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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38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 이광사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않으리 당쟁에 휘말려 평생을 유배 속에서 산 이광사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서예가이자 (圓嶠筆訣)과 (圓嶠書訣)이란 서예이론서를 저술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는 그를 박하게 평가하는데 대부분 추사 김정희의 악평(惡評)에 기반한 것이다.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초의(草衣) 선사에게 쓴 편지에서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전(大雄殿) 편액(扁額)에 대해 혹평했다. “원교가 쓴 대웅편(大雄扁)을 다행히 관람하며 지나쳤는데 이는 후배의 천박한 자들이 판별할 만한 것은 아니나 만약 원교가 자처하는 것으로 논한다면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아 조송설(趙松雪·조맹부)의 형.. 2010. 1. 19.
이익 혁명을 꿈꾸며 농사를 짓다 아버지와 형을 당쟁으로 잃고 벼슬 대신 농사와 학문을 택한 성호 이익 …서얼·농민·노비의 등용 주장하고 중화주의 거부한 조선후기 철학의 혁명 ▣ 이덕일 역사평론가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貞洞)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碧潼郡),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역임한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配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8년(1682)조는 이하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2010. 1. 19.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 이덕일 [한겨레21]에 연재된 이덕일의 역사 평론 영원한 주류, 그 오만과 편견 조선 후기 노론으로 시작해 한번도 기득권을 놓치 않고 역사를 망친 세력들 친일파가 반공세력과 손잡고 우리 현대사의 주류로 행세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보수적 단면을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권을 잡은 적이 한번도 없는 사회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류는 영원하다는 오만한 믿음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 주류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주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규정 없이 진행되는 논란이기에 조금은 혼란스럽다.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는 어떤 세력일까? 우리 역사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고려 멸망과 신흥사대부의 등장 » 사진/단군(왼쪽)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 2010. 1. 19.
조선 왕을 말하다 - 영조 절반의 성공 영조/ 소론 강경파 숙청 ‘난 경종의 충신’ 김일경은 뻣뻣했다 ◀연잉군의 세제 시절 초상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로 세제가 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격렬한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면 반대 당파의 재기를 막기 위한 정치 보복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치 보복은 권력 강화가 아니라 권력 약화의 길이었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를 인정하면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타협과 화해를 통해 권력 강화의 길을 선택한 정치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세상을 떠났다. 닷새 후인 8월 30일 장희빈의 연적(戀敵..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경종 독살설의 임금-경종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숙종, 이이명 독대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元子)가 되거나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 된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론은 이런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자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노론 영수 이이명의 초상. 이이명은 숙종 43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아래 사진은 이이명이 쓴 39소재집39 숙종 43년(1717) 7월 19일. 전염병이 크게 번져 조정은 중신(重臣)을 보내 전염병 귀신에게 여제를 ..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예종 독살설의 임금, 예종 / 쿠데타의 업보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같은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태종은 공신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 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예종은 이 공신 집단을 해체하지 않는 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예종이 왕 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양자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육신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의 시신을 몰래 이장하면서 조성되었다. 세자 예종은 공신들의 노리개로 떨어진 사육신 가족들을 석방시켜야 세조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중기의 역관 조신(曺伸)이 쓴 『소문쇄록』에는 세조와 한명회·신..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숙종 三宗의 혈맥 숙종 / 14세 소년 국왕 민생 무너지는데, 임금·사대부 눈엔 송시열만 보였다 사회를 선도할 명분과 동력을 상실한 정치세력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 이런 지배집단은 본질적 현안에는 눈을 감은 채 비(非)본질적 현상을 두고 사변적 논쟁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 역사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호명한다. 비극은 이런 책무를 수행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조선 후기가 이런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지 반문할 때다. 창경궁 명정전의 어좌.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전각으로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병이 있다. 사진가 권태균 서인 정권을 갈아치우던 현종이 재위 15년(1674) 8월 18일 급서했을 때 외아들인 세자는 14세였다. 어린 세자가 효종과 현종에게도 맞섰던 ..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현종 국란을 겪은 임금들 - 현종 /제1차 예송 논쟁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이 아니라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은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 독점의 권력이냐 사대부 균점의 권력이냐의 문제였다.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제1차 예송(禮訟) 논쟁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이끈 태두 김장생을 모신 충남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과 송시열·송준길 등 당대의 서인-노론 계열 예학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 2010. 1. 18.
조선 왕을 말하다 - 효종 국란을 겪은 임금-효종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 三宗의 혈맥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대운(大運)이 따라 준 것이다. 그러나 대운은 여기까지다. 대운을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죽이면서 생각지도 않게 대권을 잡은 효종은 굴러온 대운을 천명으로 전환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것이 북벌이었다. 효종은 현종·숙종을 잇는 삼종(三宗)의 혈맥 시대를 열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뿐 .. 2010.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