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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

대우자동차 근무, 4년...

by 싯딤 2010. 7. 27.

대우자동차 근무, 4년..

 

^ 1979년 4월, 대우자동차 입사

 

 농업고를 졸업한  2년 후인 1979년 봄, 직업훈련원에 다니던 중, 인천 부평에 있는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론 잘 해 낼 수 있을 지 불안하기도 했다. 1주일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공무부 전기과에 동기 9명과 함께 기능직 사원으로 배치되었다. 나에겐 공장 내 모터를 수리하는 일이 주어졌다. 모터 수리작업을 혼자 해 온 부서 형이 경력이 없는 나에게 스스로 체득한 권선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소손된 모터를 주로 권선하는 작업이었지만, 소형 직류모터에서부터 100kW가 넘는 대형 모터 등을 포함하여 모든 전기기기들을 수리했다.입사 첫 해의 급여가 99,000원이었는데 잔업수당을 포함하면 실제 급여는 12만원 정도 됐다. 나는 이 급여를 부모님께 꼬박꼬박 갖다 드렸다.

 내가 취업하고 몇개월 지나 우리 가족은 정든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회사에 차츰 적응해 갈 무렵, 나라 전체에 몰아닥친 유류파동으로 승용차 판매가 급감했다. 더우기 우리 회사의 주 차종인 제미니가 경쟁차인 포니에 비해 연비가 높아 거의 팔리지 않게 되자 급기야 생산라인 일부를 가동 중단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회사는 3교대 근무를 시행했다.

 우리 부서도 오전 7시, 오후 2시, 저녁 9시에 각각 출퇴근하는 3교대 근무에 들어갔다. 그러자 기본급만 받게되면서 직원들은 점차 생활비 걱정을 하게 되고 회사는 인원 감축 방안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직원들 간에 불안과 견제 심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회사 분위기 속에서 입사 2년째부터 나는 변전실 근무와 모터 권선작업을 병행하게 되었다. 1주일 단위로 주-야간 변전실-모터 권선작업, 현장 보수를 번갈아 일하는 방식이었다.

 변전실에 근무하면서부터 차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저녁 9시에 출근하여 홀로 변전실에 있노라면 상념으로 가득했다. 나의 존재, 신의 존재 유무 등 비현실적인 상념 속에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위잉 변압기 소리만 변전실을 맴돌았다.  야간작업으로 차를 조립하는 생산직원들과 함께 자정 야식을 먹은 후엔 밀려오는 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변전실 바닥 고무판에 누워 자는 둥 마는 둥 반 수면상태로 있노라면 상념은 더 깊어졌다. <내 짝은 있을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내 미래는?.. 공부해서 현 상황을 탈피해야 하는데.. >

 그러다 과부하에 차단기가 떨어져 현장의 전기가 나갔다며 변전실 문을 두드리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부서 상사도 한밤 중에 수시로 근무상황을 살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현실에 대한 불만에 술마시는 횟수도 잦아지게 되면서 뭔가 계기를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입사 4년째인 1982년 봄,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친구들과의 약속장소에 나가는 대신, 집 양지바른 담벽 밑에서 동생에게 바리깡을 쥐어주고 내 머리를 모두 밀라고 했다. 그리고는 모자를 눌러 쓰고 동인천역에 나가 고교 교과서와 참고서를 과목별로 사왔다. 그날부터 변전실 근무 중 책을 보고, 퇴근 후나 휴일에도 창고를 개조하여 방을 들인 아랫방에서 책장을 넘겼다.

 그 해 겨울, 인천기계공고에서 고교생들에 끼여 학력고사를 본 뒤 그리 높지 않은 성적표를 가지고 대학에 응시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다음 날,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학교에 갔다. 추운 겨울, 썰렁한 교내의 호숫가 학생식당 위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훑어 내리는데 내 이름이 보였다.

 이후 4년간 재직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특례 보충역에 편입되어 군대 안가는 대신 5년간 회사에 근무해야했지만 포기하고 만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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