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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 태종

by 싯딤 2010. 1. 18.

중앙선데이 2008.09.27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군주는 누구나 성군이 되길 원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아야 할 경우가 있다. 태종과 세조가 그랬다. 그들은 악역을 자처했다. 악역을 자처한 군주로서 태종은 성공했고, 세조는 실패했다. 성패를 가른 요인은 무얼까.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의 ‘조선 왕을 말하다’가 추적한다.

악역을 자청한 임금, 태종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다리(箭串橋·전곶교). 1420년(세종 3년) 세종이 태종을 위하여 다리를 놓을 것을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당대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직접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길이 78m로 당시 가장 긴 다리였다.
개국은 했으나 불안한 신생 왕조였다. ‘조선이 과연 얼마나 갈까?’라는 의구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개국 초 감찰 김부(金扶)가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 앞을 지나다가 “비록 큰 집을 지었지만 어찌 오래 살게 되겠는가?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이성계는 “이는 조선 사직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이라며 김부를 사형시켰지만 신생 왕조에 대한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자 책봉이었다. 이성계 사후를 노리는 고려 부흥 세력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강력한 인물을 세자로 책봉해 미래를 다져야 했다.

이성계는 첫째 부인인 향처(鄕妻) 한씨(1337~1391)에게서 여섯 아들을, 개경에서 얻은 경처(京妻) 강씨(?~1396)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강씨는 개경 명가 출신이었지만 한씨가 사망하는 공양왕 3년까지는 후처일 수밖에 없었고, 두 아들 역시 서자(庶子)에 불과했다. 조선 개국 당시 열한 살에 불과했던 강씨의 둘째 방석은 아무 공을 세우지 못했고, 두어 살 위의 형 방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명종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와 『태조실록』은 개국 초 태조가 배극렴·조준·정도전 등 공신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세자 문제를 논의하자 ‘시국이 평안할 때는 적자(嫡子)를 세우고, 시국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고 전한다. 개국 초의 혼란기였으므로 당연히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했는데, 이 경우 정몽주를 격살해 개국의 기틀을 연 방원이 유리했다. 시국이 평안하다면 적장자(嫡長子)인 진안대군 방우(芳雨·태조 2년 사망)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방우는 조선 개창에 부정적이었으므로 제외한다면 둘째 방과(芳果·정종)나 방원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논의를 들은 신덕왕후 강씨의 통곡 소리가 전세를 뒤집었다. 『동각잡기』는 “뒷날 또 배극렴 등을 불러 의논하니 다시는 적자를 세워야 하느니, 공 있는 이를 세워야 하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태조 1년(1392) 열한 살의 방석(芳碩)이 세자가 된 것은 오로지 모친의 눈물 덕분이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의 ‘세자를 정함’이란 글에서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 선왕(先王)이 장자(長子)를 세자로 세운 것은 (형제간의) 다툼을 막기 위한 것이고, 현자(賢者)를 세운 것은 덕(德)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 동궁(방석)은 뛰어난 자질과 온화한 성품으로…”라며 장자도 현자도 아닌 방석의 세자 책봉이 가져올 문제에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는 눈을 감는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방원은 우왕 9년(1383) 이성계 집안에서는 최초로 과거에 급제했다. 변방 무가(武家)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이성계는 이때 “대궐 뜰에서 절하고 사례하여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할 정도로 기뻐했다. 신덕왕후도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왜 내게서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한탄했다고 『동각잡기』는 전하지만, 스물여섯의 장년인 그는 열한 살 이복동생에게 밀려났다.

방원은 반발했다. 단순히 이복형제 사이의 자리다툼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한신(韓信) 같은 개국공신들을 제거한 것처럼 피의 숙청을 통해 왕실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안을 나라로 만든 화가위국(化家爲國)의 부친과 맞서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방번 형제와 배후의 정도전을 죽인 것은 사실상 부친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제1차 왕자의 난은 당(唐) 고조 9년(626) 태종 이세민이 장안(長安·현 서안) 북쪽 현무문(玄武門)에서 태자인 친형 이건성(李建成)과 넷째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현무문의 변(變)’과 흡사했다.

현무문의 변으로 고조 이연(李淵)이 강제로 양위(讓位)당한 것처럼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도 사실상 강제로 양위당했다. 이성계는 충격을 받았고 격분했고 좌절했다. 이성계 퇴위 이틀 후인 『태조실록』 7년 9월 7일조는 “상왕이 이방석 등을 위하여 소선(素膳)을 드니 도평의사사에서 육선(肉膳)을 올리기를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고 탄식했다. 심지어 태조는 왕자의 난이 발생한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가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내가 한양에 천도(遷都)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還都)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 날이 밝지 않았을 때만 출입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정종실록』 1년 3월 13일)”고도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종 2년(1400)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정종실록』은 방간이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 거병 계획을 보고하자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꾸짖었다고 전하지만 이성계가 일방적으로 방원 편만 들었을 까닭은 없다. 제2차 왕자의 난 직후 세제(世弟)로 실권을 잡은 방원이 인사하러 오자 이성계는 덕담 대신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정종실록』 2년 2월 4일)”고 조롱했다. 그러나 방원은 부친의 경멸에 좌절하는 대신 강력한 개혁 노선을 걸었다. 사병(私兵) 혁파가 그것이었다.

정종 2년(1400) 4월 대사헌 권근(權近) 등이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해야지 흩어서 주장할 수 없습니다”고 사병 혁파에 대해 상소하자마자 당일로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전광석화처럼 사병을 혁파했다. 『정종실록』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원망함)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고 전할 정도로 반발도 작지 않았다. 그중에는 방원의 측근이자 정사·좌명 1등공신인 조영무(趙英茂)도 끼어 있었다. 대간에서 조영무의 처벌을 요구하자 방원은 두 번 반대하는 형식을 취한 후 황주(黃州)로 유배 보냈다. 이 조치에 조야가 놀랐다. 조영무까지 내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정종은 재위 2년(1400) 11월 11일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전에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5월 태종이 헌수(獻壽)하자 토산(兎山)으로 유배 간 방간을 불러 올릴 것을 요구했다. 태종은 “이것이 신이 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이라며 명령대로 하겠다고 답했으나 대간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태종의 본심이었다. 태종은 방간을 불러옴으로써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동기이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발해 함흥으로 돌아가 버렸다. 심지어 이성계는 태종 2년(1402·임오년)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가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며 군사를 일으키자 여기 가담했다. 태상왕부인 승녕부(承寧府)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태상왕을 호종해 동북면으로 가서 조사의의 역모에 참여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조사의의 난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이성계의 가담은 무수한 뒷말을 낳았고 태종의 정통성에 큰 상처가 되었다. 태종도 “내가 무인년(1차 왕자의 난) 가을 사직의 대계(大計) 때문에 부득이 거사한 후 부왕께서 항상 불평하는 마음을 품으셨다(『태종실록』8년 6월 21일)”고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태종은 부친은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이 신생 조선을 살리는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직도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외척과 공신 숙청

최고권력은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도 그렇다. 이덕일의 ‘조선 왕을 말하다’는 태종 이방원이 권력창출에 기여한 측근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그에겐 동지보다 왕권이 중요했다.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민무질 묘. 태종의 처남 4형제 중 유일하게 묘가 전한다. 민무구·민무휼·민무회의 묘들은 실전이라고 한다. 민무질은 제주도에서 자진하여 문종 때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민무질 묘 앞에 있는 민무질 신도비.
1402년(태종 2년) 3월 7일. 태종은 성균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 권씨를 ‘어진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후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혼인을 주관하는 가례색(嘉禮色)까지 설치했으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가 태종의 옷을 잡으며 “제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禍亂)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한 것인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라고 거칠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환관과 궁녀를 시켜 권씨를 쓸쓸히 별궁(別宮)으로 안내해야 했다.

『태종실록』은 “상이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즉위 직후에도 “중궁의 투기 때문에 경연청(經筵廳)에 나와 10여 일 동안 거처하였다”고 『정종실록』이 적고 있는 대로 민씨의 투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취첩(取妾)은 왕실의 안녕을 위한 합법적 제도였다. 궁중의 모든 여성은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된 여관(女官)으로 왕비의 지휘를 받았다. 후궁에게는 정1품 빈(嬪)부터 종4품 숙원(淑媛)까지 주어졌고, 정5품 상궁 아래는 궁녀였다. 왕비에게 궁중의 여인들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통솔의 대상이었다. 태종이 더욱 심각하게 여긴 것은 ‘내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했다’는 말이었다. 여흥(驪興) 민씨(閔氏)와 공동 왕권이란 뜻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숙번의 안성 이씨와 조영무의 한양 조씨도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다.

태종의 즉위 과정을 되짚어 보면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민씨는 고려 충선왕 때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15가문에 들 정도로 명가였다. 게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처음 기획한 인물은 민씨 부인과 동생 민무질이었다. 『태조실록』은 먼저 민무질과 상의한 부인 민씨가 종 소근(小斤)을 급히 궁으로 보내 방원을 불렀고, ‘셋이 비밀리에 한참 이야기’한 후 거사에 나섰다고 전한다. 환수령이 내려진 무기를 몰래 감추었다가 내놓은 인물도 부인 민씨였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권했다”고 『정종실록』은 전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모두 처남 민무구·무질이 선봉에 서서 칼을 휘둘렀고 두 처남은 공신에 책봉되었다. 부인 민씨가 태종의 왕위를 두 가문의 것으로 생각한 것은 일견 당연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즉위를 천명(天命)의 결과로 보았다. 처남들은 천명을 따른 것으로서 그 대가로 왕권의 분할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즉위한 이상 처남들은 동지가 아니라 신하였다. 국왕과 동지인 공신이 존재한다면 법치(法治)는 무너지고 인치(人治)가 횡행할 것이었다. 그러면 국가는 특정 세력의 사적 이익에 종사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었다.

태종의 이런 우려를 무시한 채 민씨 형제들은 즉위 초부터 세력 확장에 나섰다. 태종이 원년(1401) 정월 초하루 강안전(康安殿) 터에 거둥하여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데, 상장군(上將軍) 이응(李膺)이 차서(次序)를 잃었다고 사헌부에서 탄핵했다. 태종은 “민무구가 사헌부를 사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응이 민무구 등에 대한 총애가 너무 극진하다며 “억압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제거하기 위해 탄핵했다는 뜻이었다. 태종이 권력 배분을 거부하자 형제는 스스로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세자에게 접근했다. 태종에게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종 7년(1407)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 등이 민씨 형제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공세의 시작이었다. 이화는 태조의 이복동생이자 태종의 숙부라는 점에서 사전 교감에 의한 상소였을 것이다.

지난 해(1406) 재변(災變)이 끊기지 않는다며 태종이 양위를 선언했을 때 모든 신하가 명의 환수를 극력 요청했으나 형제는 은근히 선위(禪位)를 바랐다는 혐의였다. ‘태종이 선위 계획을 발표했을 때 모든 신민은 애통해했으나 민무구 형제는 화색을 띠었다’는 심증뿐인 공격이었지만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였으므로 죄는 위중했다. 두 형제가 강하게 반발하자 이조참의 윤향(尹向)이 ‘태종이 양위하려고 할 때 민씨 형제가 비밀리에 내재추(內宰樞)를 선정했다’고 폭로했다. ‘내재추’는 고려 말기 5, 6명의 대신이 전권을 행사함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던 기구였다. 이런 공격이 잇따르면서 두 형제는 태종 8년(1408) 10월 지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태종은 이때 처남들을 내쫓는 교서를 발표해 ‘임금이 아들이 많으면 형세가 심히 불편하다’며 세자 외의 다른 왕자들을 제거해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 했고’ ‘양인(良人) 수백 구(口)를 사천(私賤·노비)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태종 9년(1409)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가 민씨 형제를 옹호했다는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하면서 형제의 처지는 더욱 궁박해졌다.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에서 공격을 재개해 “자고로 난역(亂逆)하는 신하는 먼저 당(黨)을 만든 연후에 악한 짓을 감행하기 때문에 『춘추(春秋)』에서 그 당(黨)을 엄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전 계림부윤(鷄林府尹) 이은(李殷) 등 13명을 ‘간인(奸人:민무구 등)에 아부한 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민씨 형제는 태종 10년(1410) 3월 제주 유배지에서 자진(自盡·스스로 목숨을 끊음)해야 했다.

5년 후인 태종 15년(1415)에는 남은 처남 민무휼·무회 형제까지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 노비 소송에 패한 전 황주(黃州)목사 염치용이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惠善翁主) 홍씨와 영의정 하륜 등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패소했다면서 민무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무회는 충녕(忠寧·세종)에게 이를 알렸다. 충녕에게서 송사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한낱 노비 소송에 임금을 연루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이 때문에 두 형제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잇따른 비위 사건으로 처지가 불안했던 세자 양녕이 ‘작년(1414) 무휼·무회 형제가 두 형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했다’고 공격에 가세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태종 15년 겨울 ‘왕자 이비(이비)의 참고(慘苦)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태종은 6~7년 전 잠시 입궐했던 민씨 친정의 여종을 임신시켰는데 이 사실을 안 원경왕후가 겨울 12월에 산통(産痛)을 시작한 여종과 갓난아이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한 사건이었다. 자신의 혈육 이비와 그 모친을 죽이려 했던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민무회 형제 사건을 재조사시켰고 그 결과 세자에게 “무구·무질 형은 모반죄로 죽었으나 사실은 무죄입니다”고 옹호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두 형처럼 사약을 마셔야 했다.

외척뿐이 아니라 측근 이숙번도 제거 대상에 올랐다. 태종 16년(1416) 이숙번은 박은(朴誾)이 우의정이 된 데 불만을 품고 가뭄으로 모두가 근신하는데 입궐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숙번 역시 사형 위기에 몰렸으나 과거 태종에게 “신은 크게 우매하니 나중에 설령 죄를 지어도 성명을 보존케 하여 주소서(『태종실록』 17년 3월 4일)”라고 요청했었고 태종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지 않으면 어찌 보존해 주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었기 때문에 겨우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태종은 “전의 말은 종사와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만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며 살아생전 도성(都城·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훗날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민무구의 옥사’에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한 것은 무슨 죄에 연루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역적죄를 범했다면 여기에서 그칠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네 처남은 혐의는 뚜렷하지 않아서 많은 의혹을 낳았다. 사적(私的) 관점에서는 태종의 행위는 배은(背恩)일지 모르지만 이런 피의 숙청을 통해 왕권은 안정되어 갔다. 국왕과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하는 신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법 아래 복종했다. 현재도 우리 사회의 고질인, 최고위층과의 사적 친분에 의한 권력의 사적 점유를 태종은 확실히 단절시켰다. 이렇게 조선은 정상적인 왕조가 되어 갔고, 이런 왕조를 물려주기 위해 태종은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랑이가 새끼 키우듯, 후계자는 엄하게 키워라/ 세자 교체와 양위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후계자가 안 보인다는 점이다. 후계자를 양성하기는커녕 경쟁자로 여길 뿐이다. 그래서 검증된 적이 없는 인물이 혜성같이 등장해 정권을 잡지만 곧 콘텐트 부족이 드러나고 국가는 혼란을 겪게 된다. 태종은 후계자의 자질 부족이 드러나자 교체하고 새 후계자를 양성했다. 그리고 일찍 물러나 국왕 수업을 시켰다. 이 부분이 현재의 위정자가 배워야 할 태종의 가장 큰 업적인지도 모른다.
태종삼호자도(73.5x50.4cm), 우승우(한국화가).
태종은 재위 5년(1405) 세자 이제(이제·양녕대군)에게 고대 은(殷)나라의 걸(桀)과 주(周)나라의 주(紂)왕이 백성에게 버림받은 독부(獨夫)가 된 이유를 물었다. 세자가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나와 네가 인심을 잃으면 하루아침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고 훈계했다. 피의 숙청으로 태종은 공신의 원망은 샀지만 태종우 고사가 말해 주듯 백성의 인심을 얻었다. 권력은 칼로 창출하지만 유지는 책으로 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독서가였다.

『태종실록』2년(1402) 6월조는 “상이 매일 청심정(淸心亭·개경 수창궁 후원)에 나가서 독서하는데, 덥거나 비가 오거나 그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고, 3년 9월조는 “상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독서하는 엄한 과정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태종은 특히 역사서와 경서(經書)를 열독했다. 역사서에는 현실에 응용 가능한 사례들이, 경서에는 유교국가의 통치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왕(嗣王·후계 임금)도 독서가여야 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재위 2년(1402) 아홉 살의 원자 이제를 교육시키는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했다. 그러나 성현(成俔)이『용재총화(용齋叢話)』에서 “세자는 성색(聲色·노래와 여자)에 빠져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고 쓴 것이 정확했다.

태종은 재위 7년(1407) 열네 살의 세자를 숙빈(淑嬪) 김씨와 혼인시키며 그 장인 김한로(金漢老)에게 “경(卿)은 멀리는 심효생(沈孝生·방석의 장인)을 본받지 말고 가까이는 민씨(閔氏)를 경계하여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면서 “나는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는 것처럼 세자를 엄하게 키우려 한다”고 경계했다. 태종은 재위 3년 시강(侍講) 김첨(金瞻)이 수(隋) 양제가 망한 원인이 성색 때문이었다고 하자 “그렇다! 성색은 실로 천하를 망치는 근본”이라고 동조했다.

태종도 후궁을 두었지만 말년에 총애하던 숙공궁주(淑恭宮主)의 부친 김점(金漸)이 평안도 관찰사 시절 수뢰 혐의로 수사를 받자 “탐오(貪汚)한 사람의 딸을 궁중에 둘 수 없다”면서 출궁시킨 후 다시는 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재위 15년(1415) 세자와 어울리는 기생 초궁장(楚宮粧)이 상왕 정종의 옛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쫓았다. 그러나 세자는 그후에도 구종수(具宗秀)의 사가까지 쫓아다니며 초궁장과 어울렸다. 세자 시강원의 깐깐한 스승 이래(李來)가 사냥용 매(鷹)나 악공(樂工·악사) 때문에 세자와 다툰 일화는 숱하다. 태종은 재위 15년 세자전(世子殿)에 잡인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을 듣고 세자의 사부 이래와 변계량(卞季良) 등을 불러 “경 등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을 꺼려 세자를 바른 길로 보도하지 못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이래는 세자에게 가서 “전하의 아들이 저하(邸下)뿐인 줄 압니까”(『태종실록』 15년 1월 28일)라며 흐느꼈다. 세자는 몰랐지만 이래는 태종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 문제는 더 심각했다. 전라도 적성(積城·순창)현에 살던 어리는 친족을 보러 상경해 곽선의 양자인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의 집에 머물렀다. 악공 이오방(李五方)으로부터 어리의 미모와 재예(才藝)가 빼어나다고 들은 세자는 어리를 세자궁으로 납치했다. 축첩(蓄妾)이 합법인 조선에서 어리는 유부녀였다. 양부의 첩을 빼앗긴 이승이 고소하려 하자 세자는 사람을 보내 “내가 한 일을 사헌부에 고할 것인가? 형조에 고할 것인가? 어느 곳에 고할 것인가?”라고 힐난했다. 권력남용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심지어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과 사적 관계까지 맺었다. 민무구 형제를 옹호하다 사형당한 이무(李茂)의 인친(姻親) 구종수의 집에 가 박혁인(博奕人:바둑·장기 명인) 방복생(方福生), 악공 이오방, 기생 초궁장·승목단(勝牧丹) 등과 어울려 놀았다. 이때 구종수 형제 등이 “저하께서 저희를 길이 사반(私伴·사적 수하)으로 삼아 달라”고 청하자 허락의 증표로 옷까지 벗어주었다. 한마디로 공사 구분이 안 됐다. 태종이 구종수 등을 귀양 보낸 후 다시 목을 벴어도 세자는 변하지 않았다. 태종이 출궁시킨 어리를 장모 전씨를 시켜 몰래 세자전으로 다시 데려왔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18년(1418) 5월 10일 세자를 구전(舊殿)으로 쫓아냈다.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세자는 보름 후에 되레 수서(手書)를 보내 항의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 태종실록』18년 5월 30일)

세자는 조사의 난 때 태조를 동북면까지 모셔갔던 신효창(申孝昌)은 죽이지 않으면서 장인 김한로는 왜 처벌하느냐고도 따졌다. 외척까지 옹호하는 것을 본 태종은 세자 교체를 결심하고 정승들에게 수서를 보여 주었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했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오직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이제 도리어 원망하며 싫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태종이 폐위 의사를 밝히자 의정부와 삼공신(三功臣)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는 즉각 동조 상소를 올렸다. 세자의 비행은 ‘매와 개[鷹犬]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던 황희(黃喜) 등 소수 신하만이 반대였다. 신료 사이에는 양녕의 아들을 대신 세워서도 안 된다는 공감대까지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효령과 충녕 중에서 누가 적당한지를 묻자 “아랫사람이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며 사양했고 태종은 “충녕(忠寧)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도 밤새 독서하므로 병이 날까 두려워 야간 독서를 금지했으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태종실록』18년 6월 3일)며 충녕을 선택했다.

영의정 유정현 등은 “신 등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례했다. 충녕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뜻밖에도 충녕이 술을 조금 할 줄 알아 명 사신을 접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명(明) 성조(成祖)는 1406년(태종 6) 안남(安南·베트남)을 침략해 호 꾸이 리(胡季이) 부자를 납치해 갓 건국한 호조(胡朝)를 멸망시켰다. 명은 내사(內史) 정승(鄭昇)을 사신으로 보내 이를 조선에 알렸다. 명과의 우호관계는 국체 보존의 핵심 과제였으므로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효령(孝寧)은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두 달 후인 8월 8일 태종은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종은 양위의 변에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거부할 때 ‘필마(匹馬) 한 필만 거느리고 혼정신성(昏定晨省·조석으로 부모를 모심)하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왕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형제와 싸우며 임금이 된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신하들이 말리자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며 강행했다.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다. 자칫하면 호랑이에게 삼켜 먹힐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살아생전 후계자 수업을 시키려 했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온 것으로 태종은 악역이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권력이 호랑이 등에 탄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태평성대를 위하여, 수고는 모두 내게 맡겨라/ 마지막 유산

태종은 세종에게도 혹독한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심온(沈溫) 사건을 계기로 명과의 외교를 중시하면서 권신의 발호를 억제하는 법을 가르치고 군사를 동원해 왜구를 소탕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오명은 자신이 받고 영광은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오늘의 영광에 집착해 미래를 망각하는 현재의 정치가에게 교훈이 될 만한 사례다.
대마도 정벌(44.7Χ73cm), 우승우(한국화가).
1399년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4남인 연왕(燕王) 주체(朱逮)는 조카인 혜제(惠帝)를 축출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양측이 수십만 병사를 동원하는 내전이 3년간 지속되었는데, 정도전이 살아 있었다면 이 혼란기를 이용해 북벌을 단행했을 개연성이 크다. 1402년 내전에서 승리한 연왕 주체가 영락제(永樂帝)라 불리는 성조(成祖)이다. 영락제는 정화(鄭和)에게 62척의 대선단과 2만7800명의 대군을 주어 대항해를 시키고, 세 차례나 몽골을 친정했는데, ‘적 1000명을 죽이고, 아군 800명을 잃는(殺敵一千, 自損八百)’ 격렬한 전투였다. 조선을 경악시킨 것은 안남(安南·베트남) 정벌이었다. 안남은 1226년 태종 트란 찬(陳昺·Tran Canh)이 건중(建中)을 연호로 진조(陳朝)를 개창했는데, 1400년 호 꾸이 리(胡季리·Ho Quy Ly·1336~1407)가 진조의 마지막 황제 트란 안(陳 ·Tran An)을 내쫓고 호조(胡朝)를 개창했다. 그런데 영락제는 뒤늦은 1406년 정이장군(征夷將軍) 주능(朱能)에게 80만 대군을 주어 호 꾸이 리 부자를 베이징으로 납치했다. 영락제는 당초 “진씨 자손 중에서 현자를 세우겠다”고 말했으나 막상 승전하자 ‘호씨가 진씨를 모조리 죽여 계승할 사람이 없다’며 직할지로 삼아버렸다.

신생 조선에 안남 사례는 큰 공포였다. 태종은 안남 사태를 논의할 때 “나는 한편으로는 지성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태종실록』 7년 4월 8일)고 말했다.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는 한편 방어 준비도 철저히 하겠다는 뜻이었다. 세종 즉위년(1418) 8월 왕위 교체를 알리는 사은주문사를 신의왕후 한씨의 친척 한장수(韓長壽)에서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으로 교체한 것도 명과의 외교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세자 교체 직후 왕위까지 바뀐 데 대해 명이 의혹을 품을 수 있었기에 신왕의 장인이자 명나라 환관태감 황엄과 친한 심온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해 9월 태종은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그 존귀함이 비할 데가 없다”면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승진시켰다.

『세종실록』은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 되어 순서를 뛰어넘어 수상(首相)에 오르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이때 심온은 불과 44세였는데, 『연려실기술』은 “상왕이 그 소문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하에게 쏠린 권력을 구경하고 있을 태종이 아니었다.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기 보름 전인 8월 25일 발생한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의 옥사’가 심온 제거에 이용되었다. 상왕은 양위 후에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하겠다”며 군사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에 관한 일을 세종에게만 보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태종은 “내가 군사 문제에 대해 듣는 것이 사직(社稷)에 무엇이 나쁘겠냐(『세종실록』 즉위년 8월 25일)”면서 강상인과 병조 낭청(郎廳) 등을 의금부에 하옥해 국문했다.

이들은 모두 군권을 세종에게 돌리려는 뜻이 아니라 ‘사리를 잘 살피지 못한 탓’이라고 변명해 강상인이 함경도 단천(端川)의 관노(官奴)로 떨어지는 것으로 일단락되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심온의 전별식 사건이 발생하자 태종은 이 사건을 재조사시켰다. 임금의 경호부대를 관할하는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정(沈<6CDF>)이 심온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여(黨與)를 대라는 심한 추궁을 받은 강상인은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날이 저물 무렵 심온의 집에 가서 ‘군사는 마땅히 한곳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했더니 심온도 ‘옳다’고 했습니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22일)라고 심온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강상인이 관련자들과의 대질신문에서 “고초를 견디지 못했을 뿐 실상은 모두 무함(誣陷)이었다”며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고 부인하는 등 무리한 옥사였다. 강상인은 심온 귀국 전 수레에 올라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매( 楚)를 견디지 못해 죽는다”고 외치며 능지처참 당했고, 귀국길에 체포된 심온은 관련자 대질을 요청했지만 “이미 황천객이 되었으니 어찌 만나겠느냐?”는 태종의 싸늘한 답변과 함께 사약을 마셔야 했다. 『세종실록』은 충녕이 세자가 된 직후 심온이 “지금 사대부들이 나를 보면 모두 은근(慇懃)한 뜻을 보내니 내가 심히 두렵습니다. 마땅히 손님을 사절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세종에게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심히 옳게 여겼다(즉위년 12월 25일)’고 전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의 다짐을 잊고 전별식 사건을 방치한 것이었다. 세종은 자신도 폐위될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태종은 좌의정 박은에게 “나의 여생은 많지 않고 본 것은 많으므로 이런 대간(大姦)은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죽기 전에 심온을 제거해 세종에게 안정된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이었다.

태종은 왜구 문제 해결책도 가르쳐주었다. 우왕 6년(1380)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적을 무찌른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이성계는 왜구 전문가였다. 그래서 건국 후 “옛날과 비교하여 왜적들이 10분의 8, 9는 감소되었다”(『태조실록』 4년 7월 10일)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세종 즉위년(1418)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계승하면서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왜구가 다시 창궐했다. 세종 1년(1419)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庇仁縣)을 습격해 만호 김성길(金成吉) 부자를 전사시키자 태종은 격분했다.

그는 세종과 대신들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때 병조판서 조말생만이 선제공격에 동조하고 나머지는 ‘적이 공격하는 것을 기다려 치는 것이 좋다’고 반대했다. 태종은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세종실록』 1년 5월 14일)라면서 대마도 정벌을 결정했다. 태종은 신민(臣民)에게 고하는 글에서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던 것”이라면서 군사를 출진시켰다. 이것이 기해동정(己亥東征)인데 그해 6월 19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는 227척의 병선에 1만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거제도를 떠나 7월 3일 귀환할 때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재정벌이 논의되는 와중인 9월 20일 대마도주 종정성은 예조판서에게 항복하기를 비는 신서(信書)를 바쳤다. “기해동정 이후 왜구들이 천위(天威)에 굴복해 감히 포학(暴虐)을 부리지 못했다”(『세종실록』12년 4월 12일)는 기록처럼 왜구는 크게 위축되었다.

세종 3년 허물어진 도성(都城)의 수축 문제가 나오자 상왕은 눈물을 흘리며 “도성을 수축하지 않을 수 없는데, 큰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수고함이 없이 오래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수고를 맡고 편안함을 주상에게 물려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세종실록, 3년 10월 13일)라고 말했다. 악역은 자신이 맡고 그 공은 후계자에게 돌리겠다는 뜻이다. 미래를 위해 측근 공신을 제거하고 후계자를 미리 양성했으며, 자신을 희생해 내일을 준비한 태종 같은 거인이 그리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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