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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

제주도의 겨울바람

by 싯딤 2010. 7. 21.

제주도의 겨울바람

^ 건업사에서 잠시 일하던 시절(1977), 만동 형과 제주항 방파제에서.

 

  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 , 나는 제주도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큰 형한테 갔다. 제주도에는 우리 동네에서 이사 간 만동이 형 가족도 살고 있었는데 나는 형과 함께 건업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일하게 된 일터였다.

  만동 형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입학만 하고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집은 지붕 처마가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낮았고, 저녁 밥 지을 때가 되어도 형네 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굶는 게 일상이었다.  형의 어머니는 허리는 반으로 굽고 반백의 헝클어진 머리에 입에는 항상 긴 담뱃대가 물려 있었다. 그런 형네 집이 초등학교 시절 어느 핸가 제주도로 이사를 갔다. 집안의 맏형이 제주도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우리 큰 형도 친구따라 제주도로 일하러 갔다.

 내가 일하게 된 건업사는 주로 관공서 일을 했는데 만동 형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있었다. 사장은 성이 '좌左'씨로 제주도 토박이었다. 성격이 괄괄하고 호탕했다. 나의 큰 형은 제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의 외진 마을에 살았는데, 뒤로는 한라산이, 앞에는 제주시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아침에 형 집에서 10여분 걸어 내려와 시내버스를 타고 몇 정류장 지나 제주항 근처에 내려서 잠깐 걸으면 건업사였다. 형 집에서부터 걷는 길은 유채밭길로, 검붉은 모래알이 깔려 디딜때마다 사각거렸는데 도마뱀이 종종 눈에 띄었다. 돌 틈서 나와 길 옆 유채밭으로 쏙 들어가곤 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는데 계속 보게 되니 적응이 되고 좀 귀엽기까지 했다. 구멍 숭숭뚫린 돌을 쌓아 경계를 만들어 일군 밭에서는 유채가 자랐다.

  첫 출근 날, 제주항 방파제에 나갔다. 둑 보수공사를 하기 위한 것인지, 사장님과 함께 줄자를 들고 방파제 둑 이곳저곳의 길이를 재고 수치를 적었다. 잠시 후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비가 내리기 시했다.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와 흩뿌려 대 옷이 다 젖고, 귀가 얼어 떨어져 나갈듯 추웠다. 사장은 안되겠다며 가자고 했다. 옷은 젖고 신발에 바닷물이 차 덜덜 떨며 건업사로 돌아가는데, 빗물, 바닷물, 눈물이 뒤섞여 입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떠올랐지만 마음을 추스르며 견뎌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을 먹고나니 사장 사모님이 불렀다. 안타까워 하시면서 말했다. ‘언준아. 비 다 맞았다며..? 가서 샤워하고 오늘은 일찍 가서 쉬그라..’ 그러면서 종이돈 한 장을 건네 주었다. 집에 돌아와 몸살 기운도 있고 해서 이불 속에 누워 있는데 형수가 전화왔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만동 형이 얘길 듣고 걱정돼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다음 날은 만동 형을 따라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건물 보수일을 했다. 건물벽 금 간 곳을 메우고 도색하는 일이 두어 달 이어졌다.

 일을 마치고 저녁무렵, 형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왠지 쓸쓸했다. 버스에서 내려  200원어치 탱자만한 작은 귤 몇 개를 사들고 까먹으며 형 집으로 향했다. 항상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는 한라산 봉우리와 유난히 외롭게 홀로 우뚝 서 있는 하얀  KAL 빌딩, 수평선이 시내보다 높게 보이는 푸르디 푸른 바다 등의 아름다운 제주 풍경들이 나에겐 한없이 쓸쓸하게 다가왔다.

 일한 지 한 달이 되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에 쥔 돈으로 보온병과 부모님 옷가지를 샀다. 그리고는 용돈 얼마를 남기함께 부모님께 부쳐 드렸다.

 봄이 되자, 우리는 제주도 내 포장도로의 차 선 그리는 일을 했다.

 차 선 그리는 기계는 만동형이 거의 전담했다. 수년 간의 경험으로 기계를 잘 다루어 차선을 비뚤어지지 않게 잘 그리며 나아갔다.  나는 앞서가면서 빗질도 하고, 기계 뒤를 따르며 선 위에 유리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도로를 따라 종일 걷는 일이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제주 풍경이 고단함을 그나마 덜어주었다.

 서로 교대하면서 가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중간중간 도로변에 앉아 쉬기도 하다가, 해가 지면 근처 여관에 들어가 잤다. 하루 일을 끝낸 어느 날 저녁, 모두 씻고 저녁먹으러 가자는 사장을 따라 바닷가 아름다운 횟집에서 생전 처음 맛보는 풍성한 회를 먹어보기도 했다. 어느 날 밤은 멀리 일출봉이 보이는 성산읍에서 자기도 했다.

 몇 달이 지난 어느날 사장님이 불렀다.' 너 일하지 말고 사무실에 있다가, 애들 학교갔다 오면 집에서 공부나 가르치고 너도 책보라' 고 했다. 사장님은 초3, 6학년인 자녀 둘을 두고 있었는데 공부하라고 나에게 맡긴 것이었다.

 언젠가 사장님이 일을 마치고 일꾼들과 함께 저녁식사 하던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너네들 나보다 잘 되야지. 언제까지 내 밑에서 이런 일만 하고 살거냐? 내가 데리고 있던 애들 중에 대학도 가고 법대도 가고 고시도 합격한 애들 한번 나와 봤으면 하는게 내 소원이다. 내가 고생해서 돈은 좀 벌었어도 맨날 이 일 아니냐? 난, 다른 일 하고 싶어도 못한다”

 이후로 나는 주로 사무실에 있으면서 가끔 현장 심부름도 하고 일손이 달리면 현장에 나갔다. 오후 두세시가 되면 애들과 함께 했다. 어느 날엔 일손이 달려 나를 현장 데리고 나갔다가 사장님이 나중에 알고 너희들끼리 그 일도 못하냐고 화를 냈다. 이 때문에 내가 난처해지곤 했다. 나는 공부 계획표를 짜 애들 공부 시키고, 밥 먹이고, 목욕탕, 영화관에 데리고 다녔다. 다행히 효과가 나타났다. 뚜렷하게 성적이 오르고, 산만하던 성격이 나아지고, 말투, 예절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장님은 기뻐하셨다. 애들도 나를 잘 따랐다.

 후에 안 일이지만 만동 형이 내 얘기를 했다 한다. <공부 잘했는데 저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워 돈 벌겠다고 형 있는 이 곳에 왔는데 언젠가는 대학 갈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일 할 생각보다는 공부할 생각을 가진 나를 탐탁치 않게 여겼을 텐데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기회를 준 것이었다. 만동 형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그런 건 염려말라고 했다.

 그즈음, 집에서 편지가 왔다.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추석을 앞두고 좀 더 일찍 제주도를 나왔다.

 어머니는 마중나와 눈물을 보이셨다.

 “있을만 하더냐? 아이고 한번도 남 밑에서 일 안해 본 놈이.. 내가 어린 것 객지 내보내 고생시킨다.. 인자 또 군대가면 어쩐다냐”

  “엄니.. 군대 바로 안가네..”

  신체검사를 받고 나니 이왕이면 빨리 군대 갔다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추석 명절에 객지 나갔던 동네 친구들을 모처럼 만나고 헤어지고 나니 허전했다. 더구나 모두들 서울로 간다 하고 나제주도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내키지 않았다. 지금 들어가도 얼마 있다가 군대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왕 지원해서 빨리 갔다 오는 게 나을성 싶어 제주도로 전화를 했다. '군대갈려고 합니다' 말씀드리니 사모님께서 ‘원준이, 군대가냐.. 진작 말하지, 정들었는니 서운하다. 제대하면 꼭 연락해라' 신신당부를 했다.

 그날 저녁, 우리 동네 이장집으로 사장님 전화가 왔다. 나는 추석 때 미리 올라와선 자초지종 말도 없이 대뜸 군대 간다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죄송하다고만 했다.

 ‘만동이한테 들었다. 그동안 대학 갈라고 공부했다는데..내가 못배워 너 대학가면 가르쳐 볼 생각이었는데, 군대 갔다와서라도 연락하고 뭔 일 잘 안되면 내려와라.’

 나는 너무 고마워 말을 못하고 대답만 했다. 애들도 아빠 수화기에 대고 ‘형 여기 안오냐’ 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1주일 후 우리 집에 커다란 소포와 적지 않은 돈이 보내져 왔다.

 추석을 보내고 전경모집 지원서를 냈다.

  전주 어느 초등학교에서 지원자 신검을 받는데 거의 대학 재학생들로 천 명이 넘게 모인 것 같았다. 나는 자신이 없어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응시해보자 하고 긴 시간 대기한 끝에 점심이 가까워서야 신검을 받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키는 기준치에 딱 걸렸고 상체와 하체가 불균형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상체와 하체를 재어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체가 더 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날 신검을 마치고 씁쓸히 돌아오는 길에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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