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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 연산군

by 싯딤 2010. 1. 18.
2008.11.30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말 갈아탄 신하들 ‘참을 수 없는 옛 군주의 흔적’

 

 

권력은 시장과 같다. 권력자 주변은 시장 바닥처럼 항상 사람들로 들끓기 마련이다. 사람 장막에 갇힌 권력자는 이들이 보여 주는 환상에 도취된다. 권력이 사라지는 날, 이들이 새 권력에 붙어 자신을 비판할 때에야 진실을 보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것이 영원히 반복하는 권력의 속성이자 인간의 속성이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적 362호 연산군 부부의 묘(사진 위쪽). 이곳에 딸·사위의 묘도 있다. 연산군의 외동딸 휘순 공주의 시아버지 구수영은 연산군이 쫓겨난 후 아들 구문경과 강제로 이혼시켰다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재결합시킬 수밖에 없었다.
쫓겨난 군주들에 대해 서술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자료의 편파성이다. 죽은 자 이상으로 쫓겨난 군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노산군일기』(단종실록) 『연산군일기』『광해군일기』가 모두 그렇다. 쫓아낸 쪽의 일방적이고 악의적인 기록만 가지고 그 시대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기는 쉽지 않다.

연산군은 즉위 초반인 재위 3년(1497) 마치 자신에 대한 후대의 비난을 예언한 듯한 말을 남긴다.

“유왕(幽王)·여왕(여王)이란 이름이 붙으면 비록 효자나 자애로운 자손일지라도 백세(百世) 동안 능히 고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여러 역사책에 써 놓으면 장차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3년 6월 5일).”

주(周) 유왕(幽王:재위 BC 781~771)은 미녀 포사(褒사)에게 빠져 주 왕실을 무력화하고 춘추시대로 접어들게 했던 용군(庸君)이며, 주 여왕(여王:재위 BC 857~842)은 폭정하다가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쫓겨난 폭군이었다. 연산군이 하지 않은 일까지 역사서에 써 놓아 ‘유왕·여왕’이라고 이름 붙이면 자신이 장차 어떻게 변명하겠느냐는 뜻이다. 연산군은 재위 5년(1499) 8월에도 같은 우려를 했다. 마치『연산군일기』에 자신이 희대의 악한이자 음란한 폭군으로 그려질 것을 예견한 듯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연산군의 흔적 지우기는 그가 쫓겨난 직후 시작됐다. 연산군은 재위 12년(1506) 9월 2일에 쫓겨나는데 여드레 후인 9월 10일 정승 및 김감(金勘)이 중종에게 “연산군이 스스로 지은 시집(自製詩集)과 실록각(實錄閣)에 소장된 ‘경서문(警誓文)’을 다 태워 없애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건의했다. 연산군의 흔적을 지우자는 주청인데, 중종이 허락했기 때문에 그날로 불태워졌다. 김감이 이런 주청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경서문’이 자신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경서문’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한 달 전인 재위 12년(1506) 7월 29일 바쳐졌다. 그날 연산군이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거동하자 영의정 유순(柳洵)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서문’을 바쳤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乾)과 곤(坤)이 제자리가 있는 것이다(天尊地卑 乾坤定矣)”는 『역경(易經)』의 한 구절로 시작하는 ‘경서문’의 뒷부분은 “진실로 이 마음이 변한다면 천지와 귀신이 있습니다. 견마(犬馬)의 정성이 삼가고 삼감[삼감]을 이길 수 없사오니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라고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연산군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의식이 끝나자 도승지 강혼(姜渾)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며 ‘경서문’을 받들고 실록각으로 가 영구히 간직하게 했다. 영의정 유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올렸지만 ‘경서문’에 백관의 이름이 다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23명의 이름만 올라갔는데, 이들이 연산군이 쫓겨나는 날까지 의정부와 육조, 승정원을 장악하고 국정을 운영했던 핵심 실세였다. 한 달 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폭정의 동반자 또는 조력자·앞잡이로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먼 오지로 유배되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중종반정 때 23명 중 화를 당한 인물은 단 세 명뿐이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좌의정 신수근(愼守勤), 그의 동생 형조판서 신수영(愼守英)과 좌참찬 임사홍(任士洪)만 반정 세력에 살해됐다. 나머지 스무 명은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스무 명 전원이 중종을 추대한 공으로 정국(靖國) 공신에 책봉된다. ‘경서문’을 올릴 때의 이들 스무 명의 면면과 직책을 보자.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金壽童),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판윤 구수영(具壽永), 좌찬성 신준(申浚), 판중추(判中樞) 김감, 우찬성 정미수(鄭眉壽), 판중추 박건(朴楗), 예조판서 송질(宋질), 공조판서 권균(權鈞), 도승지 강혼, 우참찬 민효증(閔孝曾), 호조판서 이계남(李季男), 좌승지 한순(韓恂), 병조판서 이손(李蓀),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우승지 김준손(金俊孫), 좌부승지 윤장(尹璋),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 동부승지 이우(李우)’.

연산군이 폭군으로 쫓겨났다면 무사할 수 없는 직책들이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연산군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폭정에 분노해 반정을 준비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은 별명이 ‘지당(至當) 정승’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연산군의 말에는 무조건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만 반복하던 인물들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가지고 무오사화를 일으켜 연산군 폭정의 단초를 열었던 유자광은 반정 정권의 제거 1순위에 올라야 했으나 거꾸로 정국 1등공신에 책봉됐다. 도승지 강혼은 『연산군일기』 12년 7월 5일조에 “연산군이 승정원에 시를 내리면 강혼 등이 극구 찬양하므로 연산군 역시 그 말을 믿어 총애가 더욱 융성해졌다”고 적고 있고, 우부승지 조계형은 반정 당일 수챗구멍으로 도망갔다가 공신에 책봉되자 창성군(昌城君)이란 군호(君號) 대신 수구군(水口君)으로 불릴 정도였다. 좌승지 한순은 여동생이 신수영의 부인인 것을 믿고 조관(朝官)의 머리를 잡아끌 정도로 세도를 부리고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건물을 지을 때 독책(督責)이 성화 같았다는 인물이었다. 유순정을 제외하면 정변이 일어나리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반정 당일 밤 말을 갈아탄 인물들이었다.

연산군이 폐출된 지 20여 일 되는 중종 1년(1506) 9월 24일. 빈청(賓廳)으로 대신들이 모였다. 영의정 유순,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朴元宗)과 유순정·유자광·구수영을 비롯해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 고위 관료들이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합동으로 연산군의 아들 문제를 주청하기 위해서였다.

“폐세자 이황과 창녕 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 및 이돈수(李敦壽) 등을 오래 둬서는 안 되니 일찍 처단하소서.”

세자와 창녕 대군은 왕비 신씨(愼氏) 소생이었고, 양평군과 이돈수는 후궁 조씨 소생이었다. 세자 이황이 열 살이었으니 나머지는 더 어렸는데 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청이었다. 중종은 조카들을 죽이라는 주청에 “이황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고 일단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고, 대신들은 다시 재촉했다.

“전하께서 이황 등에 대한 일을 측은한 마음으로 차마 결단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그 형세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이에게까지 미치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대의로써 결단하여 뭇사람의 마음에 응답하소서.(『중종일기』 1년 9월 24일)”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면’이라는 말은, 혹 이 아이들 중 누가 왕위에 올라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살려면 이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종은 “이황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며 네 형제를 모두 죽이라고 명했다. 그렇게 네 형제는 9월 24일 당일로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열 살짜리 큰형 아래 갓난아기를 갓 벗어났을 세 동생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약사발을 마셔야 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의 『연산군일기』는 사약을 내릴 것을 주장한 구수영에 대해 “구수영은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의 아들)의 사위인데, 그 아들이 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 들어 간사한 아첨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가 미녀를 사방에서 구해 바치자 왕이 혹하여 구수영을 팔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삼으니 권세가 중외를 기울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들 구문경(具文璟)이 연산군의 맏사위였으므로 세자는 며느리의 친동기였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헌문(憲問)’ 편에서 “나라에 도가 있으면 녹봉을 받지만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녹봉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도(道)를 논할 것도 없이 어제까지 임금으로 모셨던 연산군을 배신하고 그 흔적 지우기에 나섰던 것이다. 도대체 연산군 재위 12년의 진실은 무엇일까?
인재들을 죽음으로 내몬 리더의 지적 능력 부족/준비 안 된 군왕
리더는 시대적 소명을 인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높은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연산군에게는 세조의 쿠데타로 형성된 거대한 훈구(勳舊) 세력을 약화시키라는 시대적 소명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를 인지할 만한 지적 능력이 부족했던 연산군은 거꾸로 훈구의 정적이자 자신의 우군인 사림(士林)을 억압했다.
무오년, 서옥에서 바라보다(73Χ50cm):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항상 권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 간의 긴장은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를 계기로 폭발했다. 필화(筆禍)사건이 터지면 대(代)를 이은 숙청과 보복의 역사를 낳아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승우(한국화가)
연산군 이륭(李륭)처럼 축복 속에 태어난 경우도 찾기 어렵다. 성종 7년(1476) 11월 그가 태어나자 도승지 현석규(玄碩圭) 등은 “개국 이후 문종과 예종은 모두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시어서 오늘 같은 경사는 있지 않았습니다”고 축하했다. 단종을 제외하고 이륭만이 궐내에서 탄생한 것이다. 종친·대신이 모두 입궐해 축하하자 성종은 대사령을 내려 백성과 기쁨을 함께했다. 성종은 재위 9년(1478) 7월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에게 말 1필을 내려줬는데『성종실록』이 “강희맹의 집에서 자라던 원자가 항상 준마(駿馬) 보기를 좋아하므로 내려준 것이다”고 쓴 것처럼 원자를 위한 것이었다.

강희맹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외손자로서 세종의 조카였다. 세 살 때부터 말을 좋아했던 연산군을 성종은 ‘학자(學者) 군주’로 키우고 싶었다. 연산군이 열 살 때인 성종 16년(1485) 12월 형조판서 성준(成俊)이 “세자가 지금 『소학(小學)』『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 등의 책을 읽었으니 서연(書筵)에 청하여 앞으로는 뜻까지 해석하게 하소서”라고 청했다. 서연은 세자가 사부나 빈객 같은 스승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자리이다. 열 살 때 경서들을 읽을 줄은 알았으나 뜻은 해득하지 못했다. 1년 후인 이듬해 11월 서연관(書筵官)이 성종에게 “세자가 『논어』를 다 읽었습니다”고 보고하자 “이제부터『맹자(孟子)』를 읽히도록 하라”고 명한다. 1년 전에도 읽었다는『논어』를 이제야 다 읽었다는 보고는 세자의 학습이 지지부진함을 말해 준다. 과연 성종은 재위 23년(1492) 1월 승정원에 직접 전교를 내려 “세자가 지금 17세지만 문리(文理)를 해득하지 못해 내가 심히 근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최고의 학자들에게 조강·주강·석강으로 하루 세 번씩 집중 교육을 받았음에도 연산군은 17세까지 문리를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종은 세자의 학습 순서를 바꾸었다. 원래 사서(四書) 등을 통해 유학적 세계관을 형성한 다음 구체적 사례가 담겨 있는『사기(史記)』 같은 역사서로 넘어가는 것이 세자의 학습 순서지만 역사서를 먼저 보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동부승지 조위(曺偉)가 성종 23년 “『사기』를 읽으면 문리가 쉽게 통합니다”며 역사서를 먼저 읽게 하자고 제안했고, 성종도 “그렇다. 영의정이 일찍이 ‘『춘추(春秋)』를 읽히는 것이 옳다’고 하였고, 나도 또한『춘추』는 선악을 포폄(褒貶:옳고 그름을 판단함)한 책이며 치란과 득실이 담겨져 있으니 역사라고 생각한다(『성종실록』 23년 1월 29일)”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연산군의 학문이 진취했다는 기록은 없고 “왕(연산군)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를 통하지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학습은 지지부진했다. 연산군은 시(詩)를 좋아한 반면 경전(經典)을 싫어했는데, 이는 유교국가 조선의 국왕으로는 큰 결점이었다. 호문(好文)이자 호색(好色)의 군주였던 성종이 서른여덟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연산군은 1494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했으나 왜 유교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즉위 직후 연산군은 수륙재(水陸齋)를 놓고 유신(儒臣)들과 처음 충돌한다. 성종의 영혼을 위한 불교의 천도제였으나 대간에서 “대행 대왕이 불도를 본디 믿지 않으셨는데, 이제 칠칠일에 수륙재를 지낸다면 효자가 어버이를 받드는 뜻이 아니니 지내지 마소서”라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지내려다 홍문관과 승정원까지 반대하자 후퇴했다가 다시 강행하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한마디로 국왕이 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게다가 왕이 된 이후 학문을 더욱 등한시했다. 연산군 6년(1500) 10월 사헌부에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는 경연(經筵)에 나오시는 날이 얼마 되지 않아 6년 동안『통감강목(通鑑綱目)』 1부(部)도 아직 다 진강(進講)하지 못했습니다”고 상소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경서(經書)는 물론 역사서도 읽지 않다 보니 국왕 자리가 지닌 고도의 정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연산군의 무지를 파고든 사건이 재위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연산군 4년 7월 1일 윤필상·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유자광(柳子光) 등의 대신들이 국왕이 거처하는 편전(便殿)의 정문인 차비문(差備門)으로 와 ‘비사(秘事)’를 아뢰겠다고 청하자 연산군의 처남이자 도승지였던 신수근(愼守勤)이 안내했다. 예문관 사초 담당자인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참석하려 하자 신수근이 “참여해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막았다. 당시 조정은 비사를 아뢰겠다고 요청한 훈구 세력과 이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사림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훈구 세력의 약화가 자신에게 부과된 시대적 소명이었으나 사림의 간쟁(諫爭)을 귀찮아했던 연산군은 오히려 훈구 쪽으로 경도돼 있었다.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洪士灝)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愼克成)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으나 외인(外人)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군사작전 하듯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다. 홍사호 등이 달려간 곳은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풍질(風疾)을 치료하고 있던 경상도 청도군(淸道郡)이었다. 의금부 도사가 나타나자 김일손은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라고 예견했다. 처음 문제가 된 사초는 ‘세조가 의경세자(덕종)의 후궁인 귀인 권씨(權氏) 등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세조가 며느리들을 탐했다고 의심할 만한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은 국문에서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고 말해 단독 소행으로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는 유자광 등이 ‘비사’를 알릴 때의 계획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 허봉(허봉)은 ‘유자광전(柳子光傳)’에서 ‘유자광은 옥사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해 밤낮으로 단련하는 방법을 모색했다’면서 소매 속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꺼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추관(秋官)들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지칭해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친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답계역(踏溪驛)에서 잘 때 꿈에 초(楚)나라 의제(義帝)가 나타나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고 하소연하므로 꿈에서 깨어나 의제에게 조문했다는 내용의 글이다.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살해당한 달이므로 의제는 단종을 뜻하는 것이다. ‘술주시’는 중국 남북조 때 송(宋)의 유유(劉裕:362~422)가 동진(東晉) 공제(恭帝)의 왕위를 빼앗고 죽인 것을 애도한 시로서 이 역시 세조가 단종을 찬시(簒弑)했음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유자광전’은 “유자광이 주석하면서 글귀를 해석해 왕이 알기 쉽게 했다”고 적고 있고,『연산군일기』도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 아뢰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연산군은 유자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연산군은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세 사관(史官)을 대역죄로 능지처사했는데, 유자광 등의 훈구 세력이 자신을 이용해 정적인 사림 세력을 제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사림이 왕권 강화와 훈구 세력의 약화에 도움이 되는 세력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정국을 바라본 그 자체가 그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무오사화 이후 왕권은 크게 강해졌지만 훈구라는 바다에 떠 있는 왕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강화된 왕권만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적을 백성의 적으로 기록한 ‘붓의 권력’ 사대부/부풀려진 폭정
객관적 사실(fact)과 주관적 의견(opinion)은 다르다. 그러나 세상에는 늘 의견을 사실로 만들려는 세력이 존재해왔다. 의견을 생산해 사실처럼 유통시키려면 권력과 기구가 필요하다. 대중들은 때로 여기에 속아 오인하지만 대부분 곧 진실이 드러난다. 때로는 의견이 수백 년간이나 사실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연산군이 그런 경우다.
연산군이 이궁(離宮)을 세우려 했던 장의문(藏義門) 밖 장의사 터의 당간지주. 지금의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다.
『연산군일기』는 사실(fact)을 기술한 부분과 사관(史官)의 의견(opinion)을 개진한 부분을 분리해서 읽지 않으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사관의 의견을 사실로 읽다 보면 사관의 의도대로 연산군을 해석하게 된다. 연산군은 국왕과 사대부가 공동 통치한다는 신흥사대부들의 건국이념을 부정했다. 연산군이 사대부 계급의 공동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 대해서도 폭군이었는가?

사관은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다고 비판한다. 중종 즉위일 『중종실록』은 “사신은 말한다(史臣曰)”라면서 “사직북동(社稷北洞)에서 흥인문(興仁門:동대문)까지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표를 세우고, 인왕점(仁王岾)에서 동쪽으로 타락산(駝駱山)까지 민정(民丁:백성)을 많이 징발하여 높은 석성(石城)을 쌓았다(『중종실록』1년 9월 2일)”라며 민가 철거를 폭정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연산군은 실제로 민가를 철거했다. 그는 재위 9년(1503) 11월 승지들에게, “궁궐 담장 아래 100척(尺) 내에 집을 짓는 것은 법에서 금하고 있으므로, 법을 어기고 집을 지은 것에 대해 해당 관사에서 보고해야 하는데 아뢰지 않는 것은 원래부터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철거 대상은 국법에서 주택 건축을 금하고 있는 궁궐 담장 아래 100척 이내, 즉 30m 이내의 주택들이었다. 게다가 강제 철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먼저 병조·공조·한성부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 ‘집 주인들을 모아 철거의 뜻을 효유’시켰다. 담당 부서의 고위직들이 먼저 설득작업에 나서게 한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철거되는 사람들에게 비록 넉넉히 주지는 못하지만 면포(綿布:무명)를 조금씩 나눠주어 나라의 뜻을 알게 하라”라고 명했다. 병조판서 강귀손(姜龜孫)은 이 명에 따라 철거 대상 주택을 4등급으로 나누어, “큰집(大家)에는 무명 50필, 중간집(中家)에는 30필, 작은집(小家)에는 15필, 아주 작은집(小小家)에는 10필씩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보상책을 보고했다.

철거대상은 11월 6일 사헌부 장령 이맥(李陌)이, “대궐을 내려다보는 집은 마땅히 철거해야 하지만 그중 오래된 집들도 함께 철거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대궐을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있는 불법 주택들이었다. 사신은 이에 대해 연산군이 후원에서 나인들과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백성들이 알까 염려해서 “산 아래 인가를 헐기에 이르렀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철거한 창덕궁 후원 동쪽 인가들과 성종의 후궁들이 거주하는 자수궁(慈壽宮)과 수성궁(壽成宮) 부근,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불법 주택들은 철거할 만한 사유가 있는 주택들이었다. 연산군은 “궁궐 담 밖의 집 건축은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법을 돌아보지 않고 집을 지었으니 마땅히 법으로 논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금 도리어 빈 땅을 떼어 주었다”라고 대토(代土)까지 마련해 주었다. 게다가 “집을 비운 백성들이 편하게 거주할 곳(安接處)을 마련해 아뢰어라”라고 명해서 한성 판윤(判尹:시장) 박숭질(朴崇質)이 “도성 안의 경저(京邸)나 빈 집을 원하는 대로 빌려 거주하게 하려는데, 만일 빌리려고 하지 않으면 관에서 독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책을 보고했다.

경저란 지방의 경저리(京邸吏)가 머물던 지방관아의 서울 출장소였다. 연산군은 또한 “심한 추위에 의지할 곳이 없다 해서 봄까지 기다려 철거하게 했으니 역시 혜택을 많이 받은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일정액의 보상금과 대토,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봄까지 철거를 연기한 것을 폭정(暴政)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래도 대간에서 계속 반대하자 연산군은 속내를 드러냈다. “집을 헐리고 원망하며 근심하는 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아는 조사(朝士:벼슬아치)들도 법을 범하면서 집을 지은 자가 많으니 헌부(憲府:사헌부)에서 당연히 죄주기를 청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도리어 말을 하는 것이냐?(『연산군일기』9년 11월 9일)” 사헌부가 백성들을 빙자하지만 속으론 벼슬아치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연산군의 민가 철거는 백성들보다는 벼슬아치들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중종실록』의 사신(史臣)은 또 “광주(廣州)·양주(楊州)·고양(高陽)·양천(陽川)·파주(坡州) 등의 읍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모두 쫓아내어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살게 했다(중종 1년 9월 2일)”라고 비난했다. 『연산군일기』10년(1504) 4월조는 지언(池彦)·이오을(李吾乙)·미장수(未長守) 등이 ‘위에 관계되는 불경한 말’을 한 사건이 발생하자 다섯 고을을 혁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 년 후인 11년 7월 광주 판관(光州判官) 최인수(崔仁壽)를 파직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을 보면 다섯 고을 혁파는 엄포였든지 일시적 조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이궁(離宮:행궁)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재위 11년 7월 연산군은 “장의문(藏義門) 밖이 산과 물이 다 좋아 한 조각 절경이므로, 금표(禁標)를 세우고 이궁 수십 칸을 지어 잠시 쉬는 곳으로 삼고자 하니, 의정부와 의논하여 지형을 그려서 바치라”라고 지시했다. 영의정 유순 등은 즉각 “상의 분부가 윤당하십니다”라고 찬성했으나, 사관은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양주·포천·영평에서, 서남으로는 파주·고양·양천·금천·과천·통진·김포 등에 이르는 땅에서 주민 500여 호를 모두 내보내고, 내수사의 노자(奴子)를 옮겨서 채우고, 네 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킴)를 하니 초부·목동의 길이 끊겼다.(『연산군일기』 11년 7월 1일)”라고 비판했다. 동북 4고을, 서남 7고을 등 모두 11고을의 백성을 내쫓은 듯이 비판했지만 그 숫자는 모두 500여 호에 불과했다.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양주 한 고을의 호수(戶數)만 1만1300여 호에 인구는 5만2000여 명이라고 전한다. 11고을의 이름을 모두 든 것은 마치 이 백성들이 모두 내쫓긴 것처럼 호도하려는 사관의 의도였다.

그해 7월 22일 연산군은 추석을 앞두고, “이제부터 모든 속절(俗節:명절)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에게 2일을 한하여 제사 지내러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되 마구 다니지는 못하게 하라”라고 명절 출입을 허용했다.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했다는 것도 사관의 과장이다. 궁궐 근처 불법 가옥들도 보상해준 연산군이 이궁 건축 예정지 안의 민가에 보상해주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이궁을 설치하려 한 이유에 대해 연산군은 “무신년(성종 29년)에 대비께서 편찮으셔서 부득이 인가로 피어(避御)하셨으니 어찌 국가의 체모에 합당하겠는가?”라면서 “궐내에 온역(瘟疫:전염병)이라도 발생하면 옮겨 거처할 곳이 있어야 하고 또 사대부일지라도 집 몇 채를 가졌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어찌 별궁(別宮)을 만들 수 없겠는가?(『연산군일기』 10년 7월 28일)”라고 말했다.

또한 “경궁·요대(瓊宮·瑤臺:구슬 등을 박은 화려한 궁궐)를 만든다면 옳지 않으나, 이는 부득이한 바이다”라고도 말했다. 이때 만들려던 이궁의 규모는 ‘큰 집 50칸(大家五十間)’이었으니 99칸 민간 부호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소박한 궁이었다. 이때 예정된 이궁 터가 장의문 밖 장의사(藏義寺) 터인데, 지금의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다.

그러나 연산군은 끝내 50칸짜리 이궁도 짓지 못했지만 11고을 백성들을 다 내몰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게 성군(聖君)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관의 비난처럼 폭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깊이 근심하고/임금(上)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한다/때로 진실한 충성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매일 가짜 충성을 막으리라 생각한다(深病民有飢色, 痛恨凌上風俗, 時思欲見其實忠, 日念使杜其詐誠)(『연산군일기』 6년 8월 11일)”라는 어제시(御製詩)를 썼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근심하고 사대부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하고 가짜 충성을 경계했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붓을 잡고 있는 사대부들에게 희대의 폭군으로 몰린 것이다.
조선 최고 ‘음란한 임금’은 反正 사대부들의 날조/황음무도 논란
정적(政敵)에 대한 탄압은 거꾸로 그를 도와주는 결과로 나타나기 쉽다. 정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려면 도덕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연산군일기』와『중종실록』의 사관들은 연산군을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묘사해 도덕적으로 매장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현재까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월산대군 부부 묘. 뒤의 봉분이 부인 순천 박씨의 묘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강간해 박씨의 동생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일 가능성이 크다.
연산군 9년(1503) 6월 음악 담당 기관인 장악원(掌樂院)에서 가야금 타는 기생 광한선(廣寒仙) 등 4명의 명단을 연산군에게 보고했다.『연산군일기』는 왕이 술에 취해 임숭재(任崇載)에게 “내가 광한선을 취하고 싶은데, 외부에서 알까 두렵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임숭재가 세조 때도 네 명의 기생이 궁중에 출입했다며 “선상기(選上妓:지방에서 올린 기생)의 출입을 외인(外人)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부추기자 연산군이 광한선을 가까이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유명한 한 일화를 덧붙인다.

“이보다 앞서 왕이 미행(微行)하면서 환관 5, 6인에게 몽둥이를 쥐어주어 정업원(淨業院)으로 달려가 늙고 추한 비구니(尼僧)를 내쫓고 연소하고 자색 있는 7, 8인만 남게 해 간음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다.”

소문이 두려워 기생도 꺼리던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시끌벅적하게 때려 내쫓고 젊은 비구니를 취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중종실록』은 “처음 전전비(田田非)·장녹수(張綠水)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거기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 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백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천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렀다”라며 연산군이 1000명의 후궁을 거느린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니 양기(陽氣) 보양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연산군일기』9년(1503) 2월 8일자는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老無病)을 찾아 내수사로 보내라”는 전교를 기록하면서 “백마 고기가 양기를 돕기 때문이다”라는 논평을 덧붙였다. 양기 보양에 늙은 말을 쓸 리 없다는 상식도 무시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있다. 흥에 겨워 재물을 마구 쓰며 즐기는 것을 가리키는데 연산군이 만든 흥청(興淸)이 어원이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흥청들과 대궐이나 길가에서 집단 혼음(混淫)을 벌인 것처럼 자주 묘사했다. 그러나 흥청은 연산군의 혼음 대상이 아니라 국가 소속의 전문 음악인들이었다. 운평(運平)·광희(廣熙)도 마찬가지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12월 “흥청이란 바르지 못하고 더러운 것을 씻으라는 뜻이고, 운평(運平)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모든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은 모두 광희라고 칭하라”고 명했다. 광희부터 설명하면『경국대전』예전(禮典)에는 악생(樂生)은 297명, 악공(樂工)은 518명이라고 규정돼 있다. 이들 국가 소속의 악생과 악공들을 높여서 부른 새 명칭이 광희였다.

월산대군 묘에 있는 신도비(神道碑). 신도비는 정2품 이상으로 후세의 사표가 될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다. 풍수가에서 동남쪽을 신도라고 하기에 동남쪽에 주로 세운다.
연산군이 재위 11년(1505) “모든 도(道)의 고을들은 모두 운평을 두라”고 말한 것에서 운평은 지방 관아 소속 음악인들임을 알 수 있다. 운평 중 음악 실력이 뛰어나 서울로 뽑혀 올라온 이들이 흥청이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 “흥청악(興淸樂)은 300명, 운평악(運平樂)은 700명을 정원으로 하고, 광희(廣熙)도 증원하라”고 명하는데, 이들 흥청악·운평악·광희악을 통칭 삼악(三樂)이라고 불렀다. ‘○○합창단’ 하는 식의 이름이다.『경국대전』은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선상기는 여기(女妓) 150명, 연화대(蓮花臺:가무극 배우) 10명, 여의(女醫)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뽑힌 선상기 중 뛰어난 음악인이 흥청이다.『연산군일기』는 재위 12년(1506) 3월 “흥청악 1만 명을 지공(支供)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고 명했다고 써서 흥청악이 1만 명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11년 4월 “흥청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라고 묻자 장악원은 ‘정원 300명 중 93명을 채웠고 207인을 못 채웠다’고 답했다. 93명을 겨우 채운 흥청이 11개월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니 이 역시 사관의 창작이다. 삼악(三樂) 모두가 여성인 것도 아니었다. 연산군 12년(1506) 광희악(廣熙樂) 김귀손(金龜孫)이 운평 관홍군(冠紅群)을 강간하려고 폭력을 행사했다가 처벌받은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삼악에 대해 사대부들이 분노한 것은 자신들과 접촉을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그간 여악(女樂)은 사대부들의 예비 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산군은 재위 11년 1월 부모의 장수를 비는 헌수연(獻壽宴)을 제외하고 여악들을 조사(朝士:벼슬아치)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광희를 사천(私賤:사노비)으로 만들어 첩을 삼을 수 없게 했다. 연산군은 흥청을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했다.

재위 11년 2월에는 흥청악 공연 때 “비록 제조(提調)일지라도 의자를 치우고 땅에 앉아야 한다”고 명했다. 이보다 앞선 재위 8년(1502) 3월 연산군은 “이제부터 궐문 밖으로 행행(行幸)할 때에 여악(女樂)을 쓰지 말라”고 명하고 신하들에게 내려주는 각종 잔치 때도 남악(男樂)만 내려주었다. 그러자 같은 해 10월 정1품 영사(領事) 성준(成俊)이 항의한다.

“지금 여악은 하사하지 않고 남악만 하사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여악을 사용했지 남악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지금은 비록 술을 내려도 쓸쓸할 뿐 즐거움이 없습니다. 마셔도 취하지 않으면 위로하는 뜻이 아닐 것이니 조종(朝宗)의 고사를 따르소서.(『연산군일기』 8년 10월 28일)”

잔치 때 여악을 내려달라는 주청에 대해 연산군은 “대개 조관(朝官:벼슬아치)들이 여기(女妓)를 담연(淡然:욕심이 없음)하게 보지 않으니 한자리에 섞이게 할 수 없었다”면서도 앞으로는 여악을 내려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성준은 “성상께서는 사용하지 않으시면서 신들에게만 사용하게 하시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흥청은 연산군보다 사대부들의 색탐(色貪)의 대상이었다.

사대부들이 요순(堯舜) 임금으로 묘사한 연산군의 부친 성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에게서 16남21녀를 낳았다. 1000명의 후궁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된 연산군은 4남3녀에 불과했다. 왕비 소생의 2남1녀를 빼면 후궁 조씨 소생의 두 서자와 장녹수와 정금(鄭今) 소생의 두 서녀(庶女)가 있었을 뿐이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백모(伯母)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고 주장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관은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연산군은 서른한 살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의 부인이 남편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은 풍습과 비교해 보면 세조 12년(1466) 열세 살의 나이로 월산대군과 혼인한 박씨가 사망할 때 나이는 53~55세 정도다. 당시 이 나이의 여성이 잉태할 수는 없었다.

연산군은 박씨가 사망하기 한 달 전에 시어머니 소혜왕후의 와병 때 정성을 다했고, 세자(이황)를 자기가 낳은 자식같이 돌보았다면서 절부(節婦)로 표창하고 승평부(昇平府) 대부인(大夫人)으로 승격시켰다. 절부 표창 기사 아래 사신은 “박씨에게 특별히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명하고 드디어 간통을 했다”라고 적고 있으니 아무리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해도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씨의 부친 박중선은 공신이고 또 큰이모가 세종비 소헌왕후였다. 박원종도 이런 이유로 왕실 일가 대접을 받았다. 성종이 무과 출신인 박원종을 승지로 임명하자 대간은 “외인(外人)은 모두 박원종을 발탁한 것이 월산대군 부인 때문이라고 합니다”라고 비판했으나 『성종실록』의 사관은 성종이 형수를 간음했다고 쓰지는 않았다. 연산군도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박원종에게는 마음대로 벼슬을 고르게 할 정도로 우대했다.

시에는 능하지만 역사서는 등한시했던 연산군은 반란은 최측근에서 일어나기 쉽다는 사실에 무지했기에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한 자신이 역사상 가장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기록될 줄도 전혀 몰랐다.
※참고서적:『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지식산업사, 2003)『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변원림, 일지사, 2008)
文風에 갇힌 사대부, 武人 군주의 꿈을 꺾다/崇武정책의 좌절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과 경제력과 군사력이 삼박자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성리학에 몰두하면서 군사를 비천한 것으로 취급했다. 외적의 침략에 대해서도 군사적 응징이 아니라 국왕의 근신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산군과 문신은 군사 문제로 자주 충돌했다. 연산군이 쫓겨나면서 국방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는 더 커진다.
연산군 범사냥-상살이요(46Χ61cm): 상살(上殺)은 짐승을 쏠 때 왼쪽 표(어깨 뒤 넓적다리 앞의 살)를 쏘아 오른쪽 우(어깻죽지 앞의 살)로 관통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말린 제물로 만들어 종묘에 천신했다. 오른쪽 귀 부분을 관통하는 것을 중살이라고 하는데 빈객을 대접하는 데 썼다. 임금의 사냥은 종묘에 천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연산군일기』와『중종실록』은 연산군을 사냥광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연산군일기』는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혹은 사냥하거나 혹은 술 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고 비난하고 있고,『중종실록』은 “도성(都城) 사방 100리 이내에 금표(禁標)를 세워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따로 응사군(鷹師軍) 1만여 명을 설치하여 사냥할 때 항상 따라다니게 하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비난의 본질은 연산군의 숭무(崇武)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2년(1496) 4월 친시(親試)에서 직접 낸 책문(策問)으로 “우리나라는 남쪽으로 섬 오랑캐와 이웃이고 북쪽으로는 야인(野人:여진족)과 접했다”면서 그 대책을 물었다. 조선은 여진족 추장들에게 벼슬을 주고 귀화하면 혼인을 시켜 주는 등의 회유책을 썼지만 이들은 변경에 틈만 보이면 습격했다.

연산군 5년(1499) 4, 5월에는 함경도 삼수군(三水郡)과 평안도 벽동진(碧潼鎭) 등 3개 지역을 습격해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고 우마와 백성을 사로잡아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즉각 대신들과 의논해 정벌을 결정하고 5월 12일 우의정 성준(成俊)과 좌찬성 이극균을 서정장수(西征將帥)로 임명해 2만 병력을 준비시켰다. 그러자 5월 14일 홍문관 부제학 최진(崔璡)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천문(天文:혜성 출현)이 변하는 변괴가 발생한 데다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들었으니 정벌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최진 등은 전가의 보도를 꺼냈다. “하늘의 견고(譴告:경고)가 심한 것이므로 전하께서는 몸을 수행하면서 매일 근신해야 하는데 어찌 백성을 괴롭게 하고 군중을 동원해 멀리 떨어진 산하에서 소추(小醜:여진족)와 더불어 종사해서야 되겠습니까?”라는 것이다. 혜성과 가뭄은 모두 하늘이 임금에게 경고하는 것이므로 근신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은 “서정의 거사는 진실로 농사의 풍흉을 보아야 하지만 죽고 사로잡힌 우리 백성이 너무 많으니 지금 만약 정벌하여 많이 참획(斬獲:목을 베고 사로잡음)하면 저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침략을 중지할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5월 17일)”고 강행 의사를 밝혔다.

연산군은 다시 어서(御書)를 내려 “오직 변방 백성이 피살당하고 사로잡혀 간 것에 분한(忿恨)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서정에 나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최진 등은 “서방의 도둑들도 하늘이 전하에게 경계하고 근신하라고 시킨 것이므로 마땅히 두려워하고 근신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도리어 병혁(兵革)의 일을 일으켜 천위(天威)를 모독하십니까(『연산군일기』5년 5월 29일)”라고 반대했다. 여진족이 습격한 것은 하늘이 연산군에게 경고한 것이므로 근신해야지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습격에 대한 응징은 물론 사로잡혀 간 백성의 귀환 대책은 찾을 수 없었다. 변경에 사는 백성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투였다.

연산군은 “지금 서정은 오직 백성을 사랑(愛民)하기 때문이다”고 재차 호소했으나 대간에서 극심하게 반대하자 대신들도 점차 주저하게 되면서 서정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해 9월 4일 여진족은 다시 평안도 이산(理山)의 산양회진(山羊會鎭)을 공격해 100여 명을 잡아가고, 또 벽동군 아이진(阿耳鎭)을 습격해 갑사(甲士) 김득광(金得光) 등 9인과 말 12필을 약탈해 갔다. 연산군은 통탄했다. “지금 사변을 보니 진실로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 전일 재상들의 의논을 구하자 ‘안으로 덕스러운 덕정(德政)을 닦는 것뿐입니다’고 했는데, 하늘의 재변이라면 하늘의 경계에 근신하면서 덕정을 닦아 없앨 수 있겠지만, 이런 완흉(頑凶)한 무리가 침략을 그치지 않는데 어찌 덕정으로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5년 9월 10일)

연산군은 “저들이 오늘 몇 사람을 잡아가고 내일도 몇 사람을 잡아갈 것이니 어찌 앉아서 구경하며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내년에 정벌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 전에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강무(講武)에 나서기로 했다. 강무는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이었다.

그러자 좌참찬 홍귀달(洪貴達)이 “이름을 강무라 하지만 실은 사냥하는 것입니다”면서 “선왕(先王)의 적자(赤子)들이 온통 적에게 살해되고 잡혀갔는데 그 자제들을 구휼(救恤)하지 않고 사냥해서 그 제물로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선왕·선후(先后)께서 어찌 안심하고 이를 흠향하겠습니까?(『연산군일기』 5년 9월 16일)”라고 반대했다.

홍문관 부제학 최진은 외적의 습격도 하늘의 경계라면서 그 대책으로는 “두려워하면서 몸을 닦아야(恐懼修省)할 뿐 강무를 정지하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연산군은 “강무 역시 백성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9월 26일)”며 강행했다.

연산군은 재위 7년(1501) 10월 “근래 오랫동안 군사 사열(査閱)을 폐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해이해질까 두려워 사냥(打圍)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훗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황제들이 정기적으로 만주 지역으로 가 사냥한 것을 ‘사냥을 준비하며 무예를 연습한다’는 뜻의 ‘비렵습무(備獵習武)’라고 불렀던 것처럼 연산군에게 사냥은 군사훈련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강무든 사냥이든 군사를 움직이는 것에 모두 반대하면서 오직 임금의 근신만 요구했다.

재위 6년이 되자 서정 반대가 잇따랐다. 대간뿐 아니라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같은 대신들과 도원수 성준까지 반대론에 가세했다. 연산군은 성준에게 “서정하기로 결정해놓고 토벌하지 않으면 그 기간에 적이 반드시 변경을 침범해 우리 백성을 많이 잡아갈 것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따졌다. 성준은 다시 명년까지 기다려 정벌하자며 연기론을 제시했는데, 말이 연기지 사실은 포기였다.

서정을 하지 않으려면 방어 태세라도 잘 갖추어야 했다. 연산군 7년(1501) 5월 평안도 절도사 김윤제(金允濟)가 “금년 도내가 약간 풍작이 들었으니, 청컨대 먼저 이산에 장성을 쌓아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야 합니다”고 치계(馳啓)했다. 산양회진 등이 있어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이산에 장성을 쌓자는 말이었다.

이때 장성 축성에 찬성하면서 좌의정 성준이 한 말은 대간들이 왜 축성에도 반대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조정 신하들은 남쪽 사람이 많은데, 인부를 뽑아 부역을 시키면 그 폐단을 받을 것을 꺼려 극력 저지하는 것입니다.”(『연산군일기』 7년 5월 25일)

성준의 말에 홍문관에서는 “성준이 ‘조정에는 남도 사람이 많아서 자기 집의 종이 부역에 나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 정지할 것을 청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입니다”고 반박했다. 성준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고 피혐하자 연산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홍문관원을 국문했다. 그 전에도 축성 이야기가 나오면 대간에서는 무조건 반대했는데 연산군은 “성을 쌓지 않았다가 후에 만약 일이 생기면 너희가 그 과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연산군일기』5년 7월 12일)”고 꾸짖기도 했다. 연산군은 군사를 백안시하는 이런 문풍(文風)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문신들은 병역의 의무 대신 군포(軍布)를 받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실시해 조선의 국방력을 무력화했다. 임진왜란의 비극은 이때 예고된 것이었다. 연산군이 “만약 무사(武事)를 미리 연습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하면 붓을 쥐고 대응하겠는가?(『연산군일기』7년 10월 2일)”라고 말한 것이 90여 년 후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뜻이 옳아도, 고립된 권력은 실패한다/ 友軍 없는 군주
정치는 기본적으로 세력관계다. 연산군은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공신들의 빈자리에 좋든 싫든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을 배치해 우군으로 삼아야 했으나 갑자사화 와중에 사림까지 제거하는 우를 범했다. 공신들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쫓아냈고 사림들은 붓으로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낮에는 요순(堯舜)이요 밤에는 걸주(桀紂)’라는 평을 들었던 성종이 재위 8년(1477) 대비들과 짜고 왕비 윤씨를 폐위하려 할 때 대신들이 우려한 것은 원자(元子:연산군)였다. 왕비를 폐했다가 원자가 장성하면 “그때는 후회해도 미칠 수없을것입니다(『성종실록』8년 3월 29일)”라는 우려였다. 그러나 성종은 “큰일을 당했는데 어찌 뒷날을 생각하겠는가”라고 반박했다.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성종은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시킨 후 재위 10년(1479)에는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13년(1482)에는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게 했다. 모친을 죽였으면 그 아들을 폐하는 것이 훗날의 비극을 방지할 수 있는 차선책이었지만 성종은 이듬해 14년(1483) 정월 원자를 왕세자로 책립해 원자의 지위는 흔들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했다. 연산군은 언제 모친의 비극을 알았을까? 조선 중기 김육(金堉)이 편찬한『기묘록(己卯錄)』은 연산군이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를 생모로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았다는 것이다.『연산군일기』12년(1506) 4월조는 연산군이 미복(微服)으로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참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썼으며,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도 ‘열조통기(列朝通紀)’에서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년(1495) 4월 승정원에 “선왕 때 폐비의 묘에 어떻게 묘지기를 정해 지키게 했는가?”라고 물어서 이미 모친의 비극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해 9월에는 13년째 전라도 장흥에 유배되어 있던 외삼촌 윤구와 외할머니 신씨를 석방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고 나서 복수에 나선 사건이 아니었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선 정치구조를 바꾸려는 의도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재위 10년(1504) 3월 엄씨와 정씨를 타살한 것이 시발로 알려져 있었지만 재위 9년 9월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 때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이 내린 회배주(回盃酒)를 반 이상 엎질러 연산군의 옷을 적신 작은 사건이 시작이었다. 이세좌는 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국문 끝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은 이세좌를 이듬해 3월 석방했으나 그달 11일 경기관찰사 홍귀달(洪貴達)이 세자빈 간택을 위한 간택령 때 손녀가 병이 있다면서 “지금 비록 입궐하라는 명이 있어도 입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이세좌와 홍귀달을 불경죄로 모는 한편 그해 3월 24일 승정원에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승정원일기』를 상고해 보고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병합해 거대한 폭풍을 일으켜 공신세력을 무너뜨릴 계획이었으나 아무도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3월 30일 “위를 업신여기는 풍조를 개혁하여 없애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면서 “이세좌는 선왕조 때 큰일을 당했을 때 극력 간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리고 홍귀달도 그해 6월 교수형에 처했다. ‘선왕조 때 큰일’이란 물론 모후(母后)에게 사약을 들고 간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세좌는 부친 이극감(李克堪)뿐만 아니라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 등의 백·숙부가 모두 봉군(封君)된 거대 공신 가문이었다. 연산군은 나아가 공신들의 세력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연산군이 귀양 가서 죽은 강화도 교동도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이곳엔 연산군 부부상이 걸려 있다. 연산군이 민간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됐음을 말해 준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5월 7일 공신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차지했다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 날 “국조(國朝) 공신 중에 자신이 스스로 공을 이룬 자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공으로 얻은 자도 있다”면서 ‘개국 이후 여러 공신의 공적을 경중으로 나누어 아뢰라’고 명했다. 사관은 연산군이 연락(宴樂)에 빠져 돈이 부족해지자 ‘여러 공신의 노비·전지를 도로 거두려 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연락 때문에 돈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공신들의 물적 기반을 해체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산군은 5월 10일 여러 『공신초록(功臣抄錄)』을 내리면서 “내 생각으로는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은 그 노비와 전토를 회수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공신들의 세습 노비와 토지들을 기한을 정해 환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연산군의 말이라면 ‘지당하옵니다’만 읊조리던 지당정승 유순(柳洵)도 이 조치에는 반대했다. 태종도 신하들의 보필로 개국했기 때문에 공신을 책봉하고 노비·전토를 하사해 “영원히 상속하도록 하셨다”면서 “지금 다시 환수하려면 7, 8대나 전해져 온 자손들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반드시 인심이 소란하고 우려할 것입니다(『연산군일기』10년 5월 10일)”라는 것이었다. 지당정승 유순까지 반대하자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의 것도 환수하지 말라”고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법 제정을 통한 일괄 환수가 불가능해지자 연산군이 선택한 것이 개별적 재산 몰수였다. 연산군은 폐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윤필상·이극균·성준·권주 등 생존 대신들을 사형시키고,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 등 사망한 대신들은 부관참시했는데, 이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재산 몰수가 뒤따랐다. 적개·좌리공신이었던 윤필상의 재산에 대해 호조에서 “집이 다섯 채인데, 재물이 매우 많으니 한성부와 의논하여 몰수하고 역군(役軍) 20명을 정하여 옮기게 하소서”라고 청할 정도였다. 연산군의 재산 몰수는 내관들도 비켜가지 않아서 술에 취해 자신을 꾸짖은 김처선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이보다 앞선 재위 9년(1503) 6월에는 환관 전균(田畇)이 죽자 그의 노비 109명을 내수사(內需司)에 속하게 하고 20명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에게서 받은 것이었으나 사패(賜牌)에 ‘영원히 상속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관청(公)에 귀속시킨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렇게 몰수한 재산 처리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재위 10년 5월 9일 “전일 적몰한 노비를 3등분으로 나누어 2분은 내수사에서 가려 차지하고, 1분은 각 관사에 나누어 주라”는 하교가 이를 말해 준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라는 것은 결국 연산군이 그만큼 갖겠다는 뜻이었다. 신하들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옥사를 확대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회나 정창손처럼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부관참시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지사였다.

『연려실기술』은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 우의정 김수동이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인심을 잃은 결정적 이유가 재산 몰수에 있었다. 세조나 예종은 정적(政敵)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연산군은 자신이 차지했다. 세조라고 공신들이 무조건 예뻐서 노비·전토를 하사하고 전횡을 눈감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다. 공신 집단을 해체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대체세력을 찾아야 했는데 이 경우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0년 9월 느닷없이 무오사화 때 귀양 간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쓰겠는가?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에게는 성리학에 입각해 간쟁하는 사림도 왕권에 항거하는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미리 몸을 피한 정희량(鄭希良)을 제외하고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종친 이심원이 능지처참당하고 귀양 갔던 김굉필·박한주·이수공·강백진·최부·이원·이주·강겸·이총 등이 사형당했다. 공신들은 물론 사림까지 적으로 돌렸으니 그를 보호할 세력이 없었다. 연산군이 공신들의 자리에 사림을 배치하고 공신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림마저 적으로 삼은 그가 역사상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될 것은 사림이 사필(史筆)을 쥔 이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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