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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38

조선 왕을 말하다 - 선조 선조,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 방계 승통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 제목은 난죽도(蘭竹圖).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절차의 투명성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대통(大統)처럼 최고 권력을 잇는 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에 혼란이 온다. 당사자는 정통성 부족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는 정국 운영에 큰 부담이 된다. 호문(好文)·호학(好學)의 군주 선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투명했던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선조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가 임금이 되리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종의 7남인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초)의 ..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인조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데타 명분으로 / 西人들의 왕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 별서 유기비(別墅 遺基碑) 비각.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민심이 안정되었다. 왕조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들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의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신경 쓰고 장성한 능양군(인..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광해군 2009.1.11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험난한 세자 책봉 정치 일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요소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일정은 세자 책봉이다. 세자를 조기에 책봉해야 차기를 노린 권력 다툼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렬한 리더들은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후계자 결정을 미룬다. 그러면 차기를 둘러싼 정쟁이 발생해 리더의 권력은 강화되지만 사회는 안으로 곪아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평양성 탈환도의 한 부분. 당시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쓰던 무기들이 잘 묘사돼 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조선 중기의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南師古)가 “원주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했을 때 ..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연산군 2008.11.30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말 갈아탄 신하들 ‘참을 수 없는 옛 군주의 흔적’ 권력은 시장과 같다. 권력자 주변은 시장 바닥처럼 항상 사람들로 들끓기 마련이다. 사람 장막에 갇힌 권력자는 이들이 보여 주는 환상에 도취된다. 권력이 사라지는 날, 이들이 새 권력에 붙어 자신을 비판할 때에야 진실을 보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것이 영원히 반복하는 권력의 속성이자 인간의 속성이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적 362호 연산군 부부의 묘(사진 위쪽). 이곳에 딸·사위의 묘도 있다. 연산군의 외동딸 휘순 공주의 시아버지 구수영은 연산군이 쫓겨난 후 아들 구문경과 강제로 이혼시켰다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재결합시킬 수밖에 없었다. 쫓겨난 군주들에 대해 서술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자..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세조 2008.10.25 악역을 자청한임금 세조 / 시대를 잘못 읽다 리더의 오판이 국가의 비극을 잉태하다 리더에게는 시대를 읽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사회를 이끌어갈 수도, 통합할 수도 없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인물이 권좌에 오르면 그 사회는 큰 불행에 처하게 된다. 단종이 즉위한 해(1452년)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오문(정문에 해당) 쪽에서 바라본 태화전(太和殿)의 모습. 1452년 5월 14일 조선의 제5대 임금 문종이 승하했다. 재위 2년, 한창 때인 39세였다. 『문종실록』은 “신하가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태종 중앙선데이 2008.09.27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군주는 누구나 성군이 되길 원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아야 할 경우가 있다. 태종과 세조가 그랬다. 그들은 악역을 자처했다. 악역을 자처한 군주로서 태종은 성공했고, 세조는 실패했다. 성패를 가른 요인은 무얼까.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의 ‘조선 왕을 말하다’가 추적한다. 악역을 자청한 임금, 태종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다리(箭串橋·전곶교). 1420년(세종 3년) 세종이 태종을 위하여 다리를 놓을 것을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당대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직접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길이 78m로 당시 가장 긴 다리였다. 개국은 했으나 불안.. 2010. 1. 18.
전봉준 심문 기록(공초) 전봉준 供招 전봉준 공초는 전봉준이 1895년 2월 9일(음), 법정의 심문에 답한 재판기록이다. 필사본으로 조선 법부아문에서 편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하여 두 차례의 농민운동을 일으킨 후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기까지의 사정이 자세하게 진술되어 있다. 특히 일본 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하고 있는 것이 농민혁명과 대원군과의 관계로서, 3 ·4 ·5초 문목의 대부분이 이 부분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고부봉기와 두 차례에 걸친 농민운동, 농민군의 인적 구성, 동학과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1차 심문과 진술 [1895.2.9(음)] 문> 이름은 무엇인가? 답> 전봉준이다. 문> 나이는 몇 살.. 2009. 9. 28.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4)/최후 Ⅴ. 전봉준의 최후 1. 동지의 밀고로 순창에서 붙잡히다. 전봉준의 거사는 처음부터 승산이 적은 싸움이었다. 관군과 상대하기도 힘든 싸움인데, 훈련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까지 상대하였으니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농민이 봉기하여 정예화된 정부군을 이긴 예는 없었다. 농민이 전쟁의 주력세력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은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마련할 수가 없으며, 전쟁을 수행할 전략개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지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않으며 소명의식도 부족하다.충청지역에서 전투를 벌일 때 김개남은 전봉준의 지원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력만 키웠을 뿐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지방의 유생과 부호 계층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 2009. 9. 15.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4)/3차기포 Ⅴ. 3차기포1. 청군을 끌어들이는 조정전주성 함락을 보고받은 내무협판 민영준이 5월18일 대신회의에서 청군을 차병할 것을 제기하였다. 민영준은 민비의 친척으로 실권자였다. 이에 영돈녕 김병시 등 대신들은 '비적 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 그들도 우리의 백성이니 마땅이 우리 병사로서 토벌해야한다. 외병을 빌어 토벌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마음을 어디에다 의지할 것인가. 민심도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영준은 고종의 재가를 받아 1894년 6월1일 중신회의에서 차병을 결정한 뒤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에 보낸 민영준의 국서내용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의 한 지역과 백성을 폄훼하는 내용조차 있었다. 조회하는 바는 우리나라 전라도 일대의 태인, 고부 지방 등 민심이 흉하고 .. 2009.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