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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누가 왕을 죽였는가(7)- 제 22대 정조

by 싯딤 2008. 10. 20.

7장

개혁군주의 좌절

제22대 정조 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24년간)

<정조실록> 24년6월27일 (사망 전날)

약원藥院 도제조 이시수가 “탕약을 즉시 의논해 정해야겠는데 잠시 물러가 의논해 들여올까요?” 라고 물으니, “바깥마루로 나가 앉아 의논하여 들여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시수가 여러 의관과 함께 탕약을 의논해 정한 다음 가감팔물탕을 방문해 드리니, 임금이 어의 강명길에게 “이 약이 속에서 막히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강명길이 “원방元方 가운데 건지황을 감하였으니 반드시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고 아뢰자, 임금이 “오늘은 두 번을 복용해야 할 것이니 인삼 두 돈을 한 돈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정조실록> 24년6월28일 (사망 당일)

왕대비(정순왕후)가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고 분부하므로,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조금 뒤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홧병과 연훈방

경종시대부터 조선의 당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의 당쟁은 신하들 사이의 투쟁이었을 뿐 적어도 임금을 직접 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 사이의 분쟁에서 최종적인 판결자였다. 그러나 경종 때부터 신하들은 임금에게 당적을 붙이고 당이 다르면 적으로 돌렸다. 임금도 당색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경종이 소론 군주였다면 영조는 노론 군주였다. 그리고 그런 영조 밑에서 반노론의 기치를 들었던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와 노론에 의해 비참하게 뒤주 속에서 죽어갔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그가 영조의 외아들이란 점에서 극대화된다. 만약 영조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영조의 후사를 이으면 됐었다. 그러나 영조의 핏줄은 사도세자가 낳은 네 아들밖에 없었고, 따라서 아버지가 비참하게 뒤주 속에서 죽는 것을 목격한 아들이 즉위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네 아들중 세손인 산(정조)만이 세자빈 혜경궁 홍씨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세자의 후궁인 양제가 낳은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는 세손을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세손을 법적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듦으로써 세손의 지위를 보장해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강경파의 생각은 달랐다. 노론 강경파는 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불가피하게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른다 해도 그 대상이 세손일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가 죽을 때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던 그 비참한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을 세손이 즉위한다면, 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강경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반드시 삼종의 혈맥을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세손이 아니라 양제 박씨의 아들인 은전군이어야 했다. 나인 시절 방애라고 불렀던 양제 박씨가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 아들 은전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한 노론 강경파는 세손 제거에 나섰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세손의 나이 겨우 11살이었다. 10년 이상 대리청정한 28살의 세자를 멀쩡한 대낮에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노론의 공세를 겨우 11살의 세손이 막기는 쉽지 않았다.

만약 세손의 처리를 놓고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세손은 즉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자의 장인이자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은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처럼 장인이 사위를 죽음으로 몰 만큼 당론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3개월 후 사헌부 집의 박치륭은 홍봉한이 세자를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라고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이 상소에 분노해 박치륭을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귀양 보냈다. 이때 박치륭의 공격에 반박하여 올린 홍봉한의 상소는, 사도세자 비극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과 세손에 대한 그의 속마음을 잘 말해준다.

"기사년의 여당餘黨(남인)과 무신년의 여당(소론 강경파)들이 훗날 '생부生父(사도세자)를 위한다'는 말로 (세손을) 부추긴다면 그 추세를 막기 어려울 것이고 그 말에 마음이 쏠려들기 쉬울 것이니, 오늘날 전하의 신하들은 일망타진당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외할아버지가 외손자가 즉위했을 경우 '일망타진'당할 것을 걱정하는 이 상소는, 당시의 비정상적인 왕조국가 체제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홍봉한이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도 마찬가지였다.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가 부친과 숙부의 이런 정치관을 극력 반대하고 나섬에 따라 정치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들인 세손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경궁 홍씨 덕분에 정승의 지위에 오른 홍봉한은 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세손의 처지에서 볼 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반대로 홍씨 가문이 분열되었고, 홍씨 형제의 분열은 곧 노론의 분열이었기 때문이다. 홍봉한은 세손에 대해 표면상 침묵했으나 동생 홍인한은 적극적으로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홍인한의 세손 제거 방침은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집약되어 있다. 재위 51년(1775년) 11월 영조는 시,원임 대신을 불러모았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시킬 것을 결심한 후 대신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신기神氣가 피곤하니 공사를 펼치기가 어렵다. 내가 국사를 생각하느라 밤에 잠을 설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세손에게 '전선傳禪(임금자리를 물려 줌)'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대신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영조는 82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었다. 국왕이 사망하면 대리청정하던 세자나 세손이 즉위하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으니, 만일 세손이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 영조가 급서한다면 노론은 그의 즉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대리청정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하교로 세손을 폐위시키고 은전군이나 다른 종친을 즉위시킬 수도 있었다. 15살의 나이로 66살의 영조와 혼인한 정순왕후는 노론 김한구의 딸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다.

노론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아야 했다. 이때 좌의정 홍인한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내세운 논리가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 세손의 나이 24살, 숙종이 즉위할 당시보다 무려 9살이나 많은 나이였으니, 홍인한의 이 말은 곧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노골적인 선포나 다름없었다.

만일 영조와 세손이 적대적인 관계였다면 이때 세손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손은 현명했다. 그는 절대로 영조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았고 영조는 이런 세손을 흡족하게 여겼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후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담은 <금등비서>를 작성했다. 금등이란 쇠줄로 단단히 봉하여 비서를 넣어두는 상자를 말하는데, 이는 주공이 무왕의 병을 낫게 해주고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고 하늘에 빌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신하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즉 신하인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일종의 후회인 셈이다. 이 후회가 영조에 대한 세손의 효도와 맞물리면서 영조와 세손의 대립을 막아주었다. 영조는 시종일관 세손을 옹호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홍인한의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발언이 있은 며칠 후 영조는 세손과 춘방春坊(세자궁) 관원들을 입시케 해 말했다.

"요즈음 돌아가는 것을 보니 대신들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심법心法을 손자에게만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넘기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13년이나 지났으니 더 이상 권력에 미련을 가질 나이도 아니었다. 어쩌면 13년 세월의 무상함이 세손에게 권력을 넘기기로 결심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열흘 후인 11월 30일, 영조는 갓을 쓰고 세손에게 기대어 앉아 상참을 행했다. 영조는 통례원 관원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의식을 다 행하기도 전에 돌아가 침상에 누웠다.

"조정일이니 나랏일이니 하는 것이 오히려 하찮다. 지금 이후에도 대신들이 다투겠는가? 나의 기력이 이와 같으니 전례가 있던 일을 나는 생각한다."

영조가 익선관이 아닌 갓을 쓰고 나온 것은 임금 노릇을 그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즉 숙종 때 전례가 있는 대리청정과 정종 때 전례가 있는 선양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반대의 선봉에 선 인물은 홍인한이었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가 받들 수 있는 일입니까? 이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하들이 받들 수 있는 하교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만기를 돌보셨지만 조금도 지체됨이 없었습니다. 신은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홍인한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영조는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동궁에게 들여보내고 상소에 대한 비답이나 시급한 공사는 내가 세손과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며칠 기다려 세손의 일처리 솜씨가 익숙해지면 마땅히 여기에 추가하는 하교가 있을 것이다."

대리청정에 "추가하는 하교"는 선위禪位(왕위를 물려 줌)밖에 없었다. 이는 홍인한으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손의 즉위는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조가 승지 이명빈을 불러 전교를 쓰게 하자 홍인한은 승지를 가로막고 앉아, 영조의 하교를 쓰지 못하게 방해하면서 하교를 들을 수 없게 하였다.

신하가 임금의 전교를 못 쓰게 방해하는 행위는 임금의 권위, 나아가 임금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으로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어차피 세손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것이었다. 영조는 승지에게 써놓은 전교를 읽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 하교에 대답한 인물은 승지가 아니라 홍인한이었다.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신하된 자가 누가 감히 읽겠습니까?"

이미 성년이 된 세손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세손은 홍인한이 자신의 즉위를 저지하는데 목숨을 걸었음을 알고 있었다. 세손은 일단 홍인한에게 타협책을 제시했다.

"이 일은 내가 간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사세가 급박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상소하여 사양하려 합니다. 그러나 문적이 있어야 상소를 올릴 수 있으니 두서너 글자라도 전교를 받아 내가 사양 상소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오."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달라는 타협책이었다. 영조의 하교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리청정과 "추가하는 하교"는 곧 세손에게 보위를 주겠다는 선언이었으므로 세손으로서는 이를 반드시 문서로 만들어두어야 영조가 급서했을 때 즉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홍인한은 세손의 말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승지를 돌아보며 손을 저어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미 영조의 신하가 아니었다. 영조도 물론 홍인한의 이런 의중을 알고 있었으나 80줄에 들은 영조로서는 더 이상 옥사를 일으킬 기력이 없었다. 그 대신 영조는 세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바로 그날 세손에게 순감군을 수점하도록 한 것이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세손에게도 이제 군사가 생겼다. 이 조치에 놀란 노론 대신들이 대거 입궐해 일제히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한 발 더 나아가는 조치를 취했다.

"순감군을 동궁이 수점하는 것은 3백년 된 고사이다. 상군(임금 거동시 호위하는 군사)과 협련(임금의 연을 호위하는 군사)을 대령시켰다가 정시가 되면 들어오게 하라."

호위군을 동원하겠다는 말을 들은 대신들은 두려움에 쌓여 한 발 물러났다. 영부사 김상복은 "신 등은 전연 몰랐습니다. 지금 분명히 전례가 있음을 삼가 들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진달하겠습니까?"라며 물러섰고, 홍인한과 영돈녕 김양택, 그리고 판부사 김상철도 전례가 있는 것을 몰랐다고 물러섰다.

아무리 늙었어도 영조는 51년 동안 왕 노릇을 한 노련한 임금이었다. 영조는 순감군 수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다만 순감군을 수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공사도 모두 궐내에서 세손에게 대신하게 하려 한다."

뒤에 호위무사가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조가 명령만 내리면 상군과 협련이 들어와 대신들을 주륙낼 수도 있었다. 홍인한의 다음 말은 상군과 협련을 동원하겠다는 영조의 위협에 대신들이 느낀 두려움을 말해준다.

"하교가 이와 같고 이미 궐내에서 하도록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 등이 알 만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 거동하겠다고 하교한 후 군병이 반드시 대령하고 있을 터이니, 삼가 하념하여 주소서."

영조가 대답했다.

"지금 시,원임 대신들이 타협하였으니 거동을 그만두게 한다."

홍인한이 말했다.

"거동을 그만두게 하신다는 허락을 받고 신 등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신들은 천세를 부르고 차례로 물러나왔다. 세손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노론 강경파의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모함했던 방법이 다시 동원되었다. 이들은 세손이 몰래 민간에 돌아다니며 금주령 중에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리고, 김중득에게 시켜 한문과 한글로 세손을 모함하는 익명서를 써 존현각에 투서하기도 했다.

어차피 세손은 노론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노론에 비해 세손은 너무 약했다. 세손에게는 홍국영, 정민시 등 소수의 동궁 소속 관원들밖에 없었다. 이때 한 강직한 인물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편들고 나섬으로써 전기를 마련한다. 스물일곱의 젊은 행 부사직 서명선이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지난달 대신이 입시했을 때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동궁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함부로 진달했다고 합니다. 그 무엄하고 방자함이 매우 심합니다. 그리고 상참常參 때에 전 영상 한익모의 '좌우(신하)는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은 또 무슨 망말입니까? 수상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내시들이나 할 맹세의 말을 한 것이니 옛날의 대신 가운데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삼가 비옵건대 성상의 밝으신 지혜를 떨쳐 펴시어 빨리 대신의 죄를 바로잡아 국가의 대사가 존중되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영조는 원임대신들과 양사, 그리고 상소문의 장본인인 서명선을 부른 후, 서명선에게 상소문을 읽으라고 명했다. 서명선은 임금과 원임 대신들, 그리고 자신을 탄핵할지도 모를 양사 앞에서 상소문을 읽었다.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구절에 이르자 영조가 물었다.

"무슨 말인가?"

"신이 듣건대 성상께서 '누구는 무슨 당이고 어떤 사람은 무슨 관직에 맞는가를 마땅히 세손에게 알게 하여 조정의 일을 익숙히 알게 해야 한다'고 하교하셨는데, 홍인한이 대답하기를 '이런 일들은 동궁께서 알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것이 과연 말이나 되며 아랫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맞다. 내가 들을 때도 의아했었다."

영조는 서명선이 상소를 읽어 내려가자 꼬치꼬치 캐물었다. 한익모가 했다는 "좌우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은 신하들이 잘 보필하고 있으니 굳이 대리청정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는데, 이는 얼핏보면 정상적인 말 같지만 세손과 신하들을 일대일로 대칭시켰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은 말이었다. 서명선은 이 말도 강하게 비판했다. 읽기를 마친 서명선이 일어났다가 다시 엎드려 말했다.

"이 일은 관계된 바가 큰데 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거실(명문대가)의 미움을 받으며 솔선하여 진달하겠습니까? 신이 이러한 줄을 알면서도 눈치를 보고 진달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와 동궁을 저버리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죽어서 신의 아비를 뵐 수 있겠습니까?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서 진달한 것은 어리석은 충심이 터져 나온 것인데, 특별히 남은 생각을 다 진달하게 하시니 비록 물러가 골짜기에 빠져 죽더라도 여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서명선은 소리내어 눈물을 흘렸다. 영조가 말했다.

"우는 소리를 들으니 강개함이 마음속에 맺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상소문에 대한 영조의 물음에 모두 모호하게 대답했다. 답답해진 영조가 "옳은지 틀린지"양단간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으나 대신들은 계속 모호하게 말을 돌리며 시비여부를 판정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영조가 서명선의 상소를 들으며 몇 번이나 "옳다"를 반복했으므로 이 상소를 옳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끝내 모호한 말로 이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다. 이에 영조가 분노했다.

"서명선은 내가 안 지 오래인데 털끝만큼도 남을 해치는 마음이 없었다. 이번의 일도 나는 결단코 한결같은 혈충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여러 원임 대신들과 대사헌은 '모른다'며 흐지부지하려 하고 있다."

분노한 영조는 김상복과 판부사 이은, 김양택을 해임하고 대사헌은 삭직시켰다. 그리고 한익모와 홍인한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지우도록 했다. 한 부사직이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 한 장이 정국을 뒤바꾼 것이다. 영조는 동궁을 모해하려는 대신들의 행위를 한탄했다.

"아! 세도가 이러한데 83살의 임금이 어느 때에 강개한 직언을 듣겠는가?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하는 이 마음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내 마음을 아는 것은 오직 저 높고 높은 하늘 뿐이다."

영조의 이런 조처는 매우 시의적절했다. 영조는 이런 조처를 내린지 3개월 만인 재위 52년 3월 세상을 떠났는데, 만일 세손의 대리청정과 대신에 대한 문책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세상을 떠났으면 세손의 즉위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손은 영조가 적절한 시기에 대리청정과 순감군 수점을 지시하고 대신들을 문책했기 때문에 즉위할 수 있었다. 11살 때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소년이 25살의 장년이 되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가 바로 조선 후기의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사건

노론 대신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영조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정조가, 즉위 당일 그 사실을 부인하며 스스로를 사도세자의 아들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영조 40년 이후 장장 12년간을 가슴속에 묻어둔 한마디였다. 정조의 이 즉위 일성은 무덤 속의 사도세자를 다시 살려내는 말이자, 14년전의 비극적 사건이 잠복한 불씨에 지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 선언이기도 했다.

정조는 열흘 후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호를 '영우원', 그리고 사당은 '경모궁'으로 높이는 숭모사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자신을 축출하려 했거나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전격적인 숙청작업을 개시했다. 먼저 홍인한과 결탁해 자신을 내쫓으려던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양보내고 뒤이어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화완옹주는 이후 정치달의 부인이란 뜻의 ‘정처鄭妻’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어 즉위 다음달 정조는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며 자신을 제거하려 한 홍인한을 여산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대간에서 거듭 치죄를 청한 홍봉한의 경우는 혜경궁 홍씨가 단식까지 하면서 반대했기 때문에 처벌에 어려움이 있었다. 즉위년 8월 형조판서 이계성과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홍봉한의 처형을 주장했으니, 만일 혜경궁 홍씨의 이런 적극적인 항의가 없었다면 홍봉한은 거듭된 공세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궁궐에는 혜경궁 홍씨 이외도 단식을 하며 친정가의 치죄에 항의하는 여인이 또 한명 있었다. 바로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는 이미 영조 45년 세상을 떠났으나, 당시 오라비 김귀주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조보다 7살 위인 대비 김씨는 법적으로는 정조의 할머니였으나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정조는 별 부담 없이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가 위리안치시켰다.

또한 정조는 김상로와 결탁해 사도세자를 죽음에 모는 데 일조한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의 작호를 박탈해 사저로 내쫓고, 그의 오라비 문성국을 사형시켰으며 그 가족도 연좌시켜 어미를 제주도로 보내 여종으로 삼았다. 사저로 내쫓긴 숙의 문씨는 삼사의 거듭된 주청으로 결국 사약을 마시고 말았다.

이렇듯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노론 강경파와 외척들을 공격하자 노론도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경종때 목호룡이 고변했던 '3급수 사건'과 비슷한 방법으로 정조를 살해하려 했는데, 이를 3대 모역사건이라 한다. 정조 살해 계획에 앞장선 가문도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 중 한명인 홍계희 집안이었다. 홍계희는 정조가 즉위하기 전인 영조 47년(1771년)에 죽었지만, 정조 즉위 후 숙청을 당한 그의 아들들이 정조 암살의 길로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이자 홍계희의 아들 홍지해는 홍인한과 스승, 제자 사이이기도 했다.

그 첫번째 사건은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이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한 엄청난 것이었다. 조선 개국이래 대궐에 암살단을 난입시켜 국왕을 살해하려 한 사건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는 조선의 국가체제가 갈 데까지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왕 암살에 대한 명분도 없었다. 홍상범은 천민출신 장사 전홍문을 돈과 여자로 포섭해 행동책으로 삼은 후, 궁성 호위군관 강용휘를 포섭하고 그를 통해 20여명의 동조자를 규합했다. 이들은 정조 즉위년 7월, 칼과 철편을 들고 대궐 담을 넘어 정조가 머무는 경희궁 존현각 지붕까지 올라가 정조의 목숨을 노렸으나 한 호위무사에게 발각되어 도주했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다음달 경계가 강화된 대궐 담을 재차 넘다가 포군에게 체포되었다. 국왕 암살단이 대궐에까지 난입한 이 사건의 충격은 매우 컸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홍계희의 조카인 홍술해의 아내 효임이 주술을 이용해 정조와 홍국영을 살해하려 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홍술해는 이전에 무려 돈 4만 냥과 조 2천5백석, 소나무 260그루를 도둑질했다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것을 정조가 한 등급 감해 유배시킨 인물이었다. 효임은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과 함께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여 죽이려 했다가 검거되었다.

세번째 사건은 정조를 쫓아내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을 추대하려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홍계희의 8촌 홍계농과 홍상범의 4촌 홍상길이 주도하고 혜경궁 홍씨의 오빠인 홍낙임도 참여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결국 정조를 살해하려는 기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왕조국가 조선에서는 국왕에 대한 충성이란 기본 원칙은 간 곳 없이 당론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황이 됐다. 국왕은 조선의 국왕의 아니라 한 당파의 당인으로만 인정되었으며, 특히 노론은 자파의 국왕이 아닐 경우 국왕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정조와 노론은 이미 군신관계가 아니라 정적관계였다. 이런 정치 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정조의 미래, 아니 조선의 미래는 없었다. 정조는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이 사건을 겪은 정조는 당시의 정치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백주 대낮에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대궐에 난입해 국왕을 살해하려는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정조가 홍술해를 유배 보내며, "기강이 땅을 쓸어버린 듯 없어지고 백성들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다"고 말한 대로, 국가 기강과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는 새로운 세력을 육성해 이들 세력을 대체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조가 즉위년 9월에 '규장각'을 설립한 것은 이런 인식의 소산이었다. 설립 당시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을 표방했으나 이는 새 조직에 대한 노론의 의혹을 완화시키려는 수사였고, 실제로는 당론에 물들지 않은 문신들을 양성해 개혁정치 세력을 형성하려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규장각에 소속된 사람은 각신 6명과 각신을 보좌하는 잡직인 각감 2명, 검서관 4명 등 35명의 관리와 이속 7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05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홍문관의 84명보다도 많은 수였다. 이 중 검서관은 각신 못지않은 중요한 직책이었는데 정조는 여기에 서얼들을 등용했다. 능력 있는 서얼들을 등용함으로써 경직된 신분제에 경종을 울리고 보다 개방된 사회로 나아가려 한 것이다.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 기능과 각종 서적의 수집, 편찬 등을 기본임무로 하였으나, 그 외에도 관료들의 재교육과 원자의 강학도 담당했다. 심지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각신이 진휼사로 파견될 정도로 규장각은 정조 개혁정치의 상징적인 기구였다.

규장각이 이렇듯 왕권 강화와 개혁적 문신을 양성하기 위한 조직이었다면, 장용영은 왕권 강화와 개혁적 무신을 양성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정조는 재위 9년(1785년)장용위를 만들어 국왕을 호위하게 했는데, 이 조직을 재위 17년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시킨 것이 장용영이었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영은 서울이 중심이었고 외영은 수원 화성이 중심이었다. 장용외영의 중심이 수원 화성인 것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위패를 창의궁으로 옮겨 봉안한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낀 정조는 사도세자묘의 이장과 이와 연계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계획했다. 서울은 이미 80여년 이상을 집권한 노론의 수도였던 것이다.

재위 13년 정조는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 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곳은 백성들이 꽃산이라 부르던 수원 용복면의 '화산'이었다. 정조는 화산에 사는 백성들을 팔달산 아래의 현 수원으로 이주시키고 사도세자의 시신을 이장한 후, 그곳을 현륭원이라 불렀다. 바로 그 현륭원과 관계있는 군사가 장용외영이었다. 장용외영은 정조 22년 모두 2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사도세자와 현륭원, 그리고 장용영을 하나로 묶는 행사가 바로 정조의 능행이다. 정조는 틈만 나면 현륭원을 찾았다.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정조의 능행 때 어가를 따르는 인원이 6천여 명이 넘었고 동원된 말만도 1400여 필이나 되었으니,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던 전통시대의 백성들에게 국왕의 행차는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백성들은 정조의 능행 때면 구름같이 몰려나와 행차를 구경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임금의 행차 때 직접 징을 쳐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격쟁’이라고 하는데, 정조 19년 능행 때는 창원의 한 여인이 부사 이여절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 정준의 사연을 호소해 이여절을 유배 보내기도 했다.

정조는 이처럼 규장각과 장용영, 사도세자와 현륭원, 그리고 능행을 적절히 한 고리에 묶음으로써 노론 강경파를 무력시키려 했다.



새로운 정치세력을 찾아서

정조는 노론도 등용하긴 했으나, 노론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찾았다. 그들이 바로 남인이다. 사대부들만 놓고 보았을 때 조선 후기에 차별받은 지역은 영남이었다. 남인들의 근거지가 영남이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숙종 20년(1694년)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영남지역 전체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면서 출사길 자체를 봉쇄당했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영조와 노론은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 '평영남비'를 세워 영남전체를 반역향으로 규정했고, 그 이후로는 사실상 노론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었다.

노론 집권이 계속되는 한 남인의 조정 진출은 요원했다. 영남 남인은 비노론 국왕이 등장해야 자신들이 조정에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실망했던 영남 남인들은 그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환호했다. 그들의 기대대로 정조는 재위 12년에 체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80여년 만에 남인이 정승자리에 오른 것이다.

남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인들은 정조와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바로 사도세자였다.

채제공이 우의정이 된 그해 이진동을 대표로 하는 영남 유생들은 <무신창의록>과 상소문을 갖고 상경했다. <무신창의록>은 무신난, 즉 이인좌의 난 때 이인좌 군에 저항한 영남 사대부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었다. 이 책은 영남 사대부들 모두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지는 않았고 안동 등 13개 고을의 사대부들은 서로 편지와 격문을 주고받으며 이인좌 군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영조 4년(1728)에서 꼭 한 간지干支(60년)가 되는 정조 12년(1788)에 이 책자를 올려, 영남이 반역향이 아니란 판정을 받고 자신들을 신원하려 했다.

그러나 그 해 8월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승정원에서 봉입하기를 거부해 상소문과 책자를 올리지 못했다. 이들은 계속 기회를 보다가 그해 11월, 경희궁으로 거동하던 정조가 종로 상

인들을 만나는 틈을 타 이 책자와 상소문을 올렸다. 예조에서는 이를 받지 말도록 권했으나

정조는 오히려 밤을 세워 이 책자를 다 보았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무신창의록>간행과 대상자 포상을 명한 다음, 유생의 상소로는 이례적인 소두 이진동 등을 친히 접견해 돈유했다.

"당이 한 번 생긴 후 취미가 각기 달라져 근래에는 조정에서 영남을 거의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인재가 부족한 이때에 영남 사람들 중에도 반드시 등용할 만한 사람이 많을 터이니 함께 등용해 조정에 늘어서게 한다면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도에 부합할 것이다."

정조의 이런 돈유에 영남 남인들은 환호했으나 승지 이민채는 <무신창의록>을 반포할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무신창의록>에 노론 대신 김창집을 논박하다 죽은 조덕린과 황학재 등이 뒤섞여 기록되어 있는 것이 지극한 협잡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면서 조덕린과 황학재를 모두 사면시키고 이진동에게 교서를 내려주며 격려했다.

나아가 정조는 재위 16년 3월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실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영남 사대부들을 끌여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조치였다.

도산서원 별시는 오랜 세월 노론의 일당 전횡에 눌려왔던 영남 사대부들의 잔치였다. 이날 별시장에 입장한 유생은 7천 2백여명이 넘었고, 거둔 시험답안지만 3천 6백여 장이 넘었다. 구경꾼을 합쳐 1만여 명 이상이 운집해 인산인해를 이루어, 이때 "영남에 유생이 만 인"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정조는 직접 채점에 나서 강세백과 김희락을 합격시켰다. 이렇듯 도산서원 별시는 정조와 영남 남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행사였다.

또한 그 직후 발생한 '영남 만인소' 사건도 이 도산서원 별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 명이상이 연명한 상소문이라 하여 만인소라 불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별시 다음달인 정조 16년 4월 노론 유성한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 유성한은 정조가 "경연은 참석하지않고 유흥만 즐겨 女樂(여악사)들이 禁苑(비원)에까지 들어오고 광대가 대가大駕(임금의 어가)앞에 외람되이 접근했다"고 공격했다.

유성한은 이런 사건들이 별시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발생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도산서원 별시에 대한 노론측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성한의 상소는 명분이 약했다. 당시 국왕의 행차는 백성들의 잔치였다. 국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구경했으며 그 뒤를 광대들이 따르며 흥을 돋우었다. 조선국왕중에서도 특히 정조는 이런 행차를 즐겼고 이를 통해 백성과 일체가 되기를 원했다. 게다가 여악을 불러들인 것은 정조가 아니라 삼영의 장수들이었으며 그 장소도 금원이 아니라 궁중 건너편의 방마원이란 점에서 유성한의 상소는 사실 관계를 왜곡한 것이

었다.

유성한의 이 상소는, 경종의 능 앞을 지나며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윤구종 사건과 맞물려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이 유성한의 상소에 대한 영남 사대부들의 조직적 대응이 영남 만인소였다. 실제로 만 명이 넘는 1만 57명이 이 상소에 서명했다.

그러나 영남 만인소는 정조에게 전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관료가 아닌 유학의 상소는 성균관 장의로부터 찬동을 받는 '근실'이란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노론인 성균관 장의가 이 상소 내용에 놀라 근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남 남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현직 관료들의 상소인 진신소는 근실 과정이 필요 없다는 점을 이용해

전 교리 김한동에게 상소케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영남 만인소'는 정조의 손에 닿을 수 있었다.

노론에서 영남 만인소의 봉입 자체를 막으려 한 것은 그 내용이 노론의 아킬레스건인 사도세자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기 때문이었다.

"아! 신들은 하나의 의리(사도세자의 신원)를 마음속에 간직한 지 30여 년이 되었으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해 가슴을 치면서 죽고만 싶다가 감히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는 정성으로 대궐문에 부르짖으니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소서."

이어서 이들은 사도세자가 영명한 것을 우려한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노론)"들이 세자를 무함했다고 주장했다.

"무인년(영조 34) 이후 5년동안 그들은 각종 재주와 수단을 부려, 심지어 상소로 세자를 욕하는 자도 있었고 급서急書로 고자질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세자께서 수심에 차고 우울하면서 이를 이야깃거리로 삼아 안팎에서 선동하고 교묘하게 참언하고 소문을 퍼뜨려 끝내 차마 말할 수 없는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이들은 영조 말 세손을 제거하려 했던 일도 비판했다.

"세자께서 변을 당하신 후 이제 전하의 영명함을 걱정하여 이미 사용했던 기술로 병신년(홍인한이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한 영조 52년)에 다시 추악하게 뭉쳤으니, 동방사람들 중 누가 이 무리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영남을 돌보아주시고 예로 대우해주시니 영남인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선세자(사도세자)를 신원함이 제일의 의리이니 신들은 한 번 죽을 각오로 이를 진달합니다. 선세자에게 불충한 자(유성한)가 위로 경종에게까지 그 불충이 미친 것(윤구종)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니 이는 참으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빨리 노적의 율을 사용해 귀신과 사람들의 분을 풀어주시기를 빕니다."

이때는 정조가 어느 정도 왕권을 강화시킨 뒤였다. 정조는 즉위 직 후 사도세자 문제를 과격하게 거론한 이덕사와 조재한을 사형에 처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사도세자의 신원까지 나갈 수가 없었다. 이는 영조의 처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노론의 격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영남 만인소를 올린 소두 이우와 소하 유생들을 불렀다.

"너희들이 천 리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부른 것이니, 소두는 올라와 읽어보라."

이우가 상소문을 읽는 도중 정조는 감정을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목메임을 여러 차례 되풀이한 뒤에야 정조는 겨우 입을 열었다.

"만약 한 마디 말도 없다면 너희들이 억울해할 뿐 만 아니라 영남 몇만 명의 인사들이 장차 그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졉견하는 것이다."

정조에게 사도세자 사건은 진퇴양난의 협곡이었다. 그 비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정조 자신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부인 영조, 생모인 홍씨, 외조부인 홍봉한, 고모인 화원옹주, 이들이 없었다면 정조의 존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조는 유생들에게 김상로와 문녀(숙의 문씨), 홍인한과 홍계희 등을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해 치죄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영남 남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설명이 아니라 노론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이는 당시의 정치 구조상 불가능했다. 정조의 왕권이 노론을 제거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영남 사대부가 1만여 명이지만 벼슬아치라고는 기껏해야 정5품 교리 한 두명 정도였으니 정조의 왕권과 합친다 해도 노론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정조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위로의 말이었다.

"영남은 바로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서 위급할 때에 믿는 곳이니, 내가 영남에 바라는 것은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의 본뜻이 이와 같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본뜻을 가지고 돌아가 영남 인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옳겠다."

정조의 이 말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는 뜻이었다. 대신 정조는 음직 제수 대상자가 아닌 소두 이우를 의릉 참봉으로 삼았다. 참봉은 종 9품 말단직이지만 의릉은 경종이 묻힌 곳이므로 대단한 상징성이 있었다. 당시는 노론 윤구종이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사건이 벌어진 직후였으므로, 이는 직급을 떠나 영남 만인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영남 사대부들은 열흘 후 1차 상소보다 311명이 더 많은 1만 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신들이 한 도가 같은 소리로 1만 명이 서로 호응하여 친릿길을 발을 싸맨 채 생사를 무릅쓰고 달려온 것은 반드시 30년 동안 맺혀온 선세자의 무함을 분별하고자 한 것입니다. 흉적을 주토하는 일은 분별한 다음에 할 일입니다. 선세자의 영혼이 신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전하 앞에서 일제히 호소하게 하였습니다."

정조는 "만여 유학자의 의론은 곧 국가의 공론이다."라는 비답을 내렸을 뿐 재조사를 명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영남 사대부들은 2차 상소 때보다 687명이 더 많은 1만 1,055명의 연명상소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정조가 귀향을 종용하자 영남 유생들도 임금의 교서를 갖고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영남 만인소는 직접적으로 정국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노론은 영남 만인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정조와 영남 남인이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매개체가 사도세자였으니 이는 상황에 따라 정국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영남 만인소는 사도세자 사건을 공론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 정조는 2품 이상 신하들을 불러 영조가 남긴 <금등비서>가운데 두 구절을 베껴 보여주었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

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절절한 심정이 표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절절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를 가슴 속에 고스란히 간직한 채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렀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신진관료를 키워냈고 수원 화성을 건설했으며 장용영을 기르고 영남 남인들과 사도세자를 매개로 결합했다.

노론이 볼 때는 어느 하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조는 남인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정조가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뜻을 밝힌 것은 재위 24년(1800) 5월 30일의 연석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시대 상황에 따라 의리가 달라지는 것과 인물을 등용하는 문제에 대해 말했는데, 바로 이 말 속에 남인을 정승으로 등용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판부사 채제공, 봉조하 김종수, 우의정 윤시동을 거론하며, 이들을 등용하고 내보낸 주기가 모두 8년이었음을 밝혔다. 8년의 시련기를 주어 당사자들로 하여금 신망을 기르게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등용하고 물리치는 기준이 없었던 선왕들과 달리 자신은 이런 기준을 두고 재상을 등용했음을 밝혔다.

이 기준에 따르면 다음 번 재상 후보는 남인 이가환이나 정약용이었다. 그러나 남인들의 이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 연석이 있는 불과 20여 일 후에 정조가 급서하기 때문이다.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회연교라고 불리는 정조의 이 발언은 의리의 개념과 인재 등용의 원칙을 밝혔다는 점에서 조목을 받았다. 그 5일 후인 11일에는 훗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실학 4대가로 불리는 이서구가 상소를 올려 연석 발언을 칭송하기도 했다. 혼납 오한원은 이를 조보로 반포하자고까지 건의했는데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인 초열흘 전부터 정조가 종기가 나서 붙이는 약을 사용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 등을 편전으로 불러 진찰을 받았다. 정조가 무슨 약을 붙이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지방 의관 정윤교는 여지고가 고름을 빨아내는데 가장 좋다고 대답했다. 이에 다시 정조가 상처를 침으로 찢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정윤교는 이미 고름이 터졌으므로 다시 침을 쓸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조는 종기와는 다른 증상을 이야기했다.

"두통이 많이 있을 때는 등 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조는 가슴에 화기가 있었다. 대리청정하던 생부를 뒤주속에서 죽게 만든 정당과 정사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으니 어찌 홧병이 없으랴.

반년 전인 1월 17일, 수원 화산의 현륭원에 행차해 두루 돌아보던 정조는 엎드려 땅을 치며 목메어 흐느꼈다. 대신과 각신(규장각 관료)이 재실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정조는 말했다.

"금년의 경사를 당하여 선대를 추모하는 중에 크나큰 아픔이 북받쳐 올라 그러는데 어찌 나더러 진정하란 말인가."

금년의 경사란 세자가 가례를 올린 일을 말한다.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가 부축하겠다고 청하자 정조는 "혼자 일어서겠다"며 일어나 겨우 한두 발자국을 걷고는 또 울며 엎드려 흐느꼈는데,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이처럼 정조에게 사도세자는 씻을 수 없는 한이며 홧병의 근원이었다.

정조는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체직했다. 종기가 머리뿐만 아니라 등 쪽으로도 퍼졌으며 열기까지 올라와 후끈후끈했다. 이때 정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처방과 약조제를 직접 관장했다.

이사수가 소요산이나 백호탕이 지나치게 찬 약이라고 염려하자 정조는 "이것이 맞는 약이므로 어쩔 수 없이 쓴다"고 대답했다. 정조는 소요산에다 황금과 황련등을 추가해 사용할 정도로 어느 어의 못지않은 해박한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의 열 증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홧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한데도 그것을 풀어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자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심상한 말이 아니었다. 이는 곧 대숙청과 정계개편을 뜻사는 말이었다.

"오늘날처럼 살피고 엿보기를 잘하는 습속을로 혹시 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안다면 또한 어찌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는 길이 없겠는가. 숨어 있는 음침한 장소와 악인들과 교제를 갖는 작태를 내가 어찌 모를 것인가. 만일 내가 입을 열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이나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 기울이고 있어도 하나도 자수하는 자가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이른바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도 한 군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비밀히 내통하는데 이것이 사대부들이 할 짓인가. 내가 그들을 사대부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 방치하고 있으나 내가 한 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결판이 날 판인데 그들은 오히려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이사수가 "과격한 어조는 몸에 해롭다"며 만류했으나 정조의 어조는 한층 격해진다.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 이런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들이 종기처럼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으나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앞서 남인 중용을 시사한 연석 발언과 대숙청을 예고한 이 말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 남인 등용과 대숙청! 집권당인 노론에게 이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훈방 처방

그로부터 이틀 후인 6월 16일 약원에서는 사순청량음 두 첩과 금련차, 그리고 우황고를 올렸다. 그러나 진찰을 받으라는 내약원의 두 번에 걸친 주청을 거부할 정도로 정조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같은 날 정조는 서용보를 체직한 지 이틀만에 이병정을 내의원 제조로 삼고 그 다음날에는 가감소요산 세첩과 금련차 한 첩을 달여 오라고 명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18일 약원의 진찰을 거부하고, 그 다음날에도 직숙하겠다는 약원 제신들의 청을 거절할 정도로 상태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 6월 20일에는 가감소요산을 중지하고유분탁리산 한 첩과 삼인전라고 및 메밀밥을 지어 오라고 명했다. 메밀밥은 종기에 붙여 고름을 빼는 데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정조는 약원의 제신과 대신, 각신들을 불러 고통을 호소했다.

"종기가 높이 부어 올라 당기고 아파 고통스러우며 한열도 있어서 정신이 흐려져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의 강명길 등은 진찰한 후 "맥의 도수는 일정하여 기운이 부족한 징후는 없고 보편적으로 빠르고 센 것 같으나 특별한 종기의 열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정조는 "대체로 한열이 일어날 때 가슴의 기운이 올라와 식히기 때문에 열은 조금 줄어든 것 같다"고 처방했다. 즉 종기의 차가운 한열을 가슴 속의 화기가 식히기 때문에 열이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종기르 대신들은 물론 의관들에게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내의원 도제조 이사수의 건의가 이를 말해준다.

"종기의 부위를 진찰해본 뒤에야 붙일 처방을 의논할 수 있는데 의관들이 다 진찰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들에게 자주 진찰하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상의 병환이 이러한데도 신들이 아직 종기가 난 부위를 진찰해보지 못했으니 더욱 초조하고 답답합니다."

정조는 왜 자신의 종기 부위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이는 내의원 제조를 자주 교체한 것과 관련이 있다. 정조는 그만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기 부위를 보자는 이시수의 건의에 정조는 저녁 무렵 조금 쉰 후에 보여주겠다고 대답했으나, 다음날인 6월 22일에야 의원의 진찰을 허용했다. 정조는 이때 어의 피재길에게 지방 의관 김한주, 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하라고 명했다. 어의는 매수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인 23일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고름이 나오는 곳 이외에 왼쪽과 오른쪽이 당기고 뻣뻣하며 등골뼈 아래쪽에서부터 목 뒤 머리가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 올랐는데 그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만큼이나 크다."

이날 노론 벽파 이시수는 어의 강명길의 말을 인용해 경옥고를 쓰자고 주청했다. 이시수는 인삼이 들어가긴 했으나 온제와는 달라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정조는 처음 열 증세의 원인이 5푼의 인삼이 들어 있는 육화탕에 있는 것 같다며 거부했다. 6월 24일 이시수가 밤 사이의 열 증세에 대해 묻자 정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젯밤 같은 무더위 속에 어찌 잠이 오겠는가마는 그제 밤에 비해서는 나은 것 같다. 일어나 앉아보고 싶어 경들을 불러 접견했지만 이또한 힘이 든다."

이날 정조는 서정수가 사용해 효과를 본 이른바 민간요법인 연훈방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훈방 요법은 정조 사후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연훈방을 건의한 심인이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란 점에서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성전고와 연훈방을 사용한 6월 25일 정조의 증세는 한결 좋아졌다. 연훈방을 사용한 후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속적삼과 요자리에 번질 정도로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정조는 몇 되가 넘을 정도의 피고름이 나왔다고 말했다.

약원 제신들이 지켜본 후 "반갑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며 기뻐하였고, 정조가 새벽 연석에 들어오지 않은 각신들에게 고름에 젖은 이부자리를 살펴보게 하자 이들 역시 서로 돌아보고 기뻐했다.

"피고름이 다 나왔으니 근이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사스럽고 다행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조는 심혈을 기울여 키운 규장각 신하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 "피고름이 많이 나온 뒤라 뱃속이 필시 허약할 것인데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 무엇을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 이상한 일"이라면서 의문을 표시했다. 이 역시 가슴의 화기때문이라고 자가 진단했다. 6월 26일 이시수가 다시 경옥고를 권유하자 정조는 한 번 먹어보겠다고 답했다가 곧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의논하자고 물러섰다. 그런데도 이시수가 계속 권하자 정조는 이렇게 답변한다.

"경들이 나의 체질을 몰라서 그러는데 나는 원래 온제를 복용하지 못하는데 음산하고 궂은 날에는 그와 같은 약들을 더윽 먹지 못하니 그 해로움이 반드시 일어난다. 여러 해 궁중에 출입한 각신들은 나의 체질을 알 것이다. 체질과 사리를 따져볼 대 오늘은 결코 복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날 연훈방을 다시 사용한 정조는 이시수와 여러 의관들이 종기 부위가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자 드디어 경옥고를 들었다. 그러나 경옥고를 든 후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6월 27일, 정조는 이렇듯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정사를 걱정하였다. 그만큼 정조는 강인한 자기 제어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도목정사(매년 두 차례 관리들의 고과평점을 심사하는 것)를 치를 때가 되었는데 이조판서의 사정이 딱하게 되었구나. 혹시 백성들의 일에 관한 사항이 있으면 비록 이런 상황이라도 자주 여쭈어 조치하도록 하라."

이날 정조는 계속 정신없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8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정조는 지방 의관 김기순 등이 대령했다는 말에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불러들여라"라고 냉소적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창경궁 영춘헌에 거동해 새로 임명한 좌부승지 김조순등을 접견하였다.그러나 이때 이미 정조는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이런 정조의 병세 진행 상황을 볼 때 정조 독살설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노론 강경파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한 경옥고와 정조가 세상을 떠나는 28일 동안 등장한 한 여인, 바로 정순왕후 김씨이다.

"이번 병세는 선왕의 병술년(영조 42)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성향정기산을 드시고 효과를 보셨으니 의관에게 논의해 올리게 하시오."

이때 혜경궁 홍씨도 등장하였다.

"동궁(순조)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시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 말에 심환지 등이 문 밖으로 물러났다. 혜경궁이 돌아간 후 부제조 조윤대가 들여 온 성향정기산을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떠 올렸으나 넘기기도 하고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인삼차와 청심혼을 올렸으나 마시지 못하자 제신이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비상 사태에 대비해 궁성을 호위하는 가운데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다시 등장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인삼차에 청심환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없으니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하자. 김씨가 의외의 명을 내렸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담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잠시 후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론 벽파 심환지가 같은 당파 이시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왕대비 전하와 자궁저하(정조비 효의왕후 김씨)뿐입니다.

동궁저하께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두분께 있는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여기에서 말하는 "지극히 엄중한 국가의 예법"이란,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말한다.

즉 이순간 정순왕후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정조실록>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을 상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고 두루뭉실하게 기록한 것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였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의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병세가 심각하다 해서 목놓아 통곡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영조 35년(1759) 15세의 나이로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린 김씨는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정조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즉위하자마자 김씨의 동생 김귀주를 유배 보냈는데, 그는 10년 후 귀양지 나주에서 병사하였다. 혜경궁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급전직하 몰락의 길을 걸었으니 정조에게 원한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는 법적으로 따지면 모자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였다. 또한 정조 24년인 이 해 세자(순조)의 나이 열한 살로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의 집안이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정순왕후의 친정이 다시 살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정순왕후가 김씨는 계획대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이는 몰락했던 친정의 부활로 나타났다. 정조 때 귀양갔다가 사망한 김귀주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살아 있는 그 일족은 다시 기용되었다. 그리고 다시 노론의 세상이 되었다.

정순왕후의 세상

정조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는 삼각산도 울었다. 뿐만 아니라 그 며칠 전에는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기도 했다. 이를 본 노인들이 슬퍼하며 "이는 상복을 입는 벼"라고 말했는데 그 얼마 후 대상이 났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 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졌다.

먼저 사상적으로 유일 사상 체계가 강화되었다. 당시 성리학에 도전한 사상은 천주교였다.

정조 15년(1791)경 천주교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정파가 분열되는데 남인과 일부 노론 시파는 이를 받아들여 신서파를 형성했고, 집권당인 노론 강경파 대부분은 이를 공격하는 공서파를 형성했다. 정조는 노론 강경파를 의식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윤지층과 권상연 등을 사형시켰지만 대체적으로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극단적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노론 강경파와 함께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킨다. 명목은 사학인 천주교를 금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신서파인 남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는 정권을 장악한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안동 김씨 일당전제를 여는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다. 노론 일당전제라는 폐쇄적 사회에서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오히려 한 가문이 정권을 잡는 일족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농업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었다. 즉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의해, 사대부라는 소수 지배층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전근대적 사회 체제의 개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런 변화를 적절히 수용하려 한 군주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과 함께 전개된 세도정치는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수구정치 체제였다. 당시 조선뿐 아니라 전세계적 추세였던 개혁과 개방을 외면하고 오히려 보수와 폐쇄로 전환한 세도정치는, 역사의 반동이자 후퇴였으며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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