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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4)/3차기포

by 싯딤 2009. 9. 14.

Ⅴ. 3차기포

1. 청군을 끌어들이는 조정

전주성 함락을 보고받은 내무협판 민영준이 5월18일 대신회의에서 청군을 차병할 것을 제기하였다. 민영준은 민비의 친척으로 실권자였다. 이에 영돈녕 김병시 등 대신들은 '비적 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 그들도 우리의 백성이니 마땅이 우리 병사로서 토벌해야한다. 외병을 빌어 토벌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마음을 어디에다 의지할 것인가. 민심도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영준은 고종의 재가를 받아 1894년 6월1일 중신회의에서 차병을 결정한 뒤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에 보낸 민영준의 국서내용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의 한 지역과 백성을 폄훼하는 내용조차 있었다.

조회하는 바는 우리나라 전라도 일대의 태인, 고부 지방 등 민심이 흉하고 사납고 성정이 험휼하여 본래 다스리기가 곤란하다고 일컫던 지역인데 요사이 동학비도와 부동하여 10,000명의 군중이 10여 고을에서 공함하고 이제 북상하여 전주 영부가 함락되었습니다. ..서울과의 거리는 겨우 사백 수십리 밨에 안되는데 그대로 둔다면 서울까지 소동될 것입니다...

우리 조선의 가 군의 숫자는 겨우 서울을 호위할 정도이고 전쟁의 경험도 없어 흉악한 무리를 소탕하기 어렵고 이 일이 오래가면 청국에도 걱정이 클 것입니다.

임오, 갑신 두 정변 때에서 청국군의 감정에 힘 입었는데 이번에도 그 때 이 일을 참작해서 청원하는 바이니 속히 와 초렴하여 주면 우리 군대도 좌진시켜 귀국의 군대가 오랫동안 수고롭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청하노니 귀국의 총리께서는 빨리 구조하여 급박함을 구제해 주시기 바라오며 이에 조회하는 바입니다.

조선 정부의 차병요청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에게 청병 1,500을 보내 아산에 상륙시켰다.

2. 일본의 야욕과 청일전쟁

일본은 조선과 종번관계에 있는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끊임없이 간교를 꾸몄다. 먼저 조선에서 청국의 우월권을 없애고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토히로부미를 텐진에 보내 이홍장과 협상하여 텐진조약을 맺었다.

<톈진 조약>

1)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기산하여 4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그 이내에 각기 전체를 철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분쟁 야기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2) 양국이 함께 승낙한 것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조선 국왕에게 권하며, 또 조선 국왕에 의하여 다른 외국의 무관 1인이나 혹은 몇 인을 선발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케 하되 이후 청·일 양국은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3)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게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일본은 조선정부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청나라와 조약을 맺고 때를 기다리며 구미 열강으로부터 군사 주둔의 명분을 얻기 위해 교활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자 청나라의 이홍장이 서둘러 러시아 공사에게 일본과의 분쟁을 조정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러시아는 청, 일 두 나라가 동시에 철병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영국은 조선에서 청일 간에 전쟁이 발생하면 그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각서를 보냈다. 미국도 일본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것은 심히 유감이라는 전신을 외무대신에게 보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에게는 ‘일본만이 책임이 아니다.’ 라는 답신을, 미국에게는 ‘철군은 동양의 평화를 보호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그 밖의 구미 열강은 일본에 대체로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외교적으로 기선을 잡은 일본은 ‘어떻게든 청나라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 라는 훈령까지 내려 청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광분했으나 뾰족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조선정부가 청군 파병을 요청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각 내각회의를 열어 파병을 결정하였다.

6월 9일 오토리 케스케 공사가 420명의 육군과 대포 2문을 끌고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이어 16일 군함17척, 수송선 27척, 병사 4,00명이 들어왔다.

한편에선 낭인을 몰래 침투시켜 전봉준에게 은밀히 보내 농민군의 재 거병을 부추겨 청일전쟁의 단서를 잡으려고 시도했다. 전봉준은 이런 일본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고 일본과 대원군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 예의 주시하였다.

6월 17일, 일본은 급기야 조선정부에 청나라와 맺은 조약 일체를 파기하고 청군을 조선에서 철수시키라고 통첩하였다. 20일까지 회답하지 않으면 무력을 통해서라도 조선의 내정개혁을 시작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6월 21일, 일본군은 자정 무렵 동소문에 불을 지르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을 가두고 운현궁으로 몰려가 대원군을 강제로 입궐시켰다. 그리고는 고종을 협박하여 실권을 대원군에 맡긴다는 교서를 강제로 받아냈다. 25일에는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을 구성하였다. 경복궁을 침범한 일본군은, 6월 23일 아침, 청국 군함을 불시에 공격하여 격침시키고, 27일에는 서울 소식을 듣고 아산에서 북상하던 청군을 성환에서 야간 기습 공격하였다.

이렇게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7월 1일에야 선전 포고를 하였다. 7월 26일에는 조선정부를 압박해, 조선은 일본에 협력하고, 농민군이 재봉기하면 함께 토벌하고, 일본군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는 '양국맹약(朝日攻守同盟)' 을 맺었는데, 여기에는 "청군을 조선국의 지경 밖으로 몰아내 조선국의 독립과 자주를 공고히 하고, 양곡과 생필품을 미리 준비해 일본군을 어김없이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써 조선의 종주국은 청에서 왜로 바뀌고 일본은 마음대로 조선의 백성을 동원할 수 있고, 양곡도 마음대로 공출해 군량미로 삼을 수 있는 등 일제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침략행위는 조선 전체에 심각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하루빨리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와 백성을 구출하는 것이 지상과제로 떠올랐다. 당시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은 전봉준의 농민군들이었으나 조정은 일신의 안위와 탐욕에 눈이 멀어 있었고, 농민 봉기를 봉건적 가치관으로 바라보아 망국적 거사로 여기고 있었다.


인천에 들어온 일본군. 성환 전투장면

2.삼례에서 재 거병하다.

전봉준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민비를 몰아내고, 친일내각을 발족하고, 남산과 종로 일대에 대포를 설치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전주화약 이후 남원을 순행하고 있던 7월이었다. 일본의 도발이 조선을 삼키려는 의도임을 간파한 전봉준은 재봉기 목표를 세웠다. 이번에는 매국 배족을 일삼는 친일 봉건 통치배들을 몰아내고 일본군을 국외로 추방하는 것이 목표였다.


명성황후 국장

당시 서울 주둔 외국군인들

거병시기는 청일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이 적기였으나 당장 거병하는 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자신의 신병이 아직 쾌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봉준은 전주성에서 머리를 다치고 허리에 총상을 입었다. 또한 훗날 체포되었을 때 법정에서 '몸에 병이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아 결핵같은 지병도 있었다. 여기에 일본군의 병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거병할 수도 없었다. 또한 지금은 추수철이라 농민군을 모으기도 더욱 힘든 시기였다. 8월경, 김개남, 손화중을 만나 나눈 주요 대화 내용이다.

전봉준-지금 사세를 보니 왜와 청이 싸워 이기게 되면 이긴 자가 반드시 우리 쪽으로 군사를 돌릴 것이다. 우리는 무리가 비록 많긴 하나 오합지졸이어서 쉽게 흩어져 이 때문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귀화를 핑계대고 각 고을에 흩어져 있다가 그 추이를 살피는 게 낫겠다.

김개남-한 번 해산하면 큰 무리를 다시 모으기가 어렵다.

손화중-우리들이 일을 일으킨 지 반년이 되어 비록 한 도가 호응했다지만 사족, 재산가, 글 하는 선비가 따르지 않는다. 접장이라 부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천인들로 화를 즐기고 도적질을 좋아하는 무리들 뿐이다. 인심의 향배를 시험해보니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사방으로 흩어져 목숨이나 보전함이 좋을 듯하다. <황현. 오하기문>

세 사람의 정세 판단은 각기 달랐다. 그렇다고 무작정 미루었다가는 자칫 청일전쟁이 일본 승리로 끝나고 중앙의 정치세력이 일본 의도대로 재편 마무리 되면 그 후에 거병해 봐야 무모한 일이 될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거병이 늦어져 결국 9월에야 거병이 시작되었다.

9월초, 금구 원평에서 사태 추이를 지켜보던 전봉준은 4,000여 명을 이끌고 삼례로 향했다. 남접과 북접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삼례에 모여 9월12일 일본군을 몰아내고 봉건잔재를 척결하기 위해 삼남의 농민들은 봉기할 것과 삼례에 모이라는 통문을 띄웠다. 삼레에 본부를 설치한 전봉준은 재차 거병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전국에 띄웠다. 이즈음 농민군은 전국 구석구석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다시 일어난 각지의 농민군은 서울로 직향하여 권귀와 일본군을 축출한다는 깃발을 들고 삼례로 속속 집결하였다.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받들고, 손화중과 김덕명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농민군의 재거병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봉건관료들은 기껏 모아 대처하고자 했으나 기껏 1~2000여명의 군사에 불과했다. 이제 얼마나 빨리 서울로 올라가 농민군의 깃발만 날리면 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정작 농민군의 발걸음을 잡고 있는 것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남북접 노선대립문제였다. 이 시기 충청도 지역의 동학교도를 북접, 전라도 지역을 남접이라 했는데 북접은 그동안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종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남접의 농민봉기를 처음부터 반대해 왔었다.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2대 교주 최시형은 통유문을 발표하여 이는 교단의 뜻이 아니니 교도들은 근신할 것을 당부했었다. 심지어 삼례에 모인 농민군을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까지 있었다. 최시형은 삼례에 모인 농민군들에게 절교를 통고하는 고절문을 보내“ ...지금 들으니 호남의 전봉준, 호서의 서장옥은 따로 남접이라 이름짓고 창이한다는 핑계로 평민을 침탈하고 교인을 죽게하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에 절교를 고하니 팔도의각 포에서는 더욱 분발하여 성심으로 각 포 교령의 검속에 따라 어긋남이 없도록 하고 사문난적을 토벌함이 옿ㄹ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시천교역사>

이는 적과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였다.

그러나 북접도 이제 외세 침략으로 국운이 위기에 놓이게 되고, 북접이 벌인 최제우의 신원운동도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더 이상 온건노선이 설 땅을 잃게 되자 인식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때맞춰 전봉준이, 남북접 사이에 비교적 중도 위치에 있던 오지영을 최시형에게 보내 타협하게 하니 마침내 최시형이 남북접 연합군에 동의하고 각 두령은 교도를 거느리고 청산에 모이도록 하는 초유문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초유문

3. 전봉준과 동학

여기서 전봉준은 동학도였는가. 동학도였다면 언제 동학에 입도하였는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봉준이 체포되어 신문받을 때 자신이 직접 밝힌 내용이 있다.

문: 동학에는 언제부터 관계하였는가

답: 3년 전부터...(심문받을 때가 1895년 2월이었음)

문: 어떠한 것에 감동해서인가

답: '보국안민'이라는 동학당 주의에 감동하고 있던 바 동학도 김치도라는 자가 나에게 동학의 문건을 보여 준 적이 있다. 그 중에 경천수심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 속에 대체정심이라고 하는 것에 감동해서 입도했다.

문: 정심한다는 것은 동학당에 한한 것은 아니다. 뭔가 달리 너의 입당을 재촉한 이유가 없는가

답: 정심 외에 협동일치의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결당하였다. <전봉준 공초>

이로 보아, 전봉준은 동학에 심취했건 심취하지 않았건 간에 김치도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한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1892년인 38살 때였다.

이와 관련하여 신복룡 교수는 다음의 공초 기록을 들어 동학에 입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전봉준이 동학을 어떻게 보았으며 어떤 점에서 입도하였고 어떤 사상과 행동노선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인용한다.

문: 너의 동모자인 손화중과 최경선 등은 동학을 몹시 좋아했는가

답: 그렇다.

문: 너도 역시 몹시 좋아 했는가.

답: 동학은 수심경천지도이므로 몹시 좋아했다.<중략>

문: 너를 가리켜 전라도의 동학의 괴수라고 하던데 과연 그런가.

답: 애당초 나는 의를 부르짖어 기포하였을 뿐이지 동학괴수라 칭한 바 없다.<중략>

문: 너는 고부에 머물러 기거할 때 동학을 가르쳤는가.

답: 나는 몇몇 아동을 가르쳤을 뿐 동학을 가르친 바는 없다.<중략>

문: 동학도 가운데 접주를 차출하는 것은 누구인가.

답: 모두 최시형이 한다.

문: 네가 접주가 된 것도 역시 최시형이 차출한 것인가.

답: 그렇다.

문: 너는 재기포시 최시형과 이 문제를 논의했는가.

답: 의논한 바가 없다.

문: 최시형이 동학의 우두머리인데 동학의 무리를 규합하면서 어찌 그와 의논이 없었는가.

답: 충의는 각자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굳이 최시형과 상의한 후에 그런 일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중략>

문: 소위 접주라는 사람은 평상시 무엇을 하는가.

답: 별로 하는 일이 없다.

문: 마음을 닦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를 어찌 동학이라 부르는가.

답: 우리의 도는 동에서 생겼기에 동학이라 부른다. 애당초 본의는 시작한 사람들이나 알 일이지만 나는 남들이 그렇게 부르기에 따라서 그렇게 불렀다.

문: 동학을 공부하면 병을 면하는 것 외에 다른 이익은 없는가.

답: 다른 이익은 없다. <전봉준 공초>

위의 답변을 보면 전봉준은 동학을 좋아했을 뿐 스스로를 동학도라 칭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 좋아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다르다. 또 접주가 된 것도 전봉준 의사와 관계없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최시형에 의해 차출 된 것이었다. 당시 이처럼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교단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임명되는 예는 흔히 있었다. 홍농 안마현의 접주였던 김낙선도 공초에서

“나는 본시 넉넉한 집안의 백성으로 선대의 가업을 이으며 먹고 살아 왔으나 동학 난리에 집안이 망한 후 먹고 살 계책으로 결국 믿게 되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명색이 접주를 맡게 되었다.”

무장접주 배환정의 증손 배인수의 증언을 보면 “제 할아버지는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동학을 신봉하신 것보다 주위의 추대로 접주가 되었지요. 그래가지고 가담하게 되었어요...그것을 마다 하셨는디 한번 봉해지니까 그냥...”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또한 당시 접주란 동학 지도자에게만 사용된 고유용어는 아니었으며 서당을 접이라 하여 서당선생을 접주라 부른 유교적 용어였다. 전봉준은 3차 기포시에도 최시형과 전혀 의논한 바 없이 어떤 위계질서나 존경을 지니지 않았고, 오히려 최시형은 2차 기포 시 전봉준을 "이는 국적이요 사문난적"이라 질타했고 고부 기포 시에도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면 효도로써 할 일이지 급하게 마음먹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이런 냉랭한 관계에서 접주로 임명됐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전봉준이 교단이나 주위의 추대로 어쩔 수 없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접주가 되었다 해도 1894년의 일련의 봉기는 동학사상을 앞세운 농민혁명이 아니었다. 실제로 고부민란 때부터 체포될 때까지 그가 작성한 숱한 격문과 폐정개혁안에는 동학과 관련한 호교적인 구절이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갑오농민혁명은 농민의 의지로 발발된 혁명이었고 여기에 동학의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복룡>

전봉준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오지영과 이돈화는 저서 동학사, 천도교창건사에서 동학접주, 동학교도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복룡 교수의 주장처럼 전봉준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동학 접주의 자격을 부여받고 동학사상에 크게 심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학교도임은 분명하다. 동학과 무관한 일개 시골 서당 훈장이었다면 그처럼 많은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혁명에 동원하여 기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4. 10만 농민군, 출전의 깃발을 들다.

최시형의 결단으로 북접의 동학교도에게 총 진군의 나팔소리가 울리자, 손병희, 손천민 등의 지휘 하에 있던 농민군이 청도 보은으로 집결하였다. 보은에서 북접 농민군은 둘로 나뉘어 한 대는 옥천, 논산을 거쳐 남접 전봉준 부대와 만나고 다른 한 대는 회덕에 이르러 관군과 싸워 물리친 후 전봉준 부대와 합세하였다. 논산에 동학농민군 본영이 설치되고 전봉준과 손병희가 만났다. 둘은 형제의 의와 생사를 맹세한 후 전봉준이 형이 되고 손병희가 아우가 되었다. 전봉준이 손병희에게 말했다.

“내가 오직 일의 중하고 급한 것만을 생각하고 급히 일을 일으켜 수많은 민재와 생명을 없애고 형세 또한 이에 이르렀으니 이제라도 선후책을 강구하면 십분 희망이 있다. 돌아보건대 호남인은 여러 번 싸워 저렇게 피곤하니 원컨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대사를 이뤄내길 바라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일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은 운에 있는 지라, 우리는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데 까지 할 뿐이라" 맹세하였다. 남북접 연합군이 형성되자 전봉준은 영수의 이름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격문을 보내어 투항을 권고하였다.

<박제순에게 보낸 투항 격문>

하늘과 땅 사이에 강기가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데, 식언을 하고 마음을 속이는 자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노라. 하물며 이 나라에 지극한 근심이 있는데도 어찌 감히 겉으로 거짓을 꾸미고 속으로 유혹되어 하늘아래 한 순간이라도 숨을 쉬고 목숨을 까딱거릴 수 있겠는가?

일본 침략자들이 빌미를 꾸며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인민을 근심케 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옛날 임진왜란 때 능침 하여 궐묘를 불태우고 군친을 욕보게 하고 백성을 죽였으니, 백성들 모두가 분하게 여겨 천고에 잊을 수 없는 한이라. 초야에 있는 필부와 몽매한 어린아이까지 아직도 답답한 울분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으니, 하물며 각하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고관으로서 평민 소실小夫보다 몇 배나 더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조정대신을 보건대, 망령되이 자기 생명의 안전만을 도모하여 위로는 임금님을 협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속여서 동이東夷에게 연양連腸하여 남민南民에게 한을 이루고 친병을 망령되이 움직이어 선왕의 적자를 해치고자 하니 참으로 어떠한 뜻이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진실로 알고 있으나 일편단심 죽음을 각오하고 천하의 인신人臣으로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없애서 선왕조 500년의 유훈의 은혜에 보답코자 하니 원컨대 각하는 크게 반성하여 의로써 같이 죽으면 천만다행일까 하노라.

갑오 10월 16일 <황해도 동학당 정토약기에 수록>

전봉준은 시종일관 대일 항전을 표방하였으나 박제순은 냉소에 부치고 쳐들어 올 때를 기다렸다. 박제순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일본군을 도와 농민군 타도에 앞장서고 매관매직을 일삼다가 훗날 을사오적이 된 자였다.

10월 24일, 전봉준은 드디어 10만 농민군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다. 여산과 논산을 점령한 후 논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공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김개남과 손화중의 농민군은 각 자의 사정에 따라 합류하지 안았다. 김개남은 남원에서 49일 머물러야 한다는 참서의 내용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고 손화중은 합세하려다가 일본군이 서해안으로 침범해온다는 정보애ㅔ 따라 나주와 광주를 방비하기위해 후방에 남아잇기로 한 것ㅇ엇다.

초겨울의 하늘은 맑고도 높았으며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농민군은 여산을 지나 은진을 점령한 후 10월 초 강경포에 이르렀다. 이 시기 일본군은 각 도에 군 사령부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밀정들을 약장수나 여행객으로 가장시켜 농민군에 투입,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관군과 농민군이 싸움을 벌이면 관군에게 정보와 무기를 제공하여 동족끼리 상잔을 벌이도록 하였다.

5. 일본군에게 30만 명이 학살당하다.

갑오농민봉기는 폐정개혁으로 국정을 바로잡고 나아가 왜적을 비롯한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자주농민혁명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조선왕조를 뿌리 채 뒤흔들고 청일 두 나라가 한국에 들어오는 빌미로 이용되었다.

농민군은 전국 각 지역에서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40~50차례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비해 죽창과 농기구, 탈취한 조총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영국에서 개발되어 수입된 스나이더 소총은 임진왜란 때 사용된 조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공할 성능의 소총이었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1878년부터 소총 개발에 착수하여 1882년부터 군에 배치하여 청일전쟁과 동학농민봉기 때 본격적으로 실전에 사용하였는데 무라타 소총도 이 시기에 개발된 신무기였다.

10월 9일 삼례집회 이후 10월 12일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과 본격적으로 접전하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15일 충북 청풍 부근에서 농민군 30명이 살해되고, 10월 25에는 성주에서 동학군 11명이 살해되었다.

11월 10일, 경북 산청 단성현에 포진하고 있던 농민군에게 기습 공격하여 186명이 전사했다.

11월 18일, 충남 천원군 목천 세성산에 포진하고 있던 농민군은 일본군 2,000명과 관군 만여 명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11월 19일,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자작고개에서 농민군 천여 명을 살해했다. 이때 일본군은 한 구덩이에 부상자까지 몰아넣고 파묻는 만행을 저질렀다.

11월 25일, 경남 곤양 금오산에서 70여명 살해.

12월 12일, 청주성 밖 3리 까지 진격한 김개남의 만여 농민군들 중 100여명 사망.

12월 13일, 전북 진안 정천면 전투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농민군 수백명 살해.

12월 14일,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농민군을 기습공격하여 논산 상월면 대촌리에서 300명 사망.

이밖에도 전라도 순천에서 150명, 능주에서 20명, 강진에서 사로잡힌 포로 170명, 장흥 자오현에서 수백명이 학살되는 등 전국 곳곳에서 패주하는 농민군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박은식은 <조선 독립운동 지혈사>에서 “동학농민군은 호미와 곰방메와 가시나무총을 들고 밭고랑에서 분기하여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한지 9개월 만에 드디어 항복하였다. 이 변란통에 사망한 자가 30만이나 되었으니 미증유의 참상이로다.” 라고 통탄했다.

6. 비극의 우금치 전투

2만 농민군이 500명만 남다.

12월 7일,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관군 간에 벌어진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처절하고 가슴 아픈 전투였다. 이인리에서 공주읍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우금치인데, 우금치란 이름은 고개가 험해서 소를 몰고는 넘을 수가 없는 고개라 해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이 고개에 금광맥이 있어서 소만한 금덩어리가 들어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전해온다.

전날 12월 6일 이인리 전투에서 전봉준은 서산 관병과 일본군이 이끄는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는 전과를 올리고, 이튿날 공주성을 앞에 두고 우금치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날 새벽부터 우금치에 매복해 있다가 동이 트면서 동학농민군 앞쪽에서 햇빛이 눈부시게 비추자 우금치 고개로 올라오는 농민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농민군은 정면으로 비춰오는 햇빛에 눈이 부셔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고 빗발치는 총탄에 연신 언 땅위로 고꾸라졌다. 일본군 1대가 총격을 가하고 뒤로 물러서면 2대가 나서 총을 쏘아댔다. 시체 위로 시체가 무수히 쌓여 갔다. 교활한 일본군은 민가를 뒤져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깨에 동학깃발을 꽂고 총을 숨겨 농민군에게 접근하였다. 공주영장 이기동이 이끄는 관군은 농민군 좌측을, 조병완이 이끄는 부대는 우측을 공격했다.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사 박제순이 이끄는 관병에게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누어라. 왜 동족을 살상하느냐”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빗발치는 총알 뿐이었다.

이렇게 우금치에서 7일간 4,50차례 전투가 계속되었고, 2만여 농민군은 500여 명밖에 남지 않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다. 우금치 계곡과 봉황산 마루는 쓰러진 농민군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산아래 시엿골 개천은 여러날 동안 줄곧 핏물이 흘렀다.

일본 병관 모리오는 우금치의 견준봉 사이의 능선에 일본군을 배치하고 전봉준 군이 진격해오자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능선에 몸을 감추었다. 다시 농민군이 산마루를 넘으려 하면 능선에서 올라서 다시 일제사격을 가하고 몸을 숨기었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40-50차례 거듭하니 농민군의 시체가 온 산에 쌓여 갔다.

엄동설한에 일본군과 관군은 완전무장한 반면 농민군은 의복이 남루하여 말이 아니었다. 상대는 방한모에 방한 양말, 가죽신을 신고 서양식 신무기로 대항하는 정규군이었다. 이와 달리 농민군은 화승총과 죽창에 머리에는 흰 수건의 띠를 두르고 무명베 핫바지 차림에 버선발과 짚신이어서 감기와 동상에 걸린 자가 늘어갔다. 여름이었다면 아무리 신무기를 지닌 일본군이었다 해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의 인해전술 앞에 굴복했을 것이다.


우금치 넘어가는 도로와 우금치고개, 고개 위에 세워져 있는 조형물들

동학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논산 쪽으로 철수하였다. 일부는 천안 세성산 쪽으로 후퇴했으나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집중사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북접의 지휘자 김복용, 김영우, 원금옥 등이 붙잡혀 총살되었다. 관군 측 좌선봉 이규태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아. 수만이나 되는 비도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 점거하여 성동추서, 섬좌홀우 하면서,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력인가. 그 정황을 말하면 뼈가 떨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좌우 방비가 안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결국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 김진경은 이 날의 전투를 시로 표현했다.

우금치의 노래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무엇이 생긴 것은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가시덤불로 피어 넘을 수 없는 무엇을 넘기 시작한 것은

옛적에는 굶주린 사내들이 들어와소도둑이 되었다는 좁은 고갯길흰 옷을 입은 동학군들이 죽어 산을 이루던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치던 것은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넘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노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의리 속에 빛나는 하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우리들의 절망은 우리들의 희망

노예의 노래는 빛나는 하늘

진달래 뿌옇게 핀 좁은 고갯길

지금도 소리쳐 오는 함성은 우리의 것

아직도 피가 뜨거운 사내들은

죽음처럼 새파랗게 날선 고개를 넘는다.

우리들의 새벽 출근길에, 책 위에, 식탁위에

문득문득 막아서는 우금치여

너를 넘는다. 우리들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너를 넘는다.

마지막 반격을 하다.

살아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논산에서 철수한 전봉준은 노성의 윤씨 종가에서 잠시 몸을 쉬었다고 한다. 윤씨 종가는 대대로 양반지주로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농민군들이 이 집을 불태우려 하자 일부 농민들이 불을 끄고 만류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깥문 서까래에는 불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밥을 얻어먹고 놋쇠로 만든 재떨이와 담배통을 내밀며 ‘이것 밖에 드릴 것이 없소“ 라고 사례하고 갔다고 한다.

전봉준은 윤씨 집을 나와 전주성에 들어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11월 23일 전봉준 부대 3천여 명은 전주성을 떠나 원평으로 향했다. 25일 오전부터 전투가 벌어져 혼신의 힘으로 항전했으나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흩어졌다. 전봉준은 다시 태인으로 내려갔다. 27일 성황산에서 관군과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40여명이 죽고 50여명이 붙잡혔다. 태인을 빠져나온 전봉준은 이제 현재 상황으로는 더 이상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한 군대와 싸워 이길 공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전봉준은 자신의 공초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문: 그 후 다시 무엇을 했는가.

답: 금구로 패주하여 다시 도모하였으나 수효는 증가하되 기율이 없어 다시 싸우기가 극히 어려웠다. 더구나 일본군이 추격해 와 2차 접전하였으나 패주하여 각기 해산하였다.

패퇴한 뒤 살아남은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져 자기 살길을 찾아 헤맸다. 고향에 돌아가면 붙잡힐 것이므로 산골이나 남쪽의 후미진 곳으로 숨어 들어갔다. 관군과 민보군은 농민군 색출에 나서 처참한 복수를 하였다. 그들은 붙잡힌 농민군을 악랄하게 처형했다. 땅을 파고 한꺼번에 끌어다 묻거나, 웅덩이나 강물에 쳐 넣었다. 어떤 벼슬아치는 단단한 관솔을 깎아 머리의 숨통에 박고 불을 붙여 타들어 가게 하여 머리통이 터져 죽게 했다. 이 밖에 사지 찢기, 수레로 깔려 죽이기, 배를 죽창으로 찔러죽이기도 하였다. 조선정부와 관군은 갑오개혁법 등에 따라 농민군을 적법하게 처리하지 않고, 복수심에 불타 최대한 악랄하게 죽이는 방법을 동원함으로서 사회 갈등만 더 깊게 하고 화해로 이끌지 못했다.

이때 일본군은 직접 처형에 나서지 않고 고종, 대원군, 유력세력과의 연관성을 캐는데 집중하였다. 그 이유는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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