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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

고교시절

by 싯딤 2010. 7. 20.

고교시절

 

 

^고3 소풍 때 (1976)

 

 

 

 

 농업고에 응시하던 날, 국어 선생님은 정읍까지 오셔서 오전 시험 치루고 나온 우리학교 서너 명 애들을 데리고 가서 짜장면 한 그릇을 사 먹였다.

 흥덕에서 정읍까지는 16km인데, 버스로 통학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통학비 때문에 자전거 한 대를 사 주었다.

키가 작아 자전거 패달이 완전히 닿지를 않았지만 자전거 타는 즐거움으로 며칠 간은 신이 났다.

그러나 한달도 못 돼 힘이 들어 자전거 통학을 포기해야 했다. 40리길을 가는데, 차가 쌩쌩 달리고 언덕이 계속 이어져,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넘어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 중 코피가 주루룩 흘러내리곤 했다.

버스타고 통학하라는 어머니 말씀이 고맙긴 했지만 내 차비를 어떻게 마련하려고 그러실까 생각하면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없는 살림에 자전거를 구입해 주었는데 얼마 타지도 않고 포기한다면 아버지는 들인 돈을 생각하고 먼 산에 대고  ‘자전거 내다 버려라’  하실 것이었다.

 차비 걱정하는 자식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어찌든지 맹글어 줄팅게, 걱정 말고 핵교나 댕겨라’

 1974년, 흥덕, 정읍 간 통학비는 학생 절반 할인해서 55원, 왕복 110원이었다. 한번은 아침 통학길에 차비 100원을 냈는데 남자 차장이 정읍에 도착할 때까지 돈을 거슬러 주지 않았다. 때 분명 잔 돈이 없으니 좀 있다 주겠다고 했는데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흥덕에서 탈 때는 한가하던 차 안이 성내, 소성을 지나면서 만원이 되어 안으로 자꾸만 밀려 들어갔다. 

정읍터미널에 도착하여 학생들이 모두 내린 뒤 다가서 거슬러 달라고 하니 주지 않았다. 계속 달라고 했지만 '다 거슬러 주었는데 무슨 잔돈이냐' 며 줄 생각을 안했다. 끝내 눈물을 보이자 그때서야 거슬러 주었다. 못 받으면 수업 끝나고 40리를 걸어야 하는데 그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아직 어린 중학생 티를 못벗고 세상 물정 모른 시골뜨기였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실습시간 때였다. 학교 뒷편 밭의 잡초를 뽑는 일이었는데 아직은 서로 낯설어 아는 애라도 있는 애들은 서로 어울려 풀을 뽑았는데 한 애가 나에게 다가와 ‘어디 사냐, 몇 년생이냐’ 는 등의 말을 건넸다. 그 때 나는 학기 초이고, 청소년기로 말 수도 없고, 낯가림에다 농고 진학으로 침체돼 있었는데 피상적 질문으로 말을 걸어오고 또 슬쩍 보니 그다지 호감도 안 가 묵묵부답으로 계속 풀을 뽑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콧등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순간 코가 맵고 눈물이 핑 돌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얌마! 말같지 않냐?’ 코에서 진한 코피가 흘러 내렸다. 두어 명이 다가와 살펴 주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다. 나는 일어나 밭 한 구석으로 가 코를 쥔 채 고개를 젖혔다.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코피를 삼키지 않고 혀로 모으노라니 파란 하늘 위에 어머니가 보였다. 나는 그날 점심시간에 싸 간 도시락도 먹지 않고 교실을 나와 학교 양지바른 언덕에 내내 앉아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얼마 뒤,  등교하여 교실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 시각 쯤이면 학생들로 교실이 북적여야 하는데 반 애들이 보이질 않았다. 대신, 칠판에 몇 자 써 있었는데 oo병원으로 오라는 메모였던 것 같다. 병원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가야하는 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반 애들이 하나 둘 보였다.

 지난 밤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고로 자취생 셋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배우겠다고 부모님을 떠나 구석방에서 자취하다 피워보지도 못하고 불의로 떠난 애는 얼마 전 나에게 코피를 흘리게 한 애였다. 돌이켜 보면 그 애도 나와 친해보고 싶어 말을 걸어왔었을 터인데 내 기분으로 대꾸를 안하자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무심코 한 방 날린 것이 콧잔등을 정통으로 맞은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어려서부터 코피를 자주 흘렸다. 겨울철, 언덕에서 썰매를 타다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부터 작은 충격에도 코피를 쏟았다.우리반 애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농고 축산과 실업과목은 흥이 나지 않고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 그런 탓에 첫 중간고사에서 40명 중 36등을 했다. 농업고 교과 과정을 대략 기억해 보면 인문과목 30%, 실업과목 70%로, 국,영,수 등은 주 1시간 공부했던 것 같다.

 실업 과목도 그마저 이론과 실기 비율이 5:5였다. 축산과라 가금류, 가축, 가축위생, 축산가공, 가축사료 등을 전공으로 배우고, 원예, 임업, 양잠, 농업기계 등 다른 농업관련 전공도 한두 시간씩 통론으로 배웠다.

실습시간에는 대개 한 시간 실습하고 한 시간은 가마니와 낫을 들고 사료용 풀을 베러 다녔다. 축산가공 실습시간에는 돼지, 양을 도살하기도 했다.

 시험공부는 가축의 품종과 특징, 원산지, 임신기간, 질병 등을 외우는 것이었다. 비슷비슷한 사항이 지속적으로 반복돼 암기하는게 힘들었다.

 차츰 실업과목 시간에 국어, 수학, 국사, 정치경제, 일반상식, 생물 등의 참고서를 구입하여 꺼내 보기 시작했다. 시험, 진학 준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과목의 참고서를 보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어 고문과 국사 시간, 당시 시대상황과 선조들의 삶을 상상하면 재밌었다. 정치경제, 일반상식을 보면서 세계의 여러나라, 국제조직을 그리면서 세계를 꿈꾸기도 했다. 생물에서는 인체의 신비를 상상했다. 그러다 선생님한테 빼앗겨 다시 사기도 했다.

 한번은 인문계 국어자습서를 구입했는데 실업계와 내용이 절반도 같지 않았다. 그런데 훗 날, 고졸 후 몇 해가 지난 뒤 대학진학공부를 하려고 참고서를 구입했을 때 개정된 국어교과서 내용이 대부분 실업계인 농업고 때 배운 내용으로 바뀌어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우리 학교는 인접 군, 면 지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모두가 낯선 애들이었다.  다행히 한 동네에 사는 용채가 한 반이었고, 성내에 사는 종선이와 호복이가 있어 이들과 졸업 때까지 어울렸다. 우리는 하교길에 정읍터미널 근처의 붕어빵 포장마차에 자주 들렀다. 당시 붕어빵은 정말 꿀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용돈이 없어 대부분 얻어먹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종선이, 용채가 2개 먹을 때 나는 하나 집어들고 시간을 끌었다. 착한 심성의 종선이는 빨리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속이 좀 안좋다거나 덜 고프다는 핑계를 댔다. 어느해 겨울철엔 의 매일 들르다시피 했는데 나는 작심을 하고 속이 별로 안좋다, 오늘은 집에 빨리 가봐야 된다며 상당 기간을 혼자 닌 적이 있었다.

 3학년 새학기가 되면서 반장 선거가 있었다. 공부는 평이했지만 의리도 있고 남자다운 면이 있는 권택이가 ‘내가 반장 한번 해보겠다.’ 며 나서자 반전체가 뒤숭숭해졌다. 물론 이전까지 1, 2학년 때 반장이었고, 항상 1등에, 모든 면이 모범적인 영표형이 이번에도 반장이 될 거라는 걸 우리반 애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권택이 말에 난 문득 ‘그래 할 수도 있지. 반장이 되면 책임감을 지녀 권택이 인생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들었다. 결국 권택이가 반장이 됐는데 반 분위기는 묘해져 버렸다.

 이후 어느날, 반장이 된 권택이와 한 애가 점심시간에 피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아마도 ‘네가 반장이냐? 네가 반장이면 나는 뭐다’라는 식으로 무시했던 것이 발단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권택이도 그동안 벼르고 있던 중에 터진 것이었다.

 둘은 책걸상 위를 날듯이 뛰어다니며 손에 잡히는대로 집어 던져대더니 급기야 권택이가 일을 냈다. 우리 학교 교실바닥은 실습장 겸용이라 반질반질한 시멘트 바닥에 물이 흘러내리는 트렌치 위로 철판 커버가 덮혀 있었는데 권택이가 이 트렌치 커버를 집어 들고 휘둘러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교실바닥 여기저기 피얼룩이 지고 급우들에 엎혀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 날 담임선생님은 종례시간에 권택이를 앞으로 불러내어 사과하라고 했다. 그러나 권택이는 ‘절대’ 못하겠다고 했다. 권택이도 그동안  쌓인게 있었다. 반장으로서 뭔가 의욕적으로 한번 해 볼 생각이었는데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덩치있고 껄렁거리며 노는 애들까지 드러내놓고 무시하니 작심하고 일을 벌인 듯 했다.

 나름대로 속상한 부분이 있는 권택이긴 했지만, 속 사정을 모르는 선생님은 반장으로서 모범이 되지 못하고 일을 낸 뒤 대드는 모습까지 보이자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던 선생님이 안면이 붉어지시더니 “선생님한테 ‘절대’라는 말을 쓸 수 있냐?”며  ‘엎드려 뻗치라’ 하고는 밖에 나가 굵은 몽둥이를 들고 와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한참 매질을 한 뒤 다시 물었으나 권택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예 상의를 벗고 ‘절대’라는 말,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때리겠다며 더 세게 내리쳤다. 한참 동안을 때리시던 선생님도 힘에 겨운 듯 지친 모습으로 매를 멈추고는 아무 말없이 교실을 나갔다. 사제지간은 엉망이 되고 이후 선생님은 담임을 그만 두셨다.

 일이 일어난 후 공부 좀 하는 애들은 눈치를 보며 처져 있는데 권택이를 동조하는 몇몇 애들에 의해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닌가. 자초지종을 듣고 때려야지.. 담임 바꿔달라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선생님도 이 일 후 더이상 담임을 원치 않았을 것이기에 그만 두었다.  하지만 축산과 선생님으로서 주요 전공과목을 가르쳤기에 날마다 우리와 마주했으나 그  일 후론  미소 한번 없으셨다. 수업 분위기가 산만해져도 주의 한번 안주고 진도만 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3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1학년 때이다.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를 썼는데, 아침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위문편지에 국군장병 아저씨 명복을 빕니다‘ 라고 쓴 학생이 있다고 하여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때 나는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 웃지 않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곧이어 선생님이 나를 호명했다. 가볍게 꿀밤을 주면서 고치라고 했다. 편지를 받아들고 제자리로 돌아와 ’명복‘의 뜻을 몰라 애들에게 물었다. 이때까지도 나는 ’명복‘을 큰 복, 유명한 복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권택이 싸움 사건이 일어난 얼마 뒤 중간고사에서 선생님이 가르친 축산가공 과목을 1등을 했다. 중간고사 후 첫시간 업에 들어온 선생님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무겁게 나를 호명했다. 

“송원중이...”

나는 속으로 <무슨 일이지? 잘못한 일이 있나..?> 생각하며 자신없게 대답했다.

 “일어나” 선생님은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말했다. “축산가공, 1등이야... 박수..." 이어 말씀하셨다. "68점.. 하나 틀렸다.."

"그리고,  빵점이 몇 명이야... 평균이 40도 안돼. 지금부터 호명하면 나와.."

 호명된 애들은 종아리를 몇 대씩 맞았다. 아마 0점이거나 0점에 가까운 애들이었던 것 같은데, 반항심으로 일부러 0점 답안을 낸 것으로 여기신 것 같았다. 

 나는 솔직이 선생님께 조금은 죄송하고 속죄하고픈 마음이 들어 더 열심히 공부했었다.  

 생각해 보면 난 공부도 나름대로 하는 편이었기에 그랬으면 상위 애들하고 어울렸어야  했는데 공부 잘하건 못하건 맘맞는 애들하고 어울렸고, 특별히 친하지 않았던 권택이 일 등이 겹쳐 공부 좀 하는 애들이 나를 탐탐치 않게 여기고 었는데 그 때문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훗날 대학진학 후, 서울농대에 다니던 영표형, 후배들과 수원 허름한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는데, 고교 졸업 당시 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때 너를 넣자 말자는 얘기가 있었으며 결국 안넣게 됐었다는 얘길 들려주었다. 

 고3이 되고 진로를 생각하니 막막했다. 나에겐 졸업 후의 계획, 꿈이 없었다. 그 때까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졸업하면 부모님과 평생 농사지으며 사는 것이 인생인 줄 알았다. 대학은 집안 형편상 꿈도 꾸지못했으며, 대학은 왜 가는지,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공무원은 어떻게 되고, 삼성, 현대 등 기업체는 어떻게 취직하는 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각자 주어지고 정해진 길이 있어 그 길대로 가는 줄로 알았다. 

 그렇다고 꿈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졸업하면 취직해서 어머니께 물질적으로 효도하여 어머니 고생 좀 안시켜드리고,  그리고, 돈을 모아 땅을 사서 과수나무를 심고 가축을 길러야지, 막연하게 이 정도는 상상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고민 때문이었는지 내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동안 1센티나 컸을까?  중2, 3때 제일 많이 큰 것 같다. 그래서 키 순으로 자리에 앉는 출석부 번호를 보면, 중3 때 38번(60명 중)을 시작으로,  21번(고1, 40명), 14번(고2, 38명), 11번(고3, 37명)으로 갈수록 앞 자리가 됐다. 그나마 고3 때는 맨 앞 줄에 앉지 않으려고 뒷꿈치를 들었기에 이 정도였다.  아니면 9, 10번 정도였을 것이다.

  고3이 되자 대학진학을 위한 진학반을 편성했는데 나는 진학반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이 조용히 불렀다. 진학 안하더라도 진학반은 들거라. 2학기 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차피 대학 가지도 못할 건데 공부한다고 학교에서 늦게 오면 농사일에 보탬이 안되어 심사가 편치 않으실 것이었다. 그즈음 아버지는 환갑이 지나, 갈수록 기력이 쇠해져 일터에서 돌아와 고된 몸으로 주무실 때면 끙끙 앓으면서, 내가 어서 죽어야 이 고생 안한다고 하시던 때였다. 뙤약볕에서 농약을 하다가 기진하여 나무 그늘 밑에 누워있거나 심지어 쓰러지기도 하셨다.

   고3 초에 전국 모의고사가 있었는데 실업계인 우리들도 보게 되었다. 아마 지방 농고생인 우리들 성적은 엉망이었을 것이다. 그 중 내 성적이 괜찮았는지 무조건 진학반에 포함됐다. 나는 진학반 첫 수업부터 들어가지 않았다. 모의고사 후 성적을 토대로 편성한 진학반 예비소집에도 가지 않고, 구입해야 하는 진학반 수업 참고서도 한 권도 구입하지 않았다.  종례를 마치면 비진학반 애들은 하교하고, 진학반 애들은 진학반 교실로 옮겨 갔는데, 진학반 수업 첫 날 나는 모두 빠나간 교실에 엉거주춤 남아 있다가 집에 가기도 싫어 걸상을 모아 잠시 드러누웠다.

 누워 한참 교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반 한 친구가 교실을 두리번 거리다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 나갔다.  다음날, 진학반 애들이 너 출석 부르던데 왜 수업 안들어오냐 하고, 선생님도 진학반 수업 들어가라고 말씀하셔서 할 수 없이 몇차례, 맨 뒷자리서 멍하니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안들어 갔다.

 졸업을 앞두고 수학여행을 가게 됐을 때의 일이다. 나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다. 물론 돈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 반의 수학여행 신청자가 제일 적어 추가 신청까지 받게 되었다. 담임선생님도 불편한 심기로 수학여행 안가는 애들은 학교에 나와 수업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수학여행일이 가까워지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반 애들이 나에게 ‘너 때문에 수학여행 안간다는 애들이 있다는 소문, 네가 가지말자고 부추겼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몇몇 애들이 ‘원중이 너 수학여행 안갈래?’ 물을 때, '어' 대답하면 ‘나도 안갈란다’ 했던 애들이 있긴 했지만 부추기거나 가지말자고 얘기 한 적은 없었다. 수학여행 안가는 애들은 토요일날 모여서 자전거로 내장산 알밤따러 가기로 약속했던 것이 찜찜하긴 했지만 돈 없어 못가는 내 속을 모르는 애들이 야속했다.

 그런 씁쓸한 고교생활을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하던 날 나는 굳게 다짐했다. 늦겠지만 후에 꼭 대학 갈 것이다. 부모님 부담 안끼치겠다. 그러기 위해 서울로 올라 가야겠다.

 졸업식이 끝나고 앨범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자식 졸업한다고 두루마기에 흰고무신 신고 오신 아버지의 촉 속에, 이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소중한 친구들과 헤어지는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강당 졸업식장을 뒤로 한 채,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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