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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 선조

by 싯딤 2010. 1. 18.
선조,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 방계 승통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 제목은 난죽도(蘭竹圖).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절차의 투명성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대통(大統)처럼 최고 권력을 잇는 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에 혼란이 온다. 당사자는 정통성 부족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는 정국 운영에 큰 부담이 된다. 호문(好文)·호학(好學)의 군주 선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투명했던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선조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가 임금이 되리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종의 7남인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초)의 셋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태어나기 1년 전(1551) 명종은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에게서 적자(嫡子) 이부(이 부)를 낳았다. 이부는 명종 12년(1557)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가 있는데 중종의 수많은 서손(庶孫) 중 한 명인 하성군(河成君) 이균(李鈞:선조)에게 왕위가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명종 18년(1563)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하성군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김시양(金時讓)은 『부계기문(부溪記聞)』에서 순회세자가 죽자 애통해하던 명종이 “내가 어찌 통곡하겠는가? 을사년에 충현(忠賢)들이 죄도 없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중지시키지 못했으니 내 집안에서 어찌 대대로 군왕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김시양은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먼 훗날까지 신하를 울릴 만하다”고 칭찬했다. 명종이 실제 이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명종은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계획을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부계기문』이나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등은 명종이 하성군을 후사(後嗣)로 점지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명종이 왕손들에게 “너희들의 머리 크기를 알려 한다”면서 익선관(翼善冠)을 써 보라고 명했는데, 나이가 가장 어렸던 하성군이 관을 받들어 돌려드리면서 꿇어앉아 “이것이 어찌 상인(常人)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자 기특하게 여긴 명종이 왕위를 전할 뜻을 가졌다는 것이 『부계기문』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광해군일기』에 실려 있는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의 행장(行狀)에도 나온다. 하성군이 익선관 쓰기를 사양하자 명종이 경탄하면서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종은 하성군을 후사로 지명한 적이 없다. 『선조실록』 총서(總序)는 명종이 재위 20년(1565) 와병 중일 때 하성군을 후사로 결정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명종이 아프자 대신들이 조카 중에서 후사를 미리 선정하자고 청했고 “임금이 드디어 하성군에게 의약(醫藥) 시중을 들라고 시키고 따로 명을 내려 선비를 사부(師傅)로 삼아 가르쳐 이끌도록 했다”는 것이다. 의약 시중을 시키고 사부를 두어 공부시킨 것이 하성군을 후사로 삼으려는 의사였다는 뜻이다.

반면 『명종실록』의 기사는 다르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사부를 붙여 공부를 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재위 20년이 아니라 21년이었으며 그 이유도 달랐다. 성종의 손자 경양군(景陽君) 이수환(李壽環) 부자가 재산 문제로 서처남(庶妻男)을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하고, 청릉수(淸陵守) 이수하(李壽賀)가 창기를 끼고 놀다가 충의위(忠義衛) 이균(李鈞)를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명종은 “종친이 대개 무식해 심지어 중죄까지 범하니 내가 심히 통탄한다”며 사부를 뽑아 왕손을 교육시키라고 명한 것이다. 이때 사부의 교육 대상은 하성군뿐만 아니라 풍산도정(豊山都正) 이종린(李宗麟), 하원군(河原君) 이정(李정), 전(前) 하릉군(河陵君) 이인(李인)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넷 중에서 후사를 선택하려는 의도였다. 나이가 제일 어렸던 하성군이 가장 불리했지만 그에게는 인순왕후의 총애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율곡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명종 20년의 와병 때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전해 주고 있다. 이이는 “그해 9월 임금이 편찮으신데 순회세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국본(國本:세자)이 정해지지 않아 인심이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이 국본을 정하자고 청했으나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명종은 후사를 세우자는 대신들의 청을 거부했다. 『부계기문』은 명종의 와병 때 인순왕후와 이준경이 하성군을 명종의 후사로 결정하고 하성군의 잠저(潛邸)를 호위시켰다면서 “명종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전해 준다. 이이도 『석담일기』에서 “임금의 병이 위중해지자 중전(中殿:인순왕후)이 대신들의 처소에 하성군의 이름을 쓴 봉서(封書) 한 통을 내리고 대신들만 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이는 “대개 중전이 임금의 뜻(上意)을 받들어 임금이 돌아가신 후 하성군을 세우려는 것이었다”고 쓰고 있지만 명종은 그런 뜻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병에서 회복된 명종은 자신도 모르게 하성군이 후사로 거론된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 명종은 대신들에게 “내가 지금 황천과 조종의 말 없는 도우심에 힘입어 위기에서 소생했으니 국본의 탄생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이제 다시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부계기문』 재위 20년 10월 10일)고 못 박았다. 하성군의 왕위는 물거품이 된 것이다.

명종은 후사를 낳지 못했고 재위 22년(1567) 6월 다시 병이 들었다. 6월 27일 갑자기 병세가 위중해졌는데 이 날짜 『부계기문』은 “임금은 신음을 그치지 않았고 말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환관 10여 명이 좌우에서 부르짖어 울 뿐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미 유언을 남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핫라인이 가동되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명종이 위독해지자 이준경 등이 중전에게 “일이 이미 어찌 할 도리가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직의 대계를 정해야 합니다. 임금께서 고명(顧命:유명)을 남기시기가 불가능하시니 마땅히 중전께서 지휘하셔야 합니다”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선조실록』은 “이준경이 울면서 중전에게 대계(大計)를 청하자 중전이 ‘을축년(명종 20년)에 정한 바대로 하려고 한다’고 전교했다”고 쓰고 있다. 하성군으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부계기문』은 도승지 이양원(李陽元)이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장관을 불러서 고명을 함께 들어야 한다고 청하자 이준경이 “내가 수상으로서 유교(遺敎)를 받드는 것인데 왜 삼사의 장관을 부르려 하는가”라고 꾸짖자 이양원이 실색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하성군을 후사로 삼는다는 명종의 유교는 없었다. 이양원은 명종의 유언도 없이 하성군이 후사로 책봉되는 데 이의를 제기한 셈이었다. 『부계기문』은 선조가 즉위 후 이양원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양원이 만약 성명(聖明)의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면 일족(一族)이 전멸되는 주륙(誅戮)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왕위 계승 절차를 투명하게 하려던 이양원의 행위가 잘못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성군 이균은 명종의 유언도 없는 상태에서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공모에 의해 후사로 결정되었다. 명종이 사망하자 이준경 등은 도승지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注書) 황대수(黃大受) 등을 덕흥군의 집으로 보내 후사를 모셔오게 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승정원 주서 황대수가 이양원에게 “어느 군(君)을 모셔올 것인지 왜 대신에게 물어보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이양원이 “이미 정해진 일이니 물을 필요가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전해 준다. 황대수가 “비록 정해졌다 해도 반드시 대신의 말을 듣는 것이 옳소”라면서 대신에게 “덕흥군의 몇째 아드님을 맞아 와야 합니까”라고 묻자 대신은 “셋째 아들 하성군이시다”고 답했다. 대신은 물론 이준경이다. 이양원 등이 덕흥군의 저택에 갔을 때 위사(衛士)들이 아직 모이지 않아 잡인(雜人)들이 들락거리는 것도 막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때 16세의 하성군은 모친상 중이어서 울면서 사양하다가 궁중으로 들어왔다.

『선조실록』은 “이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몰려들어 수레 뒤를 따랐는데,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한 두루마리나 되었다”고 전한다. 임금의 수레를 호종했으므로 녹공(錄功:공신으로 기록됨)될 것을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준경이 “예전에 결정된 일인데 신하가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라면서 태워 버리라고 재촉했다. 이렇게 선왕의 유명도 없이 중종의 서손(庶孫) 하성군은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공모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선왕의 유명(遺命)도 받지 못한 방계(傍系) 승통이었으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여주다/ 정여립 사건
최고 지도자의 콤플렉스를 씻는 유일한 방법은 성공한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콤플렉스에 허우적대다 실패한 정치가로 끝나기 마련이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선조는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사림의 지지를 받았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밖으로 표출되면서 무수한 비극이 발생했다.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북 진안 죽도의 전경. 죽도에 서실이 있어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은 성리학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충북 진천에 있는 정철 신도비각.
선조 1년(1568) 사림의 영수 퇴계 이황(李滉)은 송나라 정이(程 이)의 ‘사물잠(四勿箴)’과 주희(朱熹)의 글·그림 등에 자신의 글과 그림을 덧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선조에게 올렸다. 선조는 이를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좌우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겠다”는 선조의 말에 이황은 드디어 성리학이 명실상부한 조선의 국시(國是)가 되었다고 여겼다. 성학(聖學)이 성리학이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사림의 지지를 획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림은 곧 분열되었다. 선조 8년(1575:을해년) 삼사(三司)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郞) 문제로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동인과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갈렸는데, 이것이 을해당론(乙亥黨論)이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부 건천동(乾川洞)에,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에 붙은 당명이다. 율곡 이이(李珥)는 두 당을 화합시키려는 조제론(調劑論)을 제기했으나 동인들에게서 거듭 공격을 받고 본의 아니게 서인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 초기에 선조는 서인 편을 들었다. 이황이 재위 3년(1570) 사망한 후 이이가 사림의 영수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재위 16년(1583:계미년) 이이를 공격하는 동인 허봉(許 봉)·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을 모두 귀양 보내 ‘계미삼찬(癸未三竄:계미년에 세 신하를 귀양 보내다)’이란 말까지 낳을 정도로 서인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듬해(1584:갑신년) 이이가 사망하자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임금이 이이를 융성하게 대접하다가 사망한 후에는 은혜와 예절이 박절해졌다”고 적고 있듯이 생각이 달라졌다. 김시양(金時讓)의 『자해필담(紫海筆談)』은 재위 18년(1585) 선조가 대사헌 구봉령(具鳳齡)에게 “(귀양 간) 세 신하가 이이를 큰 간신(巨奸)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고 전한다. 구봉령은 “‘이이가 비록 간사하지는 않지만 경솔한 사람이며 그에게 나라를 맡기면 나라가 잘못될 것’이라고 답했는데, 그 후 오래지 않아 귀양 간 세 신하가 다 사면되었다”고 쓰고 있다.

선조의 마음이 변한 것을 간파한 동인은 공세에 나섰다. 홍문관에서 심의겸을 공격하자 선조는 “논한 바가 너무 옳아 더할 나위 없다”고 대답하고는 직접 전교를 내려 “국권을 마음대로 천단했다”면서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명종의 유조도 없었던 하성군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은 이렇게 조정에서 쫓겨났다. 인순왕후는 선조 8년(1575) 이미 사망한 후였다.

동인이 정권을 잡자 당적을 바꾸는 인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 홍문관 수찬(修撰) 정여립(鄭汝立)이 대표적이었다. 선조 16년(1583) 10월 이조판서 이이는 ‘정여립을 여러 번 천거해도 선조가 매번 낙점을 거부한다’면서 “혹 중간에 참소라도 있으신 것입니까?”라고 항의할 정도로 정여립을 아꼈다. 그러나 이이 사망 뒤 동인으로 돌아선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 『부계기문(<6DAA>溪記聞)』은 선조가 정여립의 면전에서 “정여립은 오늘의 형서(邢恕)로구나”라고 비판하자 정여립이 성난 눈으로 물러갔다고 전한다. 형서는 스승인 송(宋)나라 정이를 비판했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선 선조가 사간원 사간 한옹(韓<9852>) 등을 만나 ‘오늘날의 형서’ 운운한 것이라고 조금 달리 전한다. 이이의 천거를 대부분 수용했던 선조는 정여립에게는 내내 비판적이었다.

이런 와중인 선조 22년(1589)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狀啓)가 도착하면서 유명한 정여립 사건이 시작된다. 선조는 야밤임에도 급히 3정승·6승지 등을 불러 모았는데 검열(檢閱) 이진길(李震吉)만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정여립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이 날짜 『선조실록』은 “황해도 안악(安岳)·재령(載寧) 등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을 의논하고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 등으로 나눠 보냈는데 전라도의 정여립이 괴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모 고변은 황해도 감사가 했는데 그 괴수는 전라도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혹이었다.

『연려실기술』은 당초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과 안악군수 이축(李軸)이 명망이 있던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을 끌어들여 감사에게 연명으로 보고했다고 전한다. 동인 정권에 의해 사노(私奴)로 전락한 송익필(宋翼弼)의 사주설도 있듯이 의혹투성이의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동·서인은 각각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에서 동인의 기록엔 푸른 점(點)을, 서인의 기록엔 붉은 점을 찍어 표시했을 정도로 당파 간 입장 차가 뚜렷했다. 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면 정여립의 사상을 먼저 추적해야 한다. 안방준(安邦俊)은 ‘기축기사(己丑記事)’에서 “정여립이 ‘유비(劉備)가 아니라 조조(曹操)를 정통으로 삼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직필이며 유비를 정통으로 삼은 주자(朱子)가 틀렸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定主)이 있겠는가…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王 촉:연나라에 저항해 자결한 제나라 충신)이 죽음에 임해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안방준은 “정여립의 패역론이 이렇게 심했는데도 사람들이 다 설복당했다”며 “조유직(趙惟直)·신여성(辛汝成) 등은 ‘우리 선생의 이런 의논은 실로 고금의 선유(先儒)들이 말하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비판했다. 이로 미뤄 정여립이 당시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을 가졌던 것과 이런 사상에 그의 지우들이 공감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여립이 전주·금구·태인 등의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매월 15일 활쏘기를 연습한 것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선조 20년(1587) 왜구가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가 왜구 격퇴에 나섰듯이 비밀 조직도 아니었다. 명재 윤증(尹拯)이 ‘황신(黃愼)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鄭언信)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書室)이 있는 진안 죽도(竹島)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鄭玉南)만을 잡아와 의혹은 증폭되었다. 훗날 남하정(南夏正:1678~1751)은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죽이고선 자살했다고 아뢰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 선조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 파악에 주력해야 했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와 정여립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겹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선조실록』은 “(정여립이) 역적의 괴수가 되자 서인은 서로 축하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동인은 간담이 떨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서인 강경파 정철(鄭澈)이 “역적을 체포하고 경외(京外)에 계엄을 선포하자”는 비밀 차자(箚子:약식 상소문)를 올리자 선조는 그 충절을 칭찬하고 사건 조사를 담당하는 위관(委官:국문 수사 책임자)으로 삼았다.

사실상 동인에 대한 대량 살육을 허용하는 부월(<9207>鉞:도끼)을 준 셈이었다. 진상이 모호한 사건의 조사를 정적들이 맡았으니 가혹한 고문이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좌의정 정언신, 부제학 이발(李潑)·이길(李 길) 형제, 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정개청(鄭介淸) 등 저명한 사대부들이 아무런 물증도 없이 죽어갔다. 조카 이진길은 불복하다가 매 맞아 죽는 등 연루자는 수없이 많았다.
북인들이 작성한 『선조실록』은 “이발·이길·백유양 등은 정철이 낙안(樂安)에 사는 선홍복(宣弘福)을 끌어들여 죽게 했다”고 적은 것처럼 동인은 사건 자체를 서인의 정치공작으로 단정했다. 이 사건으로 동·서인은 서로 적당(敵黨)이 되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수많은 전란의 징후, 무능한 정권은 눈을 감았다/임진왜란 전야
유능한 지배층과 무능한 지배층을 가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현실인식 문제다. 유능한 지배층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지만 무능한 지배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렇게 머릿속의 바람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동안 나라는 깊숙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혼간지(本願寺) 자리에 오사카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총지휘했다.
선조는 재위 8년(1575) 김효원(金孝元)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좌천시켰다. 당쟁을 유발해 조정을 시끄럽게 했다는 견책이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8년 10월 1일자는 이조판서 정대년(鄭大年)·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 등이 “경흥은 극지 변방으로 오랑캐 지역에 가까우므로 서생(書生)이 진수(鎭守)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고 반대했다고 전해 준다. 인사를 담당하는 두 판서가 건의하자 선조는 김효원을 조금 내지인 부령(富寧)부사로 보내고, 당쟁의 다른 당사자인 심의겸(沈義謙)도 개성유수로 내보냈다. 두 판서가 ‘경흥이 오지이므로 서생이 진수하기 마땅치 않다’고 계청한 것은 조선 지배층의 인식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문신이 무신을 지휘하는 도체찰사 제도가 법제화된 나라에서 서생 운운하며 변방 근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체가 지배층의 의무를 망각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해선 현재까지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느닷없이 부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통신사 부사(副使)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란 보고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둘은 결국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줄 몰랐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세종 25년(1443) 변효문(卞孝文)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이래 무려 150년 만인 선조 23년(1590) 3월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것 자체가 일본이 공언(公言)하는 침략 의사가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케(宗義調) 부자에게 명나라를 공격할 길을 조선에 빌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과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오게 하라는 ‘국왕 입조(入朝)’의 명령을 내렸다.

소 요시시케는 도요토미가 조선통신사를 직접 만나면 두 개의 요구조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리라는 생각에서 조선에 거듭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은 소 요시시케에게 선조 20년(1587) 2월 흥양(興陽)을 침범해 녹도보장(鹿島堡將) 이대원(李大源)을 전사시킨 왜구 두목과 조선인 사화동(沙火同)을 압송하고, 붙잡아 간 조선인들을 송환시키면 통신사를 파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화동은 고된 부역과 공납(貢納)으로 바치는 전복(全鰒)의 수량이 지나치게 많다면서 일본으로 귀화해 왜구를 손죽도로 안내한 조선 백성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2년(1589) 7월조는 일본에서 긴시요라(緊時要羅) 등 3인의 왜구와 사화동, 그리고 조선 포로 김대기(金大璣) 등 116명을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대마도주는 조선통신사 파견에 사활을 건 것이었다. 그래서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그 대가로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정사를 서인 황윤길, 부사를 동인 김성일로 삼은 것은 선조 나름의 탕평책이자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파 차이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다. 황윤길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김성일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는 유학자의 시각으로 일본을 얕보았다.

왼쪽 사진은 왜군 장수의 황금가면(위)과 전투 때 입은 갑옷. 오른쪽 사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통신사 일행은 수많은 고생 끝에 4개월 만인 1590년 7월 말 교토(京都)에 들어갔으나 도요토미는 통신사를 즉각 만날 생각이 없었다. 도요토미가 동쪽 정벌에 나갔다는 소식에 하염없이 한 달 반가량을 더 기다렸으나 도요토미는 9월 초 귀경한 후에도 궁전인 취락정(聚樂亭)을 수리한다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통신사 일행 중에 도요토미의 측근 호인(法印) 등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빨리 만나고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김성일은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와서는 한결같이 예법대로 해야 한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겨우 도요토미를 만나게 되었다. 귀국한 사신에게서 상황을 자세히 들은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도요토미가 안고 있던 어린애가 옷에 오줌을 싼 이야기를 전하면서 “(도요토미는) 모두 제멋대로이고 매우 자만(自滿)하여,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고 적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도요토미의 국서(國書)도 문제투성이였다. ‘조선국왕 전하(殿下)’라고 써야 할 것을 ‘합하(閤下)’라고 쓰고, 조선의 선물을 ‘예폐(禮幣)’라고 써야 하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예물이란 뜻의 ‘방물(方物)’이라고 쓴 것 등이 그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겠다면서 조선이 군사를 내어 도우라는 구절이었다.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겐소(玄蘇)에게 강하게 항의해 몇 구절을 고쳤다고 전하면서 “황윤길 등은 ‘겐소가 그 뜻을 달리 해석하는데 굳이 서로 버티면서 오래 지체할 것이 없다. 빨리 돌아가자’고 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두 사람은 사행(使行) 기간 내내 서로 다투었다. 황윤길이 무기(武氣)가 충만한 일본의 숭무(崇武) 분위기에 겁을 먹었다면, 김성일은 오랑캐의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얕보았다. 두 사람은 선조 24년(1591) 정월 귀국하는데 황윤길이 도요토미에 대해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고 달리 보고했다.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보고 내용이 상반될 경우 정사(正使)의 말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집권 동인은 반대 당파의 말이라고 무시했다. 도요토미의 국서에도 명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통신사가 귀국할 때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회례사(回禮使)로 따라왔는데 이들도 ‘내년(임진년)에 침략하겠다’고 공언했다. 『선조수정실록』 24년(1591) 3월조는 일본 회례사를 만난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상국(上國)을 침범할 것이다”는 회례사의 발언을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조정은 ‘인심을 소란시킨다’면서 오억령을 심희수(沈喜壽)로 갈아치웠다. 자신이 들은 정보를 사실대로 보고했다고 선위사를 갈아치운 것이다. 조선 지배층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의 상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국왕 선조는 침략 경고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때 왜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임금이 비변사에 명령해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고 적고 있다. 선조는 전쟁 대비에 나섰던 것이다. 이때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은 “이순신이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水使)로 발탁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선조 24년(1591) 2월인데, 이순신의 발탁에 대해 사간원은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선조는 “이러한 때에 상규(常規)에 얽매일 수 없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말라”고 막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1592) 2월 1일자는 “대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여러 도에 보내 병비(兵備)를 순시하도록 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역시 선조가 전쟁 대비책을 지시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이 4월 초하루에 사제(私第:집)로 찾아왔기에 “머지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는가”라고 묻자 신립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임란 발발 열이틀 전이었다.

류성룡이 “지금은 왜적이 조총(鳥銃)과 같은 장기(長技)까지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요”라고 거듭 말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일축했다. 서생은 변방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문신, 쳐들어와도 아무 걱정 없다고 호언하는 무신,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여기는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에 도요토미는 자신의 공언대로 400여 척의 배를 띄워 보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요동 파천’ 논란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장서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 희생은커녕 군역(軍役)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동래부순절도 : 동래부사 송상현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하다 성민(城民)들과 함께 전사했다. <육군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제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였다. 외침(外侵)이 있을 경우 수령들은 군사를 이끌고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대기하다가 조정에서 파견되는 경장(京將)의 지휘를 받아 싸우는 제도였다. 군사를 총 집결시켰다가 경장의 지휘로 단번에 적을 섬멸하려는 계책이지만 반대로 패전하면 더 이상 대책이 없다는 결점이 있었다.

이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임란 6개월 전인 선조 24년(1591) 10월 좌의정 류성룡은 진관제(鎭管制)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류성룡은 진관제에 대해 “앞뒤가 서로 응하고 안팎이 서로 보완되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선조수정실록』 24년 10월 1일)”고 말했다. 진관제는 감사와 병사가 주재하는 주진(主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주관하는 거진(巨鎭), 고을 수령이 관할하는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몇 개의 제진이 거진을 중심으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체제다. 제승방략처럼 일거에 적을 섬멸하지는 못해도 한 진관이 무너져도 다른 진관이 방어하기에 일거에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은 경상감사 김수(金<775F>)가 ‘제승방략이 시행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다’고 반대해 채택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모든 변화가 거부되는 상황에서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새벽 400여 척의 적선(賊船)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선조수정실록』은 “병사(兵使)가 ‘적의 배가 400척이 채 못 되는데 한 척의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니 대략 계산하면 약 만 명쯤 될 것입니다’라고 장계했고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고 전한다. 중종 때의 삼포왜변(1510)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보다 조금 큰 국지전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군 1만8000,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 2만2000,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3군 1만1000 명 등 도합 16만8000여 명의 대군이었다. 4월 14일 부산진성의 수군첨절제사 정발(鄭撥)은 1000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인근 다대포진도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전사하면서 함락되었고,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는 것)를 요구하는 고니시에게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면서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

조선 수군이 훈련하는 장면을 그린 수군조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는 류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그의 천거로 신립(申砬)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았다. 선조는 신립에게 보검(寶劍)을 하사하며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모두 처단하라”고 격려했지만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신립이 대궐 문 밖에 나가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라고 전하는 대로 군사도 없었다. 중종 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일반 백성들만 납부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이 주요인이었다. 지배층의 군역이 면제된 판국에 피지배층이 목숨 걸고 체제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류성룡이 모집한 장사(壯士) 8000명을 신립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렇게 급모한 군사들이 조선 병력의 전부였다. 고니시의 1군과 가토의 2군은 서울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지름길인 새재(鳥嶺)로 모여들었다.

조선에는 좋은 기회였으나 『선조실록』은 “제장(諸將)들이 모두 새재의 험준함을 근거로 적의 진격을 막자고 했으나 신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신립은 기병(騎兵)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들판을 전지(戰地)로 택한 것인데 4월 27일 탄금대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네 차례나 격퇴했으나 끝내 패전하고 자결했다. 충주에 무혈 입성한 고니시와 가토는 서울 진공 계획을 짰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자는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의 피란)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라고 전한다. 패전 보고를 받고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가 가장 먼저 도주를 계획했다는 뜻이다.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우승지 신잡(申<78FC>)은 8순 노모가 있다면서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대했고, 홍문관 수찬(修撰) 박동현(朴東賢)은 “전하의 연(輦)을 멘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라면서 통곡했다. 그러자 얼굴빛이 변한 선조는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선조의 존재 자체가 임란 극복의 걸림돌이 되었다.

선조의 파천 발언이 알려지자 도성에는 큰 소동이 일었다. 선조는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진정시켰지만 박동량(朴東亮)은 『기재사초(寄齋史草)』에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모두가 도성 결전을 주창하는 가운데 영의정 이산해가 “예전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파천을 지지하고 나섰다. 『선조실록』은 “모두 웅성거리면서 (파천의) 죄를 산해에게 돌렸다”고 적고 있는데 선조는 이산해의 찬성을 근거로 파천을 결정했다. 대신과 승지들이 빨리 세자를 세워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망설이던 선조는 겨우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데 찬성했다.

선조 일행은 4월 30일 새벽 비가 쏟아지는 궁궐을 나섰다. 그날 『선조실록』은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라고 전하고, 윤국형(尹國馨)은 『문소만록(聞韶漫錄)』에서 “저물어서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니 밤비가 죽죽 내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잤다. 임금이 드실 음식도 난리를 일으킨 군사들(亂卒)에게 빼앗겼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체제는 이미 붕괴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백성들의 동향이었다. 류성룡은 ‘전쟁 후의 일을 기록하다(記亂後事)’라는 글에서 “거가(車駕: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나서자 난민들이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는데, 이 두 부서는 공사(公私) 노비들의 문서가 있는 곳이다”라고 전하고 있고, 『임진록』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 류성룡은 “(백성들이) 또 내탕고(內帑庫: 왕실 재산 관리하던 곳)에 들어가 금백(金帛)을 약탈했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도 불태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면서 “다 적이 이르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류성룡은 “처음 일본군이 입성했을 때는 서울 백성들이 다 도주했으나 오래지 않아 차차 돌아와 마을과 시장이 가득 차서 적(賊)과 서로 섞여서 장사했다”면서 “적이 성문을 지키면서 우리 백성들에게 적첩(賊帖)을 휴대하게 하고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전해 준다. 백성들이 일본이 발행한 새 신분증을 가지고 살아갔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의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君者, 舟也, 庶人者, 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나라를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은 다름 아닌 선조였다.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자는 선조가 아침에 동파관(東坡館)에서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이모(李某: 이산해)야 류모(柳某: 류성룡)야!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마음속의 말을 다 말하라”고 울부짖었다고 전한다. 이는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행위이자 발언이었다. ‘어디’가 압록강 건너 요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도승지 이항복은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명나라로 가서 호소할 수 있다’고 제안했고, 윤두수는 ‘지세가 험한 함경도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으나 선조의 뜻은 곧바로 요동으로 도주하는 데 있었다.

이때 좌의정 류성룡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朝鮮非我有也: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라며 월경(越境)을 반대했다. 선조가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말했으나 류성룡은 거듭 안 된다고 반대했다. 내부란 명나라로 도주해 붙겠다는 뜻이었다. 백성은 도성에 불을 지르고 국왕은 도주에 가장 큰 뜻이 있는 조선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밑바닥에서 회생의 싹이 트고 있었다.
신분·조세제도 개혁, 民草들이 전쟁에 나서다/賤·作米法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민심 획득의 요체는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제도와 관습의 개혁이다. 조선은 신분제와 조세제도의 모순 때문에 백성의 버림을 받았다. 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조선은 멸망할 것이었다. 류성룡이 제정한 면천법과 작미법으로 백성의 마음이 돌아오면서 조선은 바닥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깊은 시름 하던 차에(95Χ140㎝)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 115척을 궤멸시켜 ‘조선 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덕택에 곡창 지대인 호남을 확보하게 돼 일본군은 멀리 본토에서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 고달픈 상황에 빠졌다. 우승우(한국화가)
신립의 패전은 조선 정규군의 붕괴를 뜻했다. 임진왜란의 생존자인 박동량(朴東亮)은 『기재사초(寄齋史草)』에서 “처음 임금이 서울을 떠날 적에 선비와 서민이 모두 나라의 형세가 반드시 떨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유식한 벼슬아치들도 결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인심이 이미 떠나 버려 모두 책망할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조선이 어떻게 16만 명의 전문 싸움꾼으로 구성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다. 의병 봉기와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의 분전, 그리고 명군(明軍)의 참전이다. 선조 일행이 도성을 버리고 북상하자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이 어떻게 의병이 될 수 있었을까? 선조는 오직 압록강을 도강해 중국으로 건너가기에 부심했다. 재위 25년(1592) 5월 3일 윤두수가 “성상께서 요동으로 건너가실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치첩(雉堞:성가퀴)을 지키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선조는 “여기서 용천(龍川:압록강 부근)이 얼마나 남았는가?”라고 답했다. 선조는 망명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의정 최흥원이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명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하자 선조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선조실록』 25년 6월 13일)라고 답했다.

선조는 그해 5월 윤두수에게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라고도 물었다. 조선 백성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횡행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온 후로는 인심이 무너져 지나는 곳마다 난민이 곧바로 창고에 들어가 곡물을 약탈했다”고 전한다. 백성은 선조와 사대부에게 파산선고를 내렸다. 이런 상태에서 선조 25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조선은 곧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 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가 이끄는 115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의 주력을 궤멸시키면서 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이 안전하게 됨으로써 일본군은 본토에서 직접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선조 26년(1593) 1월에는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조명(朝明) 연합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벽제관(碧蹄館)에서 패전하는 바람에 기세가 곧 꺾였으나 전황은 달라졌고 선조도 그해 10월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전세의 역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이었다. 의병 기의(起義)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림의 솔선수범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이 주도한 개혁 입법이었다. 임란 이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의령(宜寧) 유생 곽재우(郭再祐)였다.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도 곧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들은 모두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들이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2000명, 정인홍은 3000명, 김면은 5000명으로 경상우도의 의병만 1만 명에 달했다. 의병을 일으킨 사림들은 먼저 사재를 털어 무기와 식량을 마련하고 의병소(義兵所) 또는 의진소(義陣所)·의승소(義勝所)라고도 불렸던 지휘부를 구성해 체계를 마련했다.

정인홍과 김면 휘하에서 활동했던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은 “온 경내(境內) 사자(士者)들이 모여 거사를 의논했다…경내 인민을 모두 계산해 그 요부(饒富:부유함) 정도에 따라 군자(軍資)를 내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사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나면서 의병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류성룡은 개혁 입법으로 의병 활동을 북돋웠다. 류성룡은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에서 “출신(出身:과거 급제 후 출사하지 못한 사람)·양반(兩班)·서얼(庶孼)·향리(鄕吏)·공천(公賤)·사천(私賤)을 논할 것 없이 군사가 될 만한 장정은 사목(事目: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隊伍:군대)로 편성하라”고 명했는데 과거 군역에서 면제되었던 양반들도 속오군(束伍軍)에 편입시켰다.

양반의 종군(從軍)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천인의 종군에는 대가가 따라야 했다. 그래서 만든 법이 면천법(免賤法)이다. 공사(公私) 천인(賤人)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양인(良人)으로 속량시켜 주고 벼슬까지 주는 법이었다. 류성룡은 ‘정병을 선발해 훗날을 도모하기를 바라는 서장(乞抄擇精兵以爲後圖狀)’에서 “공사 천인·아전(衙前)·서자(庶子) 할 것 없이 모두 정밀하게 뽑고…그중에서 기능과 용맹이 출중한 사람은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제 천인도 군공을 세우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류성룡이 직접 작성한 『진관관병편오책(鎭管官兵編伍冊)』에는 노비 출신이 하급 간부인 대총(隊總)까지 오른 경우가 눈에 많이 띈다. 우영장군자주부(右營將軍資主簿) 최준(崔浚) 휘하의 1기총 박덕남(朴德男) 산하의 3개 대총 중 2대총 송이(松伊)와 3대총 춘복(春卜)이 모두 종(奴) 출신이었다. 1대총 산하 11명 중 종 출신이 8명이었고, 2대총은 6명, 3대총은 8명이었다. 33명의 병사 중 종 출신이 무려 22명이었던 것이다. 노비가 대거 종군하게 된 것은 면천법 덕분이었다. 군공청(軍功廳)은 “공사 천인이 적의 머리를 1급(級) 참수(斬首:목을 벰)하면 면천,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국왕 호위 무사) 배속, 3급이면 허통(許通:벼슬 시키는 것), 4급이면 수문장(守門將:4품관)을 제수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미 허통되어 직이 제수되었으면 사족(士族)과 다름없어야 마땅합니다”고 말했다. 노비 종군이 나쁠 것이 없었으므로 선조도 지지했다. 실제로 조령의 의병이었던 천인 신충원(辛忠元)이 군공으로 수문장에 임명된 것처럼 신분 상승이 잇따랐다. 물론 반발도 적지 않았다.

류성룡은 시험을 거쳐 뽑는 유급 상비군인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만들었는데 노비가 대거 지원했다. 선조는 재위 27년 2월 “적이 물러간 다음 그 주인이 찾아간다면 훈련도감의 호령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류성룡은 “적이 물러간 뒤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도 그러합니다…지금은 처첩(妻妾)까지도 항오(行伍:군대)에 편입해야 할 때입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노주(奴主)를 따지겠습니까”라고 분개했다. 『선조실록』 27년 5월 8일에는 “적을 참수한 수급이 10∼20급에 이르는 경우가 있는데 사목대로 논상한다면 사노 같은 천인도 반드시 동반(東班:문관)의 정직(正職)에 붙여진 뒤에 그만두어야 하니 관작(官爵)의 외람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는 반대도 있었지만 일본군 격퇴가 최우선 과제였던 선조는 류성룡의 의견대로 면천법을 고수했다.

류성룡은 조세제도 역시 혁명적으로 개혁했다. 류성룡은 ‘시무를 아뢰는 차자’에서 “난리를 다스려 바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비록 군사와 군량이 넉넉한 데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 있다고 합니다.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해 함께 휴식할 뿐입니다”고 말했다. 류성룡이 주장하는 혁명적 세제 개혁안이 훗날 대동법(大同法)이라고 불렸던 작미법(作米法)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거꾸로 많이 납부하고 부유한 사람이 적게 납부하던 공납(貢納)의 폐단을 조세 정의에 맞게 개혁한 법이 작미법이다. 부과 기준을 호(戶)에서 농지 소유의 다과(多寡)로 바꾸어 부유한 사람이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하게 한 법이다. 이는 조광조·이이 같은 개혁 정치가들의 단골 주장이었으나 양반 사대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던 법이었다.

작미법이 실시되면서 땅이 없는 가난한 백성은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으니 위화도 회군 직후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개혁 입법이었다. 당연히 반대가 잇따랐다. 류성룡이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헌의(貢物作米議)’에서 감사(監司)·병사(兵使)·지방관·아전·부호가 모두 반대한다고 말한 것처럼 모든 벼슬아치가 반대했다. 심지어 이들은 백성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핑계까지 댔는데 류성룡은 “백성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이들 힘 있는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갈파했다. 류성룡은 이런 개혁 입법들이 아니면 조선을 회생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과연 면천법으로 노비를 의병으로 끌어들이고, 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조선은 회생하고 있었다. 그러자 선조의 마음이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 끝나자 도로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천국/ 지배층의 변심
모든 위기는 기회를 수반한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이 이반된 조선은 망국의 위기에 몰렸다가 면천법·속오군 같은 개혁 입법으로 회생했다. 그러나 종전(終戰)이 다가오자 선조와 사대부의 마음은 달라졌다. 전시의 개혁입법들이 무력화되면서 나라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임란은 우리에게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자세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7년(1604) 류성룡에게 내려진 호성공신 녹권. 일등공신에 이항복·정권수 이름이 보인다.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선조를 수행했고, 정권수는 명나라 사신으로 가 명군 파병을 성사시킨 공을 인정받았다. 류성룡은 이등공신에 책봉됐으나 이를 사양하면서 국가에서 화원(畵員)을 보내 초상화를 그려 준다는 것도 거부했다(경북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소장).
임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백성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대부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10월 영의정으로 복귀한 류성룡이 노비들도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作米法),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군(束伍軍) 제도 같은 개혁입법들을 강행하면서 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신분제의 완화 내지 철폐는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이 희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향성이 견지된다면 임란은 조선에 되레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선조도 국망이 목전에 다가왔던 임란 초에는 개혁입법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먼저 ‘전쟁영웅 제거’가 시작되었다. 그 희생양이 육전의 영웅 김덕령(金德齡)이었다. 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과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김덕령이 가담했다’는 이몽학의 일방적 선전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김덕령에 대한 예단을 지닌 선조는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면서 직접 친국했다.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8월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조수정실록』은 ‘소문을 들은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며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29년 8월 1일)고 적고 있다. 5000 의병을 거느렸던 김덕령의 죽음이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는 “들으니 그의 군사는 원래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육전 영웅 김덕령 죽이기는 수전 영웅 이순신 제거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김덕령이 체포되기 한 달 전쯤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선조실록』 29년 6월 26일)고 비판했다. 남인 류성룡이 천거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은 선조의 이순신 비난에 적극 동조했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충장사의 김덕령 충효비. 김덕령은 현종 때 신원됐으며 비각은 정조 때 세워진 것이다(왼쪽 사진). 충장사에 있는 김덕령의 친필. 거제도에 있는 적의 간계에 속지 말자는 것과 둔전 개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오른쪽 사진).
선조가 요동 망명을 포기한 것은 일본군과 싸우기로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명나라에서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본국(本國:선조)을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두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비로소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선조실록』 25년 6월 26일)는 기록처럼 명나라에서 선조를 요동의 빈 관아에 유폐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요동에서 비빈(妃嬪)들을 거느리며 제후 행세를 하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선조는 망명을 포기했다.

이순신 제거 작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한 일본과 명(明) 사이의 강화협상이 전개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 사신 이종성(李宗城)에게 조선 남부 4도(道)를 떼어 달라는 ‘할지(割地)’와 명나라 공주를 후비(后妃)로 달라는 ‘납녀(納女)’ 등을 요구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선조 30년(1597) 정월 다시 대군을 보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정유재란의 승패가 이순신 제거에 달렸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간자(間者:간첩) 요시라(要時羅)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역정보를 조선에 제공하게 했다. 유인책으로 간주한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자 선조와 서인은 이순신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순신을 압송해 형문(刑問)하게 하고 원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게 했다.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金弘微)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순신이 ‘무군지죄(無君之罪:역적죄)’ ‘부국지죄(負國之罪:국가 반역죄)’ ‘함인지죄(陷人之罪:남(원균)을 함정에 빠트린 죄)’를 저질렀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니 마땅히 율(律)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선조실록』30년 3월 13일)고 말했다.

27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던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鄭琢) 등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원균은 선조 30년(1597) 6월과 7월 한산도와 칠천도(七川島)에서 거듭 대패해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으나 수군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수군 해체령을 내리고 이순신을 육군으로 발령했다. 『이충무공 행록(行錄)』은 이때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설령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신(微臣:미천한 신하)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라고 장계했다고 전한다.

정유재란도 처음에는 임란 초기처럼 일본군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제해권을 되찾으면서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선조 31년(1598) 8월 18일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 이른바 사대로(四大老)는 8월 28일과 9월 5일 조선 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렇게 종전이 기정사실화되자 다시 전쟁영웅 제거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번 대상은 류성룡이었다. 선조 31년(1598) 9월 말께부터 류성룡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는데, 남이공(南以恭)은 “(류성룡이) 속오(束伍)·작미(作米)법을 만들고…서예(庶<96B8>)의 천한 신분을 발탁했습니다”고 비난했다. 양반의 특권을 크게 제한한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폐지하고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사대부의 천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공세였다.

선조는 몇 번 반대의 제스처를 취한 후 류성룡을 버리는데, 그가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었다. 『서애선생 연보』는 “통제사 이순신은 선생(류성룡)이 논핵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성한 듯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크게 탄식했다”고 전한다.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난중잡록』에서 노량해전 때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고, 적은 선미에 엎드려 일제히 공(公)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실각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노량해전의 전과를 보고하자, 선조는 “수병(水兵)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전사를 애석해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7년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당연히 전공자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유정)의 공덕입니다”(『선조실록』32년 2월 2일)면서 임란 극복이 명나라 덕이라는 궤변을 만들어냈다. 선조는 36년(1603) 4월에는 “이제는 마땅히 군공청(軍功廳)을 혁파하여 쓸데없는 관원을 한 명이라도 덜어야 할 것이다”고 말해 논공행상 자체에 불만을 토로했다.

선조 37년(1604)에야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공신이 책봉되는데 문신들인 호성(扈聖)공신이 86명인 데 비해 일본군과 직접 싸운 무신들인 선무(宣武)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호성공신 중에선 내시(內侍)가 24명이고 선조의 말을 관리했던 이마(理馬)가 6명이나 되었다. 선무 1등인 이순신·권율·원균은 모두 사망한 장수들이었는데 당초 2등으로 의정되었던 원균은 선조의 명령으로 1등으로 올라갔다. 선조는 류성룡의 정적이던 서인·북인과 손잡고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모두 무력화했다. 이렇게 조선은 다시 전란 전으로 회귀했다.

임란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은 멸망했어야 하지만 성리학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이 없었고, 새 나라를 개창할 주도 세력이 없었다. 양명학은 이단으로 몰렸고, 사대부에 맞설 유일한 지식인 집단인 승려들은 호국(護國)의 틀에 안주했다. 그렇게 조선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형해(形骸)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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