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電氣'를 배우다 / 전주직업훈련원 시절
^ 전주직업훈련원 재학시절, 기숙사에서(1978)
전경 모집에 지원했다가 신체검사에 불합격하고는 흥덕 집에 가려고 전주터미널로 향했다.
아침에 나올때 어머니가 챙겨 줬던 고구마를 먹으며 차비를 아낄려고 낯선 시내를 1시간 넘게 걸어 터미널에 거의 도착할 무렵, 도로변 한 게시판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직업훈련원이 개원하여 올해 첫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문의처 등 주요 사항을 메모한 뒤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곰곰히 생각하니 나에게 기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훈련원에 전화하여 원서 교부장소, 필기시험 수준, 취업율 등을 문의한 뒤 면사무소에 가 응시원서를 받아 왔다. 전기과에 지원하는 원서를 써 등기우편으로 발송한 후 국어 수학 등 고교 참고서를 구입했다. 대학입시 준비가 아닌 직업훈련원 필기시험 준비였다. 기간이 짧아 대략 훑어보는데 출제 경향을 몰라 불안하긴 했지만 다행히 시험문제는 평이한 편이었다.
1978년 봄, 전주직업훈련원 전기과 1년 과정에 입학했다.
직업훈련원은 박정희 정권 때 우리나라가 급속히 산업화되면서 공업고 3년의 교과 과정을 1년 동안 실기 위주로 집중 교육시켜 산업현장에 취업시키기 위한 기능인력 양성 교육기관이었다. 학비가 무료이고 기숙사비와 식비만 일부 냈다.
교육내용은 공고 과정을 그대로 배웠다. 교과서도 같았다. 다만 실기 위주로 그 비중이 70~80%였다. 우리 훈련원은 전기, 기계공작, 조립, 용접 등의 학과에 과별 정원이 120명으로 고졸 2개반, 중졸 1개반이었다.
훈련원 조직과 하루 일과는 군대식이었다. 훈련원장이 군 장성 출신이고 기숙사 사감도 장교 출신으로, 아침 6시에 기상하여 10시에 취침하고 날마다 점호를 했다.
식당이나 실습장으로 이동할 때는 훈련복 차림으로 열을 지어 이동했다. 아침 8시30분 부터 저녁 5시까지 실습 수업을 받고, 학과 공부는 저녁 식사 후와 토요일에 진행되었다.
이론은 개략적으로 배운 뒤 수시로 평가시험을 치뤘는데, 공부할 시간이 적어 선생님이 요약 정리한 내용을 프린트해 배포한 것을 외우다시피 했다. 평가 때마다 성적은 1등에서 120등까지 나열되어 실습장 게시판에 붙고 성적 미달 학생들은 종아리를 맞고 외출이 금지되어 기숙사에 남아 재시험공부를 해야 했다.
재시험은 점심시간, 하루를 마친 저녁 보충시간, 외출 금지한 주말에 치뤄졌는데 그런 까닭에 더 쉴 시간이 없었다. 국경일에도 가끔 보충수업을 했다.
한번은 40점 미만이 대부분이어서 화가 난 담당과목 선생님이 실습을 중지하고 몽둥이로 종아리를 때리다가 지친 적도 있었다.
'이래가지고 너희들이 뭐 하나 할 수 있겠나. 훈련원 그만두고싶은 애들, 다 내보내 주겠다. 쓰레기 집합소냐'
이렇게 매맞아가며 공부하면서도 선생님을 원망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기능사 2급을 취득하여 취업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최우선 최고의 목표는 기능사 2급 취득이었다.
전기 공부와 실습은 재미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 현상을 알아가는 것이 흥미있어 기숙사에서도 책을 봤다.
내가 전기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 우리집에 전기가 들어왔을 때였다. 고등학교 초까지만 해도 우리집은 등잔불이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초가집이 스레트 지붕으로 바뀌고 전깃불이 들어와 방 안이 갑자기 환해졌을 때의 충격은 컸다.
전기 과목은 전기통론과 직교류 전동기, 발전기, 변압기 등을 배우는 전기기기, 발전에서 송배전까지 선로의 전기적 특성을 공부하는 전력공학, 전기, 자기의 물리적 특성을 배우는 전자기학 및 전기응용, 전기공사재료, 전기법규 등이었는데 전자기학, 전기기기의 개념 이해가 무척 어려웠다. 특히 처음 접하는 분야인데다 용어가 생소하여 더 어려웠다.
그래도 계속 암기하고 반복해 풀다보니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해하고 문제를 푼게 아니라 일단 외우고 문제를 풀며 이해해 가는 식이었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 싶었다. 훈련원 시절 처음으로 열심히 공부해 본 것 같다. 성적 순으로 취업 추천이 된다고 하여 이왕이면 좋은 회사에, 나아가 기간산업체에 취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평가시험에서 지속적으로 최상위를 유지했다. 무섭게 가르치는 전기기계 선생님도 나에게는 부드러운 편이셨고 담임선생님도 나를 불러 지시사항을 하달하시곤 했다.
우리 반엔 이미 군복무를 마친 형들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연장자인 형이 과대표였다. 그 형은 나를 '게쉬타포'라 불렀다.우리 전기과 학생들은 서로 친했다. 특히 기숙사 한 방에서 생활한 8명은 유난히 친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청소년기였던 우리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집 떠나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더 친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간혹 아프기라도 하면 사감실에 가 약을 타오고 식사시간에 밥을 타다 주는 등 서로를 진심으로 위해 주었다.
평가 시험을 앞두고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알려주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토요일 오후 외출이 있는 날.. 우리는 함께 고향 집에 놀러가 부모님 일손을 보태기도 하고 감과 밤을 따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셨지만 말 못할 사연이 있던 서울이 집인, 곱게 자란 덕성이, 여동생까지 소개시켜 준 순하고 착한 준기, 농고 임과 졸업한 동창을 훈련원에 만난 삼례. 고창이 고향이라 주말 집에 갈 때 함께 버스타고 갔던 동엽이, 둥근 눈에 키만 휑하니 크고 매사가 삐딱했던 상열이 등...모두가 이유 모를 고민이 어깨를 누르던 시절, 함께 몸을 부딪히며 진심으로 위해 주던 친구들이었다.
1학기가 끝나고 15일 간의 여름방학이 주어졌다. 나는 덕성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세워 베낭 여행을 떠났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를 가는데 또래 여성 둘을 알게 되었다. 잘 생긴 덕성이가 8시간 항해하는 3등칸 배 안을 여기저기 살펴보고는 다가가 한참 말을 건넨 결과였다. 제주에 도착한 뒤 우리는 그녀들과 함께 시외버스로 이동하면서 어두워지면 나란히 각기 텐트를 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서귀포 70리 비가 있는 외돌개 근처 텐트촌의 낭만적인 밤은 잊을 수가 없다. 4박 5일간의 제주여행을 마치던 날 우리는 다음날 일찍 출발하는 배를 타기위해 제주항에서 가까운 시내 한 여관에 묵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느낌이 이상해서 배낭을 뒤적이니 그동안 찍었던 사진 필름들이 몽땅 없어진 것이었다.
허탈하고 괘씸했다. 그렇게 호감가는 편이 아니었기에 우리 둘이 여행하자고 몇 번이나 얘기 나눴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잘못이었다. 배신감에 내가 빨리 제주항에 나가보자고 했지만 덕성이는 그만 두자고 했다. 사진 뽑아 우리에게 보내주면 받는 거고 아니면 그런 추억 지워버리는게 낫다는 거였다.
그후 덕성이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 그녀들이 알려 준 인천의 한 회사를 찾아가 면회를 신청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 했다고 한다. 덕성이 말로는 일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2학기부터는 기능사 시험을 볼 수 있었다. 1년 과정을 거의 다 마치는 시점에 훈련원생을 대상으로 치뤄지는 기능사 시험이 있어 이 때 90%이상 합격한다고 했지만, 평상시 응시해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처음 응시한 기능사 2급 필기시험에서 우리과 몇 학생들과 합격했다. 필기시험 다음날 선생님이 문제를 입수하여 채점을 매겨 본 뒤 예상합격자들을 모아 별도로 실기시험을 준비시켰다.
전기기기 기능사 실기시험은 전동기, 소형 변압기 등의 코일 권선 및 조립이 출제된다. 우리는 실기시험까지 1달여간 실기 연습을 반복했다. 실기시험이 다가오면서 두가지 과제 중 하나가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두 가지를 집중 연습했다. 실기시험시간이 4시간이었는데 2~3시간에 마치는 연습을 했다. 시험 도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못되면 이미 권선한 코일을 다시 사용할 수 없고 재료도 부족해지고 시간도 촉박하여 다시 제작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실수가 없어야 했다.
시험을 1주일 정도 남겨둔 시점부터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계속 반복했다. 실기 예상문제도 날마다 바뀌었다. 시험 당일, 실기시험을 잘 마쳤다. 코일을 슬롯에넣고 결선을 마친 뒤 케이스에 넣어 조립을 완성했다. 케이스를 끼워 고정한 뒤 손으로 회전자 축을 돌리니 조금 도는 듯 하다가 고정자에 닿아 더 이상 돌지 않았다. 고정자와 회전자의 틈(공극)이 일정하지 않아서였다. 다시 분해하여 재조립하니 조금 부드러워졌다. 기동코일 리드선에 콘덴서를 결선하고 전원을 투입하여 구동시켜보는 일만 남았다. 전원을 연결하고 움직이지 않도록 발로 모터케이스를 가볍게 밟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바로 내리니 부드럽게 기동했다. 드디어 안심하고 전원을 재차 투입하니 모터가 정상 회전하였다. 체크하던 시험관 선생님이 다가와 바라보았다.
^ 선풍기용 모터의 내부
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종료시간을 알리는 벨소리에 다시 시험장에 들어가 개인공구를 챙겨들고 나오는데 함께 치룬 형이 말했다. 조립을 했는데 모터가 작업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공극이 안맞아 그거 잡는라고 혼났다고 한다. 다행히 돌아가게 맞추긴 했는데 현장 채점 안하고 옮겨진 뒤 테스트하면 떨어질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형도 합격하여 형은 한전에 입사했고, 나는 이듬해인 1979년 봄 직업훈련원 1년과정 수료를 몇개월 남겨두고 인천 대우자동차에 입사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직업훈련원 1년과정은 나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전기를 배운 시간이었고 열심히 공부한 시간이기도 했다. 기숙사 생활을 통해 남을 위하는 것을 깨달았고 체계적인 생활습관을 익힌 것도 소중했다. 겨울 어느날 새벽, 기숙사에서 밤새 불켜 놓고 떠들며 놀다가 적발되어 전교생이 깜깜한 새벽에 연병장에 알몸으로 눈 위에 서 있던 일도 있었다. 지나고보니 우리들에게 인내심을 길러주기 위한 사감 선생님의 사전 의도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기간산업체에 취직하여 특례보충역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 나에겐 가장 소중한 결실이었다. 그동안의 불투명했던 미래를 이제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체육대회도 잊지 못한다.
체육대회가 열린 날 저녁, 우리는 강당에서 장기자랑을 포함한 축제의 시간을 가졌었는데 훈련생의 개성과 특기가 마음대로 표출된 시간이었다. 팝송을 유창하게 불러 연속 앵콜을 받은 친구, 동창 여학생들을 무더기로 초대하여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던 친구, 섹스폰을 기가 막히게 부르고.. 모창과 개그를 넘나들며 개그맨보다 더 웃겼던 친구 등 모두가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우리를 사로잡은 애는 재훈이었다. 드럼 솜씨는 그때까지 보아온 것 중 단연 최고였다. 다른 반 애 한명도 드럼을 잘 쳤는데 재훈이가 월등하다보니 오히려 그와 비교가 되면서 더 유명해져 버렸다.
그 때 나는 재훈이의 밴드에 맞춰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을 불렀는데 나름 호응이 있었다. 그 해 대학가요제 입상곡으로 그다지 알려져 있던 노래가 아니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제법 앵콜이 쏟아졌다. 미처 준비된 노래가 없었고 노래 한 곡도 긴장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정신없이 부른 터라 그냥 내려왔다.
이 후 우리 반에 드럼 배우는 애들이 생겼고 나에게 노래 가사 적어달라는 애들도 있었다.내가 먼저 취직하여 인천으로 올라가게 되자 모두들 서운해 했다. 특히 기숙사 한 방 친구들은 졸업 후 모두 서울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주고 받고 모임을 결성했다. 선생님은 졸업식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직업훈련원 1년은 나에게 소중한 계기를 만들어 준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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