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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_이덕일(4)

by 싯딤 2026. 1. 14.

다음은 이덕일 교수의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경기신문, 2020-08-31)의 글이다.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_이덕일

 

 

 

 

 

 임나일본부란 삼국시대 6가야를 고대 일본 오사카 근처 나라奈良에 있던 야마토왜大和倭가 점령하고 그 곳에 임나일본부(일제 조선총독부 같은)를 설치하고 통치했다는 주장으로, 따라서 일제의 한국 점령은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정한론) 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의 임나일본부설은 야마토왜가 369년 가야를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지배했는데, 때로는 임나의 지배영역이 경상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도쿄조감도. 일왕이 거주하는 궁성 앞에 육군성과 참모본부가 있어서 일왕을 옹위하는 형세다.

 

 

BC 28년에 임나가 있었다는 <일본서기>

 남한 식민사학자들은 “가야=임나” 라고 주장한다. 이는 물론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처음 만든 논리다. ‘임나=가야설은 일본 참모본부가 조직적으로 퍼뜨리면서 시작됐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일본은 6년 후인 1882년에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임나고고任那稿考> <임나명고任那名考>라는 임나 관련 저서를 간행했다. 가야가 임나이자 야마토왜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책들이다. 임나는 일본어로 미마나みまな라고 하는데, 미마나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반노부토모伴信友(1773~1846) 등의 일본 극우파 학자들은 미마나가 <일본서기 상> 10대 임금인 숭신崇神(BC 97~BC 30)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반노부토모는 일본을 대황국大皇國, 즉 ‘위대한 천황의 나라’ 라고 주장했던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8) 일본 국학자다. 일제가 스스로를 황국, 자국 군대를 황군이라고 부르는 논리를 제공한 인물이다.

 <일본서기><고사기>, <상륙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 등에는 숭신의 이름이 7개나 나타난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어간성御間城인데, 그 일본어 발음이 미마키みまき. 어진목御眞木도 숭신의 이름인데, 이 역시 발음은 미마키다. 숭신은 미만귀美萬貴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 역시 발음은 미마키다. 이 미마키에서 미나나(임나)가 나왔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상> 11대 임금이라는 <수인垂仁 2(BD 28)> 조에 이런 기사가 있다.

 

 이 해에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귀국하고 싶다’고 청했다. 아마도 선왕 때에 내조來朝하러 왔다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것인가?

 

 이 기사가 나오는 수인垂仁 2년은 BC 28년인데, 가야는 그보다 70년 후인 서기 42년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임나는 가야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이 기사는 임나인 소나갈이 선왕(숭신) 때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 상>10대 임금인 숭신은 BC 97년부터 BC 3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가야가 건국되기 150여 년 전에 즉위해 가야가 건국되기 7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가야가 임나라면, 숭신 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야 사람이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갔다는 말인가? 원래 BC 1세기 때 일본열도에는 숭신같은 임금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야마토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가지고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면 뒤죽박죽이 되기 일쑤다. 가야가 건국되기 70년 전에 임나인 소나갈이 그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야마토왜에 조공 바치러 갔다는 것이 일본서’ 기록인데, 일본인도 아닌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지금도 ‘가야는 임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니 세계 사학사상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삼한을 정벌하고 가라도 정벌하고

메이지시대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교장을 역임한 국학자 나가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 1897<가라고加羅孝>에 이렇게 썼다.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한, 다시 한 번 장수를 보내어 평정한 7개국 중의 하나인 가라국은 즉, 대가라로서 일본서기(응신계체흠명기應神繼体欽明紀) 등에 자주 보인다."

 

 이 기사는 두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신공왕후가 삼한 곧 신라· 고구려· 백제를 정벌했다는 것이다. 둘째, 신공왕후가 다시 7국을 정벌했는데 그 중 하나가 가라국이라는 것이다. 첫번째는 <일본서기 신공 9>조에 나오고, 두번째는 <신공 49>조에 나온다는 것이다.

 신공은 야마토의 14대 일왕 중애仲哀의 부인이다.<일본서기 상>. <일본서기 신공 9>조는 이런 내용이다. 하루는 신이 신공에게 '보물이 많은 신라를 치라'는 신탁을 내렸다. 문제는 신라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바다사람 오마려烏摩呂(워마로)를 서해로 보내 찾아보게 했지만 찾지 못했다. 다시 바다사람 명초名草(나쿠사)를 보냈더니 며칠 후 "서북쪽에 나라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해서 신라정벌에 나섰다.

 인류 역사상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를 힘들게 찾아서 공격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인 것이다. 때마침 신공왕후는 해산 달이어서 돌을 허리에 차고 정벌에 나섰다. 신공의 군사가 신라 바닷가에 이르자 신라의 왕은 "내가 듣기에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이른다. 또한 성왕聖王이 계시는데 천황이라고 이른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떻게 군사로 막겠느냐?" 라면서 흰 깃발을 들어서 스스로 항복했다.

 

일본의 전통 축제인 마쯔리祭り의 신공왕후(2015). 신공왕후는 지금도 마쯔리에서 삼한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군주로 받들어진다.

 

 

 신공 9년은 AD 209년인데, ‘라는 국호가 '일본日本'으로 변경된 것은 백제· 고구려 멸망 직후인 670년이다. 신라왕은 460여년 후에 왜의 국호가 일본으로 변할 것을 미리 안 예언자였는가?

 신라 항복 소식을 듣고 고구려· 백제 두 왕도 함께 항복하면서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라는 것이다. 이후 세 나라는 매년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쳐야했다고 <일본서기>에 써 있다.

 

 

신라가 백제 조공품을 빼앗아 야마토왜에 바쳤다

 AD 720년에 편찬했다는 일본서기는 앞뒤가 안 맞는 모순덩어리의 역사서로 유명하다. 허구의 역사로 왕후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야마토왜는 황제국이고 고구려·백제·신라는 제후국이고 '가야(임나)'는 직접적 식민지라는 것이다.

 신공 9년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는 매년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신공 44(244)에 백제왕은 구저久氐 등을 탁순卓淳에 사신으로 보내서, '일본 귀국日本 貴國'에 조공을 바치고 싶은데 길을 몰라서 바치지 못한다면서 일본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2년 후인 신공 46(246), 탁순에 사신으로 왔던 야마토왜의 사마숙네(시마노스쿠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겸인傔人(시종) 이파이爾波移를 백제로 보냈다.

 백제의 초고왕肖古王은 야마토왜에서 제조 생산하지 못하는 쇠덩어리인 철정鐵鋌 40매를 비롯해 오색 비단 등을 이파이에게 주면서 앞으로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공 47(247), 왜에서 백제와 신라가 바친 공물을 조사하니 백제의 공물이 좋지 않았다. 조사해보니 신라에서 백제의 공물을 빼앗아 신라 공물인 것처럼 속여서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 신공왕후가 신라정벌을 명해서 신공 49(249)에 신라정벌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가 미치요 초상,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교장으로, 단군은 일연이 창작한 가짜이고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신라를 공격했는데 망한 것은 가야

 <일본서기 신공 49>조는 황국사관 교리의 핵심구절이다. 그해 봄에 신공은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 등에게 군사를 주어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야마토왜군이) 모두 탁순에 집결해서 신라를 공격해서 깨트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했다. <일본서기 신공神功 49년>

 

 이것이 이른바 '임나일본부' 성립 기사라는 것인데, '임나'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또한 공격당한 나라는 신라인데 망한 나라는 가야여서 여기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신공 9년조는 허구지만 49년조는 사실이라는 주장

 일제 패전 후 일본의 역사학계는 신공 9년조의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폐기했다. 한국땅에서 쫓겨난 마당에 신공 9년에 신라· 고구려· 백제를 정벌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공 49년조의 정벌 기사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남한 역사학계도 마찬가지다.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인데, 여기에 120년을 더해서 369년의 사건이고 백제 근초고왕 때 일이라고 주장한다. '야마토왜' '백제'라고 주체만 슬그머니 바꾼 후 정벌기사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거없이 마음대로 갖다 붙여 해석하는 것이다.

신공 49년조의 폐기는 황국사관 포기와 같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야의 이시품왕은 어떻게 쫓겨나지 않았나?

 이들은 신공 49년조의 남가라가 금관가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금관가야는 369년에 멸망했거나 최소한 국왕은 교체되었어야 한다. 금관가야의 제5대 이시품왕의 재위기간은 346~407년이다. 신공 49년이 사실이라면 369년 이시품왕은 쫓겨났어야 한다. 그러나 이시품왕은 407년까지 재위에 있다가 승하했고, 아들 좌지왕(재위 407~421)이 즉위했다. 369년에 가야가 왜에게 멸망당한 사건은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내용을 한국의 강단교수들이 추종하고 임나일본부사로 변조하는데 12천억의 국고를 쓰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에도시대 일본 국학자 반 노부토모. 일본을 대황국이라고 주장했다

 

 

 서기 전 27년에 가야가 신라와 싸웠다는 일본서기

 그런데 위 소나갈질지 기록 바로 뒤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어간성御間城(숭신) 천황 때 아라사등阿羅斯等이라는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가 야마토왜에 왔다는 것이다. 숭신이 죽은 후 3년 동안 그 후사인 수인을 섬기면서 야마토왜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원문을 보자.

 

천황이 (가라왕자) 아라사등에게 “너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아라사등이 “많이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천황이 조서를 내려서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숭신)도 만나 뵙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본국명을 고치되 어간성(숭신) 천황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으로 고치라”고 했다. 이에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로 돌아가게 했다. 그 나라 이름을 미마나국彌摩那國(임나국)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아라사등은 지급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나라의 군부郡府에 간수했다. 신라인이 이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아 갔다.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일본서기 수인 기>

 

 의부가라 왕자 아라사등이 숭신을 섬기기 위해서 왜에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숭신을 만나지 못하고, 그 후임인 수인을 만나 3년간 섬기다가 귀국했다는 기사다. 이때 수인이 숭신의 이름인 어간성(미마키)를 따서 나라 이름을 미나나로 고치라고 했다는 것이고, 수인이 미마나에 붉은 비단을 내려줬는데, 신라가 이를 빼앗아 가면서 신라와 임나 사이에 원한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수인 3년은 BC 27년으로 가야가 건국되기 69년 전이다. 이 당시엔 생겨나지도 않았던 가야가, 역시 있지도 않았던 야마토왜에서 내려 준 붉은 비단 때문에 신라와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니 이 역시 허황된 기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다

 일본인 학자들은 허황된데다 연도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를 가짜로 모는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한 강단사학계는 삼국사기 불신론을 유일한 정설로 받든다.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 평생 이 분야를 연구했던 고 최재석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조작에 방해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조작으로 몰고, 가야와 미나나(임나)가 전혀 별개의 나라라는 증거는 있을지언정 같은 나라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음에도 가야와 미나나가 동일국이라는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인들의 주장에 어찌하여 한국의 사학자들도 무조건 동조하며 가야와 미나나가 동일국이라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최재석/일본서기의 사실기사와 왜곡기사>

 

 가야가 건국되기 70여 년 전인 서기전 28년에 <일본서기>에는 임나라는 이름이 등장하므로 가야는 임나일 수 없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임나=가야설’은 서기 42년에 태어난 가야라는 갓난아이의 나이가 이미 일흔 살이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이런 뻔한 사실들은 모른 체 하면서 “우리 학자들이 모두 한 통속인데, 누가 이를 알아차리겠는가?”라면서 ‘가야는 임나’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최재석 교수는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삼국사기 불신론을 신봉하는 것도 이렇게 비판했다.

 

 “이러한 경향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조작설에 대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인들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 조작되었으며,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경우에도 한국 고대 사학자들은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 채 삼국사기가 조작되었다는 부분에만 관심을 보여 일본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최재석/일본서기의 사실기사와 왜곡기사>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동전의 양면이다. 쓰다 소키치나 이마니시 류 같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한 것은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이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메이지시대 일본 참모본부. 참모본부는 육군성과 동일한 지위로서 일왕의 직속이었다.

 

 

 일본 참모본부

  일본 참모본부는 1880년에 사코 가게노부를 간첩으로 북경에 보내 중의학中醫學을 공부하면서 중국어를 익히게 했다. 사코는 1883 4월부터 7월까지 지금의 길림성 집안集安현에 머물며 광개토대왕비문의 탁본을 떴고, 이듬해 이를 일본으로 가져갔다. 육군참모본부는 이 탁본의 존재를 비밀에 붙인 채 여러 한학자들을 동원해 비문을 해독하고 왜곡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비문에 왜가 나오는 점에 착안해 이 왜가 야마토왜라고 우기면서 신라· 백제· 가야 등을 식민지로 지배했다고 조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총론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고 자화자찬한 후 본론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가야는 임나다라고 주장한다.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1894년의 청일전쟁 결과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 4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는데, 1항이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가 갖고 있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일본이 갖겠다는 뜻이다. 2항이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대만 및 팽호도澎湖島 등을 일본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를 차지하는 것보다 한국에 대한 종주권 확보가 더 중요했다는 뜻이다. 일본 참모본부가 어떤 정신자세로 1882년 ‘임나고고’ 및 ‘임나명고’를 냈는지 짐작하게 해 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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