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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누가 왕을 죽였는가(최종)- 제 26대 고종

by 싯딤 2008. 10. 21.

8장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

제26대 고종 1852-1919년, 재위 1863-1907년

<순종실록> 12년 1월20일

종척宗戚과 귀족 등을 불러들여 만났다. 태왕 전하의(고종) 병세가 깊기 때문에 병문안 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자작子爵 이기용과 이완용에게 별도로 들어와 숙직하도록 명하였다.

<순종실록> 12년 1월20일

태왕 전하의 병이 깊어 동경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볼 알렸다.

<순종실록> 12년 1월21일

묘시卯時에 태왕전하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다음날 죽은 사람의 혼령을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해외 망명계획과 식혜

서기 1863년 12월,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창덕궁에서 사망했다. 철종은 14년간 재위에 있었지만 강화도령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재위기간 동안 사실상의 임금은 그가 아니라 '도령'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외척 안동 김씨였다. 그런데 철종이 서른셋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뒷자리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대체적인 예상은 당시 세도를 잡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강화도령같은 한미한 종친을 내세워 후사로 삼으리라는 것이었으나, 안동 김씨는 철종의 급서를 예상하지 못한 듯 준비된 정치일정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왕실의 웃어른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빈 신정왕후 조씨였다. 조씨는 중희당에 중신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나 같은 미망인이 이런 망극한 일을 당하니 원통하지만 이제 국세의 안위를 살펴볼 때 시각이 급하니 여러 대신들은 종사의 대계를 빨리 의정하라."

‘종사의 대계’란 후임 임금을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종사의 대계를 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도정치라지만 신하의 입으로 누가 임금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가는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신정왕후 조씨만이 거론할 수 있었다. 안동 김씨는 미리 후사를 정해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원로인 영중추부사 정원용이 "자성(신정왕후)이 교지를 내리셔서 책봉하시기 바랍니다“고 입을 열었다. 조대비로서는 바라고 바라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안동 김씨를 누르고 친정 풍양 조씨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흥선군의 아들 명복

"그렇다면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케 하라."

이 전교는 조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이 결탁한 결과였다. ‘흥선군의 아들 명복’이란 말에 안동 김씨는 놀랐으나 안된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드디어 흥선군이 조선 역사상 처음 살아있는 임금의 생부로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나 인조의 아버지 능양대원군, 그리고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처럼 사후에 추존된 예는 있었으나, 생전에 아들이 임금이 되어 대원군이 된 예는 없었다.

독일인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잘 알려진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후사였으나, 이는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고 실제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5세손 병원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혈통으로 따지면 고종은 도저히 즉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즉위 당시 고종은 12살이었으므로 대왕대비 조씨나 생부 대원군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대왕대비 조씨가 섭정을 양보함으로써 드디어 안동 김씨에게 '궁도령'이라고 무시당하던 몰락 왕족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 앞에 놓인 과제는 간단치가 않았다. 대내적으로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나라 구석구석에 끼친 폐해를 타파하고 정상적인 왕조 통치체제를 회복해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밀려오는 서양과 일본 세력에 맞서 국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한마디로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했는데 여기에서 왕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주역인 안동 김씨를 제거하고 그간 왕권을 견제해오던 비변사를 축소, 폐지했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또한 백성들의 원성의 표적이었던 서원을 철폐해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은 고종 3년(1866년)프랑스 선교사 처형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에 침략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고, 고종 8년(1871년)에는 제너럴 셔먼호 소각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침략한 미국함대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대내외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강화'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당시 조선 왕조가 처한 상황은 왕권강화라는 한가지 목표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원납전을 주조하는 등 수많은 무리수를 두어 백성들의 지지를 원성으로 돌렸으며, 서원 철폐와 호포제 실시로 양반 사대부들의 불만을 유발시켰다. 그런데 무엇보다 대원군의 가장 큰 실수는 민씨를 며느리로 뽑은 것이었다.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해 부인 민씨의 친정에서 며느리를 뽑았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왕비가 된 명성왕후 민씨는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인 면암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10년 치세를 실정의 연속이라고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해 대원군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 상소를 놓고 대원군과 최익현이 맞붙었을 때, 고종은 훗날 여러번 반복해 보여지는 전형적인 방관과 기습의 태도를 취했다. 10년 동안 대원군의 정치에 수수방관 끌려가기만 했던 고종은, 일단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자 대원군을 버리고 그를 지지하면서 호조참판에 제수했다. 고종은 대원군측이 격렬히 반발하는 와중에 최익현이 대원군의 국정 간여 금지를 주장하는 2차 상소를 올리자, 할 수 없이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내긴 했으나, 이는 최익현이 백성들로부터 '최충신'이란 찬양을 받아가며 귀양길에 올랐다는 일화가 보여주듯 대원군측의 공격으로부터 최익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충청도 덕산의 남연군 묘소에 성묘한 후 양주군 직곡산장으로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재위 10년(1873년) 11월, 드디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고종과 일본의 악연

고종이 아버지 대원군과 최익현의 대결에서 최익현의 손을 들어준 것은, 유리하다는 판단이 설 때만 심증을 나타내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종이 보통 아버지 대원군의 도포자락과 명성왕후의 치맛자락에 싸여 있다가 나라를 빼앗긴 용렬한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렇게 용렬한 군주는 아니었다. 고종을 직접 만났던 거의 모든 외국인은 그를 대단히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정치력을 지닌 군주로 회상했다. 그러나 대원군 축출 장면에서 보여지듯이 고종의 정치력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 조성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수동적인 정치력이란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가 치세할 때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않은 것처럼, 부인의 친정이 치세할 때도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려오던 조선 후기의 혼란기에 이러한 고종의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수동적인 고종의 정치태도는 대외 관계에서 보다 심각한 위기를 드러낸다. 고종 12년

(1875년) 9월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양호의 강화도 침입사건은, 앞으로 밀려올 외세에 대한 그의 외교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 대원군이라면 이 도발 행위에 대해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때처럼 군사적으로 맞섰을 것이다. 이때 일본은 미국의 군사위협에 굴복해 개국한 지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한론征韓論이 기승을 부리기는 했으나 국력을 기울여 조선 침략에 나설 상황은 아니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개국에 뜻을 두었더라도, 일단 운양호를 격퇴한 후 대등한 위치에서 주체적으로 개국을 단행해야 했다. 그러나 고종은 군사적 대응보다는 부산 등 3개 항구의 개방과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불평등조약인 강화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순응의 길을 택했다. 한번 열린 불평등조약의 문은 닫을 수가 없어서, 이후 미국과는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청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으며, 영국및 독일, 그리고 러시아와도 예외없이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다.

고종은 이를 소중화 사상에 입각한 이이제이以夷制以 정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이제이는 오랑캐를 제압할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정책이다. 이들 대부분이 조선을 하나의 침략대상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이이제이는 패자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순간이 오리라 믿으면서 기다렸다.

국내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개화파인 민씨 세력이 주도한 잇따른 불평등조약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고종 19년(1882년)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특별대우에 분노한 구식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를 타살했으며,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감사 김보현 등 민씨 일파를 살해하고 나아가 민비까지 찾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민비는 이미 궐 밖으로 도망친 뒤였다.

군사 위협에 놀란 고종이 구식군인들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은, 두 세력이 다툴 때 대세에 따르던 그의 정치방식을 잘 보여준다. 일단 대세에 따르다가 기회를 엿보아 반격하는 것이 고종의 정치 방식이었다.

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10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나, 재집권은 그리 길지 못했다. 청이 세 척의 군함과 4천여 명의 군사를 몰고 와 대원군을 청의 천진으로 납치해 갔기 때문이다. 이때도 고종은 대원군의 납치를 반대하지 않았으며, 다시 나타난 민비가 친청 정권을 수립하는 데도 반대하지 않았다.

친청 사대파로 변신한 민씨 일파가 조정을 장악하자, 일본은 친일정권을 수립하고자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를 이용해 임오군란 2년 후인 고종 21년(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하였다. 갑신정변이 성공하자 또다시 대세에 순응한 고종은 개화파에 동조해 거주지를 창덕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개화파가 패배하자 이번에는 개화파를 역적으로 몰았다. 140여 명에 불과한 일본군을 믿고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파의 무모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고, 일본도 서울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정변으로 조선과 1885년 한성조약을 맺어 불탄 공사관 건축비와 배상금 지불을 약속받았으며, 청과는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청,일 양군의 조선 철수와 향후 조선 파병시 서로 통고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천진조약으로, 일본은 유사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고종 31년(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접주 전봉준의 지도로 시작된 동학혁명은, 천진조약에 의거해 일본군과 청군의 충돌을 부른 계기가 되었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종이 청에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충돌하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을 구성했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끌여들였던 고종은, 이 때문에 오히려 정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어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대만,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런데 요동반도의 할양은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를 자극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3국간섭을 초래했다.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하라는 이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가 일본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결탁해 친일파 박영효를 몰아내고 이범진 등이 주도하는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청나라를 이용해 대원군을 몰아냈던 고종이,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여들여 다시 대원군을 쫓아낸 셈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그 열매를 러시아에게 빼앗긴 일본은 이노우에 공사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우 공사에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도록 했다. 1895년 10월 미우라 공사는 일본 보병 18대대 병력으로 대궐을 점령하여 명성왕후를 참살한 후, 그 시신을 영사관 경부 오기하라 슈지로로 하여금 소나무 숲속에 옮겨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이로써 조정은 다시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장악하게 되었다. 고종은 명성왕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알고 야만적인 처사에 분개하였으나, 모든 실권을 일본과 친일내각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일국의 왕후를 참살한 일본이 자신을 참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판단한 고종은 은인자중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을미사변 발생 약 4개월 후인 고종 33년(1896년) 2월, 고종은 일본군이 의병 진압을 위해 지방에 내려간 틈을 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독립국의 군주가 외국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은 민족적 수치였지만, 일본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고종은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거는 결단력은 부족했지만,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허를 찌르는 데는 능숙했다.

이후 일본과 고종의 관계는 대부분 이런 형태로 전개된다. 일본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고종을 압박하면 고종은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가 기회를 보아 의외의 반격을 시도하였다.

아관파천을 단행한 지 1년 만인 1897년, 지금의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 해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이때 반포한 대한국제에서 고종은 황제가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함은 물론 황제의 통치권이 무한하다고 규정지었다. 이는 입헌군주제를 추구한 독립협회의 구상과는 달랐지만 고종 자신은 이를 당연시했다.

한편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지 않으면 한반도 병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1904년 2월 선전포고 없이 인천과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급습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일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고종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여 전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다른 곳도 아닌 인천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전쟁에서 대한제국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일본은 전쟁 직전 한국에 군대를 보내 서울과 전국의 군사요지를 점령하고, 필요한 경우 일본이 한국 영토를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사실상 한국병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1905년 9월 포츠머스강화조약 체결 한 달 전에 일본은 자국이 추천하는 고문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1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했었다. 이로써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재정과 외교에만 고문을 채용하기로 한 협약과 달리 궁내부, 군부, 내부, 학부에까지 일본인 고문들이 들어옴으로써 대한제국의 자주권은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또한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 한 달 전에 이미 미국과 이른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았고, 다음달에는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맺어 고립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도 고종은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고종은 40여년 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처럼 이를 이이제이 정책의 일환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고종은 일본이 많은 것을 빼앗아 갈 때 투쟁으로 저지하기보다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했으며, 목숨을 걸고 자신을 위해 싸워 줄 백성들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력에 의존하고자 했다.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1905년 10월 말 일본 각의閣議는 한국을 이른바 보호국화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한국에 파견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이다. 그해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 경운궁으로 고종을 방문해 한국을 보호국화 하겠다는 소위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고종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취해온 여러 조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대답은 적반하장이었다.

"폐하께 한마디 묻고 싶은데 한국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으며, 한국

의 독립은 누가 준 것입니까. 폐하께서 이를 아시면서도 불만을 말할 수 있습니까?"

이토 히로부미의 말은 서구 열강이 먹으려던 한국이란 음식을 일본이 대신 먹어주니 고마워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계속 고종을 위협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확고한 방침으로서 결코 움직일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승낙하시든 거부하시든 자유이지만, 만약 거부하실 경우 일본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 있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짐작컨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경우에 이를 것이며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는 완전한 협박이었다. 고종은 재위 4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고종은 독립국을 유지하고 싶은 자신의 희망을 일본 황실과 정부에 전해주기 바란다고 간청했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반응은 싸늘했다.

고종은 대신들과 회의를 해 결정하겠다고 일단 결정을 미루었다. 당시 일본 공사였던 하야시가 이 회의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은 회의에 참석할 한국 대신들의 회유와 일본군 대장을 통한 군사 위협, 그리고 옥쇄를 미리 확보하는 것 등의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런 준비 끝에 열린 회의에 대한 하야시의 회상기를 보자.

"나는 미리 이러한 회의 중에도 국왕이 궁궐 깊은 곳에서 어떠한 기도를 꾸미고 있는지 시시각각 알 필요가 있어 꼼꼼하게 밀사를 배치해두었는데 그 밀사가 저녁 어스름 무렵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내왔다.

'지금 임금께서 궁 대신을 이토 공의 숙소로 보내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 목적은 지금 대궐에서 협의하고 있는 문제를 2,3일간 연기해줄 수 있는가 하는 국왕의 희망을 이토 공公에게 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일제의 간자인 '그 밀사'가 바로 고종 독살설과 관련 있는 문제의 핵심 인물이다. 그로부터 7년 전인 고종 34년(1897년)에 일어난 순종의 '독차사건'도 이런 일제의 간자들이 짓이었다. 당시 고종과 황태자가 즐겨 마시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은 독차 사건은, 친러파가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친일파가 개입했을 개연성도 농후하다. 하나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궁 내의 간자가 개입한 것은 분명하다. 이때 커피 맛에 익숙한 고종은 곧 뱉어냈으나 다량을 마신 세자(순종)는 그 탓인지 이후 지적 장애를 일으켜 판단 능력을 잃게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보병 1개 대대,포병중대, 기병연대가 대궐 앞과 종로에서 군사 시위를 벌이고 일본 병사가 서울 시가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협하고 있는 동안, 대궐 안에서는 이른바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이 고종의 서명 날인없이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찬성만으로 강제 조인되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한다는 내용의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대표하는 최초의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게 되었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정상적인 독립국가일 수는 없으므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이때 망한 것이었다. 전 참정 민영환과 전 특진관 조병세 등이 음독자살하고 전 참판 민종식과 최익현 등이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도 을사조약을 사실상의 망국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을사조약부터 고종과 일본의 싸움은 본격화된다. 고종은 결코 을사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조약을 폐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무력보다는 외국, 특히 미국의 중재에 의해 해결하려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종은 친한적인 교육가인 미국인 헐버트에게 친서를 주어 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헐버트는 루스벨트대통령과의 회견을 거부당하고 어렵사리 만난 루트 국무장관에게도 냉담한 반응만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약 3개월 전인 1905년 7월 31일 루스벨트는 국무장관과 태프트에게 "귀하가 가쓰라에게 말한 것은 모두 옳다. 귀하의 말이 곧 나의 말이라는 것을 지체없이 가쓰라에게 전하라"는 훈령을 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바 있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고종은 주불 공사 민영찬을 다시 미국으로 파견했으나 그 역시 루트 국무장관에게 냉담한 반응만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고종은 좌절하지 않고 비밀리에 런던 <트리뷴>지 기자인 스토리에게 옥쇄가 찍힌 국서를 주어 영국에 전하게 했다. 고종은 이 국서에서 황제인 자신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주권의 일부도 일본에 양도하지 않았음을 역설하고, 이후 세계 열강이 5년동안 한국을 공동으로 보호하기 바란다고 했다. 이 국서는 1906년 12월 6일자 <트리뷴>지에 게재되었고, 1907년 1월 16에는 영국인 베젤과 양기탁이 함께 운영하던 한국의 <대한매일신보>에도 게재되었으며, 중국 주재 영국 총영사 지부에게 전달되었다. 몇 년 전 같았으면 각 열강은 "5년 동안 한국을 보호하기 바란다"는 이 매력적인 제안에 다투어 달려들었겠지만 이미 각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 터였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고종은 1907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 그리고전 주러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6월-7월,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파견했다. 고종은 이들에게 위임장을 주며 을사조약의 불법, 무효성을 역설했다. 러시아는 이미 지난해 주한 러시아의 넬리도프를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어느 열강 대표도 이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미 지난해 주한 러시아 총영사에 대한 인가장을 고종이 아닌 일본의 메이지 천황에게 받음으로써 을사조약을 인정한 상태였다.

헤이그에 고종의 밀사가 나타나자 일본은 한순간 당황했으나 곧 이 사건을 이용해 고종을 몰아내기로 방침을 정했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는 정보를 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해 7월 3일 하야시 외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국면 전환의 행동을 할 호기라고 믿는다. 즉, 병권, 재판권을 우리 수중에 넣을 호기라고 생각된다."

이토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고종의 퇴위를 합의했다. 이완용은 7월 16, 17일 두 차례에 걸쳐 양위를 주청했지만 고종은 격노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고종에게 아무런 힘도 없었다. 고종은 결국 그 달 19일 새벽 3시에 "지금까지 선양禪讓의 예에 따라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발표하는 데까지 양보했다.

이 조칙의 속뜻은 황태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동안 '대리'하게한다는 데 있었다. 즉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회를 보아 다시 복위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뜻은 '대리'가아니라 '선위禪位'에 있었기 때문에 조칙을 거부했다.

이토와 이완용은 다음날 아침 고종이 거부하는 데도 경운궁 중화전에서 황제 양위식을 강행했다. 양위하는 고종과 양위받는 은垠(순종)모두 참석하지 않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양위식이었다. 그 후 일본은 순종과 황태자인 영친왕 은을 덕수궁(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주시킴으로써 고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다.

독차 사건 이후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잃은 순종이 즉위했으니 이제 모든 것은 일본의 뜻대로였다. 고종을 무력화시킨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점령하기로 하고 그 해 8월 1일 6000여명에 달하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고종의 양위에 반대하는 유생과 농민들, 그리고 해산된 군대의 일부가 가담한 정미의병(1907년)이 일어났으나 우수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2년 후인 1909년 9월부터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 와타나베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의병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두 달 동안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 토벌작전으로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살육, 방화 등의 방법으로 위병장 심남일을 포함한 2000여 명 이상의 의병이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 이로써 전라도 의병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본이 이 토벌 작전을 전개한 이유는 저항할 수 있는 무력을 미리 제거해 한국을 완전히 병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 다음해인 1910년 8월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하기 위해서 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함이 가장 좋은 길임을 확신"한다는 내용의 소위 한일합방조약이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고종은 물론 순종도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일본에겐 이미 이들의 동의가 필요 없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다시 조선으로 회귀시키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데라우치 통감을 조선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한국의 모든 권력은 고종이나 순종의 것이 아니라 총독의 것이었고 그가 사실상 한국의 국왕이었다.

그러나 이완용 같은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한국 민중 그 누구도 데라우치 총독을 임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략자이자 식민지 지배자일 뿐이며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일 뿐이었다. 조선 민중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은 임금은 여전히 고종이었다. 그것이 일본에겐 골칫거리였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침탈한 후 일본은 고종 황제를 이왕李王으로, 황태자 순종을 세자로 격하시켰다. 비록 왕이란 칭호는 남아 있었으나 이름 뿐이었고, 1871년 3부 72현으로 재편된 일본의 지방관제에 한국이란 한 부가 추가된 형국이었다.





언젠가는 기회가오리라

고종이 자신의 재위 기간 중에 500년 사직이 망한 것에 자괴감을 느꼈으나 포기하지 는 않았다. 고종은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거라고 믿는 인물이었다. 광무 2년(1898년)대원군이 세상을 떴을 때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고종은 만약 이대로 세상을 뜬다면 저승에 가서 대원군을 볼 면목이 없었다. 더욱이 25명의 역대 선왕들을 볼 면목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고종은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헌병통치로 표현되는 무단통치로 한국을 옥죄고 있을 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한 후 '조선귀족령'에 따라서 75명의 전,현직 고위관료들에게 작위를 주었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1명과 남작 45명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친일파였으나, 일부 일제의 회유에 못이겨 작위를 받은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했을 때 조선의 지배층 인사는 목숨걸고 일제와 투쟁한 인물은 드물었다. 이들은 왜 투쟁에 나서지 않았을까? 이들이 투쟁에 나서지 않은 데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바로 고종의 존재였다.

고종의 해외 망명작전

일본은 한일합방이 일본 황실과 한국 황실의 자유로운 의사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서 이루어졌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즉 한일합방이 고종과 순종의 동의에 따른 조약이라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옛 지배층들은 바로 이 고종과 순종의 동의에서 투쟁에 나서지 않아도 좋은 파난처를 찾았다.

물론 한국의 식자 중 한일합방이 한국 황실의 자의에 의해 체결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고종의 존재 자체가 격렬한 항일투쟁을 자제시키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자의든 타의든 한국 황실이 한일합방이란 운명을 받아들인 것만은 사실이라 생각하고, 황실의 결정에 따른다는 명분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합방 후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인물들은 모두 하층민들이고 조선의 지배층은 합방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선전해왔던 터였다.

만약 고종이 합방이란 운명을 거부하고 항일투쟁의 전면에 나선다면, 대한제국의 지배층이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명분은 송두리째 사라질 것이며, 그때까지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전, 현직 벼슬아치들도 침묵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농민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은 급속히 와해될 수 있었다.

또한 고종이 해외로 망명이라도 해서 항일 개전의 조서를 내린다면 틀림없이 전국적 봉기가 일어났을 것이다. 해외로 망명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고종의 망명을 적극 추진한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현존 기록에 의하면 이들 중 고종의 해외 망명을 가장 먼저 추진한 세력은, 1914년 이상설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였다. 이상설은 1915년 3월 상해 영국 조계 내의 배달학원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화, 유동열, 이춘일 등 주요 국립운동가들과 회동해, 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광복군을 무장시켜 국내외에서 강력하고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북경에 본부를 둔 신한혁명단 본부의 본부장 이상설은 외교부장에 성낙형을 선임하고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성낙형은 이 지시에 따라 국내에 잠입해 고종의 망명을 추진했다. 성낙형은 고종을 신한혁명단 당수로 받들고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려 했다.

신한혁명단 간부들이 1914년 7월 26일 내관 염덕인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관련 서류를 제출하자, 고종은 외교부장 성낙형을 알현하겠다고 허락했다. 이들은 고종뿐만 아니라 왕실 인물 중 항일 의지가 가장 높았던 고종의 왕자 의친왕 이강까지 연결하려 했으나 고종 알현 직전에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 김사홍, 김승현 등 다수의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일제는 이 사건을 '보안법 위반 사건'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더욱 철저히 감시했다. 만약 고종이 해외로 망명한다면 식민지 통치 체제 전반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한일합방이 고종의 자의로 체결되었다는 주장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물론, 이전의 의병 투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독립운동의 거센 물결이 국내외에서 일 것이 분명했다.

이상설과 성낙형의 고종 망명 기도 사건이 무위로 끝난 후, 1918년 다시 고종의 해외 망명이 추진되었다.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은 회고록 <운명의 여진>에서 1917년경부터 이 일을 추진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계획에는 이회영, 시영형제와 이득영, 홍증식, 민영달, 조완구 등이 가담했는데, 그 중에서 이회영 가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종의 생질이자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친족인 조계진이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의 부인이었으므로 고종과 비밀리에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고 고종은 선뜻 해외 망명계획을 승낙했다. 고종이 해외 망명계획을 쾌히 승낙한 것은, 당시 일본이 세자이자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을 일본의 왕족 이방자와 혼인시키려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종은 한국의 왕세자가 한국 여인이 아닌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국혼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고종의 손을 떠나 일본에게 있었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이 완전히 끊길 거라고 판단한 고종은, 자신이 직접 해외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고종은 측근인 민영달에게 망명 결심을 알렸다. 호조판서 좌참 등을 지낸 후,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항의 사직하고 일본이 내린 남작 작위도 거부했던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렇다면 분골쇄신 하더라도 뒤를 따르겠다"며 거금 5만 원을 내놓았다. 5만원은 북경에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마련할 자금이었다. 북경 행궁은 이회영이 물색하기로 역할 분담이 되어 있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이 일 것은 분명했다. 고종이 망명해 정부를 구성하면 이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 독일, 스페인 같은 나라는 고종의 망명정부를 인정했을 것이다.

고종이 해외망명을 결심하던 1919년에는 10년에 걸친 일본의 무단 통치가 한계에 봉착한 때였다. 어떤 계기만 생긴다면 백성들은 기꺼이 들고 일어날 자세가 되어 있었으므로, 고종이망명해 개전 조칙을 내린다면 전국 각제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바야흐로 일본과의 한판 결전의 날이 무르익고 있었다.

마지막 군주의 최후

이렇듯 자금이 준비되고 행궁 마련 계획까지 세워져 구체화되어가던 고종의 망명 계획은, 그러나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당사자인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한 것이다.

고종의 급서에는 여러가지로 의문점이 많다. 당시 고종의 망명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망명 정보가 누설되어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의 기록에도 의혹의 여지가 많다. <순종실록>의 부록에 태왕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고종의 병명도 없이 그저 태왕의 병이 깊어 그날 동경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되어 있다.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어 숙직한 인물이 바로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완용과 이기용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묘시卯時(오전6시)에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고종의 임종을 지켜본 인물은 헤이그 밀사 사건 때 고종에게 "일본에 가 일황에게 사죄하든 퇴위하라"고 윽박질렀던 이완용과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친일파뿐이었다.

고종이 1월 20일에 사망했는지 아니면 <고종실록>의 기록대로 21일에 사망했는지도 불분명하며, 그 사이 이완용과 이기용이 고종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일본은 고종의 사망사실을 하루 숨겼다가 발표했는데, 발표 방식도 신문 호외를 통한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고종의 병명은 급서의 경우 흔히 갖다붙이는 뇌일혈이었다. 고종의 사망 사실을 은폐하는 동안 일제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일제가 조선총독부 칙령 제9호로 "이태왕이 돌아가셨으므로 오늘부터 3일 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고 결정한 것은 1월 27일이었다. 1주일이 지난 뒤에야 "이태왕이 돌아셨으므로" 가무음곡을 중지한다는 칙령을 내려 뒷북을 치고 있는 것이다. 1주일 동안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을 독살한 장본인으로 두 인물을 지목했다. 이왕직 장시국장이자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이 일제의 하수인으로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자 <연합신문>에 1918년 12월 19일 밤에 두 한씨가 독약이 들어 있는 식혜를 올려 독살했다고 적었다.

성신여대의 구양근 교수가 일본 외부성 외교관료에서 찾아낸 국민대회 명의의 성명서에는 이 설을 지지하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이 사망한 그 달에 열린 국민대회의 성명서가 그것인데, 그 내용 중에 "그들(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은 출로가 막히자 후일을 두려워하여 간신배를 사서 시해하기로 하였다. 윤덕영,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시해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단순한 설이 아니라 고종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이완용과 이기용, 그리고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한창수, 윤덕영, 한상학 등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될 만큼 구체성을 띄고 있다.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널리 유포되고 이를 사실로 확신하게 된 것은 이런 구체적인 정황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제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두 궁녀를 살해했다는 사실에 이르면 믿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독살설은 일반과 궁중 모두에 널리 퍼졌다. 앞서 말한 이회영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생질인 조계진이 고종이 승하한 닷새 후 운형궁에 다녀와서 시부에게 이런 사실을 전한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고종 독살설은 당시 여러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병장 곽종석과 교류하였던 송상도는,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가 명말 충신의 사적을 수집한 예에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적을 수립해 <기려수필>을 남겼는데, 이 책의 유신영 편에 "역신 윤덕영, 한상학, 이완용이 태황을 독살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충북 보은에 살던 유신영은 "경술년(1910년)에 자결코자 했으나 군왕이 생존해 계시므로 참았다. 인산날 군왕을 지하에서 만나 불충의 죄를 씻겠다"며 자결하였고, 곡성에 살던 김기순도 "이제 우리 군왕마저 승하하셨으니 가망이 없다"며 할복 자살했으며, 무과 출신으로 선전관을 지낸 백성흠은 고종의 독살설을 듣고 대성통곡하다가 수일 후 숨을 거두는 등 자살이 잇달았다. 당시의 기록인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해서 아들들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고종의 급서는 한일합방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만약 고종의 해외망명이 성공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한반도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여 아무리 강고한 무단통치라 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교 관계로 보더라도 황제가 직접 망명해 정부를 수립한다면 자발적으로 합병했다는 일본 주장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차원을 넘어, 최소한 영국, 독일, 스페인 같은 군주국가 들의 승인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정세를 조성할 수 있었다. 일본과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은 이를 막기위해 고종 독살설을 결심했을 것이며, 일본이 독살을 결심했다면 적에게 둘러싸인 고종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고종의 치세는 결코 잘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조선 백성들의 임금이었다. 그는 사대부들이 앞장 선 의병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 조선의 임금이었다. 그의 죽음이 전민족적 항거인 3,1운동을 유발시킨 것만 보아도 그가 당시 백승들에게 어떤 존대였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 백성들은 일본의 히로이토가 아니라 고종을 임금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고종이 사망하자 그 인산일因山日에 전 국민적으로 항거했다.

왕비 명성왕후 민씨가 살해됨으로서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고종의 독살로 3,1운동이 발발했으니, 아마도 고종 부부는 죽음으로써만 일본에게 복수할 수 있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518년 간 존속했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의 인산을 애도시위로 보낸 것은, 5백 년 왕업에 대한 이 땅의 소박한 백성들의 마지막 의리와 예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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