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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3)/2차기포

by 싯딤 2009. 9. 14.

4. 2차 기포

안핵사 이용태, 농민봉기의 물줄기를 바꿔놓다.

고부관아를 습격한 뒤 각자 생업으로 돌아간 농민들은 이것으로 역사의 한 장이 매듭지어졌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고부 현감으로 새로 부임한 신관 사또 박원명이 진심으로 선처를 베풀어 민중의 상처를 씻어 주려고 노력함으로서 고부 민란은 원만히 해결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덮어두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무휼하고 진상이 어떠한 지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안핵사란 조선 후기에 여기저기서 민란이 발생하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임시직이었는데 이것이 농민봉기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용태는 고부의 안핵사로 부임해오자마자 선처를 베풀려는 박원명의 처사를 꾸짖고, 이 지역이 왕건 이래 반역향으로 지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난민들을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용태는 역졸 800명을 대동하고 고부로 내려와 박원명이 천명한 것들을 모두 번복하고는 ‘민요 두목들’을 색출한다며 역졸들을 풀어 마을을 뒤져 닥치는대로 농민들을 구타하여 고기 꿰듯 얽어갔다. 그는 고부뿐만 아니라 부안, 고창, 무장 등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붙잡아 들였다. 한번은 무장 선운사에서 다소 생활형편이 나은 사람들을 동학군이라 트집 잡아 결박하여 압송하던 중 손화중 세력에게 걸려 정읍 연지원에서 매를 맞고 도망친 일도 있었다. 이용태를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전봉준이 그를 놓아주라 하여 풀려났다고 한다. 역졸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욕보이고 민가에 서슴지 않고 불을 질렀다. 조소리의 전봉준 집도 이 때 불에 타 없어졌다.

 

                                                        동곡리 전봉준 옛 집, 당시 불 타 없어졌다.

 

이용태는 나름대로 민란의 원인을 파악하여 조정에 올리기도 했는데 실정을 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토지제도가 해이해진 점.

-전운소가 부족미를 채우기 위해 수탈한 점.

-유망한 곳의 세를 받을 수 없었던 점.

-황무지를 개간한 곳에 과세한 점.

-개간하지 못한 황무지에 땔감을 과세한 점.

-만석보에 과세한 점.

-팔왕보에 과세한 점. <고종실록. 1894.4.24>

 

일이 이렇게 되자 고부관아로 쳐들어갔던 농민들뿐만 아니라 이제 모든 민심이 탐관오리를 몰아내려고 한 일이 오히려 이리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맞이한 꼴이 되었다며 들끓기 시작했다.

 

 

무장에서 황룡촌까지

고부관아에 쳐들어갔다가 농민들을 해산시킨 뒤 어디론가 사라졌던 전봉준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은밀하게 무장으로 발길을 향했다. 무장은 그가 태어난 고창 당촌과는 지척이며 동학도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하고 있던 손화중이 있는 곳이었다. 전봉준은 손화중을 찾아가 다시한번 가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손화중은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했으나 밤을 세우며 고성이 오간 논의 끝에 ‘죽어도 한날, 살아도 한날’ 이라는 맹세를 하고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태인의 김개남, 원평의 김덕명을 만나 봉기를 약속하고 거사일을 1894년 3월 21일로 잡았다. 장소는 무장 동음치 구수마을 앞 들판(현 공음면 구암리)으로 정했다. 이곳을 거사 장소로 정한 이유는,

첫째, 무장 접주 손화중의 포가 전라도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손화중의 농민군은 3,000명에 이르렀고 이미 1년 전 보은집회 때도 손화중은 금구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동학도를 모았었다. 따라서 무장에 도소를 설치하면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대규모 동학세력을 모아 휘하에 둘 수 있었다.

둘째. 전봉준과 손화중의 절친한 친분관계와 동지적 결속관계 때문이었다. 손화중은 전봉준보다 6살 위였으나 전봉준의 학식과 지략이 탁월했기 때문에 대접주이면서도 자기의 윗자리로 받아들였다. 또한 전봉준의 친척들도 이 지역에 많이 살고 있었다.

셋째. 무장이 지리적으로 고부에서 비교적 멀지않은 동학조직의 거점이었기 때문이었다.<신용하, 고부민란의 사발통문, 일조각, 1993>

 

1월10일, 고부관아를 점거했다가 스스로 해산한 지 80여일 만에 다시 봉기한 것이다. 이번 봉기는 지난번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지난번은 자연발생적이었지만 이번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고 동원되었다. 이들은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전봉준이 총대장인 동도대장에 추대되고 손화중, 김개남이 총관령, 김덕명, 오지영이 총참모, 최경선이 영솔장, 송희옥·정백현이 비서로 선임되었다. 지도부가 결성되자 전봉준은 전국에 격문을 띄워 모든 민중이 참여할 것을 외쳤다.

 

우리가 의를 일으켜 여기에 이름은 그 본뜻이 결단코 다른 데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갑오 정월 일

호남창의대장소 재백산在白山 <오지영, 동학사. 날짜는 오류이며 3월25일 선포한 것이라고 함(정창열)>

 

격문을 띄우자 3일 만에 손화중 포에서 1,500여 명, 무장지역 1,300여 명, 정읍 1,200여 명, 태인에서 2,000여 명이 지역 두령들 영솔 하에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대정소에서 지휘부와 전략을 짠 후, 2월 20일경 재차 격문을 띄웠다.

 

백성을 지키고 가르쳐야할 지방관은, 다스리는 도를 모르고 직책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하여 전운영이 창설됨으로서 폐단이 극심하니 민중들이 도탄에 빠졌고 나라가 위태롭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구나. 원컨대 각 읍의 여러 군자들은 한 목소리로 의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

 

무장에 집결한 농민혁명군은 '보국안민'이라 쓴 깃발을 필두로 청황적백기의 오색기로 표식을 삼아 대오를 정렬하였다. 전봉준은 3월 21일을 봉기일로 정한 다음 이번 거사의 대의를 4개항의 행동지침으로 선포하였다.

1)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마음대로 잡아먹지 말라.

2)충효를 모두 잘 보전하고, 세상을 구제하고 인민을 편안케 하라.

3)왜와 오랑캐를 모조리 쫓아 없애고, 성도聖道(서울)를 깨끗이 하라.

4)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하라. <정교鄭喬, 대한계년사,국사편찬위원회,1971>

3월 21로 정한 것은 이 날이 최시형의 탄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사 전날인 3월 20일, <창의문>을 발표하여 혁명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창의문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라.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인자하고 자식이 효도한 뒤에야 비로소 가정과 나라를 이루어 능히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자애하시고 정신이 밝고 총명하시어, 지혜롭고 현명하고 어질고 정직한 신하가 잘 보좌하여 다스리게 한다면 요순의 덕화와 문경文景(한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다진 문제를 일컬음)의 치적을 가히 해를 보는 것처럼 바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며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만을 일삼으면서, 충성된 선비의 간언을 요망한 말이라 이르고, 정직한 신하를 비도라 하니,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하는 관리가 많으니 인민들의 마음은 날로 나쁘게 변하여 들어와서는 생업에 즐거움이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도다. 학정이 날로 심하여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수가 드디어 무너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도다.

관자가 이르기를, "예의염치가 펴지 못하면 나라가 곧 멸망하고 만다."고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도 더 심하다. 공경公卿부터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기 몸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꾀에만 빠져 있으며, 사람 뽑아 쓰는 곳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만들고, 과거 보는 곳을 교역하는 저자거리로 바꾸어 놓았도다.

허다한 재물은 나라 창고에 넣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사로이 저장하면서, 나라에는 누적된 빚이 있는데도 이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탕하고 안일에 빠져 놀면서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으니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도다. 수령 방백의 탐학이 참으로 이러하니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으리요.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바깥으로 향제를 세워 오직 제 몸만을 온전히 하려는 방책에 힘쓰면서 부질없이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고 있으니 어찌 옳은 이치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나, 임금의 땅을 갈아 먹고 살고 임금이 주신 옷을 입고 사니, 어찌 나라의 위태로움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8도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창생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사는 맹세를 하노니,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만한 일이기는 하나 결코 두려워 말고 가자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모두 성상의 덕화를 기린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갑오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창의문을 보면 전체적으로 유교적, 봉건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의 봉건적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혁명성은 지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의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농민들의 반응은 대단하였다. 집집마다 모여앉아 “하늘이 무심하랴. 이놈의 세상 얼른 망해야 한다. 망할 것은 얼른 망해버리고 새 세상이 와야 한다.” 는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다.<오지영. 동학사>

 

무장 기포장소 (흑백은 조성되기 전), 기포장소에 세워진 기념탑

                                                   

3월 20일, 마침내 진격의 나팔이 울렸다. 전봉준,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은 무장 구수네 훈련장에서 고부를 향해 출발하였다. 전봉준은 상복차림에 삿갓을 쓰고 백마를 타고 대장기를 펄럭이며 행진하였다. 이 무렵, 전라감사 김문현과 안핵사 이용태, 각지 수령들은 고부 민란도 여느 민란처럼 금새 수그러든 것으로 여기고, 전주 한벽루에 모여 기생을 끼고 풍악을 울리며 질탕하게 놀고 있었다.

3월 21일, 농민군 4,000여 명이 흰 무명의 머리띠를 매고 창과 칼, 5척의 죽창을 들고 향교와 각 관청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무장 굴치를 넘어 고창을 거쳐, 22일, 흥덕현의 사포, 후포를 지나 23일에는 부안 줄포를 거쳐 고부로 향했다. 일부는 정읍으로 진출했다. 이들이 정읍으로 향한 것은 그 지역에 봉기를 알리고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23일 밤 곧장 고부관아로 쳐들어 가 점령하니 이용태는 벌써 달아나고 없었고 졸개 몇몇이 지키고 있었다. 25일 고부 백산에 진을 쳤다. 각 지역에서 모여든 농민군이 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고부 백산지역은 물론 영광, 옥구, 만경, 무안, 임실, 남원, 순창, 진안, 장수, 무주, 부안, 장흥, 담양, 창평, 장성, 능주, 광주, 나주, 보성, 영암, 해남, 곡성, 구례, 순천, 전주 등지에서 모여들었다. 김개남도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와 합류하였다. 백산 일대는 밤늦도록 군막치는 망치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군데군데 화톳불이 찬란했다. 황현은 “비도들이 열흘사이에 수만 명에 이르렀는데 동학과 농민들이 이때부터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전봉준 등이 무장 관아에 크게 모여 민간에게 포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늘어난 농민군을 통제하기위해 <12개조 군령>을 만들어 공포하고 대오를 짜 훈련을 시작하였다.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든 농민군들이 훈련을 받는 광경에서 “일어나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다”라는 말이 이 무렵 생겨났다.

 

<12조 계군호령>

1.항복한 자는 대우한다.

2.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4.순종하는 자는 경복한다.

5.도주하는 자는 좇지 말라

6.굶주린 자는 먹인다.

7.간사, 교활한 자는 없애버린다.

8.빈한한 자는 구해주라.

9.불충한 자는 없애버린다.

10.거역하는 자는 효유하라.

11.병자에게는 약을 주라.

12.불효한 자는 죽인다.

우 조목은 우리들 학행의 근본이니 만약 호령을 어기면 감옥에 가둔다.<김윤식, 속음청사>

 

전봉준은 또 농민군이 진군하면서 지켜야 할 사항을 주지시켰다.

 

<동도대장 약속>

1) 항상 적을 대할 적에는 병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큰 공으로 심는다.

2)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절대 인명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긴다.

3) 항상 행진하여 지날 적에는 절대 사람과 가축을 헤쳐서는 안된다.

4) 효제충신이 사는 마을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않는다.<동비토록>

 

이에 따라 농민군은 행진하면서 논밭에 자라는 곡식을 밟지 않았으며, 노인, 어린애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면 얼른 가서 대신 져다 주기도 했다. 또 마을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더라도 강요하지 않았으며, 돼지나 닭 같은 가축도 맘대로 잡아먹지 않았다. 특히 어르신을 보면 깍듯이 대하였다. 일본인 기자가 <동경일일신문>에 쓴 기사이다.

 

동학당은 술과 여자를 탐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등의 규율을 만들어 지켜, 조금도 농민을 해치는 일이 없었다. 왜 농민군으로 참여했느냐고 물으면 조정의 잘못된 정치를 고치고 왜를 추방하여 백성의 만복을 도모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고부에서 전주로 진격할 때에 구경꾼들이 몰려 산을 이루어 논밭이 다 밟혀 엉망이 되자 공포를 쏘아 논밭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 한 예이다. 그들이 마을에 들어 올 때에는 잡다한 물건일지라도 그에 상응하는 돈을 주고 사서 상업적으로도 약간의 이익을 주었다. 그래서 위해의 걱정이 없어서 백성들 사이에 자뭇 평판이 좋았다.

동학은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보국안민 한다"고 외치며, 살인과 약탈을 하지 않고 오직 탐관오리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매천야록, 황현>

 

4월 3일, 농민군은 일부는 백산에서 고부로 이동하고 일부는 태인에 주둔하였다. 4일에는 농민군 수천 명이 금구, 원평에서 현감 이철화를 감금하고 무기를 빼앗았다. 전봉준은 백산의 관창을 열어 관미 4,000석을 곤궁한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배고픈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루가 다르게 세가 불어났다.

백산 소식을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도저히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중앙에 보고한 다음 서둘러 무남영의 군사를 소집했다. 고을 단위로 임시 동원한 향병들과 보부상, 백정, 무당의 지아비들까지 끌어내 출전시켰다. 이렇게 동원된 숫자가 전주감영군 250명에 향병 1,000여명, 잡일꾼 수백 명이었다. 이들이 5일, 줄포에 집결하였다.

 

피로 물든 황토재

농민군과 관군이 최초로 접전한 ‘황토현 전투’는 갑오농민혁명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는 혈전의 역사다. 원래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태인, 금구를 거쳐 곧장 전주로 공격해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전주영 관병들이 출동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금구에서 다시 고부로 돌아와 도교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밀서 형식의 통문을 돌려 혁명의지를 천명하였다.

 

<통문>

임금의 밝은 지혜가 위에 있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으니 누가 민폐의 근본인고? 이는 포흠질하는 탐관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포흠질하는 관리의 근본은 탐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탐관의 소기所紀는 집권을 탐람하는 것에 있다. 오호라, 난이 극한즉 다스리고, 흐린즉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지금 우리들이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이 마당에, 어찌 관리와 백성의 구별이 있겠는가. 그 근본을 캐면 관리 역시 백성이니, 각 공문부의 이통吏逋(관리들의 포략질)은 민막民瘼(인민들에 대한 병폐)의 조건이므로 몰수해 와서 보고하라. 또한 시각을 어기지 말기를 특별히 명심하라.

 

<통문 1894. 3. 29>

오늘 우리들의 의거는 위로는 종묘사직을 보호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죽음으로 맹세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우두머리들은 다음 차례대로 바로잡는 것을 잘 살펴보라.

-전운영이 아전과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를 만드는 일이다.

-균전관이 폐해를 없앤다고 하면서 폐단을 만드는 일이다.

-각 시정에서 돈을 나누어 세를 거두는 일이다.

-각 포구에서 선주船主가 늑탈하는 일이다.

-다른 나라의 잠상들이 비싼 값으로 쌀을 사가는 일이다.

-염전의 시장세이다.

-각 창의 물건에 대해 도고가 이익을 취하는 일이다.

-백지징세와 송전의 개간이다.

-환곡은 눕혀놓고 본전을 뽑는 일이다.

위의 조목마다 폐막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지만 우리 사농공상으로 업을 삼아 먹고사는 인민들은 마음과 힘을 합하여 위로는 국가를 돕고 아래로는 죽을 사람들을 편안케 함이니 민생에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농민군 지도부는 결전에 앞서 다시 한번 방문을 통해 기의하게 된 이유와 결전의 의지를 밝혔다.

 

방문 榜文 (1894. 4. 10.)

지금의 사세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다. 날랜 군사와 용맹스런 장수들이 각각 그 믿는 땅에 있고 각 고을의 재주있는 자들은 천리千里에 보내어 국왕의 일에 힘쓴다.

대저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형편으로 말하면, 집권 대신들은 모두가 왕의 외척인데 주야로 하는 일이란 오로지 자기의 배만 채우기만 할 뿐이고, 자기의 당, 자기의 파만 각 읍에 내려보내 백성 해치기를 일삼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찌 이를 감내하고 살 수 있으리요?

초토사 홍계훈은 본래 무식한 사람이라, 동학의 위세에 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출병하고서 망령되게도 공功이 있는 김시풍을 죽이고는 이것으로 공을 삼으려 하니 이런 자는 반드시 형을 받고 죽을 것이다.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는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므로, 이 때문에 우리 동학이 크게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함이니라.

 

비 내리는 4월 6일, 농민군이 도교산에 집결하여 두승산에서 동북으로 뻗은 시목리 고지인 사시봉에 진을 치고 있었다.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전주를 떠나 뒤를 쫓아 오던 전라감영군은 해질 무렵 황토재 아래 산등성이에 이르러 진을 치고 머물렀다. 양 진영은 두승산 줄기에 이어진 깊은 계곡지대를 사이에 두고 1.5km 정도 떨어져 함성을 지르면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서 관군은 농민군 진영이 조용하자 멀리 달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무장을 풀고 술판을 벌이는 등 긴장을 완전히 풀고 있었다. 3경이 지나고 밤이 깊어가는 데도 경비서는 군사 한 명 없었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관군의 정면을, 한 부대는 뒷 진영을 기습하기로 하였다. 농민군은 창검을 지니고 밭둑에 바싹 엎드려 소리죽여 전진하여 관군진영에 이르렀다. 관군들 가운데는 보부상들도 있어 이들은 평상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관군의 순찰병들은 보부상으로 여겼는지 검문도 하지 않았다. 황토현 고지에 도달하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였다. 기습을 당한 관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패퇴하였다. 당시 관군으로 싸웠던 보부상 한 사람이 살아남아 회고한 기록이다.

 

“4월 6일 아침, 고부를 떠나 징집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군량을 운반하였다. 비가 온 뒤라 짐 실은 수레와 말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큰 짐만 챙겨서 진군하였다. 두승산 동쪽 장거리에서는 좁은 계곡 길을 더듬으면서 올랐는데 길이 고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군사들은 매우 원기왕성하여 행진가를 부르는 등 왁자지껄하였다. 수차례 휴식을 취하면서 저녁 무렵 황토현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짐을 풀고 진지의 막사를 만든 다음 밥을 지어 먹었다. 모두 배가 고파 저녁밥을 달라고 크게 소리쳤는데 지도자 한 명과 10여 명의 군사가 소고기와 술을 장만해 온 것을 먹고나서 기운을 회복하고 ‘아둔한 동학 사람들은 모두 나무껍질이나 먹고 계곡물로 배를 채워 당장 내일은 걷지도 못할 것’이라고 비웃고 있었다.

이런 유희에 빠진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처음에는 경계를 섰으나 건너 동학군 진영이 너무도 조용하고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안심하고 그 후부터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 잠이 들었는데 나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결에 적이 습격해 온다는 커다란 외침에 잠이 깨었는데 이리저리 도망가는 사람, 엎어지는 사람, 울부짖는 사람, 엎드려 있는 사람, 숨는 사람 등 주위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약 2,000명 가량의 관군 가운데 무기를 가지고 대적한 사람은 매우 적었고 나머지는 자다가 죽거나 앉아서 칼을 맞는 등 그 모습은 매우 참혹하였다.

나는 황토현 북쪽 소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겨우 지름길을 더듬어 백산 서쪽 해안까지 갔다가 배를 타고 아산 쪽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동쪽으로 도망한 사람들은 동학군의 별동대에게 습격당하였고, 곳곳에 수리의 작은 샛강이 있어서 그냥 건너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서쪽으로 간 것이다. 7일 동트기 전까지 대개 살해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내 동료 보부상 70~80명이 죽었다.<국지겸양, 근대조선사. 1939>

 

황토재에 세워진기념관                         황토재 정상 기념탑에서 내려다 본 황토현 일대

 

황토현 전투는 민란의 성격에 동학이란 종교적 성격이 가미된 전투로서 관군 측은 영관 이경호, 서기 유상문 등 1,000여 명이 죽고 군량미 400석, 소총 600자루, 대포 1문을 빼앗기는 등 농민군이 크게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또, 농민군이 군 경계를 넘음으로서 민란의 성격에서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고, 이 전투에서 얻은 무기가 농민군의 전투력을 강화시켜 이후 전주성 함락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전주에 내려온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경군은 황토재에서 감영군이 무참하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절반이 도망가 버렸다. 조선 최고의 정예군인 장위영 소속 군사들이었다.

 

기수를 남쪽으로

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했다는 소문은 금새 사방으로 퍼졌다. 이 전투에서 전봉준은 상복차림으로 농민군을 지휘하여, 장차 조선의 운명은 전봉준 손에 달려있고, 세상은 동학농민군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동학농민군은 승리한 여세를 몰아 곧장 당일 해질 무렵 정읍으로 진격하였다. 전봉준이 정읍을 진격한 것은 이 여세로 전주성까지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초토사 홍계훈의 병력이 군산에 상륙하여, 4월 7일, 전주로 입성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전력강화를 위해 우선 전라도 서해안 쪽으로 진군의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황토현을 출발, 연지원을 거쳐 정읍 관아로 들어가 분탕을 치고, 정읍의 보부상 점막을 불태운 뒤,밤늦게 소성삼거리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농민군은 흥덕현으로 진주하여 군기고를 부수고 탄약과 창검, 조총을 접수한 다음, 정오경에 고창으로 향했다. 농민군은 고창성을 점령한 다음 옥문을 부수고 농민군 7명을 풀어줬다. 그런다음 곧장 성 앞에 있는 만석군 토호로 온갖 횡포와 불법을 저지른 은수룡의 집을 부수고 불태웠다. 이어서 고창 관아를 쳐부수고 인부印簿를 탈취하려하자 현감은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황토현 전투 후 농민군은 남쪽으로 진군하면서 정읍 연지원(4월6일)→흥덕(7일)→고창(8일)→무장(9일)→영광(12~16일)을 점령한 후 16일, 함평에 이르렀다. 함평읍을 지나는 농민군의 위세는 장관이었다. 이 때 쯤엔 무장武裝과 지휘체계도 상당한 수준으로 갖추어, 깃발을 들고 칼춤을 추고 총을 메고 진군을 했는데 말 탄 자가 100여 명에 갑옷과 전립을 쓴 자도 있었다.

 

당시 정읍 시가지 모습,                         고창 모양성

                                           

평민 한 명이 14, 5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군대 앞에 섰는데, 아이는 조그마한 남색기를 손에 쥐고서 마치 지휘하듯 한다. 모든 농민군이 그 뒤를 따랐다. 호적을 부는 자가 앞에 서고, 다음은 인, 의를 쓴 깃발 한 쌍이 따르고, 그 뒤에 예, 지를 쓴 깃발 한 쌍이 따랐다. 다음은 백기 둘에 각각 전서체로 보제普劑, 안민창덕安民昌德이라 썼다. 다음은 황색기에 해서체로 보제중생普劑衆生이라 썼고, 다음의 기들은 각각의 읍명을 표시했다. 그 다음에는 말을 타고 칼춤을 추는 자가 따르고 그 뒤를 칼을 쥐고 걷는 자들이 너댓쌍, 큰 나팔을 불고 붉은 단령을 입은 자 두 명, 또 호적을 부는 두 사람이 따랐다. 그 다음에는 만여 명의 총수들이 두 줄로 행진하는데 모두 5색 두건을 했다. 총수 뒤에는 죽창을 가진 자들이 따랐는데, 그 걸음걸이가 꺾어졌다 돌았다 하면서 때로는 '갈 지之' 자를 만들고 때로는 '입 구口' 자를 만들면서 전열을 배열하였다. 이들은 모두 맨 앞에 선 아이의 남색기가 가리키는 대로 하였다. <황현. 오하기문>

 

전봉준은 농민군을 하나로 결속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어린애를 내세우는 기발한 방법까지 동원하였다. 농민군이 각 고을에 들어서면 현감을 비롯한 관리들은 대부분 도망을 치고 관아는 비어 있었다. 반면 지역 백성들은 대대적으로 이들을 환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호미와 낫을 내던지고 내려와 합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결연한 의지를 보이려고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가담하기도 하였다. 또 어느 가족들은 앉아서 굶어 죽느니 밥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따라붙기도 했다. 당시 농민군의 행렬을 지켜 본 일본 기자의 기사이다.

 

동학당의 인원 수는 4,000여 명인데, 그중 2,000 명이 화승총을 가졌고, 기병 100명은 2열로 나뉘어 수색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 훈련방식은 서양식과 닮아 지역민들이 감동하였다.

 

원군을 기다리는 초토사 홍계훈

4월7일 전주성에 들어간 홍계훈은 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성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나라군사 원병을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호남의 뛰어난 무인으로 초토사가 되려고 애쓰다가 홍계훈에게 그 자리를 빼앗겨 의기소침해 있던 김시풍이 적과 내통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 뜻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불러다 술을 마시면서 넌지시 물었다.

"나라의 일이 대단히 어려운데 내가 제주가 없어 외람되이 중책을 맡았으니 공을 중군으로 삼아 힘써 일하려 하는데 공의 생각은 어떠시오?" 하니, 시풍은 눈을 부릅뜨고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그대는 본래 후궁에 딸린 관원이고 나는 영교이니 같은 처지인데 어찌 중군을 한단 말이오. 날고 어찌 초토사가 되지 못한단 말이오?"하였다. 홍계훈이 크게 화를 내어 그를 잡도록 명하고는 "너는 시골의 미천한 백성으로서 국가의 읂메르르 입어 영자이 되었으니 마당히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아야 하거늘 오히려 비도의 괴수가 되어 불러모으는 것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하니 시풍이 머리를 치켜들고 "어지러운 조정을 폐하고 밝은 조정을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이는 일, 내가 7월 보름 안에 새로운 임금을 추대하고 반정을 꾀하려 했으나 일이 이미 글렀으니 다시 무슨 말이 필요한가"하며 몸을 솟구치니 군병들이 포를 쏘아 김시풍을 쓰러뜨렸다.

홍계훈은 다음날 김시풍을 비롯해 김영배, 김용하, 김동근 등을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풍남문 밖 곤지산 아래에서 효수하였다.

전라감영 수교 정석희도 김시풍과 쌍벽을 이루는 걸출한 무인이었다. 그런데 홍계훈은 전봉준을 효우\ㅠ하기 위해 세차례나 내려가 오히려 밀통하고 뇌물 1200냥을 받았다는 혐의로 역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18일 효수하였다.

판관 민영승이 정석희의 무고함을 알고 급히 급사를 보내어 형을 중지할 것을 명하였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효수장에 이른 정석희가 울면서 좇는 처자를 바라보며 "평소 늘 말한 바대로 나는 최후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하늘아래 전혀 거리낄 것이 전혀 없다. 너희들 누구도 한탄하지 말라."이르고 태영자약하게 원통한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갑오약력의 저자 정석모는 '홍계훈이 명석하지 못하여 두 유용한 장수를 처형했다. 두 사람이 죽으니 농민군이 안심하고 전주성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계훈의 증원 요청을 받은 조정은 강화ㅅ비병 400여명을 황헌주 인솔하에 내려 보냈다. 18일에는 전라감사 김문현을 파직시키고 외무협판 김학진을 신임 감사로 제수하였다. 증원군이 내려온다고 하자 홍계훈은 더 이상 전주성에 머뭇거리고 있을 수 없어 농민군의 뒤를 쫒았다.

 

황룡촌 전투

홍계훈의 경군이 영광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농민군은 무안(18일), 나주(19일)를 거쳐 21일, 장성 황룡촌에 도착하였다. 농민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경군 270여 명과 다시 맞서게 되었다. 23일, 농민군이 황룡강 강변 월평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뒤따라 온 장위영의 군사들이 대포 2문으로 포격을 가해 온 것이다. 관군이 서로 공功을 먼저 세우려고 명령도 없이 강 건너편에서 다짜고짜 포를 쏘아대자 농민군 40여 명이 쓰러졌다. 당황한 농민군은 산등성이(월평 삼봉)로 올라가 대오를 짓고 주변 대나무를 쪼개 얽어 원통모양으로 만든 장태 속으로 들어가 관군을 향하여 총을 쏘며 돌진했다.

관군은 인원이 예상보다 적고 지원군도 없어 황룡강 언덕에서 농민군한테 포위되어 몰살을 당했다. 관군 대장 이학승은 패잔병을 이끌고 영광 쪽으로 달아나다가 신호리 마을 뒷 구릉에서 농민군과 맞부딪혔다. 이학승이 사태를 예감한 듯 우뚝서서 소리쳤다.

"나는 대장 이학승이다. 의리에 구차히 살 수가 없구나. 역적들은 어찌 나를 죽이지 않느냐?"

'이학승이 탄환을 맞고 쓰러지자 농민군이 머리를 베어갔다.' <오하기문>

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대관 이학승 등 관군 300여 명을 죽이고, 대포 3문과 총 100여정을 빼앗았다. 농민군도 대환포에 맞아 죽은 자가 40~50명에 이르러 이들을 끌어 모아 무덤 17개를 만들어 시체 4~5구씩을 묻었다.

이학승이 죽자 조정에서는 그를 좌승지로 추승하고 순직한 장소인 월평 순의리에 면암 최익현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여 순의비를 세워주었다. 홍계훈은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하자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나라군 원병 요청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5월5일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왔다. 일본군도 천진조약에 따라 자동적으로 들어왔다.

장성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원평에서 노령을 넘어 정읍을 거쳐 전주로 향했다.

 

Ⅳ. 전주화약과 집강소 설치

1. 전주성 점령과 공방전

4월 27일, 날씨는 화창하였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이날 전주성에 수월하게 입성하였다. 홍계훈의 관군은 아직 남쪽에 있었고, 김문현은 전날 파직되어 아직 후임자가 오지 않아 공백상태였기 때문이다. 농민군이 전주로 향하는 광경이다.

 

전봉준의 군대는 청황적백흑의 5색 깃발과 경천안민의 깃발을 세우고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주문을 외었다. 이것은 마치 십자군의 성스러운 교도들의 행진 같았으며 태인, 장성 등 고을을 지날 때마다 동지들이 합세하여 전주로 전진하였다.

행군하는 길가에는 남녀노소 축복하며 이들을 맞이하였고, 전주에 가까울 무렵에는 군사가 10,000 명에 도달하였다. 술을 싣고 역머리에 마중 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처자, 친척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참가하는 동지를 배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인의로운 왕자가 군사를 일으킨 것과 같이 곳곳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전봉준의 농민군이 전주성에 당당하게 들어서자 성문은 열려 있었고, 군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감사 김문현은 한벽정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전봉준이 감영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문서를 가

져다 태워버리고, 동학본영소라는 간판을 달 때까지도 김문현은 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시인 매하산인, 기생 향월이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100주년기념사업회>

 

    당시 전주시가지 풍경. 왼쪽은 풍남문, 우측은 조선조 시묘                                                     오늘날의 풍남문과 당시 재현모습

 

관찰사 김문현은 농민군이 밀려오자 위폐와 영정을 위봉산성으로 옮긴다는 구실로 판관 민영승을 데리고 4인교를 타고 도망가다가, 상황이 위급해지자 4인교를 버리고 헤진 옷과 짚신을 얻어 입고 피난민에 섞여 공주로 달아났다.

전주성을 점령한 전봉준은 선화당에 본부를 차리고 4대문을 굳게 지키게 하는 한편 무기를 거두고 관창을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한편, 홍계훈은 1,500명의 관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 날인 28일, 전주에 도착하여 전주성이 내려다보이는 완산에 포진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은 3일간 대치하다가, 5월 1일 동이 틀 무렵 접전이 벌어졌다. 먼저 관군이 성 내를 향해 야포를 쏘아댔다. 다음날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자 3일, 농민군 5,000여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관군 수가 크게 늘고 화력도 크게 보완된 터라 농민군 500 명과 장수 김순명이 죽고 전봉준도 머리와 허벅지를 다치는 패배를 가져왔다. 전봉준은 완산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처음으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2. 전주화약

전봉준은 전주성 안에서 다친 머리와 다리를 치료하면서 앞날에 대해 고심이 깊어갔다. 광제창생과 제폭구민의 기치아래 국기를 반석위에 올려놓고자 한 동기로 거병하여 그동안의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여 탐관오리와 악질부호들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긴 했으나 이번 싸움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고, 이제는 오히려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움이 커져갔다. 외군이 들어오면 초래될 비극도 예견되었고, 현재 외부와 고립된 상황에서 성 안의 양곡도 바닥나고 있었으며, 농번기철이 다가오면서 농민들의 마음도 동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들로 생각이 미치자 전봉준은 결심을 하고 초토사 홍계훈에게 소지문을 써 보냈다.

 

소지문 訴志文

저희도 이 나라 선왕의 유민이라 어찌 옳지 못하게 위를 범할 마음으로 편안히 한울 땅 사이에서 숨을 쉬며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의 이 거사는 비록 놀랄만한 일인 줄 아오나 출병을 해서 마구 잡아죽이는 것은 누가 먼저 한 것입니까? 전 도백이 허다한 양민을 죽이고 도리어 저희들 죄라고 이르니 덕화를 펴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무고한 백성을 많이 죽인 것은 죄가 아니고 무성이며 가짜 인부로 방목을 붙이니 손가락으로 쓴 것도 인부가 될 수 있습니까? 대원군을 받들어 국정을 감역케 하자는 것은 이에 합당하거늘 어찌하여 반역이라고 말하며 잡아 죽이는가. 임금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선유하는 종사관이 임금님의 말씀(윤음)은 보여주지 아니하고 다만 토벌한다, 잡아 가둔다, 병정을 부른다 하는 문자만 보이니 만일 참인 것을 알면 어지 이럴리가 있겠습니까. 전주감영에 대포 놓은 것을 가지고 저희들 죄라고 하지마는 성주를 시키어 대포를 놓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죄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 성에 들어가고 무기를 수집한 것은 신명을 방어하는데 불과한 일입니다. 눈 한번 흘긴 것도 반드시 앙갚음을 한다는데 조상의 무덤을 파고 백성의 재물을 토색하는 것은 저희가 가장 미워하고 엄격히 금하는 바입니다. 탐관오리가 아무리 학정질을 해도 정부에서는 못들은 척하고 내버려 두어 백성들만 생명재산을 보전하기 어렵기 때문에 탐관 오리를 낱낱이 없애버리자는 것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주는 나라에서도 중하게 여기는 곳인데 봉산封山에 진을 친다거나 우물을 파는 것은 국법으로 금한 바 있거늘 각하께서는 고의로 범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느끼고 깨달아서 죄를 속하게 하는 방법은 합하께서 선처해서 나라에 보고하는 것인즉 모든 백성들이 한가지로 바라고 치하하는 일이 아닙니까? 말을 이만 그칠 뿐입니다.목도서제중생등의소木圖署濟衆生等義所 <양호초토담록, 동학란기록>

 

정부와 관군 쪽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관군은 홍계훈의 장위영병, 증원으로 온 총제영병, 감영군, 각 지역에서 급히 선발되어 온 향병 등으로 이루어져 지휘통제가 어렵고 사기는 황토재 전투 후 절반이 도망칠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홍계훈 자신도 농민군과 전면적으로 싸워 전황이 장기전으로 넘어가지 않고 사태를 원만히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라 판단하고 있었다.

이 무렵 조정은 김문현, 조병갑을 거제로, 이용태를 남해로, 조필영을 함열로 귀향 보내고, 후임으로 김학진이 내려왔다. 김학진은 글을 잘하고 벼슬을 탐하지 않은 인물이라서 조정안팎에서 쓸만한 사람으로 여겼다.<오하기문. 일성록, 고종 31년 7월 17일. 승정원일기, 1894년 9월 22일>

고종은 청일 양국에 군사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고 농민군을 귀가시켜 생업으로 돌려보낼 생각으로 농민군과 협상을 해서라도 속히 사태를 마무리 지으라는 뜻을 김학진을 통해 홍계훈에게 전달했다. 이에 홍계훈은 김학진과 상의하여 전봉준에게 타협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미흡한 타협안을 완강히 거부하였다.전봉준은 폐정개혁이 농민군 주도로 수행되도록 요구했고 홍계훈은 더 이상 끌 수 없어 이를 수용하고, 전주성을 점령한 지 10일 만인 5월 5일과 6일, 관군의 포위를 풀게 하고 농민군이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자 농민군들은 '북문을 열고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진을 정돈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이어 5월 8일에는 대사면령이 내려졌다.

6월 중순이 지난 어느 날, 신임 관찰사 김학진이 전봉준을 감영으로 청하여 관민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책을 상의했다. 전봉준은 농민군이 돌아가 보복당하지 않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고, 다음과 같은 14개조 항을 개혁해 줄 것을 제시하였다. 전봉준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은 그의 판결문에 분명히 27개 조항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중 14개 조항이 판결문에 적혀 있다.

<폐정개혁안 14개조>

1.전운소轉運所를 혁파할 것

2.국결國結을 더하지 말 것

3.보부상인들의 작폐作弊를 금지시킬 것

4.도 내 환전은 옛 감사가 거두어 갔으니 민간에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대동미를 상납한 기간에 각 포구 잠상(潛商, 외국상인과 그들의 수하인 매판 상인들)의 미곡 무역을 금할 것

6.동포전洞布錢은 매호每戶 봄 가을로 2량씩 정할 것

7.탐관오리들을 파면시켜 내쫓을 것

8.위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관작을 팔아 국권을 농락한 자들을 축출할 것

9.관장이 된 자는 관할 지역에 묘지를 쓸 수 없게 하고 또한 논도 살 수 없게 할 것

10.전세田稅는 전례에 따를 것

11.집집에 부과하는 잡역을 줄여 없앨 것

12.포구의 어염세魚鹽稅를 혁파할 것

13.보세洑稅와 관답官沓은 시행하지 말 것

14.각 고을의 수령들이 내려와 백성 소유의 산지山地를 사들이고 묘를 쓰지 못하게 할 것

 

삼남집회 때부터 줄기차게 주창되어 온 척왜양운동, 권귀타도 등 반봉건 반외세의 구호가 사라지고 지엽적이라 할 수 있는 요구들만 나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13개 조항은 당시 정치적 현실과 직결되는 내용이거나 금기시 한 내용으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조선 집권세력에 대한 강한 비판과 타도,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무력개입에 대한 반대, 철수 요구 등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

 

3. 집강소 설치에 주력하다.

전봉준이 개혁안을 제시한뒤 20여일이 지난 6월 하순 김학진은 전봉준을 다시 만나 집강소 설치를 허락하였다. 오랜만에 태인의 집으로 돌아온 전봉준은 각 지역에 사람을 보내 집강소 설치를 독려하고, 잠시 쉬었다가 농민군 20명과 함께 말을 타고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집강소 개혁을 하나하나 점검하였다. 전주에는 총 본부인 대도소를 두고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형식상으로는 관민이 협력하는 이원화된 조직이었지만 지방수령은 그저 자리나 지키고 있을 뿐 실제로는 농민군이 통치하였다. 전봉준은 각 군현의 집강들을 통해 폐정개혁을 위한 행정요강 12개 조항을 공포하여 이를 집강소 운영의 준칙으로 삼았다.

<집강소 12개 행정요강>

1.도인道人(동학교도)과 정부와의 사이에 오래 지속되어 온 혐오의 감정을 씻어버리고 모든 서민 행정에 협력할 것.

2.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해 내어 일일이 엄징할 것,

3.횡포한 부호배들은 엄징할 것,

4.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6.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7.청춘과부의 재가를 허락할 것,

8.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적과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토지는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오지영. 앞의 책

또한, 이미 행해진 일은 다음과 같이 전후처리를 하였다.

 

1.이미 거둬들인 포, 창, 검, 마는 이미 공납에 귀속되었은즉 성명, 주소, 양을 자세히 적어 두 권의 책으로 만든 다음 순영으로 올려 보낸다.

2.역마와 상인들의 말은 각각 본래 주인들에게 돌려준다.

3.지금 이후로는 총포나 말을 모으는 일을 일체 하며, 돈, 곡식을 토색질 한 자는 영문에 보고하여 군율에 따라 처벌한다.

4.남의 무덤을 파헤치거나 사채를 받아내는 일은 시비를 따지지 않고 일체 금하며 만약 어기는 자는 영문에 보고하여 법대로 처리한다. <황현. 오하기문>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할 무렵 한 때 패배의식에 빠져 있다가 집강소가 설치되어 운영에 참여하게 되자 신바람이 났다. 이들은 저녁 때가 되면 수십, 수백 명씩 떼를 지어 칼춤을 추고 검가를 부르며 각기 집으로 흩어졌다.

 

검가

처의장삼 용호장이 여차여차 우여차라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시호

만세일지 장부로서 5만년 지시호

용천 검 드는 칼 아니쓰고 어이하랴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 저칼 넌짓 들어

호호막막 넓은 천지 일신을 비껴서서

칼 노래 한곡조로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 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한다

계운은 무수장삼 우주를 덮었어라

자고병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시호 좋을시고

태평가를 불러내어 시호시호 득의로다

왈이동방 제자들아 너도 득의 나도 득의

우리 집도 득의로다.

<한국민중운동사: 동학서, 여강출판사, 1985>

 

집강소의 성격

각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는 관민합작의 성격을 띠었다. 집강소는 전봉준이 제안하여 설치한 것을 관에서 사후에 추인한 형식이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신용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집강소 설치는 5월 7일 전주를 관군에 내어주고 자진 해산하여 각각 생업으로 돌아가는 대신 동학농민군에서 '면리집강'을 임명하여 관측이 폐정개혁을 단행하는 지를 지켜보고자 한 것인데 이들이 귀향하자 무기를 풀고 해산한 것이 아니라 무장한 채 '군 수준의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농민군과 양반관료들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자 6월에 전라감영에서 전봉준을 초청하여 관민 화의책을 의논한 결과 전봉준의 제의에 따라 이미 다수 설치된 '군집강소'를 사후적으로 추인하여 합법화 시켜주고 도내 행정질서를 수립하는데 농민군의 협력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신용하, 1993>

 

4. 농민군의 행패도 심해져

농민군이 자치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여러가지 작폐가 심각하게 나타났다. 행정집행이 감정에 치우치고 굶주렸던 농민들이 부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가 하면, 벼슬아치나 지난 날의 상전들에게 보복하고, 시세에 편승한 자들이 동학에 입도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또 떼를 지어 무기를 들고 마을을 활보하면서 부잣집을 털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심지어는 양반집 처자를 끌어내어 강제로 장가드는 자들도 생겨났다. 충청도에서는 신분에 한이 맺힌 노비들이 상전을 잡아다가 불알을 까는 사형私刑을 가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대개 적(농민군)은 천한 노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양반들을 가장 미워했다. 길에서 갓 쓴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달려들어 ‘너도 양반이냐’ 며 갓을 빼앗아 찢어 버렸고, 어떤 자들은 자기가 갓을 쓰고 쏘다니며 모욕을 주었다. 종들은 한결같이 주인을 협박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면천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주인을 결박하여 주리를 틀고 곤장을 때리기도 하였다. 노비가운데 착실한 사람은 노비문서를 태우지 말아 달라고 했으나 주인들은 이들의 기세가 갈수록 커지자 더욱 두려워하였다. 간혹 양반 가운데는 이들을 추종하여 서로 접장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법도를 따랐다. 백정이나 재인들 또한 양반들과 평등한 예를 행하여 이러하니 사람들이 더욱 이를 갈았다.

 

이들은 양반집에 딸이 있으면 수건을 문에 걸어두고 납폐(시집가기로 정해져 있음)라고 하고 늑혼(강제결혼)을 했다. 이에 딸이 있는 사족, 향품(지방향청 관리), 필서(여염집)들은 늑혼을 피하고자 매파를 기다리지도 않고 택일도 않고 끼리끼리 귓속말로 약속하여 물 한 그릇 소반에 올려놓고 손을 끌어 초례를 올렸다. 그리고 촛불을 들고 신랑집으로 갔다. 그래서 열네살 이상의 처녀는 안방에 없었다.

동짓달 쯤에는 이들이 늑혼을 하고자 해도 모두 젖내 나는 아이들이 머리를 틀고 비녀를 꽂고 있어서 안방을 엿보고 는 웃거나 욕을 해댔다. <황현, 오하기문>

 

당시 일기에 나타난 농민군과 관군의 행패를 하나 더 보자

 

<7월14일>

동네사람들과 민간 보루를 구경했다. 한달 동안에 세태인심이 전보다 크게 달라져 관아는 잡기가 어지럽게 일어나도 막지를 못한다. 성 내에 동학의 무리가 1,000여 명이나 있는데 이들은 왜놈을 막는다고 곳곳에 보루를 쌓고 있다. 서울서 온 병정들은 부인들을 강간하고 재화를 약탈하여 허리에 차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므로 전라도 전체가 먼저는 도적에게 약탈당하고 뒤에는 서울 병정에게 약탈당하여 재물이 비로 쓴 듯이 없어졌다. 그로 인하여 씨를 뿌리지도 못하고 있고 양민은 다 도적이 되었다.

<7월 23일>

동학무리가 신당시에 모였다. 동학이 크게 일어나자 시골 백성들은 거의 동학에 들어가 원수도 같고 돈도 빼앗는 등 마음대로 하였는데 심한 자는 양반의 불알까지 뽑았다. 이들은 모든 행동과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매번 하늘에 고한다. 심지어 기침과 대소변 전에도 하늘에 고하는데 가장 장관인 것은 신이 강림한 의식으로서 허리에 차고 있는 패를 신에게 바치며 주문을 외우는데 잘 뛰는 개구리 같다. 이날 300명이 신당시에 모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자 최시형은 각 교도들에게 통유문을 발표했다. 

 

통유문

하늘이 큰 운을 내리사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친 것은 세상에 선으로 나아가며 복리에 취하여 더욱 지선의 경에 정진하기를 위함이러니, 이제 도인된 자 도를 빙자하여 속인을 능멸하고 비법을 행하는 이 ㅇ찌 정도를 지키는 자의 소행이리요.심하게는 도로서 도를 해하여..도리어 안보키 어려우니 슬프다. 도를 아는자의 소행이 도리어 타인만 같지 못하니 탄식할 일이로다. 맹자 가로되 짐승이 서로를 잡아 먹는 것도 사람이 미워한다 했거늘 하물며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니 금수와 다름이 없도다...

이에 8조를 정하여 각 포에 펴노니 지푸라기의 말로 버리지 말고 길이 금석의 전을 삼아 삼가 어기지 말라.

-각 포 사무는 마땅히 핵주사와 주관의 말을 쫓을 것.

-무덤을 파헤치고 재물을 강탈하는 자는 도법에 의하여 죄를 과할 것

-각 포 교도가 당이나 세력을 믿고 재물을 범하는 자는 엄하게 징벌할 것

-각 포 교도가 혹...

-각 포 교도가 법소 포덕소 문을 가지지 않고 차의로 당하는 자는 제할 것.

무례히 상호 구타하는 자는 오하야 각 포에 회시할 것

-술을 마시거나 노름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결코 도인의 행위가 아니니 제할것

-각 포 사무는 크고 작음을 무론하고 포덕소 지유를 받들어 행할 것 <이돈화. 천도교창건사.1933>

 

 

5. 아직 집강소 설치가 안 된 나주에 들어가다.

전라도 대부분의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지만, 나주, 남원, 운봉 관아는 농민군에 끝까지 항거하며 거부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이들을 징벌하기로 하고 최경선에게 나주를, 김개남에게 남원을, 김봉득에게 운봉을 공격하게 했다. 마침내 남원과 운봉이 농민군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나주 관아만은 목사 민종렬이 백성들과 함께 굳게 지키고 있어 함락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자 전봉준이 8월 13일, 직접 나주성을 방문하였다.

전봉준은 무장하지 않은 부하 십 수명을 거느리고 성문 앞에 이르러 "나는 전라감영의 공문을 가지고 감영관리와 비밀리에 왔으니 성문을 열어 민태수와 만나게 하라."고 소리쳤다. 민종렬을 만나 집강소 설치를 인정하라며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이날 밤을 성안에서 자고 나주를 떠났다.

이날 아침 장령들이 모여 전봉준이 성 밖으로 나갈 때 총을 쏘아 죽이자고 모의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전봉준이 장령들 앞에 나타나 입었던 옷 10벌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는 내 수하들이 입고 온 옷이다. 두어 달 동안 돌아다녀 땀과 때로 더러워졌으니 그대들이 빨래를 시켜놓으면 내가 이 길로 영암에 내려갔다가 3,4일 후에 올 것이니 그때 옷을 바꿔 입게끔 수고를 해주었으면 고맙겠다."

이 말을 듣고 장령들은 그 때 가서 제거해도 늦지 않겠다 생각하고 전봉준 일행을 무사히 보내주었다.

 

당시 양호루와 나주시에서 복원중인 나주읍성 중 망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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