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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1)/새야새야 파랑새야

by 싯딤 2009. 9. 4.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 을 6회로 나눠 싣습니다. 발췌, 참고 도서는 맨 마지막에 싣습니다.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으로 우리에게알려진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

이 사진은 1895년 2월,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무라카미 기자가 서울의 일본영사관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으로 이송될 때 촬영했다.' 는 기사로 실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어릴 적 우리 입을 통해 불려지고 전해?왔던 이 노래의 주인공인 녹두장군 전봉준, 무너져가던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희망 잃은 백성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일어섰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전봉준, 오늘날에 와서야 위대한 지도자로 다시 평가되고 있지만 근래까지도 그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주변을 의식해야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개혁하고 외세를 막고자 조국 강토에 우뚝 서서 포효했지만 삭풍처럼 휘몰아친 매서운 역풍에 끝내 마지막 언덕을 넘지 못하고 쓰러져 간 그를 보내고, 이 땅의 민중들은 삶이 고달플 때면 세월과 함께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면서 애달프고 구슬픈 가락의 이 노래를 불러왔다. 한 시대의 역사를 증언하고 한 인물을 반추하면서 우리 곁에 맴돌기를 어언 백여년, 그러나 이마저도 전봉준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듯이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차츰 잊혀져가고 있다.

 

Ⅰ.무너지는 조선의 봉건 지배체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이나 이를 모태로 한 사회운동은 그 시대를 선도하기위해 발생했다기보다 그 시대의 산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 당시 사회 밑바닥에 흐르고 있던 대중 의식을 어떤 사건을 계기로 틀에 넣어 정형화하거나 몇몇 지도자의 이념으로 의미를 모두 부여하여 귀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을 음미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처했던 시대 상황과 농민혁명을 일으킨 주체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를 우선 조명해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봉건적 지배체제는 내재된 여러 모순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생명력을 지속해 왔다. 그 생명력을 지속시켜 준 것은 다음과 같은 유·무형의 강제적 힘들이었다.

첫째, 토지를 기본 생산수단으로 하고 생산층을 확보하여 이로부터 세금을 안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경제구조로서, 이는 중앙의 양반 관료조직과 결합되어 강력하게 강제력을 발휘하였다.

둘째, 지배계급과 생산계급을 배타적으로 나누어 놓은 봉건적 신분제도의 힘이다.

셋째, 인간을 선천적으로 차별하는 신분제도를 합당하다고 논리적으로 뒷받침해준 성리학적 지배이념이다.

넷째, 위의 연결고리들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도록 강제적으로 힘을 발휘한 군사력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400년간 지속되어 온 이러한 봉건적 지배형태는 서구 자본주의 요소와 부딪히고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여 농민층에 신분 변화가 일어나면서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경 서울과 남대문 일대. 초가집들과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일본식 집들이 대조적이다. 멀리 경복궁과 성벽도 보인다.  <사진으로 보는 100년>

 

1. 사회, 경제적 상황

농업경제와 신분질서의 변화

조선사회는 지주와 전호제田戶制(소작농), 양반ㆍ평민ㆍ천민으로 대별되는 두 가지 형태의 신분제도였다. 이러한 인간차별의 지배이념은 성리학이 합리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18세기를 지나면서 이앙법이라는 새로운 농사법이 개발되어 노동력은 절반으로 준 반면 수확량은 2배 이상 늘어나고, 저수지 등 수리시설의 정비, 시비법의 발달, 농기구의 개량 등 경작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두드러지게 증대되자 조선사회는 커다란 경제적 변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농업생산량이 증대하자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부호가 되고, 자작농의 토지까지 사들이면서 경영규모를 확대시켜 나갔다. 이들은 감자, 고구마, 고추, 인삼, 담배 등 새로운 작물들을 들여와 집단 재배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 팔았다. 19세기 초, 전국에는 약 천여 군데에서 5일장이 열렸으며, 지방 행정중심지와 포구에서는 상시로 시장이 열려 상업도시로 발달해 갔다. 시장을 중심으로 보부상, 객주, 선상 등이 새롭게 출현하여 독자적인 세력으로 형성되면서, 그동안 시전상인 등 봉건적 특권상인층이 장악해왔던 유통 독점권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농산물의 상품화로 시장이 성해지면서 화폐경제가 급속히 발달하고, 농민들 중에는 농업경영에 성공하여 서민지주 혹은 부호의 광작 경영주가 되어 신분적 특권을 누리는 자도 생겨나 그동안의 신분질서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들 부농과 새롭게 형성된 상업층은 돈벌이를 하면서도 세금 의무는 지려하지 않았다.

한편, 광작廣作으로 남아도는 인력과 몰락한 소작농들은 소작지로부터 떨어져 나가, 먹고살기 위해 비참한 모습으로 새로운 생활터전을 찾아 다녀야 했다. 이들은 도시주변으로 흘러들어가 최하 수준의 장사벌이에 뛰어들거나, 단순한 날품팔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거나, 거지로 떠돌거나, 명화적明火賊에 뛰어들기도 했다. 세도세력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계층도 오랫동안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면서 더 이상 책만 붙들고 있을 수 없어 평민과 다름없는 처지로 전답을 일구어야 했다. 이들 몰락한 양반(잔반 殘班)들 가운데는 신분을 포기하는 자도 나타났다.

조선후기 사회는 이렇게 농업경제의 급격한 변동 속에 소수의 부농·지주층과 몰락, 궁핍의 나락으로 빠져 봉건체제를 질곡으로 느끼는 다수의 빈농층으로 양극화해 가고 있었다.

1900년경 강경시장과 북한산성 밖 마을풍경

 

봉건 지배이념의 쇠태

조선의 성리학은 인간의 신분은 타고난다고 생각하여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들이 내세운 성리학은 이기론理氣論으로, 예의명분을 중시하고, 일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상하·남녀 차별적 신분관계를 당연시하는 논리로 뭉쳐졌다.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관 확산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명분론에만 집착하여 현실성 없는 철학적 논쟁에 빠져 정쟁을 벌이며 붕당만 속출시켰다. 성리학이 현실성 없는 사변적 관념주의에 빠진 좋은 예가 헌종 때의 예송논쟁이다. 상복을 얼마동안 입느냐는 문제로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었는데 실상은 자파 생존을 위한 명분 없는 싸움일 뿐이었다.

성리학이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한계에 이르자 양명학과 실학이 대두되었다. 양명학은 16세기에 전래되었지만 성리학의 위세에 눌려 드러내놓고 논하지 못하다가 조선 후기 들어 공론화되었다. 양명학의 기본 사상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즉, 알았다 해도 행하지 않으면 참 앎이 아니며, 알았으면 곧 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앎과 행함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명학도 공리공론空理空論임은 마찬가지여서 그 반동으로 실사구시事求是를 내세운 실학이 나왔다. 그러나 실학도 성리학을 완전히 배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리학을 위협한 것은 불교를 재해석한 미륵신앙, 천주교 같은 서양 종교였다. 이 종교들이 피지배층에 급속히 확산되면서 성리학 가치를 부정하고 나아가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하는데까지 발전하였다. 이에 봉건 지배세력은 더욱더 폐쇄적, 획일적 경향을 보이면서 이들을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이단학문이라 하여 사문난적으로 몰아 제거에 나섰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봉건 지배세력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 폭력 도구로 변질되었다.


1900년경 밭 메는 모습과 김홍도의 <타작도>, 양반 지주가 긴 담뱃대를 물고 낟가리를 털고 있는 머슴들을 감시하고 있다.

 

삼정의 폐단

봉건체제를 지탱해 주던 신분제와 성리학적 지배이념이 서서히 이완되어가자 봉건지배층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생존과 권력 유지를 위해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착취의 대명사였다. 이 삼정의 수취제도는 수탈의 명목도 문제였지만 근본적인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 토지 소유주인 지주에게 세금이 부과된 것이 아니라 토지를 빌어 농사짓는 소작인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전정田政은 농사 수확량에 부과하는 조세를 말하는데,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비중이 가장 큰 세금이었다. 이 시기 농민들의 세금 부담은 엄청났다. 흉년 때나 묵은 땅을 일구었을 때 면세해주던 규정은 사문화 되었고, 기본세 외에 각종 명목의 세금이 만들어져 농민들의 등골을 뽑아 먹었다. 관리들의 식사비, 여행비, 서원 제사비, 관료 생활비, 가마 수리비, 토호들의 족보 발간비, 부임 여비 등의 세목을 책정하여 백성들의 주머니를 쥐어짜냈다.

군역軍役에 나가지 않는 대신 받은 군포세금(軍政)도 가중되었다. 죽은 사람에게 물린 백골징포白骨徵布, 어린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도망간 자의 이웃에게 물리는 인징隣徵, 일가친척에게 물리는 족징族徵, 심지어는 뱃속의 태아까지도 군적에 등록시켜 물리고, 여자를 남자로 고쳐 등록시켜 군포라고 빼앗아 갔다. 군포 착취가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힘들게 했었는지 정약용이 강진에 있을 적에 지은 시를 통해 그 단면을 보자.

애절양哀切陽

<정약용>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관아문 향해 울부짖고 하늘보고 울부짖네

군인 간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로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이는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내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려해도

호랑이 같은 문지기 버티고 있구나

이정里正놈의 호통소리에

외양간 단벌 소만 끌려가누나.

남편 문득 식칼 갈아 방안으로 뛰어드니

붉은 피 방안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 이 환난은 아이 낳은 죄로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지나친 일이고

땅 자식 거세함도 애닲은 일이거든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이치거니

아들 낳고 딸 낳는 건 사람 사는 도릴세라.

말,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 있어서랴

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

한알 쌀, 한치 베도 바치는 일 없으니

다 같은 나라의 백성이거늘

어찌 이다지 불공평하단 말인가

객창에 우두커니 서서 시구편鳩篇을 내내 읊어보노라.

*애절양: 양근陽根 자른 것을 슬퍼하다.

 

정약용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목민심서' 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계해년 가을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노전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軍保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 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 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아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 내가 이를 듣고 시를 지었다."

재난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추수기에 거둬들였던 환정還政도 관리들의 축재수단일 뿐이었다. 수령과 아전들이 환곡을 갈취한 다음 장부상에 허위로 기록해 놓고는 쌀값이 오를 때 비싼 값으로 내다 팔아 이익을 가로채거나 농민들에게 절반만 지급한 뒤 다 물리게 했다.

이러한 삼정의 착취는 실질적으로 국가재정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농민들만 등골이 휘어지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2. 지배세력의 부패

부패한 세도통치 80년

세도통치는 문중 세력이 변칙적으로 위임 통치한 형태로서, 순조·헌종·철종·고종 대에 이르는 80여 년간 안동 김씨·풍양 조씨·여흥 민씨 세력이 조선후기 사회를 정치, 경제적으로 병들게 하였다.

19세기 초, 정조(1776~1800)의 뒤를 이어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하던 경주김씨 영조비 정순왕후(김대비)는 자신의 친정식구들을 권력에 포진시켰다.

1900년대 충무로, 멀리 보이는 건물이 명동성당,   당시 날품팔이 지게꾼들. 

 

수렴청정이 끝나자 이번에는 순조비의 친정세력인 안동김씨 김조순 일파들이 득세하게 되었고, 여기에 세자빈의 풍양 조씨 집안들까지 세력을 떨쳐 헌종 때까지 이어졌다. 안동김씨 세력이 어린 철종을 앉히고 다시 득세하니 조선 말기는 두 세도권력에 의해 왕권은 허수아비가 되고 부패는 가속화되었다. 이어, 고종이 어린 나이에 풍양 조씨 세력의 지원으로 등극하자 고종의 생부인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한 뒤 안동김씨 세력에게 철퇴를 내려 세도정치가 어느 정도 수그러드는 듯 했다. 그러나 고종이 성장하여 대원군을 축출하고 친정을 하자 이번에는 고종비 명성황후 민씨의 세력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 민씨 집단의 권력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자본주의의 풍요한 물질생활에 현혹되어 탐욕스런 돈벌이에 나서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민씨 중에도 큰 도둑 셋이 있는데 경성 도둑 민영주, 관동 도둑 민두호, 영남 도둑 민형식이 그들' 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번은 민두호의 아들 민영준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평안도 금을 긁어모아 송아지를 주조해서 고종에게 바치니 고종은 지극한 충성을 보였다 하여 중앙직을 그에게 맡기는 한심스러운 상황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또 민씨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인사를 단행하면서 그 때마다 몰려드는 전국의 부호들에게 참봉, 도사都事 등의 자리를 팔아 넘겼다. 과거시험도 해마다 10여 차례씩 치루어, 내는 돈의 액수로 합격여부를 결정하였다. 매관매직에는 정해진 액수가 있었는데, 감사나 유수자리는 엽전 4, 50만~100만 꿰미, 초사는 5,000~1만 꿰미, 대과는 5만~10만 꿰미, 소과는 2~3만 꿰미였다.<오하기문>. 처음에는 이렇게 팔아넘기다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자 나중에는 돈 많은 사람을 물색하여 많은 돈을 받고 억지로 떠넘겼다.

이렇게 경주김씨, 안동김씨, 민씨에 이르는 7·80년 동안 세도세력들은 썩을 대로 썩고, 여기에 관직을 산 지방 수령들까지 관직 매수에 들인 돈을 보충하기위해 수탈에 앞장서니, 통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농민들의 분노와 원한은 커져만 갔다. 이런 살기 힘든 상황 속에서 1859~1862년(철종 10~13)에는 전국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여 40만 명이 죽어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고, 여기에 흉년까지 겹쳐 1871· 2년에는 자녀를 곡식과 바꾸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893년에는 심한 수해로 폐농이 속출하기도 하였다.

국가재정의 위기

1900년경 조선왕조의 1년 예산은 대략 7~800만원 정도였는데 예산의 절반 정도만 조세 수입으로 걷혀 해마다 재정 부족상태였다. 국고가 바닥나 월급을 지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년도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조세(만원)

150

240

280

380

500

830

700

1,000

징수율(%)

29.4

51.0

그러나 조선 왕실은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궁내부까지 만들어 온갖 사치를 누렸다. 이 기간, 왕실이 별도로 소유한 돈이 약 400만원이었는데, 이중 절반가량이 왕릉 정비, 제사비, 전각 짓는 사업에 쓰였다. 매년 7월 25일은 고종의 생일인 만수절로 이때가 다가오면 종친과 척신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수령들이 갖가지 물건을 진상하였다. 한번은 경기감사 김명진이 사위 민영환을 시켜 ‘왜증 50필, 황저포 70필’이라 적은 물목을 갖다 바쳤는데 고종은 그것을 보고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반면 전라감사 김규홍이 ‘명주 500필, 갑사 500필, 백동 5합, 색함 50’ 등등의 굉장한 물량을 적어 바치자 고종은 ‘규홍이야말로 나를 위해 일하는 자로다’ 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본 민영환이 할 수 없이 자기 돈 2만 냥을 들여 다시 사다 바쳤다. 백성의 고혈로 만수절에 만든 음식은 산해진미로 넘쳐나 백관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아돌아 결국 쉰 음식을 경회루 연못에 버리니 고기들이 변한 음식을 먹고 전부 죽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고 지출 중에는 외국인을 초대하거나 또 비밀리에 외국으로 사람을 보내는 일에도 막대하게 들어갔다. 이 때문에 돈이 부족해지면 청나라에서 1만냥, 10만냥씩 빌려다 썼다.

왕실의 사치와 낭비는 이러한데 관료들에게 주는 녹봉은 9개월씩이나 밀렸다.


좌측으로부터 영친왕, 순조, 고종황제, 순조비, 덕혜옹주

 

3. 당시의 국제 정세

서구 자본주의 열강들의 침입

1820년대 들어 영국의 산업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조선도 자본주의 시장화에 빨려 들어갔다. 서구 자본주의 열강들은 봉건국가나 후진국들을 제각기 자신들의 상품시장, 원료 수급지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식민지화를 꾀했는데 조선 근해에도 이들 선박이 수시로 출몰하면서 침략 의도를 뻗쳐왔다. 그리하여 1800~1847년, 47년 동안에 7차례였던 선박 출몰이, 이후 1860년까지 12년 동안에는 20차례로 증가했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을 침범하고, 이어 영국도 통상을 강요해 왔다.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로 침범하여 규장각 도서와 금, 은 등을 약

탈해 가고, 다시 9월에 대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병인양요>. 1870년 5월에는 독일 외교관이 일본 관리와 함께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렸다. 1871년 4월에는 미국 군함 5척이 85문의 대포와 군사 1,230 명을 태우고 들어와 강화도를 점령했다가 우리 군대에 의해 퇴각하였다.<신미양요>. 1875년 8월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출몰한데 이어 영종도를 침범하여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 30여 명을 살해했다. 이들은 이듬해 1월 군함 8척과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 위협하면서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강화도조약을 맺자 일본은 부

산항, 원산항, 인천항을 차례로 개항시켰다.


강화도조약 체결당시 강화부 진무영에서 조약체결 강요 무력시위를 벌이는 일본군. 조약당시를 기록한 그림

 

* 강화도조약

1876년(고종13)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 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강압으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 조약.

<주요내용>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1조)

-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사무를 협의한다. (제2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여한다. (제5조)

-조선은 연안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 (제7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 자국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제10조)

-양국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장정을 체결한다. (제11조)

1조는 조선과 청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 5조는 통상업무 이외에 정치적, 군사적 침략 의도, 7조는 조선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지점을 미리 정탐하려는 의도, 10조는 치외법권으로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의도.

이후 조선은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의 식민주의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고. 위정척 사파와 개화파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조선은 물밀듯 들어오는 서구 열강들의 통상압력에 굴복하여, 미국(1882), 중국(1882), 독일(1883), 영국(1883), 이태리 (1884), 러시아(1884), 프랑스(1886), 오스트리아(1892)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제 조선은 무방비 상태에서 세계열강들의 시장쟁탈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한 것이다.

 

일본의 침탈

이렇게 문호가 강압적으로 개방되자 조선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이 가장 혹독했다. 개항초기 일본은 주로 중개무역을 했는데, 유럽의 옷감을 수입해 와 조선에서 20배 이상을 받고 팔았다. 그 돈으로 조선의 곡식을 싼 값으로 사들여 자국에 5배 이상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자국의 식량 부족분을 메우려고 조선의 쌀을 마구 사들인 것이다. 그러자 정작 조선에는 쌀이 모자라게 되어 쌀값이 상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쌀값 앙등은 소수 지주들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나, 소작농들에게는 쌀값이 비싼 춘궁기에 빚을 내서 사먹고 가을에 수확한 쌀을 싼 값에 팔아 빚을 갚아야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빚더미만 커져갔다. 가내수공업도 마찬가지였다. 값싼 외국산 면포가 순식간에 조선의 면포시장을 잠식했고 도자기 제조업 등 모든 수공업 분야가 생산을 중단해갔다.

4. 민중세력의 형성과 저항

조선 후기 경제상황은 한결같이 농민 대중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이었다. 백성들은 가중되는 조세부담과 수탈로 배고픔과 헐벗음에서 떨어야 했으니 생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싸워야만 했다. 봉건세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움직임이 전국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점차 조직적인 투쟁을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조세와 지주에게 내는 지세地稅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거나 나쁜 소문을 퍼뜨리며 대항했다. 불시에 벼슬아치나 지주들의 집을 습격하거나 불을 지르고 사라지고, 한낮에 수백 명이 떼지어 몰려다니며 대규모 습격전을 벌이기도 하고,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세금 거두어가는 것들을 탈취하기도 했다.

지역적으로 고립되고 산발적이던 저항이 1812년 홍경래의 봉기로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이해 2월, 몰락한 양반 홍경래는 광부들과 농토 없는 농민들을 이끌고 평안도 가산에서 일어나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검은 옷에 푸른 모자를 쓰고 창검으로 무장한 뒤, "조정은 서토西土를 버렸다. 심지어 권문세가 노비들조차 서토 사람을 보면 평한平閑이라 일컫는다. 이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라는 격문을 발표한 후 고을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다. 그러나 5개월 만에 토벌되고 말았다. 사상인私商人, 몰락한 양반들까지 합세한 이 봉기는 비록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 자신들도 봉건 왕조의 잘못된 행태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조선 봉건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823년에는 박형서, 정상채 등이 정감록 등을 조직적으로 퍼뜨리며 청주성을 공략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1833년에는 서울에서 싸전상인들이 쌀값을 폭등시켜 한밑천 잡으려고 경강상인京江商人들과 결탁하여 쌀을 팔지 않자, 한줌의 쌀로 연명하던 도시백성들이 일어나 싸전과 경강상인의 집을 불태우고 한강나루터의 창고를 허물어 버렸다. 조정은 이에 당황하여 무차별 진압한 뒤 7명을 사형에 처하고 45명을 귀향보냈다. 1862년 2월 진주에서 발생한 진주민란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민란을 이끈 싸릿골의 농민 유계촌, 이명윤 등은 진주병사 백낙신이 재물을 갈취하고 개간한 땅까지 강제로 빼앗아 가는 등, 6개 조항의 불법 수탈이 극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게 되자,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수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이들은 6일간의 봉기에서 23개 현을 점령하여 4명의 부정 향리를 죽이고, 양반 집과 관아를 습격하여 가옥 126채를 파손하고, 많은 식량을 갈취했다. 이 불길이 전국으로 타올라 익산, 개령, 함평, 회덕, 공주, 순천, 장흥, 선산, 상주, 부안, 금구, 연산, 은진, 함양, 밀양, 성주에서 일어났고, 이어 8월에는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9월에는 제주에서 수만 명이 들고 일어나 열흘 동안 봉기가 계속되는 영향을 끼쳤다. 진주민란은 지배층에게 다소의 경종을 주어 소기의 개혁을 가져오고 갑오농민혁명의 원류가 되었다.

1864년 3월에는 동학을 창시한 최재우가 ‘전통적인 유교국가에서 이단으로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대구에서 처형당하였다. 1869년 3월에는 전라도 광양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1871년 3월에는 이필제라는 사람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천 명을 모아 일대 변란을 꾸미고, 경상도 영해를 점거했다가 붙잡혀 서울 서소문에서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1875년 1월에는 울산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흉년이 계속되었다. 1876년에는 생활이 어려워 도적질을 일삼는 명화적이 급증하여 밤에 횃불을 들고 관아를 습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1877년에는 훈련도감 군병들이 급료를 받지 못하자 반란을 꾀했다가 주동자 5명이 유배당하고, 1879년은 전국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많은 사람이 죽은 해였는데 울산에서 농민들이 관아에 쳐들어가 관리들을 구타하고 감옥 문을 부수어 버렸고, 1883년 동래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882년에는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못한 군병들이 봉기하여 임오군변*을 일으켰다. 1883년 5월에는 동래에서 민란이 났고, 1884년 10월에는 친일세력들에 의해 갑신정변이 발생하여 많은 요인들이 처단되었다.

* 임오군변

강화도조약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붕괴되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고종, 명성황후의 척족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으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개화정책에 따라 개화파 관료가 대거 기용되었으며1881년 일본에 의해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을 개편하여 여기에 소속된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별기군을 왜군부대라 하여 증오하게 되었다.


구군영 군인들과 일장기를 앞세우고 철수하는 일본군

구舊 군영 소속 군인들에게 13개월 동안 군료가 밀려 불만은 고조되었고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군병들은 민씨정권 이후 빈번하게 일어나는 군료 미불사태의 원인이 궁중비용의 남용과 척신들의 탐오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군료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 당상, 병조판서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1882년 6월 초 전라도 조미가 도착되자 6월 5일 선혜청에서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舊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 분의 급료를 지불하였다. 그러나 선혜청 창고지기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이고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자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군료지급 담당자가 민겸호의 하인이며 그의 언동이 불손하여 군병들의 분노를 유발시키자 수령을 거부한 구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 등은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을 구타하고 투석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는 주동자의 체포령을 내려 김춘영·유복만 등 4, 5명의 군인이 포도청에 잡혀갔다.

잡혀간 자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으며 그들 중 2명이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지자 군병들은 더욱 격분하였다(도봉소사건). 이에 김장손, 유춘만(유복만의 동생)이 주동이 되어 투옥된 군병의 구명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통문을 작성하였다. 6월 8일에는 이최응이 별파진을 동원하여 군변을 진압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져 군병들은 더욱 흥분되어 도봉소의 군료시비사건은 정변으로 확산되었다. 6월 9일 김장손과 유춘만을 선두로 한 무위영 군병들은 무위대장 이경하의 집에 가서 민겸호의 불법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이경하는 군료관할의 권리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변백구해辨白求解하는 글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였다. 민겸호의 집 앞에 이른 군민들은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하였으나 민겸호와 고직은 찾지 못한 채 가재도구와 가옥을 모두 파괴시키고 폭동을 일으켰다. 사태의 심각성으로 민씨정권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운현궁으로 올라가 대원군에게 진정한 후 진퇴를 결정해주기를 요청하였다.

대원군은 소요사태에 대해 무위영 군졸 장순길 등에게 명하여 표면상으로는 효유선무하는 태도를 취하여 밀린 군료의 지급을 약속하며 해산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밀계를 지령하고 심복인 허욱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군민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대원군과 연결된 군민들은 좀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하여 포도청에 난입한 후 김춘영, 유복만 등을 구출하고 이어서 의금부를 습격하여 백낙관 등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다른 일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나머지 일대는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

군민들이 이날 저녁에 일본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자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 등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도피하였다. 또 한편의 군민들은 별기군병영 하도감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를 살해하고 일본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폭동은 끝났다.

이튿날은 전날보다 더 강력해진 폭동군민들이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령부영사 흥인군 이최응과 호군 민창식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에 육박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였다. 난군들은 궐내 도처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척신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군민들의 난동을 조정에서는 민겸호의 보고에 의해 단순한 도봉소의 군료분쟁으로 생각했으나 척신들의 집들이 습격·파괴되고 군민이 대거 폭동에 참가하게 되자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에 보내어 진무시켰으나 실패하였다. 점점 사태가 위급하게 번지자 당면의 책임자를 문책한다는 뜻에서 선혜청당상 민겸호, 도봉소당상 심순택,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을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상호군 조영하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변사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군민들의 공격으로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난민들이 궐내로 진입을 하게 되자 고종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시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와 장자 이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하였는데, 이 때 허욱의 지휘하에 구 훈국병 200명이 대원군을 호위하였다. 대원군은 사태수습의 책임을 맡고, 왕명으로 ‘자금 이후 대소 공무公務는 대원군 전에 품결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사실상의 정권을 장악했다. 곧이어 국왕의 자책교지가 반포되어 군변의 정당성이 합리화되었고,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군민을 무마하여 사태수습에 나서 우선 군병의 요청에 따라 무위영, 장어영과 별기군을 혁파하고 5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3군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군병들에 대해 군료의 지급을 공약하고 척족의 제거를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하여 이재면으로 하여금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당상을 겸임하게 하여 병兵, 재財 양권을 장악하게 하고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 수령들에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대원군이 기용한 인물은 대개 남인계열의 노정치가들이며 인재의 보충을 위해 투옥되었거나 정배당한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서정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6월 15일에는 각 지방의 미납세미를 급히 서울로 보낼 것을 지방관에 명하여 군병들의 군료와 도민都民의 식량에 충당했으며 20일은 각공원가各貢援價에 감합 등의 절차는 갑자년(1864) 이후의 신정정식新定定式에 의하도록 하고, 21일에는 민폐의 근원이 되는 신감채辛甘菜, 해홍채海紅菜의 징수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어서 22일에는 주전鑄錢을 금지시키고 동시에 각종 도매의 민폐에 관한 것도 혁파시켰으며 26일에는 수세에 원래 정한 액수 이외의 부과는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부 난병들은 명성황후의 처단을 주장하고 해산을 거부했으므로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실종을 홍거薨去로 단정하고 명성황후 상喪을 공포하였다. 이에 민씨 일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곧 청나라 톈진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 김윤식 등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원조를 청하였다. 통지를 받은 김윤식 등은 대원군의 존재 위험성과 함께 난당의 소탕,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 청국이 조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청국정부는 김윤식의 의견에 따라 일본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고 오장경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곧 출동하게 하였다.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국은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한 오장경은 서울 요소에 군사를 배치한 후 조선의 내정에 직간접으로 간섭을 하며 군령)을 찾아온 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으로 호송함으로써 대원군은 정권에서 다시 축출되었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에 대항하지 못했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 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일본정부는 조선에 대해 군란의 수모자首謀者를 처단하고, 일본인 조해자遭害者 유족에게는 위문금을 지불할 것이며,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과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 등이다.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1885년부터 민란이 더욱 잦아졌다. 이 해 2월 여주에서, 1888년 7월에는 함경도 영흥, 90년 1월 안성, 8월 함창, 91년 1월 제주, 8월 고성, 92년 함흥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11월에는 동학교도 수천 명이 삼례에서 군중집회를 가진 뒤, 이듬해 2월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서 3일간 국왕에게 국정을 개혁하고 간당의 무리를 소탕하라는 복합 상소를 올렸다. 1893년에는 전국 각지에서 65건의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났다. 이후에도 농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처럼 조선왕조 후기에 민심이 동요하여 끊임없이 민란이 발생하자 우의정 조병세는 그 구조적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 공사公私가 너무 문란하며,

2. 왕의 근신近臣들은 직간을 피하고 아부를 일삼음으로서 왕은 허위보고만 들을 뿐이며,

3. 형벌이 정실에 흘러 기강이 잡히지 않고,

4. 관리는 민정을 조정에 반영시키지 않으며,

5. 관리에게 급여를 주지 못하여 백성의 고혈로 생계를 유지하며,

6. 이러한 사회악은 금권과 직결되어 있어서,

7. 매관매직이 성하고,

8.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짐에 따라 신하로서 왕에 대한 보좌가 결여되어 있다.

<고종실록 1892. 윤6월 5일>

 

5. 고부봉기 직전의 집회들

공주집회

1890년 8월, 이단사술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귀향갔던 동학도 서인주가 풀려나왔다. 서인주는 서병학 등과 1892년10월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에서 집회를 갖고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글을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올리고는 1개월 동안 감영문 밖에 머물면서 시위하였다. 그러나 조병식은 '앞으로 동학을 금하는 과정에서의 폐단은 중지할 테니 해산하기 바란다.' 는 대책없는 몇 줄의 글만 내걸고 교조신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삼례집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최시형(2대 동학교주)이 10월 27일 뒤늦게나마 나서서 교조들 모두 11월 3일 삼례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들 수천 명의 교도들을 이끌고 전봉준, 유태홍은 소장을 작성하여 전라 감영에 올려 동학은 서학이 아니라며 자유로운 포교활동과 교조신원을 호소하였다.

전주 삼례역에서 또 집회하여 서병학의 문필로 소장을 진술하여 의송코자 할 때 관리 강압의 두려움 때문에 소장을 올릴 사람이 없어 주저 방황하고 있는데 전라우도 전봉준, 전라좌도 유태홍이 자원 출두하여 관청에 소장을 올린 즉...<남원군 동학사. 1924년 남원군 주임 종리사 최병헌이 유태홍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필서한 책>

그러나 전라감사는 '고려해 보겠다. 교도들의 재물수탈은 금하도록 할테니 모두 물러가서 새사람이 되라.'는 회유적인 글만 되풀이하였다. 이에 북접北接교단은 자기들의 뜻이 어느 정도 전달됐다며 해산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교도가 아닌 수천 명의 농민들은 곧장 전주감영으로 몰려가 악질 토호들과 탐학 관리를 처벌해 달라며 감영문 밖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즈음 관서 지방에서도 농민 봉기가 계속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함종, 강계, 성천 등지에서는 관아를 공격하고 아전들의 집을 불태웠다. 이로 인해 함종부사가 파면되고 평안감사가 문책을 당하였다.<일성록, 고종 30년 2월 23일>

복합상소

지방 관리들의 기만성이 분명히 드러나자 공주, 삼례집회로 고무된 군중들은 이제 한양으로 올라가 상소운동을 벌이자고 외쳤다. 1893년 1월, 남접계의 서인주 ,서병학 등은 임금의 궁궐 앞에서 상소하는 이른바 복합상소를 올리기로 작정하였다. 서병학은 2월 1일 먼저 상경하여 한양 남산동 최창한의 집에서 준비를 하였다. 상소하기 위해 올라오는 교도들은 마침 때가 세자 탄신을 축하하는 과거가 있을 무렵이어서 이들 행렬 속에 끼여 속속 올라가고 있었다. 서병학은 복합상소를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사실 상소에는 큰 관심은 없었고 오히려 민씨 일파와 조정 간신들을 제거하는 정치적인 뜻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은 먼저 서둘러 올라와 11일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다. 상소를 접한 고종은 13일, “각각 집에 돌아가 하는 일에 힘쓰고 있으면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 는 전교를 내렸다. 그러자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고 먼저 상소했던 북접계는 임금의 비답이 있자 곧바로 내려갔다.

척왜양 운동

서인주, 서병학은 북접계가 내려간 뒤로 한양에 남아, 거리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왜와 서양세력을 물리치고자 의병을 일으킴)와 '보국안민報國安民"(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함)의 괘서를 붙이고 노골적으로 반외세, 반봉건을 부르짖었다. 1893년 2월 14일 밤 미국인 학당을 시작으로 각국 영사관, 교회당에 괘서가 나붙었다. 3월에 접어들 무렵에는 "만약 너희들이 짐을 싸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3월 7일에 공격할 터이니 그리 알라."는 벽서가 붙고, 3월 2일 일본 영사관에는 "안위의 기회는 너희들 스스로 잡는 것이니 뒷날 후회하지 말라. 두 말 않겠으니 빨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최후 통첩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 즈음 삼례에서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전라 감사에게 동학을 사교로 칭하지 말 것, 외국인과 상인을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 낼 것, 탐학 관리들을 모두 제거할 것 등을 요구하며 집회를 갖고 있었다. 이 집회에 전봉준이 참여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사전에 서병학과 의논하여 한양에서 척왜양을 부르짖을 때, 자신은 삼례에서 봉기를 하며 사람을 올려 보내고 기회를 보아 한양으로 진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전봉준은 곧 후발대와 함께 한양에 잠입하여 조정의 정치상황을 살폈다. 이때 대원군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정창렬, 고부민란의 연구. 한국사 연구>

보은집회

그러나 3월 7일의 반외세 공격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전봉준, 서인주 등은 아직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한양에서 내려와 다시 한양공격을 위한 계획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반외세 집회를 계속 가지면서 북접과 다른 지역의 농민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세를 키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금지와 소두小頭 수배령을 내렸다. 정부로부터 동학이란 이름아래 쫓기는 신세가 된 전봉준 등은 최시형을 압박하여 3월 11일 보은에서 집회를 열기로 하고 방어를 위해 성채를 쌓고 깃발을 꽂아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집회일이 되자 개항이후 최대 인파인 7, 8만명이 운집하여 "척왜양창의"를 외쳤다.<김윤식, 황현, 오하기문>

이에 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이 때 고종은 청군을 끌어들여 사태를 진압하려 했는데 중신들의 반대로 거둬들였다.

 

어윤중魚允中 (1848년~1896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 본관은 함종咸從.

1869년 별시 병과에 합격하여 교리, 지평 등을 지내고,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서 청나라, 러시아 등과 국경을 정하는 데 노력했다.

그 후 승지, 참판 등을 거쳐 1893년 양호순무사로서 동학교도들의 보은집회를 해산시켰으며, 1894년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친러파의 세력이 강해지자 1896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에 옮기고(아관파천), 김홍집을 살해한 뒤, 고향으로 도망하던 중 용인에서 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규장각 대제학으로 증직되고, 1909년 7월에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1894년 김홍집 내각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좌로부터 외무대신, 어윤중

 

 

보은에 내려온 어윤중은 북접 주도의 보은집회를 정탐한 후, 3월 26일, 해산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왕의 칙유문을 반포했다. 고종의 칙유문을 접한 북접 지도자들은 감복하여 왕의 명지가 있으면 해산하겠다고 말했다. 어윤중은 4월1일 청주 영장과 보은 군수를 대동하고 장내리로 가서 왕의 윤음을 엄숙하게 읽어 내려갔다.

"...너희들은 어리석다 하나 어찌 세상의 대의와 조정의 약속을 듣지도 못했는가. 내 장차 탐학한 수령과 아전들을 엄하게 징치할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라. 만약 지금의 효유에도 흩어지지 아니하면 대처분이 있을 것이고 다시는 너희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 마음을 크게 바로 먹고 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왕의 윤음에 북접 지도부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3일 안에 해산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투항적 태도에 분개한 농민들이 북접지도부를 성토하는 등 분위가 험학해지자 최시형, 손병희 등은 이날 밤 야음을 틈타 달아나 버렸다. 서병학도 "내가 불행히도 동학에 들어와 남의 지목을 받은 지 오래 되었는데 모든 소행은 다 그들 짓이다."라며 함께 도주했다. 북접 지도부가 와해되자 괴나리봇짐에 한 줌의 양식과 짚신 몇 켤레를 매달고 며칠씩을 걸어 집회에 참가했던 농민들은 울분을 삼키며 허무한 마음으로 기약없이 흩어졌다.

원평집회

보은집회가 지도부의 변질로 와해되어가고 있을 무렵, 전라도 금구 원평에서도 전봉준이 참여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원평은 전봉준이 소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부근지역에서는 가장 큰 장시가 열려 사람들이 모이기에는 안성마춤인 지역이었다. 또한 전주로부터 15km 떨어져 있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원평집회도 어윤중이 보은집회가 해산된 뒤 효유를 위해 원평에 도착도 하기 전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들이 모두 흩어져 돌아갔지만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하여 언제 또 대열을 가다듬어 재차 모일지는 알 수 없었다.

밀양집회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원평에서 집회가 열릴 무렵, 경상도 밀양에서도 전봉준과 연계한 집회가 열렸다. 수만 명의 농민들이 소매없는 푸른 두루마기에다 소매 끝을 붉게 장식하고 반외세, 반봉건, 탐학관료 제거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도 보은, 원평집회 해산소식을 듣자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어윤중의 보고에 따르면 군중은 다음과 같은 무리였다.

- 재주가 있으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울분 속에 사는 자.

- 탐관오리의 비행에 분노를 느껴 민중을 위해 죽기로 결심한 자.

- 외국이 우리의 이권을 빼앗음으로 이를 분하게 여긴 자.

- 탐관오리에게 수탈을 당하고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 자.

- 세도가에게 눌려 살아갈 수 없는 자.

- 죄짓고 도망다니던 자.

- 영읍營邑의 관리로서 떠돌아다니던 자.

- 농민, 상인으로 살아갈 길이 없는 자.

- 그 곳에 가면 잘 살게 되리라는 풍문을 듣고 온 어리석은 자.

- 빚에 쫒기는 자.

- 천민의 몸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는 자. <승정원일기 1893.4.10>

삼남지방의 집회가 모두 해산되자 조정은 집회의 주모자로, 호서의 서병학, 호남의 김봉집(전봉준. 이 당시 가명을 사용함)과 서장옥을 지목하고, 4월10일 체포명령을 내렸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전봉준은 몸을 숨기고 앞으로의 계획을 숙의했다. 전봉준은 이런 집회가 쉽게 수그러들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즈음 동학교단 지도부에서는 전봉준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이들이 주도하는 민중집회에 교도들이 임의대로 참가하는 것을 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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