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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정부 반대로 청와대 못 들르고 떠나...

by 싯딤 2009. 9. 27.

[한겨레21. 2009.09.04 ]

 

‘DJ 운구’ 정부 반대로 청와대 못 들렀다

 

이희호 여사 간절한 소망 좌절… 노제에 민감한 정부, 서울광장 문화제 지원도 거부 

운구 행렬은 빨랐다. “선상님” “대통령님”을 외치며 오열하는 이들 앞에서 머물 듯 머물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할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이른 것은 8월23일 오후 4시50분이었다. 예상보다 1시간10분이나 이른 도착이었다. 텔레비전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한 조문객은 “뭐 저리 마음이 급하나”라고 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조문객은 “만장(輓章) 하나도 걸리지 않은 장례식이 무슨 국장이냐”고 아쉬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당시 서울시청 앞부터 서울역까지 길을 가득 메웠던 만장과 길가를 까맣게 물들인 리본과 걸개를 기억했기 때문일까. 만장만 해도 그렇다. 가는 이를 애도하며 깃발에 글을 적는 것이 만장이다. 만장은 애도의 뜻도 있지만, 떠나는 이가 생전에 한 일을 하늘에 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장을 쓰는 일이 고인의 생애를 회고하는 일이고, 만장을 드는 일이 그 기한일을 알리는 일이다. 여든다섯 평생에 사형수부터 대통령까지 살았던 이에 대해 쓸 말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운구 행렬이 8월23일 오후 서울광장을 들르는 동안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가 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왼쪽에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을 들고 선 이가 김 전 대통령의 손자 종대씨이고, 훈장을 든 이는 셋째아들 홍걸씨다. 사진 <한겨레21>

  유족과 정부, 장례일 새벽까지 이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족과 동교동계 인사도 국장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김 전 대통령의 국장 이튿날인 8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라디오 주례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도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또 누구에게나 공과 과가 있다. 공과는 역사가들이 평가하겠지만, 공에 대해선 충분히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일부로 기억해야 한다. 전직 대통령들을 예우하고 존중하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른 것에 반발하는 보수층을 향한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다음날인 8월25일 김 전 대통령의 둘째아들 김홍업 전 의원은 삼우제 자리에서 “국장이 엄숙히 치러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국민들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 장의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 장의위원은 “국민의 참여가 구조적으로 배제된, ‘형식만 살고 진심은 죽은’ 국장이었다”고 평했다. 다른 장의위원은 “말만 국장이지, 고인과 유족의 뜻을 받들겠다는 정성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이런 불만들이 나왔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 유족 대표들과 청와대, 그리고 정부를 대표한 행정안전부는 장례식 당일 새벽까지 장례의 성격부터 절차, 행사 내용에 이르기까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한 장의위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 운구 행렬의 방문지와 서울시청 앞 광장 행사의 성격과 주체를 두고 대립이 가장 강했다”며 “문제가 된 방문지는 바로 청와대였다”고 전했다.

  행정안전부와 실제 협상을 진행했던 유족 대표의 증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이 청와대를 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하셨다. 최초로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진 곳이고, 현직 당시 대통령께서 열심히 일하신 곳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도 하늘에서 이를 원하셨을 것이라며 대통령 영정과 함께 들르고 싶어하셨다.”

  유족 대표들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다음날인 8월19일 이런 뜻을 처음 정부에 전했다. 제안을 받은 행정안전부는 청와대와 협의한 뒤 “곤란하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 경호실의 반대를 이유로 들었다. 청와대 일대는 특별경계지역이고, 20여 대의 차량이 이어지는 대형 운구 행렬을 따라 시민들이 몰려들 경우 안전사고는 물론,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논리였다.

  협상안 제안에도 “경호상 문제” 정부 완강

  “대통령과 청와대 경호의 중요성을 생각해서 저희도 운구 행렬 전체가 가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본대는 광화문 광장이나 광화문 밖에서 대기를 하고, 영정과 운구 차량 그리고 여사님 차량만 청와대 앞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자고 다시 제안했다. 정부에서는 ‘국장 행렬에서 영정과 운구 차량 등만 분리돼 움직이는 것도 경호상의 문제가 있다’며 반대했다. 우리가 계속 협상안을 냈지만, 정부의 대답은 늘 같았다.”(실무 협상에 참여한 유족 대표)

  청와대 방문 협상은 8월22일 낮에 끝났다. 이날 오후 6시 브리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경환 비서관은 “운구 경로에서 청와대는 왜 빠졌나”라는 질문에 “소요 시간 문제 등 여러 가지 때문”이라고만 답했다. 1시간10분이나 빨리 끝난 운구 시간은 이 대답에 ‘밝힐 수 없는 사실’이 숨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앞으로도 전직 대통령은 죽어서는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곳을 방문할 수 없게 되는 전례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헌화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내외.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유족이 요구한 서울시청 앞 추모행사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같았다. 계속되는 증언이다.

  “시청 광장 앞 추모행사에 대해서도, 저희는 종교상의 이유도 있고 정부의 부담감을 생각해서도 노제라는 형식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했다. 엄숙한 문화제로 만들겠다고 했다. ‘만장도 내걸지 않겠다’고 양보했다. 청와대와 정부는 만장을 든 시민과 운구 차량이 뒤엉킨, 자칫 감정이 고조되기 쉬운 상황이 만들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당시의 서울시청 광장 앞 상황을 연상한 정부가 ‘노제’의 ‘노’자만 나와도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저희는 ‘국장과 국민장은 성격이 다르다. 저희도 최대한 차분하고 엄숙하게 진행하겠다’고 했다.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를 위해 애쓴 대통령의 마지막을 위령하는 합창과 관현악 연주 등 문화행사를 장엄하게 진행하겠다고 했다. 시청 광장은 특히 국장 기간 내내 가장 중심이 된 시민분향소가 있던 자리이고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지역인 만큼 운구 행렬이 거쳐가는 것은 당연하고, 이희호 여사님도 국민 앞에서 인사를 드릴 장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청와대만 안 오면 지원” 말했다가 번복

  행정안전부는 이에 대해서도 “결국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노제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게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유족 대표는 전했다. 정부가 우려한 것은 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정부 집회가 되는 것이었으리라.

  결국 유족 대표가 “이희호 여사가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인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정부 쪽에서 “민주당이나 시민단체 차원에서 이뤄지는 문화행사에 참여하는 경우는 필요한 연단이나 방송·연설 시설 등은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선에서 협상이 매듭지어졌다고 한다. 다른 장의위원은 “운구 행렬이 청와대만 오지 않으면 시청 앞에서 문화제를 치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문화제는 정부에서 지원할 수 없고, 자체적으로 진행하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꾼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문화행사를 여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비용 지원은 못한다는 답변이었다. 수억원의 돈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문화행사를 유족이 전적으로 부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민주당 차원의 문화행사가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장례식 당일 국회에서 진행된 영결식이 ‘열린 영결식’에서 ‘닫힌 영결식’이 된 과정도 비슷했다. 김 전 대통령을 마지막까지 수행했던 최경환 비서관은 8월21일 아침 8시 브리핑에서 “8월23일 영결식에는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다”며 “초청장이 없더라도 누구나 신분증만 지참하면 영결식장에 참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를 ‘열린 국장, 국민과 함께하는 국장’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정부는 곧바로 이를 부인했다. 양쪽은 장례식 당일 새벽까지 이 문제를 논의했다. 김 전 대통령 쪽에서는 “비표가 없어도 원하는 이들은 다 입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만큼 비표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국 초청장을 가진 이들과 장례위원들이 입장하고 나서 남는 자리가 있으면 차례대로 입장할 수 있다는 쪽으로 협상이 이뤄졌다. 당시 상황을 잘 안다는 한 장의위원은 “정부가 계속 제한된 입장만을 이야기하니, 언론 브리핑을 통해 못을 박아버리자는 전략이었다”며 “그러나 정부가 이를 전면 거부하는 바람에 ‘닫힌 영결식’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국회 영결식 국민 참여도 제한

  영결식 세 과정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한 장의위원은 “영결식 순서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며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과 탕자쉬안 전 중국 외교부장 등 주요국 대표들은 따로 분향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데, 한꺼번에 일괄 헌화를 시켜 외교적으로도 많은 결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장의위원은 “정부는 장의위원회가 마련한 일회용 종이모자도 ‘모자를 쓰는 것은 장례식 격식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가 오후의 높은 열기에 결국 허용했다”며 “영결식에 참여한 이들 상당수가 고령자였기에 우리가 종이모자를 준비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났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동교동의 목표는 ‘국장 엄수’와 ‘동작동 현충원 안장’이었기 때문에, 이 조건이 수용된 이후는 정부 쪽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는 설명도 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박지원 의원을 비롯한 권노갑·한화갑·김옥두·한광옥 전 의원 등 동교동 비서 출신 인사들이 대통령 서거 전에 ‘국장과 동작동 안장’을 정부에 공식 요구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이들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조건에서는 정부 쪽 의견을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한편, 장의위원회와 협상을 진행했던 행정안전부 의전실 관계자들은 “정부는 최선을 다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을 치렀다”면서도 “자세한 협상 내용은 실무자들은 모른다”고만 밝혔다. 실무 협상을 이끈 행정안전부 의전담당관은 휴가라는 이유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태희 기자*

  

김홍일의 비극도 남산에서

 고문받던 지하 벙커서 자살 기도하다 중정 요원들에게 짓밟혀 신경 손상…
“제때 치료 못 받아 파킨슨병 얻어”

 

» 8월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진행된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진행요원들이 헌화·분향을 마친 장남 김홍일 전 의원(휠체어에 탄 이)을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로 옮기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전 대통령이 퇴임을 반년 앞둔 2002년 9월의 일이다. 당시 서울 동교동에 짓고 있던 자택이 ‘초호화 주택’이라고 한나라당이 들고 나섰다. 연면적 199평의 규모도 그렇지만, 초점은 엘리베이터에 맞춰졌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그 가족은 이를 두고 속을 끓였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단독주택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하는 까닭 때문이었다. 의문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했던 김 전 대통령과 팔순을 넘은 부인 이희호씨는 실내에서도 가끔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다. 맏아들 김홍일(61) 전 의원도 당시부터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2001년부터 악화된 파킨슨병이 온몸의 근육을 옥죄기 시작한 탓이다. 김 전 대통령 가족에게 휠체어는 그간 살아온 역사와 삶의 무게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기간에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김홍일 전 의원의 등장이었다. 2006년 9월 의원직 상실 당시까지 넉넉한 체구이던 그가, 3년 만에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상한 얼굴로 나타나자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고문으로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경환 비서관은 8월20일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80년 5·17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사기관에 끌려가 허리와 등, 신경 계통을 많이 다쳤고 그것 때문에 파킨슨병을 얻은 것으로 안다. 최근까지 침대에 누워 생활하다가 병세가 조금 좋아져 앉아서 생활했다. 말을 거의 못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종 순간에 “아.버.지”라며 세 음절을 겨우 토해냈다는 김홍일 전 의원. 최경환 비서관이 말한 조사기관은 1980년의 중앙정보부였다. 그 비극의 시작은 29년 전, 80년 5월 ‘남산’으로 돌아간다.

  <한겨레21>은 당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였던 김상현·김옥두 전 의원과 유족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김홍일·김옥두 전 의원이 남긴 기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인동출판사) 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황을 재구성했다.

  1980년 5월14일, 서울과 대구, 광주, 청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 대학생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몰려나왔다. 6만여 명의 학생들은 거리에서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을 외쳤다. 다음날인 5월15일, 이제는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를 메웠다. 1979년 10월29일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이후, 거리에 선 이들은 민주화가 드디어 시작될 것이란 기대감에 들떴다. 전두환 계엄사령관을 중심에 둔 신군부가 이런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을 모른 채. 5월17일 밤 10시,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씨를 비롯해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정치인과 학생운동 지도자, 노동조합 간부, 종교인 등 26명을 체포했다.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등 소요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였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시작이었다.


김옥두·권노갑·한화갑도 옆방에서 고문받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일부다. “5월17일 밤 10시, ‘문을 열라’며 대문을 장총 개머리판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문을 부수고 군인 몇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단 한마디로 ‘가자’고 했다. 나는 ‘가자고 하면 가겠지만, 총을 치우라’고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만약 나와 경호원들이 저항을 하면 총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의 지하실로 나를 끌고 갔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은 ‘지하 벙커’라고 불리던 ‘제6별관’이었다. (지금은 남산 서울유스호스텔 앞의 ‘서울종합방재센터’ 건물로 쓰이는 곳이다.)

 

» 1980년 9월, 신군부가 조작한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앞줄 오른쪽 두 번째)의 모습. 재판부는 이때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

회고는 이어진다. “중앙정보부 지하로 끌려온 이후로는 매일같이 잠을 못 자고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들었다. 중앙정보부 지하에는 취조실이 나란히 있어서 옆방에서 누군가 고문을 당하는지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듣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내 귓가에 집요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로 내 가슴은 찢어질 듯했다. 알고 보니 모두 나와의 관계를 추궁당하고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행된 직후, 동교동 자택에서는 맏아들 김홍일씨와 비서 김옥두·권노갑·한화갑 등이 연행됐다. 제6별관 지하 2층, 김대중 전 대통령 옆에서 고문받고 있던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김홍일 전 의원이 남긴 기록의 일부다. “끌려온 첫날, 군복을 던져주며 갈아입으라고 했다. 하얀 벽은 구멍이 뻥뻥 뚫린 방음벽이었다. 세면대와 소변기, 책상 둘이 있었다. 수사관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두들겨팼다. 하루를 한마디 말도 없이 구타만 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뜨니 새 얼굴이다. 담당이 대여섯 명 되는 것 같았다. ‘니가 김대중이 아들이냐. 너는 절대로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 어차피 송장으로 나갈 테니까 피차 힘들게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답해!’ 사흘 동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5월15일 서울역 집회 배후자임을 시인하라고 윽박질렀다. 내 이름은 ‘빨갱이 새끼’였다. 연청 사무실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쓴 메모를 (간첩이 쓰는) 난수표로 인정하라고 했다. 사정없이 구타하지만, 급소는 교묘하게 피했다. 수치감과 모멸감을 받으며 ‘사람이 이렇게 망가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쳤다. ‘죽여달라고? 허허, 이놈이, 여기서는 죽는 것이 가장 호강하는 거야. 너 좋으라고 죽여줘?’ 카메라가 보였다. 만약 내가 자백을 하면 ‘봐라, 김대중이 아들이 말했다’고 악용하려는 것일 거다. 나는 혹여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할까 두려워 수사관의 눈을 피해 자살을 기도했다. 책상에 올라가 머리를 시멘트 바닥으로 처박고 뛰어내렸다. 이때 목을 다쳤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 인용)

  시멘트 바닥으로 머리 처박고 뛰어내려

  <한겨레21>과 만난 김옥두 전 의원의 증언이다.

  “중정 요원들이 김홍일 의원한테는 ‘니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쓰라’ ‘니 아버지가 밤마다 이북 방송을 듣는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고문했다. 김홍일 의원은 ‘차라리 죽여라’고 반항했지만,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구타를 당했다. 결국 고문 열흘째인가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에 책상에서 고개를 박고 뛰어내리고,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중정 요원들이 치료해주기는커녕 더 때렸다. 허리와 전신을 짓밟았다. 그때 목과 허리의 신경을 다쳤다. 그걸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니까 결국 파킨슨병이 왔다. 지난 16대 의원(2000~2004년) 때부터 보행이 불편했고, 17대 의원(2004~2006년) 할 때는 미국을 오가며 수술도 여러 번 받았다. 지금은 차라리 조금 좋아진 상태다.”

  파킨슨병은 뇌의 흑질(substantia nigra)에 분포하는 도파민의 신경세포가 점차 소실되는 신경계의 만성 진행성·퇴행성 질환이다.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속적인 외부의 충격과 고문을 받은 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한겨레>의 초대 사장을 지냈던 청암 송건호 선생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중정에 끌려가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어 8년간의 투병 끝에 지난 2001년 12월 타계했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도 이 병을 앓고 있다. 김홍일 전 의원은 올해 초·중순에는 최경환 비서관의 말대로 휠체어에도 앉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단다.

  김옥두 전 의원도 다리를 절고 있었다.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고 했다. 의전·총무·수행비서를 겸하고 있던 김 전 의원은 비서들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다. 김옥두 전 의원은 “매일 각목으로 두드려맞았지만,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각목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군홧발로 짓밟을 때였다”며 “유신정권 때도 중정 지하 벙커에 끌려가 고문당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잔인해져 있었다”고 말했다. 악질적인 요원들은 때리던 몽둥이를 입 안에 밀어넣고 휘젓거나, 집게로 혓바닥을 빼곤 했다. 완전히 벗긴 상태에서 성기를 플라스틱 자로 때리는 수치스럽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한마디로 ‘인간 백정’들이었다”며 치를 떨었다.

  김옥두 전 의원의 증언은 이어진다. “고문하면서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것을 인정하라’ ‘김대중이 학생들에게 돈을 줘서 데모를 조종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했다. 그리고 ‘김대중을 도와준 경제인이 누구냐’ ‘연결된 군부는 누구냐’ ‘학원(대학생)과 연결된 끈을 불라’고 했다. 김대중 선생님을 용공으로 몰아 사형시키기 위해 모든 비서진과 지인들을 잡아서 고문했다.”

  김상현 전 의원의 증언이다. 김상현 전 의원도 5월17일부터 안기부 지하 벙커에서 고문당하고 있었다. “5월18일부터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5월 말부터 ‘정동년을 아느냐’고 했다. 모른다고 하면 무조건 때렸다. ‘김대중이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두 차례에 걸쳐 300만원과 200만원씩 모두 500만원을 주고, 광주로 가서 학생과 깡패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를 수립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동년이란 전남대 복학생이 80년 4월에 동교동을 방문한 방명록 기록을 찾아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동년을 통해 ‘광주 사태’를 일으켰다고 짜맞춘 것이었다. 그 정동년이를 내가 동교동에 소개했다고 조작하기도 했다. 정동년씨는 당시 고문에 못 이겨 이런 허위 사실을 모두 인정했고,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신군부는 이렇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과 비서, 그리고 애꿎은 젊은이들을 남산으로 끌고 가 인정사정 없는 고문과 허위 진술을 통해 ‘김대중이 광주 사태를 일으켰다’고 조작했다. 그 목표는 ‘내란음모죄’의 성립이었다. 사형 구실이었다.

  허위 자백한 정동년씨 두 차례 자살 기도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의 일부다. “1980년 9월17일 오전 10시, 육군본부 대법정. 계엄보통군법회의의 선고공판이 열렸다. 군법무관 양신기 중령이 판결 이유 요지와 양형 이유를 6분 만에 낭독하고 나자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의 문응식 재판관(육군소장)이 일어섰다.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긴장된 몇 초가 흘러갔다. ‘김대중… 사형!’ 긴장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퍼졌다.”

  돌이켜보면, 신군부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 조사요원들은 김홍일과 김옥두, 김상현 전 의원에게 ‘네 아버지를, 네가 모시던 정치 지도자를 죽일 혐의를 만들라’고 강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황폐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정신적 지도자를 죽이고’ 자신이 대신 살고 싶을 만큼. 김홍일 전 의원의 신경은 고문으로 끊어진 게 아니라, ‘대신 아버지를 죽이라’는 악마의 목소리에 새카맣게 타버린 것은 아닐까.

  서울종합방재센터의 지하실에서 지금은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역사와 기억이 담긴 건물까지 없애야 할까. 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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