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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고조선 강역_윤내현 (3)

by 싯딤 2026. 1. 14.

 신채호∙ 윤내현 교수를 비롯한 민족사학자들은 고조선을 독립적인 토착세력으로서 중국 요동까지 2천년 이상 이어간 국가로 보고있다.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2017, 고조선 연구/1962/리지린>

 1980년대 남한 역사학자 윤내현 교수는 <한국고대사신론>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넓게 해석했다. 중국 고대문헌인 <사기>와 <한서>, <삼국지>와 <후한서> 등 고대 4서 모두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 요하를 요동의 난하 또는 그보다 더 서쪽의 대릉하로 써 있는 것을 분석, 적용한 것이다.

다음은 윤내현 교수의 저서 <한국고대사신론>에서 고조선 내용을, 인용 문헌 중심으로 발췌한 것이다.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_고조선 강역/ 윤내현

 

 

 

 고조선 시대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국 문헌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제왕운기> 등인데 모두가 고려말(1200~1300)에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이보다 앞선 중국 문헌을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 주나라 제후 환공(BC 685~BC 643)과 관자의 대화에 귀중한 예물 일곱가지 가운데 조선의 표범가죽이 그 한가지요<관자 권 23 규도>란 말이 나온다. 이로 보아 고조선은 BC 7세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전국시대(BC 403~BC 222)에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는 <산해경>에도 고조선이 언급된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이름은 조선이다. <산해경 권18 해내경>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 시대에 우리 한민족이 형성되었는데, 고조선은 많은 거수국渠搜國(무리의 우두머리, 부족연맹체, 부족국)을 거느린 국가로, 오늘날 중국 요서지역을 포함한 만주와 한반도 전지역을 영토로 하여 2000여년간 독창적인 고조선 문명을 지속하였다.

 단군이 거주한 마을을 도읍, 거수의 우두머리(족장)가 거주한 마을을 국읍, 그 아래 마을을 읍이라고 하였으며, <후한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왕이나 거수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로 보아 단군은 왕의 호칭으로 보인다.

 고조선시대에 서부 변경지역에서의 기자 망명국, 위만조선의 등장, 한사군 설치 등의 사건은 우리역사가 아닌 중국역사이며, 한나라에 의해 많은 부족국가들로 분열되고 고구려에 의해 계승되기까지 고조선은 지속되었다.

 

 

 

 

  

 

 

기자국과 위만조선

고조선시대에 중국은 하→상→서주→춘추→전국→진→서한으로 왕조 교체가 계속되었다. BC 11세기경, 상商나라가 주족에게 망하자 상 왕실의 제후였던 기자가 일족을 거느리고 고조선 서쪽 변경으로 망명해 왔다.

 

무왕은 상나라에 승리하고 공자 녹보에게 상나라를 계승하도록 하고, 갇혀 있던 기자를 풀어주었는데, 기자는 참을 수가 없어서 조선으로 도주하였다.’ <상서대전 권2 은전 홍범>

 

기자는 그곳에 기자국을 세우고 주민들을 통치했다.

 

 

 

 

 

  BC 195년엔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서한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방어해 주겠다며, 오늘날의 난하 유역 국경에 중국 망명자들과 토착인을 규합하여 머물다가, 기자국을 침략하여 정권을 빼앗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그 후 위만은 서한나라의 신하국이 되겠다고 약속하고 지원을 받아 고조선을 침략했다.

 

 BC 109년에 서한 무제가 강성해진 국력으로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한나라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 지역에 낙랑 임둔 진번의 3군부를 설치하여 다스리게 한 다음, BC 107년 고조선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한 후 요하지역에 현도군을 설치했다. 기자국과 위만조선의 역사는 위로 보아 한민족 고조선역사가 아닌 중국역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단군은 통치능력을 잃고 BC 100년경 붕괴되었고, 고조선 영토는 수많은 열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거수국들은 세력 확장과 체제 강화를 통해 점차 독립국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북부여 동부여 고죽 고구려 기자 낙랑 진번 임둔현도 숙신 청구 양이 양주 읍루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 신라∙ 한∙ 가야 등이 명멸해 갔고, 고구려가 점차 고조선의 고토를 수복해 가면서 고조선 민족의 재통합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고조선의 영토

 그러면 고조선의 강역, 즉 중국과의 국경은 어디였을까? 중국고대 문헌에는 중국 동쪽 국경이 고조선과 있다는 기록은 많다. 진시황제에 의해 통일된 진제국의 북동쪽 국경기록을 보자.

 

(진나라) 땅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으며북쪽은 요동에 이르렀다. <사기 권6 진시황본기 26년조(BC 221)>

고조선과의 접경은 북쪽 요동지역으로, 이 지역은 갈석산이 있는 곳이라 하였다. <사기 권12, 효무본기 한서 권6 무제기>

 

 지금도 산둥성 북쪽의 하북성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다. 이와 더불어 만리장성의 끝도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고조선 영토 황해도가 아닌 요동땅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태강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하였다. <사기 권2 하본기_사기집해>

 

 

한사군의 위치

 한사군은 BC 108년에 서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4개 군을 말한다.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 기록을 보자. 위만조선의 대신 이계상이 우거왕을 죽이고 서한에 와서 항복했다. 수도 왕검성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나라 장군 순체가 위만 백성들을 타이르고, 반항하는 대신들은 죽였다.

 

(한나라)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상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타이르게 하고 대신 상사를 죽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고조선은 마침내 평정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개의 군이 되었다. <한서 권 95 서남이양월 조선전>

 

 그러면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서쪽으로는 여러나라가 연이어 안식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갈석산을 지나 현도, 낙랑의 군을 만들었으며, 북쪽으로는 흉노를 쫓아내어 요새를 다시 세웠다. <한서 권6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 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 >

 

 갈석산 동쪽은 오늘날 요서 지역이다. 한사군의 위치는 지도에서 본 바와 같이 한반도 서북쪽 위만이 차지하고 있던 요서지역으로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북한지역과는 맞지 않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

 그러나 이병도 등은 요하를 한반도의 대동강 또는 청천강이라 주장한다.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같은 유물과 유적은 무시하고, 오로지 한반도 평양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 유물과 기왓장 따위 만을 내세운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은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요동에 위치했고, 나중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반도 북부로 수도로 옮기면서 '평양'이라는 지명도 따라왔다. , 고대의 '평양'은 요동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주요도시였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평양'은 현재의 평안도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고조선 쇠태 후 열국들과 지리적 위치

 고조선이 쇠퇴한 뒤 이 지역에 열국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한 등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한을 보면

 

한에는 세 종족이 있다. 마한 진한 변한이며, 마한은 서쪽에 54개국이 있었고, 그 북쪽으로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였다. 진한은 서쪽으로 12개국이 있으며 북쪽으로 예맥과 접하였다. 변한은 진한의 남쪽인데 또한 12개 국이 있으며 남쪽으로 왜와 접하였다.<후한서 권85 동이열전 한전>

 

 삼한을 오늘날의 위치로 보면 마한은 전라 충청 경기 황해도, 변한은 경남, 진한은 경북지역이다. 동예는 오늘날의 강원도 지역이었다.

 

예는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하였고 동쪽은 넓은 바다로 끝났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르렀다. 예, 옥저 및 고구려는 본래 모두 고조선의 땅이었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예전>

 

 여기서 서쪽은 낙랑이라 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를 보면 최리왕이 다스린 낙랑국의 기록이 있어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관계없는 별개의 국인 것이다.

 또한 동옥저는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으로, 예맥의 북쪽에 자리하여 서쪽에는 고구려가, 북쪽에는 읍루와 부여가 있는데, 동서로는 좁고 길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됐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동옥저전>

 

고구려는 오늘날의 요동지역과 압록강 유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요동 동쪽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 동쪽엔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 땅은 사방 2000리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고구려전>

 

위의 <후한서> 기록에 조선이 나오는데, 고구려 남쪽과 동예 사이의 청천강 유역으로, 고조선이 붕괴된 뒤 단군의 일족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소국小國 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과 묘향산에 단군과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이와 관련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에 따르면,

 

 동명왕이 비류강 가운데 채소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이에 사냥을 하며 찾아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비류왕이 항복하니 그를 주(분봉왕)로 삼고 그 땅을 옛 땅(고조선)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다물도라 이름지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명왕은 단군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옛 땅 회복의 의식을 치뤘을 것이다. 읍루는 오늘날의 길림성 북부와 흑룡강성 일대의 연해주를 차지하였으며, 요서에 거주하던 숙신이란 한민족이 이주해 세운 나라였다.

 

부여는 현도군 북쪽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 북쪽엔 약수가 있다.  땅은 사방 2000리로서 본래 동예의 땅이었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부여국전>

 

약수는 오늘날의 흑룡강이다. <진서 동이열전 숙신씨전>

 

 행인국은 백두산 동남쪽에 있었는데 고구려는 그 땅을 정벌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개마국은 개마지역에, 구마국은 길림성 동남부에 있었는데, 고구려에 항복했다. 조나국과 주나국은 위치를 알 수 없으나 고구려와 가까운 요동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모두 고구려가 정복했다.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요하유역 갈사강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칭했는데 역사에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가 살해된 것을 보고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100여명과 함께 압록곡(요하)에 이르렀는데 사냥 나온 해두국왕을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하여 이곳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니 그가 갈사왕이다.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고조선 붕괴 후 분열되어 열국시대가 도래했다. 기자가 망명하여 고조선 서부에 정착하여 기자국을 세우고, 위만이 망명하여 위만조선이 기자국을 패망시켰을 때도 고조선의 서쪽 영토에서 변화가 있었을 뿐 계승되었다. 한사군도 위만조선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국 고대사는 중국(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지배로 역사가 단절되어 있다.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는 중국이 고조선 변방을 일시 지배하였으며, 열국의 시대를 거쳐 고구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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