를 별자리로 갖고 태어난 아기였다. 아기는 분명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파란만장한 자신의 운명으로 다가갈 터였다. 겨울을 이겨내고 푸름을 피워내는 인동초처럼 자라날 터였다.

300년 지속된 농지탈환운동

하의도 농민 정신의 뿌리

하의도는 ‘투쟁’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그 뿌리는 162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명 공주가 혼인을 할 때 인조가 하의도 땅 24결(약 8만 평)을 하사했다. 정명 공주는 홍씨 집안과 혼인했고 홍씨 집안은 18세기부터 농민들에게 ‘도조’(남의 논밭을 빌린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걷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개간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관과 민에게 이중으로 세금을 내게 된 농민들은 1723년 한성부에 행정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19세기 들어 홍씨 집안의 세도가 약해진 틈을 타 1870년 도민들이 전라감사 이호준에게 하소연하여 도조를 걷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궁내부 내장원경 이용익이 하의도의 땅을 내장원 소속으로 해버렸다. 이완용이 득세한 1908년에는 홍씨 집안의 홍우록이 이완용에게 접근해 하의3도(하의도와 지금 신의면으로 분리된 상·하태도) 땅이 모두 자기 집안 소유라는 하급증을 받아냈다. 도민들은 경성지방법원에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냈다. 그사이 홍씨 일가가 이 땅을 처분해 일본인 우콘 곤자에몬이 땅 주인이 됐다.

도민들은 결국 재판에서 승소했고, 토지매입이 헛일이 된 일본인은 식민통치권력을 총동원했다. 도민 대표를 매수하고 재판부와 경찰 등을 동원해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도민들은 들고 일어났다. 일본인에게 협조한 이들의 집을 부수고 목포경찰서와 재판소에 몰려가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1928년 하의농민조합이 탄생했다. 하지만 경찰은 농민조합 간부들을 체포했고 하의도 농민항쟁은 반총독정치·반일투쟁으로 발전했다.

해방이 됐지만 하의도 땅은 또다시 ‘신한공사’ 소속이 됐다. 1946년 여름 신한공사는 소작료를 걷기 위해 하의도에 공사 직원과 경찰을 파견했다. 농민들은 저항했고 결국 8월2일 경찰과 도민이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 김지배씨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고 도민들은 폭발했다. 그들은 신한공사 하의지부 사무실에 불을 지르며 항의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농지조사가 시작됐지만 6·25로 중단됐고, 결국 1956년 6월 하의도 농지는 평당 200원의 가격으로 농민들에게 유상환원됐다. 농민들이 바라던 무상환원이 아니었던데다 아직도 일본 소유, 혹은 국가 소유의 땅이 남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의3도 농민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투쟁해왔다”고 말했다. 무려 300년이나 지속된 하의도 농지탈환운동, 그것이 김 전 대통령이 말한 하의도 농민의 정신이었다. 임지선 기자

2. 1944~1971 이상을 품다

청년기부터 평생을 따라다닌 낙인 ‘빨갱이’


6·25 때 북한군에 총살당할 위기까지 넘겼건만 정치 인생 내내 공산주의자·좌익이라는 공세에 시달려

1959년 6월, 강원 인제 보궐선거의 주인공은 국회의원 후보가 아니라 찬조연설자였다. “김대중과 나는 같은 세포조직에 있었습니다. 그는 틀림없는 공산당원입니다. 김대중과 죽마고우인 내가 말하는 것이니 믿으십시오.” 주민들은 그 말을 믿었다. 다른 쟁점은 파묻혔다.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김대중은 낙선했다. 김대중 후보는 “죽마고우”라는 그 연설자를 선거 때 처음 봤다. 상대 후보가 동원한 날조 선전원이었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낙선했을 때도 이승만 정부의 방해 공작이 있었다. 그러나 ‘빨갱이’로 몰아붙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1967년 신민당 윤보선 대통령 후보 지원 유세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맨 오른쪽). 김 전 대통령은 정치 입문 뒤 50년 동안 ‘빨갱이’란 낙인을 달고 살아야만 했다. 사진 연합

이듬해인 1960년 인제에서 다시 한번 낙선해 내리 세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그에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아둔 재산은 다 써버렸다. 선거 직후인 1960년, 첫 번째 아내 차용애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빨갱이’의 낙인은 이후로도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1959년 보궐선거서 첫 등장 “DJ는 공산당원”

낙인의 형틀은 김대중의 청년기 때 주조됐다. 그의 젊음은 광복, 좌우 대립, 전쟁, 독재로 이어지는 시간을 빛의 속도로 헤집고 달렸다. 청년 김대중은 좌와 우,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격변의 시대만큼 진동했다. 독재 정권과 극우 세력은 그 가운데 오른쪽을 모두 가리고 왼쪽의 흔적만 캐내어 ‘빨갱이’의 형틀을 만들었다.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그는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일본인 사장이 운영하는 국책회사였다. 직원이 되면 징병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15일 광복과 함께 회사는 귀속재산이 됐다. 미 군정은 스무 살의 김대중을 회사 관리인으로 선정했다. 당시 그는 한국인 종업원으로 구성된 경영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이듬해 정식으로 회사를 불하받았다. 이름을 흥국해운상사로 고쳤다.
흥국해운은 금융조합연합회(농협의 전신)와 계약을 맺어 구호 양곡과 비료 등을 전국에 해상수송하는 계약을 맺었다. 사장 김대중은 ‘청년 재벌’이 됐다.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 등도 겸했다. 1948년엔 일제 시기 일본어로 발행됐던 당시 유일의 지역언론 <목포일보>도 인수했다. 직접 사설을 쓰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때, 그는 서울에 있었다. 해군의 물자 소송 하청을 따내려고 해군 장교를 만나고 있었다. 전쟁 직후엔 부산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정부와 교섭해 사업권을 따내려 했다. 미 군정 치하에서 일제가 남긴 적산을 불하받고, 총독부 기관지나 다름없던 신문을 인수하고, 전쟁 중에도 정부 하청을 받으려 했던 ‘사장 김대중’의 면모는 ‘역사의식’보다는 ‘수지타산’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독립운동, 나아가 좌익 계열의 무장투쟁에 청춘을 바친 또래 젊은이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그에겐 어렴풋하나마 ‘민족의식’이 있었다. 그것이 청년 재벌 김대중의 발목을 잡아챘다. 1945년 8월16일, 서울에서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발족했다. 8월20일에는 목포에 건준 지부가 만들어졌다. 목포상선 관리인 김대중은 건준 목포지부에 참여했다. “이제부터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즉시 참여했다”고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적었다. 선전부의 말단 심부름을 맡았던 그는 이듬해 1월,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 지지 의견을 밝히자 건준을 떠났다.

그다음 선택도 숙고 끝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건준을 통해 정치에 눈을 뜬 그는 1946년 조선신민당에 입당했다. 조선신민당은 공산 계열의 ‘중국 연안파’가 만든 정당이었다. “좌우 합작을 내걸었기 때문에” 가입했다고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썼다. 그는 관련 모임에서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놈들은 때려죽여야 한다”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당을 나왔다. 그리고 1947년,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 해상단에 가입해 부단장이 됐다.

건준·조선신민당 거쳐 우익 단체에 합류

한국전쟁을 서울에서 맞은 그는 20일 동안 걸어서 목포에 돌아왔다. 인민군은 회사 건물, 자택, 가재도구는 물론 식량까지 모두 징발했다. 일제가 유달산에 만들었던 방공호로 숨어 이틀 밤을 보냈다. 인민군 정치보위부가 그를 찾아냈다. 지역 유지 김대중은 반동으로 몰려 두 달간 목포 형무소에 갇혔다.

1950년 9월18일, 수감자 200명을 강당에 몰아넣은 인민군은 50명씩 트럭에 태워 야산에서 처형했다. 저녁 무렵, 후퇴하기 바쁜 인민군을 대신해 지역 공산당원들이 ‘뒤처리’를 맡았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고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탈출했다. 100여 명이 목숨을 건졌다. 그는 공산 게릴라를 피하려고 집 천장에 숨어 지냈다.

극우 세력이 단골로 의혹을 제기하는 행적 가운데 ‘보도연맹’도 있다. 처음으로 공론화된 것은 1980년 신군부 쿠데타 직전이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중앙정보부의 ‘신상기록철’을 근거로 “김대중은 6·25 때 총살 대상으로 분류됐으나 실무자의 착오로 총살을 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같은 내용을 육군 각 부대를 돌며 일선 지휘관들에게도 강조해 전했다.

한국전쟁 직전, 이승만 정부는 사상전향자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사상검사, 정부 관료, 지역 유지들이 연맹의 간부를 맡았다.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기록 가운데는 보도연맹에 대한 언급이 없다. 보도연맹 가입 자체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가입했다 해도 지역 유지의 자격인지, 사상전향자의 자격인지 불분명하다. 어쨌건 보도연맹은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참상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체제에 협조하라고 꼬드겨 가입시킨 뒤, 오히려 양민 학살의 분류 기준으로 삼았다.

1967년 12월17일, 김대중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신상 발언을 했다. 박정희 정권 때였다. “이북에서 지령 받고 내려온 공산당도 자수하면 무죄를 해주고 생활정착금까지 주는 게 국가의 시책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한민국에서 자라고 생활하는 사람이, 나는 공산당을 반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억지로 빨갱이로만 몰아가는가. 광복 당시 20세에, 공산주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 분간을 못했다. 그것이 독립인 줄 알았다. 공산당은 (나를) 반동이라고 죽이려 하고, 반공을 위해서 혁명했다는 당신들도 나를 빨갱이라고 그러면 나는 어데 가서 살아야 하오?”

한 서린 질문은 응답받지 못했다. 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빨갱이’의 낙인도 커졌다. 1980년 7월, 전두환 신군부는 대중을 선동해 민중 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문을 보면, ‘김대중은 해방 직후부터 좌익 활동에 가담한 열성 공산주의자’라고 규정돼 있다.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뉴욕타임스>에는 박희도 당시 육군참모총장 등이 기자간담회에서 행한 발언 내용이 실렸다. “(김대중씨의 집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1980년 무렵 군 장성들의 견해가) 지금도 변한 것은 없다. 김대중씨도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8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다면 수류탄을 들고 뛰어들고 싶다.”

서거 뒤에도 진행 중인 ‘친북’ 낙인찍기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북한이 원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책임 있는 대통령 후보라면 김일성 노선에 동조하는 세력과 손을 끊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1997년 대선 때는 <김대중 엑스파일>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책은 권영해 안기부장이 용공 조작을 위해 발행을 사주한 것으로 이듬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지난 8월19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김 전 대통령을 “국가 반역범죄 전력자, 6·15 반역선언자, 북핵개발 지원 혐의자”로 칭했다. ‘빨갱이’의 낙인을 무덤에까지 새겨넣으려는 이들은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

안수찬 기자

인동초를 피우게 한 물이자 거름

47년 동안 함께해온 이희호 여사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

“다시 태어나도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시겠어요?” 누군가의 질문에 이희호씨가 답했다.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껄껄 웃었다. ‘네’ ‘아니요’보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2008년 11월에 열린 이희호씨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회장에는 그렇게 웃음과 평화가 흘렀다. 이씨가 고문직을 맡은 재단 ‘사랑의 친구들’의 이정원 사무총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뒷얘기를 전했다. “선생님께 그렇게 답변하신 이유를 물었어요. 그랬더니 ‘진짜 태어날지 안 태어날지 알 수 없는데 뭐라 하겠어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날 사람들이 웃었던 이유와는 분명 달랐지만 대답이 쉽지 않은 질문이었음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 1962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씨의 결혼식. 김 전 대통령은 5·16 군사쿠데타로 국회의원 당선 사흘 만에 자격을 상실한 뒤 수사기관에 불려다니는 와중에 이희호씨와 결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가난한 정치 지망생을 택한 유복한 인텔리 여성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이희호씨는 정신적인 동지이자 삶의 동반자였다. 김 전 대통령이 ‘인동초’였다면, 그는 한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도록 돕는 거름과 빛, 물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해 온갖 고초를 겪는 동안 그는 늘 곁에 있었다.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 인생 드라마를 도운 것도 그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김 전 대통령은 이씨에게 “당신이 없었으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소?”라며 고마운 마음을 비쳤다. 시어머니와 병든 여동생, 두 아들이 있는 가난한 ‘정치 재수생’과 결혼해 47년을 살아온 이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희호씨는 유복한 가정에서 많은 배움의 기회를 누렸다. 의사인 아버지와 신여성인 어머니로부터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화여전, 서울대 사범대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가 여성문제에 눈을 뜬 건 서울대 사범대를 다닐 때였다. 이희호씨는 갓 남녀공학으로 바뀐 국립대학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깊이 뿌리박힌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의식과 부딪쳤다. 남녀공학에서 몇 되지 않는 여학생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빈 교실을 찾아 도시락을 먹고,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학교에는 남학생들이 중심이 된 묵은 관습이 많았다. 이를 불평등하다고 여겼던 그는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다니라고 주문했다. 남학생들에겐 모임이 있을 때 여성들이 술 대신 마실 수 있는 사이다를 갖다놓으라고도 요구했다.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남녀공학에서 깨달았다. 당시 그의 별명은 중성을 뜻하는 독일어 관사 ‘다스’(das). 늘 꼿꼿하고 당당한 모습에 남학생들도 그를 ‘누나’라 부르며 따랐다.

결혼 열흘 만에 수감된 남편…고난의 시작

성평등 문제에 눈을 뜬 그는 촉망받는 여성계 지도자가 됐다. YWCA 총무를 맡고 있던 그가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만류는 어쩌면 당연했다. 이희호씨의 50년지기로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영숙씨는 “어려운 시기에 유학을 다녀온 석사로 미래가 촉망되는 여성운동가가 한 사람의 아내, 그것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정치인과 결혼하겠다니 말릴 수밖에 없었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하지만 이희호씨의 결심은 확고했다. 1962년 5월10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남녀평등 사회를 꿈꾸던 페미니스트 이희호씨는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이자 동지가 됐다. 이희호씨는 자서전 <동행>에서 김 전 대통령과 결혼을 결심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에게 정치가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그들에겐 달콤한 신혼도 없었다. 결혼한 지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은 ‘반혁명 혐의’로 체포돼 한 달여간 구치소 생활을 했다. 이후로도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이어졌다. 남편은 대중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었지만 독재정권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감옥과 주택연금,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 험난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이희호씨는 적극적으로 남편의 억류 사실을 언론에 알리고, 구명 활동을 펼쳤다. 기도와 눈물의 나날이었다. 그 오랜 세월에 대해 이씨는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이희호씨는 대통령 부인으로서도 남달랐다. 대통령의 그림자로만 살지 않았다. 아동과 여성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권 첫 해에 재단 ‘사랑의 친구들’을 만들었다. 결식아동과 독거노인 등을 돕는 일은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가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면서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위한 정책도 쏟아졌다. 역대 정권과 비교해 국민의 정부는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시작으로 여성부가 만들어지고, 가족법이 개정됐다. “국민의 정부 여성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들렸다. 여성 문제를 인권 신장과 민주주의 성숙의 잣대로 여기던 김 전 대통령은 이희호씨의 의견에 귀기울였다. 때론 그보다 앞서 챙겼다. 청와대 입성 전부터 동교동 집에 나란히 걸린 ‘김대중 이희호’라는 문패는 이희호씨도 생각하지 못한 거였다. 각료의 임명장 수여식에는 배우자도 초청했다. “공직을 수행하는 엄숙함을 부부가 공유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002년 5월, 유엔아동특별총회가 열렸다. 한국이 의장국이 될 차례였다. 이희호씨는 아픈 남편을 대신해 홀로 외교순방길에 올랐다. 한복을 곱게 입은 그는 어느 나라 여성도 앉지 못했던 의장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남북 평화의 물꼬를 틀 때도,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도 그의 존재는 특별했다. 성인숙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은 “김 전 대통령이 늘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아내, 어머니, 국민의 어머니로 완벽했다”며 “세상 누구를 만나도 위축되지 않았고 자신을 뽐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이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뜨던 날, 이희호씨는 자신이 뜬 벙어리장갑을 낀 남편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난 8월19일 빈소를 찾았던 성인숙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은 “김 전 대통령과 이별의 세리머니도 없었던 걸 안타까워하더라”고 전했다. 박영숙씨도 “인생의 동반자를 잃은 큰 상실감에 ‘미혼인 이길여 여사(경원대 총장)가 부럽다’는 말씀도 하시더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을 살아온 이희호씨는 그렇게 홀로 남았다.

하지만 그는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으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권양숙 여사가 여위었다”며 걱정하고, “장례위원회에 여성들을 많이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박영숙씨는 이희호씨를 가리켜 “한국의 엘리너 루스벨트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최영애 전 국가인권위원은 “이희호씨를 떠올리면 그의 걸음걸이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불편한 다리로 조심스럽게 걷는 모습에서 소신을 따라 걸어온 흔들림 없는 인생이 느껴져 사뿐거리는 여성의 걸음걸이보다 아름다웠다”고 했다.

“한국의 엘리너 루스벨트”

이희호씨의 자서전 <동행>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길고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굳건히 잘 걸어온 날들이었다. 남편의 평생 소원인 한민족의 평화가 빨리 정착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또한 나의 지극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대한민국이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남편을 먼저 떠난 보낸 지금, 그의 마음속에 담겨 있을 말 같다. 김미영 기자

개발독재에 맞선 대중경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접목한 ‘대중경제론’

…DJ를 대안 정치인으로 부각시켜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정치인 김대중’을 만든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재라는 암울한 정치 상황, 민주화 투쟁, 분단 체제…. 그런데 정치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1971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격돌한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해 3월 출간된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하 <대중경제>)이다. 이 책은 당시 10만 부가량 인쇄돼 대선 유세 현장을 중심으로 뿌려졌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 기초한 대중경제론은 DJ를 ‘진보적 대안을 가진 정치인’으로 각인시켰다. 고 박현채 교수와 <김대중씨의 대중경제>(1971) 표지. 사진 오른쪽 한겨레 장철규 기자

잘 알려졌다시피 ‘대중경제론’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전까지 형성·발전·수정돼온 정치인 김대중의 경제철학이다. 특히 대중경제론의 원형인 <대중경제>는 정치인 DJ를 ‘진보적 경제 대안을 가진 야당 정치인’으로 각인시킨 책이나 마찬가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을 지낸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지난 2005년 <프레시안>에 쓴 글에서 “대중경제론은 김대중을 그냥 반대만 하는 야당 정치인이 아니라 현실의 합리적 대안을 가진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국민에게 각인시킨 중요한 자원이었다”고 말했다.

1971년 대선 앞두고 출간돼 인기몰이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추진을 들여다보니… 재벌에 독점적 이윤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대중이 참여하고 대중이 공동 운영하고 같이 분배받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이, 노동자가 주식을 소유하고, 감사도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한 사람들이 해서…. 대중경제의 목표는 중산층을 지원하고 하위계층을 중산층화하는 것이다. 당시 내 주장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체제’였다. …당시 대중경제론을 만들면서 박현채 교수와 함께했다.”(김대중, 2008년 7월 <역사비평> 가을호 인터뷰에서)

‘대중경제연구소’ 이름으로 나온 이 책은 머리말에서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체제’ 지향을 선언하고 있다. 당시 대선 국면에서 발간된 이 책은 ‘대중’이란 단어와 김대중 후보 이름의 발음이 같다는 작명의 행운까지 더해지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돌풍을 몰고 왔다. 사실 <대중경제>는 그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선에 나설 당시 ‘정치적 목적’으로 펴낸 것이다.
이 <대중경제>가 고 박현채 조선대 교수의 작품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일화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제창한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당시 박 교수의 주도로 충남 온양온천의 제일여관에 여러 명의 진보적 학자들(정윤형 전 홍익대 교수, 김병태 전 건국대 교수, 김대중의 당시 비서였던 김경광 등)이 모여 10여 일 동안 합숙하며 공동 집필을 했다고 한다. 박 교수가 총괄을 맡고 DJ가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전체적으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DJ와 박 교수는 동향 출신으로, 1960년대부터 이미 서로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71년 당시 DJ는 내외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대중경제론을 만들면서 박현채 교수 등과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박현채 교수하고는 같이 좀 했어요. 책 내는 것도 도와줬고. 내외문제연구소 할 때는 남덕우 당시 서강대 교수 같은 분들도 초청해서 얘기를 듣기도 했죠.”(김대중, 2008년 7월 <역사비평> 가을호 인터뷰에서)

놀라운 건 정치인 김대중이 대선 당시 공안당국의 감시가 집중된 빨치산 출신 사상범인 박현채 교수한테 대중경제론의 이론적 근거와 체계를 맡겼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이 박현채에게 대중경제론의 집필을 맡겼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김대중은 당시 대통령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만약 김대중과 박현채의 관계를 박정희 정권이 안다면 김대중은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김대중의 경륜과 고뇌와 문제의식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중경제론은 기본적으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류동민 충남대 교수)고 할 수 있다.

수차례 수정 거쳐 민주적 시장경제론으로

물론 박현채 교수가 대중경제론을 기획했다지만 실제 집필자를 둘러싼 저작권 문제로 <대중경제>를 접근하는 건 협소한 시각이다. 대중경제론이 태동한 건 이미 1960년대 중반이었다. 1966년 1월 박순천 민중당 대표의 연두기조 연설문에 ‘대중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등장하는데, 이 연설문은 DJ가 직접 구상하고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중경제론의 아이디어와 철학은 DJ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산층, 중소기업, 균분’을 강조한 이 연설문이 발표된 뒤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중산층 논쟁이 뜨겁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어 1969년 DJ는 <신동아>에 ‘대중경제론을 주창한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정치사적으로 대중경제론은 박정희의 개발독재 노선에 대항하는 진보적 대안이란 성격을 띠고 있었다. 특히 정치적 기획가로서 DJ의 탁월한 면모와 정치적 역량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대중경제론의 등장으로 단기적으로 당시 1971년 대선을 야당이 주도할 수 있었다. 대중경제론이 구체화되면서 야당인 신민당이 정책정당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확산되었고 지지자들의 반응도 고조되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해 DJ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도시 지역에서 박정희보다 높은 득표를 하였다. 중·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대중경제론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온 대안적 전망이자 ‘서민과 중산층’ 정당을 표방해온 야당의 존립 근거와 정당성의 기제로서 작동하였다.”(정상호, ‘정책이념으로서 대중경제론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기억과 전망>, 2008년 제18호)

나아가 박현채 등 당대 진보적 지식인 그룹과의 적극적인 연대 속에서 대중경제론이 형성됐다고 한다면 이른바 ‘비판적 지지론’의 뿌리가 여기까지 닿아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까.

대중경제론은 DJ의 집권 직전까지 몇 차례의 수정과 변형을 거치면서 연속성과 단절을 동시에 보여왔다. 1983∼84년 미국에 건너가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으로 있던 DJ는 장문의 영문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1985년 영문판 <대중참여경제론>(Mass-Participatory Economy)으로 출판됐다. 이 책은 1971년의 <대중경제>를 바탕으로 당시 뉴저지주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던 유종근 전 전북지사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책은 국내에서 <대중경제론>(도서출판 청사·1986)이란 제목으로 간행됐다.

대통령 김대중의 정책은 대중경제론을 배신

이 1980년대판 <대중경제론>은 “기업가, 노동자, 농민, 소비자 등 모든 집단이 민주정부하에서 경제적 의사결정 과정의 여러 국면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창하고 있다. 그 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대중경제론은 다시 이강래 특보가 실무를 맡아 펴낸 <대중참여경제론>이란 수정본으로 재출판되기에 이른다. 국민의 정부 시절 경제 분야 정책을 관통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으로 대중경제론이 수정된 셈이다.

그 뒤 박현채 교수는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 태도를 오랫동안 유지하다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이른바 ‘뉴 DJ 플랜’을 표방하자 정치적으로 결별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 교수는 지난 1995년 세상을 떠났다.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대중경제론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대중경제론의 마지막 수정(?)은 김대중 집권 뒤의 실제 경제 운용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체제를 시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김대중은 그 자신이 그렇게도 주장했던 바대로 대중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양극화를 더욱 심화한 장본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1997년 이후의 김대중은 1971년의 대중경제론을 수정 증보한 것이 결코 아니라 철저하게 배신했다고 볼 수 있다.” 조계완 기자

3.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확고한 인권 신념 지켜온 사형수 출신 대통령…
국가인권위 발족과 실질적 사형제 폐지 길 닦는 업적 남겨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살해 위기를 겪었다.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1980년 9월17일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고난 속에서 인권 철학이 뿌리내렸다.

»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지난 2005년 2월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연세대 교정을 찾았다. 연세대 리더십센터의 초청으로 한·미·중·일 네 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1천여 명의 학생이 ‘동아시아와 젊은 리더십’이란 주제의 강연을 경청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던 때를 회상했다.

재판장 입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 군사정권의 모진 박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권과 민주주의 투사’로 만들었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큰소리는 쳤지만, 살고 싶어서 재판장에서 재판관 입을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무기징역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기만 받으면 언젠가는 나올 테니까. 왜 재판관 입을 쳐다봤냐 하면, ‘무’ 하면 (재판관) 입이 (앞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형의 ‘사’ 하면 (재판관) 입이 (옆으로) 찢어집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이것이었죠.”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한없이 절박했을 생사 갈림길에서의 고뇌는 ‘입이 튀어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라는 말과 웃음으로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인생에는 그런 유머로 넘기기에는 너무 엄혹하고 절박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이 언급한 1980년 신군부 군사재판에서의 내란음모 혐의 사형선고를 비롯해, 1971년 목포에서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 1973년 일본에서의 납치·수장 위기까지….

하지만 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군사정권의 도 넘은 탄압은 자연스레 그를 인권 수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인권 탄압 피해의 상징과 인권 수호의 상징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인권의 중요성과 인권 향상의 절박한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인권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만들어갔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돼 인권과 관련해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사형제 폐지 노력을 들 수 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는 김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자신의 임기 중인 2001년에 출범시켰다. 출범 준비 단계에서 국가인권위의 위상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시민사회단체 쪽과 갈등을 겪긴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자체는 우리 사회 인권 향상의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국가인권위는 지난 8월18일 김 전 대통령 서거 2시간여 만에 “김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이셨습니다. 고인이 목숨을 바치며 추구했던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라는 추도문을 냈다.

김 전 대통령과 인권을 잇는 또 다른 축인 사형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우선 본인 스스로가 1980년 9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출신이다. 김형태 변호사(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는 “1992년 대선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선 주자들을 불러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확고하게 사형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며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사형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빠져죽을 뻔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이 사람 목숨을 뺏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제도가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사형제 반대의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그는 2006년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기고문에서 “보다 우려되는 것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주창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는 수단으로 사형제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혁당의 가담자들이 잘못 기소된 뒤 사형됐고 나조차도 사형 언도를 받고 거의 사형에 처할 뻔했다”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사형제 폐지 활동 나서

»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하지만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신념은 개인의 경험 이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는 “그분 자신이 해방 뒤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기에 형벌로서의 사형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며 “1973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사형폐지·고문철폐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도 (김 전 대통령이) 열심히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앞서 언급한 기고문 서두에서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규정한 뒤 “민주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하는 것이며, 생명을 끊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인권의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형과 범죄 감소율은 무관한 점 △당사자로 하여금 범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기회를 줄 수 없는 점 등도 반대 이유로 지적했다. 사형제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신념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기간 단 한 번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표출됐다. 또 이런 정책 기조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운동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23명의 사형을 한꺼번에 집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업적은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김 전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의석수 또는 ‘국민 감정’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두 차례 정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형수·양심수와 관련해서만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진정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제 폐지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본인은 사형제를 폐지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는 못해 실질적 폐지라는 첫 단추를 끼운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15대 국회 이후 매번 제출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으며, 17대 국회에서도 절반이 넘는 175명의 국회의원이 사형제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민적 여론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누명 썼던 외국인 사형수 본국 돌려보내

인권운동가들은 살인 누명을 쓴 외국인 사형수 2명을 모국으로 돌려보낸 것도 사형제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파키스탄인 모하메드 아지즈와 아미르 사밀은 동료 파키스탄인을 살해한 혐의로 1993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편지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도록 진술을 사주한 또 다른 파키스탄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답변만을 내놓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이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하면서 국외 추방 형식으로 고국에 돌려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뿐 한국인이 개입된 사건이 아닌 만큼 감형 뒤 본국으로 추방해 파키스탄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은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혁 기자

‘엄마’의 눈물을 닦아준 ‘선생님’

민추협’ 시절부터 시작된 민가협과의 인연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분”

하필이면 광장엔 구슬픈 그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머리에 보랏빛 수건을 두르고 이 노래를 부르던 어머니의 가슴엔 이날 검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 2009년 8월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날,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이들은 고인과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에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던 손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빨갱이 엄마’로 손가락질당하던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던 사람은 영정 속 사진으로 남았다. 하필이면 민가협 어머니들이 모여앉은 천막 앞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자식과 남편을 감옥에 보냈던 민가협 어머니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분향소가 있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훌륭한 아들을 키웠다” 해주다

“그때는 민가협도 없었어. 구속학생 엄마들이 민추협 강당에 살았지. 자식들 구해달라고.” 민가협 어머니와 김대중 ‘선생님’의 인연은 그렇게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가협의 산 역사, 임기란 어머니는 말을 시작하며 “아이고, 지금도 창피해”라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그는 고인과의 인연을 돌이킨다. “새벽 2시에도 여러 번 (자식들) 살려달라고 선생님 댁으로 뛰어 들어갔잖아. 그러면 부부가 눈곱을 떼면서 맞았어. 우리 얘기를 하고 나면, 식은 밥이라도 비벼먹고 나왔지. 그냥 보내지 않았어.”

그렇게 어머니들은 외로웠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아래서 ‘엄마의 편’이 돼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남편은 말렸고, 친척도 외면했다. 그렇게 외로운 손들을 잡고 당시 김대중 ‘선생님’은 “훌륭한 아들을 키웠다”고 위로했고, 어머니들은 ‘우리 아들이 몹쓸 짓을 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부심을 얻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땅을 치고 울고 싶은 심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부음이 전해진 다음날, 10여 명의 민가협 어머니가 마치 자신이 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영안실이 있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제야 말한다. 임기란 어머니는 “솔직히 양김이 똑같지 않았어. 모두들 상도동을 ‘영삼이네’라고 했다면, 동교동은 ‘선생님댁’이라고 했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거든”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어머니들은 저마다 가슴에 고인과의 추억을 하나씩은 품고 있다.
1989년 방북 사실이 알려져 옥살이를 했던 서경원 전 의원의 부인 임선순씨는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에 어렵게 김대중 총재를 찾아갔는데, 총재님 모르게 북한에 갔으니 죄송하다고 말하니까 오히려 ‘서경원 의원 덕분에 내가 세계적 인물이 되었다’고 위로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어느 날에는 이희호 여사가 아이 넷을 혼자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당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주고 옷가지를 챙겨주었다”고 돌이켰다.

취임하자마자 청와대로 초대

그래서 서경원 전 의원 부부는 이날 아침 8시 한달음에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이렇게 오래된 인연이 있으니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분”이라는 임씨의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눈물이 나왔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다음날, 당시 김대중 당선인은 서울 수유리 4·19 묘역을 찾았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새벽같이 묘역에 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동지들’은 손을 맞잡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앞서 이별도 있었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선생님’이 영국으로 떠날 당시엔 30여 명의 민가협 어머니가 눈물로 배웅했다. 그래서 맞잡은 손의 감격은 더욱 컸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이선실 간첩단 사건’으로 아들을 감옥에 보냈던 김성한 어머니는 “지나고 보니 김대중 대통령도 그 사건의 피해자였고,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였다”며 “그렇게 ‘빨갱이’ 소리를 듣는 억울한 심정을 아는 사람으로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당연히, 고인은 취임하자 곧바로 민가협 어머니들을 청와대로 초대했다. 임기란 어머니는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청와대에서 불러도 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민가협이 공식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선생님과 희로애락을 같이했다.

집이 동교동에서 청와대로 바뀌어도 성역은 아니었다. 임기란 어머니는 “청와대로 무시로 쫓아가 사정을 말했다”며 “감옥에 있는 누가 아프고, 누구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지 정리해서 명단을 건네면 대부분 특별사면에 반영됐다”고 전했다. 현재 민가협 의장인 이영 어머니는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을 북한으로 송환한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장기수 후원사업을 해온 민가협 어머니들은 나중에 평양을 방문해 송환된 장기수들을 만나는 기쁨도 누렸다. 아들이 감옥에 가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한총련 사건으로 김대중 정부하에서 아들을 감옥에 보냈던 조순덕 어머니는 “그래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한총련 학생들이 빨리 석방되고 수배도 많이 풀렸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권의 ‘한총련 죽이기’에 지쳤던 이들은 그렇게 위로를 얻었다. 역시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민혁당 사건’으로 아들을 감옥에 보냈던 박영옥 어머니는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나오면서 사회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고, 비록 자식이 감옥에 있었어도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고 돌이켰다.

물론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있었다. 조순덕 어머니는 “김영삼 정권 시절에 나온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이 풀리지 않아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것은 여전히 한으로 남는다. 박영옥 어머니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했으면 정말로 좋았겠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1986년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민가협 활동을 시작한 이정님 어머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6번 만났다”고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대통령이 된 다음에 만나서 ‘인권 대통령’이지 ‘경제 대통령’이 아니니 꼭 국가보안법을 없애달라고 당부했다”고 돌이켰다. 비록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양심수 한 명도 포함 안 된 이번 특사

시절이 하수상하니 그리움은 커진다. 임기란 어머니는 “올해 8·15 특사에 양심수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며 “아예 양심수 개념조차 모르는 정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순덕 어머니는 “20년 넘게 이어진 민주화 흐름이 끊어질 위기가 닥치니 서거가 더욱 원통하다”며 “두어 해만 더 사셨어도…”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어머니의 목소리에 현 대통령이 귀를 막으니 떠나간 대통령이 더욱 그리워진다. 인터뷰 내내 민가협 어머니들은 숙연한 얼굴로 고인을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임이 떠났다. 글 신윤동욱 기자. 사진 류우종 기자

4. 1985~1996 고배를 마시다

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

군사정권의 탄압 이데올로기로 시작돼

민주 진영 분열·수구언론 공세 심해진 87·92년 대선 거치며 노골화

1985~1996 고배를 마시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가택연금 속에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 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

호남당 총재, 대통령병 환자, 거짓말쟁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질기게도 괴롭힌 ‘주홍글씨’다. 권위주의 시대 집권 세력은 ‘반독재 야당 투사’ 김 전 대통령에게 이런 낙인을 찍었다. 낙인이 통했던 배경은 지역주의였다. 정확히 말하면 ‘반호남 정서’였고, ‘김대중 죽이기’ 전략이었다.

처음부터 먹힌 건 아니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에 맞설 대항마로 김대중 신민당 대선 후보가 선출됐다. 5·16 쿠데타 이후 10년 동안 독재 정권에 시달렸던 국민은 대중경제론, 주변 4개국의 남북전쟁 억제 보장, 향토예비군제 폐지 등을 내세운 ‘김대중 후보’에게 열광했다.

김대중 죽이기 전략으로 동원된 지역주의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의 유세에 20만 명이 몰려들었고, 부산 유세엔 50만 명이 운집했다. 선거를 9일 앞두고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 유세엔 100만 명이 모였다.

초조해진 박정희 전 대통령 쪽은 그가 호남 출신이라는 데 주목했다. 영남 유세 때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우리 지역이 단합해 몰표를 몰아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낼 수 없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효과는 없었다. 직전 대선인 1963년 박 전 대통령이 영호남에서 골고루 55% 안팎의 득표를 할 정도로 지역감정이 보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광주역 광장에서 투명 방패로 보호를 받으며 유세를 하고 있다. 노 후보 쪽은 야당 후보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지역감정을 유발해 자신의 유세를 방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연합

개표 부정, 무효표 조작 등 부정선거 의혹을 받으면서도 박 전 대통령은 94만7천여 표 차이로 힘겹게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부산·경남 지역에선 직전 대선 때 같은 당 윤보선 후보가 얻었던 것보다 각각 12.45%포인트, 2.52%포인트 더 득표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직전 대선보다 부산에서 8.56%포인트 줄었다.

지역주의가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계기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사정권을 상대로 한 오랜 민주화운동 끝에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이었다. 공민권을 박탈당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86년 10월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면 다음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압박했다.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동지이자 ‘40대 기수론’의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거들고 나섰다. “김대중씨가 복권되면 차기 대통령 후보를 김씨에게 양보하겠다”고 했다.

1987년 6·29 선언 뒤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는 실현되지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후보가 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을 겨냥했다. 영남과 호남으로 출신 지역이 다른 민주 진영의 두 사람이 갈라서는 바람에 군사정권의 후예가 대통령이 되고, 지역주의가 심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풀이도 있다. 그해 11월1일 김대중 후보의 부산 유세가 끝난 뒤 숙소 앞에서 ‘신원미상자’ 300여 명이 난동을 부렸다. 같은 달 14일 이번엔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가 군중 난동으로 무산됐다. 두 당 사이에 공방이 오갔지만, 곧 지역감정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집권 세력의 농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지역감정에 좌우되는 것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도와주는 것”이라며, 상대 후보가 자신의 연고지에서 유세를 할 경우 유세 방해 행위를 막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언론 보도는 ‘유세장 폭력’에 초점이 맞춰졌고, 노태우 후보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민정당은 잇따라 논평과 성명을 내어 두 사람이 권력을 잡으려고 지역감정을 유발한다고 맹비난했다.

민주화 이슈를 지역으로 덮은 <조선일보>

» 1999년 1월24일 경남 마산역 광장에서 한나라당이 대규모 정부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정부가 한나라당 기반인 영남 죽이기에 나섰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조선일보>도 지역주의를 이용해 공격에 나섰다. 그해 8월2일치 ‘김대중 칼럼’은 “지역감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노골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 유권자들에게 가장 잘 먹혀 들어가는 한마디는 ‘전라도에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다”라고 썼다.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지역주의를 고찰한 저서 <만들어진 현실>에서 “<조선일보>는 1987년 민주화 정초선거 훨씬 이전부터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동원하는 한편, 선거 경쟁에 참여하게 될 야당의 3김에 대해 매우 직설적인 반대 담론을 조직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 후보를 제외한 정당 후보들은 지역주의를 동원하지 않았다. 민주화와 정권 교체를 선호하는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조건에서 이들을 두 야당 후보 지지로 양분시키는 것은 (집권당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고, 지역주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동원됐다”고 지적했다. 민주화라는 선거 이슈를 야당 후보의 지역주의 경쟁으로 덮는 한편, 지역 변수와 무관하게 ‘안정’을 바라는 보수적 유권자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민정당과 이들의 집권 연장을 바라는 세력이 지역주의를 전략으로 선택했다는 얘기다.

1992년 대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역감정 때문에 패배했다”고 자평할 만큼 반호남 정서가 노골화됐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가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해.” 1992년 12월11일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이 한 발언이다. 이 자리엔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 등 부산 지역 기관장이 모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논의했다. 바로 ‘초원복집 사건’이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집권당에 편입해 호남 고립 구도를 만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자당은 이렇게 대선에서도 지역주의를 철저히 활용했다.

대선에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부터 1995년 복귀 때까진 끊임없는 ‘정계 복귀 논란’의 형태로 지역주의가 동원됐다. 진원지는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언론이었다. 이 때문에 1993년 말 노무현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을 놓고 아무 근거 없이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며 이런저런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민주당을 자생력이 없는 지역당으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의 음해”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킨 1997년 대선에서도 그를 겨냥한 지역주의 공격은 계속됐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1997년 11월1일치 칼럼에서 “많은 사람들이 3김 청산을 얘기해왔다. 우리는 왜 30~40년을 3김씨에게 묻혀 헤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고 ‘참신’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참신’이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뜻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칼럼을 비롯해 ‘3김=지역주의’란 등식으로 ‘3김 청산론’도 힘을 얻었다.

흥미로운 것은 1987~97년 세 차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호남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영남에서도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상승했다는 점이다. 부산은 9.14%→12.52%→15.28%, 대구는 2.63%→7.82%→12.53%, 경남은 4.50%→9.23%→11.04%로 늘어났고, 경북도 2.38%→9.62%→13.66%로 증가했다. 이는 집권 세력과 언론의 지역주의 공격에 영남 유권자들이 그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같은 시기 여당 후보의 호남 득표율은 광주 4.81%→2.13%→1.71%, 전북 14.13%→5.67%→4.54%, 전남 8.16%→4.20%→3.19%로 계속 떨어졌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한’이라고도 표현한 바 있는 ‘반호남 정서에 대한 반발’이 표의 응집력을 계속 높여온 셈이다.

‘호남 지지 얻은 영남 대통령’ 나왔지만…

이어진 두 차례 대선에서도 영남 출신이 호남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독식하는 지역 구도는 지속되고 있다. 정당이 유권자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를 대표하고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역 구도에 의존하고, 유권자도 정당의 변별력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가까운 쪽의 손을 들어주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역 차별에 결코 승복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득을 보고 손해를 보는 차원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대구·경북 지역과 부산·경남 지역에서 소박한 애향심을 악용한 특권층이 혜택을 보는 것이다. 영남 농민이나 호남 농민이나, 영남 중소기업이나 호남 중소기업이나 똑같이 못산다.” 새삼스럽지만 누가 지역주의로 이득을 보는지 눈을 크게 떠보라는 당부로 들린다. 누가 내게 ‘빵과 장미’를 줄 수 있는지 가려내야 한다는 당부 말이다. 조혜정 기자 *

*****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되돌아 본다(3)  (0) 2009.08.29
김대중 전 대통령을 되돌아 본다(2)  (0) 2009.08.29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  (0) 2009.08.27
11  (0) 2009.08.26
사진으로 본 생애  (0) 2009.08.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