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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4)/최후

by 싯딤 2009. 9. 15.

Ⅴ. 전봉준의 최후

 1. 동지의 밀고로 순창에서 붙잡히다. 

전봉준의 거사는 처음부터 승산이 적은 싸움이었다. 관군과 상대하기도 힘든 싸움인데, 훈련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까지 상대하였으니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농민이 봉기하여 정예화된 정부군을 이긴 예는 없었다. 농민이 전쟁의 주력세력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은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마련할 수가 없으며, 전쟁을 수행할 전략개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지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않으며 소명의식도 부족하다.

충청지역에서 전투를 벌일 때 김개남은 전봉준의 지원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력만 키웠을 뿐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지방의 유생과 부호 계층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은 계급적으로 기득권 세력이었으므로 전봉준의 개혁사상과 평등사상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11월 말, 전봉준은 부하 열댓 명만 데리고 잠행에 들어갔다. 조정은 전봉준을 체포하는 자에게 거액의 현상금 1,000 냥과 군수 자리를 내걸었다. 태인에서 농부 옷차림으로 변신하고 29일 입암산성으로 들어가니 별장 이종록은 전봉준을 환대하며 재워 주고 밥도 먹여 주었다.

 

 

                        입암산 정상                                                  입암산성 안 성내리 마을과 마지막까지 살았던 주민

               입암산성도  1750년대 그려져 채색된 것으로(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선왕실 행사그림과 옛지도) 남문, 남장대, 성 안 객사, 마을,

                                 저수지 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재는 그 터에 수풀만 무성하다.

 

  

 그러나 우선봉장 이규태가 추격대를 파견하여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와 백양사의 암자로 잠시 피했다가, 또다시 추격해 온다는 전갈을 받고 순창의 피노리로

옮겨 갔다. 따르던 부하들도 세 명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냈다. 말도 버리고 총 한자루만 쥐고 부하 양해일, 최경선, 윤정오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피노리로 향한 것은 이곳에 예전의 부하 김경천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경천은 전봉준의 고향 동지로 고부에 있을 때 집사일을 보며 전봉준을 도왔던 인물이었는데 봉기가 발발하자 정읍을 떠나 산골마을인 피노리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이것이 전봉준의 일생일대 큰 실책이 되었다. 항간에는 '전봉준이 경천을 조심해야 한다.' 는 점괘와 참요가 나돌고 있었다.

 

김경천은 전봉준이 총대장이고 그에게 많은 현상금이 걸려 있고 그를 따르는 부하도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전봉준이 찾아오자 반갑게 맞이하여 길가 주막으로 안내하여 저녁밥을 시키고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웃 마을에 사는 선비 한신현에게 전봉준이 주막에 머물러 있다고 알려 주었다. 한신현은 마침 농민군을 색출하기 위해 민보단을 조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호박이 굴러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친구 김영철, 정창욱과 동네 장정들을 동원하여 주막주위를 엿보다가 밤을 틈타 전봉준을 덮쳤다. 전봉준은 밖의 소란스런 소리에 위기를 직감하고 천보총을 들고 방문을 박차고 나가 나뭇단을 밟고 담을 뛰어 넘었다. 그 순간 포위하고 있던 마을 장정들이 사정없이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전봉준을 내리쳤다. 전봉준은 머리와 발목 등을 무수히 맞고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불세출의 영웅 전봉준’은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하여 천하를 호령한 지 1년 만에 옛 부하의 밀고로 허무하게 붙잡히고 말았다. 12월 2일 밤이었다. 현상금에 눈이 먼 자들이 초주검을 만들어 놓고 공회당에 가둔 후 순창관아에 알리자 압송하려고 달려왔다. 그러나 어느 틈에 일본군 소좌 미나미 쇼시로가 정보를 입수하고 병졸을 이끌고 피노리에 나타나 전봉준의 신병을 인도해갔다.

 

전봉준이 붙잡힌 주막. 단장되기 전에는 우물가가 그대로 남아 있 다. 뒤에 보이는 산이 계룡산.

전봉준과 부하 세 명은 일본군 19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담양으로 끌려갔다가 나주의 일본 순사청 감옥에 갇혔다. 일본군은 전봉준을 나주에다 거의 한달여 구류했다가 다음해 1월 5일 다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때 일본군에 의해 붙잡힌 손화중도 함께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붙잡힐 때 당한 부상으로 걷기가 불편한 상태였으므로 들것에 태워 압송되었다. 지금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에는 전봉준이 들것에 앉아서 화가 난 듯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순간의 표정으로나마 모진 고문, 심한 추위 속에서도 꼿꼿한 위엄을 느낄 수가 있다. 전봉준이서울로 압송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농민들이 몰려 나와 통곡하며 압송되어가는 영웅을 전송하였다.

전봉준을 생포한 한신현은 금천군수가 되었고 피노리 마을에는 돈 1,000냥이 내려졌다. 밀고자 김경천은 세상의 눈총과 보복이 두려워 마을을 떠나 숨어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피노리 마을은 뒤에 이름을 바꿔야 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진고개(지금의 명동, 충무로 일대)에 있는 일본 영사관 순사청(중부경찰서 자리)에 갇혔다. 1895년 2월 9일부터 공식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일본이 주도하였지만 형식상으로는 대한제국 법무대신 서광범이 최종 서명하고 이재정, 장백, 김기조, 오용묵이 재판에 참여하였다.

일본 영사관에서 심문받을 때 법관이 죄인 취급하며 다루자 전봉준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고자 하여 탐학한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꾸려 한 것이 뭐가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먹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을 행한 자를 없앤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을 매매하고 국토를 농락하여 사욕을 채우는 자를 친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자국을 해친 무리이다. 그 죄가 가장 중대하거늘 어찌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며 준열히 꾸짖었다. 법관이 고문을 가하며 심문을 계속하자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것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2. 사형에 처해지다.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영사관은 전봉준을 31일간에 걸쳐 다섯 차례 심문하였다. 심문의 총 문답은 275개였다.

전봉준은 붙잡힐 때 당한 부상과 감옥에서의 고문으로 몇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재판을 받았다. 상한 다리를 일본 군의에게 치료를 받기도 했는데 이때 일본 측 인사가 은밀히 제의해 왔다. “그대의 죄상은 일본 법률로는 중대한 국사범이긴 하나 사형까지는 이르게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본 변호사를 선임하여 재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일본정부의 양해를 얻어 활로를 구하는 것이 어떠냐?” <동경아사히신문,1895,3,12 양력>는 회유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단호했다. 척결 대상이던 외세, 그것도 일본의 힘을 빌어 목숨을 구차하게 연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활로를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봉준을 살려 이용해 먹고자 계속 간계를 꾸몄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일본 천우협 소속의 다나카 지로가 영사관 동의하에 감옥으로 들어와 전봉준을 만났다. 그는, 전봉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품이 고결하고 행동거지가 엄정한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현재 정세, 천우협의 역할, 일본의 미래 등을 자세히 설명한 후 일본으로 탈출할 것을 권고하였다. 당시 서울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묵인하면 일본으로의 탈출은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단호했다.

“내 형편이 여기에 이른 것은 필경 천명이니, 굳이 천명을 거스리고 일본으로 탈출하려는 뜻은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다.”<동경아사히신문>

전봉준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사형을 면하고 높은 자리를 보장받고 출세의 길을 열어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갑오농민혁명의 명분과 이 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결연하게 죽음의 길을 택했다. 1895년 3월 29일 마침내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일본기자석이 잠시 술렁였다. 법무참의 장박이 전봉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 나는 법관으로 죄인과 한마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목숨이 아까우냐.

전: 국법을 적용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장: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너희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아직 분명한 규정이 없다. 문명의 나라에서는 국사범으로 다루어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구나. 너희는 스스로 생각해 보라. 오늘의 죽음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너희로 인하여 우리나라도 크게 개혁되었고, 너희가 지목한 탐관오리 민영준 등도 국법에 처해졌고, 나머지 사람들도 흔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너희 죽음은 결국 오늘의 공명한 정사를 촉진한 것이므로 명복을 빈다.

전봉준은 ‘부대참시’라는 사형판결의 주문을 듣자 일어나 외쳤다.

“올바른 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으나, 오직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사형판결과 함께 곧바로 이날 사형이 집행되었다. 전봉준과 같이 사형언도를 받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도 한날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대 위에 선 전봉준에게 집행관이 가족에게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전봉준은,

“나는 다른 할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껌껌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는 목이 베어졌다.

당시 일본인이 찍은 전봉준의 효수된 머리는 눈을 부릅뜬 혁명가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교수형 당시 집행총순이었던 강모라는 사람이 오지영에게 전한 말이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오던 날부터 형을 받던 날까지 전후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과연 풍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돋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만인의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의 청초한 얼굴과 정채로운 미목,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는 세상을 한번 놀라게 할 만한 대 위인, 대 영걸이었다.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규모로 만들어 낸 자니 그는 죽을 때까지라도 뜻을 굴하지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 <오지영. 동학사>

 

일본인 기쿠치 겐조는 자신의 책에 전봉준과 관련한 내용을 이렇게 썼다. 그는 고종실록, 순종실록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근대조선이면사’를 저술한 인물로서, 일본인 시각에서 왜곡된 부분도 있다.

전봉준은 1895년 사형되었는데, 일본인 가운데는 그의 인물됨을 아까워하고 보국안민의 정의를 받든 그의 정열에 감탄하여, 어떻게 하면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 분주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큰 군사를 이끌고 국가에 대적한 반역자였다. 그는 사형 순간에도 평안하였고 마지막에는 일본의 고상한 뜻을 알고 그의 행적을 후회하기도 했다. 을미사변 때 일본으로 쫓겨가던 일본인들이 용산에서 배에 오르면서 전봉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을 바쳐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전봉준이 처형되던 날 서울에는 이른 아침부터 봄비가 내리고, 동쪽하늘에는 먹구름이 겹겹이 덮히고 있었다. 전봉준은 그렇게 죽었다. 41세, 아직 창창한 나이였다.

                                                                         효수된 전봉준의 머리

 

 

3. 전봉준의 후손들

전봉준이 교수형에 처해진 다음 그 유족들은 어찌되었을까?

전봉준은 두 아내를 두었었는데, 첫째 부인 송씨는 1894년 갑오농민 봉기가 일어나기 전 사망했고, 이후 재혼한 후처 이씨는 농민전쟁 당시에 생존해 있었다. 전봉준은 심문에서 가족이 6명이라고 했는데 자신과 부인, 그리고 4명의 자녀를 말한 것이었다. 자녀는 전처의 두 딸과 후처의 두 아들이었다.

전봉준이 죽은 뒤 전봉준의 고향으로 전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고창 당촌은 모두 불에 탔고, 이때 전씨들은 각자 흩어져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전봉준의 첫 딸 전옥례, 전봉준의 외손녀가 되는 강금례(1905-1983) 할머니

 

전봉준의 외손녀 강금례 할머니가 생전에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원동골에 살고 있을 때의 증언에 따르면 외할아버지(전봉준)가 전쟁터에 나갈 때면 작은 딸과 두 아들을 시집간 장녀(전옥례. 고부댁이라 불리움)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모두 폐병에 걸려 고부댁은 1930년경 해수병으로 죽고, 두 외삼촌은 10살 전후에 모두 요절했고 이모(전봉준의 차녀)는 아버지가 잡혀간 후 집을 나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장남 용규는 동곡리에서 10살 쯤에 일찍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차남 전용현은 누나가 사는 지금실에서 숨어살면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용현은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네에서 노름을 일삼다가 노름빚을 져서 남의 소를 팔아먹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외손녀 강금례는 1921년에 박영주와 결혼하여 아들 승규를 두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차녀 전옥련은 이후 15살 어린나이에 집을 나와 김제 금산사에 숨어 있다가 다시 진안 마이산 석탑사 입구에 있는 금당사에 들어가 성을 김씨로 바꾸고 7년 동안을 과부행세를 하며 살았다. 그 뒤 23살 때 주막집 주인의 소개로 이영찬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진안 부귀면 신정리 샛터부락에서 살면서 후환이 두려워 아버지 이름을 입밖에도 내지 않고 살아오다가 어느날 손자집에 갔다가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증손자가 읽던 전봉준전 책의 사진을 보고 ‘이 분이 나의 아버지’ 라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는 1970년 1월 5일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이주석과 장손 이희종을 불러 “어떤 일이 있어도 녹두장군 유해를 찾아 덕천면에 있는 기념탑에 모시고 관리인에게 논 5마지기를 사주어 지키도록 하라” 고 유언했다고 한다.

전봉준과 김옥련, 강금례의 사진을 감정한 조용진 교수(서울대 미술과)는 김옥련과 강금례는 근친이며, 강금례와 김옥련은 전봉준의 지친이라고 증언한다.

현재 전봉준의 제사를 받들고 있는 전만길은 천안전씨 문중에서 양자로 입양한 양손이다. 전만길은 전봉준의 숙부인 전용호의 증손이라는 설명(문중)과 전봉준이 송암공파인데 삼재공파로 잘못 알려진 지난 시절에 족보를 작성했던 전귀몽이 자기파에서 입양했다는 설이 있다.

강금례와 일부 문헌을 종합하면 전봉준의 가계도는 아래와 같다.

전창혁-------언양 김씨

 

여산 송씨(초취)--------전봉준---------------남평 이씨(후실)

 

강창언---장녀(고부댁) 차녀(김옥련)------이영찬 장남(용현)

건기 주석 차남(용규)

성진 희종

금례----박영주

승규

이들 유족 가운데 이희종 만이 다소 생활이 나은 편이고 외증손인 박승규(1986 사망)나 전만길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다. 따라서 전봉준의 외손은 현재 살아있다. 그러나 친손의 생존유무는 전혀 알 수가 없다.

2004년 2월 국회에서 농민군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110년 만에 농민군 지도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훈장이나 표창장을 받을 후손이 없다.

 

 

Ⅵ. 농민들이 꿈꾼 세상

 18941년 동안 조선 전역을 뒤흔든 농민 대중의 대항쟁, 동학농민혁명은 일제의 무력간섭으로 12월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면 30-40만여명의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농민들이 이루고자 한 세상은 무엇인가? 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군이 여러차례에 걸쳐 올렸던 원정서와 그들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것을 사회 경제 및 정치분야로 나누어 살펴보자. 또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100년이 더 지난 지금 그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를 정리해보자.

 

1. 갑오농민혁명의 지향

 경제적 지향

 농민들의 경제적 지향은 무엇보다도 조세 수취제도인 삼정을 바로잡는데 있었다. 삼정의 개혁에 관한 농민들의 요구는 집권층과 지방관리의 제도적 또는 불법적인 조세수탈을 중지하라는 것에 집중되었다. 말하자면 당시대의 경제적 모순을 총체적으로 철폐하여 가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절박한 요구이다. 그러나 이는 모순되고 문란했던 조세 수취제도에 대한 시정을 바란 것이지,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요구를 가지고 농민군이 기존의 경제적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근대적 조세제도에 대한 안목이 없었던 현실에서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이런 농민들의 요구가 실현된다면, 당시 조선의 지배구조는 사실상 그 뿌리에서부터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들이 제기한 삼정 개혁의 문제는 개화파정권의 갑오개혁에서 상당부분 수용되었다.

다음으로 농민들은 상업문제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주로 관과의 결탁을 통하여 특정물건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하는 도매상인 도고의 철폐, 영세한 상인에 대한 지배층의 수탈 금지, 보부상과 외국상인으로부터 농촌의 영세한 행상들의 활동 보장, 외국상인들의 개항장 밖 활동금지 및 내륙으로의 상권 확대 억제 등이 그것이다. 영세한 상인층의 기본적인 활동권과 생계유지 보장을 요구한 셈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일본상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해옴으로써, 영세 상인의 상업활동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에는 그 기반이 송두리채 붕괴되었다.

 

회적 지향

 신분제도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의 개혁요구는 농민군의 원정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농민군의 활동 과정에 드러난 것을 통해 정리해볼 수 있다. 사회적인 문제의개혁요구는 신분제의 폐지에 집중되었다. 물론 신분제를 철폐하라는 공식적인 요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농민군은 농민혁명 과정에서, 횡포한 양반과 수령을 비롯한 관속, 그리고 양반 지주에 대한 처벌을 단행했다. 그 처벌과 응징의 강도는 마치 그동안 쌓였던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듯이 강력했다고 유림들은 기록하였다. 또한 농민군 사이에서는 신분의 벽을 없애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다. 이런 활동은 집강소 기간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농민군은 집강소기간 이전에도 서로 ‘접장接長’이라는 평등한 호칭을 썼는데 집강소 기간에는 그것이 일상화되다시피 하였다.

농민군은 신분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비록 이를 글로써서 공식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으나, 농민혁명 과정에서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출한 것이

다. 신분제도의 폐지요구는 결국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는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의 의안을 통해 법적으로 철폐되었다.

 

정치적 지향

 농민군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요구는 민씨정권의 축출과 탐관오리의 제거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농민군의 정치적 지향이 다 드러났다고 볼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정치적 구상을 아는 일일 것이다.

농민혁명은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전개되었지만, 농민군의 정치적 구상은 단계별로 변화, 발전하였다. 경제적 요구는 삼정개혁 문제로 시종일관했고, 사회적 신분문제는 집강소를 기점으로 신분타파운동이 강렬해지는 변화를 보였다. 이에 비해 정치적 구상은 3월 봉기-집강소-9월 재봉기를 거치면서, 농민군의 의식 진전과 더불어 변화되고 구체화되었다.

9월 재봉기의 근본적인 배경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과 내정간섭의 심화였다. 그러므로 농민군은 대원군과의 관련이 없었을지라도 멀지 않은 시기에 전면적으로 항일 재봉기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8월25일까지도 재봉기 움직임을 만류하던 전봉준이 불과 며칠 뒤인 9월 8일 재봉기로 돌아서고, 같은 때에 김개남이 재봉기를 결정짓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밀지를통해 대원군과의 정치적 결합이 현실화된 점이었다.

그러면 농민군 최고 지도자들이 대원군과의 정치적 연합을 기대한 것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봉준의 경우, 그의 정치적 지향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로 생각되는 기록이다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간惡奸의 관리를 축출해서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는 몇 사람 주석柱石의 선비를 내세워서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들은 곧장 농촌에 들어가 상직常職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사國事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합協合해서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전봉준은 ‘군주는 두되, 나랏일은 농민군이 인정하는 몇 사람이 합의하여 담당하는 군민공치의 정치 형태’ 즉 농민군이 참여하는 입헌군주제를 꿈꾸었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한편 농민군의 정치적 지향의 큰 줄기는 외세 축출이었다. 농민군은 3월 봉기 때부터 외세 축출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게 핵심적인 지향은 아니었고, 그 대상도 서양인 선교사와 일본상인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외세축출의 지향이 구체화되고 본격화된 것은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궁궐을 강제로 점령하고 청 일전쟁을 도발하며 내정 간섭을 심화하면서, 일본군이 제1의 적으로 떠올랐다.

이후 농민군은 일본군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반외세(반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농민군의 반외세 항쟁은, 조선정부와 군대까지 장악한 일본군, 그리고 농민군을 더 위험시하여 일본군에 동조한 기득권세력의 공격에 밀려 좌절하고 말았다. 외침이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 농민군은 정면으로, 그러나 외롭게 맞서 싸우다 산화해 갔던 것이다.

 

2. 갑오농민혁명에 흐르는 정신

 갑오농민혁명은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이라는 대사건을 불러왔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주목받을 사건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그런 외형에 있는게 아니라, 농민혁명의 내용 자체에 있다. 갑오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통치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말, 조선은 크게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고치고 모든 백성이 평등의 원칙아래 자유를 누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가는 근대화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의 힘에 대응하는 자주화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층의 위정척사 운동과 개화지식인들의 개화 운동이 그런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일본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이의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갑오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갑오농민혁명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세상을 향한 농민 대중의 일대 항쟁인 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1894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30-4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끝났다.

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군은 전(前)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지주중심의 구조를 혁파하고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소상품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인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 = 자주 근대화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를 가르는 사건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광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근원지였다. 18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해주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장교 살해, 신민회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은 백번 김구의 생애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민족운동, 즉 4.19의거·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산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있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민요와 참요>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민요가 불리어졌다. 동학농민군이 승리하고 집강소가 설치될 무렵 파랑새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예로부터 참요는 정치적인 징후를 암시하는 민요로 은유, 파자, 동음이의어 등을 사용하여 불리어졌다. 대체로 파랑새는 팔왕 즉 전자의 파자로 전봉준을 의미하고 새는 그를 따르는 민중들로 풀이되어 왔다. '녹두'는 크기가 작고 딴딴한데 키가 작은 전봉준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해석하면 이해하기가 힘들게 된다. 그래서 파랑새는 청나라 군사, 청포장수는 민중을 뜻한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청포장수는 당시 녹말묵을 파는 행상으로 당시 천대받던 일반 민중을 일컫는다고 해석한 것이다.

파랑새 노래는 구전되면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여러 형태로 불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 뭣하러 나왔느냐

솔잎댓잎 푸릇푸릇 하절인 줄 알았더니

백설이 펑펑 엄동설한 되었구나

-정읍지방-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잎에 앉은 새야

녹두잎이 깐딱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느냐

-평양지방-

 

새야새야 파랑새야 깝죽깝죽 잘 논다만

녹두꽃을 떨구고서 청포장수 부지깽이

맛이좋다 어서가라

-원주지방-

 

웃녘새는 우로 가고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전주 고부 녹두새야 두룸박 딱딱우여...

-전주지방-

 

 

여기서 웃녘새는 청나라, 아랫녘 새는 일본을 뜻한다.

전주화약 후 일본군이 서울에 진입했을 때 북진을 시도하기위해 봉기했을 무렵 불려진 것이 '가보세' 이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갑오년(1894)에 일어난 농민혁명이 을미년(1895)을 지나 병신년(1896)이 되면 실패하니 그 때까지 끌지 말고 성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자 패배를 아쉬워하는 민중들의 노래가 불려졌다.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양에다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전했네

 

놀미는 논산, 갱갱은 강경의 사투리이다.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디다 두고

전주야 숱애는 유시했노.

 

김개남의 패전을 안타깝게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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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발췌한 문헌>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은 신복룡 교수의 <전봉준평전>과 우윤의<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을 모태로 요약한 글에 불과함을 밝혀둡니다.

이외, <녹두장군 전봉준, 이이화>, <전봉준 전기, > 등 여러 문헌을 읽고 제 주관대로 발췌하여 거의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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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증손자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혀지는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

 

전북대학교 송정수 명예교수가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의 오랜 과제였던 전봉준 장군의 가족사를 명쾌하게 밝혀냈다. 이 책은 송 교수가 연전에 펴낸 《베일에서 벗어나는 전봉준 장군》(도서출판혜안, 2018)에 이어 전봉준 장군을 연구해서 이뤄낸 두 번째 저서이다. 두 저서의 주제와 내용은 연결되기 때문에 함께 읽어야 전모를 알 수 있다.

이들 두 책에서 송정수 교수가 논지를 전개하면서 제시한 주요 근거는 《천안전씨세보병술보》이다. 이 《병술보》는 저자가 처음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의 가문과 가계, 신상은 물론이고 출생지가 고창 당촌이라는 사실 등을 확인했던 자료였다. 이번 저서에서도 이 《병술보》를 근거로 전봉준 장군 선대의 세거지와 이동 과정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녹두장군 전봉준의 직계 후손의 증언을 담다!!
전북대학교 송정수 명예교수가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의 오랜 과제였던 전봉준 장군의 가족사를 명쾌하게 밝혀냈다. 이 책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는 송 교수가 연전에 펴낸 『베일에서 벗어나는 전봉준 장군』(도서출판혜안, 2018)에 이어 전봉준 장군을 연구해서 이뤄낸 두 번째 저서이다. 두 저서의 주제와 내용은 연결되기 때문에 함께 읽어야 전모를 알 수 있다.
이들 두 책에서 송정수 교수가 논지를 전개하면서 제시한 주요 근거는 『천안전씨세보병술보』이다. 이 『병술보』는 저자가 처음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의 가문과 가계, 신상은 물론이고 출생지가 고창 당촌이라는 사실 등을 확인했던 자료였다. 이번 저서에서도 이 『병술보』를 근거로 전봉준 장군 선대의 세거지와 이동 과정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책의 핵심 근거는 전봉준 장군 증손자의 증언이다. 장군의 증손자가 나타난 것이다. 저자도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증손자의 증언을 지금까지 알려져 온 전봉준 장군의 가족 관련 자료와 비교하면서는 놀라움과 함께 직계 후손이 맞다는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전봉준 장군의 증손자는 현재 진주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전장수(全長壽, 1958년생) 씨이다.

증손자의 출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것은 전봉준 장군의 혈손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갑오년에 활동했던 동학농민군들의 후손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전하고 있는 증언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온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에 관해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문헌사료는 역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인멸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이럴 경우, 발굴해서 채록된 증언은 불완전한 문헌자료를 보완해주기도 하면서 역사적인 사실을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그 효용 가치가 크게 인정이 된다. 그동안 역사적 인물인 전봉준 장군에 관해 큰 줄기는 알려져 오긴 했지만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집안·가족·교육·유동생활·교유관계 등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새로운 증언을 바탕으로 모자이크 단편과 같은 자료들을 짜 맞춰서 커다란 그림을 구성하는 것처럼 전봉준 장군 개인과 가족사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
‘전봉준 장군의 증손자’ 전장수 씨의 가족사 증언은 믿을 수 있는가? 저자가 주목해서 정리한 전장수 씨의 주요 증언은 다음과 같다.

① 전봉준 장군의 소년기 일화
② 혼인과 후처 남평 이씨
③ 여동생 전고개(全古介)의 실명 전승
④ 1961년 고창 당촌을 방문한 전장수 씨의 증언
⑤ 전봉준 장군의 장녀 전옥례의 진안 집을 아버지 전익선과 함께 방문한 사실
⑥ 전봉준 장군을 재판한 재판장 서광범에 대한 반감
⑦ 전봉준 장군의 유해 수습과 무덤을 방문한 이야기

전봉준 장군이 18세 이전에 전북 태인 감산면 황새마을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자들이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전장수 씨는 이와 관련한 전봉준의 소년기 일화를 전해준다. 어느 친척집 잔치에서 젊은 양반이 무례한 행동을 하자 이를 시원하게 논박했는데, 이를 목격한 어느 학자가 훈도를 자청하여 서당 인근 태인의 황새마을로 이주했다고 했다. 일부 전공자만 아는 이야기가 말 그대로 뜬금없이 전장수 씨 증언에서 나왔다.
또 전봉준 장군의 첫 부인인 여산 송씨(1851~1877)는 큰딸과 연년생인 둘째 딸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났다. 전봉준 장군은 갓난 딸을 기르기 위해 젖어미를 들여야 했다. 그때 돌림병으로 전 남편과 아기를 잃어버린 남평 이씨가 들어왔고, 결국 전봉준 장군과 약식혼례를 치르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전장수 씨의 이런 증언은 집안에서 전해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남평 이씨가 낳은 두 아들 중 행방불명된 아들이 전장수 씨의 조부인 전용현(일명 전의천, 1886~1941)이라고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간 전봉준 장군의 가족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여동생의 이름을 전장수 씨가 전고개(全古介, 1861~1951)라고 증언한 것이다. 전승 상황도 실감이 난다. 전장수 씨가 대학입시에 합격해서 축하를 받기 위해 동대문 밖 음식점 진고개(珍古介)에 갔을 때 부친이 대고모할머니의 이름과 음식점 이름이 한자까지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전고개는 유명한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중 한 사람인 손여옥의 부인 이름이다. 그 손자인 손주갑(孫周甲) 씨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 이후 오랫동안 사무총장으로 전국의 유족들을 연결하며 실질적으로 유족회를 지켜왔다. 유족회 사무총장이 바로 전봉준 장군 여동생의 손자였던 것이다.
전장수 씨가 고창 당촌을 방문한 사실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전봉준 장군의 생가는 오지영이 『동학사』에서 고창 당촌이라고 했지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을 전후해서 학자들의 논쟁을 거쳐 확인된 바 있다. 그런 당촌을 전장수 씨가 그의 나이 네 살 때인 1961년에 고모 전오녀의 아들인 진의장을 따라서 방문했다고 했다. 방문 당시 형과 나눈 기억 속의 상세한 여러 이야기는 꾸며낸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방문이 사실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1969년에 부친 전익선과 함께 진안으로 전봉준 장군의 장녀 전옥례를 찾아간 증언도 중요하다. 당시 전옥례 고모할머니로부터 들은 “니가 우석(전장수 씨 아명)이구나.” “내가 전봉준 장군 딸이다. 네가 우리 집 장손이구나. 잘 커서 집안을 이어라.” “내가 몸이 안 좋아 밥 한끼 따뜻하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등의 이야기도 실감나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집안 내부 구조에 대한 전장수 씨의 기억은 전옥례 할머니 집안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긍정하고 있거니와 그의 증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증언 가운데 조부와 부친이 유독 서씨에 대해 갖는 반감이 강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로 인해 부친 전익선이 서씨 성을 가진 부인과 이혼하기까지 했던 것인데, 전봉준 장군에게 사형판결을 한 재판장이 법무대신 서광범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재판장 한 사람이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생사여탈을 결정하지는 못하지만, 후손 집안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겨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더해 전장수 씨는 전봉준 장군이 처형된 이후 그 시신이 어떻게 수습이 되고, 아들 용현(의천)에게 어떻게 알려졌으며, 이후 어디로 이장이 되었는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아울러 1971년 그의 나이 14살 때 부친을 따라 장군의 묘역을 방문하면서 나눈 여러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에 관한 이야기 역시 매우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증언하고 있거니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이상의 몇 가지만 전장수 씨가 증언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부록에는 네 편의 자료를 전재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방대한 증언의 규모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밖에도 수많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자료인 <동학대장 전봉준 장군의 가족사>는 고조부 전기창부터 시작하여 증조부 전봉준의 가족 일대기를 기록했고, 이어서 전봉준의 아들인 조부 전용현과 부친 전익선의 삶의 역정, 마지막에는 전장수 씨 본인이 살아온 과정을 정리했다.
전장수 씨는 2005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당시 동학농민혁명 유족 등록 범위가 손자까지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의 모친 이름으로 신청서를 작성해서 경남도청에 제출했으나 반려되었다. 이유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로 전장수 씨는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의 담임목회 활동을 위해 해외에 쭉 나가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족 신청을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이 증언 내용이 모두 정확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간 연구자들이 채록한 동학농민군 후손들의 증언은 오류가 적지 않았다. 120여 년 전의 사실을 후손들이 모두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집안에 내려오는 일화도 과장되거나 덧붙인 내용이 나올 수 있다. 후손이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책을 읽고 공부한 것이거나 신문과 방송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전하기도 한다. 오히려 그런 과장이나 오류가 나오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다. 그러한 사정은 역사연구자가 인용하는 많은 관찬 및 사찬 사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료비판을 전제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저자 송정수 교수도 엄밀한 검증과 비판을 거쳐서 장수씨의 증언 내용을 저술에 활용하였다.
전장수 씨의 증언 내용은 큰 벽화의 수많은 조각과 같다. 이 같은 재료를 제공한 전장수 씨의 증언이 갖는 진실성을 부정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 장군에 관한 연구와 자료는 무수히 많다. 전장수 씨는 상당한 수준으로 관련 자료를 읽어왔지만 가전(家傳) 일화와 후손이 살아온 이야기를 뒤섞지 않았다. 전장수 씨의 기억과 절제력은 상당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의 증언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는 조부와 부친, 그리고 전봉준이 살고 활동한 곳을 쓴 여러 지명들이 나온다. 전봉준 장군과 관련한 지역은 유년시절을 보낸 고창과 함께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낸 고부와 금구, 태인이 중심이다.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한 장년기에는 무장과 장성, 전주와 정읍, 그리고 남원과 나주, 논산과 공주, 금구와 순창 등지가 주요 활동지였다.
전봉준이 살거나 활동했던 연고지는 동진강 수계로 이어져 있다. 동진강은 정읍 산외면과 칠보면에서 흘러내려 옹동면을 거쳐서 정우면과 이평면을 지난다. 그리고 부안 백산면과 동진면으로 흘러가 계화면에서 서해로 들어간다. 지도를 보면, 전봉준 장군은 정읍 동부의 산골지역 마을들에서 거주했다. 동진강 북쪽 지류인 원평천 인근의 감곡면 계룡리의 황새마을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그 아래 상두산 남쪽 기슭의 산외면 동곡리의 지금실에서 살았다. 지금실은 역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이 살았던 마을이다.
전봉준이 남평 이씨와 혼인 살림을 차린 곳은 산내면 능교리의 소금실이었고, 이후 이평면 장내리의 조소리로 이주를 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한 후 불타버린 조소리 집을 떠나서 산외면 동곡리의 원동골로 이주하였다. <전봉준공초>에서 전봉준은 태인에 살다가 고부로 이사해서 몇 해를 살았고, 그 집이 불에 타서 태인 산외면 동곡에 가서 살았다는 말을 직접 했다. 전봉준 장군 판결선고서에 기재된 집도 태인 산외면 동곡이었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모두 정읍시 경내에 해당하는 곳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전한 후 순창의 민보군에게 사로잡힌 곳도 소금실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쌍치면 금성리의 피노리였다.
갑오년에 1차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주력은 전북평야와 함께 대둔산과 모악산과 내장산을 잇는 노령산맥에 접한 군현의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그 중심부를 동서로 흐르는 동진강 유역에 배들평야가 펼쳐졌고 만석보가 위치해 있다. 여기가 고부항쟁과 황토현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조선후기 농민들이 결성한 민군이 무능하고 부패한 양반관료가 지배한 관군을 처음으로 격파한 역사의 현장이 동진강 유역에 펼쳐진 들판 가운데 있었다. 이 책에서 송정수 교수가 무수히 답사하면서 확인한 전봉준 장군의 41년 격동의 삶의 무대가 바로 이들 지역이다.
저자 송정수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중심 무대의 하나인 전북 부안 출신으로 전봉준 장군의 족보인 『천안전씨세보병술보』를 발굴해서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를 시작했다. 이 족보 기록을 토대로 보명(譜名)이 병호(炳鎬)로 기재된 인물이 전봉준이고, 문효공파에 속했으며, 생가가 고창 당촌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 그의 초기 업적이었다. 전북대에 재직하면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박명규, 신순철 교수 등과 함께 기념사업 논의에 참여하였다.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전라북도 유족등록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송 교수는 서울 종로에 전봉준 장군 동상을 건립할 때 학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2018년 여름에 개최한 학술발표회에서 <족보에 나타난 전봉준 장군 외가 검토>라는 주제를 발표하였다. 당시 이 발표회에 참석한 전장수 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이 책의 머리말에 붙인 ‘전봉준 장군 증손자 전장수 씨와의 만남, 그 이후’의 내용에서 보듯 이 무렵부터 그 가족사를 본격 추적하기에 이른다.
이 책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전장수 씨의 증언만 채록해서 소개한 것이 아니라 전봉준 장군과 그 가족에 관한 문헌자료를 망라해서 검토하고 실증연구를 수행한 성과물이다. 이 책은 많은 주석을 붙여서 논지 전개의 근거를 밝혔다. 편집 체제 때문에 미주로 배치했지만 전문 연구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전후 사정을 추정하는 내용이 많이 들어갔다. 전봉준 장군의 삶과 활동, 그리고 후손들이 살아온 과정을 모두 근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거주 이전 배경과 교유관계를 비롯한 여러 사실을 추정도 포함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게 될 것이다.
송정수 교수가 저술한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는 전장수 씨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지만, 이 저서를 통해 나라를 위해 분투노력한 동학농민군과 그들의 후손을 보는 시각이 새롭게 정립되기를 희망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송정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음.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전북대학교 명예교수임. 대표 논저로 《베일에서 벗어나는 전봉준 장군》(혜안, 2018), 《중국 정사 외국전이 그리는 ‘세계’들》(공저, 역사공간, 2016), 《중국근세향촌사회사연구》(혜안, 1997), <‘삼립삼절(三立三絶)’을 통해서 본 명조의 하미(Hami) 지배의 변화상>(《명청사연구》 45, 2016), <《天安全氏世譜丙戌譜》를 통해 본 全琫準의 家系와 出生地에 대한 再硏究>(《歷史學硏究》 38, 2010), <청 중기 이후 ‘반청복명’ 의식의 전승과 굴절>(《동양사학연구》 108, 2009), <전봉준의 가계와 출생지에 대한 연구>(《조선시대사학보》 12집, 2000) 등이 있음. 명청사학회, 동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청사학회, 동양사학회, 역사학회 평의원임.

 

  목차

책머리에
머리말|전봉준 장군 증손자 전장수 씨와의 만남, 그 이후...

1부 전봉준 장군의 선대 가문과 그의 신상 및 유동생활
1. 선대 가문의 내력
1) 충청도에서 세거
2) 전라도로 이주
3) 흩어진 집안 당촌에서 합류
2. 조부와 부친의 행적
1) 조부 전석풍의 행적
2) 부친 전기창의 행적
3. 전봉준 장군의 신상과 유동생활
1) 이름과 출생(출생 연도, 출생지)에 관하여
2) 당촌에서 고부, 태인으로 이사
3) 유동생활 중 동지들과의 만남

2부 동학농민혁명 시기 전봉준 장군의 활동과 행적
1. 금구취회와 고부봉기 주도
2. 무장기포에서 황룡촌 전승까지
3. 전주 입성과 화약, 폐정개혁을 이끌다
4. 2차 농민봉기를 주도

3부 전봉준 장군의 죽음과 묻힌 곳
1. 전봉준 장군의 피체와 죽음
1) 체포
2) 심문
3) 죽음
2. 전봉준 장군이 묻힌 곳
1) 미완의 발굴
2) ‘장군천안전공지묘’에 대한 필자의 기존 견해
3) ‘장군천안전공지묘’와 관련한 전장수 씨의 증언
4) 재개된 발굴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새로운 과제

4부 전봉준 장군의 아내와 자식 이야기
1. 전봉준 장군의 아내
1) 전처 여산 송씨
2) 후처 남평 이씨
2. 전봉준 장군 두 딸의 행적과 행방
1) 누가 큰딸이고 작은딸인가?
2) 두 딸의 생년
3) 작은딸 성녀의 행적
4) 큰딸 옥례의 행적
3. 전봉준 장군 두 아들의 행적과 행방
1) 두 아들의 이름과 생년에 대해서
2) 두 아들의 행적

5부 전봉준 장군 혈손들의 이야기
1. 손자 전익선의 삶과 행적
1) 가출과 오랜 방랑생활
2) 결혼과 부자 상봉
3) 또다시 긴 방랑생활
4) 재혼과 어려운 가정생활
5) 뿌리를 찾고자 노력한 노년생활
2. 증손자 전장수의 삶의 역정
1) 형을 따라 고창 당촌을 방문한 기억
2) 전옥례 고모할머니와의 만남
3) 부친을 따라 전봉준 장군 묘소 찾음
4) 어려운 가정생활과 방황
5) 청장년 시절 삶의 역정
6) 부친의 유언과 목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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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24-05-04>

‘전봉준 증손’ 주장하며 밝힌 가족사…학계 “정밀한 검증 필요”

전봉준 장군의 장녀 전옥례(1876~1970)의 생전 모습. 도서출판 혜안 제공
                                    전봉준 장군의 장녀 전옥례(1876~1970)의 생전 모습. 도서출판 혜안 제공
 

“우칸(위 칸)에 덕석 있는디, 거기서 마지막 살다 나가서 (장군이) 쌈하다 죽었다게.”

지난달 27일 찾아간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160-3번지. 소담한 한옥 대문 담벼락 왼쪽에 ‘전봉준 장군 마지막 거주지’라는 알림판이 붙어 있었다. 집주인 박옥자(92)씨는 전봉준 장군의 가족들이 헛간 터에 있던 집에서 살았다고 증언했다. 전봉준 장군의 공초(심문 기록)에도 거처지가 “태인 산외면 동곡”으로 나온다.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거주지였던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160-3번지. 원동골로 불리는 이 집 헛간 터가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거주지였다.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2021·혜안)의 저자인 송정수 전북대 명예교수(역사교육과)의 설명을 종합하면, 전봉준 장군은 2남 2녀를 뒀다. 첫째 부인 여산 송씨는 딸 전옥례(1876~1970)와 전성녀(1877~1938)를 낳고 해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전봉준은 홀로 살던 남평 이씨 이순영을 젖어머니로 들였고, 정화수를 앞에 두고 약식으로 혼인했다. 부인 이씨는 전용규와 전용현 두 아들을 낳았다.

 

부인 이씨는 전봉준이 역적으로 몰리자 숨죽이며 살았다. 송 교수는 “남평 이씨가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후 관군들이 농민군 가족 색출에 나서자 인근 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했다”고 밝혔다. 차녀 전성녀는 1892년 원동골에서 멀지 않은 지금실 강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 살고 있었다.

전봉준 장군의 증손이라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유족 등록 신청을 했다가 부결 통보를 받은 전장수씨. 도서출판 혜안 제공

부인 이씨는 장남이 폐병을 얻자, 차남 전용현을 차녀 전성녀에게 보냈다. 1896년께 장남이 사망했고, 이씨도 폐병에 걸렸다. 그즈음 차남 전용현은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지고 1897년 무렵 마을에서 도망쳐 나간 뒤 행방불명됐다고 전해졌다. 큰딸 전옥례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사찰로 몸을 숨겼다.

 

이 때문에 그간 전봉준의 혈손은 외손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전봉준 장군의 증손이라는 전장수(1958년생·아명 우석)씨가 2018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유족 등록 신청을 하면서 친손 존재 여부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송 교수는 “처음엔 과연 장군의 혈육이겠느냐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전장수씨가 선대 어른들의 행적을 정리한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전장수씨가 밝힌 가족사는 처절하다. 차남 전용현(1886~1941)은 1906년 전남 함평에서 만난 이양림과 결혼해 무안에서 살았다. 전용현의 장남 전익선(1909~1998)은 1953년 목포에서 김연임과 혼인해 서울로 이주한 뒤 2남 2녀를 뒀다. 전익선의 장남이 전장수씨다. 그는 1969년 12살 때 전북 진안에서 고모할머니 전옥례(전봉준의 장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했다. 당시 전옥례는 “내가 전봉준 장군의 딸이다. 네가 우리 집 장손이구나. 아주 잘 컸네. 우리 집 장손이니까 들키지 말고 꼭꼭 숨어서 잘 자라 집안의 대를 꼭 이으라”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전봉준의 차녀 전성녀가 살았던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630번지 집터.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거주지와 불과 2㎞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전성녀의 옆집이 동학농민혁명 김개남 장군의 고택 터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 등록 업무를 위탁받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21년 11월께 “전봉준 장군 집안 후손을 입증할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며 전장수씨의 유족 등록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사학과)는 “전장수씨는 전봉준 장군의 여동생 전고개(1861~1951)의 존재를 처음으로 증언했다. 수십년간 동학농민군의 후손 증언을 채록해온 경험에 비추면, 일부를 제외하곤 전장수씨의 증언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학계와 정부에서 정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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