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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38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3)/2차기포 4. 2차 기포안핵사 이용태, 농민봉기의 물줄기를 바꿔놓다.고부관아를 습격한 뒤 각자 생업으로 돌아간 농민들은 이것으로 역사의 한 장이 매듭지어졌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고부 현감으로 새로 부임한 신관 사또 박원명이 진심으로 선처를 베풀어 민중의 상처를 씻어 주려고 노력함으로서 고부 민란은 원만히 해결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덮어두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무휼하고 진상이 어떠한 지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안핵사란 조선 후기에 여기저기서 민란이 발생하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임시직이었는데 이것이 농민봉기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용태는 고부의 안핵사로 부임해오자마자 .. 2009. 9. 14.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2)/전봉준의 출생 Ⅱ.전봉준의 출생과 성장 1.출생 전봉준은 1855년, 아버지 전기창(창혁)과 어머니 언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675만 명 (남자 339만, 여자 335만 명), 호수戶數는 159만여 호였다. 한국사에서 역적, 반역으로 낙인찍힌 인물들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출생연도나 가족관계 등을 알 수가 없다. 신돈, 장보고, 궁예, 정도전, 이시애, 임꺽정 등의 출신연도가 모두 의문부호(?)로 되어 있는 것도 남아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태어난 전봉준도 근래 들어 농민혁명가, 장군, 선생 등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극히 적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정읍 이평면 조소리, 정읍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정읍 덕천면 시목리, 전주 등이 제기되어 왔는데, .. 2009. 9. 9.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1)/새야새야 파랑새야 "전봉준과 갑오농민혁명" 을 6회로 나눠 싣습니다. 발췌, 참고 도서는 맨 마지막에 싣습니다.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으로 우리에게알려진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 이 사진은 1895년 2월,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무라카미 기자가 서울의 일본영사관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으로 이송될 때 촬영했다.' 는 기사로 실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어릴 적 우리 입을 통해 불려지고 전해?왔던 이 노래의 주인공인 녹두장군 전봉준, 무너져가던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희망 잃은 백성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일어섰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전봉준, 오늘날에 와서야 위대한 지도자로 다시 평가되고 있지만 근래까지도 그를 입에 .. 2009. 9. 4.
누가 왕을 죽였는가(최종)- 제 26대 고종 8장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1852-1919년, 재위 1863-1907년 12년 1월20일종척宗戚과 귀족 등을 불러들여 만났다. 태왕 전하의(고종) 병세가 깊기 때문에 병문안 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자작子爵 이기용과 이완용에게 별도로 들어와 숙직하도록 명하였다. 12년 1월20일태왕 전하의 병이 깊어 동경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볼 알렸다. 12년 1월21일묘시卯時에 태왕전하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다음날 죽은 사람의 혼령을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해외 망명계획과 식혜서기 1863년 12월,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창덕궁에서 사망했다. 철종은 14년간 재위에 있었지만 강화도령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재위기간 동안 사실상의 임금은 그가 아니라 '도령'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2008. 10. 21.
누가 왕을 죽였는가(7)- 제 22대 정조 7장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24년간) 24년6월27일 (사망 전날)약원藥院 도제조 이시수가 “탕약을 즉시 의논해 정해야겠는데 잠시 물러가 의논해 들여올까요?” 라고 물으니, “바깥마루로 나가 앉아 의논하여 들여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시수가 여러 의관과 함께 탕약을 의논해 정한 다음 가감팔물탕을 방문해 드리니, 임금이 어의 강명길에게 “이 약이 속에서 막히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강명길이 “원방元方 가운데 건지황을 감하였으니 반드시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고 아뢰자, 임금이 “오늘은 두 번을 복용해야 할 것이니 인삼 두 돈을 한 돈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24년6월28일 (사망 당일)왕대비(정순왕후)가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 2008. 10. 20.
누가 왕을 죽였는가(6)- 제 20대 경종 6장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1588-1724년. 재위 1720-1724(4년간) 4년8월21일(사망 3일 전)여러 의원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는 매우 꺼려하는 것이었다. 4년8월24일(사망 당일)세제世弟(영조)가 “인삼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고 말하자 어의 이공윤이 “인삼차를 쓰면 안됩니다. 제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여기에 인삼차를 올리면 능히 기氣를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고 반대했는데, 세제가 “사람이란 본 시 자기의 의견을 네세울 데가 있기는 하나 지금이 어떤 때라고 자기 의견을 세우고 인삼을 못 쓰게 하는가” 라고 하였다. 31년5월21일역적 신치운이 복주伏誅되었다. 사신史臣(실록 기록자)은 말한다. "갑진년 8월에 경묘(경종)께서 .. 2008. 10. 20.
누가 왕을 죽였는가(5)- 제 18대 현종 5장 예송 시대에 가려진 죽음 제18대 현종 1641-1674년. 재위 1659-1674 15년8월16일 임금의 증세가 여전히 위급하여 오직 가끔씩 인삼차만 복용하였는데 종일토록 혼미하고 지쳐서 잠자는 것 같기도 하고 잠들지 않은 것 같기도 하였다. 15년8월17일 영의정으로 제수받은 허적이 충주에서 올라왔다. 승정원에서 “영상이 방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영상의 직책은 감히 받을 수 없으므로 사은숙배는 못하고 임금의 환후가 이렇게 편찮으시므로 바로 약방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고 아뢰니, 임금이 “부른다고 즉시 전하라” 명했다. 15년8월18일 임금의 병이 크게 위중해지더니, 이날 밤 해시에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복통과 뜸 치료 현종은 그다지 많이 알려진 임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재위 15년간.. 2008. 10. 20.
누가 왕을 죽였는가?(4)- 제 17대 효종 4장 사라진 북벌의 꿈 제 17대 효종 1619-1659, 재위 1649-1659(10년간) 10년5월4일 임금이 어의御醫에게 침 맞는 것에 대해 물으니 어의 신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농증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고 말했으나 다른 어의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효종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 했다.”라고 말했으나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피를 빨리 멈추게 하는 약을 발라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삼공三公과 송시열, 송준길,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 사관史.. 2008. 10. 15.
누가 왕을 죽였는가?(3)-소현세자 3장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1612-1645 23년6월27일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 (죽은 뒤 3개월 후 지내는 제사)를 행하였다. 세자는 심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부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임금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는 인열왕후의 서제庶弟였는데 이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학질과 의관醫官 이형익 인조반정.. 2008.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