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宗의 혈맥 숙종 / 14세 소년 국왕
민생 무너지는데, 임금·사대부 눈엔 송시열만 보였다
사회를 선도할 명분과 동력을 상실한 정치세력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 이런 지배집단은 본질적 현안에는 눈을 감은 채 비(非)본질적 현상을 두고 사변적 논쟁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 역사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호명한다. 비극은 이런 책무를 수행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조선 후기가 이런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지 반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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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왕위에 오른 8월 23일, 성균관 유생 이심 등은 송시열이 ‘덕을 쌓은 유학의 종주(宿德儒宗)’라면서 “현자(賢者)의 진퇴는 구차스럽게 할 수 없지만 군주의 정성스러운 예절이 어떠한가에도 달려 있다”며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고 상소했다. 같은 날 전 영의정 김수흥과 그를 구원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던 간관(諫官)들에 대한 처벌도 모두 무효화되었다. 24일에는 숙종이 가주서(假注書) 이윤(李綸)을 보냈으나 송시열은 이미 서울을 떠나 버린 뒤였다. 이윤이 뒤따라가 국왕의 말을 전했음에도 광주(廣州)를 거쳐 수원으로 가 버렸다. 숙종은 송시열을 거듭 타이르면서 현종의 능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송시열은 모두 거부했다.
“얼마 전 여러 신하들이 득죄(得罪)한 것은 그 근원이 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을 벌할 때 신의 죄상이 여러 번 전교에 나왔지만 특별히 그 성명을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벼슬이 아니라 벌을 달라는 주청이었다. 어린 국왕 길들이기였다. 그의 말대로 현종도 영의정 김수흥은 처벌했지만 송시열은 이름도 적지 못한 상대였다. 누가 보더라도 현종의 급서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할 인물은 예순여덟 살의 송시열이지 열네 살의 숙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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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송시열을 겨냥한 상소를 올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곽세건은 ‘선왕이 급서하는 바람에 왕법(王法)을 다 밝히지 못했으니 그 뜻을 따르는 달효(達孝)를 해야 한다’면서 송시열에게 지문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론(邪論)에 붙은 김수흥도 오히려 편배(編配:유배안에 기재됨)되었는데, 사론을 창도한 송시열이 어찌 헌장(憲章:법)에서 빠질 수 있습니까?… 송시열은 효묘(孝廟:효종)의 죄인이고, 선왕(현종)의 죄인이니 왕법을 시행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전하의 책무입니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25일)”라고 말했다.
『현종실록』은 곽세건이 현종 생존 시인 그해 5월에도 송시열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병조에서 기각했다고 전하고 있다. 좌부승지 김석주는 곽세건이 계속 서울에 머물고 있다가 다시 상소를 올린 것이라면서 ‘삼조(三朝:인조·효종·현종)에서 예우하던 재야의 늙은 신하를 불측한 곳에 빠뜨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숙종은 “알았다”라고 심상하게 답했다. 곽세건의 상소에 대해서도 역시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은 “승정원의 계달이 김석주에게서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다 시원하게 여겼으나 이때 임금은 이미 마음에 들어온 것이 있어서 (곽세건의 상소를) 끝내 엄히 배척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김석주의 계달에 시큰둥하게 답한 것은 의외였다. 김석주는 서인이면서도 2차 예송논쟁 때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책략가였다. 서인들에게 곽세건은 묵과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다음 날 대사헌 민시중(閔蓍重) 등이 곽세건을 엄하게 국문하자고 청하자 숙종은 “금일 유생의 상소는 (그 말을) 쓰느냐 안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며 거부했다. 남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조정의 서인 벼슬아치들과 관학 유생들은 곽세건 공격에 대거 가담했다. 숙종은 곽세건의 말을 ‘충언(忠言)이자 지론(至論)’이라고 옹호해 서인들을 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송시열이 ‘지문 찬술’을 계속 거부하자 김석주에게 대신 짓게 했다. 이조참판 이단하(李端夏)에게는 현종의 『행장』을 짓게 했는데 그는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단하는 현종의 『행장』에 “(예송논쟁 때) 실대(失對:국왕에게 대답을 잘못함)했다는 이유로 수상(首相:영의정)을 죄주었다”고 썼으나 숙종은 “다른 의논에 붙었기 때문에 수상을 죄주었다”라고 고치라고 명령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예론이었다. 이단하는 스승의 이름을 쓰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번 독촉을 받고 “공경(公卿)들이 『의례(儀禮)』의 네 가지 설(四種之說: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경우)로써 대답했는데 이는 본래 송시열이 인용한(所引) 말이다”라고 이름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숙종은 “인용한(所引)의 소(所)자를 잘못한 오(誤)자로 바꾸라(『숙종실록』 즉위년 11월 30일)”고 명했다.
이단하는 할 수 없이 이를 고친 후 물러나와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숙종은 “이모(이단하)는 다만 스승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송자대전(宋子大全)』, 『수차(隨箚) 5권』)”라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했다. 경기 유생 이필익(李必益) 등이 상소해서 송시열을 옹호하고 곽세건을 먼 변방으로 내치라고 요구하자 숙종은 거꾸로 이필익을 먼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이 조치에 대사간 정석(鄭晳)과 관학 유생 이윤악(李胤岳) 등 90여 인이 항의하자 숙종은 “내가 어린 임금(幼主)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내가 심히 통탄스럽고 해괴해서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고 꾸짖었다.
어린 숙종이 송시열을 꺾어 가면서 정권은 남인에게 넘어갔다. 나아가 숙종은 재위 1년(1675) 1월 13일 드디어 송시열을 덕원(德源)으로 유배 보냈다.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이 쓴 『최신록(崔愼錄)』에 따르면 이때 충청도 진천의 길상사(吉祥寺)에 있던 송시열은 유배 소식을 듣고, “김청풍(金淸風:김우명)의 계획이 지금에야 실현되었다. 지금까지 지체된 것은 임금의 참으심이 많으셨던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숙종의 외조부인 김우명이 부친 김육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구원(舊怨)이 있었던 것을 빗댄 것이다. 송시열을 처벌하자 그 제자들은 사직하거나 나오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5월 16일 “송시열이 죄를 입은 이래 조정의 신하들이 까닭 없이 나오지 않는 자들이 있다. 아! 아비가 죄를 입었어도 그 아들은 오히려 벼슬을 하는 것인데 하물며 스승이 득죄(得罪)했다고 그에게 배운 자가 나오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숙종실록』 1년 5월 16일)”라면서 그 제자들을 처벌했다. 일부 남인들은 ‘송시열이 효종의 역적이니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맞섰던 판부사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이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목은 형량을 가중해 송시열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대부들이 송시열 문제로 당파가 갈려 날을 지새우는 동안 백성들은 생존에 허덕였다. 숙종 즉위년 8월 전국 각지에 거듭 우박이 내렸고, 9월에는 평안도에 긴 가뭄 끝에 홍수가 들고 서리와 우박이 겹쳐서 전야(田野)가 쑥밭이 되었다. 경신대기근을 기억하고 있는 안주(安州) 백성은 “내년 봄에 굶어 죽느니 오늘 자진(自盡)하는 것이 낫다”면서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같은 달에는 황해도·평안도·원양도(原襄道:강원도)·함경도에 비둘기 알만 한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국내뿐만 아니었다. 청나라에서는 내란이 한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송시열 문제로 날이 지고 해가 뜨고 있었다.
윤휴 북벌론 꺾은 사대부들의 이중성 / 淸 내란의 호기
북벌론은 효종 사망과 동시에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 청나라가 삼번(三藩) 철폐 문제로 내전에 휩싸이자 조선에서 다시 북벌론이 등장했다. 이때의 북벌론은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대립했던 백호 윤휴가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지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역사의 붓대를 잡은 자가 미래인의 뇌리를 지배하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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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인조 27년) 경중명이 죽자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정남왕의 지위를 세습한 것처럼 사실상 세습왕국같이 행세했다. 대륙 전체를 지배하기가 버거웠던 만주족이 한족에게 한족을 다스리게 한 ‘이한제한(以漢制漢)’이었다. 즉위(1662) 당시 강희제(康熙帝: 1654~1722)는 아홉 살의 소년이었으므로 청 태종(太宗)의 부인이었던 할머니 태황태후(太皇太后)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와 오배(鰲拜) 등 고명(顧命) 4대신의 도움을 받아 제국을 통치했다. 강희제는 열여섯 살 때인 재위 9년(1670)에 친정을 시작했으나 삼번엔 손을 대지 못했다. 재위 12년(1673:현종 14년) 3월 평남왕 상가희가 요동 귀향(歸鄕)을 요청하면서 아들 상지신(尙之信)에게 평남왕의 자리를 세습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강희제는 귀향을 허락했지만 세습은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 번도 형식상 철번을 요청했으나 막상 철번을 받아들이면 내전이 발생할 분위기였다. 청 조정도 ‘철번 반대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청사고(淸史稿)』 근보(<9773>輔)열전에 따르면 강희제는 “친정 이후 삼번, 하무(河務), 조운(漕運)을 (국가) 삼대사(三大事)로 삼아 기둥에 써 놨다”고 전할 정도로 철번 의지가 강했다. 스무 살의 젊은 황제는 전쟁을 각오하고 철번을 명했다. 오삼계는 예상대로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를 자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켰고 두 번왕(평남왕과 정남왕)이 가세하면서 남부 전역이 전쟁터로 돌변했다. 전황은 불투명했으나 강희제가 불리하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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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제자들에 의해 북벌의 화신으로 추앙된 송시열은 정작 아무 말도 없는 상황에서 그해 7월 1일 비밀상소(密疏)를 올려 북벌을 주창한 인물이 백호 윤휴(윤휴)였다. 윤휴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정4품)과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등을 역임했으나 포의(布衣)로 자칭하며 상소를 올려 ‘효종이 10년 동안 북쪽으로 전진해 보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며 북벌을 주창했다.
“우리나라의 정병(精兵)과 강한 활솜씨는 천하에 이름이 있는 데다가 화포와 비환(飛丸:조총)을 곁들이면 진격하기에 충분합니다. 군졸 1만 대(隊)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燕山:북경)으로 넓은 규모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 한쪽 길을 터 정인(鄭人:대만)과 약속해 힘을 합해 그 중심부를 흔들어야 합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일).” 윤휴는 ‘동시에 중국 북부와 남부, 일본에도 격문을 전해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인(노론)이 작성한 『현종수정실록』은 “윤휴가 밀소(密疏)를 올렸으나 (현종이) 답하지 않았다”고만 쓰고 밀소의 내용에 대해서는 한 자도 적지 않는 대신 “윤휴는 얼신(얼신)의 자식으로서 거짓으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집에 있으면서도 불의를 자행하고 또 선유(先儒)의 학설을 공척(攻斥)하였다”는 비난만 잔뜩 써놓았다. 송시열이 아니라 윤휴를 북벌 주창자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당파적 오기였다.
이런 와중에 제2차 예송논쟁을 계기로 서인들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윤휴는 숙종 즉위년(1674) 12월 1일 다시 상소를 올려 ‘복수(復<8B8E>)와 설치(雪恥)’를 주장하면서 북벌 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冊子)를 함께 올렸는데, 사관은 윤휴의 주장이 “책사(策士)의 설(說)과 같은 종류였다”고 적고 있다. 다음 날 숙종은 영의정 허적(許積)에게 “윤휴의 상소는 화(禍)를 부르는 말이다”고 평했다. 그러자 남인 정승 허적은 “그 뜻은 군신 상하가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의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으니 다만 마땅히 마음에만 둘 뿐입니다”고 숙종의 말에 찬동했다. 역시 남인이었던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도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심히 불가합니다(『숙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고 가세했다. 서인은 물론 남인들 중에서도 북벌이 가능하다고 믿는 벼슬아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숙종 1년(1675) 1월 2일 경연 시독관(侍讀官) 권유(權愈)가 허목(許穆)과 윤휴를 경연에 출입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벼슬을 사양하던 윤휴는 숙종이 사관을 통해 비망기를 보내 ‘생각을 고치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다’고 전하자 드디어 경연에 나왔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윤휴는 첫 경연에서 소매 안에서 혁제(赫<8E4F>:종이쪽지)를 꺼내 읽었는데 ‘정도를 확립하고 천하의 대의를 펴자’는 내용이었다. 숙종은 “격언(格言)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마땅히 유심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5년 후에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송시열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으로 여겨졌다. 윤휴의 출사로 현종 때 묵살되었던 비밀상소가 숙종 1년 1월 경연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정오에 시작된 경연은 포시(哺時:오후 3~5시)에 끝났는데 사관은 긴 시간 동안 숙종이 “단정히 손을 모으고 듣기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숙종의 나이 열다섯, 강희제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할아버지(효종)가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숙고했을까? 윤휴가 병거(兵車)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도 대륙에서 기병을 상대로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간수하기 불편하다는 반대론이 나오자 윤휴는 ‘수레 하나를 10인이 담당해 서로 교대로 간수하게 하고 지방에서는 민간에게 내주어 짐을 싣는 수레로 사용하면 보관에 어려움이 없다’고 반박했다. 검토관(檢討官) 이하진(李夏鎭)도 “적의 돌진을 막고 기병을 제어하는 데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고 호응했다. 이하진은 실학자 성호 이익의 부친이기도 하다. 숙종은 “이미 만들게 했으니 그 제도를 보면 가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답했다. 숙종은 윤휴의 북벌 주장에 군비를 증강하면서 기회를 보자는 쪽이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사관의 말은 윤휴의 북벌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나 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복수하고 치욕을 씻는 천하의 대의를 무릇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단 지금이 어떤 때인가? 백성의 곤궁은 극에 달했고 재력도 고갈되었다. 어린 임금(幼主)이 새로 섰고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운데도 천하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윤휴가 한 번 입으로 대의를 빙자했으나 이날 군신들이 경연에서 정한 것은 머뭇거리고 미룬 것에 불과한데 윤휴가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고 여겨 스스로 그 일을 담당했으니 그도 우활(迂闊)하다 하겠다(『숙종실록』 1년 1월 11일).”
윤휴는 숙종을 국왕으로 봉하는 강희제의 칙서도 거부하자고 청했는데 이에 대해 숙종이 “자강의 방책은 지금 실행할 수 있지만 국왕으로 봉하는 칙서를 가져오는 사신을 어떻게 거절하고 마중 나가지 않겠는가?(『숙종실록』 1년 1월 28일)”라고 거부했다. 숙종 1년 2월 전 우후(虞候:병마절도사, 종3품) 노우(盧瑀)가 상소해서 북벌을 주창했는데 “윤휴의 논의가 있고 나서 이런 상소가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숙종실록』 1년 2월 12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인물은 윤휴·이하진 등 남인 중에서도 소수일 뿐 대다수 사대부는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북벌은 말로만 주창해 선명성만 나타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중처신이었다.
부국강병의 길 특권이 막았다 / 민생계혁의 좌초
지배층만 부유한 나라보다 다수 백성들이 부유한 나라가 강국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수 백성들을 잘살게 하자는 민생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정치가의 단골메뉴였지만 많은 경우 현안 회피용에 불과했다. 어떤 정치세력이 진정으로 민생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민생을 위한 법제화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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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즉위한 숙종이 안으로는 각 당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대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민생을 보존하며, 밖으로는 내전에 휩싸인 청나라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그러나 숙종은 조숙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11월 허적과 허목을 불러 만경창파에 일엽편주가 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배가 닻줄과 노도 없이 물결 가운데 있다가 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뒤집힐 염려가 있으니 이는 임금의 도(君道)를 미루어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림 위에 숙종이 쓴 어필이 있는 『어제주수도설(御製舟水圖說)』이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다섯이 있으니 첫째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 어진 현량(賢良:어질고 착한 사람)을 쓰는 것이고, 셋째 충간(忠諫)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넷째 과실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섯째 보물을 천하게 여기고 어진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숙종실록』 1년 11월 8일)”
숙종이 재위 1년 윤5월 평안도 관찰사 민종도(閔宗道)에게 한 말은 조선 정치구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다섯이 있으니 첫째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 어진 현량(賢良:어질고 착한 사람)을 쓰는 것이고, 셋째 충간(忠諫)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넷째 과실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섯째 보물을 천하게 여기고 어진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숙종실록』 1년 11월 8일)”
숙종이 재위 1년 윤5월 평안도 관찰사 민종도(閔宗道)에게 한 말은 조선 정치구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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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론이 선조 조부터 성하기 시작해 효종 조에 이르러
서는 송준길·송시열이 두소(斗<7B72>:국량이 작음)의 비루하고 미세한 무리로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산림에 물러나 있으면서 조정의 권력을 멀리서 잡고 무릇 인물의 진퇴나 크고 작은 정사도 반드시 먼저 이 두 사람에게 품의한 후 (임금에게) 상달(上達)했으니 일이 극히 한심했다.(『숙종실록』 1년 윤5월 27일)”
영의정부터 송시열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나서 임금에게 진달했던 서인 정권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숙종은 선왕의 유지를 이어 정권을 갈아치웠지만 남인의 당세는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숙종의 마음을 끈 것은 그의 정책관이 기존 관료들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타파해 백성들을 살림으로써 그 역량으로 북벌을 단행하자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윤휴가 북벌을 주창하자 북벌 반대론자들은 민생우선론인 양민론(養民論)으로 맞섰다. 윤휴는 양민론이 북벌의 현실화를 막기 위한 사대부들의 허울 좋은 명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동법 이후 민생의 가장 큰 문제는 신역(身役:병역)의 폐단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 의무를 졌는데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했다. 이것이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인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가난한 상민들은 군포 부담에 허리가 휘지만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의무조차 없는 모순된 상황을 바꾸는 것이 민생 개혁의 핵심이었다.
현종 때 각종 재이가 발생하자 군역의 폐단 때문에 하늘이 노했다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현종 말에도 군역개혁론이 논의되었다. 현종 15년(1674) 영의정 김수흥이 “몇 해 전부터 입이 달린 사람이면 모두 ‘재이가 거듭 닥치고 민생이 곤궁하게 된 것은 다 신역의 폐단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변통(變通:개혁)하려고 하면 그 폐단만 말할 뿐 구제의 도(道)는 말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큰 골칫거리입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3일)”라고 말했다.
사실 군역 폐단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 말 모든 양반은커녕 생원·진사를 제외한 유학(幼學)들에게만 포를 받자는 소변통(小變通:온건개혁론)이 나왔을 때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은 이렇게 반대했다.
“국조(國朝) 300년 이래 사자(士子)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혹 이름을 빙자해 역(役)을 면한 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체 선비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 섞어 똑같이 포를 징수하면 어찌 역(役)을 정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13일)”
유생들도 사대부니 군역을 부담할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구상한 것은 전체 사대부들도 똑같은 군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대변통(大變通:급진개혁)이었으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역 부담을 균등하게 하려고 했다.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지패는 종이신분증을 뜻했다. 지패법이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산 이유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지패법은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묶는 오가통법(五家統法)이 전제였다. 오가통법 사목(事目)은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에 따라 모으되, 가구(家口)의 다과(多寡)와 재산의 빈부(貧富)를 물론하고 매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만들고, 한 사람을 통수(統首)로 뽑아 통 안의 일을 맡게 한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고 규정하고 있다.
통-리(里)-면(面)-읍(邑) 순의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인데 ‘재산의 빈부를 물론한다’는 것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가통법은 또 흉년으로 유망한 백성들을 거주지역의 행정단위로 포섭해 전체 민정(民丁) 숫자를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영의정 허적은 지패법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지패법은 구애되는 일이 있으니, 사대부가 상한(常漢:상놈)의 통수 하에 들어가니 일이 매우 불편합니다”고 토로했다. 오가(五家)의 통수가 상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나마 지패법과 호포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허적이 이 정도면 다른 양반들은 볼 것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지패법에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호포법(戶布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호포법은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오가통 내의 모든 호(戶)에 군포를 걷는 법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불편해한다는 명분을 대면서 반발했다. 심지어 벼슬 없는 가난한 유생들에게만 포를 걷는 유포(儒布)제를 실시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자 영상 허적이 “이른바 유포(儒布)의 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신부터 아래까지 무릇 호(戶)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포를 낸다면 어찌 유포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2년 1월 19일)”라고 방어했다. 영의정인 자신부터 호포(戶布)를 낼 것이니 어찌 가난한 유생에게만 걷는 것이냐는 반론이었다.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를 잘 아는 숙종은 “형세를 보아서 시행할 것”이라고 일단 실시를 유보했다.
그러자 조정에 의논시켜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윤휴는 국왕의 결단을 촉구했다.
“마땅히 성상께서 속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먼저 덕음(德音)을 발표하셔서 백성들의 해를 제거하시고, 서서히 호포법이나 구산법을 의논하셔서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나라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소서. (『숙종실록』 3년 12월 5일)”
사망자나 도주자, 갓난아이의 군포를 가족이나 이웃에게 씌우는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의 폐단부터 먼저 없앤 후 호포법이나 구산법을 논의하자는 말이었다. 호포법이 가호(家戶)를 기준으로 군포를 받는 법이라면 구산법은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에게 군포를 받자는 것이니 호포법보다 근본적인 개혁론이었다. 당연히 양반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의정 허적도 족징이나 인징의 폐단 등만 일단 해결하는 온건개혁으로 물러섰다. 서인에 비해 열세인 집권 기반으로 구산제와 호포제를 함께 밀어붙이다 정권이 무너진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런 정책 차이 등으로 집권 남인은 급진개혁파인 윤휴 중심의 청남(淸南)과 온건개혁파인 허적 중심의 탁남(濁南)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윤휴의 생각은 확고했다.
“물고(物故:죽은 사람), 아약(兒弱:갓난아이)에게서 거두는 포(布)는 먼저 탕감해 주고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호포법을 시행한다면, 군병(軍兵)과 공천(公賤)·사천(私賤)의 제도를 모두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
윤휴의 이 말에 대해 『숙종실록』은 허적·김석주·오시수 등이 모두 놀라, “오늘 논의하는 것은 아약과 물고된 자의 폐단을 변통하는데 불과한데 만약 윤휴의 말대로 한다면 국가 제도를 모두 바꾸어야 할 것이니 결단코 행하기 불가합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윤휴의 ‘군병과 공천·사천의 제도를 모두 변통하자’는 말은 군제 개혁을 통해 신분제의 틀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신분제를 완화시켜 국력을 증진시키자는 것이 윤휴의 본뜻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윤휴의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되었다. 벼슬아치들은 상아로 만든 아각패(牙角牌)를 차고, 일반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호패를 차게 했다. 호포제도 사대부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해 국력을 키울 생각이 없었고 효종이 바라마지 않았던 천재일우의 기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는 송준길·송시열이 두소(斗<7B72>:국량이 작음)의 비루하고 미세한 무리로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산림에 물러나 있으면서 조정의 권력을 멀리서 잡고 무릇 인물의 진퇴나 크고 작은 정사도 반드시 먼저 이 두 사람에게 품의한 후 (임금에게) 상달(上達)했으니 일이 극히 한심했다.(『숙종실록』 1년 윤5월 27일)”
영의정부터 송시열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나서 임금에게 진달했던 서인 정권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숙종은 선왕의 유지를 이어 정권을 갈아치웠지만 남인의 당세는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숙종의 마음을 끈 것은 그의 정책관이 기존 관료들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타파해 백성들을 살림으로써 그 역량으로 북벌을 단행하자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윤휴가 북벌을 주창하자 북벌 반대론자들은 민생우선론인 양민론(養民論)으로 맞섰다. 윤휴는 양민론이 북벌의 현실화를 막기 위한 사대부들의 허울 좋은 명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동법 이후 민생의 가장 큰 문제는 신역(身役:병역)의 폐단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 의무를 졌는데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했다. 이것이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인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가난한 상민들은 군포 부담에 허리가 휘지만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의무조차 없는 모순된 상황을 바꾸는 것이 민생 개혁의 핵심이었다.
현종 때 각종 재이가 발생하자 군역의 폐단 때문에 하늘이 노했다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현종 말에도 군역개혁론이 논의되었다. 현종 15년(1674) 영의정 김수흥이 “몇 해 전부터 입이 달린 사람이면 모두 ‘재이가 거듭 닥치고 민생이 곤궁하게 된 것은 다 신역의 폐단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변통(變通:개혁)하려고 하면 그 폐단만 말할 뿐 구제의 도(道)는 말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큰 골칫거리입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3일)”라고 말했다.
사실 군역 폐단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 말 모든 양반은커녕 생원·진사를 제외한 유학(幼學)들에게만 포를 받자는 소변통(小變通:온건개혁론)이 나왔을 때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은 이렇게 반대했다.
“국조(國朝) 300년 이래 사자(士子)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혹 이름을 빙자해 역(役)을 면한 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체 선비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 섞어 똑같이 포를 징수하면 어찌 역(役)을 정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13일)”
유생들도 사대부니 군역을 부담할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구상한 것은 전체 사대부들도 똑같은 군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대변통(大變通:급진개혁)이었으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역 부담을 균등하게 하려고 했다.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지패는 종이신분증을 뜻했다. 지패법이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산 이유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지패법은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묶는 오가통법(五家統法)이 전제였다. 오가통법 사목(事目)은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에 따라 모으되, 가구(家口)의 다과(多寡)와 재산의 빈부(貧富)를 물론하고 매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만들고, 한 사람을 통수(統首)로 뽑아 통 안의 일을 맡게 한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고 규정하고 있다.
통-리(里)-면(面)-읍(邑) 순의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인데 ‘재산의 빈부를 물론한다’는 것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가통법은 또 흉년으로 유망한 백성들을 거주지역의 행정단위로 포섭해 전체 민정(民丁) 숫자를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영의정 허적은 지패법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지패법은 구애되는 일이 있으니, 사대부가 상한(常漢:상놈)의 통수 하에 들어가니 일이 매우 불편합니다”고 토로했다. 오가(五家)의 통수가 상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나마 지패법과 호포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허적이 이 정도면 다른 양반들은 볼 것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지패법에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호포법(戶布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호포법은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오가통 내의 모든 호(戶)에 군포를 걷는 법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불편해한다는 명분을 대면서 반발했다. 심지어 벼슬 없는 가난한 유생들에게만 포를 걷는 유포(儒布)제를 실시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자 영상 허적이 “이른바 유포(儒布)의 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신부터 아래까지 무릇 호(戶)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포를 낸다면 어찌 유포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2년 1월 19일)”라고 방어했다. 영의정인 자신부터 호포(戶布)를 낼 것이니 어찌 가난한 유생에게만 걷는 것이냐는 반론이었다.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를 잘 아는 숙종은 “형세를 보아서 시행할 것”이라고 일단 실시를 유보했다.
그러자 조정에 의논시켜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윤휴는 국왕의 결단을 촉구했다.
“마땅히 성상께서 속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먼저 덕음(德音)을 발표하셔서 백성들의 해를 제거하시고, 서서히 호포법이나 구산법을 의논하셔서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나라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소서. (『숙종실록』 3년 12월 5일)”
사망자나 도주자, 갓난아이의 군포를 가족이나 이웃에게 씌우는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의 폐단부터 먼저 없앤 후 호포법이나 구산법을 논의하자는 말이었다. 호포법이 가호(家戶)를 기준으로 군포를 받는 법이라면 구산법은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에게 군포를 받자는 것이니 호포법보다 근본적인 개혁론이었다. 당연히 양반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의정 허적도 족징이나 인징의 폐단 등만 일단 해결하는 온건개혁으로 물러섰다. 서인에 비해 열세인 집권 기반으로 구산제와 호포제를 함께 밀어붙이다 정권이 무너진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런 정책 차이 등으로 집권 남인은 급진개혁파인 윤휴 중심의 청남(淸南)과 온건개혁파인 허적 중심의 탁남(濁南)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윤휴의 생각은 확고했다.
“물고(物故:죽은 사람), 아약(兒弱:갓난아이)에게서 거두는 포(布)는 먼저 탕감해 주고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호포법을 시행한다면, 군병(軍兵)과 공천(公賤)·사천(私賤)의 제도를 모두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
윤휴의 이 말에 대해 『숙종실록』은 허적·김석주·오시수 등이 모두 놀라, “오늘 논의하는 것은 아약과 물고된 자의 폐단을 변통하는데 불과한데 만약 윤휴의 말대로 한다면 국가 제도를 모두 바꾸어야 할 것이니 결단코 행하기 불가합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윤휴의 ‘군병과 공천·사천의 제도를 모두 변통하자’는 말은 군제 개혁을 통해 신분제의 틀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신분제를 완화시켜 국력을 증진시키자는 것이 윤휴의 본뜻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윤휴의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되었다. 벼슬아치들은 상아로 만든 아각패(牙角牌)를 차고, 일반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호패를 차게 했다. 호포제도 사대부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해 국력을 키울 생각이 없었고 효종이 바라마지 않았던 천재일우의 기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직 왕권을 위해 남인,북벌론 버렸다 / 경신환국
숙종은 두 당파를 경쟁시켜 왕권을 극대화하는 길을 택했다. 한 당파를 이용해 다른 당파를 제거할수록 왕권은 강해졌다. 그러나 그는 왕권 강화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을 뿐 강화된 왕권으로 추구할 목표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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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가 숙종 1년(1675) 9월 체부(體府: 도체찰사부) 설치를 주장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 윤휴의 체부 설치 주장에 대신들은 “저 사람들(彼人: 청나라)이 의심할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숙종은 체부 설치를 결정하고 영의정 허적에게 도체찰사를 겸임시켰다. 허적은 부체찰사 후보로 김석주·윤휴·이원정을 천거했고(三望) 숙종은 김석주를 낙점했다. 도체찰사를 남인 허적이 차지했으니 부체찰사는 서인 김석주에게 맡겨 견제하게 한 것인데, 부체찰사로서 체부를 북벌 총지휘부로 꾸리려던 윤휴의 계획은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 북벌을 위한 윤휴의 암중모색이 계속되는 가운데 숙종 6년(1680)이 되었다.
남인 정권은 강경개혁파인 청남과 온건개혁파인 탁남으로 나뉜 채 6년째 집권하고 있었다. 숙종 5년(1679) 일흔 살이 된 허적은 거듭 면직을 요청했으나 숙종은 반려했다. 무려 열 번의 사직상소 끝에 허적은 다시 조정에 나왔고 숙종은 재위 6년 3월 안석과 지팡이, 1등의 음악을 내려주었다. 허적은 영의정으로서 행정권을 장악하고 도체찰사로서 군권을 장악했으나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런 그에게 세종의 장인이었던 영의정 심온과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許潛)이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아 잔치하는 영시일(迎諡日: 시호를 맞이하는 날)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 해 전인 숙종 5년부터 서인들의 공세가 거칠어졌다. 서인들의 공세는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과 윤휴에게 맞춰졌다. 허견은 서자였지만 외아들이었기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를 지낸 인물이었다. 허견에 대한 서인들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은 당초 의도와는 달리 그의 부인 홍예형과 유철의 간통사건이 발각되는 부산물을 낳았다. 숙종은 두 간부를 유배 보내라는 좌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우의정 민희(閔熙)의 건의에 ‘둘의 행위는 개돼지와 같다’면서 사형시키라고 명했다. 숙종 5년(1679) 2월 20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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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적은 “신의 자식이 남의 아내를 납치해 집에 두었다 돌려보냈다면 신이 집에 있으면서 어찌 몰랐겠습니까?”라면서 “포도청은 도둑을 살피기 위하여 만든 것인데, 신이 대신의 지위에 있는데도 그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불평한 대로 포도대장 구일(具鎰)은 허적의 집을 집중 감시했다. 숙종은 “포도청에서 거짓 자백을 받은 것이 명약관화하다”면서 허견을 석방하고 포도대장 구일을 문초했다.
한성부 좌윤 남구만은 “대사헌 윤휴가 서도(西道: 황해·평안)의 금송(禁松) 수천 그루를 베어 강가에 새 집을 짓고 있다고 한다(『숙종실록』 5년 2월 10일)”고 공격했다. 윤휴는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살인을 했는데 증삼이 살인했다고 모친에게 전하자 처음에는 믿지 않던 어머니가 세 번째에는 베 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는 삼지주모(三至走母) 고사를 인용하며 헛소문이라고 항변했다. 성균관 직강(直講) 김정태(金鼎台)가 “관리들이 윤휴의 집에 달려들어 새것, 헌것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일일이 헤아려 조사하고 있다(숙종 5년 2월 13일)”고 항의한 것처럼 서인은 야당이지만 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성부는 서도에 사는 김세보(金世寶)가 선산(先山)의 선영 봉분을 소나무 뿌리가 파고들었다는 명분으로 벌목 허가를 받아 소나무를 윤휴의 집으로 운반했다고 보고했으나 좌상 권대운이 “윤휴가 지은 집은 10여 칸이 되지 않는다”고 방어한 것처럼 정치공세의 성격이 짙었다.
허적의 조부 영시일은 숙종 6년(1680) 4월 1일이었는데, 일부 야사는 이날 남인들이 서인들을 독살하려 했다고 적고 있다. 병조판서 김석주와 광성부원군 김만기 등을 짐새의 독을 이용해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치에 참석한 숙종의 장인 김만기가 남의 술잔을 먼저 빼앗아 마시고 자신의 잔은 ‘벌써 취했다’면서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잔치에 하객으로 참석한 임금의 장인(김만기)을 독살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허적이 김만기와 김석주에게 허견을 다섯 번이나 보내 간곡하게 참석을 요청했다는 점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야사에는 허적이 사당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릴 때, 그리고 잔칫상에도 암탉이 날아들어 술병을 깨뜨렸는데 허적이 잡아 죽이라고 말하면서 “닭은 유(酉)이고, 유는 서인을 뜻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고도 전한다. 닭 유(酉)자는 서(西)자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중관(中官: 내시)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유악(油幄: 기름 칠한 천막)을 갖다 주라고 말했는데 내시가 ‘이미 가져갔다’고 답하자 “한명회도 감히 이런 짓은 하지 못했다”고 크게 노했다.
야사『조야회통(朝野會通)』은"숙종이 궁중 하인에게 해진 옷을 입고 가서 정탐하게 하니 서인은 소수이고 남인들의 숫자와 기세가 성하다는 말을 듣고 제거할 결심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은 군권을 갖고 있는 훈련대장 유혁연과 포도대장 신여철, 총융사 김만기를 급하게 패초했다. 잔치에 참여했던 김만기가 패초를 받고 일어서자 허적은 크게 당황하면서 잔치는 일순간에 파장이 되었다.
『조야회통』은 “좌중이 모두 경악(驚愕)하고 실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고, 『당의통략』은 “허적이 크게 놀라 급히 수레를 타고 따라가 대궐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은 남인 유혁연을 서인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 신여철, 수어사에 김익훈 등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서인 김수항을 영의정, 민정중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이것이 숙종 6년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사전에 짜인 각본처럼 허적과 윤휴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허견에게는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병조판서 김석주는 경기도 이천의 둔군(屯軍)들이 매일 훈련하고 대흥산성에서도 군사훈련을 했는데, 이것이 “훗날 군사를 동원하는 계제(階梯)로 삼으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천의 둔군 훈련이 복선군 추대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는 것이다.
허견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숱한 고문 끝에 4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 길에서 능지처사 당했고 복선군 이남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허적 역시 서인으로 강등당했다가 사형당했다. 윤휴에게는 정사에 관여하는 대비(大妃)를 조관(照管: 단속)하라고 말했다는 점과 자신이 부체찰사로 선임되지 않자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윤휴가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는 공지(共知) 사실은 애써 무시되었다.
윤휴는 5월 20일 사사(賜死)당하는데 『당의통략』은 사약을 마시기 전 “조정에서 어찌해서 유학자(儒者)를 죽이는가?”라고 항의했다고 전한다. 도체찰사부 설치 주장이 역모의 근거로 사용되었으나 『당의통략』이 도체찰사부는 “실상 김석주도 찬성했던 일”이라고 정치보복의 구실에 지나지 않음을 전해 주고 있다.
허적은 국청에서 허견이 윤휴를 부체찰사로 천거하면서 “이 사람이 대의(大義: 북벌)를 밝히려고 하는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허견 역시 윤휴의 북벌론을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간 경신환국은 서인과 남인 사이 당쟁의 결과물로만 인식되고 있었지만 실상 청의 정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 무렵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三藩)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吳世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岳州: 현 호남성 악양)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예송논쟁에서 왕가(王家)를 높이는 3년복설과 북벌을 주창하고 호포제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던 유신(儒臣) 윤휴는 이렇게 정치보복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휴가 죽은 지 나흘 후인 5월 24일 숙종은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민정중의 주청을 받아들여 송시열을 방면했다. 윤휴의 빈자리를 다시 송시열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權道의 말단’ 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 서인의 분열
세상 모든 길에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다. 정도(正道)라고도 불리는 상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고, 권도는 상황에 따른 응용이다. 당쟁이 심해지면 권도의 말단인 정치공작의 유혹이 커져간다. 정치공작이 용납되는 세상은 그 자체로 개혁 대상이 된다. 권도는 정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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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가 김환에게 말하기를) 지금 허새와 허영이 용산(龍山)에 살고 있으니, 네가 피접(避接: 요양)을 핑계로 그 이웃집으로 이사 가 깊이 사귄 후에 장기를 두도록 하라. 네가 이겼을 때 넌지시 ‘나라를 취하는 것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기색을 엿보라. 저들이 괴이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거든 함께 동침하면서 모반에 대해 은밀히 의논하라. 그렇게 살피면 진위(眞僞)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황강문답』『한수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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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허새가 죄를 승복한 뒤에도 모주(謀主)에 대한 한 항목만은 끝내 하나로 귀일되지 않아 연달아 일곱 차례의 형신을 받았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처럼 복평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끝내 거부했다. 한 차례의 형신은 30대를 뜻했고 곤장도 보통 범죄보다 크고 두꺼웠다. 허새가 물고(物故: 죽음)될 위험이 있자 서둘러 사형시키고 허영도 지정률(知情律: 불고지죄)로 처형했다. 이 사건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 김익훈은 남인 유명견(柳命堅)도 역모로 몰려다 여의치 않자 국청의 위관 김수항(金壽恒)에게 수사를 요청했다. 김수항은 “국청의 일은 어명으로 나온 것이나 죄인의 초사에 나온 것이 아니면 감히 거론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등 같은 서인들끼리도 혼선이 생겼다.
김환·이회·한수만은 공신이 되었으나 유명견을 물고 들어갔던 전익대는 유배형에 처해지자 의혹이 증폭되었다. 정치공작이란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이때 사류(士類)들이 다투어 ‘김익훈이 남을 유인해 역모로 만들었으니 그 마음은 자신이 역적이 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익(趙翼)의 손자 승지 조지겸(趙持謙)과 집의 한태동(韓泰東) 등 젊은 서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재수사 요구가 거세자 귀양 간 전익대를 불러 다시 심문했는데 김환이 사주했다고 고백했다. 김환을 국문할 경우 김석주와 김익훈의 사주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국문 없이 귀양 보냈고 전익대는 사형시켰다. 주범은 귀양 가고 종범만 사형 당하자 조지겸은 “협박을 당한 전익대는 죽었는데, 유혹하고 협박한 자(김환) 홀로 죄를 면하겠습니까?(『숙종실록』 9년 4월 16일)”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당의통략』은 “다 김석주와 김익훈이 사주한 것인데, 전익대만 후원자가 없었으므로 혼자 죽었다고 사람들이 일렀다”는 말처럼 물의가 들끓었다. 사헌부 집의 한태동(韓泰東)이 김익훈을 공격한 말이 젊은 서인들의 여론을 말해주고 있다.
“김익훈은 문벌(門閥)을 의지해 백도(白徒: 과거 미급제자)로서 떨쳐 일어나 기록할 만한 단편적인 선행(善行)은 없지만 악(惡)은 한 가지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역적 집안의 재산에 침을 흘려 그 아내(婦: 허견의 부인)까지 차지했고…갑인년(현종 15년) 이후…유현(儒賢: 김장생)의 손자로서…욕된 짓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역적 허적(許積)에게 붙어 노복보다 심하게 아첨했습니다.(『숙종실록』 8년 12월 22일)”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였다. 그러나 남인정권 때는 허적에게 붙었다가 경신환국 후 허적의 재산과 그 며느리까지 빼앗았다는 것이다. 물의가 커져가자 숙종은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를 받아 송시열·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 같은 유현(儒賢)을 출사시켜 조정 분위기를 일신하려 했다.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던 이들은 송시열을 필두로 상경하게 되는데 숙종 8년(1682) 11월 22일 송시열이 여강(驪江: 여주)에 도착하자 숙종은 승지를 보내 예우했다. 그 승지가 조지겸이었는데 권상하는 『황강문답』에서 이때의 정경을 전하고 있다.
“승지 조지겸이 여러 날 동안 (송시열을) 모시고 묵으면서 광남(光南: 김익훈)이 반역으로 유도한 나쁜 마음씨를 자세히 말하니 우암이 듣고는 역시 무상(無狀)한 짓이라면서 비록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젊은 무리(少輩)들이 ‘장자(長者)의 소견도 우리들과 같다’고 크게 기뻐했다.(권상하, 『황강문답』 『한수재선생문집』)”
그러나 송시열이 입경(入京)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우암이 서울에 들어오자 문곡(文谷: 김수항)·노봉(老峯: 민정중)·청성(淸城: 김석주)이 사건의 본말을 다 알렸으며, 또 광성(光城: 김익훈)의 가족이 찾아와 그 곡절을 호소했다. 우암이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고 ‘일이 과연 이렇다면 김익훈은 죄가 없다’고 말했는데 젊은 무리들이 크게 분개하면서, ‘장자(長者)도 사사로이 편애하여 처음의 견해를 바꾸는가’라고 말했다. 이렇게 조지겸·한태동이 비로소 각립(角立)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무수히 많았다.(『황강문답』)”
선조 8년(1575) 을해당론으로 사림이 동서로 분당된 후 일찍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된 동인과는 달리 100년 이상 단일 정체성을 유지하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송시열 연보는 그가 숙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신이 젊어서 김장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 손자 익훈이 시론(時論)에 죄를 얻어 장차 죽게 되었습니다. 신은 조목(趙穆: 이황의 제자)이 이황의 자손을 규계(規戒)한 것처럼 하지 못한 것으로서 신은 조목에 대한 죄인입니다.(『송자대전』연보, 숭정(崇禎) 56년, 계해.)”
송시열이 김익훈을 변호하고 나서자 젊은 서인들은 분개했다. 젊은 서인들이 반대 당에 대한 정치공작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여야 사이에 공존(共存)의 정치를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김석주를 비롯한 서인 노장파의 견해를 듣고 김익훈을 변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공작을 옹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천까지 올라온 윤증(尹拯)은 정세를 관망하며 입경(入京)하지 않았다. 박세채가 과천까지 내려가 윤증을 만났는데, 『숙종실록(9년 5월 5일)』과 『당의통략』은 이때 윤증이 세 가지 출사 조건을 내걸었다고 밝히고 있다.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三戚: 김만기·김우명(김석주)·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당의통략』)”
박세채는 한참 침묵하다가 “모두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했고, 윤증은 “세 가지를 고칠 수 없다면 나는 출사하지 않겠소”라면서 귀향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은 윤증을 새 영수로 삼았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김석주)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覇道) 정객에 불과했다.
‘차기 후계’ 암투가 임금의 가정을 파탄내다 / 미인계 정국
정당정치는 여야의 공존이 전제조건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피력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공존의 요체다. 그러나 대립이 격화되는 정치 현실은 상대를 제거하고 싶은 독존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공존의 정치가 파괴되면 패자만 화를 입는 것이 아니다.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정권이 바뀌면 과거 상대를 찔렀던 창은 나를 겨누게 된다.
숙종 14년(1688) 11월 21일. 8명의 노비가 메는 옥교(屋轎:지붕 있는 가마)가 궐 안에 들어섰다. 옥교에 탄 여인을 알아본 지평 이익수(李益壽)는 사헌부 금리(禁吏)와 조례(<7681>隷:관아 노비)를 시켜 여인을 끌어내리게 한 다음 노비들을 처벌하고 상소를 올렸다.
“신(臣)이 들으니 ‘장소의(張昭儀:장옥정)의 어미가 8인이 메는 옥교를 타고 대궐에 왕래한다’고 합니다. 소의의 어미는 한 천인(賤人)인데 어찌 감히 옥교를 이렇게 무엄(無嚴)하게 드나들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14년 11월 21일)
숙종은 화가 났다. 그는 환관에게 ‘여인을 끌어내린 사헌부 금리와 조례를 잡아다 누가 사주했는지 엄한 형벌을 써서 알아내라’고 명했다. 숙종은 “연전(年前)에 귀인(貴人: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 사헌부에서 이렇게 모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 궁중의 시녀들도 일개 천인에 불과하지만 품계가 상궁에 오르면 법에 의거해 가마를 탄다. … 하물며 왕자 외가에서 전교(傳敎)로 출입하는데…”라고 화를 냈다. 혹독한 형신을 받은 금리와 조례 두 사람은 귀양을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섰다가 곧 죽고 말았다. 옥교에 탄 여인은 10월 27일 숙종이 바라던 왕자를 낳은 후궁 장씨의 모친 윤씨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차기 왕위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다툼이었다.
“신(臣)이 들으니 ‘장소의(張昭儀:장옥정)의 어미가 8인이 메는 옥교를 타고 대궐에 왕래한다’고 합니다. 소의의 어미는 한 천인(賤人)인데 어찌 감히 옥교를 이렇게 무엄(無嚴)하게 드나들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14년 11월 21일)
숙종은 화가 났다. 그는 환관에게 ‘여인을 끌어내린 사헌부 금리와 조례를 잡아다 누가 사주했는지 엄한 형벌을 써서 알아내라’고 명했다. 숙종은 “연전(年前)에 귀인(貴人: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 사헌부에서 이렇게 모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 궁중의 시녀들도 일개 천인에 불과하지만 품계가 상궁에 오르면 법에 의거해 가마를 탄다. … 하물며 왕자 외가에서 전교(傳敎)로 출입하는데…”라고 화를 냈다. 혹독한 형신을 받은 금리와 조례 두 사람은 귀양을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섰다가 곧 죽고 말았다. 옥교에 탄 여인은 10월 27일 숙종이 바라던 왕자를 낳은 후궁 장씨의 모친 윤씨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차기 왕위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다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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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장희빈이라 불리게 되는 소의 장씨는 중인 역관(譯官) 집안의 서녀(庶女)였다. 숙부 장현(張炫)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인 데다 수역(首譯:역관의 우두머리)으로서 숙종 3년(1677)에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그만큼 남인 정권과 가까웠는데 이 때문에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종친 복창군(福昌君)과 함께 유배당했다.
서인들은 소의 장씨(장옥정)를 남인들의 여인계로 보았고 실제로 그런 성격이 있었다. 장옥정은 남인들과 가까웠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전의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숙종실록』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전하고 있다. 대비의 후원을 업은 장옥정은 막 인경왕후 김씨를 잃은 청년 임금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제동이 걸렸다.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 김씨가 장씨를 강제로 출궁시킨 것이다. 서인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는 국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은 민간에 거주할 수 없다는 관례마저 깨고 궁에서 쫓아냈다. 명성왕후는 1681년(숙종 7년) 숙종을 서인 명가인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재혼시켰으니 그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다.
그러나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 9년(1683)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복상기간이 끝나자 자의대비의 권고를 받은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입궐시켰다. 서인들은 당황했다. 인현왕후 민씨가 왕자는커녕 공주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옥정이 왕자라도 생산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숙종 12년(1686) 7월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은 지진이 발생하자 『사기(史記)』에 ‘외척(外戚)이나 여알(女謁:궐내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이 극성하면 지진이 온다’고 써 있다면서 이렇게 상소했다.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중의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장녀(張女:장옥정)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숙종실록』12년 7월 6일)
장옥정 때문에 재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숙종 6년(1680) 11월 혜성이 나타나자 『숙종실록』은 ‘장녀(張女)’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 이때’였다며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어느 날 내전(內殿:인현왕후)이 명하여 (장씨의)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는 『숙종실록』(12년 12월 10일)의 기록처럼 민씨 역시 질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숙종실록』이 “내전(인현왕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인현왕후는 질투보다 당익(黨益)을 앞세울 줄 아는 냉혹한 정객이기도 했다. 인현왕후의 권유로 입궐한 여인은 숙종이 “연전에 귀인(貴人:귀인 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라고 예를 들은 김 귀인이다.
그러나 김 귀인이란 미인계는 장옥정의 상대가 되지 못해 숙종은 재위 12년 12월 장씨를 숙원(淑媛:내명부 종4품)으로 책봉했다. 내명부(內命婦)는 정5품 상궁까지는 궁녀, 종4품 숙원부터 정1품 빈(嬪)까지는 후궁이었다. 장씨가 숙원에 책봉되자 사간원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으로 인함이며 전하가 장씨를 책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臣民)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숙종실록』12년 12월 14일)라고 비난할 정도로 서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장옥정은 서인들의 이런 반발을 비웃듯 버젓이 왕자를 생산했다. 숙종은 재위 14년 만에 처음으로 왕자를 낳았으나 집권 서인이 하례하지 않고 왕자의 외할머니까지 끌어내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숙종은 왕자 탄생 3개월이 채 안 된 재위 15년(1689) 1월 10일 전·현직 대신과 6경(六卿:판서), 판윤(判尹:서울시장), 삼사(三司) 장관을 명소했다. 신년 초의 느닷없는 명소였으므로 많은 대신이 모이지 못했다. 숙종은 “국본(國本:세자)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만약 지체시키고 어정거리고 관망(觀望)하면서 감히 이의(異議)가 있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국본(國本) 운운한 것은 갓 낳은 왕자를 후사로 결정할 속셈을 표명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러 신하가 대답할 바를 알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으니 물러가기는 하겠습니다만 또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을 필두로 대부분이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단 하나였다. ‘중궁(中宮:인현왕후)께서 춘추가 한창이시니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남용익이 여러 대신과 2품 이상에게 널리 의논해 처리하자고 요청했으나 숙종은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고 거절하고 갓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했다. 닷새 후인 1월 15일에는 이 사실을 종묘·사직에 고묘(告廟)했다. 왕조 국가에서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하면 번복할 수 없으므로 장희빈이 낳은 아이가 숙종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묘 15일 후인 2월 1일 서인 영수 송시열이 재논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파란이 일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哲宗:재위 1085~1100)이 10세가 되도록 번왕(藩王)으로 있다가 신종(神宗:재위 1067~1085)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다’는 예를 들면서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처였다고 비판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라도 종묘에 고묘(告廟)한 사안에 이의를 제기한 자체가 왕권 도전이란 혐의를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숙종은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홍문관원들을 불러 노기 띤 목소리로 “일이 결정되기 전에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지만 이미 결정된 후에도 말하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반드시 있다”고 비판했다.
숙종은 또 ‘명나라 황제도 황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封號)한 일이 있다’고 말해 송시열이 든 송나라 철종의 예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숙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소론 여성제(呂聖齊)로 대신했으며 남인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 남인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2월 4일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10년 전 경신환국 때 당한 정치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서인들은 소의 장씨(장옥정)를 남인들의 여인계로 보았고 실제로 그런 성격이 있었다. 장옥정은 남인들과 가까웠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전의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숙종실록』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전하고 있다. 대비의 후원을 업은 장옥정은 막 인경왕후 김씨를 잃은 청년 임금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제동이 걸렸다.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 김씨가 장씨를 강제로 출궁시킨 것이다. 서인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는 국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은 민간에 거주할 수 없다는 관례마저 깨고 궁에서 쫓아냈다. 명성왕후는 1681년(숙종 7년) 숙종을 서인 명가인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재혼시켰으니 그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다.
그러나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 9년(1683)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복상기간이 끝나자 자의대비의 권고를 받은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입궐시켰다. 서인들은 당황했다. 인현왕후 민씨가 왕자는커녕 공주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옥정이 왕자라도 생산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숙종 12년(1686) 7월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은 지진이 발생하자 『사기(史記)』에 ‘외척(外戚)이나 여알(女謁:궐내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이 극성하면 지진이 온다’고 써 있다면서 이렇게 상소했다.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중의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장녀(張女:장옥정)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숙종실록』12년 7월 6일)
장옥정 때문에 재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숙종 6년(1680) 11월 혜성이 나타나자 『숙종실록』은 ‘장녀(張女)’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 이때’였다며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어느 날 내전(內殿:인현왕후)이 명하여 (장씨의)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는 『숙종실록』(12년 12월 10일)의 기록처럼 민씨 역시 질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숙종실록』이 “내전(인현왕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인현왕후는 질투보다 당익(黨益)을 앞세울 줄 아는 냉혹한 정객이기도 했다. 인현왕후의 권유로 입궐한 여인은 숙종이 “연전에 귀인(貴人:귀인 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라고 예를 들은 김 귀인이다.
그러나 김 귀인이란 미인계는 장옥정의 상대가 되지 못해 숙종은 재위 12년 12월 장씨를 숙원(淑媛:내명부 종4품)으로 책봉했다. 내명부(內命婦)는 정5품 상궁까지는 궁녀, 종4품 숙원부터 정1품 빈(嬪)까지는 후궁이었다. 장씨가 숙원에 책봉되자 사간원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으로 인함이며 전하가 장씨를 책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臣民)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숙종실록』12년 12월 14일)라고 비난할 정도로 서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장옥정은 서인들의 이런 반발을 비웃듯 버젓이 왕자를 생산했다. 숙종은 재위 14년 만에 처음으로 왕자를 낳았으나 집권 서인이 하례하지 않고 왕자의 외할머니까지 끌어내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숙종은 왕자 탄생 3개월이 채 안 된 재위 15년(1689) 1월 10일 전·현직 대신과 6경(六卿:판서), 판윤(判尹:서울시장), 삼사(三司) 장관을 명소했다. 신년 초의 느닷없는 명소였으므로 많은 대신이 모이지 못했다. 숙종은 “국본(國本:세자)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만약 지체시키고 어정거리고 관망(觀望)하면서 감히 이의(異議)가 있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국본(國本) 운운한 것은 갓 낳은 왕자를 후사로 결정할 속셈을 표명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러 신하가 대답할 바를 알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으니 물러가기는 하겠습니다만 또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을 필두로 대부분이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단 하나였다. ‘중궁(中宮:인현왕후)께서 춘추가 한창이시니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남용익이 여러 대신과 2품 이상에게 널리 의논해 처리하자고 요청했으나 숙종은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고 거절하고 갓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했다. 닷새 후인 1월 15일에는 이 사실을 종묘·사직에 고묘(告廟)했다. 왕조 국가에서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하면 번복할 수 없으므로 장희빈이 낳은 아이가 숙종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묘 15일 후인 2월 1일 서인 영수 송시열이 재논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파란이 일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哲宗:재위 1085~1100)이 10세가 되도록 번왕(藩王)으로 있다가 신종(神宗:재위 1067~1085)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다’는 예를 들면서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처였다고 비판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라도 종묘에 고묘(告廟)한 사안에 이의를 제기한 자체가 왕권 도전이란 혐의를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숙종은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홍문관원들을 불러 노기 띤 목소리로 “일이 결정되기 전에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지만 이미 결정된 후에도 말하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반드시 있다”고 비판했다.
숙종은 또 ‘명나라 황제도 황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封號)한 일이 있다’고 말해 송시열이 든 송나라 철종의 예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숙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소론 여성제(呂聖齊)로 대신했으며 남인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 남인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2월 4일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10년 전 경신환국 때 당한 정치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애욕에 눈먼 임금 정치보복을 許하다 / 기사환국
노나라 대부 계강자(季康子)가 ‘무도한 사람을 죽여 도(道)가 있는 데로 나가게 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정치를 하면서 어찌 죽임(殺)을 수단으로 쓰겠는가?”라고 반대했다. 모두 공자의 제자를 자처했으나 상대방을 포용하기보다 배척하기를 좋아했던 군주와 당파들이 서로 만나 살(殺)이 난무했던 증오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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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김수항의 사사는 허용했으나 송시열에 대해선 일단 거부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은 어떤 사람이 우의정 김덕원에게 “김수항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지자 김덕원이 “우리 덕이(德而)는 어찌하겠는가?”라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숙종실록』은 “덕이는 오시수(吳始壽)의 자(字)인데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당연한 보복(報復)이라는 뜻이다(15년 윤 3월 28일)”라고 덧붙이고 있다. 숙종 원년(1675) 청 사신 원접사((遠接使)였던 오시수는 청나라 황제가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고 했다는 군약신강(君弱臣强) 등의 발언을 전했다가 경신환국 이후 서인에 의해 사형당했다. 김수항의 죽음이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보복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시수의 사형이 억울하다면 김수항도 마찬가지였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낳는 악순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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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에, 본부인 고씨는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에 추증되었고, 궁중에 옥교를 타고 들어왔다 모욕을 당했던 장씨의 생모 윤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에 봉해졌다. 장형의 묘갈(墓碣)을 다시 세우는 데 1500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남인 정권이라고 해서 뚜렷하게 드러난 잘못이 없는 왕비 폐출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왕비 폐출과 남인이 원하는 송시열의 죽음을 맞바꾸기로 결심했다. 4월 21일 대사헌 목창명(睦昌明) 등이 제주도에 유배 간 송시열을 잡아다 국문(鞠問)하자고 청하자 숙종은 느닷없이 왕비 민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세상 풍속이 말세로 떨어질수록 인심이 점점 악해지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중궁은 관저의 덕풍(關雎德風:주 문왕의 아내 같은 덕풍)은 없고 투기의 습관이 있다. 병인년(丙寅年:숙종 12) 희빈(禧嬪:장씨)이 처음 숙원이 될 때부터 귀인(후궁 김씨)과 당(黨)을 이루어 성내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
신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들 앞에서 어머니를 욕하는 격이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왕비 민씨가 ‘꿈에 선왕(先王:현종) 부부가 자신과 귀인 김씨는 자손이 많겠지만 숙원 장씨는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궐내에 있으면 경신년(庚申年:숙종 6)에 실각한 사람들(남인)에게 당부(當付)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선왕까지 투기에 끌어들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4월 23일은 왕비 민씨의 생일이었는데 숙종은 영의정 권대운 등의 하례를 막으면서 민씨를 후궁 척 부인(戚夫人)을 인체(人<5F58>:돼지우리에 넣은 사람)로 만들고 소제(少帝)를 살해했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 여후(呂后) 등과 비교하면서 “하루인들 이런 사람이 일국의 국모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라고 힐난했다. 노골적인 왕비 폐출 선언이었다. 드디어 4월 25일 전 사직(司直) 오두인(吳斗寅)을 소두(疏頭:상소의 우두머리)로 86인이 왕비 폐출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글은 전 목사 박태보(朴泰輔)가 쓴 것이었다.
날이 이미 어두웠고 승지 등이 ‘역옥(逆獄)이 아니니 친국(親鞫)할 필요가 없다’고 권했으나 숙종은 “이는 모반대역(謀反大逆)보다 더 심하다”면서 “내가 이들 무리를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심야 친국을 강행했다. 『숙종실록』이 상소가 찢어진 부분이 있었는데 “임금의 분노가 극심해서 손으로 쳤기 때문”이라고 전할 정도였다. 숙종은 박태보에게 “이러한 독물(毒物)은 곧바로 머리를 베어야 된다”고 극언하면서 “만약 저(왕비)가 옳다면 나는 이광한(李光漢:김익훈의 심복)이 무고(誣告)한 것과 같은 것이니 나를 폐출시켜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늘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 아니라 애욕에 눈이 먼 필부에 불과했다.
숙종이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부인(婦人:왕비)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려 한다”고 힐난하자 박태보는 “이미 전하를 배반했다면 중전을 위하여 절의를 세운다 한들 어떻게 절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숙종은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라면서 “매우 쳐라, 매우 쳐라”를 반복했다. 진도(珍島)로 귀양에 처해졌던 박태보는 5월 4일 과천까지 갔다가 장독(杖毒)으로 죽고 말았다. 박태보가 죽은 당일 숙종은 드디어 왕비 민씨를 폐출해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사흘 후에는 도승지를 역임한 오두인도 파주에서 죽었는데 박태보는 39세, 오두인은 66세의 노구였다. 박태보는 이미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쓰는 것을 반대하고 노소 분당 때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했던 소론이었으나 왕비 폐출은 원칙의 문제라고 생각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은 ‘송시열이 제주에서 나치(拿致)되어 (서울에서 국문 받기 위해)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이 이미 폐출된 것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송시열은 그러나 서울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국문 받기 위해 상경하던 6월 3일 정읍에서 만난 금부도사가 사약(賜藥)을 내민 것이었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숱한 논란의 중심에 있던 83세의 노구(老軀)는 결국 사형으로 끝났다. 9년 전 허적과 윤휴의 사형을 남인들이 정치보복으로 여긴 것처럼 김수항과 송시열의 사형 역시 서인들은 정치보복으로 여겼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후궁 장씨가 사실상 왕비였으나 숙종 14년에 사망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왕비책봉식만 거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숙종은 재위 16년(1690)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10월 22일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권을 노린 남인과 왕비 자리를 노린 장옥정의 결합이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실록』은 “송시열의 상(喪) 때 서울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 모여 곡한 사람이 수천 명을 넘었는데, ‘각자 그 종 5, 6인씩만 내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0년 4월 1일)”고 전한다. 노론가(家)의 노비들을 동원해 군사로 쓸 수 있다는 뜻이리라. 노론의 이런 분노는 남인 정권과 장희빈을 향한 것이었지만 여차하면 숙종을 직접 겨냥할 수도 있었다.
미인계로 흥한 남인 미인계로 망하다 / 갑술환국
신성한 왕권의 전제는 국왕이 하늘을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사실에 온 나라가 동의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국왕은 초월적인 위치에 서서 정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숙종은 개인의 애욕(愛慾)을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해 잦은 정권교체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국왕은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왕위에 앉은 필부(匹夫)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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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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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인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신년에 정권을 빼앗겼을 때 허적·윤휴를 비롯한 많은 당인이 사형당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기사년 정권을 되찾았을 때 김수항·송시열 등 많은 서인을 사형시킨 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정권을 빼앗기면 대대적인 정치보복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공존의 틀이 붕괴된 붕당정치는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됐다. 남인들은 서인들의 환국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가 선제 공세를 펼쳤다. 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閔<9EEF>)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咸以完)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염(閭閻)에서 떠도는 말로는 은화(銀貨)를 모아 환국을 도모하는 자가 있는데, 폐비와 귀인(貴人)도 은화를 냈다고 한다(20년 윤5월 22일)”고 전한다. 쫓겨난 폐비 민씨와 귀인 김씨(김수항의 손녀)가 서인들의 환국을 위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말이었다. 또한 김춘택은 숙종의 고모이자 효종의 차녀인 숙안공주(淑安公主)와도 연결돼 환국을 도모했다. 공주의 아들 홍치상(洪致祥)은 숙종 13년(1687)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에 제수되자 ‘후궁 장씨의 모친이 조사석의 여종 출신이기 때문에 이 연줄로 정승이 되었다’는 말을 했다가 숙종 15년 사형당했던 것이다. 이 원한으로 숙안공주도 서인들의 환국 모의에 적극 가담했다.
환국 기도에 대한 의금부 수사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중인이나 상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역관(譯官) 김천민의 아들인 동래 상인 김도명과 역관 김기문의 아들 김보명, 역관 변이보의 아들 변학령은 500냥씩의 정치자금을 냈고, 지전(紙廛) 상인 이기정과 동래상인 박세건도 200냥씩을 냈는데, 40냥을 낸 중인 강만태는 “일이 성사된 후에 좋은 벼슬을 준다고 해서 은화를 내고 동참했다”고 자백했다. 양인(良人)들이 더 이상 정치를 사대부만의 전유물로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의식이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金海成)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
“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門外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覆逆)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覆逆)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三司)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 간쟁 자체를 막겠다는 뜻이었다.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숙종 20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송시열·김수항·민정중 등 사사당했거나 유배지에서 죽은 서인 인사들이 복권되었고,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제사 대상에서 쫓겨남)당한 서인의 종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다시 제향되었다. 숙종의 느닷없는 변심에 남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남인들이 후궁 장씨를 이용한 미인계로 정권을 잡은 것처럼 후궁 최씨를 이용한 서인들의 미인계였다. 인현왕후의 동생 민진원(閔鎭遠)은 『단암만록(丹巖漫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숙빈(淑嬪:최씨)은 기사년 이후 임금의 굄을 받자 장씨에게 시샘과 고통을 크게 당해 거의 목숨을 보존할 수 없었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奉保夫人)이 인경왕후의 본가와 친밀했는데, 갑술환국 때에도 세상에서는 ‘김진귀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해 숙빈에게 계책을 주어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들려주어 대처분(大處分)이 있었다’고 하였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서인들을 역모 혐의로 고변했던 함이완은 물론 우의정 민암과 아들 민종도, 이의징·조사기·노이익과 왕비 장씨의 친신(親信) 궁녀 정숙 등이 사형당했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남인들은 14명이 사형당하고 67명이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왕비 장씨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비 민씨가 다시 복위됐다. 그러나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양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거꾸로 강만태는 난언(亂言) 혐의로 참형(斬刑)당하고 가산은 적몰(籍沒)됐으며, 김도명·변학령 등은 석방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숙종 때의 잦은 환국과 왕비 교체는 정당정치의 말기적 현상에 국왕까지 가담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잦은 정권교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원칙을 상실한 잦은 환국은 국왕과 왕비마저도 파당적 지위로 격하시켰다.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 후계경쟁
정치가는 권력을 강화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권력 강화가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조선은 국왕의 권력이 강하면 사대부의 세력이 억제되면서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으나 숙종은 그렇지 못했다. 숙종은 조선 후기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군주지만 권력을 백성들과 나눌 줄 몰랐던 실패한 군주이자 외로운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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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탈환한 서인들이 남인들에 대한 정치보복에 몰두하는 동안 조선은 다시 대기근에 접어들고 있었다. 숙종 20년 9월 28일 비변사에서 “올해는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의 손상이 특히 심한데, 연변(沿邊)은 가뭄이 들기도 하고 벌레가 생기기도 하여 피해가 한 가지만이 아니다”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듬해부터 3년간 흉년이 거듭되는 상란(喪亂)의 전주곡이었다.
『숙종실록』 21년 4월 1일조는 “이해 큰 가뭄이 들었다. 거센 바람이 연이어 불고 서리가 거듭 내려 양맥(兩麥:보리와 밀)이 여물지 않았으며 파종 시기도 놓쳐 드디어 큰 흉년이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가뭄으로 파종을 못하게 되자 숙종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숙종 21년 4월 21일 첫 기우제를 지낸 후 25일, 30일 거듭 기우제를 지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자 5월에는 무려 7차례나 기우제를 지냈다. 5월 10일 남교(南郊)의 기우제 때 숙종은 제문을 작성하는 신하에게 “임금 자신을 책망하고 죄가 있다는 뜻을 상세하게 기술하도록 시켰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사후 보복이 특기인 숙종의 잘못을 신하가 적시할 수는 없었다.
『숙종실록』 21년 4월 1일조는 “이해 큰 가뭄이 들었다. 거센 바람이 연이어 불고 서리가 거듭 내려 양맥(兩麥:보리와 밀)이 여물지 않았으며 파종 시기도 놓쳐 드디어 큰 흉년이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가뭄으로 파종을 못하게 되자 숙종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숙종 21년 4월 21일 첫 기우제를 지낸 후 25일, 30일 거듭 기우제를 지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자 5월에는 무려 7차례나 기우제를 지냈다. 5월 10일 남교(南郊)의 기우제 때 숙종은 제문을 작성하는 신하에게 “임금 자신을 책망하고 죄가 있다는 뜻을 상세하게 기술하도록 시켰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사후 보복이 특기인 숙종의 잘못을 신하가 적시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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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으로 어린아이들을 버리는 백성들이 속출하자 숙종 21년 12월에는 유기아(遺棄兒) 수양법(修養法)까지 만들었다. 유기아를 거둔 사람에게 양식을 지급하거나 자녀나 노비로 삼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다. 숙종은 재위 21년 10월 7일 “밥을 대하면 목이 메인다”면서 자신의 잘못을 직언하라고 구언(求言)했고, 부호군 조형기(趙亨期)가 응지(應旨) 상소해 왕실에 바치는 공물(貢物)의 숫자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공물 1관(款)을 또 감삭(減削)하는 것은 결코 불가하다”면서 거부했다. 사관은 조형기가 한 여러 건의 중 “마침내 시행한 것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 때도 진휼소를 설치해 기민(饑民)들을 먹이고, 신역(身役)을 감해주는 등 외형적으로는 기근 극복에 나섰지만 백성들은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1671)처럼 국가총력체제는 아니라고 느꼈다.
흉년 3년째인 숙종 23년(1697) 4월 숙종은 비망기에서 “길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다. 관창(官倉)의 곡식도 다 떨어지고 개인의 비축도 거덜났으니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자신이 솔선수범할 생각은 없었다. 감선(減膳: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나 철악(撤樂:음악을 철폐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흉년 3년째인 숙종 23년(1697) 4월 숙종은 비망기에서 “길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다. 관창(官倉)의 곡식도 다 떨어지고 개인의 비축도 거덜났으니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자신이 솔선수범할 생각은 없었다. 감선(減膳: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나 철악(撤樂:음악을 철폐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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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준(吳命峻)이 팔도에 구언(求言)하는 하유를 내리게 청했으나 상은 불허했고, 또 2품 이상과 삼사 관원을 불러 재이(災異) 극복책을 묻기를 청했으나 이것도 불허했다.(『숙종실록』 23년 9월 28일 )”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勸分)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숙종 23년(1697) 4월 광주(廣州)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中江開市)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淸)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숙종 23년(1697)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朴泰淳)이 개시(開市)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 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숙종 24년(1698)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西路: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숙종 27년(1701) 전국적인 재해가 또 발생한 가운데 병세가 위중해진 인현왕후 민씨는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희빈 장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민씨의 죽음은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남인 행부사직 이봉징(李鳳徵)은 장희빈은 한때 왕비였으므로 다른 후궁들과는 복제가 달라야 한다고 상소했다. 다른 후궁들보다 높은 자리에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봉징을 전라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시켰다. 남인들의 의도와는 달리 왕비 민씨의 죽음은 오히려 장씨를 사지로 몰았다. 왕비의 죽음을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고 몰았던 것이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9월 25일에는 ‘비망기’를 내려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자살)을 명했다. 숙종은 ‘비망기’에서 “옛날 한(漢) 무제(武帝)가 구익(鉤<5F0B>) 부인을 죽인 것은 결단이었다”면서 장씨를 죽이는 것이 “국가를 위하고 세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제의 후궁 구익 부인은 소제(昭帝)의 생모인데, 『사기(史記)』 ‘외척세가(外戚世家)’는 무제가 “임금이 어린데 모친이 장성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에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숙종은 재위 16년(1690) 10월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교명문(敎命文)’에서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여지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라고 반포했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低下)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李濡)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庭請: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이이명)과 ‘정유독대(丁酉獨對)’를 실시했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43년 7월 28일)”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숙종은 재위 46년(1720)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뒷자리는 자신이 제거하려던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차지했다. 잇따른 배신과 살육으로 왕권은 강화시켰으나 백성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숙종 혼자만의 왕권강화였다.*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勸分)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숙종 23년(1697) 4월 광주(廣州)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中江開市)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淸)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숙종 23년(1697)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朴泰淳)이 개시(開市)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 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숙종 24년(1698)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西路: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숙종 27년(1701) 전국적인 재해가 또 발생한 가운데 병세가 위중해진 인현왕후 민씨는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희빈 장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민씨의 죽음은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남인 행부사직 이봉징(李鳳徵)은 장희빈은 한때 왕비였으므로 다른 후궁들과는 복제가 달라야 한다고 상소했다. 다른 후궁들보다 높은 자리에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봉징을 전라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시켰다. 남인들의 의도와는 달리 왕비 민씨의 죽음은 오히려 장씨를 사지로 몰았다. 왕비의 죽음을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고 몰았던 것이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9월 25일에는 ‘비망기’를 내려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자살)을 명했다. 숙종은 ‘비망기’에서 “옛날 한(漢) 무제(武帝)가 구익(鉤<5F0B>) 부인을 죽인 것은 결단이었다”면서 장씨를 죽이는 것이 “국가를 위하고 세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제의 후궁 구익 부인은 소제(昭帝)의 생모인데, 『사기(史記)』 ‘외척세가(外戚世家)’는 무제가 “임금이 어린데 모친이 장성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에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숙종은 재위 16년(1690) 10월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교명문(敎命文)’에서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여지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라고 반포했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低下)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李濡)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庭請: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이이명)과 ‘정유독대(丁酉獨對)’를 실시했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43년 7월 28일)”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숙종은 재위 46년(1720)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뒷자리는 자신이 제거하려던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차지했다. 잇따른 배신과 살육으로 왕권은 강화시켰으나 백성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숙종 혼자만의 왕권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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