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란을 겪은 임금들 - 현종 /제1차 예송 논쟁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이 아니라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은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 독점의 권력이냐 사대부 균점의 권력이냐의 문제였다.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제1차 예송(禮訟) 논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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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명반청(崇明反淸)을 기치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은 청나라를 인정하려 했던 소현세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제거되었다면 그 뒤를 누가 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있어야 했다. 종법에 따라 원손 석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목숨 걸고 간쟁하든지, 비록 편법이지만 봉림대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효종의 왕위 계승도 인정하면서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과 그 아들들의 신원(伸寃)도 요구했다. 소현세자 일가의 억울한 죽음과 효종의 왕위 계승은 한몸이었다.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억울한 희생 위에서 효종이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세조냐 단종이냐의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정인지·신숙주가 되든지 성삼문·박팽년이 되든지 한길을 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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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조선 후기 성리학의 흐름이었다. 양란(兩亂:임진·병자) 이후 피지배 백성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서인 유학자들은 예학(禮學)을 강화해 신분제를 고수하려 했다. 양반에서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宋翼弼)이 조선 예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것 또한 모순일 수밖에 없는데, 김장생(金長生)은 송익필의 예학을 크게 발전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로 계승되면서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서인이 율곡의 개혁사상을 사장시킨 채 예학을 조선 사상의 주류로 만든 이유는 백성의 신분제 철폐 움직임에 맞서 지배층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예(禮)란 본질적으로 하(下)가 상(上)을 섬기는 형식적 질서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효종에 대한 서인의 이중적 태도였다. 인조반정 후 서인에게 임금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사대부 중의 제1 사대부에 불과했다. 효종이 왕통은 이었지만 가통으로는 둘째 아들에 불과하다고 나누어 생각했다. 효종에 대한 이런 이중적 태도가 예송 논쟁의 발단 원인이었다. 고대 『주례(周禮)『나 『주자가례』 등에서 규정하는 상복(喪服)은 다섯 종류가 있었다. 참최(斬衰:3년), 재최(齋衰:1년), 대공(大功:9개월), 소공(小功:5개월), 시마(<7DE6>麻:3개월)가 그것이다. 부모상에는 자녀가 모두 3년복을 입고 자식상에도 부모가 상복을 입었다. 장자(長子)의 경우는 3년, 차자(次子) 이하는 1년복이었다. 효종 승하 때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기간이 문제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왕통을 이었지만 가통(家統)으로는 차자로 여긴 것이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큰 폭발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부왕의 급서로 경황이 없던 18세의 왕세자(현종)에게 예조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예조는 대비의 상복 규정에 대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지 않다면서 “혹자는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소서”(『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라고 주청했다. 서인 대신은 대부분 1년복이 맞다고 생각했다.
국왕이지만 차자라는 생각이었다. 집권 서인의 의견에 따라 그렇게 결정되려 할 때 전 지평 윤휴(尹휴)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주석에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嫡妻)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고 쓰여 있다는 점을 들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황한 왕세자(현종)는 “두 찬선(贊善)에게 모든 것을 문의하라”고 명하는데 두 찬선은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윤휴의 3년복설을 듣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서한을 보내 의견을 묻자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되물었다. 송시열은 “예법에 천자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次長子:둘째아들)를 세우면 그 복제 역시 장자와 같습니다만 그 아래 사종지설(四種之說)이 있습니다”(『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답했다.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예외 사항인 사종지설(四種之說)은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송시열은 정태화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①정이불체(正而不體)는 맏손자가 승중(承重)한 것이고, ②체이부정(體而不正)은 서자(庶子)가 후사가 된 것이고, ③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은 맏아들이 폐질(廢疾:불치병)에 걸린 것이고, ④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는 서손(庶孫)이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국조보감』현종 즉위년)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는 ①손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 ②장자가 아닌 아들(庶子)이 후사를 이은 경우 ③장자가 병이 있어 제사를 받들지 못한 경우 ④맏손자 아닌 손자(庶孫)가 후사를 이은 경우라는 설명이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때 송시열이 정태화에게 “인조(仁祖)로서 말하면 소현의 아들이 정이불체이고 대행대왕(효종)은 체이부정입니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정태화가 깜짝 놀라 손을 흔들어 막으면서 “예가 비록 그렇다 해도 지금 소현에게 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이론으로 지금 논의하는 예의 근거로 삼겠습니까?”라고 말렸다.
송시열은 ‘이택지에게 보낸 편지(與李擇之)’에서 “영상(정태화)이 머리를 흔들어 말리면서 ‘소현에게 아들이 없다면 정이불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감히 이 설을 말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송시열은 또 정태화가 “제왕가(帝王家)의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그 때문에 큰 화(禍)가 일어나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으니 정이불체 같은 말이 훗날 한없는 화의 근본이 될까 두렵습니다”는 말도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정태화와 송시열은 국제(國制), 곧 『경국대전』을 근거로 1년으로 의정해 올렸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의 ‘오복(五服:다섯 가지 상복)조’에는 장남과 차남의 구별 없이 ‘기년(期年)’으로 기록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속으로는 효종을 체이부정으로 여겼지만 겉으로는 『경국대전』에 따라 장남으로 대우한 것처럼 편법을 쓴 것이다.
그런데 장남과 차남은 구분하지 않았던 『경국대전』은 장자처(長子妻:큰며느리)는 기년(期年:1년), 중자처(衆子妻)는 대공(大功:9개월)이라고 구분해 놓아 15년 후 제2차 예송 논쟁의 불씨가 된다. 현종은 1년복설이 내심 불쾌했지만 송시열 같은 예학자들의 논리를 반박할 학문이 없었다. 그러나 커다란 내부 모순을 안고 있는 이 문제가 그냥 덮어질 수는 없었다.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 예송논쟁의 칼날
집권 서인들은 겉으로는 효종을 국왕으로 여겼으나 속으로는 차자(次子)로 낮춰 보았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정당이 집권하면 불필요한 정쟁이 빈발한다. 겉과 속이 다르니 논리의 모순이 생기고 반대편이 이를 지적하면 정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송 논쟁은 일인(日人)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당쟁이 아니라 효종의 종통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기에 치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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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국가에서 왕위를 계승한 국왕에게 장자니 차자니 따지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집권 서인은 송시열·송준길의 예론에 따라 효종을 차자로 여겨 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국제(國制:경국대전)에 따른 것처럼 위장했다. 남인 윤휴가 “무릇 제왕가의 사체는 사가(私家)와 아주 다르므로 대비가 대행대왕(효종)에 대해 참최복(3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반발한 것처럼 이 문제는 윤휴처럼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느냐, 송시열처럼 왕가 역시 사대부가(家)와 같다고 보느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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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國朝寶鑑)』 현종 즉위년조는 ‘당초 수원부에 석물(石物)을 세우는 일까지 진행했다’고 전하는데 송시열이 계속 홍제동을 고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송시열은 수원이 오환(五患)의 염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례편람(四禮便覽)』 상례(喪禮)조는 장지를 가릴 때 피해야 하는 오환(五患)으로 앞으로 도로·성곽·연못이 되거나 세력가에게 빼앗기거나 농지가 될 곳이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현종은 부왕을 즉위년(1659) 10월 홍제동에 안장했으니 영릉(寧陵)이었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 석물에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천장(遷葬)하는 것처럼 문제 있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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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후한(後漢) 정현(鄭玄)이 지은 『의례주소(儀禮注疏)』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을 근거로 삼았는데 핵심은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우고 역시 장자(長子)라 이름한다”는 구절이었다. 이 경우 효종은 장자가 되므로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소현(昭顯)이 일찍 세상을 뜨고 효종이 인조의 제2장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대왕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또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당연히 존엄한 정체(正體)인데도 그 복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을 수 없는 자와 같게 했으니 신은 그 근거를 모르겠습니다.(『현종실록』1년 3월 16일)”
허목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현종이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 송준길이 나섰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3년복을 입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복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다섯째·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 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현종실록』1년 3월 20일)”
송준길이 자식이 모두 먼저 죽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논리가 부족했다. 허목은 재차 상소를 올려 송준길이 자신의 뜻을 곡해했다고 주장했다. “신의 말은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立嫡以長)’는 뜻입니다…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正體)’라는 것이지 첫째 아들이기 때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현종실록』1년 4월 10일)”
먼저 죽은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는 것이지 장자냐 차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허목은 “효종은 인조의 체(體)를 계승한 적자이고 종묘를 이어받아 일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지금 그의 상에 3년 복제를 쓰지 않고 강등해서 기년(期年)으로 한다면, 체이부정(體而不正:서자가 후계자가 된 경우)의 복제입니까? 정이불체(正而不體:손자가 후계자가 된 경우)의 복제입니까?(『현종실록』1년 4월 10일)”라며 효종을 둘째로 대우하려는 서인들의 아픈 속내를 찔렀다.
『당의통략』이 ‘처음에는 사람들이 윤휴의 설을 더 지지했으나 서인들이 송시열을 높이 받들고 숭상하므로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라고 쓴 것처럼 예론에 따르면 윤휴와 허목이 맞았다. 남인들이 작성한 『현종실록』의 사관은 허목의 상소에 대해 ‘그때 군신(群臣)들은 다 허목의 말이 정론이라면서도 시의(時議)에 저촉될까 두려워 한 사람도 변론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윤선도가 송시열을 직접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일으켰다. “성인이 상례(喪禮)에 있어 오복(五服)의 제도를 정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라고 시작하는 윤선도의 상소문은 송시열을 직접 지목하고 있었다. “송시열은…(장자가) 성인이 돼 죽으면 적통이 거기에 있어 차장자가 비록 동모제(同母弟)이나 이미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었고, 이미 왕위에 올라 종묘를 이어받았더라도 끝까지 적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효종의 장지 선정 싸움에서 패한 윤선도의 언사는 거칠었다. “차장자가 부친과 하늘의 명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體)로서 후사가 된 후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면, 이는 가짜 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정 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현종실록』 1년 4월 18일)”
서인들이 세운 논리의 모순을 정확히 뚫어본 말이지만 ‘가세자·섭황제’ 운운한 것은 역공을 받을 소지가 충분했다. 먼저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승지들이 윤선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현종은 “윤선도의 심술이 바르지 못하다”며 관작을 삭탈하고 향리로 쫓아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가형(加刑)을 요구했다. 『당의통략』이 “윤선도의 상소를 보고 남인들이 이를 빌미로 송시열을 죽이고 서인들을 축출하려는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이제 예송 논쟁이 아니라 직접적인 권력투쟁이었다.
부제학 유계(兪棨)와 사간원은 윤선도에게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을 무고하면 해당 형벌을 자신이 받는 게 반좌율인데 사간원에서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죄를 송시열 등에게 씌우려 했다’고 공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좌율이 적용되면 사형이었다. 서인들의 치열한 공세로 윤선도가 위기에 빠지자 우윤(右尹) 권시(權<8AF0>)가 옹호하고 나섰다.
“항간에서도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감히 못하고 뱃속으로는 비방하면서도 입으로는 말을 못하는데, 이것이 태평성대의 기상입니까? 신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걱정하고 그 두 사람을 위해서도 걱정하고 있습니다.(『현종실록』 1년 4월 24일)”
권시는 “대왕대비 복제가 당연히 3년이어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며 “윤선도가 남을 꾸짖고 참소한 것은 매우 나쁜 짓임에 틀림없으나, 자기 몸에 반드시 화가 닥치리라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했는 데 역시 감히 할 말을 하는 선비입니다.(『현종실록』 1년 4월 24일)”라고 옹호했다. 서인들은 일제히 권시를 비난했고, 그는 벼슬을 내놓고 낙향했다. 윤선도는 상소가 불태워지고 극변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그래도 진사 이혜(李혜) 등 142명이 다시 윤선도를 공격하자 현종은 드디어 예송 자체를 금지시켰다. 기년복제는 국제(國制)에 따른 것이지 차자로 대우한 고례(古禮)를 따른 것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1차 예송은 외견상 송시열과 서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현종은 ‘만일 다시 복제를 갖고 서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을 쓰겠다’며 거론 자체를 금지시켰으나 왕권은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국왕의 복제를 두고 신하들이 싸운다는 것 자체가 왕권의 추락이었다. 게다가 서인들은 효종을 차자로 본 속내를 국제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포장과 내용물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15년 후의 2차 예송 논쟁이었다.
양반들의 조세 저항, 7년 걸린 대동법 호남 전역 확대/공납개혁 갈등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자신의 개인적·계급적 이익을 뛰어넘는 위민(爲民)정치를 펼치는 경우는 드물다. 조선처럼 양반 사대부만이 정치를 할 수 있었던 나라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김육과 이시방 같은 소수의 관료들은 계급적 이익을 뛰어넘어 백성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나라 전체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것이 대동법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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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즉위년(1659) 9월 송시열(宋時烈)은 효종의 묘지문을 지어 올리면서 “신의 기억에 따르면 봄에 삼가 대행대왕(효종)의 옥음을 들었는데 ‘마땅히 가을에 가서 호남 산군(山郡)의 대동법 실시에 대해서 의논해 결정해야겠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현종실록』 즉위년 9월 3일)”라고 말했다. 현종은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일은 경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알았겠는가?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되었다가 효종 2년(1651)에 호서(湖西:충청도)에 확대 실시되었고 효종 9년(1658)에는 전라도 해읍(海邑:바다를 낀 읍)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효종 10년(1659) 호남 산군(山郡:내륙 군현)에도 실시하기로 했으나 그해 5월 효종이 급서하면서 무산된 것이었다.
송시열이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의외였다. 효종 즉위 초 서인들은 대동법 실시를 찬성하는 김육(金堉) 중심의 한당(漢黨)과 반대하는 김집(金集)·송시열 중심의 산당(山黨)으로 분당되었는데 당시 송시열은 대동법 반대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거나 각 관아에서 쓰는 물품을 바치는 공납(貢納)을 쌀로 대체하자는 법이었다. 공납은 가짓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었고 그 군현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 점이었다.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양반 전주(田主)나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전호(佃戶:소작농)의 납부액이 비슷했다. 여기에 방납(防納)의 폐단까지 더해졌다. 방납업자들은 경아전(京衙前)의 관리들과 짜고 자신들의 물품을 사서 구입해야만 납부를 받아주게 했다. 방납업자와 관리들이 챙기는 뇌물 성격의 수수료가 인정(人情)인데, 현종 2년(1661) 4월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인정(人情)으로 드는 비용이 원래의 공물 값보다 두 배나 드는 형편이라서 가산을 탕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배보다 배꼽이 컸다. 대사간 윤황(尹煌)은 “손에는 진상품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人情物)을 싣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인조실록』 14년 2월 10일)”라고도 말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할 정도로 폐단이 컸지만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농지 면적으로 바꾸고 쌀로 일괄적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송시열이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의외였다. 효종 즉위 초 서인들은 대동법 실시를 찬성하는 김육(金堉) 중심의 한당(漢黨)과 반대하는 김집(金集)·송시열 중심의 산당(山黨)으로 분당되었는데 당시 송시열은 대동법 반대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거나 각 관아에서 쓰는 물품을 바치는 공납(貢納)을 쌀로 대체하자는 법이었다. 공납은 가짓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었고 그 군현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 점이었다.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양반 전주(田主)나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전호(佃戶:소작농)의 납부액이 비슷했다. 여기에 방납(防納)의 폐단까지 더해졌다. 방납업자들은 경아전(京衙前)의 관리들과 짜고 자신들의 물품을 사서 구입해야만 납부를 받아주게 했다. 방납업자와 관리들이 챙기는 뇌물 성격의 수수료가 인정(人情)인데, 현종 2년(1661) 4월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인정(人情)으로 드는 비용이 원래의 공물 값보다 두 배나 드는 형편이라서 가산을 탕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배보다 배꼽이 컸다. 대사간 윤황(尹煌)은 “손에는 진상품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人情物)을 싣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인조실록』 14년 2월 10일)”라고도 말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할 정도로 폐단이 컸지만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농지 면적으로 바꾸고 쌀로 일괄적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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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납을 쌀 하나로 통일했기에 대동(大同)이란 표현을 쓰는데 농지가 많은 부호들은 많이 내는 반면 전호(佃戶)들은 면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세정의에 가까운 이 법은 양반 전주(田主)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조선의 개혁정치가들은 조광조가 그랬고 율곡 이이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이 방안을 지지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은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 법을 실시했으나 종전(終戰)과 동시에 집중 공격을 받아 실각하고 이 법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이 법에 대한 백성들의 희구가 컸기 때문에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된 이후 진통을 겪으면서 계속 확대 실시되는 과정을 걷고 있었다. 효종이 재위 9년(1658) 7월 조정에 들어온 충청도 회덕 출신의 송시열에게 “호서(湖西:충청도)의 대동법에 대해서 백성들의 생각이 어떠하던가?”라고 묻자 송시열도 “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효과는 컸다. 송시열이 당초의 견해를 일부나마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시방(李時昉) 때문이었다. 이시방은 인조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의 아들이자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이기도 한데 그의 문집인 『서봉일기(西峯日記)』에는 그가 자주 송시열을 찾아가 대동법에 대해 역설하자 송시열도 “임금에게 진달하겠다”고 동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양반 지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에는 암초가 너무 많았다. 김육은 효종 9년(1658) 9월 임종 직전 상소를 올려 “신이 만약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일(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육이 죽은 후에는 이시방이 대동법에 정치인생을 걸었으나 그 역시 현종 1년(1660) 1월 사망했다. 『서봉일기』는 이시방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내가 죽은 후에 누가 다시 대동법을 주장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고 적고 있다.
현종은 선왕의 결정사항이란 사실을 알고는 호남 산군으로 확대 실시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재위 1년 6월 영의정 정태화가 전라감사와 다시 의논하자고 건의하자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은 이미 완전히 결정난 것이니 거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못박았다. 현종은 7월 11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결정하고 그 시행 절목은 연해(沿海) 각 읍에 준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막상 추수기가 다가오자 반대론이 다시 들끓었다. 가장 큰 명분은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조판서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1년(1660) 9월 “금년 호남의 농사는 연해 지역은 흉년이지만 산군에서는 약간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의논이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니 신은 의혹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시행을 주장했으나 소용 없었다.
흉년이 들어 더욱 더 실시해야 한다는 반대론은 파묻혀 버렸고 비변사(備邊司)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흉년에 강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백성’의 이름을 빙자해 반대했다. 그래서 대동법은 1년 연기되었으나 현종 2년이 되자 다시 반대론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김육의 아들인 공조참판 김좌명(金左明)은 사직 상소를 내면서 “호남에 안찰사로 나가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직(京職)이 스스로 향직(鄕職)을 자청한 드문 경우지만 비변사는 “대동법 시행 절목도 여기에서 요리할 수 있으니 그가 꼭 그 지역에 가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렇게 다시 1년이 더 연기되었다.
현종 3년(1662) 7월 김좌명은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올가을부터 실시할 예정인데, 영상이 장차 사신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마땅히 속히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주청했다. 영상이 없다는 핑계로 다시 연기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다수 벼슬아치는 반대했지만 소수 신료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현종 4년(1663) 3월 12일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1결당 가을에 쌀 7말, 봄에 6말을 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쌀을 납부해야 할 10월이 되자 전라도 유생 배기(裵紀) 등이 상소해 “대호(大戶:부유한 집)는 대호대로 귀한 쌀을 탕진하고 소호(小戶)는 소호대로 연역(煙役:잡역)에 시달린다”면서 “옛 법을 따르고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면 되는데 어찌 반드시 새로운 법과 특별한 정치를 별도로 만들 것이 있겠습니까?”라면서 대동법 혁파를 주장했다.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태화·홍명하·허적 등 삼정승은 물론 송시열도 반대로 돌아섰다. 그래서 현종 6년(1665) 12월 27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은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명분으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이 날짜『현종개수실록』은 “대동법을 설행한 후 소민(小民:가난한 백성)들은 다 편리하다고 말했으나 대호(大戶:부유한 백성)들은 한꺼번에 쌀을 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모두 불편하다고 했다. 조정의 논의도 혁파해야 한다는 자가 많았다”고 쓴 것처럼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조세저항이었다. 현종은 재위 7년(1666) 8월 말 각 도에 어사를 파견하면서 전라도에는 신명규(申命圭)를 보냈다. 신명규는 남루한 행색으로 촌락에 드나들며 대동법 민심을 수집한 후 “호우(豪右:부유하고 세력 있는 집)는 대동법 혁파가 편리하다고 말하고 잔호(殘戶:가난한 집)는 다시 실시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현종실록』 7년 10월 22일)”라고 현장의 민심을 전했다. 『승정원일기』 현종 7년 11월 10일자에 따르면 현종은 “지금 어사의 옥계(玉啓)를 보니 (대신들의 말과는 달리) 백성들이 대개 대동법이 다시 실시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면서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김좌명을 비롯한 대신들이 재실시를 주장했고 호남 산간의 대동법은 현종 7년 말 다시 살아났다.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국을 초토로 만드는 현종 11~12년의 (1670~1671) 경신대기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에 대한 백성들의 희구가 컸기 때문에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된 이후 진통을 겪으면서 계속 확대 실시되는 과정을 걷고 있었다. 효종이 재위 9년(1658) 7월 조정에 들어온 충청도 회덕 출신의 송시열에게 “호서(湖西:충청도)의 대동법에 대해서 백성들의 생각이 어떠하던가?”라고 묻자 송시열도 “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효과는 컸다. 송시열이 당초의 견해를 일부나마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시방(李時昉) 때문이었다. 이시방은 인조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의 아들이자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이기도 한데 그의 문집인 『서봉일기(西峯日記)』에는 그가 자주 송시열을 찾아가 대동법에 대해 역설하자 송시열도 “임금에게 진달하겠다”고 동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양반 지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에는 암초가 너무 많았다. 김육은 효종 9년(1658) 9월 임종 직전 상소를 올려 “신이 만약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일(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육이 죽은 후에는 이시방이 대동법에 정치인생을 걸었으나 그 역시 현종 1년(1660) 1월 사망했다. 『서봉일기』는 이시방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내가 죽은 후에 누가 다시 대동법을 주장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고 적고 있다.
현종은 선왕의 결정사항이란 사실을 알고는 호남 산군으로 확대 실시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재위 1년 6월 영의정 정태화가 전라감사와 다시 의논하자고 건의하자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은 이미 완전히 결정난 것이니 거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못박았다. 현종은 7월 11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결정하고 그 시행 절목은 연해(沿海) 각 읍에 준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막상 추수기가 다가오자 반대론이 다시 들끓었다. 가장 큰 명분은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조판서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1년(1660) 9월 “금년 호남의 농사는 연해 지역은 흉년이지만 산군에서는 약간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의논이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니 신은 의혹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시행을 주장했으나 소용 없었다.
흉년이 들어 더욱 더 실시해야 한다는 반대론은 파묻혀 버렸고 비변사(備邊司)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흉년에 강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백성’의 이름을 빙자해 반대했다. 그래서 대동법은 1년 연기되었으나 현종 2년이 되자 다시 반대론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김육의 아들인 공조참판 김좌명(金左明)은 사직 상소를 내면서 “호남에 안찰사로 나가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직(京職)이 스스로 향직(鄕職)을 자청한 드문 경우지만 비변사는 “대동법 시행 절목도 여기에서 요리할 수 있으니 그가 꼭 그 지역에 가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렇게 다시 1년이 더 연기되었다.
현종 3년(1662) 7월 김좌명은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올가을부터 실시할 예정인데, 영상이 장차 사신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마땅히 속히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주청했다. 영상이 없다는 핑계로 다시 연기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다수 벼슬아치는 반대했지만 소수 신료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현종 4년(1663) 3월 12일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1결당 가을에 쌀 7말, 봄에 6말을 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쌀을 납부해야 할 10월이 되자 전라도 유생 배기(裵紀) 등이 상소해 “대호(大戶:부유한 집)는 대호대로 귀한 쌀을 탕진하고 소호(小戶)는 소호대로 연역(煙役:잡역)에 시달린다”면서 “옛 법을 따르고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면 되는데 어찌 반드시 새로운 법과 특별한 정치를 별도로 만들 것이 있겠습니까?”라면서 대동법 혁파를 주장했다.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태화·홍명하·허적 등 삼정승은 물론 송시열도 반대로 돌아섰다. 그래서 현종 6년(1665) 12월 27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은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명분으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이 날짜『현종개수실록』은 “대동법을 설행한 후 소민(小民:가난한 백성)들은 다 편리하다고 말했으나 대호(大戶:부유한 백성)들은 한꺼번에 쌀을 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모두 불편하다고 했다. 조정의 논의도 혁파해야 한다는 자가 많았다”고 쓴 것처럼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조세저항이었다. 현종은 재위 7년(1666) 8월 말 각 도에 어사를 파견하면서 전라도에는 신명규(申命圭)를 보냈다. 신명규는 남루한 행색으로 촌락에 드나들며 대동법 민심을 수집한 후 “호우(豪右:부유하고 세력 있는 집)는 대동법 혁파가 편리하다고 말하고 잔호(殘戶:가난한 집)는 다시 실시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현종실록』 7년 10월 22일)”라고 현장의 민심을 전했다. 『승정원일기』 현종 7년 11월 10일자에 따르면 현종은 “지금 어사의 옥계(玉啓)를 보니 (대신들의 말과는 달리) 백성들이 대개 대동법이 다시 실시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면서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김좌명을 비롯한 대신들이 재실시를 주장했고 호남 산간의 대동법은 현종 7년 말 다시 살아났다.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국을 초토로 만드는 현종 11~12년의 (1670~1671) 경신대기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뭄·홍수·냉해·태풍·병충해, 5災가 한꺼번에 덮치다
/ 경신 대기근
16~19세기는 전 세계적인 소빙기(小氷期)였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중·후반 현종 때 기상이변과 재난이 집중되었다. 예송논쟁이 치열했던 한편으로 대동법 논쟁이 거셌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의 조세를 경감해주고 풍년 든 지역의 곡식 일부를 흉년 든 지역으로 직접 보내는 탄력적 운용으로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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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들이 효종의 군비 강화 정책에 반대한 데는 흉년이 잇따르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현종 1년(1660) 2월 대신들은 군량 부족을 명분으로 훈련도감과 금군(禁軍:국왕 호위부대)의 결원을 보충하지 말자고 주청했다. 문신들은 효종이 가능하지도 않은 북벌에 매달리면서 쓸데없는 군사 숫자만 늘려놓았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부왕만큼 북벌 의지가 강하지 못했던 현종은 군비 축소에 동의했다. 현종 2년(1661)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은 “근래 지방 곳곳에 전염병(<7658>疫)이 성행하고 있으며 영·호남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보고했다. 기근에 전염병이 더해진 것이다. 현종 2년(1661) 윤7월 당초 비변사 소속이었던 진휼청(賑恤廳)을 사실상의 상설기구로 독립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현종 3년(1662) 2월 경상감사 민희(閔熙)는 “본도에 기근이 든 망극한 정상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그 위에 전염병까지 성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호남도 마찬가지여서 현종 3년(1662) 호남 진휼 어사 이숙은 ‘2월 17일 현재 굶어 죽은 아사자(餓死者)가 142인이고 6147인의 전염병자 중 사망자가 998인’이라고 보고했다. 이숙은 “연초에 벌써 이와 같으니 앞으로 어떠할지 알 수 있습니다”라고 우울한 전망을 덧붙였다.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그해를 보냈으나 현종 4년(1663)과 5년(1664)에도 재난은 그치지 않았다. 재해를 더 큰 재해가 덮고, 전염병을 더 센 전염병이 덮는 형국이었다. 국왕 자리는 바늘방석이었다. 현종은 재위 5년 10월 홍문관 부제학 이경억(李慶億) 등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홍수와 가뭄과 기근이 없는 해가 없으니 내 마음이 기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변이(變異)가 겹쳐 나타나는 것은 보아하니 진실로 나의 거친 정치 때문에 하늘의 죄를 얻은 것이다.”(『현종실록』 5년 10월 12일)
현종이 조선 임금 27명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계속되는 재난으로 하늘의 견책을 두렵게 여기고 반성하는 ‘공구수성(恐懼修省)’의 처지에서 후궁을 두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선 인물이 대왕대비 자의대비 조씨였다. 조씨는 현종을 위해 역관 최우의 딸을 후궁으로 간택했다. 그런데 그 직전 영의정 정태화가 ‘최우의 딸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기로 약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현종실록』 5년 12월 30일자는 ‘정태화의 말을 듣고서 임금이 기뻐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고지식한 정태화가 현종의 속내도 모르고 곧이곧대로 주달하는 바람에 후궁 입궁은 백지화되었다.
문신들은 현종이 최씨 소녀를 내쫓은 것을 칭찬했으나 이런 공구수성이 전염병과 기근을 물리쳐주지는 못했다. 재위 6년·7년·8년에도 흉년이었다. 재위 9년에는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현종 9년(1668) 3월에 경상감사는 전염병(染病)으로 죽은 자가 230여 명이라고 보고했고, 『현종실록』은 “각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해 온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적고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말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복시(司僕寺)의 말 50여 필이 죽자 살아남은 어승마(御乘馬)와 주마(走馬)를 경복궁 성내로 옮겼다.
소의 전염병도 유행했다. 현종 4년(1663) 국가 제향(祭享)에 쓸 검은 소가 갑자기 죽어 민가에 격리시켰으나 계속 죽어 제향에 쓸 희생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교적 환경이 깨끗한 궁중의 소가 이 정도면 민간의 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현종 4년(1663) 9월 소의 종자가 끊길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소를 죽인 자’를 ‘사람을 죽인 자’의 형벌로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재변이 조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이 시기를 소빙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현종 9년(1668) 10월 사은사 일행이 돌아와 청나라의 산동(山東)·강남(江南) 등 3개 성에 지진이 발생해 수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선도 몇 년째 집들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각지에서 발생했다. 사신들은 몽골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도 전했는데, 이에 대해 여러 신하는 “청나라가 반드시 지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낙관적인 희망을 피력했다. 자신들이 직접 북벌에 나서지는 못해도 하늘이 멸망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조정의 이런 분위기에 대해 사관(史官)은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때 우리나라도 재이(災異)가 거듭 발생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해 실로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인데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청나라에 변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한 번 듣자 상하가 희색이 만면했다. 몽골이 한번 난을 일으키면 우리가 먼저 화를 입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서 장막 위의 제비가 집이 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현종실록』 9년 10월 13일)
재위 1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니 실로 재위 10년 동안 단 한 해도 기근이 없던 때가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되는 경신(庚辛) 대기근에 비하면 약과였다. 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재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종 11년의 불길한 전조는 새해 벽두의 전염병 소식으로 나타났다.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1월 4일자는 충청감사가 “도내 각 읍에 전염병이 돌아 513명이 감염돼 30명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전해주고 있다. 2월에는 사망자가 80명으로 늘어났다. 전염병은 위로는 평안도로 북상하고 아래로는 경상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상륙했다.
여기에 기상이변이 가세했다. 현종 11년 윤2월 26일자 『승정원일기』는 조보(朝報)를 인용해 도성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기상이변을 전해준다. 어둑새벽에는 눈발이 휘날리더니 정오에는 작은 콩만 한 우박이 쏟아지다가 오후 2시(未時)쯤부터는 비와 눈이 뒤섞여 퍼부었다. 양력 4월 말에 해당하는 윤2월 말에 생긴 변괴는 냉해(冷害)의 조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종실록』 11년 4월 14일자는 ‘평안도 위원(渭源) 등지에 연 이틀 밤 서리가 내렸고, 영원(寧遠)에는 서리와 눈이 내렸으며, 평양(平壤)·은산(殷山) 등 8개 읍에서는 우박이 내려 싹이 튼 각종 곡식과 삼·목화 등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5월에는 평양에 오리알만 한 우박이 반 자(尺) 정도 쌓일 만큼 쏟아져 네 살 된 아이가 즉사하고 꿩·토끼·까마귀·까치들도 많이 맞아 죽었다. 초여름인 음력 4~5월의 우박과 서리에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현종실록』 11년 5월 조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한재가 참혹했다”고 전하고 있다. 냉해 위에 한해(旱害:가뭄)가 덧씌워진 것이다.
같은 달 경기도 교하(交河) 등 9읍에서는 황충(蝗蟲)이 극성을 부렸다. 냉해와 한해 위에다 충해(蟲害)가 더해진 것이었다. 6월에는 태풍이 부는 풍해(風害)까지 기승을 부렸다. 기상이변은 전국적 현상이었다. 『현종실록』 11년 7월 30일자는 “평안도 창성(昌成)에 우박이 크게 내렸고, 충청도 대흥(大興)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고, 원양도(原襄道:강원도)의 영서(嶺西)의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렸으며 원주(原州)에는 우박이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에 수해(水害)까지 덧붙여졌다. 그해 7월 전라도 감사는 “전라도 용담(龍潭) 등 여러 고을에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렸으며 또 새벽에는 서리가 내렸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흉년의 원인은 한해·수해·냉해·풍해·충해의 다섯 가지로서 이 중 한두 가지만 겹쳐도 쑥대밭이 되는데 다섯 가지 재해가 한꺼번에 닥친 것이었다. 길에는 집을 떠나 유리하거나 굶어 죽은 백성들이 즐비했고 “몇 년이 지나면 초목만 남을 것(『현종실록』 11년 9월 15일)”이라는 흉언(凶言)이 횡행했다. 실로 국망의 위기였다.
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天災에서 나라를 건져내다
/대기근 극복
유례를 찾기 힘든 경신 대기근을 맞아 조선은 기민(饑民) 살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소빙기(小氷期)의 재앙에 맞서 수도(修道)하는 자세로 재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망국 지경까지 갔던 나라가 되살아났다. 위기를 맞이하고도 당리당략 외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권이 되돌아볼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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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의 경신 대기근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변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현종 11년 8월 전라감사 오시수(吳始壽)는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고, 무리를 지어 겁탈까지 했으며, 조금 익어 가는 곡식이 있으면 전주(田主)를 묶어 놓고 공공연히 베어 가며 들판에 방목하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먹지만 감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현종실록』 11년 8월 10일)라고 보고했다.
한해(旱害:가뭄)·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의 오재(五災)에 인간 전염병과 가축 전염병이 가세한 칠재(七災)였다. 여기에 겨울 혹한(酷寒)까지 팔재(八災)가 되었다. 전라감사는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는데 집에 조금의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합니다. 심지어 무덤을 파내 관을 쪼개 시신의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현종개수실록』 12년 1월 11일)라고도 보고했다.
한해(旱害:가뭄)·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의 오재(五災)에 인간 전염병과 가축 전염병이 가세한 칠재(七災)였다. 여기에 겨울 혹한(酷寒)까지 팔재(八災)가 되었다. 전라감사는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는데 집에 조금의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합니다. 심지어 무덤을 파내 관을 쪼개 시신의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현종개수실록』 12년 1월 11일)라고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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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12년 2월 보성군의 교노(校奴) 일명(日命)과 남원부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 등이 무덤을 파 옷을 벗겨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었다. 대명률(大明律) ‘발총(發塚:무덤을 파헤침)’조는 “관곽(棺槨)을 열고 시신을 본 자는 교수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추위가 극심했기 때문이라고 무심하게 자백했다. 경상도도 마찬가지였다. 경상감사 민시중(閔蓍重)은 그해 4월 참혹한 정경을 보고했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10여 세의 어린 아들이 이웃집을 도둑질했다고 물에 빠트려 죽였으며, 또 한 여인은 서너 살짜리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의 굶주린 한 백성은 죽소(粥所:죽을 제공하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 아내는 곁에서 죽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곡했습니다.”(『현종실록』 12년 4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은 관아 창고에도 손을 댔다. 현종 12년 11월 함경도 길주(吉州)의 허홍(許泓) 등 150여 명은 관고(官庫)의 감관(監官)이 진휼곡 대출을 미루자 관고에 난입해 곡식 35석을 3두씩 나누어 가진 후 각자 이름을 써 후에 환납(還納)하자고 약속했다. 함경감사 홍처후(洪處厚)는 주동자 5인을 강도률(强盜律)로 목을 베려 했으나 영의정 허적과 이단하 등이 감관의 잘못도 있다고 옹호해 가볍게 처벌했다. 그러나 반란사건에 대한 처벌은 강력했다. 금산의 향청(鄕廳) 좌수(座首) 이광성(李光星) 등이 50여 명을 모아 덕유산 깊은 계곡에 진을 치고 용담(龍潭)·무주현의 무기와 곡식을 탈취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는데 반역으로 규정되어 39명이 사형당했다. 이런 와중에 병사자와 아사자가 잇따랐다.
“이달에 서울에서 굶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460여 명이었고 각 도에서 죽은 수가 1만7490여 명이었다…도적이 살해하고 약탈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했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현종실록』 12년 6월 30일)
6월 한 달 동안 1만7000여 명이, 8월에는 서울에서 250여 명, 각 도에서 1만5830여 명이 죽었다. 소빙기가 불러온 대재앙이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종 11년 7월 23일 “관고의 곡식도 이미 바닥났다”면서 “오늘의 계책은 온갖 벌인 일들을 정지시키고 번잡한 비용을 줄여 오직 구황 정책에 전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고 건의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굶주린 백성 살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태화는 진휼청(賑恤廳)을 상시 가동하고 인상했던 관료들의 녹봉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닷새 후인 7월 2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재난대책회의가 열렸다. 병조판서 김좌명은 “어영미(御營米) 5000석을 취해 사용하되 군량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자를 더해 다시 갚아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전시 대비 비축곡까지 임시로 방출하겠다는 뜻이었다. 진휼에 쓸 총 가용 경비를 뽑아 보니 ‘은 7100냥, 포 960동, 쌀 3만 석, 벼 1만 석’이었다. 왕실에 바치는 각종 공물과 관리들의 녹봉을 줄이면 쌀 3만6760석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금주했으며 백관은 봉급을 줄여 만든 비용으로 기민(饑民) 살리기에 나섰다. 병자를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와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所)가 중심이었다.
현종 12년 1월 16일 선혜청·한성부·훈련원 세 곳에 진휼소를 설치했는데, 『현종개수실록』은 “첫날 죽을 먹은 자가 6000여 명이었고 다음 날에는 1만 명을 훨씬 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진휼소에 나올 수 없는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에게는 따로 곡식을 제공했다. 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1월 25일에는 1만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한성부는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조석으로 진휼소까지 오기 어렵다면서 용산과 홍제원에도 진휼소를 설치했다. 지방 각 관아도 진휼소를 운영했다. 또 동소문 밖 연희방의 동활인서, 남대문 밖 용산강의 서활인서에서는 병자들을 치료했다. 현종 12년 5월 비변사는 “두 활인서에 1000여 명의 병자가 있고 사막(私幕)에도 7860여 명이 있다”면서 “막에서 나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만합니다”(『현종실록』 12년 5월 11일)라고 보고했다.
진휼소 덕분에 무수히 많은 백성이 살아났지만 곡식이 부족해 무한정 운영할 수도 없었다. 『현종실록』 12년 5월 15일자는 “각 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 진휼소의 3만2040여 명 중 서울 백성 1만957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양식을 주어 보냈다. 자활하라는 뜻이었다.
마지막 방안은 청나라에서 곡식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현종 11년 겨울부터 일부 관료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현종 12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이 공사 간의 모든 저축이 바닥났다면서 “외간에서 곡식을 빌리자는 의논이 많아 감히 아룁니다”라고 공론화했다. 그러나 『현종실록』은 “불가하다는 신하가 많아 서필원의 의논은 시행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굶주린 백성 앞에서도 이념을 앞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대기근을 정략에 이용하는 당인(黨人)도 있었다. 현종 12년 12월 5일 헌납 윤경교(尹敬敎)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토착 농민의 수를 온 나라를 합해 계산하면 거의 100만 명에 이릅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경교의 상소는 남인 영상 허적(許積)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종은 영의정 정태화가 재위 12년 칠순이 되었다는 이유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자 그해 5월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윤경교는 남인이 영의정으로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뜻에서 현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심지어 “전하께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시상(時相:허적)의 말은 모두 굽혀서 따르시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유현(儒賢:송시열)의 아룀에 대해서는 어찌 한결같이 머뭇거리고 어렵게 여기십니까”라고도 비판했다.
현종은 크게 분개해 “윤경교는 간관(諫官)으로 오래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다…당(黨)을 끌어들이고 남의 뜻에 부합했다”고 비판하면서 체차(遞差:갈아치움)시켰다. 이처럼 대기근 앞에서도 당리당략을 앞세운 일부 무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기근 극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하늘이 왕조를 버린 듯한 천재(天災)가 왕조 타도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동법도 큰 역할을 했다. 경신 대기근을 극복한 현종 14년 11월 전 사간(司諫) 이무(李무)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소 사민(士民)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농지 한 결(結)에 쌀을 60두씩 바쳐도 부족했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한 결에 10두씩만 내어도 남습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승정원일기』 현종 14년 11월 21일)
국가나 정치권이 백성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는 좋은 정책과 시의에 맞는 법 제정이란 뜻이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10여 세의 어린 아들이 이웃집을 도둑질했다고 물에 빠트려 죽였으며, 또 한 여인은 서너 살짜리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의 굶주린 한 백성은 죽소(粥所:죽을 제공하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 아내는 곁에서 죽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곡했습니다.”(『현종실록』 12년 4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은 관아 창고에도 손을 댔다. 현종 12년 11월 함경도 길주(吉州)의 허홍(許泓) 등 150여 명은 관고(官庫)의 감관(監官)이 진휼곡 대출을 미루자 관고에 난입해 곡식 35석을 3두씩 나누어 가진 후 각자 이름을 써 후에 환납(還納)하자고 약속했다. 함경감사 홍처후(洪處厚)는 주동자 5인을 강도률(强盜律)로 목을 베려 했으나 영의정 허적과 이단하 등이 감관의 잘못도 있다고 옹호해 가볍게 처벌했다. 그러나 반란사건에 대한 처벌은 강력했다. 금산의 향청(鄕廳) 좌수(座首) 이광성(李光星) 등이 50여 명을 모아 덕유산 깊은 계곡에 진을 치고 용담(龍潭)·무주현의 무기와 곡식을 탈취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는데 반역으로 규정되어 39명이 사형당했다. 이런 와중에 병사자와 아사자가 잇따랐다.
“이달에 서울에서 굶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460여 명이었고 각 도에서 죽은 수가 1만7490여 명이었다…도적이 살해하고 약탈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했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현종실록』 12년 6월 30일)
6월 한 달 동안 1만7000여 명이, 8월에는 서울에서 250여 명, 각 도에서 1만5830여 명이 죽었다. 소빙기가 불러온 대재앙이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종 11년 7월 23일 “관고의 곡식도 이미 바닥났다”면서 “오늘의 계책은 온갖 벌인 일들을 정지시키고 번잡한 비용을 줄여 오직 구황 정책에 전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고 건의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굶주린 백성 살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태화는 진휼청(賑恤廳)을 상시 가동하고 인상했던 관료들의 녹봉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닷새 후인 7월 2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재난대책회의가 열렸다. 병조판서 김좌명은 “어영미(御營米) 5000석을 취해 사용하되 군량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자를 더해 다시 갚아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전시 대비 비축곡까지 임시로 방출하겠다는 뜻이었다. 진휼에 쓸 총 가용 경비를 뽑아 보니 ‘은 7100냥, 포 960동, 쌀 3만 석, 벼 1만 석’이었다. 왕실에 바치는 각종 공물과 관리들의 녹봉을 줄이면 쌀 3만6760석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금주했으며 백관은 봉급을 줄여 만든 비용으로 기민(饑民) 살리기에 나섰다. 병자를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와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所)가 중심이었다.
현종 12년 1월 16일 선혜청·한성부·훈련원 세 곳에 진휼소를 설치했는데, 『현종개수실록』은 “첫날 죽을 먹은 자가 6000여 명이었고 다음 날에는 1만 명을 훨씬 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진휼소에 나올 수 없는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에게는 따로 곡식을 제공했다. 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1월 25일에는 1만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한성부는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조석으로 진휼소까지 오기 어렵다면서 용산과 홍제원에도 진휼소를 설치했다. 지방 각 관아도 진휼소를 운영했다. 또 동소문 밖 연희방의 동활인서, 남대문 밖 용산강의 서활인서에서는 병자들을 치료했다. 현종 12년 5월 비변사는 “두 활인서에 1000여 명의 병자가 있고 사막(私幕)에도 7860여 명이 있다”면서 “막에서 나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만합니다”(『현종실록』 12년 5월 11일)라고 보고했다.
진휼소 덕분에 무수히 많은 백성이 살아났지만 곡식이 부족해 무한정 운영할 수도 없었다. 『현종실록』 12년 5월 15일자는 “각 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 진휼소의 3만2040여 명 중 서울 백성 1만957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양식을 주어 보냈다. 자활하라는 뜻이었다.
마지막 방안은 청나라에서 곡식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현종 11년 겨울부터 일부 관료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현종 12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이 공사 간의 모든 저축이 바닥났다면서 “외간에서 곡식을 빌리자는 의논이 많아 감히 아룁니다”라고 공론화했다. 그러나 『현종실록』은 “불가하다는 신하가 많아 서필원의 의논은 시행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굶주린 백성 앞에서도 이념을 앞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대기근을 정략에 이용하는 당인(黨人)도 있었다. 현종 12년 12월 5일 헌납 윤경교(尹敬敎)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토착 농민의 수를 온 나라를 합해 계산하면 거의 100만 명에 이릅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경교의 상소는 남인 영상 허적(許積)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종은 영의정 정태화가 재위 12년 칠순이 되었다는 이유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자 그해 5월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윤경교는 남인이 영의정으로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뜻에서 현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심지어 “전하께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시상(時相:허적)의 말은 모두 굽혀서 따르시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유현(儒賢:송시열)의 아룀에 대해서는 어찌 한결같이 머뭇거리고 어렵게 여기십니까”라고도 비판했다.
현종은 크게 분개해 “윤경교는 간관(諫官)으로 오래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다…당(黨)을 끌어들이고 남의 뜻에 부합했다”고 비판하면서 체차(遞差:갈아치움)시켰다. 이처럼 대기근 앞에서도 당리당략을 앞세운 일부 무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기근 극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하늘이 왕조를 버린 듯한 천재(天災)가 왕조 타도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동법도 큰 역할을 했다. 경신 대기근을 극복한 현종 14년 11월 전 사간(司諫) 이무(李무)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소 사민(士民)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농지 한 결(結)에 쌀을 60두씩 바쳐도 부족했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한 결에 10두씩만 내어도 남습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승정원일기』 현종 14년 11월 21일)
국가나 정치권이 백성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는 좋은 정책과 시의에 맞는 법 제정이란 뜻이다.
오만한 西人에 분노한 임금, 정권 바꾸려다 의문의 죽음
/34세에 요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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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재위 기간 내내 대기근과 왕권 약화에 시달렸다. 조선의 약한 왕권은 청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현종 12년(1671:신해년) 2월 북경에 갔던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67DF>)은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이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하기 때문(臣强)이라고 한다. 돌아가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고 말했다(『현종실록』 12년 2월 20일)”고 산해관(山海關)에서 보고했다. 현종의 사촌인 복선군이 “어찌 신하가 강해 백성이 이렇게 굶주릴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하자 강희제(康熙帝)는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청에서 보기에 국왕이 승하했는데 신하들이 3년복이니 1년복이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상현상이었다.
그런데 기해년(현종 즉위년:1659)의 1차 예송논쟁 15년 후인 갑인년(현종 15년:1674) 2월 23일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면서 이상현상이 재발할 조짐이 보였다. 기해 예송 때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아 기년복(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장자·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으로 규정되어 있는 국제(國制:경국대전)를 쓴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현종은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의정한 것으로 믿었다. 『경국대전』 ‘오복(五服)’조는 아들이 먼저 죽었을 때 장·차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맏며느리인 장자처(長子妻)의 경우는 1년, 기타 며느리인 중자처(衆子妻)는 대공복(大功服:9개월복)을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했을 당초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은 기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그러나 2월 27일에는 기년복이 잘못이라며 대공복으로 바꾸겠다고 수정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에 대해 “송시열의 당(黨) 사람들이 송시열의 의논과 다른 것을 미워해 옥당(玉堂:홍문관)에 편지를 보내니 예조판서 조형 등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대공복은 왕비를 기타 며느리로 대접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제가 있었으나 1차 예송 때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 간 전례가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칠순의 노구를 끌고 서울로 올라와 대궐 문 앞에 꿇어앉아 상소문을 봉입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승정원은 “예송은 금지되어 있다”면서 반 달 이상 상소문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현종 15년(1674) 7월 6일 현종의 손에 들어가는데 조부 김육(金堉)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싸운 좌부승지 김석주(金錫胄)가 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해년(현종 즉위년:1659)의 1차 예송논쟁 15년 후인 갑인년(현종 15년:1674) 2월 23일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면서 이상현상이 재발할 조짐이 보였다. 기해 예송 때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아 기년복(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장자·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으로 규정되어 있는 국제(國制:경국대전)를 쓴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현종은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의정한 것으로 믿었다. 『경국대전』 ‘오복(五服)’조는 아들이 먼저 죽었을 때 장·차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맏며느리인 장자처(長子妻)의 경우는 1년, 기타 며느리인 중자처(衆子妻)는 대공복(大功服:9개월복)을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했을 당초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은 기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그러나 2월 27일에는 기년복이 잘못이라며 대공복으로 바꾸겠다고 수정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에 대해 “송시열의 당(黨) 사람들이 송시열의 의논과 다른 것을 미워해 옥당(玉堂:홍문관)에 편지를 보내니 예조판서 조형 등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대공복은 왕비를 기타 며느리로 대접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제가 있었으나 1차 예송 때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 간 전례가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칠순의 노구를 끌고 서울로 올라와 대궐 문 앞에 꿇어앉아 상소문을 봉입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승정원은 “예송은 금지되어 있다”면서 반 달 이상 상소문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현종 15년(1674) 7월 6일 현종의 손에 들어가는데 조부 김육(金堉)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싸운 좌부승지 김석주(金錫胄)가 전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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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의 복제를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어떤 전례를 따른 것입니까?…기해년 국상 때 대왕대비는 ‘국전(國典: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거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대공복은 국제 밖에서 나온 것이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6일)”
기해년 국상 때 근거로 썼던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비의 복제는 기년복이어야 하는데 왜 대공복이냐는 항의였다. 도신징은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아직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도신징의 상소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현종은 일주일 후인 7월 13일 대신들을 불렀다. 그 사이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던 것이다.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15년 전의 일을 다 기억은 못 하지만 고례(古禮:고대 중국의 예)가 아닌 국제를 써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면서 “오늘의 대공복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송시열의 제자 김수흥은 고례와 국제를 뒤섞어 설명했다. 그러자 현종은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라고 물었고 김수흥은 ‘대공복’이라고 대답했다. 현종은 “기해년에는 시왕의 제도(時王之制:조선의 제도)를 사용하고 지금은 고례를 사용하니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라고 재차 물었다. 갑작스러운 부왕의 급서에 허둥대던 18세 청년이 아니었다. 현종은 다시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기년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종은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는 국제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해괴한 일이다”라고 되물었다. 김수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해년에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었다. 현종이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참최 3년복입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건네주면서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둘째)로 의정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때 좌부승지 김석주가 “송시열의 수의(收議)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송시열이 효종을 둘째로 봤다고 보고했다.
호조판서 민유중이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건의하자 현종은 ‘반드시 오늘 안에 의논해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시간을 주면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집단적으로 대처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등의 대신들이 긴급히 회동한 후 계사를 올렸는데 기해년에 기년복으로 정한 근거만 장황하게 써 올렸다. 현종은 승전색(承傳色:왕명을 전하는 내시)을 시켜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지적하여 결말지은 곳이 없다”고 지적하며 다시 의정하라고 명했다. 이때 대신들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라고 답했으면 예조의 몇몇 신하가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을 문제였다. 현종이 여러 차례 ‘국제에 따르면 대왕대비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은 이유는 ‘기년복’이란 대답을 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고수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대해 매우 놀랐다…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임금에게 이렇게 박하게 하면서 어느 곳(何地)에 후하게 하려는 것인가.(『현종실록』 15년 7월 15일)”
‘어느 곳’은 바로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이것이 왕실과 서인 사대부의 싸움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인 사대부는 왕실의 특수성을 부인하고 자신들과 같은 계급으로 보는 것이었다. 현종은 “당초 국전에 따라 정해진 자의대비 복제를 기년복으로 실행하라”고 단안을 내리고 예조판서 조형을 비롯한 예조 관료들을 투옥했다. 현종은 7월 16일에는 영의정 김수흥에 대해 “선왕의 은혜를 잊고 다른 의논에 빌붙은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춘천에 부처(付處)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설을 뜻한다. 그러자 승정원과 홍문관이 일제히 김수흥 구하기에 나섰다.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는 전혀 생각도 안 한다는 말이냐?(『현종실록』 15년 7월 16일)”
승정원과 홍문관의 김수흥 구하기가 불발로 끝나자 이번에는 사헌부가 나섰다. 현종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살펴 탄핵하는 것이 대간(臺諫:사헌부)의 직책인데 오히려 남을 두둔하며 구하기에 급급했다’며 삭탈관작하고 도성에서 내쫓았다. 현종은 끝까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하는 서인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했다. 남인 장선징(張善<7013>)을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을 판의금,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삼고 7월 26일에는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갑자기 현종은 뚜렷한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겼다. 『현종실록』 8월 17일자는 ‘의관을 갖추어 입고 허적을 인견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34세, 재위 15년, 정권을 갈아치우던 와중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각종 재해와 강한 당파에 시달렸던 유약했던 임금이 처음으로 칼을 뽑아 휘두르는 도중에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의 유일한 후사는 14세 숙종이었으므로 약체 왕실의 지속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기해년 국상 때 근거로 썼던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비의 복제는 기년복이어야 하는데 왜 대공복이냐는 항의였다. 도신징은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아직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도신징의 상소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현종은 일주일 후인 7월 13일 대신들을 불렀다. 그 사이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던 것이다.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15년 전의 일을 다 기억은 못 하지만 고례(古禮:고대 중국의 예)가 아닌 국제를 써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면서 “오늘의 대공복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송시열의 제자 김수흥은 고례와 국제를 뒤섞어 설명했다. 그러자 현종은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라고 물었고 김수흥은 ‘대공복’이라고 대답했다. 현종은 “기해년에는 시왕의 제도(時王之制:조선의 제도)를 사용하고 지금은 고례를 사용하니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라고 재차 물었다. 갑작스러운 부왕의 급서에 허둥대던 18세 청년이 아니었다. 현종은 다시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기년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종은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는 국제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해괴한 일이다”라고 되물었다. 김수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해년에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었다. 현종이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참최 3년복입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건네주면서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둘째)로 의정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때 좌부승지 김석주가 “송시열의 수의(收議)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송시열이 효종을 둘째로 봤다고 보고했다.
호조판서 민유중이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건의하자 현종은 ‘반드시 오늘 안에 의논해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시간을 주면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집단적으로 대처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등의 대신들이 긴급히 회동한 후 계사를 올렸는데 기해년에 기년복으로 정한 근거만 장황하게 써 올렸다. 현종은 승전색(承傳色:왕명을 전하는 내시)을 시켜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지적하여 결말지은 곳이 없다”고 지적하며 다시 의정하라고 명했다. 이때 대신들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라고 답했으면 예조의 몇몇 신하가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을 문제였다. 현종이 여러 차례 ‘국제에 따르면 대왕대비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은 이유는 ‘기년복’이란 대답을 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고수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대해 매우 놀랐다…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임금에게 이렇게 박하게 하면서 어느 곳(何地)에 후하게 하려는 것인가.(『현종실록』 15년 7월 15일)”
‘어느 곳’은 바로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이것이 왕실과 서인 사대부의 싸움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인 사대부는 왕실의 특수성을 부인하고 자신들과 같은 계급으로 보는 것이었다. 현종은 “당초 국전에 따라 정해진 자의대비 복제를 기년복으로 실행하라”고 단안을 내리고 예조판서 조형을 비롯한 예조 관료들을 투옥했다. 현종은 7월 16일에는 영의정 김수흥에 대해 “선왕의 은혜를 잊고 다른 의논에 빌붙은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춘천에 부처(付處)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설을 뜻한다. 그러자 승정원과 홍문관이 일제히 김수흥 구하기에 나섰다.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는 전혀 생각도 안 한다는 말이냐?(『현종실록』 15년 7월 16일)”
승정원과 홍문관의 김수흥 구하기가 불발로 끝나자 이번에는 사헌부가 나섰다. 현종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살펴 탄핵하는 것이 대간(臺諫:사헌부)의 직책인데 오히려 남을 두둔하며 구하기에 급급했다’며 삭탈관작하고 도성에서 내쫓았다. 현종은 끝까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하는 서인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했다. 남인 장선징(張善<7013>)을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을 판의금,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삼고 7월 26일에는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갑자기 현종은 뚜렷한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겼다. 『현종실록』 8월 17일자는 ‘의관을 갖추어 입고 허적을 인견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34세, 재위 15년, 정권을 갈아치우던 와중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각종 재해와 강한 당파에 시달렸던 유약했던 임금이 처음으로 칼을 뽑아 휘두르는 도중에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의 유일한 후사는 14세 숙종이었으므로 약체 왕실의 지속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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