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 읽는 역사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2)/전봉준의 출생

by 싯딤 2009. 9. 9.

Ⅱ.전봉준의 출생과 성장

 

 

1.출생

 

전봉준은 1855년, 아버지 전기창(창혁)과 어머니 언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675만 명 (남자 339만, 여자 335만 명), 호수戶數는 159만여 호였다.

한국사에서 역적, 반역으로 낙인찍힌 인물들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출생연도나 가족관계 등을 알 수가 없다. 신돈, 장보고, 궁예, 정도전, 이시애, 임꺽정 등의 출신연도가 모두 의문부호(?)로 되어 있는 것도 남아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태어난 전봉준도 근래 들어 농민혁명가, 장군, 선생 등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극히 적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정읍 이평면 조소리, 정읍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정읍 덕천면 시목리, 전주 등이 제기되어 왔는데, 근래 들어 고창문화원장 이기화의 오랜 발굴 끝에 고창 덕정면 죽림리 당촌마을로 밝혀졌다. 그의 주장은 당촌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 전봉준의 족보, 선대와 형제들의 묘소를 추적하여 얻은 결론으로서 지금까지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봉준의 족보 <천안전씨 병술족보>는 갑오농민혁명 직전인 1886년 간행된 족보로서, 그의 종증손 전동근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전동근은 전봉준의 당숙인 전기완의 증손으로, 그의 아버지 전기삼이 갑오년 당시 멸문의 화를 피해 숨어 살면서 간직하고 있었다. 이 족보에는 전봉준이 전병호로 적혀 있는데 관련 내용은 이렇다.

전봉준의 초명은 철로이고, 자는 명좌이며, 1855년 12월 3일 태어났다. 그의 부인은 여산 송씨 두옥의 딸로서, 1851년 8월 16일 태어나 1877년 4월 24일에 죽었다. 부인의 묘는 태인 산내면 소금동 할머니 묘 아래에 있다. 그 후 전봉준은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였는데, 남평 이씨 문기의 딸이다.

 


전봉준 족보 <천안전씨 세보병술보> 권6, 5면 뒷장.

신복룡, <전봉준평전>: 전동근(전봉준의 사촌 전기환의 증손)씨 소장본을 이기화씨가 사본 보관한 것임

 


전봉준이 태어난 집과 고창 당촌마을. 집터 뒤쪽 언덕 바로 위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난다.

 


 


당촌에서 소요산 가는 중간지점에서 바라본 소요산 만장봉 (가운데 뾰족한 봉우리)

 

구전에 따르면, 부친 전창혁이 일찍이 흥덕 소요산 암자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꿈에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전봉준이 태어났다고 한다.<동학사. 오지영> 전봉준의 집안은 원래 사림세가였으나 조부 때부터 이렇다 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여 가세가 기울기 시작, 전답 세마지기로 연명하는 형편이었다.

가세가 기울자 전봉준은 어릴 적부터 여러 번 옮겨 다니며 살았다. 특히 비기秘記를 믿어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을 찾아 터를 잡고 살기를 좋아했다.

고창 당촌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처음 이사 간 곳이, 사람의 왕래가 많고 생산물이 풍부하여 구미성 인출이라고 명당자리로 꼽히던 전주 봉상면 구미리였다. 이곳에서 잠깐 살다가 10살 무렵에 금구현 원평 황새마을(지금은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관봉마을)로 옮겨 갔다. 황새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김덕명이 살고 있었다. 김덕명은 농민봉기 1차 기병 때 총참모 역할을 맡고 전봉준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했던 인물로 그의 언양 김씨 집안은 원평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으며 전봉준의 외가이기도 했다.

전봉준이 황새마을을 떠나 지금도 찾아가기 힘든 산골마을인 지금실로 옮긴 때는 18살 무렵이었다. 정읍 산외면 평사리 지금실로 이사해서 25세 무렵까지 살았는데 이 때 만난 인물이 김개남이다. 그 후, 조모와 아내의 무덤이 태인 산내면 소금곡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웃인 산외면 동곡리로 1886년 이전에 이사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고부 이평면 양간다리에서 잠깐 살다가 이평면 조소리로 이사해서 갑오농민혁명을 맞을 때까지 살았다.

당시 1879년, 고부 궁동면 석지리에서 태어난 박문규라는 사람이 그의 저서 「석남역사」에 남긴 글을 보면, 전봉준이 조소마을로 이사를 와 천자문을 가르칠 때 찾아간 때가 그의 나이 8살 되던 해인 1886년 3월 3일이었는데 그 부분을 보면 이렇다.

"8살이 되어 3월3일 좋은 날에 잔등 넘어 조소리로 천자문을 들고 아버지를 따라 입학하러 간다. 고모댁 이웃집이라 전녹두 선생님 전에 인사하고,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전생님이 가르쳐 준다. 서당 안 서넛 동무 재미 붙여 배워간다. 선생님의 노 부친이 서서 감독한다, 천자 떼고 추구推句를 배웠다."

일본인 기쿠키 겐조가 1932년 조소리를 방문하여 당시 생존해 있던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전봉준은 키는 작았으나 얼굴이 희고 눈빛은 형형하여 사람을 쏘아 보는 듯 했다. 평소 집에 머물 때는 마을 소년들에게 동몽선습과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동네 어른들이 찾아오면 옛 성인들의 행적을 들어 얘기할 뿐 세상사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방문하는 사람이 없으면 종일 묵묵히 앉았다 드러누웠다 하였으며, 부모를 봉양함에 그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농사를 지을 줄은 몰랐다.

가끔,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며칠씩 묵어가는 일이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과 별로 어울리지는 않았다. 다만 동네에 경조사가 있으면 먼저 찾아가 축하하고 조문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인물됨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고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다.

2. 아버지와 아내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1827년생이며, 족보에는 전기창, 1936년의 정읍군 지와 동학교단 지에는 각각 창혁, 승록으로 되어있다. 이는 당시의 풍속이 돌림자에 따른 이름과 실제 부른 이름이 달라 흔히 있었던 일이라 볼 수 있다. 전봉준의 족보를 보면 그의 10대조 오상은, 원종 3등공신으로서 선무랑이라는 종6품직에 오르고, 그의 아들 성은, 통덕랑(정5품)에, 전봉준의 고조부 상규 또한 통덕랑에 오를 정도로 양반가문에 속했다. 다만 전봉준의 고조부 도신 대부터 벼슬길이 막히고 조부 석풍, 아버지 창혁 대를 이어오면서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6대조 이내에서 초시조차 합격한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잔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 당촌에서 서당 훈장을 하고, 고부 향교의 장의掌儀를 지냈다는 설은 평민의 신분으로는 맡아 볼 수 없는 직책이다.

고부현감 조병갑이 익산 현감으로 전임 갔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고부관아 아전들이 조의금을 추렴하는 문제로 전창혁과 김성천을 찾아가 2천냥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전창혁이 “조병갑은 고부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추호의 선처도 없었고, 또 기첩이 죽었는데 무슨 부의를 하느냐?” 며 의견을 일축해 버렸다. 이 말은 즉시 조병갑의 귀에 들어갔고 1894년 1월 고부로 다시 부임하자마자 전창혁은 잡혀 들어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곧 죽었다. <1936년, 정읍군지>

전창혁이 장살된 시기를 유추해 보면,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전봉준이 나들이 할 때면 상주들이 쓰는 방갓을 쓰고 있었고, 전주성을 점령하고 화약을 맺은 1894년 6월경 선친의 소상을 맞이했는데 조문객들이 수천을 헤아렸고 현물 조의도 상당수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 1893년 6월경인 것으로 보여진다. 고부 조소마을에는 지금도 ‘산 사람 열 명이 죽은 승록(창혁) 못 당한다.’ 는 말이 전해지고 있어 비교적 강직하고 정의감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태형장면

아버지가 관아에 잡혀 들어가 죽어 돌아온 현실 앞에서 전봉준의 심정은 정말로 비통했을 것이다. 따라서 전봉준의 거병에 대한 이유에 아버지 죽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봉준은 21살 때 여산 송씨 송두옥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전봉준보다는 4년 위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에 아내가 병으로 고생하다가 어린 두 딸을 남겨 놓고 일찍 세상을 떠나자 전봉준은 태인 산내면 소금동 할머니 묘 밑에 장례를 지냈다. 이후 여러 차례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아내의 묘소를 찾아 묵도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 후 남평 이씨 문기文琦의 딸과 재혼하였다. 전봉준은 전처와는 두 딸(옥례, 옥련)을, 후처와는 두 아들(용규, 용현)을 두었다.

고부관아터, 향교우측 고부초등학교 자리가 관아가 있던 자리다.

 

3. 동지들 

전봉준의 대인관계는 폭이 넓거나 원만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사람을 가려 사귀었던 것 같다. 교우관계는 대체로 명당을 찾아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인데, 정읍의 김개남과 손화중, 금구의 김덕명, 태인의 최경선 등을 들 수 있다.

 


좌로부터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김개남 金開南(1853∼1894)

도강 김씨로 자는 기선琪先, 본명은 기범箕範. 태인군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신인神人이 '남쪽 지방을 연다' 는 뜻으로 개남開南이라는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 주어 스스로 호를 개남이라 했다."고 한다. 선대先代는 큰 벼슬은 하지 못했으나 정유재란 때 의병에 가담한 공으로 음사蔭仕를 한 이후 토반土班으로서 가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처가의 이웃 마을에서 서당의 훈장을 했으며 결혼과 더불어 분가하여 선산이 있는 태인의 지금실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지금재를 넘어 20리 거리가 되는 금구 원평의 생활권에서 살았다. 남원을 거점으로 삼은 것은 처가가 임실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농민혁명 당시 전주 영장營將으로 농민군과 내통하였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한 김시풍은 김개남의 집안 아저씨(族叔)로서 성장기의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개남은 생각이 깊고 의지가 굳은 면이 있어 자못 사람들에게 군림했다. 혁명이 일어났던 초기에 그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난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강 김씨 중에 접주가 24명이나 되었다. 집안은 부농은 아니었다. 그는 정감록을 믿어 십승지지十勝之地인 지리산의 청학동에 들어가 처남과 함께 산 적이 있었다. 1890년 6월 초에 최시형이 지금실의 그의 집에서 열흘쯤 묵어 갈 정도로 그는 신심信心이 깊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전봉준의 장녀가 김개남의 이웃인 정읍의 지금실로 시집가는 바람에 서로 가끔씩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전봉준의 딸이 이곳으로 시집오게 된 것도 김개남의 중매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들은 난세에 대한 걱정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이 그들을 묶어주는 고리가 되어 대사大事를 함께 도모하게 되었다.

 

손화중 孫化仲(1861∼1895)

정읍의 토반土班인 밀양 손씨 양반가의 후예로, 중류 이상의 유족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긴 손홍록의 후손으로, 정읍의 옛 이름이 초산楚山이었기에 호를 초산이라 했다.

손화중은 과거에 염두를 두지는 않았고, 내우외환이 겹치고 있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당시의 사회 풍조대로 십승지지를 찾아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일찍이 한문을 수업하고 시국에 관심을 가져오던 중 처남 유용수를 따라 20대에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갔다가 때마침 이곳에서 만난 동학도에 공명하여 입도했다. 그 후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포교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눈을 피해 부안과 정읍으로 옮겨 다니다가 무장에서 포교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장부의 기상을 지녔던 그는 돈독한 신앙심으로 최시형의 신망이 두터워 호남의 유수한 접주로 꼽혔다.

전봉준이 손화중과 만난 것은 1888년 경인데, 손화중의 집안 조카인 손여옥과 친한 관계로 교우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담道談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거병 직전까지만 해도 손화중은 아직 동학 교인이 일어날 때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전봉준이 손화중을 필요로 했던 것은 그의 막강한 세력 때문이었다. 훗날 2차 기포 당시 손화중은 전라우도 지방의 백정, 재인, 역부, 대장장이, 승려 등, 천한 사람들을 모아 별도의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사납기가 비길 데 없었기 때문에 관군은 이들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혁명의 절정기에 전봉준의 노선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의 한계였다.

김덕명 金德明(1845∼1894년)

금구 용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중인 언양 김씨는 금구의 4대 토반 중 하나였다. 본명은 준상, 자는 덕명이며, 호는 용계이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특히 담론이 유창하였다. 1880년대 말이나 1890년대 초에 동학에 입도한 이래 동학의 중견 지도자가 되어 교도를 지도하였고, 1892년의 삼례집회와 1893년의 금구집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동학에 깊어 최시형이 포교차 그 지방에 내려올 때는 그의 집에 묵을 정도였다.

전봉준은 유년 시절에 풍수지리설에 심취한 그의 아버지를 따라 금구의 원평에서 1km떨어진 정읍 계봉리 황새마을에서 살면서 그곳에서 2km 떨어진 김제 종정마을에서 서당을 다녔다. 이곳은 모악산 금산사의 인근으로서 행정구역상으로서는 정읍이지만 원평이 생활권이었다. 이들은 이웃 간에 살았다는 공간적인 인연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안목이 같았고, 특히 전봉준의 어머니가 언양 김씨로서 김덕명과는 외척간이어서 두 사람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었다. 전봉준은 2차 기포를 하면서 금구집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를 주목했음이 틀림없다.

최경선 崔慶善(1859∼1895년)

전주 최씨로, 전주 월산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병석이며 경선은 그의 자이다. 학문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최경선은 전봉준과는 동향(태인) 사람으로서, 농민혁명 5∼6년 전에 만나 사귀어 온 사이여서 사발통문에 함께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 과정에서 전봉준의 비서로 활약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이 각 지역을 순회할 때 최경선 만을 대동한 것으로 보아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Ⅲ. 고부봉기에서 황룡촌 전투까지 

1.사발통문  

삼남집회에 참여한 후 잠적했던 전봉준은 세상 동정과 인심을 예의주시하며 앞날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조정은 삼남집회 주모자들의 수배를 해제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체포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관리들은 예전의 타성에 젖어 다시 권력의 향배를 좇고 백성들을 등쳐먹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제 북접과 연계한 동학교조 신원이나 동학의 자유나 바라는 집회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투쟁을 해 나가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뜻을 모아갔다. 그 무렵, 1893년 6월, 아버지 전창혁이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죽는 일이 발생했다.

1893년 11월 하순, 한 해가 저물어 가던 어느 날 전봉준은, 우선 합법적 방법인 등소等訴가 순서라 생각하고, 세를 규합하여 40여 명과 함께 민장을 들고 고부관아로 몰려가 등소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다시 다음 달인 12월에 60여 명이 소장을 들고 몰려가 조병갑에게 불법, 탐학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번에도 소장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자신의 비행을 규탄하고 탐학의 시정을 요구하는 이들을 붙잡아 심한 매질을 하여 쫒아냈다.소장을 들고 찾아갔다가 되레 심한 매질만 당하고 돌아온 농민들은 분노가 극도에 달해 이런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조병갑을 추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봉준도 이런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만 먼저 합법적 절차로 등소하는 것이 순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전봉준은 손여옥, 최경선 등 농민대표 20여 명과 함께 고부 서부면 죽산리 대뫼부락(현 신중리 주산마을)에 있는 송두호의 집에 모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20명이 사발처럼 동그랗게 연명하였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이 1968년 12월 고부면 송준섭의 집 마루 밑에서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발통문

 

계사 11월 일

각리 리집강 좌하

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날려 전하니 여론이 비등하였다. 매일 난망을 구가하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얏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道人들은 선후책을 토의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차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 된 내용은 좌左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 할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리를 쳐 징계할 것.

4.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행할 것.

우와 같이 결의가 되고 띠라서 군략에 능하고 모든 일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장...(이하 불명)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섭, 황흥모,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성노홍, 송인호.

 

이 사발통문에 대한 신용하 교수의 해석이다.

-사발통문의 '계사 11월 일' 앞부분에 원문이 있으나 잘려나갔다.

-서명자가 동일인의 필치로 되어있는 것은 농민들이 글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이 훗날 회상하여 쓴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송대화일 것이다.

-작성일자는 1905년 이후 일제 강점기일 것이다.

-4개 항을 고부민란의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특히 서울로 직향하겠다는 내용은 작성 당시 의사와는 무관하다. <신용하, 고부민란의 사발통문. 노산 유원동 박사 회갑논총, 정음문화사.1985>

그런데 최근 사발통문과 관련된 새로운 문서가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송재섭이 1954년에 쓴 '갑오동학혁명난과 전봉준장군실기' 이다. 이 자료는 최근에 알려진 사료로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Ⅲ(김용섭, 지식산업사, 2001.7)에 실려 있는데 사발통문 입수경위와 그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책자는 진암 송재섭(1889~1955)이 1954년에 펜으로 쓴 필사본인데 필자는 박영재 교수를 통해 박명도 선생(부박래원, 조부 박인호)댁에 소장되어 있는 원고본의 복사본을 기증받아 보고 있다."

 실기를 저술한 송재섭은 서명자 중 한 사람인 송주성의 차남이다. 그는 1889년생으로 그의 나이 35세 때인 1924년에 송주성이 사망하였고 그 후 1932년에 만주로 이주하여 1945년 8. 15 해방 후 귀국하여 고부 강고리로 되돌아와 천도교 고부교구 활동을 하다가 1955년에 사망하였다.

 이 문건에는 위 사발통문에서 빠져있는 거사계획의 전문이 실려 있으며 전봉준이 쓴 비격이 실려 있고 중복되는 부분이 거의 일치하여 전봉준실기의 사발통문이 오히려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비격飛檄 

今之爲臣은 不思報國하고 도절녹위하며 掩蔽聰明하고 가意도容이라 총간지목을 謂之妖言하고 正直之人을 위之비도하여 內無포圍之재하고 外多학民之官이라 人民之心은 日益유變 入無학생之業하고 出無保구策이라 학政이日사에 怨聲이 相續이로다 

自公卿以下로 以至方伯守令에 不念國家之危殆하고 도절비己윤家之計와 전選之門은 視作生화之路 요 응試之場은 擧作交역之市라 

許多화뢰가 不納王庫하고 反充사장이라 國有累積之債라도 不念國報요 교사음이가 無所위기라 人路魚肉에 萬民도탄이라 

民爲國本이니 本削則國殘이라 吾道는 유초야유민이나 食君之土하고 服君之義(衣)하며 不可坐視國家之危亡이라 以報公輔國安民으로 爲死生之誓라 

癸巳仲冬下旬 罪人 全琫準 書 

통문通文 

右文爲通諭事 無他라 大廈將傾 比將奈何오 坐而待之可乎아 扶而救之可乎아 奈若何오 當此時期하야 海內同胞의 總力으로 以하야 撑而擎之코저하와 血淚를 灑하며 滿天下同胞의게 衷心으로써 訴하노라.  

吾儕飮恨忍痛이 已爲歲積 悲塞哽咽함은 必無贅論이어니와 今不可忍일새 玆敢烽火를 擧하야 其哀痛切迫之情를 天下에 大告하는 同時에 義旗를 揮하야 蒼生를 濁浪之中에서 救濟하고 鼓를 鳴하야 써滿朝의 奸臣賊子를 驅除하며 貪官汚吏를 擊懲하고 進하여 써倭를 逐하고 洋를 斥하야 國家를 萬年盤石의 上에 確立코자 하오니 惟我道人은 勿論이요 一般同胞兄弟도 本年十一月二十日를 期하야 古阜馬項市로 無漏內應하라 若不應者 有하면 梟首하리라 

癸巳 仲冬 月 日 

전봉준(全琫準), 송두호(宋斗浩), 정종혁(鄭宗赫), 송대화(宋大和), 김도삼(金道三), 송주옥(宋柱玉), 송주성(宋柱晟), 황홍모(黃洪模), 황찬오(黃贊五), 송인호(宋寅浩), 최흥열(崔興烈), 이성하(李成夏), 최경선(崔景善), 김응칠(金應七), 황채오(黃彩五)

 

各里 里執綱 座下 

右와 如한 檄文이 四方에 飛傳하니 物論이 鼎沸하고 人心이 忷忷하얐다. 每日 亂亡를 謳歌하던 民衆들은 處處에 모혀서 말하되, ‘낫네 낫서 亂離가 낫서, 에이 참 잘되얏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百姓이 한 사람이나 남어잇겟나’하며 下回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道人들은 先後策을 討議하기 위하야, 宋斗浩家에 都所를 定하고 每日雲集하야 次序를 따라 條項을 定하니 左와 如하다.

 - 古阜城을 擊破하고 郡守 趙秉甲를 梟首할 事

 - 軍器倉과 火藥庫를 占領할 事

 - 郡守의게 阿諛하야 人民를 侵魚한 吏屬를 擊懲할 事

 - 全州營를 陷落하고 京師로 直向할 事

 右와 如히 決議가 되고, 따라서 軍略에 能하고 庶事에 敏活한 領導者될 將材를 選擇하야 部署를 定하니 下와 如하다.

 - 一將頭에 全琫準

 - 二將頭에 鄭鍾赫

 - 三將頭에 金道三

 - 參謀에 宋大和

 - 中軍에 黃洪模

 - 火砲將에 金應七

 전봉준의 이름으로 작성된 비격은 봉기의 당위성을 밝히는 내용이다. 통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봉화烽火를 들어 그 애통하고 절박한 사정을 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의로운 깃발을 들어 창생)을 구하고 북을 울려 조정에 가득 찬 간신도적 무리들을 쫓아내고 탐관오리를 물리치며, 나아가 왜와 서양세력을 몰아내고 국가를 튼튼히 하고자하니 동학을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일반 동포형제도 1893년 11월 20일에 고부 말목장터로 모이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효수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학교인과 백성들에게 말목장터로 1893년 11월 20일에 모이라는 대목은 실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던 1894년 1월 10일 이전에 농민봉기를 시도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어떤 사정에 의해 불발에 그치자 갑오년 1월 10일 봉기하게 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서명자 숫자는 기존의 사발통문 서명자 숫자인 20명이 아닌 15명으로 나와 있다. 즉, 기존의 사발통문에 나오는 서명자 중 임노홍, 손여옥, 송국섭, 이문형, 이봉근 등 5명의 이름이 없다. 이는 일부 삭제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사발통문이 더 첨가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누락 된 5명 중에는 주인공인 송국섭이 포함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격문은 기존의 통문과 같은 내용으로, 이는 위 사발통문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운 문서라고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다만 '실기'에는 사발통문 작성일자가 癸巳 11월이 아닌 계사 仲冬으로 나와 있으며 ‘期日’이라는 글자는 ‘下回’로 나온다. 또 '실기'에는 전봉준이 고부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송두호, 송대화와 함께 상의하였으며 거병의 의의를 밝히는 글을 송주성을 시켜 최시형에게 전하도록 하여 고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면 호서에서도 기포하여 빨리 내응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최경선,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김낙철 등 각 군의 대접주에게 일일이 격문을 보내 함께 일어나도록 촉구한 다음 고부 각면 각리에 사발통문을 일시에 포고하여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봉준이 최시형에게 고지를 했으며 호서에서의 내응까지 요구했다는 점이다. 또 전봉준은 당시 고부와 행정구역이 다른 태인, 금구, 남원, 무장, 부안의 지도자들에 일일이 격문을 보내 봉기를 촉구했다는 점이다. 이는 고부농민봉기가 단순히 고부군수 조병갑에 대한 일시적 감정의 폭발로 일어난 민란이 아닌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사전 치밀하게 계획된 거사임을 말해주고 있다.

 고부농민봉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고부에서 일어나 전주를 점령하고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가 중앙정권을 쳐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즈음, 고부군수 조병갑이 11월 30일에 익산 군수로 발령이 났다. 고부군수로 이은용, 신좌묵, 이규백 등 6명이 계속 발령이 났으나 아무도 부임해 오지 않았다. 익산군수로 발령이 난 조병갑이 고부에 계속 있으려고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공작을 벌였기 때문이다. 김문현은 이은용 등을 불러 사양하도록 강압하는 한편 조정에는 '타읍으로 전출되면 세금 거두는 일에 착오가 발생될까 걱정된다.'고 보고하여 유임을 요청했다. 결국 조병갑은 1894년 1월 9일 고부군수로 재발령이 났고 이후 하루걸러 고부군수로 발령이 난 인물들도 모두 신병을 이유로 내려오지 않았다.<승정원일기, 고종31년 정월 9일조>.

 

2.고부봉기-1차 기포  

전봉준은 당시 정읍 포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손화중을 가담시키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11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날 저녁, 손여옥 등과 함께 무장 괴치리에 있는 손화중을 찾아갔다. 그러나 거사의 전말을 들은 손화중은 비폭력을 내세우고 전략상으로도 어렵다며 참여를 거부했다.

한해가 저물고 갑오년(1894)이 밝아왔다. 전봉준은 정초부터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가 상의했고 모두들 그의 거사 계획에 동조해 주었다. 마침내 정월 9일을 거사의 날로 잡았다. 우선 태인 주산리 최경선의 집을 모의 장소로 잡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금새 장정 300여명이 모여들었다. 훈장, 약업을 하면서 주민들의 신망을 얻은 전봉준이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전봉준은 미리 사람을 보내, 고부 사람들은 9일 아침에 사람의 왕래가 많은 배들(이평)의 말목장터 삼거리에 있는 감나무 밑으로 모이되 각각 손에 무기를 들고 오도록 했다. 9일 밤, 전봉준은 장정 300여 명을 이끌고 주산리 최경선의 집을 출발하여 30리 거리인 말목장터로 향했다. 도착하니 감나무 주변에는 벌써 수많은 주민들이 낫 같은 무기들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합세하니 1,000여 명이 되었다.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한 박문규라는 사람의 기록이다.

갑오년, 내 나이 열여섯 되던 해의 정월 초파일은 말목 장날이었다. 석양에 동네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더니 조금 있다가 통문이 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여러 동네에서 징소리, 나팔소리, 고함소리로 천지가 들끓더니 수천 명의 군중들이 우리 동네 앞길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조병갑이를 죽인다고 민요가 났다. 수만 군중이 사방으로 몰려가니 군수 조병갑은 정읍으로 도주하여 서울로 도망하였다. 그는 본시 서울의 유세객이다. 민요군은 다시 10일 아침 말목장터로 모여 수직守直을 하니 누차 해산명령이 내렸다.

 


말목장터와 감나무 밑, 150여년 된 감나무는 2003년 태풍에 쓰러져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은 쓰러지기 전의 것이다.

 

11일까지 모여든 농민들이 15개 부락에서 만여 명에 이르렀다. 전봉준은 이들 가운데 먼저 장정을 뽑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려 보내고 부락마다 5명씩을 뽑아 자기 부락을 통솔케 했다. <이등박문, 비밀서류조선교섭자료, 동경, 원서방,1970>. 이제 인원은 어느 정도 충분했지만 무기가 없어, 우선 예동 김진사댁 부근에 대장간을 차려 급한 대로 병기를 만들고, 하송리 마을을 지나면서 대나무를 베어다 죽창을 만들었다. <동학혁명, 최현식,1979>

10일, 전봉준은 대오를 둘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향했다. 하나는 천치재의 서쪽을 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전봉준의 농민 주력부대가 영원 길로 20리 길을 걸어 다음날 새벽 고부관아로 들이 닥치니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조병갑은 영원면 앵성리에 사는 조 모로부터 농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부 입석리의 부호 정차봉 집에 숨어들었다가 변장을 하고 야밤에 정읍, 순창을 거쳐 전주 감영으로 도망쳤다. 고부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날이 밝아오자 다음과 같은 조취를 취했다.

1. 관속 중에서 군수와 부동하고 탐학한 자를 처단하고

2. 군기고를 열어 총, 창, 탄약을 거두고

3. 읍내 청죽을 베어 죽창을 만들어 무기 없는 자에게 주고

4; 옥문을 열어 민란의 장두와 원통하게 갇혀 있는 백성들을 석방하고

5.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휼하라.

6. 읍사를 대략 정리하고 대군을 하라. <오지영, 동학사>

 

날이 밝자 농민들은 말목장터로 되돌아갔다. 일부 농민들은 만석보로 가 헐어버리려 했으나 춥고 얼어 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전주감영 김문현은 전봉준을 잡으려고 병졸 16명을 농민복장으로 변장시키고 철추鐵椎를 몸속에 숨겨 고부에 침투시켰다. 그러나, 농민군들이 외부 침입자들을 식별해내기 위해 비표처럼 왼쪽 손목에 노끈을 메고 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잠행했다가 붙잡혀 책임자 군위 정석진은 살해되고 나머지는 5, 6일간 고통을 받다가 백산으로 이동할 때 풀려났다.

고부민란이 전주감영을 통해 서울 조정에 전해지자, “고부군수 조병갑을 압송 격식을 갖추어 잡아와수감하라”는 전교가 내려졌고, 그 후임으로 2월 15일 박원명이 부임하게 되었다. 박원명은 전라도 출신으로 광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부유한 집안 태생으로 자못 재주도 있고 임기응변이 있어 민영준이 그를 뽑은 것이었다.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만석보 유지비

부임해 온 박원명은 전봉준이 주둔하고 있는 진영에 서찰을 보내 “내 뜻은 백성을 편한케 하는데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그대들과 이곳 사정을 의논코자 하니 민군 중에서 이부吏部이하 자리를 선발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 3월 3일에는 이들을 초청하여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잔치를 풍성하게 벌여주면서 ‘조정에서도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각자 돌아가서 생업에 편안히 힘쓰라’ 고 당부하였다. 그러자 농민군들은 현저히 동요하는 빛을 보이면서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 본 전봉준은 장터로 돌아와서 군중을 해산시킨 뒤 부하 수십 명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로써 고부민란은 마무리되어 가는 듯 했다. 이날이 3월 13일이었다.

농민군이 이렇게 쉽게 해산한 까닭은, 첫째, 마을단위로 구성된 지도부에 토호와 부자들이 끼어 있었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수탈당한 양이 더 많아 그 분풀이로 민요에 참여는 했으나 자칫 역적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서둘러 해산한 것이었다. 둘째, 앞장서서 행동한 대원들은 소작농, 머슴, 무뢰배, 발피潑皮(직업없이 폭력쓰기를 업으로 삼는 자들. 일종의 깡패) 들이었는데, 이들은 관아의 곡식을 나누어 받고 잔치상으로 배를 채우자 분이 풀렸다가 토호들이 해산하자 덩달아 흩어져 간 것이었다.

전봉준도 이 때 '천하를 도모할 꿈을 꾸고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거사의 시발'이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판단한 두 기록이다.

원래 이번 난민은 소위 동학도와는 다르다. 오로지 양민이 관의 무거운 수탈을 원망하여 원수 갚기를 꾀한 것이다. 각기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밤을 틈타 일어나고 낮에는 집에 있으면서 소요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날 정읍에서 곤도 70명을 생포하였는데 동학도는 불과 5,6명에 불과했다.

<청국함 평원호 함장과 인천 2등영사와의 대화, 日公記2>

문: 난민 중에 원민寃民(원한을 가진 백성)이 많았는가? 아니면 동학도가 많았는가?

답: 원민이 많았고 교도는 적었다. <전봉준 공초>

 

3. 고부 현감 조병갑의 탐학

 당시 고부는 일대 고을 중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 고부일대에는 고부평야, 팔왕평야, 백산평야, 이평평야 등이 형성되어 비옥한 농토를 지니고 있었고, 서해안이 인접해 있어 풍부한 해산물을 얻을 수 있는 천혜의 낙토여서 탐학한 관리들이 눈독을 들이는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 조병갑이 현감으로 부임해 왔으니 그는 부임 초부터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고 있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부패한 탐관오리로 지목되고 농민혁명을 직접 촉발시킨 당사자인 조병갑은 본관이 양주로 순조 왕비 조씨의 일족이다.

 


만경평야

조병갑의 조부는 규장각 검서관과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아버지는 태인 현감을 지낸 조태순의 서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조카이다. 이들은 순조왕비인 조대비에 의해 출세한 가문이다. 조병갑이나 조두순이 과거 급제자의 명단에 없는 것으로 보아 권력의 비호로 출세한 것으로 보여진다.

조병갑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은데, 1892년 4월(고종 19년)에 고부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전에는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 것으로 보여진다. 따지고 보면 이 당시 조병갑만 탐관오리였던 것은 아니었다. 전운사 조필영은 세미를 운반하면서 운임, 유실 등의 명목으로 빼돌리고 더 거두어 들여 농민들의 뼛골을 짜냈고, 균전사 김창석은 농민들에게 묵은 땅을 개간하게 하고 추수 때가 되면 수탈해 가는 등 전라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전봉준이 공초에서 밝힌 조병갑의 죄상이다.

1.보를 쌓은 둑 아래서 물의 혜택을 받는 농민에 대하여 강압적인 명령을 내려, 좋은 논이면 1두락에 2말을, 좋지 않은 논은 1두락에 1말의 세금을 거두어 도합 700여석을 착복했다.

2.묵은 황무지를 백성들에게 갈아먹으라고 허락하고 관아에서 문권까지 발급하여 세금을 징수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가을 추수 때가 되니 억지로 거두어 갔다.

3.부잣집 백성에게서 불효, 불목, 음행, 잡기 등의 죄목으로 얽어서 돈 2만냥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

4.조병갑의 아비가 일찍이 태인 고을 원님을 지냈는데, 아비를 위하여 비각을 세운다고 1,000여 냥을 억지로 거두었다.

5.대동미를 정백미 16말씩 일정하게 거둘 때에, 막상 쌀을 상납하면 하등미로 값을 쳐서 그 남는 이익을 몽땅 먹어 버렸다.

6.수리사업으로 보를 쌓을 때, 다른 산에서 수백년 된 나무를 베어다가 보를 쌓게 하고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조병갑은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2월 15일자로 고부군수직에서 파직되고, 향리인 양주에 은신해 있다가 4월 20일 의금부도사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5월4일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흥선대원군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던 영의정 조두순(1796∼1870)의 조카였고, 이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지낸 심상훈과 사돈 간이라는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이목이 있어 잠시 귀양 보낸 것이었다.


조병갑 부친 조규순 공적비

조병갑은 1898년 8월 18일자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이 변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민요는 고부민요 수개월 전부터 고산 등 각 군에서 먼저 일어났고, 동요는 보은 등 각 군 지방에서 1893년 가을에 일어났고, 갑오동요는 전봉준이가 4월에 무장에다 방을 걸고 고창 등 각 군에서 작요한 것은 그 때 감사 김문현 씨의 등보가 있었으니 고부동요가 아닌 것은 가히 알겠으며, 또 민요로 말할진대 백성이 관장의 탐혹을 못이겨 일어났다 할진대 조병갑이가 범죄 사실이 없는 것은 그때 명사관 조명호, 안핵사 이용태, 염찰사 엄세영, 감사 김문현이 5번 사실을 말하였으되 소위 장전이라 이르던 16,000 냥 내에 2,800냥은 당초에 허무하고 13,200여 냥은 보폐가 분명한지라 만일 안핵사 이용태가 빨리 장계를 하였더라면 조병갑은 다만 민요로 논감만 당하였을 것을 이용태가 무단히 석달을 끌다가 비로소 무장군 동요 일어난 후에 겨우 장계를 하여 그해 정월에 갈려 간 조병갑으로 하여금 5월에 와서야 파직되고 귀양 간 일을 당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간의 시비는 세계 제 군자가 각기 짐작을 하시오."

조병갑, 감투만 쓰면 백성을 수탈하던 시대에 하필 자신만 지탄받을 일이 뭐가 있느냐고 강변했다. 특히 이용태가 1차 봉기 후 사태수습을 3개월이나 끈 탓에 2차 봉기가 일어났다면서 책임은 이용태에게 있고 자신은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조병갑은 이후 재판관으로 등용되어 최시형을 사형에 처했다, 이용태는 1899년 평리원 재판장이 되었고, 이완용 내각에서 학부대신으로,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