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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 세조

by 싯딤 2010. 1. 18.

2008.10.25

악역을 자청한임금 세조 / 시대를 잘못 읽다

리더의 오판이 국가의 비극을 잉태하다

 

 

리더에게는 시대를 읽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사회를 이끌어갈 수도, 통합할 수도 없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인물이 권좌에 오르면 그 사회는 큰 불행에 처하게 된다.
단종이 즉위한 해(1452년)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오문(정문에 해당) 쪽에서 바라본 태화전(太和殿)의 모습.
1452년 5월 14일 조선의 제5대 임금 문종이 승하했다. 재위 2년, 한창 때인 39세였다. 『문종실록』은 “신하가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그치지 않았으며, 거리의 소민(小民)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2년 5월 14일)고 쓰고 있다. 문종의 병은 허리 위의 종기(종氣)였는데, 이를 치료한 어의 전순의는 5월 8일 대신들에게 “성상의 종기가 난 곳의 농즙(濃汁)이 흘러나와 지침(紙針)이 저절로 뽑혀졌습니다. 오늘부터 처음으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니 예전의 평일과 같습니다”고 말했다. 거의 다 나았다는 말에 대신들은 기뻐하며 물러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 느닷없이 승하한 것이다.

『문종실록』은 “이때 사왕(嗣王·단종)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 상사 때보다 더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세자 이홍위(李弘暐·단종)는 12세에 불과했으나 모두 그의 즉위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이 개국 60년 된 조선의 헌정질서였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임금이 즉위할 경우 대비가 수렴청정해야 했으나 그럴 왕대비가 없었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와 모후(母后) 현덕(顯德)왕후 권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다며 계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정부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분)이 단종을 보좌했다.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계유년(癸酉年:단종 1년)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의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른여섯 살 수양대군 이유(李유)가 주목 대상이었다. 그래서 대군들의 이심(異心)을 막기 위해 단종 즉위 교서에 분경(奔競) 금지 조항을 넣었다. 이·병조(吏·兵曹) 등의 인사권자를 찾아다니며 엽관운동(獵官運動)을 하는 것이 분경인데, 단종 즉위교서에는 특별히 정부 대신(大臣)과 귀근(貴近) 각처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귀근 각처가 대군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경을 가장 강력하게 금지한 왕은 태종이었다. 태종은 삼군부와 사헌부의 아전(吏)들에게 권세가의 집을 상시 감시하다가 5세(世) 이내의 친족이 아닌 자가 드나들면 무조건 체포해 가두게 했을 정도였다. 조선의 법전인 『속육전(續六典)』은 종친의 정사 관여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과거에는 굳이 대군들을 분경 금지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분경 금지 조처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수양은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을 불러 “우리에게 분경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행세하겠는가”라고 항의했다. 이는 수양이 야심을 노골화한 것이므로 의정부 정승들은 『속육전』을 들어 강하게 반박하고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은 탄핵해야 했으나 영의정 황보인은 크게 놀라 대군 집의 분경 금지 조처를 해제했다. 이것이 숱한 비극의 단서였다. 수양이 항의한 것은 자신이 사람 만나는 것을 제한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분경 금지 조처에서 해제된 것을 계기로 수양은 다양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신숙주(申叔舟)나 권남(權擥) 같은 벼슬아치도 있었고, 한명회(韓明澮) 같은 낙방거사도 있었다. 음서(蔭敍)로 종9품 경덕궁(敬德宮:태조의 개경 잠저)지기가 된 한명회를 두고 수양대군은 “예부터 영웅은 처세하기 어려운 법이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느냐”고 극찬하면서 국사(國士)로까지 높이 평가했다. 당초 친구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보라고 권했던 인물이 한명회였다. 과거에 거듭 낙방한 한명회에게 정상적 헌정질서 속에서는 미래가 없었다. 그는 수양의 야심과 결탁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라고 권한 것이다. 한명회는 이미 수양을 임금으로 ‘택군(擇君)’한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지위와 돈과 술을 이용해 숱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수양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나라의 동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지지를 확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단종 즉위년(1452) 9월 10일 수양대군은 스스로 고명(顧命) 사은사를 자청한 것이다. 도승지 강맹경이 “수양대군이 가기를 청하니 사신으로 삼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말하자 단종은 답을 하지 않다가 선왕의 부마(駙馬)를 사은사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미 수양에게 붙은 강맹경은 부마들이 병들어서 안 된다고 반대했고, 수양대군은 거듭 자청해 드디어 사은사로 낙점되었다.

수양대군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단종실록)』는 이때의 사신 길이 무척 위험한 일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단종 즉위년 10월 11일자는 수양대군이 이복동생 계양군(桂陽君) 이증(李증)에게 “국가의 안위가 이 한 번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나는 목숨을 하늘에 맡길 뿐이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매일 밤 대왕대비(大王大妃:세조비 윤씨)가 몰래 울었고, 세조도 비통하게 울면서 “나의 충성을 하늘이 알아주기 원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사신 길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명에서 통상 관례에 따라 단종에게 국왕 책봉 고명(誥命)을 내린 데 대한 답례사일 뿐이었다. 쿠데타를 결심한 수양에게는 ‘이 한 번의 행차’가 중요했는지 몰랐지만 이는 그의 사정일 뿐이었다. 후세의 비난이 두려워 편찬자의 이름도 적지 못한 『노산군일기』는 단종 즉위년 윤9월 27일 종친이 베푼 전별식에서 수양이 홀로 취하지 않자 양녕대군과 태종의 서자 경녕군(敬寧君)이 “이는 천하의 호걸이다. 중국 사람이 그것을 알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양녕이 수양에게 “수양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도 적고 있다. 임금 이외의 인물에게 ‘천명’이란 용어를 썼다면 그 자체가 ‘역모’였다. 수양은 사신으로 가면서 영의정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과 좌의정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를 일종의 인질로 데려갔다.

이 무렵 명나라의 위세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조선은 태종~문종을 거치며 국력이 크게 신장돼 있었다. 명의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은 3년 전인 1449년(세종 31년) 8월 몽골군과 전쟁에 나섰다가 현재의 허베이(河北)성 화이라이(懷來)현 부근의 토목보(土木堡)에서 대패했다. 대군은 궤멸되고 영종은 생포되는 ‘토목의 변(土木之變)’이었다. 몽골군은 베이징(北京)까지 공격했다.

영종은 이듬해 몽골군이 풀어주는 바람에 귀국했으나 베이징 남지자(南池子)에 있는 남궁(南宮)에 유폐되어야 했다. 영종의 동생인 대종(代宗:재위 1449~1457) 주기옥(朱祁鈺)이 즉위했으나 정정 불안이 계속되었다. 수양이 사신으로 간 것은 이런 때로서 주변 국가들이 명을 우습게 볼 때였다. 그러나 양녕은 대종이 예부 낭중(郎中)을 시켜 표리(表裏:겉옷과 속옷)를 하사하자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며 일어나서 받았다. 예부 낭중 웅장(熊壯)이 놀라 일어나면서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고 감탄했다고 『노산군일기』는 전한다. 조선 국왕의 숙부가 일개 낭중에게 통상 예법을 뛰어넘어 과공(過恭)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수양은 저자세 외교로 일관함으로써 권위가 땅에 추락한 명 왕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명의 지지를 확신한 수양은 쿠데타를 결심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태종처럼 왕위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 때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태종 때는 질서를 만들던 시기이고 이때는 질서가 잡힌 시대였다. 태종~문종대를 거치며 유학이 사회의 주도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그렇게 유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 헌정질서 파괴
명분은 때로 실용보다 중요하다.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힘이 명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많을수록 사회는 혼란스럽게 마련이다. 수양은 명분이 없어도 힘만 있으면 국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종 시절 김종서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하류에 6진을 설치했으나 수양에게 살해됐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그는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중략)…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는 시를 남겼다. 김종서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는지 달(단종을 상징)을 향해 울부짖고 소나무(유학자 그룹)는 달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단종 1년(1453) 10월 10일 새벽.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 등을 집으로 불러 “김종서가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그날 제거하겠다고 말했다. 수양은 집 후원(後苑) 송정(松亭)으로 수십 명의 무사를 불러 활을 쏘게 하고 술을 먹였다. 저녁 무렵 수양은 무사들에게 “오늘은 충신열사가 대의(大義)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김종서)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깜짝 놀란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 등은 “마땅히 조정에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우리가 역적이니 죽여 달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수양이 온갖 공을 들여 키운 무사들에게조차 수양의 ‘대의’는 ‘역심(逆心)’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노산군일기’는 수양의 말을 듣고 ‘북문 쪽으로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아무런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다.

다급해진 수양이 한명회에게 “대다수 사람이 불가하게 여기니, 장차 어떤 계교가 좋겠는가”라고 묻자, 쿠데타에 인생을 건 한명회는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할 수 없습니다. …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고, 홍윤성(洪允成)도 “군사를 쓰는 데 이럴까 저럴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해입니다”라며 결행을 촉구했다.

부인 윤씨가 갑옷을 갖다 입히자 수양은 가동 임어을운(林於乙云)과 무사 양정(楊汀) 등을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김종서에게 “정승의 사모(紗帽) 뿔을 빌립시다”라고 말해 경계를 느슨히 한 다음 청이 있다면서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가 달빛에 편지를 비춰보는 순간 수양의 재촉을 받은 임어을운이 철퇴로 내려쳤다. 아들 승규가 아비를 구하기 위해 몸으로 덮자 양정이 칼로 찔렀다. 두만강 육진 개척의 원훈(元勳) 김종서가 이렇게 쓰러지면서 조선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는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시작된다.

수양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는 이때 “노산군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해 궁중의 술(內온)과 음식(內羞)으로 세조(수양) 이하 여러 재상을 먹였다”고 전하지만,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의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譜錄)’은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두려워하는 단종을 협박해 대신들을 부르는 명패(命牌)를 내리게 한 수양은 문(門)마다 역사들을 배치했다.

‘본조선원보록’은 이때 ‘한명회가 ‘생살부(生殺簿)’를 들고 문 곁에 앉아 있다가 ‘사부(死簿)’에 오른 대신들을 때려죽이게 했다’고 전한다.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李穰),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이 명패를 받고 입궐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윤처공(尹處恭)·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은 집으로 쳐들어 온 역사(力士)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죽은 이현로(李賢老)는 단종 즉위년 윤9월 이미 수양에게 구타당했던 문신이었다. 감여(堪輿:풍수)에도 능했던 그는 “백악산(白嶽山) 뒤에 궁을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종손)이 쇠하고 방룡(傍龍:지손)이 발(發)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의 말대로 백악산 뒤에 궁을 지으면 지손인 수양은 국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구타했던 것이다.

다음날 수양은 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領議政府事·領經筵·書雲觀事·兼判吏兵曹事)가 되었다. 혼자서 의정부와 이·병조를 모두 차지했으니 ‘왕’이란 말만 빠진 사실상의 임금이었다. 살육전은 계속되어 수양의 친동생 안평대군, 선공부정(繕工副正) 이명민 같은 왕족들과 허후(許후)·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지정(池淨)·이보인(李保仁)·이의산(李義山)·김정(金晶)·김말생(金末生) 등이 죽임을 당했다. 국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죽인 후 그 시신 위에서 축제를 열었다. 쿠데타 닷새 후인 단종 1년(1453) 10월 15일 수양대군·정인지·한확(韓確)·한명회·권남 등 14명을 1등공신, 신숙주 등 11명을 이등공신으로 하는 43명의 정난공신이 책봉되었다.

태종 즉위년(1401)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이후 52년 만의 공신 책봉이었다. 공신의 자손들은 범죄(犯罪)해도 영원히 용서하는 특혜가 주어졌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제거했던 특권층이 다시 부활하는 역사의 반동이었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토지와 노비를 난신전(亂臣田)이란 명목으로 나누어 가졌고, 급기야 그 가족들까지 죽였다.

처음에 가족들은 ‘변군(邊郡)의 관노(官奴)’로 삼았으나 계유정난 10개월 후인 단종 2년(1454) 8월 15일, 추석제를 지내고 환궁하다가 중량포(中良浦)의 주정소(晝停所)에서 살해령을 내린 것이다. 단종의 명을 빙자했지만 “대신의 의논도 이와 같았다”는 기록처럼 수양대군이 주도한 것이다. “이용(李瑢: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皇甫錫:황보인의 아들)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金木臺),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 이현로의 아들 이건금(李乾金)·이건옥(李乾玉)·이건철(李乾鐵)… 그리고 정분(鄭분)·이석정(李石貞)·조완규(趙完珪)·조순생(趙順生)·정효강(鄭孝康)·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노산군일기’ 2년 8월 15일)”

39명을 추석날 사형시킨 것이다. 태종은 정도전을 죽이고 아들 정진(鄭津)을 수군으로 삼았으나 재위 7년(1407) 판나주(判羅州) 목사로, 상왕 시절인 세종 1년 충청도 도관찰사까지 승진시켰다. 선 자리가 달랐기에 정도전은 제거했어도 자식은 종2품까지 승진시켰던 것이다.

단종은 재위 2년(1454) 수양에게 “숙부는 과인(寡人)을 도와 널리 서정(庶政)을 보필하고… 희공(姬公:주공)으로 하여금 주(周)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조카 성왕(成王)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끝까지 조카를 보좌함으로써 공자가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던 주공(周公)이 돼 달라는 애원이었다. 단종은 여러 차례 수양을 주공(周公)에 비유하는 글을 내렸으나 수양은 애당초 주공이 될 생각이 없었다.

수양은 단종 3년(1455) 윤6월 친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세종의 서자 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 등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을 귀양보내 압박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단종은 그날 환관 전균(田畇)을 시켜 수양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고 전하지만 ‘육신록(六臣錄)’은 “밤에 수양대군이 철퇴(鐵槌:쇠몽치)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자 단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내 실로 왕위를 원함이 아니로소이다’라면서 물러났다”고 전한다. ‘육신록’이 신빙성이 있는 것은 바로 그날 수양이 근정전 뜰에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즉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위에 성공한 수양은 한명회·신숙주·한확·윤사로 등 7명을 1등공신으로 하는 총 47명의 좌익(左翼)공신을 다시 책봉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은 수양이 왕위를 빼앗을 때 ‘승지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하니 수양이 머리를 들고 그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수양이 왕위까지 빼앗은 것은 시대가 용인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을 넘은 것이었다.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에서 수양의 행위는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주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판한 찬탈(簒奪)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 때 집현전 등을 통해 성장한 유학자들이 이 명분 없는 쿠데타에 강력히 반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의 패륜을 본 인재들, 목숨은 줘도 마음은 안 줘 / 사육신·생육신
가치관은 그 어떤 물질보다 중요하다. 세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통해 확립한 유교적 가치관을 뒤집었다. 유학자들은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권은 잡았지만 온갖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세조를 축출하려는 시도가 잇따랐고, 유학자들이 출사를 거부하는 등 숱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다.
세조 2년(1456) 6월 1일 아침. 호조참판이자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현덕왕후의 동생)의 절을 받는 상왕 단종의 가슴은 뛰었다. 『세조실록』은 이때 단종이 권자신에게 ‘긴 칼을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상왕과 세조가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에서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에게 연회를 베푸는 날이었다. 수양을 임금으로 책봉한다는 명 대종(代宗)의 고명(誥命)을 가지고 온 데 대한 답례였다. 성삼문 등은 권자신의 모친, 즉 단종의 외조모 최씨를 통해 거사 계획을 알렸다. 단종은 긴장 속에서 거병을 기다렸으나 연회가 파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실록』이 “낮인데도 어두웠다(晝晦)”고 쓰고 있는 다음날. 성균관 사예(司藝) 김질(金질)과 장인인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이 대궐로 달려가 ‘비밀리에 아뢸 것이 있다’면서 충격적 사실을 털어놓았다. 성삼문(成三問)이 김질을 찾아와 “이러한 때를 맞이해 상왕의 복립(復立)을 창의(唱義)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라며 세조를 죽이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세조는 즉시 호위 군사를 모으고 승지들을 급히 불러 좌부승지 성삼문을 꿇어 앉혔다. 세조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한참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 나서 말하겠다”고 답했다. 김질이 다시 입을 열자 성삼문은 “다 말할 것 없다”고 말을 막았다. 세칭 사육신(死六臣) 사건, 곧 상왕 복위 기도 사건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같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과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박쟁(朴쟁) 같은 고위급 무신들이 결합한 사건이었다.

명 사신 접대 연회에서 성승·유응부·박쟁이 임금 뒤에 칼을 차고 시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뽑힌 것이 기회였다. 그러나 광연전이 좁고 덥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폐지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육신은 칼에 잘린 핏빛의 대나무와 같았다. 무수히 많은 대나무와 죽순(생육신과 절개 있는 충신들을 상징)은 꾀꼬리(단종)를 향해 서있다. 대나무가 끝없이 죽순을 내는 것처럼 조선 유학자 사회에서 충신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두 동강 난 칼은 세조의 패륜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뜻한다.
『세조실록』은 “성삼문이 승정원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다시 계청하자 신숙주에게 내부를 살펴보게 하고는 드디어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자 문신들이 거사 연기를 주장했다. 『육신전(六臣傳)』은 무신 유응부가 “이런 일은 신속히 하는 것이 좋고,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된다”며 결행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는 문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세조가 농사의 작황을 살피는 관가(觀稼) 때 거사하기로 연기했다. 그러자 유응부의 우려대로 동지였던 김질이 고변자로 돌아선 것이었다. 관련자들이 잡혀왔으나 아무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육신록(六臣錄)』은 잡혀온 박팽년이 “내 임금(단종) 신하지 어이 나으리(세조) 신하리요”라고 말했고, 이개는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리까”라고 항의했다고 전한다. 유응부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서생(書生)들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라고 탄식하며 죽어갔다.

세조 일당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박팽년이 자백한 관련자만 박팽년과 부친 박중림(朴仲林), 성승·성삼문 부자, 하위지·유성원·이개·유응부·김문기·박쟁·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 등 14명이었다. 세조 일당은 관련자의 부친과 형제, 아들들을 모두 죽여 대를 끊었다. 그러나 『선조실록』 36년(1603) 4월조는 박팽년의 유복(遺腹) 손자 박비(朴斐)는 딸을 낳았다고 속이고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여종을 대신 바쳐 죽음을 면했다고 전한다.

이 사건은 세조의 즉위 명분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영조 40년(1769) 『장릉지(莊陵誌)』의 서문을 쓴 남학명(南鶴鳴)은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집집마다 『육신전』을 간수해 두고 외우다시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세조는 공자의 말대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건 직후 세조는 8도 관찰사에게 “아직도 소민(小民)들이 두려워할까 염려하니, 소민들을 경동하지 않게 하라”는 전지를 보내 백성의 소요를 두려워하는 심경을 드러냈다. 용안(龍眼)이란 무녀(巫女)가 ‘금년에 상왕께서 복위하시는 기쁜 일이 있다’는 점을 친 사실이 드러나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사회 불안이 계속되었다. 세조는 공신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래서 수백 명에 달하는 부녀자를 종친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일례로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는 정인지가, 조완규(趙完圭:김종서의 측근)의 아내 소사(召史)와 딸은 신숙주가,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와 딸은 한명회가 차지했다. 조선 중기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월정만필(月汀漫筆)』이 ‘신숙주가 노산군의 왕비 송씨를 받으려 했다’고까지 전하는 것처럼 몇 달 전만 해도 동료의 부인이거나 딸이었던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나 여종으로 삼은 이들의 행위는 패륜으로 인식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유 토지까지 나누어 가졌다. 장물을 나눔으로써 결속을 강화하는 식이었다.

세조는 그해 6월 21일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는데, 『육신록』은 ‘풀로 엮은 집이요, 사면에 가시울타리를 둘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세조 일당은 단종의 생존 자체에 공포를 느꼈다. 단종이 살아 있는 한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듬해(1457)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 간 세조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숙주는 “이유(李瑜:금성대군)가 또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종의 사형을 선창했고, 정인지가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했으니 편안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가세했다. 양녕·효령대군도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라고 가담했다. 과거의 임금을 죽이자고 청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훗날 선조 때 쓰인 『대동운옥(大東韻玉)』이 “수상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고 비판하고, 이덕형(李德馨)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서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라고 전하는 것처럼 후세까지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세조실록』은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자(李자)가 『음애일기』에서 자살설을 부정하면서 ‘여우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간사하고 아첨하는 붓 장난이니, 실록을 편수한 자들은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다’고 비난한 것처럼 조작의 혐의가 짙었다. 『병자록(丙子錄)』은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왕방연(王邦衍)이라고 적고 있고, 훗날 『숙종실록』에도 이 사실을 적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육신록』과 『단종출손기(端宗黜遜記)』는 금부도사가 나타나자 단종이 하늘을 우러러 “푸른 하늘이 이렇게 앎이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하고, “돗개무리(개·돼지)가 어느 면목으로 차마 일월(日月) 아래 다니느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금부도사가 엎드린 채 울자 공생(貢生:관가의 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랐는데, 공생은 문밖을 채 나가지 못하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고 『육신록』 등은 전한다.

세조의 찬시(簒弑:왕위를 빼앗고 죽임)는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가치관이 붕괴되었고, 왕실은 충성의 대상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육신전』의 저자 남효온(南孝溫)과 5세 신동 김시습(金時習)은 과거 응시를 거부해 생육신(生六臣)으로 남았다. 엄청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던 것이다.
특권층 1만 명의 천국, 백성들에겐 지옥이 되다/ 공신들의 나라
외적과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을 공신 책봉으로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권 창출 기여 같은 사회 내부적인 일로 공신을 책봉하면 그 자체가 사회악이다. 공신들은 반드시 특권을 요구하게 돼 있는데, 사회가 이런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조는 조선을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정조 시절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그림. 명나라 사신들도 구경하고 싶어했다는 압구정은 한명회가 자신의 호(號)를 따 세운 것이다. 간송미술관
국왕이 되는 것을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고도 한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인데 주로 개국 시조에게 사용한다. 태종도 사용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쿠데타를 건국에 버금간다고 여긴 세조는 사용했다. 문제는 공신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는 점이다. 즉위년(1455) 8월 세조는 자신의 즉위를 도운 인물들을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책봉하라면서 “내가 화가위국하여 오늘이 있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이었던가?… 그 깊은 공을 생각하건대, 진정 잊지 못하겠노라”라고 칭송했다.

그해 9월 한명회·신숙주·한확 등 8명을 1등 공신으로, 모두 46명의 좌익공신이 책봉됐다. 1등 공신은 전토(田土) 150결과 근수(수행 몸종) 7인, 반당(伴당 :사환) 10인, 노비 13구(口), 백금(白金) 5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이 주어지는 등 막대한 부상이 뒤따랐다. 세조 때 공신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공신과 그 자손들을 법 위의 특권층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공신 범죄에 대한 세조의 원칙은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는 것이었다. 본인은 물론 그 자손까지 정안(政案:인사안)에 “몇 등 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고 기록해 어떤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았다.

조선이 일반 양인(良人)은 물론 노비까지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사헌부의 감찰 기능 때문이었다. 『경국대전』은 사헌부에 대해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신들도 길에서 사헌부 관리들을 보면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4월의 사헌부는 ‘공신의 처첩(妻妾) 중 범죄를 저질렀으나 면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면서 “지금부터는 공신의 조부모·부모·아내 및 공신의 자손과 자식이 있는 첩(妾)까지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면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감찰권을 쥔 사헌부가 이 정도였으니 통제받지 않는 공신집단의 불법행위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게다가 공신 숫자가 너무 많았다. 세조 1년 12월 좌익공신의 자제·사위·수종자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했는데 무려 2300여 명이었다. 원종공신에게 줄 벼슬이 부족하자 우선 나이가 많은 자는 일 없이 녹봉만 타가는 검직(檢職)을 제수했으니 공신이 아니면 벼슬을 꿈꾸기 어려웠다. 가족까지 1만 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은 수양이 왕위를 꿈꾸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사회악이었다. 세조가 아무리 애민(愛民)과 선정(善政)을 강조해도 말장난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세조는 풍양(豊壤)에 거동해 술을 마시며 “여러 종친·재추(宰樞:대신)·공신은 나에게 있어서 쇠붙이의 자석(磁石)과 같아 간격이 없고, 불에 던져진 섶[薪]과 같아 기세가 성(盛)하여 막을 수 없고, 하늘에 대하여 땅이 생성된 것 같아서 의논할 수 없다(『세조실록』5년 2월 6일)”라고 자신과 공신은 한 몸이라고 선언했다.

세자도 공신의 자손들과 북단(北壇)에서 회맹하고 ‘자자손손(子子孫孫) 오늘을 잊지 말라’는 회맹문을 발표했다.

세조 3년(1457)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공신의 모친들을 내전(內殿)으로 초청해 잔치를 베풀자 세조는 그 아들들을 사정전으로 불러, ‘어머니가 잔치에 나와서 그 아들을 특별히 부른 것이니 각자 실컷 마시고 배불리 먹으라”고 가족처럼 대했다. 공신 사이의 결속만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세조는 궁궐에서, 또는 공신의 집으로 자주 행차해 연회를 베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북부(北部)조에 “홍윤성(洪允成)의 집은 숭례문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세조 2년(1456) 5월 경연에서 시독관(侍讀官) 양성지(梁誠之)가 “어두운 밤중에 민가 사이를 세자, 훈신(勳臣:공신)과 함께 행차하시니 신은 불가하게 여깁니다”라며 중지를 요청했으나 세조는 “밤에 공신들과 연회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공신들의 불법행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헌부나 형조에서 고소장 자체를 접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기록이 드물다.

예종 때 『세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를 고치다가 원숙강(元叔康)·강치성(康致誠)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민수(閔粹)는 관노(官奴)로 떨어졌는데 민수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한 것은 실로 재상(宰相)을 두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공신 범죄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이유를 말해준다.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정난 2등 공신 홍윤성의 불법행위가 전해진다. 홍윤성이 문 밖 시내에서 말을 씻기는 사람을 보고 사람과 말을 함께 죽였고, 늙은 할머니의 논을 빼앗고는 땅문서를 들고 와서 호소하는 할머니를 바위 위에 엎어놓고 모난 돌로 쳐서 죽이고 시체를 길가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는 광해군 때의 문신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부溪記聞)』을 인용해 더한 이야기를 전한다. 홍윤성이 곤궁할 때 30년 동안 돌봐줬던 숙부가 이조판서가 된 홍윤성에게 벼슬을 청탁했다는 것이다. 홍윤성이 논 20마지기를 요구하자 숙부가 옛일을 거론하며 항의했고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 죽였다.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도 사헌부도 받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에 갈 때 숙모는 전날부터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세조의 행차가 이르자 크게 호곡했는데, 세조가 사람을 시켜 묻자 ‘권신(權臣)과 관계된 일이라 한 걸음 사이에도 반드시 그 말 내용이 바뀔 것’이라며 직접 말하겠다고 해서 세조는 정상을 알았으나 홍윤성 대신 그 종만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공신들의 탈법이 빈발하자 세조는 재위 3년(1457) ‘공신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의(故意)로 범죄하니 금후에는 3차까지는 논죄하지 말고, 그 후에도 범법하면 승정원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무한정 불법 허용에서 3차까지 불법 허용으로 공신범죄법이 강화된 셈이다.

세조 5년(1459) 6월 원종 2등 공신인 북청부사(北靑府使) 서수(徐수)는 백성 고현(高玄) 등이 부사의 잘못을 관찰사에게 호소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때려죽였다. 형조는 참대시(斬待時:춘분~추분을 피해서 참형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으나 세조는 공신이라고 용서했다. 세조 7년(1461) 1월에는 원종 3등 공신 이백손(李伯孫)이 아내 천종(千從)이 죽자 처제 종이(從伊)와 간통했으나 종이만 처벌받았다. 원종공신이 이 정도니 정공신은 말할 것이 없었다.

세조 7년 5월에는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의 관노 화만(禾萬)이 좌익 3등 공신 황수신(黃守身)에게 부친과 조부의 땅을 빼앗겼다고 사헌부에 고소했으나 정작 옥에 갇힌 것은 화만이었다. 사헌부에서 황수신이 실제로 땅을 빼앗았다고 보고하자 세조는 “황수신은 죄가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렸다. 수양대군 시절 종이었던 좌익 3등 공신 조득림(趙得琳)은 세조 7년 종복(從僕)을 대거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오다가 제지하는 시위 군사를 구타했다.

군사가 군무를 총괄하던 진무소(鎭撫所)에 고발했으나 진무는 두려워 보고도 못할 정도였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법 아래의 존재로 끌어내린 공신들을 세조는 법 위의 존재로 끌어올렸다. 태종이 국가권력을 천명(天命)의 실현 도구로 생각했다면 세조는 공신집단의 사적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했다. 혁명아 정도전이 계구수전(計口受田: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의 이상으로 건국했던 조선이 세조의 왕위 찬탈로 공신들의 천국이자 백성들의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 예종 목숨마저 앗아갔다/불행한 종말
역사는 때로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태종과 세조는 모두 공신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나 공신과의 권력 분점(分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미래를 위해 공신 제거를 선택한 태종의 결과물이 세종인 반면 오늘을 위해 공존을 택한 세조의 결과물은 후사 예종의 의문사였다.
즉위 두 달 후에 세조는 창덕궁에서 개국·정사·좌명·정난 4공신(四功臣)들과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정난 1등공신이자 병조판서인 이계전(李季甸)이 조용히 “오늘 성상께서 어온(御온:술)이 과하신 듯하오니 청컨대 대내(大內)로 돌아가소서”라고 권하자 세조는 대로해서 “내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인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면서 관(冠)을 벗게 하고 홍달손(洪達孫)에게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리게 했다.

“네가 전에 하위지와 함께 의정부의 서리(署理)를 폐하지 말라고 했으니 너희들의 학술이 바르지 못한 것이다”고 꾸짖고는 신숙주를 시켜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좌익공신 높은 등급을 주려는데 너는 원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계전은 머리를 땅에 대고 사죄하면서 목 놓아 통곡했다. 세조는 상(床)에서 내려와 이계전과 신숙주를 잡고 술을 따라주고 춤추게 했는데, 『세조실록』은 ‘파할 무렵이 밤 2고(鼓:오후 9시~11시)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 연회 장면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 정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명분은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權臣: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계전을 끌어내린 이유는 의정부 서리(署理)를 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라고 하는데, 집행부서인 육조(六曹)에서 의정부에 먼저 보고하는 체제다.

반대로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는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의 권한이, 육조 직계제는 국왕의 권한이 강하게 돼 있었다. 개국 초의 의정부 서사제를 태종이 재위 14년(1414) 육조 직계제로 바꾸었는데, 세종이 재위 18년(1436) 다시 의정부 서사제로 바꾸었다. 피의 숙청으로 왕권에 대한 위협이 없었고, 영의정 황희(黃喜)가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를 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세조 영정: 세조는 불교에 심취해 불경을 간행하는 간경도감에도 대납권(代納權)을 주었다. 해인사 소장
세조가 즉위 직후 의정부 서사제 폐지와 육조 직계제 부활을 명하자 병조판서 이계전과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 등이 반대했는데, 세조는 주창자인 하위지의 관을 벗기고 곤장을 친 다음 사형에 처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권력을 강화하고 싶은 것은 세조뿐만 아니라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조는 태종과 달리 공신들도 우대하고 왕권도 강화하려는 모순된 길을 택했다.

정통성 문제를 안고 있던 세조는 끝내 공신들을 버릴 수 없었다. 세조는 공신들에게 정치적 특권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이득까지 나누어주었다. 공신전(功臣田)과 이른바 난신(亂臣)들의 처첩·노비와 전토를 준 것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보상이 대납권(代納權)이었다. 백성들에게 부과된 전세(田稅)와 공납(貢納)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代納)인데, 적은 경우가 두 배이고 서너 배로 걷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납을 방납(防納)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수령·아전과 짜고 백성들의 직접 세금 납부를 막기 때문이다. 현전하는 성종 때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대납자는 장형 80대와 도형 2년에 영구히 관리로 서용하지 않고, 대납을 허용한 수령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임금의 명령을 어긴 율)로 논한다’고 대납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인 세조 7년(1461) 1월 호조는 “『경국대전』에 공물은 쌍방의 정원(情願)에 따라 대납하되 수령이 정한 값에 의하여 수급(收給)한다”고 조건부 허용임을 밝히고 있다. 백성들과 대납자 쌍방이 원하면 대납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원 세금보다 몇 배를 더 내는 대납을 원할 백성은 없었지만 공신·종친들의 경제적 이득을 보장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예종실록』 1년 1월자는 “처음에 세조께서 무릇 민간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을 타인들이 경중(京中:서울)에서 선납하도록 허락하고, 그 값을 민간에서 두 배로 징수하였는데, 이것을 대납이라 한다”고 전한다.

같은 기록은 “대납하는 무리들이 먼저 권세가에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에게 청하게 하면서 후한 뇌물을 주면 수령들은 위세도 두렵고 이익도 생각나 억지로 대납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고 전한다. 대납제는 공신들에게 고을 전체 세금의 몇 배의 이익 착취를 법적으로 허용한 제도였다.

『세조실록』에는 대납의 고통에 대한 호소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경국대전』대로 ‘백성의 정원(情願)에 따르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그 폐단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납 금지였으나 세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조 7년(1461) 3월 세조는 “근자에 효령(孝寧)대군과 충훈부(忠勳府:공신 관할 부서)에서 공물 대납 전에 그 값을 먼저 거두게 해 달라고 청했다”고 밝혔다. 세금을 선납하고 후에 거두는 대납도 백성들의 고통이 막심한데, 먼저 서너 배의 세금을 받아 그중 일부를 떼어 세금으로 내겠다는 후안무치의 청이었다.

세조는 쿠데타를 거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즉위했다면 성군(聖君)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성들의 수령 고소를 허용하고 자주 분대(分臺:사헌부 감찰)를 보내 수령의 탐학을 조사하게 한 것은 그의 애민(愛民)사상의 발로다. 그러나 그는 태생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재위 13년(1467)에 설치한 원상제(院相制)는 쿠데타 명분인 왕권 강화책마저 실패로 돌아갔음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백옹(白옹)·황철(黃哲)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원상제의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집현전과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한 후 권한이 대폭 강화된 승정원에 실세 공신들이 출근해서 업무를 보았으니 왕권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세조가 원상제를 실시한 것은 공신들의 지지 없이 세자가 왕위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종 즉위 직후 원상은 앞의 세 명 외에 박원형(朴元亨)·최항(崔恒)·홍윤성(洪允成)·조석문(曺錫文)·김질(金질)·김국광(金國光) 등 9명으로 늘어난다.

세조는 또한 죽기 6개월 전인 재위 14년(1468) 3월에는 “분경(奔競:인사청탁)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에 설치한 것”이라며 분경을 허용했다.

사실상 관직 매매를 허용한 것이다. 세조에게 단종과 사육신 등은 영원한 콤플렉스였다. 세조는 재위 3년 조석문에게 내려주었던 단종의 후궁 권중비(權仲非)를 재위 10년(1464) 방면했다. 전 군주의 후궁을 신하의 노리개로 내려준 데 대한 뒤늦은 후회였을까? 한 해 전인 재위 9년(1463)에는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이른바 난신(亂臣)의 처첩과 딸들을 방면하고 다른 노비로 충당케 했다. 사망 넉 달 전인 1468년 5월에 세조는 술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가 잠저로부터 일어나 창업의 임금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형벌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한 가지 일이라도 원망을 취함이 없었겠느냐? 『주역(周易)』에 ‘소정(小貞)은 길(吉)하고 대정(大貞)은 흉(凶)하다’고 하였다.”

『주역』 둔괘(屯卦) 구오(九五)에 나오는 이 효사(爻辭)에 대해 왕필(王弼)은 『주역주(周易注)』에서 ‘직은 일에서는 곧으면 길하지만 큰일에는 곧아도 흉하다’고 설명했다. 별로 좋지 않은 효사로서 세조가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연려실기술』은 한명회에 대해 “만년에 권세가 떠나자 슬퍼하며 적막하게 탄식을 하곤 했다”고 전하고 있고 『해동악부(海東樂府)』는 신숙주에 대해 “59세로 임종할 때 한숨 쉬며, ‘인생이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고 마는가’라고 탄식했으니 후회하는 마음이 싹터서 그러하였다 한다”고 전한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은 즉위 직후 분경을 금지하고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宰樞:대신)를 막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한다”고 선포했다가 재위 1년 남짓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잘못된 쿠데타로 만든 그릇된 체제의 유산이 그 후계자에게 칼을 겨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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