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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식민사학자들의 역사 왜곡, 한사군의 한반도설(2)

by 싯딤 2026. 1. 14.

 

 

 

식민사학자들의 역사왜곡,  고조선 강역과 한사군의 한반도설

 

 

 

식민사학자들의 가장 큰 역사왜곡이 고조선 시대와 한사군의 위치다. 이들은 중국 한나라가 지금의 평양지역까지 정복하고 그 곳에 한나라 4군을 설치했는데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과 황해도 인근으로 규정하여 고조선을 변방의 작은 나라 정도로 만들었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의 출발지가 평양이었고 망할 때까지 그 자리였으니 한무제의 한사군도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는 것이 이병도와 그 후예들의 식민사관이다.

이 주장은 중국의 동북공정과도 일치하는데 현재 식민사학자들로 구성된 동북아재단이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역사 문헌은 하나도 없다.

 

낙랑군에 있었다는 갈석산.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데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유명한 산이다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은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여년 지난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일제 식민사관이 아니라 낙랑군 설치 당시의 시각으로 그 위치를 찾아야 한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 설선薛宣열전>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 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검토해보자.

대동강변의 낙랑 토성. 일제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로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도 수도 자리가 아니라는 반론이 일었다

 

 

 

궁색함을 자인한 이병도황해도설’, 한국 주류사학계 무작정 받아들여

 

이병도는 그의 저서 <한국고대사연구 낙랑군고> 에 이렇게 썼다.

수성현遂城縣은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 比定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 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낙랑군고>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뜻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옹색하기 때문에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8)은 이나바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중국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 놓았다. 중국 동북공정 논리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갈석산의 각자

 

 

갈석碣石은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이다. BC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몽염蒙恬열전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중국에서는 상식이다.

그럼 지금의 창려현이 옛날에는 수성현이었는지 살펴보자. 고대 지명은 왕조 교체에 따라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러 사서를 추적해야 한다.

수서隋書 지리지는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이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18(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창려현이 과거 수성현의 일부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수안군 건치연혁에는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을 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고려 태조 23(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못 본체하고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1913년 세키노關野貞 같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 곧 옛 조선현으로 만들어졌지만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론이 일었다. 고대 수도는 관방關防(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한데 대동강변 토성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반론이었다. 사기 조선 열전은 고조선의 우거왕이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적고 있지만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 굳세게 성을 지켜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적고 있는데, 대동강변 토성은 반나절도 지키기도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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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의 위치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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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 호분의 무덤 벽화 .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라는 인물의 묵서명이 실려 있다 .  이 묵서명이 없었으면 한사군 유물로 둔갑했을 것이다


 

강단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양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조선고적도보를 간행하면서 낙랑· 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전에는 누구나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했었다. 일제 뿐만 아니라 북한도 이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남한 강단사학계는 일제의 발굴 결과는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 북한의 발굴 결과는 무조건 부인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인다.

 

 

북한 리진순평양일대 낙랑무덤 연구’ “낙랑군 설치 200년전에 벌써 존재
강단사학계, 북한 연구 무조건 부인, 시멘트 쓴 의혹 일제 발굴 비석은 맹신

 

 북한학자 안병찬은<평양일대 낙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1995>에서평양시 낙랑구역 안에서만도 2600여 기에 달하는 무덤과 수백m²의 건축지가 발굴되었으며 1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찾아냈다면서이것은 일제가낙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하기 위해 조선 강점 기간에 도굴한 무덤수보다 무려 26배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남한의 한 사학자가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이란 논문에서북한에서 근래 연구서 형태의 몇몇 자료가 나왔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문자 유물의 보고는 더욱 부실하여 설명한 내용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며 무조건 부정하고 있다. 

 북한 정치체제를 떠나 해당 유적을 직접 발굴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대해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단정짓는 것은 학문적 소통의 거부 선언에 다름 아니다.

 남한 학자들이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안 믿겠다고 부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정설로 떠받들고 있는한사군 한반도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 학계에서 한사군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목곽묘木槨墓나무곽무덤이라고 부르는데 850여 기나 발굴했다. 북한의 리진순은 <평양일대 낙랑무덤에 관한 연구>에서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BC 3세기 전부터 BC 1세기 말까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BC 1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한사군이 설치된 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목곽묘는 한사군 유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 랴오닝성 금서시에서  1997 년 발견된 임둔태수장 봉니 .  중국 요서 지역이 한사군 지역임을 알게 해주는 유력한 물증이지만 주류 사학계는 외면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가 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재 평남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를 살펴보자.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점제현은 낙랑군의 25개 속현 중의 하나이므로 강단 사학계는 이 신사비를 용강군이 낙랑군 지역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보고 있다. 그런데 비석이 발견된 지역은 현재 온천군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휴양지이고 비석이 서 있던 곳도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였다. 이런 곳에 2천년 동안 서 있던 비를 아무도 발견 못했으나 이마니시 류가 단번에 발견한 것이다.

 조선총독부 고분 조사위원이었던 후지타 료사쿠(1892~1960)는 조선고고학연구 (1948)에서이마니시 류는 용강군 해운면의 어을동 고분에서 단 한 개의 와당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면장으로부터비석문을 읽을 수 있으면 그 아래의 황금을 얻을 수 있다는 고비古碑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증언을 한 장면은 누락시키고 동네 아이와 찍은 사진을 발표했다

 북한의 <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기초에는 시멘트를 썼다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화학성분도 근처의 마영 화강석·온천 오석산 화강석·룡강 화강석과는 다르다고 분석했다. (Ag)은 주위 3개 지역의 화강석보다 2~4, 납은 3, 아연(Zn), 텅스텐(W), 니켈(Ni), (P)은 각각 2배가 많은 반면 바륨(Ba)은 주위 화강석의 6분의 1 이하로서, 이는 다른 지역(요동)에서 가져온 비석이란 분석이다.

 

<삼국사기>, “낙랑군 등 포로 2만명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의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사들였는데,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다.

 북한의 박진욱은 <낙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95년 제4)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해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썼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 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 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점제현 신사비. 평남 용강군(현 온천군)에서 이마니시 류가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 북한에서는 다른 지역의 암석 재질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해석할 때 중국인들 기록의 존재가 중요하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대왕이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호구 수가 기록된 낙랑 목간도 이런 경로로 획득한 문서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302) 현도군 사람 8천여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315)에도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 이상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385)> 조는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 기록상으로만 최소 2만명 이상의 포로들이 잡혀왔다. 이런 포로들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가장 먼 평안남도나 황해도에 집단 거주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많은 망명인들도 있었다. <삼국사기 고국천왕 19(197)> 조는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217)조에는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중국계 유적, 포로들 것일 가능성 커

 1997년 중국 랴오닝성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옛 성터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조작 시비가 일지 않는 유일한 봉니다.

 길림대 고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백산학보 61(2002)>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를 발표했다. 봉니 출토지는 물론 근처의 대니大泥 유적과 패묘貝墓 유적의 출토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논문이다. 

그는 전국시대(BC 475~221)에는 금서시 유적에서 고조선 계통의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다가 전한 중기부터 후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특징은 약해지고 중국 특징의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뒷 시기는 한사군 설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주류 사학계로부터 외면당했다. 임둔군은 함경남도 쪽에 있어야 랴오닝성 금서시에 있어서는 정설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구석기 시대 유적·유물을 조작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조작이라는, 조선사편수회의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해석을 정설로 떠받드는 대한민국 강단사학계는 과연 조선사편수회와 단절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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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이병도, 이제의 주장

중국 삼국시대 유주(왼쪽 점선 안)와 대방군(오른쪽 점선 안) 지도. ‘중국 역사지도집 제3집(삼국, 서진시대)’에 실린 것으로, 위나라가 평안남북도는 물론 황해도의 대방군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원에서 촉, 오와 싸우기에도 전력이 부족하던 위나라가 고구려 남부에 대방군을 운영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사군 중에는 진번· 임둔군처럼 설치 25(BC 82) 만에 낙랑· 현도군에 편입된 군이 있는가 하면, 대방군처럼 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다시 설치된 군도 있다. 대방군은 요동의 토호였던 공손강公孫康이 3세기 초반에 낙랑군 남부에 세운 것인데, 현재 주류 강단사학계는 황해도와 한강 이북 지역으로 비정하면서 과거에는 한사군· 진번군의 고지故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를 평남 일대라고 규정한 주류 사학계로서는 대방군은 황해도 쯤에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고대 사서가 말해줄 것이다.

 

 삼국지대방군, 둔유에 설치기록
한자음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병도둔유는 황해도 동어라 믿어
군국지에선대방군, 요동에 속해

 

 대방군이 황해도와 경기도에 있었다는 주류 학설은 이병도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의 와세다대 스승이자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 1913>에서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쓴 것이 시초이다. 이병도는 또 1911년 일본인 학자들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한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을 근거로 대방군의 치소인 대방현이 봉산군이라고 비정했다. 중국계 무덤이나 유물은 덮어놓고 한사군 유물로 보는 주류 사학계의 고질적 병폐에 대해서는 차후 살펴보겠지만 우선 장무이의 무덤에서 나온무신戊申년이 새겨진 명문 벽돌만 제대로 해석해도 봉산군은 대방현이 될 수 없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지 위서 한전韓傳>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후한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 (고구려가) 다시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고구려가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대방 현령을 죽이고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전과를 고려하면 대방은 황해도에 있을 수가 없다. 낙랑이 평안도이고 대방이 황해도라면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유령처럼 황해도에 나타나 대방 현령을 죽이고 다시 평안도의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아온 것이 된다. 공수특전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구절에 대해 <군국지郡國志>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 대방, 낙랑이 모두 고대의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에 있다는 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황해도로 비정한 주류 사학계의 정설은 설 곳을 잃는다. 그러나 이병도는 둔유현을 황해도 황주로 비정했는데 그 논리를 보자.

산해경에는열구, 요동에 있어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와 ‘동어’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달리 적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의 상上(웃)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장황한 설명 후적중하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단정했지만 이병도가 황주를 둔유라고 본 근거는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 하나 뿐이다. 뜻글자인 한자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둔유는군대가 진 치고 있다는 뜻으로서 주요 군사기지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게다가우동어홀중에서 우于자와 홀忽자는 마음대로 빼 버리고 가운데 동어冬於만을 취해서동어가 둔유와 같은 말을 달리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진서>에는 대방군에 소속된 7개 현의 이름이 나온다. ‘대방· 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현이 그것이다. 이 중 중국 고대 사서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현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열구현인데 이병도는 이를 황해도 은율恩栗로 비정했다. 다시 그 논리를 보자.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무덤군과 장무이 무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이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무덤이 나왔다고 대방군 지역으로 확정한 것이지만 낙랑군이 망한 지 35년 후에도 이 지역은 한사군이 지배했다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은율군은 고구려 시대의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니 율구(栗口)는 열구(列口)와 음이 거의 같고 율천(栗川)도 열수(列水)의 이사(異寫)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구현이 오늘의 은율 부근이라 함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주류 사학계는 대방군 열구현을 황해도 은율군으로 보는 데 이론이 없을지 모르지만 <후한서> 주석자는곽박(郭璞) <산해경>에서()은 강의 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열구가 요동에 있었다는 뜻이다. 장잠현에 대해서 이병도는 황해도 풍천군으로 비정하면서 그 근거로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을 들었다. ‘최인이 장잠현령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멀어서 부임하지 않았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후한서>는 이 구절에장잠현은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요동에 있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이병도가 이 주석을 못 보았을 리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므로 못 본 체하고 황해도 풍천에 비정한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열구·장잠현을 모두 황해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방군 설치자 주무대도 요동

 또한 주류 사학계는 진번군과 대방군을 같은 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고대 사료는 전무하다. 진번군에 대한 사료 자체가 희소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크게 정리하면 진번군이 요동이나 고구려 지역에 있었다는 북방설과 황해도 등지에 있었다는 남방설이 있다. 이병도는 북방설에 대해일소(一笑)에 붙이고도 남음이 있다고 일축하면서진번군=대방군=황해·경기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근거로 든 것은 고대 사료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학자 양수경(楊守敬: 1839~1915) <회명헌고>(晦明軒稿)에서 대방군의 7개 현을 옛 진번군의 잔현(殘縣)이라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아무런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양수경의 주장에 대해 이병도는어떻든 대방 7현을 고() 진번의 잔현(殘縣)으로 추단(推斷: 추측해서 단정함)한 것은 틀림없는 탁견으로 진번 문제 해결에 한 서광을 비추어주었다”(<한국고대사연구> 114)라고 극찬했다.

 쓰다 소우키치는 <조선역사지리>에서 진번군을 압록강 상류 부근이라고 비정했는데 이병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쓰다가 아니라 양수경을 스승으로 삼은 셈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진번군을 충청·전라북도 지역으로 비정하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충청도 지역으로 비정한 것보다는 조금 나은지도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사기> <한서>(漢書)를 근거로진번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대방군을 설치한 공손강 가문은 그 부친 공손도(公孫度)가 후한 말의 혼란기에 요동왕을 자칭했던 가문이다. 이 가문은 서진(西進)하는 고구려와 요동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다. <삼국지> ‘위서공손도(公孫度) 열전은 공손도와 아들 공손강 일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의 무대는 시종일관 요동이었고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요동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다.

 고구려의 저지선을 뚫고 황해도와 경기 북부까지 진출하는 것은 이 가문의 관심사도 아니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위에는 고구려, 아래는 백제가 압박하는 황해·경기도에 대방군이 존속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나?

 한국 사학계 주류의 정설(定說) 중의 하나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삼국의 시조가 누락되어 있는 것도 이런 사관의 반영이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국사교과서>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임나일본부 얘기 없어 조작 사료
조선사편수회 쓰다 소우키치 주장에
부정확한동이열전그대로 수용
주류학계, 교과서에서 삼국시조 빼

 

 <삼국사기>는 신라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57, 고구려는 서기전 37, 백제는 서기전 18년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믿겠다는 것이었다. 7차 교과과정의 <국사교과서> 부터는 그 이전 왕들의 재위연대도 수록했지만 주류 사학계가 자신들의 고대사 인식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넣은 결과가 아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육부 관료들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강력히 요구한 결과 마지못해 수용한 결과였다. <국사교과서>의 부록에는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가 들어갔지만 본문 서술에서는 여전히 초기 국왕들의 존재가 부인된다.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때 사실상 건국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고고관에는원삼국실原三國室이란 전시실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삼국시대에 대해서력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300년경까지 약 3세기간을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삼국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부락단위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면 삼국의 유물이라고 하지 않고 원삼국이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고고학판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원삼국실로서 아비(삼국)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했던 일제시대가 계속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심지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용한 논문은 통과되지 않는 것이 학계의 상식일 정도로 사학계 주류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도그마가 되었다.

 

삼국사기, 편년체라 조작 어려워

 

가야의  ‘ 말머리 가리개 ’.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

 

 그런데 이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창안해 낸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다. 그는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1919)>의 부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에 대한 면밀한 연구 결과 나온 이론이 아니라 일본 고대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연구의 부수물로 연구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고사기> <일본서기>의 왜倭 관련 기록과 삼국사기의 왜 관련 기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둘 중 하나는 사실과 다르게 조작된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서기의 14대 쥬아이仲哀천황까지는 신화시대의 천황으로 후대인에 의해 조작되었고 15대 천황부터 실재했던 국왕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인데 동일한 잣대를 삼국사기에도 들이댔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신화 비슷한 <고사기> <일본서기> 등과 달리 삼국사기는 기전체 형식의 편년체 사서이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기 때문에 왜()에 관한 기재 역시 마찬가지로 사료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면서도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원삼국 시기의 철제무기 .  철제 무기의 출현은 고대국가 성립의 지표로 해석하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의 통설이지만 한국에서는 서기전  1 세기부터 서기  3 세기까지 신라와 백제는 부락수준에 불과했다면서 굳이 원삼국이란 틀에 가두어 설명하고 있다 .

 

  쓰다 소키치의 말 중에 핵심은 삼국사기의 왜에 관한 사료 역시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그가 같은 글에서 “(삼국사기에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우리나라(일본)가 가야를 근거로 신라에 당도했다라는 명백한 사건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쓴 것처럼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왜가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해야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조선역사지리에서 “(한반도) 남쪽의 그 일각一角에 지위를 점유하고 있던 것은 우리나라(倭國)였다. 변진弁辰의 한 나라인 가나加羅:가야는 우리 보호국이었고, 임나일본부가 그 땅에 설치되어 있었다라고 쓴 것처럼 쓰다의 관심은 임나일본부였다그래서 쓰다는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상대(上代)에 보이는 외국관계나 영토에 관한 기사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라고 비판했다.

 임나일본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의외국관계나 영토관계 기사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논리 중에는혁거세의 건국을 갑자년(甲子年 BC 57)으로 한 것은 간지(干支)의 시작을 맞춰놓은 것이므로 가짜라는 주장까지 있다. 신라가 갑자년에 건국되었다고 쓴 것이 조작의 증거라는 뜻이니 굳이 반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열한 수준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하는 일관된 이유는 단 하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나오지 않을 뿐더러 <삼국사기> 기록처럼 한반도 중남에 강력한 고대국가인 신라와 백제가 존재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기에 <삼국사기>를 부정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부정해야 했던 쓰다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 진수(陳壽) <삼국지> 동이열전 한()조였다. <삼국지> ()조는마한은 54개 소국,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도합 78개 소국이 있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수는 이 글에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고 썼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에 따라서 삼한의 위치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는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으며 삼한도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했다. 한반도 남부가 78개 소국으로 나뉘어 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말살한 자리를 <삼국지> 한조로 대치시켰던 것이다.

 쓰다는한지(韓地:한반도)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삼국지> ‘위지의 한()전과 그것에 인용된 위략(魏略)이 최초의 것으로서 그것에 의하면 3세기의 상태가 알려졌다라고 <삼국지>가 중국 3세기 삼국시대(220~265)에 대한 기술이니 그 한()조도 당연히 3세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3세기 한반도 중남부에는 강력한 고대 국가 신라·백제가 아니라 78개 부락(部落) 단위의 소국이 우글대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은 예()나라를 설명하면서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서기 3세기가 아니라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인 서기전 2세기 이전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이다. 물론 3세기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도 있다. 이처럼 <삼국지> 동이열전은 진수가 부정확한 전문에 의거했거나 정리되지 않은 사료를 가지고 쓴 부정확한 기록에 불과하다.   해방 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국사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빼버렸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되살려야하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계속 부정하면서 <삼국지> 동이열전을 경전으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현행 <국사교과서>여러 나라의 성장부분에는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순서로 기술하면서신라와 백제를 누락시켰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의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 (삼한)’과 같은 순서의 기술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지> 동이열전을 빌미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한 식민사관이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해방된 지 한 갑자가 훨씬 지났지만 대한민국에서 조선사편수회는 과연 해체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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