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덕일의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로, 그의 저서와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고조선 역사는 윤내현(1939-2025)의 저서 <고조선연구, 2016> 의 내용을 옮겼다.
이덕일은 역사학자로서 식민사학의 우리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문헌과 고증을 통해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이덕일은 1961년 충남 천안 출생으로, 모교 숭실대에서 <동북항일연군 연구, 1997>로 박사학위를 받고, 신한대∙ 순천향대 대학원 교수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일제식민사학과 이병도_이덕일
역사학 연구
역사학 연구는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흩어진 사실들을 조합하여 2차로 논리적 추론을 하고 3차로 해당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종의 탐정작업이다.
1차 사료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헌이다. 이들 사료들은 당시의 증거물이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설사 거짓을 기록했더라도 당시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지 문헌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당대는 물론 후대 사가들에 의해 당시대를 언급한 많은 기록들을 검토하여 진실을 추론하는데, 이병도를 태두로 모시는 주류 역사학계는 이런 증거가 없다.
식민사관과 노론사관
한국 주류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史觀이 있다. 하나는 일제 식민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다. 식민사관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사관으로,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노론사관과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다. 서인은 국왕 축출의 명분이 필요하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진정한 임금인 명나라 황제를 배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쿠데타가 명 황제에 대한 충성이란 논리였다. 서인들은 인조반정 때 체제 내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남인들에게 뜻밖에도 2차 예송논쟁으로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 도륙했다. 죄 없는 남인들을 역모로 꾀어 죽인 정치공작에 반발한 서인 소장파가 소론이 되고, 당을 위한 행위라고 옹호한 서인 노장파가 노론이 된다. 노론 당수 송시열을 앞세워 말로만 북벌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북벌위기론을 이용해 국내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소론과 노론 거대정파 기득권동맹을 이용해 성리학 지배자들의 부를 늘렸고 민중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부패시켰다.
그들은 정조를 독살하고 왕의 호위대인 장용영을 철폐시키고 노론의 안동김씨 세상으로 전락시켰다. 강화도령(철종)이 하루 사이에 왕권이 없는 왕이 되었을 때 자기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제국주의를 찾았는데 그것이 일본이었다. 조선은 이제 능력이 없어 더 이상 이익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본과 결탁하여 국권을 이양하고 자기들의 이권을 챙겼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은 왕실 친척이었고 조선 고위관료였으며 노론 당수였다.
청일전쟁이후 일본은 1910년 조선귀족령으로 76명의 조선인에게 귀족 작위(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를 수여했는데 모두 노론이었다. 이들은 '조선귀족열전' 이라는 책에 일본이 최소한 50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었다고 기술했다.
집권수구세력이었던 노론은 결국 나라를 팔아 자기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보호했다. 정도전의 혁명적 제안으로 건국되었던 조선은 결국 노론 파당의 자기 보호로 부모를 팔아넘기고, 다른 둥지에서 안식을 찾은 것이다. 이 노론 세력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미국과 결탁, 친미와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자기들의 이익을 채우기를 시작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반공에서 종북으로 바뀐 친일, 식민사관은 여전히 건재하다.
일제 식민사관
전 세계가 일본 왕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황국사관은 일본 천황을 국가의 정점으로 일본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다른 나라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일본 제국주의 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은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자는 정한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서기를 조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식민사관은 한마디로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다. 여기에 조선 후기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인데,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 몸이다. 그래서 이 두가지 역사관이 지금까지 여러 형태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일제 조선총독부와 거기에 참여한 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의 주장은, ‘임나는 가야다.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했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원래부터 중국의 영토였다. 고려 북방강역은 지금의 함경남도까지였다. 그래서 고려라는 나라는 광활한 대륙은커녕 한반도의 2/3 정도에 불과했다.’ 라는 역사왜곡이다. 이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역사 조작을 시작으로 단군신화설, 한사군의 한반도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위만조선설 등 허구의 식민사학 이론을 만들었다.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
조선총독부와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좇은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1896~1989)는 노론 우봉 이씨 가문으로,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와세다대 사회학과를 졸업(1919)하였다. 이병도와 이완용은 본관이 같은 먼 친척벌로, 이병도의 부친인 이봉구가 이완용의 집사로 일했으며, 덕분에 이병도의 형인 이병희는 당대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었다고 한다.(이운구 성균관대 교수 증언). 이병도의 장인 조성근은 일본군 육군중장과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병도의 후손들은 윤치영(처남), 이장무(서울대 총장, 손자), 이건무(문화재청장, 손자) 등이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조선사 왜곡에 참여하였는데 조선사편수회의 처음 명칭이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1922) 였는데 한국사를 반도의 틀에 가두려 했던 일제의 의도가 드러나는 명칭이다.
*조선사편수회: 일제 조선총독부 조선사 왜곡과 일본침략,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위해 만든 조선사 정리, 왜곡을 위한 연구기관
*조선총독부: 일제 조선주재 조선통치기관

사이토 조선 총독은 조편위 설치에 앞서 교육시책을 발표했는데 그 주 내용이,
- 조선 사람들이 일본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 과장하여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를 경멸하는 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서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일제의 조선사 왜곡과 날조에 이병도가 참여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병도를 이렇게 기술했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다. 수사관보로 재직하던 1926년 1월 조선사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 연구기관인 조선사학동고회의 편찬을 맡았다."
이병도는 1934년, 비판을 의식하여 식민사학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기관인 진단학회를 창립했으며, 1930년부터 9년간은 청구학회靑丘學會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를 지냈다. 청구학회는 조선과 만주의 역사적 연구와 이를 이용한 일제의 만주침략을 합리화하는 연구활동을 수행했다
해방 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해방 직후에 창설된 조선학술원의 역사철학부 학부장을 맡은데 이어 진단학회를 부활시켜 상임위원을 맡고, 1946년 학제 개편에 따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발령받아 1961년 정년퇴직 할 때까지 재직했다
*진단학회: 1934년, 일제식민사관 극복과 순수학술 연구를 지향하며 이병도를 주축으로 역사학, 국어국문학, 민속학 연구자들이 만든 학술연구단체. 1946년, 국사교본, 1960년대 한국사 7권 발행. 식민사관의 틀을 벗어나지 않음
*청구학회: 19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와 19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와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학자들이 모여 만든 일제어용 학술연구기관
이병도는 스스로 일본학자 요시다 도고(1864-1918)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받았다고 했다. 요시다는 <일한고사단>이란 책을 쓴 식민사학자다. 이후 후임 쓰다 쇼키치 밑에서 강의를 듣고 동경제대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를 소개받아 지도를 받았다. 쓰다는 삼국사기 불신론을 조장하고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린 자이며, 이케우치는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시킨 인물이다. 이병도는 1982년 4월, ‘광장’지의 기고(박성수 교수와의 대담)에서 와세다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 3학년 때 강사인 쓰다 씨와 또 그의 친구 이케우치 히로시(동경대 조선사 교수) 씨의 사랑을 받아, 졸업 후에도 이 두 분이 자기들 논문이나 저서를 보내주어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원래 남의 논문이나 저서를 많이 보아야 연구방법이나 학식의 향상을 보게 되는데 그 당시 일본 학계의 최첨단을 걷는 이 분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인이지만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였고, 그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만큼 날카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는 일본인 학자들을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라고 흠모했고, 실증적이고 비판적이고 날카로웠다고 극찬했다. 쓰다 소키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가짜라는 ‘삼국사기 불신론’의 주창자이며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한 식민사학자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고려의 북쪽 국경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임에도 불구하고 그 보다 2천여리 남쪽인 함경남도 안변이라고 축소시킨 악성 식민사학자다. 이런 쓰다와 이케우치의 눈에 한국에서 온 이병도 학생이 민족정신이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고, 자신들의 침략사관을 흠모하고 있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만약 이 학생이 이병도가 아니라 신채호였어도 쓰다와 이케우치가 사랑을 베풀어주고 귀 국 후에도 논문이나 저서를 보내주며 교육시켰을까?
이병도는 이 대담에서 ‘그때 중앙학교(현 중앙중고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다가 지내굉池內宏(이케우치 히로시) 씨의 추천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일시 취직 해 일본인 학자들과 접촉을 하였고, 그 후로부터 비로소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병도가 1925년부터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것이 이케우치 히로시의 추천이라는 것이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눈에 이병도의 역사관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조선사편수회에 취직시켜주었을까? 일본인 학자들이 식민사학을 전파하는 것보다 혈통은 한국인이 전파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병도는 과연 이케우치의 단독 추천으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갔을까? 조선사편수회는 학술기관이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는 물론 행자부·법무부 장관 등을 겸임하던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이 위원장이었던 정치조직이었다. 조선사편수 회에는 이완용·박영효·권중현 같은 친일매국적들이 고문이었는데, 이병도는 이완용(1858~1926)의 손자항렬이었다. 이케우치가 이완용과 교감을 통해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넣어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박아 놓은 것은 일본극 우파들의 ‘신의 한 수’였다. 아직까지도 남한 강단사학이 일본 극우파 역사관을 교리처럼 신봉하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탄생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는 수단으로 건국훈장을 수여했는데 그 심사위원에 이병도·신석호·이선근 등을 참여시켜 독립운동 훈장 수여심사를 엉터리로 하여 친일청산은 커녕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이들은 대한민국 역사관 장악을 위해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첫째, 주요 대학 역사학과를 장악했다. 이병도·신석호·이선근 등은 주요 대학 사학과를 장악해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정설定說로 정착시켰다.
둘째,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역사 관련 국가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자료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국사편찬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조선사편수회 자료 정리가 나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계승이었다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위원장이 교육부장관, 사무국장은 신석호였는데, 국사편찬위원회사는 신석호의 재임기간을 1929년 4월~1961년 1월이라고 적어 놓았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했다고 당당하게 밝혀 놓은 것이다.
셋째, 해방 직후 국사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중등국사 교원양성소를 장악해 국사교사들에게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주입시켰다. 주요대학 역사학과→역사관련 국가기관→중등국사 교원양성소→학생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해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대한민국의 주류 사관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이병도는 서울대에서 이기백∙ 이철준∙ 변태섭 등 2세대를 양성했다. 이후 3세대 노태돈∙ 이기동, 4세대 송호정이 배출되었다, 송호정은 현재 한국교원대에서 역사교사를 양성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는 재야사학자, 유사역사학자, 사이비역사학자라 모독하고, 자기들은 대학강단의 ‘강단사학자’라 주장하면서 합리화한다.
이병도의 제자들을 그의 호를 따 두계학파라 불리는데 1979년 충북 중원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되었을 때, 풍상으로 마모가 심해 그 부분의 해석이 다양하였다. 이를 두고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이병도는 이 비석이 건흥 4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이 논거를 묻자 ‘내가 하도 오매불망한 끝에 꿈에 그렇게 현몽했다’ 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호영/중원고구려비 제액의 신독, 신복룡/ 한국사학사의 위기>
<식민사학 계보 및 역사학술단체>
1. 식민사학 1세대
이병도, 손진태(서울대), 신석호(고려대), 이홍직(연세대, 고려대)
2. 식민사학 2세대
고병익, 유홍렬, 한우근, 김철준, 김원룡, 변태섭, 최몽룡, 차하순 (이상 서울대), 이기백(서강대, 한림대), 천관우, 전해종(서강대), 김정배(고려대,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백낙준(연세대), 이선근(만주국협화회위원, 전 문교부 장관), 김용덕, 조인성, 유원동, 최 영희, 김도연, 신형식(이화여대)
3. 식민사학 3세대
노태돈(이병도-김철준-노태돈-송호정으로 이어지는 서울대 대표적 식민사학자), 이기동(동국대), 서영수(단국대), 이광린(서강 대), 배기동(한양대, 국립박물관장), 안휘준(서울대, 미술사학과), 조유전(1942, 고고학), 손병헌, 주보돈(경북대), 이종욱, 송기 호(서울대) 등
4. 식민사학 4세대
송호정(1964, 교원대 교수, 노태돈 제자), 임기환(서울교대 교수), 김태식(서울대 사학과, 문학박사, 홍대 교수), 정재정(서울시립 대), 정요근(서울대), 김현구(고려대), 하일식(고대사학회, 연세대), 오강원(한국학 중앙연구원, 고고학), 공석구(한밭대), 정인성 (영남대), 권오영(서울대 국사학과), 이형구(선문대), 김호섭(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윤용구(인천도시공사, 문화재담당기획관), 이선복(서울대 고고학과 교수), 이명희(공주대 역사교육과)
5. 식민사학 5세대
심재훈(단국대), 박준형(연세대 학예연구사), 이진한(한국역사연구회, 고려대), 백경식(한국역사문제연구소), 한상권(덕성여대), 오수창(서울대), 이후석(숭실대), 홍종욱(한국역사연구회, 서울대), 이후석(숭실대), 배성준, 박선미, 연민수(동북아역사재단), 이 영식(인제대), 기경량(가톨릭대), 안정준(서울시립대), 위가야
6. 식민사학 역사학회단체
- 동북아 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 중앙 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 진단학회, 청구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상고사학회, 한국서양사학회,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한국 역사연구회, 한국교육학회, 한국중세사학회, 역사교육학회, 일본사학회, 아시아평화역사연구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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