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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영남'과 '진보주의자'라는 단어가 김대중과는 얼마나 어색한 관계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경주가 본관인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19년을 보냈고 대학생이던 1992년 대선 때는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을 했으니 정서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김대중과는 가깝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김대중에 대한 영남의 저주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19년을 그 속에서 살았다. 빨갱이에 사기꾼은 기본이고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부산 사람들부터 몰살시킨다는 소문도 적어도 부산에서는 흉문보다는 사실에 가까웠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지난 19년을 얼마나 허구와 거짓 속에서 속고 살아왔는지 통감할 수 있었다. 그 충격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모피어스의 빨간약을 먹고 진실을 알게 될 때의 충격과도 비슷하다. 부산의 방송과 신문들에서는 결코 보거나 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물론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다. 김대중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는 2009년의 대한민국은 어떨까.
어떤 이는 그렇게 정보를 통제해서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게 과연 가능하냐고 묻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이제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고 인터넷이 급속도로 퍼졌으니 더 이상 그런 식의 세뇌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의 높은 의식수준도 대개는 같이 언급된다. 과연 그럴까.
영화 <화려한 휴가>가 나왔을 때 서울의 어느 어르신은 진압군이 정말로 그렇게 잔인했는지 처음 알았다고 했다(나는 내가 본 사진과 영상물보다 영화가 너무 순하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20년도 넘었고 해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념사업을 하는데도 광주의 진상을 모르는 사람이 꽤 많다. 발포 책임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앙일간지의 어느 기자는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인 김대중에게 죽기 전에 비자금 실체를 밝히라고 호통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빨갱이 김대중" 세뇌의 주범은 누구?
이번에는 김대중 서거를 계기로 그와 관련된 언론보도가 잇따르자 김대중이 정말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남북통일을 위해서 그렇게 진심으로 노력했는지 처음 알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잘못된 정보에 세뇌되지 않고서야 대명천지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는 일본 국민들이 한일관계에 대해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일본의 잘못된 교육과 일본 언론에서 찾는다. 일본은 매우 오래 전부터 우리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국제화된 나라이며 인구도 세 배다. 그런 나라에서 대다수 국민들이 잘못된 역사인식을 '세뇌' 당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우리는 한국현대사를 누군가에 의해 세뇌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까.
그 세뇌의 주범을 나는 이번 국장을 통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김대중 서거에 부쳐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는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김종필 국무총리(김대중 정부의 첫 총리였다) 인준을 6개월이나 해 주지 않았다는 점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이 취임선서를 하던 바로 그날부터 한나라당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민정당과 공화당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뿌리는 그 '위대한 지도자'를 빨갱이로 몰아 여러 번 사지로 몰았다. 아직도 그들은 툭하면 '좌파척결'이나 불순한 배후를 거론하며 정치적 반대자에 낙인을 찍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억울하게 죽어간 것이 석 달 전의 일이다. 자신들의 지난 과거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그들이 이제 와서 위대한 지도자 운운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조중동은 그들의 훌륭한 공범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신문 사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2000년 6월15일자 <조선일보> 사설이었다. 조선일보의 이날 첫 사설 제목은 'IMT 2000 황금알인가'였고 두 번째 사설 제목은 '양안에 훈풍이'였다. 첫 사설은 당시 차세대 이동통신으로 주목받던 IMT 2000사업의 과열양상을 경계하는 내용이었고 둘째 사설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완화를 다루었다. 그 첫 문장은 이렇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타이완의 천수이볜(진수편) 총통 정부가 중국대륙과의 '3통(통)'을 허용키로 한 것은 타이완 해협의 긴장완화는 물론, 동북아 지역 전체의 평화정착을 위해 적지 않은 희망을 갖게 해주는 조처로 보인다."
이 사설을 실은 날 김대중은 평양에서 김정일과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어차피 그날 선언은 다음날 신문에서 다룰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모두들 평양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그날 대한민국의 1등 신문은 중국과 타이완의 관계개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조선일보가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김대중의 노력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고 기대하기 어렵다. 햇볕정책을 '퍼주기'라고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던 조선일보가 아니던가.
실제 조선일보는 김대중 서거 다음날의 사설에서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을 때 온 나라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사실대로 쓸 수도 없었고, 정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조선일보는 사실대로 쓰지도 정직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입바른 소리하는 노 정객에 저주를 퍼붓던 사람들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갑자기 180도 다른 말로 그를 칭송하고 있으니 그 진의를 믿기 어렵다. 과거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다면 그들은 내일 또다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사실대로 쓰지도 않을 것이고 정직하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존경할 만한 보수주의자, 김대중
오늘 김대중을 추모하는 전국적인 열기와는 사뭇 다르게 김대중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적 반감 또한 대단했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 추모방송들은 지난 일이라고 쉽게 넘어가지만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4요소, 즉 1) IMF가 터지지 않았거나 2) 이회창 아들이 군대 갔거나 3) 이인제가 출마하지 않았거나 4) DJP연합이 불발되었거나 넷 가운데 어느 한 요소만 없었어도 김대중의 당선은 불가능했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고서도 김대중은 겨우 39만 표차로 이겼다.
나의 고향인 경주와 부산 친지들은 "그냥 김대중이 싫어서", "말하는 게 얍삽해 보여서", 혹은 "전라도 깽깽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찍지 않았다. 국장이 모두 끝나고 김대중을 땅에 묻은 지금, 한국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까? 오히려 한나라당은 새로운 미디어법을날치기로처리해, 이들 힘센 언론사에게 더 큰 힘을 쥐어주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2의 김대중 같은 거목을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19년의 세뇌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혁명을 꿈꾸는 학생운동권이었다. 사회혁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김대중은 확실히 우리의 대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해 운동에 가담하면서 수십 년 동안 민주화의 한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가늠할 수 있었다. 적어도 김대중은 그 오랜 세월 동안 헌정질서를 유린하거나 공범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김대중은 존경받을 이유가 충분했다.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김대중은 존경할 만한 보수주의자였다.
과학에서는 또 다른 길, 혹은 대안(alternative)이 무척 중요하다. 과학이 발전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또 다른 길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는 또 다른 가능성이 곧 축복이다.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도 이 얼터너티브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정희 말고도 대통령을 할 만한 사람이 있음을 직접 증명했다. 예비군을 없애도 국방을 할 수 있음을, 남북간 화해협력으로도 통일의 길을 열 수 있음을 주장했다. 군사독재나 한국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보편적 민주주의도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음을, 재벌위주의 정부주도 관치경제 말고 시장의 자율성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구조를 만들 수 있음을, 그리고 호남 출신도 충분히 국가를 잘 운영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실제로 그 다른 길이 모두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직접 증명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김대중이 IMF를 극복할 때 그의 방식이 아닌 또 다른 대안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알짜기업들이 헐값에 팔려나갔고 신용불량자들이 대량으로 생겨나 후대 정부에까지 큰 부담을 지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불행했던 것은 그런 대안을 실천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 대안을 말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길을 말하는 것은 곧 빨갱이요 좌경반란분자였다. 불행하게도 얼터너티브를 인정하지 않는 현상은 이명박 정부에서 재현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 누구도 김대중처럼목숨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김대중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정말로 '행동하는 양심'이었기때문이다. 그것도 그 행동의 강도가 남달랐다. 김대중은 진정으로 행동하는 양심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김대중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고도 다시 자기 목숨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나는 아직도 김대중이 평양 방문에 앞서 발표했던 대국민 성명을 기억한다. 그날 2000년 6월13일 아침 김대중의 표정은 비장했다. 얼마 안 되는 그 성명을 잘 보면 으레 들어가 있는 "잘하고 돌아오겠습니다"는 말이 없다. "이제 국민 여러분의 뜻을 모아 북녘 땅을 향해 출발하겠습니다." 성명서 어디를 봐도 '돌아오겠다'는 말이 없다. 그러니까 그 때 방북하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는 그날 김대중이 정말자신의 모든 것을걸고 평양에 들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6.15 성명을 들고 무사히 돌아왔다. 무엇보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의 서거를 맞아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그저 유명 정치인의 예정된 죽음 정도로만 다루었다. 그러나 그가 노환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발하려다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이번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내가 계속해서 '민중후보'나 '진보후보'에 투표하며 자칭 진보주의자로 살아오면서도 현실 정치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김대중처럼자신의 모든 것을걸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문제가 그들에게 절박하지 않기 때문일까?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에 항거해서 그 '흔한' 단식투쟁도 변변히 못하는 사람들을 누가 믿고 따르겠나. 노무현 탄핵 때 이미 분노한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는데도 진보주의자들은 "우리는 노무현과 다르다"는 강박관념에 성명서 하나 제대로 발표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에게서 국민들은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니, 행동하는 양심이니, 그런 말들을 언론에서 들을 때마다 나는 한 자락의 분노를 느낀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가 쓰러졌는데 왜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2009년 조국의 민주주의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가. 왜 김대중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목숨을걸어야만 했던가. 그가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였다면 왜 우리는 그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못했던가.
현직으로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이 점에서 일차적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6.15와 10.4 남북정상회담을 없던 일로 하고 남북관계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로 돌려버렸다. 노무현은 방북 때 "북한은 개혁이나 개방이라는 단어를 무척 싫어한다"고 힘주어 말했음에도 이명박은 자신의 대북정책을 '비핵개방3000'으로 확정했다. 이런 사례들은 두 전직 대통령의 성과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거나 의도적으로 모욕을 주려는 행위로밖에는 해석될 길이 없다. 민주주의는 어떤가. 작년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서부터 미네르바, 용산참사, 대법관파동, 쌍용차 사태 등 한국 사회의 자유의 폭과 인권의 깊이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음은 지난 1년 반 동안 수많은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진심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면 그가목숨을 걸고비판했던 자신의 국정을 반성해 봐야 한다. "꽃은 화려할 때 지는 기야!"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어린 화랑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뱉은 말이다. 85년 굴곡 많은 인생, 그 숱한 영욕의 세월을 보낸 김대중이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마지막 일성을 높였던 2009년 여름의 인동초가 내게는 가장 화려해 보였다. 이제는 그처럼 대의를 위해 자기 한 몸을 던질 위인이 누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시작되는 한 주와 함께 이명박 시대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김대중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김대중을 묻으며, 나는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도 함께 묻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아득히 멀어져가는 그의 운구행렬 뒤로 나는 어느 시인의 한마디를 떠올렸다. '민주주의여, 만세' <출처 : 누구도 그처럼 목숨을 걸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에드워드 “DJ, 당신은 한국의 JFK” 김지환기자 baldkim@kyunghyang.com ㆍ김대중도서관, 80년대 주고받은 서신 10여통 공개
케네디 의원은 71년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로 미국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80년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미국 망명 생활과 귀국 때도 큰 도움을 줬다. 케네디 의원은 84년 4월26일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고 썼다. 85년 2·12 총선 전에 귀국을 결심한 김 전 대통령은 84년 6월 “84년 말까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서신에 담아 전했다. 케네디 의원은 86년 5월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김 전 대통령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도서관 측은 김 전 대통령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며 케네디 의원과 당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 전 부통령 등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등도 공개했다. 도서관 관계자는 “이번에 공개된 편지들은 한국 민주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한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김지환기자 baldkim@kyunghyang.com> |
"DJ는 소리내어 울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DJ를 기억하며] DJ의 눈물, 박정희의 눈물
2009-08-21 오전 10:37:24
내가 아는 김대중은 '우는 남자'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여러 번이었지만- 했을 때 항시 나오던 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다리 저는 놈을 대통령을 시키냐."
71년 박정희와 대결했었던 대통령 선거전 당시 유세를 위해 승용차를 타고
1994년 1월 18일,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셨다. 통일운동에 일생을 바친 목회자로서,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압제와 협박, 회유, 투옥, 고문에 굴하지 않는 분이었다. 김대중과는 절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동지로서 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에서 김대중은 울었다. 그냥 운 것이 아니라 '징징' 울었다. 나이 70의 노인네가, 남자가, 죽을 고비를 다섯번 넘긴 정치인이 사람들이, 다른 정치인과 정적들, 그리고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그를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평해서는 옳지 않다. 다섯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생의 절반을 감옥과 가택연금 상태로 보낸 사람은 감성적이라고 해서 울 수 없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 당하여 배에 태워져 일본으로 가는 바다에서 던져질 운명에 처했던 그가 지인의 죽음 앞에서 감성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징징'대며 울 수 있겠는가.
그의 소리내는 울음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를 그 긴 시간동안의 고난에 굴하지 않고 질기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인동초'처럼 견디게 한 것은 철갑의 심장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고 열린 마음이었다.
언제라도 필요한 순간에 자신이 입고 있어야 하는 것, 무장해야 하는 것을 버리고 맨 몸으로 설 수 있어야,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그 어려움을 진정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
사리 하나를 맨 몸에 걸치고 뼈만 앙상한 채로 물레를 젓던 간디를 강하게 만든 것은 강철의 심장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위해 사람들 앞에 발가벗고 설 수 있는 용기였다.
힘의 논리에 경도된 자들-그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에 어디에 속하는 사람이건 간에-은 그가 징징대며 우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김대중은 벗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석달전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유족들의 손을 잡고 그는 또 다시 울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장면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TV 앞에서 한 없이 눈물 흘리는 내 자신을 보았다.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사람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정치인을 본 적이 있는가. 있다. 박정희는 총 맞아 죽은 아내의 운구를 보내며 흰장갑 낀 손으로 눈을 훔쳤다. 떠나는 이는 그의 아내였고 가족이었다. 정치적 동지도, 마음의 동반자도 아니었다.
또 한 사람. 노무현. 그도 자주 우는 정치인이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 자신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며 피맺힌 사자후를 토하는 문성근의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청와대에 노사모 회원들을 불러 밥을 먹으며 회원들의 성원에 길게 울었다.
그 중에서도 떠나는 민주화 친구들의 장례식에서 징징 소리 내어 우는 대통령이 우리에게 있었다. 이제 그가 간다. 그의 장례식에 '소리 내어' 우는 자 누구인가. <출처:프레시안 신면호>
배칠수와 대구시민, 그리고 김대중
정말 객관적인 DJ 평전이 있었더라면
기사입력 2009-08-21 오전 10:09:21
1.
60대의 대구 시민이 말했습니다. "평생 경상도 토박이로 살며 선거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그가 말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외환위기 때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사실을 뒤늦게 알고 가슴이 뭉클했다"며 고인을 달리 평가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코미디언 배칠수 씨가 말했습니다. MBC라디오 '최양락의 재밌는 라디오-3김퀴즈'에서 7년 넘게 성대모사를 하면서 고인을 공부한 그가 말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너무나 아이같이 우는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완벽하고 냉철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깨졌다"고 말했습니다.
같습니다. 고인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도, 고인을 공부했던 사람도 정작 고인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습니다.
2.
그저께 차안에서 들었습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고인을 추모하면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 국민이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일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행간을 읽었습니다. 국민 다수가 고인의 성대모사를 하는 것은 그만큼 고인이 유명했고, 친근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맞을 겁니다. 고인의 인지도는 99.99%쯤 될 겁니다. 젖먹이 아이를 빼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알지 못합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으로 추앙하고, 다른 사람은 '빨갱이'라고 욕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굴의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다른 사람은 '대통령병 환자'로 혹평합니다. 고인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다릅니다. 그제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습니다.
약간 줄긴 했습니다. 오늘에 와서 호평은 늘었고 혹평은 줄었습니다.
하지만 인식의 전환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고인의 서거를 계기로 고인에 대한 회고가 이어지면서 인식을 새롭게 한 결과로 보긴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한국 특유의 정서, 떠나는 자의 등 뒤에 대고 아픈 말을 하지 않는 특유의 전통(?)에 따른 현상에 가깝습니다. 인식과 평가의 간극은 여전히 큽니다.
3.
고인은 생전에 말했습니다. "대중보다 반 발짝만 앞서 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결과는 다릅니다. 대중의 절반은 반 발짝이 아니라 몇 발짝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왜 이렇게 간극이 큰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미 제기됐던 여러 이유들, 이념 공세와 언론 보도, 미디어 환경 등등의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문화입니다. 기록의 문화….
4.
번역판 평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자코뱅당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방대한 책이었습니다. 쪽수가 1000에 육박하는, 베개 삼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건조했습니다. 엄청난 쪽수에 담긴 내용은 칭송도 비난도 아닌 사실이었습니다. 시시콜콜한 신변잡사부터 교과서에 실려야 할 족적까지, 취합될 수 있는 모든 사실이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평전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 평전도 그랬고 프리다 칼로 평전도 그랬습니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평가 자료만 제시했습니다.
5.
상상해 봅니다. 이런 평전이 고인의 생전에 나왔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런 평전을 국민이 읽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무 얘기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접근 가능한 사실을 모두 접한 다음에 내려지는 개개인의 평가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그 사람의 자기 인식이고 자기 평가일 테니까요.
많은 얘기가 오갔을 겁니다. 인상에 치우치지 않고 느낌에 휘둘리지 않는 토론, 객관적 사실을 재료 삼고 자신의 가치관을 양념 삼은 진지하고도 생산적인 토론이 진행됐을 겁니다.
6.
이런 평전은 꼭 필요합니다. 사후만이 아니라 생전에도 꼭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편향된 이미지에 갇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가의 몫이지만 제2, 제3의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를 사는 유권자의 몫입니다. 떠난 자에 대한 판단은 역사에서 꿈틀대지만 오는 자에 대한 판단은 현실에서 작동합니다.
DJ “YS와 同苦는 해도 同樂은 어려워” | |||||||
“‘무’하면 입이 나오고, ‘사’하면 입이 찢어집니다. 입이 나오면 내가 살고, 입이 찢어지면 나는 죽는 겁니다.”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인 민주당 이낙연 의원이 20일 김대중(DJ) 전 대통령 생전의 인간적인 면모와 유머 감각을 소개했다. 한때 DJ를 전담하는 신문기자였던 이 의원은 “DJ의 전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분의 유머를 모르고는 그분의 전체를 알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죽음의 공포를 몇번이나 뛰어넘으신 분의 특별한 경지”라며 ‘해탈미(解脫美)’라고 표현한 김 전 대통령의 유머 감각은 재판장의 입에서 무기징역이 나올지 사형이 나올지 조마조마하던 순간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표현했다는 것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경쟁이 고조됐던 1987년 직전, DJ는 YS에 대해 “그분은 동고(同苦)는 돼도, 동락(同樂)은 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설명했다고 이 의원은 기억했다. 또 이 의원이 “YS가 나보다 낫다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묻자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 대책을 고민할 때 직선제 개헌 100만인 서명 운동을 제안한 DJ에게 YS가 1천만명으로 하자고 제안한 일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다독가(多讀家)로 잘 알려진 DJ는 대통령이 된 뒤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하며 “감옥에 한번 더 가야 할 모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측근이 남미여행에서 돌아와 토산품을 선물하며 “이것이 악운을 쫓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합니다”고 말하자, DJ는 “이 사람아, 이런 것은 진작 주어야지”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또 DJ가 매운탕을 먹다 말고 매운탕에 있던 생선 한토막을 덜어줬던 기억과 이희호 여사가 면회를 와서 ‘남편 살려주세요’가 아닌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해 서운했다고 말했던 일 등을 떠올리기도 했다. 출처:서울신문 연합뉴스 "윤 동지"라고 불러준 DJ, 잊을 수 없다 2009년 8월 18일은 기자에게 귀신들린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공(時空)을 초월한 듯한 하루였기 때문이다. 그날 오전에 고은 시인, 그리고 백낙청 교수와 국제전화로 통화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태평양 건너 시드니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정을 모셔놓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다. 분명 환청일 터인데 너무나 분명하다. 18일, 고은 시인· 백낙청 교수와의 통화 잘 알려진 대로 고은 시인과 백낙청 교수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인연을 이어온 대표적인 문화계 인사들이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어려움도 함께 겪었고 6.15 남북공동선언 등의 통일문제에서도공동보조를 맞춰왔다. 1992년에 호주를 방문한 고은 시인한테 반해서 해마다 '고은 시 낭송회'를 여는 호주 시인들이 있다. 그런데 그 모임을 주관하는 마가레트 스트리톤(호주국영 abc-TV 문화프로그램 진행자)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고은 시인에게 전하는 통화를 18일 했다. 스트리톤은생전에 "귀신들린 것 같은 시낭송과 통일을 열망하는 그의 시편들에 크게 감명 받아서 17년째 '고은 시 낭송회' 주관한다"고 말했다. 스트리톤은 호주공영 SBS-TV '북 쇼(Book Show)'에 출연한 고은 시인을 40분 동안 직접 인터뷰했다. 고은 시인과 통화를 끝낸 다음 곧바로 백낙청 교수와 통화했다. 그가 8월 25일 호주국립대(ANU)에서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관해서 공개강좌를 가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 여러 차례 참가한 바 있는 백낙청 교수는 오랫동안 천착해온 '분단체제 극복'에 연관 지어서 자신의 통일철학을 밝힐 예정이다. 그런데 두 사람과 통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커다란 충격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DJ와의 개인적 인연들이 떠올랐다. 밤늦도록 김대중, 고은, 백낙청의 그동안 발자취를 곱씹으면서 세 분의 공동관심사인 '분단체제 극복'에 대해서 생각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최초의 로고송 추억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대전 유성호텔에서의 기억이다. 전주 신역의 유세를 마치고 유성에서 1박한 다음 부산으로 가서 수영만 유세를 앞둔 시점이었다. 유세장에 청중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어 30만, 50만은 보통이고 100만 명도 모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기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단독으로 만났다. 밤늦은 시간이었는데, 마치 거대한 산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지라는 호칭 하나로 바짝 긴장한 마음을 풀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말이 대화지 기자는 다소곳이 앉아 그냥 듣기만 했다. 바로 그날 낮에 전주 신역 유세장에서 방송된 김대중 후보 로고송에 대해서 이런저런 의견을 주셨던 것이다. 그 로고송은 그날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김영삼 후보의 로고송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치사상 최초의 선거용 로고송이었다. "윤 동지, 로고송들이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가사 몇 군데를 고쳤으면 좋겠어요. 특히 '자전거' 노래 중에서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김대중이 나갑니다. 비켜나세요'는 문제가 있어요. 차라리 '김대중이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로 바꿉시다." 당시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선거본부는 여의도에 있었다. 평민당 당료들은 그곳을 '옐로 캠프'로 불렀다. 그러나 본부만 그곳에 있었지 하부 조직은 흩어져 있었다. 로고송 제작도 마포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진행됐다. 그 당시회사원이었던 기자는 퇴근 후에 '옐로 캠프'로 가서 밤늦도록 로고송 제작에 몰두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동지들과 함께 가사를 쓰고, 곡을 선택하고, 녹음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일이 극비리에 진행됐다. 그 당시 민족해방그룹(NL)과 민중민주그룹(PD)으로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DJ와 YS를 흔쾌히 지지할 수 없었던 운동권은 군정종식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비판적 지지를 뜻하는 '비지그룹'이라는 명칭으로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에 파견(?)됐다. 기자는 NL 쪽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김대중 후보가 의미 있는 통일정책을 많이 제시했다는 이유로 평민당을 선택했다. 그 당시 기자와 같은 고향 출신인 김종필 후보도 대선 구도의 일각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런 연유로 기자는 고향 선후배들로부터 배신자 낙인이 찍혔다. 어렵사리, 그리고 아주 급하게 로고송의 가사가 완성되고 녹음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녹음을 해주겠다는 녹음실이 없었다. 김대중 후보 로고송을 녹음한 다음 뒷감당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연히 노래를 부르고 반주를 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걸 해결하는 건 기자의 몫이 아니었다. 시인이라는 이유로 '옐로 캠프' 한화갑 특보로부터 로고송 가사를 쓰는 일을 하명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옐로 캠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열성 일꾼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결국 비밀리에 방송국 합창단원과 연주단이 동원되고, 절대로 녹음회사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야간녹음을 허락한 녹음실이 나타났다. 가수 아무개씨가 운영하던 녹음실도 그 중의 하나였다. 눈물바다가 된 부산 수영만 유세
우여곡절 끝에 녹음이 완성되고 전주 신역 유세장에서 첫 방송이 시작됐다. 그날부터 기자는 아예 휴가를 내고 유세장을 따라다니면서 노란색 방송차량 안에서 녹음을 트는 담당을 맡았다. 수십만 명의 청중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로고송을 따라 불렀다.
나중에 한광옥 비서실장한테 들은 얘기인데 김대중 후보도 그날 처음으로 로고송을 들었다고 한다. 청중의 반응이 좋아서 비교적 만족스럽게 생각했지만 가사 몇 개를 고치고 싶어서 밤늦은 시간에 기자를 부른 것이었다. 덕분에 기자는 DJ를 독대하는 영광을 누렸다. 부산은 YS의 아성이었지만, 김대중 후보의 부산 수영만 유세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남북 일대의 호남 사람들이 총출동한 것 같았다. DJ의 연설로 한껏 고조된 청중들이 로고송을 따라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특히 '밀양아리랑'을 개사한 로고송이 마치 대선에서 승리한 것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들의 감동은 더욱 컸다. 나중엔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도 나타나면서 수영만은 바닷물이 아닌 눈물로 출렁거렸다. 호주로의 이민,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방문 회고가 너무 길어졌다. 기자는 '옐로 캠프' 파견이 원인(遠因)으로 작용하여 호주 이민 길에 오르게 됐다.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신 DJ가 애꿎은 직장인을 호주로 추방시킨(?) 셈이 됐다. 그렇게 시작된 이민생활이 10년을 넘길 즈음이던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했다. 감격스러웠지만 그냥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빨갱이' 운운하던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 곁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청와대가 호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단체를 통해서나에게동포간담회에 참석해달라는 통보를 해왔다. 그러나 넌지시 사양했다. DJ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는점에서 지금은 크게 후회하는 대목이다. 길고 긴 투쟁의 기간에 비해 DJ의 집권 5년은 화살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그의 임기말년은 민주화 투쟁 못지않은 고난의 기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던 날 기자는 우연히 <조선일보>를 읽었다. 그리고 폭음을 한 다음 밤새도록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스름 동이 틀 무렵 시 한 수를 써서 서울의 동료 시인에게 보냈다. 서울에 꽃샘바람이 드세게 불었다는 2003년 2월이었다. 나는 그 날 '복사꽃에 절하다'라는 시를 담아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보냈다.
그 당시 기자는 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선일보>와 생각이 크게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과거에 DJ 캠프에서 한 달 남짓 봉사활동을 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을 바라보는 감회가 특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주에서 높이 평가받는 DJ의 업적들이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폄하되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 대통령의 퇴임 기사들이 너무나 처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전해오는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시비에 대해서 abc라디오 소속 호주 언론인이 기자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한국인들의 몰이해가 아쉽다. 그 상은 김대중 개인에게 주면서, 동시에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인들이 한국인 모두에게 준 상이다. 그가 수상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호주인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한국인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부러워했다. 만약에 호주인 모두에게 노벨평화상을 줄 일이 있으면 호주 총리가 대표로 받을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럭비 팀이 우승했을 때 주장이 나가서 트로피를 받듯이. 한국인들이 노벨평화상 수상에 시비를 거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다. 뿐만 아니라 그 상을 한국인들 모두에게 준 세계인들을 모독하는 행위다." 그날따라 특히 그호주언론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재외한인동포들을 포함한 한국인 모두를 대표해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DJ가 왜 저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떠나가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린 언제까지 서로의 얼굴에 먹칠이나 해대면서 살아갈 것인지. 떠나가는 겨울을 꽃으로 단장하여 배웅하는 봄날의 마음이 한국인 본디의 마음일진대, 그동안 우리가 너무 급하게 달려오면서 그런 귀한 마음들을 다 버리고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J의 초라한 퇴임이 맺어준 인연 <오마이뉴스> 그 일을 계기로 <오마이뉴스>를 알게 됐고 급기야 기자가 됐다. 시를 받은 동료 시인이 <오마이뉴스>를 소개해준게 인연이 된 것.
2003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하며 쓴 자작시가 <오마이뉴스> 첫 기사(잉걸)로 실리면서 기사를 통한 모국과의 소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주로 호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관련 뉴스를 썼다. 10년 남짓 호주역사를 공부한 것을 밑천 삼아서 한국과 호주의 공통분모를 찾는 작업이기도 했다. 과분하게도 2006년에는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뉴스부문을 수상했다. 고은 시인은 기회만 있으면 기자에게 '시드니 건달'이라고 어깃장을 놓는데 제대로 복수를 한 셈이었다. 물론 고은 시인은 가장 많이 가장 큰 상찬을 기자에게 전해주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해지자 호주 언론은 신속하게 보도했다.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브레이크 뉴스와 특집으로 다루었다. 서거 이튿날에는 호주 국영 abc-TV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을 특집으로 마련하여 세 차례나 방영했다. 덩달아 기자도 바빠졌다. 호주 언론을 꼼꼼하게 챙기고, 호주 동포사회의 추모 분위기도 열심히 취재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에 한 꼭지씩 관련기사를 올리고 있다. 결국 DJ가 <오마이뉴스> 기자를 만들어준 셈이므로 그게 보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윤 동지, 잘 부탁합니다" 20일 시드니한인회관 분향소로 가서 향을 피우고 두 번 절을 올렸다. 잠시 영정 앞에 머물면서 김대중 대통령님의 사진을 보다가 문득 뚝뚝 눈물을흘리고 말았다. 22년 전 유성호텔에서 "윤군이라고 했나요? 지금부터는 윤 동지라고 부르겠어요"라고 말씀하셨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집필실로 돌아와서 <오마이뉴스>에 접속해보니 오연호 대표기자가 김대중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내용을 쓴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그 기사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유언이 이렇게 서술돼 있었다. "나는 몸도 이렇고…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세요.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그 이야기가 내게는 "윤 동지 잘 부탁합니다"라는 것처럼 들렸다. 출처 : "윤 동지"라고 불러준 DJ, 잊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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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영상:추억 김대중 전 대통령
http://www.ytn.co.kr/_comm/pop_mov.php?s_mcd=0302&s_hcd=01&key=200908211345272370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사형선고 받고도 소신
안굽힌 분 감사원장 임명뒤 일절 간섭안해”
[서울신문]"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난을 오직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 오셨다."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관식을 지켜본 한승헌(75) 전 감사원장은 평생 동지의 마지막 모습을 이처럼 뼈에 사무치게 기억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한 전 감사원장에 대해 "한승헌 변호사는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된다."고 자랑했다. 김 전 대통령과 격의없이 농담을 주고 받은 몇 안 되는 인사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한다.
한 전 감사원장은 1970년 월간지 '다리'의 필화사건을 변호하며 김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74년 김 전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됐을 때 변호를 맡았고 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육군교도소에서 같이 복역했다. 93년 '김대중씨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 공동위원장, 98년 국민의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김대중 자서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 전 감사원장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던 것은 월간지 '다리' 창간 1주년 기념식이다. 민주주의를 역설하는 강연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청중이 초만원이었다. 정치인으로서 소신과 패기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73년 8월 일본으로 납치됐던 김 전 대통령이 생환하자, 정부는 67년 대선 때의 발언을 문제삼아 선거법 위반혐의로 김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한 전 감사원장은 "가택연금으로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 대신 이희호 여사가 나를 찾아와 변호를 의뢰했다. 매일 아침 동교동으로 가서 대책을 상의했다. 그러던 중 내가 75년 3월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자 김 전 대통령은 갈현동 집에 찾아와 어머님과 아내를 위로하셨다."고 전했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신군부의 정권탈취에 가장 큰 장애물인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한 사건'이라고 한 전 감사원장은 못박았다. 공소장 낭독에 걸린 시간만 해도 1시간27여분. 그런데도 "사형 선고를 받고 소신을 굽히지 않을 정도로 생사에 초연했다."고 회상했다.
감사원장 취임 초기 때 대통령이 감사원을 간섭할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범 답안'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 답안을 한번도 쓴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를 이끌어 내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한국인의 자랑이다. 아직 나라에 걱정거리가 많은데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출처:서울신문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까닭은?
[프레시안 윤태곤 기자]
이희호 여사가 직접 떠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운명할 때까지 착용하고 있던 장갑과 덧양말 등 유품이 22일 공개됐다. 유족 측이 공개한 유품은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입원할 때 입었던 양복과 셔츠, 양말과 지팡이, 잠옷, 돋보기, 붓과 벼루, 낙관 등 30여 점이다.
이 유품들은 현재 빈소가 마련된 국회의사당 잔디광장에 전시 중이다. 이희호 여사는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은 직후 유품이 전시된 곳을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최경환 비서관에 따르면 입관식이 치러진 지난 20일 오열하고 링거를 맞기도 했던 이 여사는 원기를 많이 회복해 가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 까지 사용했던 유품들
벙어리 장갑과 덧양말에 대해 최 비서관은 "거의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 만드셨다. 이희호 여사님의 뜨개질 솜씨는 유명하다"면서 "대통령께서 운명하실 때도 이것들을 착용하고 계셨다"고 전했다.
▲ 김 전 대통령이 입원 당시 신었던 양말ⓒ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이날 유품 중에선 발목 고무밴드가 빠진 양말이 눈길을 끌었다. 1971년 대선 유세 당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김 전 대통령은 조금만 서 있거나 걸어도 다리가 부었다. 그래서 양말을 사면 비서들이 고무밴드를 빼 냈다는 것.
▲ 이희호 여사가 쓴 성경구절이 적혀있는 부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여름마다 사용하던 낡은 붉은색 부채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 4장 13절)라는 성경 구절이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하단부에 '이희호 씀'이라고 적혀있다.
▲ 김 전 대통령 내외는 다정한 모습이 새겨진 이 방석을 아꼈다고 한다ⓒ인터넷공동사진취재단 |
생전에 침실에서 등받이로 사용했던 방석도 낡았기는 마찬가지다. 함께 꽃밭을 가꾸는 다정한 모습이 새겨진 이 방석은 김 전 대통령 내외가 아낀 것이라고 한다.
▲ 행동하는 양심, 만방일가, 후광, 김대중 인 이라고 새겨진 낙관ⓒ인터넷공동사진취재단 |
서예애호가였던 김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낙관도 공개됐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세 번 째 낙선 이후 선물받은 이 낙관은 '후광', '김대중인', '만방일가'(세계는 하나의 가족),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왼쪽 위에 김 전 대통령이 30년 넘게 사용한 영어 사전이 놓여있다ⓒ인터넷공동사진취재단 |
책과 글을 놓지 않았던 고인의 만년필, 수첩, 안경 등도 눈에 띄었다. 특히 활자가 작은 낡은 영어 사전은 일본 삼성당에서 쇼와 47년(1972년) 발간한 것으로 고인이 최근까지 사용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일본에 망명 했을 때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프레시안 윤태곤 기자 ( peyo@pressian.com )
22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의 팬클럽 사이
트인 '시민광장'에 올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사.
출처 : "너무 늦어버린 고백... 당신을 사랑합니다" - 오마이뉴스
DJ, 그는 과연 지역주의의 원인인가? |
[동향과 분석] DJ에 대한 의도된 왜곡과 잘못된 편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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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참 무섭다. 고정관념은 지독하다. 물론 인간이 가진 기억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선의를 가지고서도 잘못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해는 가지만 짜증이 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짜증 나는 왜곡과 편견
"그(DJ)는 좌·우 갈등과 산업화·민주화 갈등의 한 상징과도 같았다. (…)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애증은 우리 사회 갈등이 한 근원이다."
<조선일보> 8월 19일 자 양상훈의 기명 칼럼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려 깊은 왜곡인데, 이 매체는 이런 기술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하는 '3김 청산론'을 만들어 DJ를 공격하고 노태우를 돕던 신문 아니던가. 당시 "두 김씨(DJ와 YS)의 이름이 결코 우리 정치의 마법이 아니고 두 사람 아니면 우리는 일어서지도 못할 것 같은 맹신"을 규탄했다. <조선일보>다운 통찰이요, 혜안이다.
"그(DJ)는 우리 사회의 고질인 지역주의의 희생자이고 하지만 동시에 원인 제공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겨레>의 8월 19일 자 칼럼이다. 이건 문제다. '원인 제공자'라는 대목에서 딱 걸린다. 잘못된 편견, 고정관념에 짜증이 난다. 추정컨대, 아마 1987년 10월 DJ가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을 염두에 둔 지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1980년의 광주항쟁을 기억한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광주항쟁은 독재에 대한 저항이지 지역독립을 외친 게 아니었다.
그처럼 아픈 상처를 지닌 호남이 1971년 대선에서 대중경제론 등을 외치며 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DJ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963년 대선에서 낡은 체제를 쓸어버리고 출마한 박정희 후보에게 호남이 영남(56.7%)과 비슷한 54.2%의 지지를 보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광주를 피로 짓밟고, DJ를 핍박한 그들이 같은 세력이라면 과연 누가 다르게 행동할 것인가.
물론 그때 DJ가 탈당해서 당을 만들지 않고, 또 대선에서 '4자 필승론' 따위에 근거해 독자출마하지 않았다면 민주화가 순조로웠을 것이란 지적도 가능하다. 당시 유시민이 <게임의 법칙>이란 책을 통해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인정할 수 있는 논리다. DJ가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나,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 신세에서 가해자의 처지로 바뀌는 건 더 더욱 아니다.
가능성만 놓고 말한다면, YS가 기득권을 바탕으로 DJ 양보를 압박하지 않았다면 DJ가 그런 선택을 했을 리 만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DJ의 이탈과 출마를 개인 욕심의 발로로 비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계산된 행동'으로 보는 것은 야비한 비틀기다.
DJ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1971년 대선에서 지역출신과 이념성향으로 DJ를 공격하기 시작한 이후 그에 대한 '악마화'는 점점 심해졌다. 멀쩡한 생목숨을 바다에 빠트려 죽이겠다는 시도까지 감행할 정도로 그들의 공포가 처절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까지 DJ는 지역주의를 부추기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1987년 결과적으로 나타난 호남의 DJ 몰표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DJ를 지역주의의 화신으로, 빨갱이로 모는 덧씌우기 작업이 만연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결코 좌·우 갈등의 상징도 아니고, 산업화·민주화 갈등은 단연코 상징이 아니다. 우리 사회 갈등의 근원이 아니다. 독재정권의 의도된 매도라는 원인을 빼놓고서, 그 후의 현상만 가지고 그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것 역시 계산된 왜곡이다. DJ는 지역주의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다. 희생자일 뿐이다. 설사 그렇게 볼 여지가 없지 않더라도 그것은 30년 가까이 왕따와 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허용된 자위권이나 방위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은 어떤 이의 시커먼 속셈을 쉽게 예단하라는 속담이 아니다. 그의 행동을 촌탁할 때는 최대한 신중하라는 경구다. DJ의 속내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른 행동에 비추어 보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는 있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DJ는 과거와의 화해, 동서 통합에 나섰다. 6년간의 감옥살이와 10년에 걸친 연금 생활을 겪고 대한해협에서 수장당할 뻔한 그였지만 그는 박정희를 용서했다. 박정희 기념 재단에 국고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죽하면 박근혜 전 대표가 말했으랴. "아버지 (집권)시절에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 DJ가 화답했다. "정치를 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박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준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2004년 8월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다.
뿐이랴. DJ는 청와대 비서실장에 TK의 핵심이던 김중권 전 의원을 발탁했다. 그것도 구색 차원이 아니라 실권을 줬다. 끊임없이 동진정책을 추진했다. 수천억 원을 쏟아 부은 밀라노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그런 그에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영남은 그에게 단 한 석도 허락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
이 땅의 우파, 보수가 동경해 마지않는 나라 미국은 2008년 대선에서 흑인 대통령을 뽑았다. 미국은 흑백갈등 때문에 내전을 겪은 나라다. 무려 60여만 명이 희생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제가 도입되지 못한 것도 인종갈등 때문이다. 그런 나라에서 백인의 43%가 흑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박상훈의 <만들어진 현실>을 보면, 우리의 지역주의는 산업화 이전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오직 독재정권이 정권안보 차원에서 동원한 논리요, 통제 기제였다.
DJ는 지역주의를 이용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이처럼 제대로 된 뿌리조차 없는 지역주의 때문에 1997년 대선에서 영남은 호남 출신 DJ를 홀대했다. 고작 13.2%의 지지를 보냈다. 이 조차도 산업화 시대에 일자리가 있는 영남으로 이주한 '가난한' 호남 출신의 지지 덕분이었다. 좋다, 영남의 냉대를 평민당 창당이라는 분열에 대한 단죄 차원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3당 합당이란 야합을 주도한 YS에게 영남은 어떠했나? 그들은 1992년 대선에서 무려 68.8%의 지지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부당하다. 부끄러워해야 할 수치다.
기억해야 할 사실 하나. 호남은 인구 덩치에서 영남에 비교가 안 된다. 사실 둘. DJ는 한 시도 대통령이 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사실 셋. DJ는 평소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대통령직을 열망하는 DJ, 현실감각이 뛰어난 DJ가 호남만 먹어서는 결코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DJ가 호남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이처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가 바보처럼 그랬다고 억측해야 하는가.
지역주의에 희생당한 사람과 수혜를 누린 사람은 다르게 대해야 한다. DJ가 피해자라면, MB는 수혜자다. 이 주장은 싫어하는 사람에게 어떤 딱지를 붙이려는 억지가 아니다. MB는 서울시장 시절 시종일관 수도권 이기주의를 자극하고, 동원했다. 덕분에 그는 선거 역사상 드물게 수도권에서 압승할 수 있었다. 정동영 후보에 비해 2배 넘는 득표율을 얻었다. 과거 그 누구의 독주도 쉽게 허용하지 않던 수도권이 MB에게 올인한 것은 그의 지역주의 정치 때문이다.
MB가 수도권 지역주의를 형성·활용할 수 있는 계기는 참여정부가 줬다. 참여정부가 식민지로 전락한 지방을 살리기 위해 지방분권 차원에서 국토 균형개발을 시도한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하고, 추진했다. 기득권을 빼앗기는 수도권으로서 맘이 편할 리 없었다. MB는 이런 정서를 파고들었다. 행정수도 이전에 극력 반대했다. 서울시장으로서의 반대를 넘어 정치적 효과까지 감안한 행보였다.
지역주의를 부추긴 인물,MB
참여정부는 의도와 상관없이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조장했든, 막지 못했든 어쨌든 참여정부 시절 서울의 집값은 폭등했다. 이것을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수도권 이기주의를 자극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부동산이 자산증식의 주요 통로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 MB의 뉴타운 정책이다. 뉴타운은 민주정부의 실패로 야기된 개인주의와 수도권 이기주의를 자극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그 결과가 바로 17대 대선에서 MB에 대한 수도권의 편애였다. 그 효과는 총선까지 이어졌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 MB는 지역주의 해소를 거론했다. 그것은 수도권이 흔들리고, PK가 이탈하는 흐름에 대한 처방이다. 지난 대선에서 '수도권+영남연합'을 복원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70%에 가까운 반MB 정서 속에서 그것밖에 나름대로의 활로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중도나 친서민 운운한 것도 지역주의 동원을 위한 터 닦기에 다름 아니었다.
관점이 곧 가치요, 시선이 곧 권력이라고 했다. 어떤 관점과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해법을 택할 것인지도 관점과 시선의 문제다. DJ에게 따뜻하고, MB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다. 지역주의 운운하면서 또 다시 우리 사회의 잘못을 숨기려 하는 시도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지역주의에 대한 해법은 지역주의를 소리 높여 성토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주의의 원인인 권위주의, 부자 감세, 지역 편중, 불평등과 차별, 소외와 빈곤 등을 없애는 것이다.
DJ는 할 만큼 했다. 과도한 피해를 당했고, 주어진 역할 이상을 해냈다. 독재정권이 그에게 올가미 씌운 온갖 허상과 왜곡을 바로 잡아주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어영부영 뇌 뱉는 찬사 속에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DJ에게 진 빚, 이제 갚아야 한다. 특히 그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들에게 속죄를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DJ와 같은 피해자가 없을 것이고, 그래야만 DJ처럼 큰 인물이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1963년부터 1984년까지 <뉴스위크> 동경특파원을 하면서 주은래·박정희·김일성·김영삼·김대중 등을 인터뷰했던 버나드 크리셔가 말했다.
"김대중씨가 죽고 나면 한국인들은 그때
가서야 김대중씨에게 정말로 큰 빚을 지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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