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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 유수원

by 싯딤 2010. 1. 19.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경종에 대한 충성을 간직하다 영조 때 사형당한 실학자 유수원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했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한다. 상공업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고등학교 국사> 314쪽)

 




» 유수원은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돼 죽은 수많은 소론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조정에 간신이 가득하다”는 벽서가 붙었다고 알려진 나주객사 금성관.

  소론, 노론의 쿠데타를 막다

  위 기술의 핵심은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은 노론 집안 출신들이 제기했는데, 그 선구자는 유수원이라는 것이다. 이 기술을 읽으면 ‘유수원=노론’이라고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유수원은 노론에 의해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였다. 노론도 어떤 업적을 남겼음을 강조하기 위한 구차한 기술에 불과하다.  

유수원의 일생을 보면 학자의 역저 한 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우서>(迂書)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는 당쟁 와중에 희생된 수많은 장삼이사 중의 한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기 일쑤여서 그가 <우서>의 저자라는 게 알려진 것은 20세기 중반이었다. 1938년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이조 인구에 관한 신분계급별적 고찰’에서 <우서>를 “저자 미상”이라고 썼는데, 1942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해학유서서문’(海鶴遺書序文)에서 <우서>를 유수원의 작품으로 언급하면서 유수원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영조실록> 13년(1737) 10월24일조는 <우서>가 유수원의 작품임을 명시하고 있다. 비국 당상 이종성(李宗城)이, “단양 군수 유수원이 비록 귀는 먹었지만 문장을 잘합니다. 책을 한 권 지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을 논한 것입니다. 헛되이 늙는 것이 아깝습니다”라고 말하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신 역시 그 책을 보았는데, 책 이름을 <우서>라고 합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영조는 승정원에 <우서>를 구해 올리라고 명령했는데, 영조도 읽은 <우서>가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것은 역사에서 패자의 짐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유수원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몰락한 숙종 20년(1694) 출생했다. 이 무렵 집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데,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다. 노론은 소론의 반대 속에서 장희빈을 사사하고 그의 아들인 경종까지 제거하려 했다. 유수원이 문과 별시에 급제해 조정에 나갔던 때는 숙종 44년(1718)이었는데, 한 해 전 세자(경종)의 대리청정 문제를 두고 두 당파는 크게 부딪쳤다.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李頤命)이 꼬투리를 잡아 세자를 내쫓기 위해 세자 대리청정을 시키기로 합의했는데, 소론에서 격렬하게 반발했던 것이다. 병석의 숙종이 죽으면서 경종이 즉위했는데, <당의통략>은 경종에 대해 “그 바탕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웠으며 경사(經史)를 강론할 때는 어려운 것을 묻고 뜻밖의 의사표시를 많이 했으나 어머니의 변고를 당하고 나서는 근심하고 조심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더니 잠을 자는 것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국왕으로 삼기 위해 왕세제 책봉을 추진했다. 집권 노론은 경종 1년(1721) 소론 대신들이 모두 퇴궐한 틈을 타서 경종을 위협해 왕세제 책봉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이때 경종은 서른넷,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에 불과했으므로 젊은 왕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이때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柳鳳輝)였다. 유봉휘는 경종 1년 8월 세제 책봉은 ‘한강 밖에 있던 대신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정된 것으로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노론에서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이 모두 나서 세제의 지위를 흔든다며 유봉휘의 처벌을 주장했다. 소론에서는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하는 것은 유봉휘의 잘못이지만 그 마음만은 ‘나라를 위하는 단충(丹忠)’이라고 절충을 시도했는데, 이는 유봉휘를 옹호한 것 같지만 왕세제 책봉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소론 강경파인 준소(峻少)의 큰 반발을 샀다.

  사는 백성 중에서 선발해야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서 더 큰 풍파를 일으킨다. 결국 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던 노론은 소론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의 역습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나아가 목호룡의 고변사건으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하는 신임옥사(辛壬獄事)를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세제의 지위는 인정하는 소론 온건파인 완소(緩少)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자 준소는 세제 연잉군의 왕위 계승이 기정사실화될 것을 우려해 조태구를 탄핵하고 나서는데 공격수가 바로 유수원이었다.

  경종 3년(1723) 2월 사간원 정언 유수원은 영의정 조태구가 민생을 파탄시켰으며 종제였던 조태채가 사형당하자 ‘천리 길에 짐바리에 가득한 부의물(賻儀物)을 보냈다’고 탄핵했다. 유수원의 상소에 대해 <경종실록>의 사관은 “유수원은 곧 유봉휘의 종질로서 혹자는 그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유봉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아니라고 맹세했다고 한다”고 적으면서도 “그 조카의 장주(章奏·상소)를 어찌 아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상소로 유수원은 예안과 낭천(狼川·화천) 현감 등으로 좌천되는데, 이런 와중에 1년 뒤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유수원이 지은 <우서>. 그는 이 책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적극 주장했다.

경종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는 즉위 뒤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용하는 탕평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 영수였던 김일경을 사형시킨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속마음은 노론에 있었다. 영조 즉위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던 유봉휘가 영조 1년(1725) 경원에 유배됐다가 2년 뒤 끝내 배사(配死·유배지에서 죽음)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유봉휘의 조카였던 유수원의 처지 또한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으나 이런 정치보복에 대한 반발로, 또 경종이 독살당했다고 믿은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자 영조는 소론도 끌어안기로 방침을 바꿨다. 그래서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지 않은 유수원은 영조 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다. 그러나 탄핵권이 있는 지평은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자리인데도 그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가 실제로 지평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영조 11년(1735) 홍문관 교리 조명택(趙明澤)이 ‘유수원은 공의(公議)에 저지당한 자’인데 관직 후보자로 의망(擬望·추천)한 것이 한탄스럽다고 상소한 것처럼 노론은 유수원이 관직에 의망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벼슬에서 소외된 그는 <우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울적한 심사를 달랬다. <우서>는 이광좌·이종성 등 소론 대신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읽히다가 영조 13년(1737)에는 영조에게도 추천된다. 이는 소론 대신들도 글의 논지에 공감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소론의 정치철학을 짐작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유수원은 <우서>의 머리말 격인 ‘논찬하는 본지를 기록한다’(記論讚本旨)에서 “마음속의 울결(鬱結·응어리)을 펼 수 없으면 할 수 없이 글을 지어 자성(自省)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마음속에 맺힌 게 있어서 <우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수원은 <우서>에서 “백성이 그 직업을 잃었기 때문에 가난해졌고, 백성이 가난해졌기 때문에 나라가 텅 비었다”면서 사민(四民·사농공상)이 각기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사고가 획기적인 것은 지배층인 사(士) 계급에 대한 규정 때문이다. 그는 ‘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치기(治己)와 치인(治人)의 법을 배운 연후에 출신(出身)해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사인데 동시대의 인물들과 달리 사를 선천적인 신분으로 보지 않았다. “무릇 백성의 자제 중에서 준수한 자를 뽑아서 교육해 사를 선발한다”(‘문벌의 폐단을 논한다’(論門閥之弊))는 주장이 이를 말해준다. 양반 사대부 계급의 자식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자식 중에서 준수한 자를 교육해 벼슬아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의 사 계급을 군역에 종사하지 않고, 농공상에도 종사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거나 고리대 또는 노비 소송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나주벽서사건의 연루자로  

무엇보다 그는 상공업의 진흥을 적극 주장했다. 그의 상공업 진흥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부상(富商)과 세약소민(細弱小民·가난한 백성들)의 결합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부상은 반드시 세약소민의 힘을 얻어야 액점(額店·상점)을 개설할 수 있다. 부상이 혼자서 경영할 수는 없다. 대저 작은 것은 큰 것에 통합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이 사리상 떳떳한 일이다”라고 유수원은 강자와 약자가 서로 제휴하면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상과 빈상(貧商)의 제휴를 ‘동과’, 또는 ‘합과’라고 불렀는데, 요즘 말로 하면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공생관계 같은 것이다. 그는 서울의 시전(市廛) 같은 상업시설을 작은 군읍에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농본상말(農本商末)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유수원은 영조 13년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비변사 문랑(文郞·문과 출신의 당하관)이 된다. 그리고 소론 영수였던 조현명은 영조 17년(1741) 2월 유수원에게 영조를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때 영조는 귀 먹은 유수원에게 주서(注書)에게 써서 보여주는 반 필담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귀머거리 맑은 대쑥’이란 뜻의 농암(聾菴)이란 호는 자신의 신체 상황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이때 유수원은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써서 바쳤는데, <우서>에 나오는 관제 개혁안을 보강한 것으로 추측된다. 유수원은 홍문관이나 승정원 같은 청요직도 3년을 주기로 승진시키자는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에 대해 영조는 “이 말은 옳으며 이 그림 또한 좋다”고 흡족해하면서 그를 비국 낭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영조 19년(1743) 우참찬 이덕수(李德壽)와 함께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는데, 이듬해 이덕수가 사망하고 대신 편찬 책임을 맡은 예조판서 이종성은 유수원을 체차하고 윤광소(尹光紹)에게 실무책임을 맡겼다.

  이후 11년 동안 유수원에 대한 기록은 <영조실록>에서 사라진다. 그러다가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사건의 연루자로 충격적으로 등장한다.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나주벽서사건으로 수많은 소론 인사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체포된 그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윤혜(尹惠) 등과 함께 이 사건의 주모자인 신치운(申致雲) 등과 친했다고 시인하면서 묻지 않는 말까지 진술했다.

  “매양 서로 만날 때마다 흉언과 패설을 김일경과 박필몽처럼 하였고, 때로는 김일경과 박필몽보다 더했는데, 신도 거기에 난만하게 수작하여 참여했습니다. 대개 신은 여러 역적 가운데 비단 흉적을 알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당준(黨峻·강한 당론)의 마음에서 나라를 원망하기에 이른 것이며,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항상 헤아리기 어려운 패설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영조실록> 31년 5월 25일)

  장희빈 죽음부터 이어진 비극

  이인좌 난의 주모자인 박필몽(朴弼夢)보다 더했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경종에 대한 충성을 의리로 간직한 이들, 경종독살설을 사실로 믿은 이들은 영조를 끝내 임금으로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심악(沈鍔)은 “신은 유수원의 역절(逆節)을 나라를 향한 정성이라 생각하였고, 유수원의 흉언(凶言)을 대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라고 답한다. 심악은 “유수원과 함께 죄를 입는다면 죽어도 기쁘겠습니다”라고도 말했다. 나주벽서사건으로 처형당한 인물은 무려 500명을 헤아리는데, 이 비극적 사건의 뿌리는 집권 노론의 장희빈 사사와 경종 독살에 있었던 것이다. 즉, 노론이 경종 대신 연잉군을 임금으로 택군(擇君)한 데 있었다. 유수원은 그 자신이 처형당한 것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연좌되어 집안 전체가 폐고(廢固)되고 말았다. 경종에 대한 충심을 간직했던 한 선구적 실학자의 비극이었다. *

 

낙랑군은 침략자였는가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고 한민족을 수탈했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  

어느 나라를 봐도, 전통시대에 ‘남’에 의한 장기적 정복은 민족주의자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정복자들이 나중에 ‘우리’의 일부가 된 경우에는, 일단 정복에 대한 ‘우리의 영웅적 항쟁’과 함께 정복 이후 혼합 사회의 긍정적 이미지를 제시하면 된다. 예컨대 오늘날 중국 교과서들이 몽골 침략에 대한 중국인의 항쟁에 대한 칭송과 함께 ‘다민족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예시한 듯한 세계제국 원나라의 ‘위대한 번영’을 찬양하고 있지 않는가?

  원나라를 깎아내리는 러시아

그런데 침략자들이 나중에도 계속 ‘남’으로 남았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민족주의자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적 대응을 한다. 첫째, ‘우리의 자존과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이 ‘우리 영토’에 언젠가 들어와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무조건 부인한다. 예컨대 12세기 러시아의 최초 사서(史書)인 <연대기>에서 9세기 중반 노브고로드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나중에 러시아 공국(公國)으로 발전될 부족국가를 세운 군주가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류리크 공(公)으로 서술됐다. 실제 이 이름은 고대 스칸디나비아 언어로 ‘명군’(名君)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노브고로드 부근의 9세기 유적에서 수많은 스칸디나비아 계통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상당수 러시아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류리크에 대해 슬라브계 인물이었다고 별다른 근거 없이 주장하거나 아예 “후대에 조작됐다”며 러시아 초기 국가 형성에서의 스칸디나비아인의 역할을 전면 부정하기도 했다.

  둘째, 사료상 전면 부정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외국인 지배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극도로 강조한다. 예컨대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칸(1205∼55)의 1236~39년 러시아 정벌의 결과로 러시아 공국(公國)들이 1480년까지 바투칸 후손의 킵차크한국(金帳汗國)이라는 몽골계 국가의 제후국을 칭해 공물을 바쳐야 했다. 13세기 후반 이후로 주로 러시아 영주들이 행했던 공물 징수는 부담이 됐지만 원나라의 유라시아 통일로 중동,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이 성행했고, 역참 제도나 호구세 징수법 등 동아시아의 선진적 통치 제도들이 바로 그때 러시아에 도입되기도 했다. 즉, 동시대의 고려와 몽골제국의 관계도 그랬듯이, 러시아와 몽골의 상호 작용도 긍정 일색으로도 부정 일색으로도 이야기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국정 국사 교과서나 오늘날 러시아의 검인정 국사 교과서들은 늘 ‘몽골 침략자의 만행’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규탄과 ‘몽골 침략자에 대한 러시아인의 영웅적 투쟁’에 대한 찬사로만 일관해왔다. 러시아인이라는 개념이 그때에 없었고 러시아의 여러 공국 지배자들이 몽골인 이상으로 서로를 경쟁자로 여겨 증오했음에도 근대 민족주의가 중세사에 여과 없이 투영된다.

  북유럽과 러시아, 비잔틴 그리고 중동 지역을 하나의 무역 네트워크로 묶어서 장거리 무역 중개자로서 초기 러시아의 발전의 발판을 마련해준 바이킹의 류리크와 그 후손을 ‘토착인’으로 둔갑시키거나 무시하는, 그리고 당대 유럽에 비해 훨씬 앞섰던 원나라를 ‘후진적이며 침략적 유목민’으로 깎아내리는 러시아의 ‘애국 사학’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고조선의 멸망(기원전 108년) 이후에 한반도 북부에서 한나라에 의해 세워진 한사군(漢四郡), 특히 그중에서 313년까지 거의 400년 이상 존속해온 낙랑(樂浪)에 대해 한국 민족주의적 사학이 취해온 태도는 과연 유형적으로 러시아의 ‘애국 사학’과 많이 다른가? 낙랑에 대한 뚜렷한 역사적 기억은, 낙랑의 중심이 평양이었다고 못박은 <삼국유사>와 낙랑 주민들의 초기 신라 귀화 사실과 낙랑 출신으로 추측되는 치희(雉姬)가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재위 기원전 19년∼기원후 18년)의 후처가 됐다는 사실을 전하는 <삼국사기> 등 가장 오래된 사서에서부터 풍부하게 발견된다. 치희가 유리왕의 다른 부인과 다투었다가 달아난 뒤에 슬픔에 빠진 유리왕이 썼다는, 실제로 아마도 고구려 초기 청춘남녀들의 애정가요를 한역(漢譯)한 작품인 듯한 ‘황조가’(黃鳥歌)가 국문학 개설서에서 빠짐없이 나오지 않는가?  

» 낙랑시대 유물들. 고조선 멸망 뒤 한나라가 세운 한사군, 그중에서 특히 낙랑은 400년 이상 존속하며 한반도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낙랑문화의 영향권 일본까지

후대의 기억도 그렇지만 당대 한반도 전역의 주민들이 낙랑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은 1~3세기의 유적을 통해 쉽게 추적할 수 있다. 예컨대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낙랑과 거리상 가장 먼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었지만 김해 가야 초기 세력의 중심지로 추측되는 김해 양동리 162호분에서 출토된 철복(鐵腹·쇠항아리) 등 철기와 청동기 등이 평양 정백동의 53호 목곽묘에서 나온 낙랑의 유물들과 모양이나 제작법, 분포상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 가야와 낙랑이 활발한 무역을 해왔다는 문헌 기록들을 고고학적으로 증빙한다. 가야 초기의 또 하나의 유명한 유적인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칠기 화장품통과 같은 매우 세련된 유물들을 봐도 평양 정백동 유물들과의 흡사성은 눈에 띈다. 규슈 등 당대 일본 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고도 볼 수 있는 낙랑문화의 영향권이 대단히 넓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근대에 접어들어 낙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돼왔는가?

  한백겸(韓百謙·1552∼1615)과 안정복(安鼎福·1712∼91) 등 한반도 역사지리의 기초를 놓은 실학자 이후로는 낙랑 등 한사군이 주로 한반도 북부(한강 이북)에 위치했다는 것은 거의 통설이 됐다. 이 통설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창시자라 할 신채호(申菜浩·1880∼1936)였다. 낙랑을 “조선 역사의 일부가 아닌 일개 외래 침략 세력”으로 규정한 그는, 한사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한 한편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 계통의 유물들이 “조선인 최씨가 세운 남(南)낙랑국”이 만들었거나 고구려가 노획해 가져온 것이라고 서술했다. 정인보(鄭寅普·1893∼1950) 등 대종교와 관련성이 있었던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 이외에 동조자를 별로 얻지 못한 이 학설을 단재 선생이 초지일관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낙랑의 중심지가 평양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조선이 애당초부터 중국에 정치, 문화적으로 예속돼 있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한국사의 독자성을 부정했던 일제 관학자들에게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보이고, 또 이와 같은 취지에서 낙랑을 고대 한반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존재를 부인했던 신채호의 의도는 단순히 일제 식민사관에의 반론 제기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토지의 역사가 아닌 혈통적 민족의 계보”라고 규정한 그로서는 “미국인이 인디언들을 자신의 선조로 인정해 제사 지낼 수 없듯이, 우리도 중국인이나 한반도 토민 등 단군 후손인 신성한 부여족이 아닌 잡다한 외인들을 우리 조상으로 인정해 우리 역사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와 혈통적으로 다른 한사군이 우리 땅 안에 있었을 리 없었다는 그의 논리는, “류리크 공과 그의 바이킹 가신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 해도 슬라브인이었을 것이다”라는 러시아 ‘애국 사학’의 논리와 질적으로 얼마나 달랐을까?

  낙랑문화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교묘히 이용해 한반도 역사의 전체적 상을 왜곡하는 식민지 당국과의 투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신채호나 정인보 선생이 “낙랑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비역사적 주장을 제기한 것은, 그나마 시대적 상황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기는 한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가 끝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북한 학계가 낙랑군이 요동반도에 있었으며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대동강 유역의 유적이 “조선인 유민이 세운 낙랑국의 유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이를 뒷받침해야 할 최근의 평양 일대 낙랑 유적 발굴에 대한 보고서를 제대로 내지 않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한사군의 존재를 이용해 이북 영토에 대해 “역사적으로 중화 영향권에 속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를 중국에 대한 대비책이었다고 변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북한의 국수주의적 주장들이 중국 동북공정을 유발한 요인 중 하나라고 반대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평양 부근의 낙랑 무덤 발굴 현장(맨 위). 남한에서 처음 발굴된 경남 사천시 늑도의 낙랑토기.

또 1990년대에 대폭 강경화된 북한의 “평양 일대 조선인 유민의 낙랑국” 주장은 고립된 스탈린주의 국가가 내부 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정치적 조치로도 볼 수 있지만, 남한에서도 윤내현, 이덕일 등 소수 사학자의 한사군 요동반도 위치설, 평양 일대 조선인 낙랑국설이 대중매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전체 결혼의 14%가 국제결혼에 해당하는 시대에 접어들어도 한반도 땅에 수세기에 걸쳐 중국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을 꼭 부정할 필요가 있는가?

  토작민에게 압박 가할 수 없는 처지

  북한과 달리 최남선(崔南善·1890~1957)과 이병도(李丙燾·1896~1989)의 계통을 이은 남한의 주류 사학계는 한사군이 주로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러시아 교과서가 몽골과의 관계를 부정적 측면 위주로 파악하듯이 남한의 국사 개설서들도 낙랑을 ‘중국인의 식민지’라는 부정적 관점에서 서술해왔다. 가장 객관적인 축에 속해 국수주의자들과 각을 세웠던 이기백(李基白·1924~2004) 선생마저도 한사군이 토착민들에게 “심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라든가 “한인(漢人)들의 주요 관심사가 경제적 이득이었다”는 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오늘날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의 중심지를 “호화로운 식민도시”로 서술하고 중국 상인의 유입이 “순박했던 조선 사회에 분해 작용을 일으켜 도둑질이 생기는 등 풍속을 각박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한국사신론>, 1967). 이에 더해 더 보수적이었던 한우근(1915∼99)은 “한족(漢族)의 억압과 수탈” “낙랑의 수탈 경제”를 규탄하면서 가야 지역과의 철 무역까지도 ‘수탈 무역’으로 파악했다(<한국통사>, 1970).

  낙랑 등 한사군이 한나라의 침략의 결과로 세워졌다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과연 한나라의 머나먼 동북쪽 변방에 가서 정착한 소수의 한인(漢人) 관료, 상인, 장인 집단이 고구려 등 토착세력의 습격을 받으면서 주변 예맥, 옥저, 한인(韓人)들을 “억압·수탈”할 능력이라도 있었겠는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사학자들에게 낙랑의 중심지가 경성이나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와 같은 것으로 상상되기 쉬워겠지만, 근대 제국주의 국가 일본과 달리 전근대의 제국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와 같은 변방들을 체계적으로 통제·수탈할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한사군이 한 제국에서 외군(外郡)으로 분류돼 토착민들의 거수(巨帥)와 그들의 ‘공물’을 받고 비슷한 가치의 사치품 등으로 갚아주는 관(官) 무역을 해도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착민들에게 인두세를 징수하거나 노역에 징발할 수 없었다.

  낙랑이 4세기 넘게 존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인수(印綏·도장), 동경(銅鏡·구리 거울) 등 정교하게 만든 위신재로 토착 지배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고급 수공업과 무역 중심으로서의 필요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니었을까? 중국 상인의 출입 때문에 조선인 사이에서 도둑질이 생겼다는 기록은 중국 사료에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상인들을 통해 첨단 철기, 보습 제작법 등이 보급됐다는 점도 무시하면 안 된다.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킨 313년부터 낙랑의 중심이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427년까지 평양 지역의 중국인들을 추방하기는커녕 오히려 반(半)자치의 상태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낙랑에 대한 토착민들의 의식이 별로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낙랑은 고구려 문화 발전에도 기여

  외부 세력의 정복이란 늘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비극적 과정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 교류와 인구의 혼합화가 이루어져 더 복합적인 문화로의 길이 열린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침략을 긍정할 일도 없지만 전근대에 ‘우리’ 영토 안에서 많은 ‘외부인’들이 살았다는 것을 전면 부정하거나 ‘수탈적 식민지’라고 규탄할 필요는 없다. 결국 온갖 사람들이 장기간 섞여야 위대한 문화가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낙랑의 남은 인구가 고구려에 흡수돼 고구려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도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

  참고 문헌

 

1. <요동사> 김한규, 문학과 지성사, 2004, 183∼238쪽
2. <한국 고고학 개설> 김원룡, 일지사, 1992, 119∼127쪽, 152∼167쪽
3.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푸른역사, 2002, 제3권, 24, 210∼211쪽
4. <신채호> 안병직, 한길사, 1979, 76∼77쪽

 

 

폭정은 영웅을 낳는다

귀족 자제들만을 위한 과거를 포기한 홍경래, 세상을 향해 붓 대신 칼을 들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홍경래는 당시 차별받던 서북 출신으로 입신양명을 꿈꿨으나 좌절되자 칼을 들었다. 홍경래군과 관군의 전투를 그린 <순무영진도>

조선 말기 관변 쪽은 홍경래(洪景來)를 서적(西賊), 또는 경적(景賊)이라고 불렀다. 서적(西賊)은 그가 봉기한 관서지역의 역적이란 뜻이고 경적(景賊)은 그의 이름 가운데 자를 딴 것이다. 순조 11년(1811) 발생한 평안도 민중항쟁에 대해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한 <조선통사>(1977년판)는 ‘평안도 농민전쟁’이라고 계급 간의 전쟁으로 표현했다. 남한에서는 ‘홍경래의 난’으로 주로 칭해왔으나 <한국사>(1997) 36권에서는 ‘서북지방의 민중항쟁’이란 중간 제목 아래 ‘홍경래 난’이라고 절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유명한 사건에 대한 사료는 의외로 소략하다. <순조실록> <일성록>과 관군 쪽 박기풍(朴基豊)이 쓴 <진중일기> 등 진압군 쪽의 사료가 대부분이다. 반대쪽 시각은 주로 소설 속에 구현돼왔다. 철종 12년경(1861)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역사소설 <신미록>(辛未錄)은 관군 쪽의 시각으로 서술되었지만 <홍경래 실기>(洪景來實記)나 한문소설인 <홍경래전>(洪景來傳) 등은 민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다. 양쪽 사료를 참고해 일생을 추적하면 홍경래는 정조 4년(1780) 평안북도 용강군 다미면(多美面)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중화(中和)에 있는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가서 공부하는데, 한문소설 <홍경래전>은 이 무렵에 관한 소식을 전한다.

“<사략>(史略)을 읽다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장사가 죽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고 죽으면 큰 이름을 남긴다’ 같은 대목에서는 반드시 두 번 세 번 읽고 감탄하며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놈’이라 불린 서북인들

  같은 책에는 그가 12살 때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자객 형가(荊軻)를 애도하는 ‘송형가’(松荊歌)라는 글제를 받고는, “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秋風易水壯士卷/白日咸陽天子頭)라고 지었다고 전한다. 유학권이 “가을 바람은 역수 장사(형가)의 주먹이요, 빛나는 태양은 함양에 있는 천자의 머리이다”라고 해석하자, 홍경래는 “가을 바람 부는데 역수 장사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 천자의 머리를 친다”라고 바꾸어 해석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유학권은 그 다음날로 홍경래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홍경래는 혼자 경사(經史)를 통독하며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달이 뭇 별을 거느리고 하늘에 진을 치니, 바람은 나뭇잎을 몰고 가을 산에서 싸우도다”(月將衆星屯碧落/風驅木落戰秋山)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홍경래는 체제 내의 입신을 꿈꾸었다. 평양 향시를 통과한 그가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대과는 홍경래 같은 지방 출신이 통과할 수 있는 등용문이 아니었다. <홍경래전>은 세도가 자제들은 과장에 가지 않아도 급제하지만 시골 선비는 한갓 노자와 다리 힘만 헛되이할 뿐이라며, 이들이 낸 답안지는 근시배(近侍輩)들의 휴지로 사용될 뿐이란 현실을 전하고 있다. 과거는 경화세족(京華勢族)으로 불렸던 세도가 자제들의 관직 진출을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서북 출신이었던 홍경래의 경우는 여기에 한 술 더 떴다.

  “이 중에서도 평안도 사람들은 더욱 당세에 쓰이지 못했다. 조선 초에는 고려 유민(遺民)이라 하여 위험하게 여겨 쓰지 않았고, 나중에는 천하게 여겨 쓰지 않았다. 서울의 하인배나 충청도의 졸개들까지도 서북인을 ‘사람’(人)이라 부르지 않고, ‘놈’(漢)이라 불렀다. 서북지방의 감사, 수령들이 백성의 재물을 다반사로 토색한 것도 서북민을 내심으로 천시한 까닭이다.”(<홍경래전>)

  <홍경래전>은 사마시에 낙방한 홍경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당일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改造犯上之心)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홍경래란 혁명가의 탄생이었다.

  동지 탐색에 나선 홍경래는 가산(嘉山)의 청룡사에서 태천(泰川)의 명가 출신 서얼 우군칙(禹君則)을 만났다. 동지가 된 둘은 가산의 역속(驛屬)으로 있는 부호 이희저(李禧著)를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우군칙의 아내를 점쟁이로 변장시켜 이희저에게 보내 “10년 이내 대운을 만날 것인데, 반드시 수성(水姓)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게 했다. 1년 뒤에는 우군칙이 이희저의 부친 묏자리를 봐주면서, “당대(當代) 발복(發福)하겠지만 수성 가진 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희저 앞에 ‘물 수’(水=?)변을 가진 홍(洪)씨가 나타나자 이희저는 귀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곽산의 김창시(金昌始)도 비슷한 방법으로 포섭했다. 이 밖에도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김사용(金士用) 등의 장사를 포섭했다. <홍경래전>은 홍경래가 순조 11년 모친과 형을 모시고 가산의 다복동으로 들어갔다고 전하는데, 바로 혁명의 전초기지였다.

  “다복동은 가산과 박천 사이에 낀 버드나무 잎과 같은 형국의 땅으로, 좌우가 유달리 험준하지는 않지만 울창한 산비탈로 은폐된 아늑한 골짝이었다. 뒤쪽으로는 경의(京義) 간의 대로와 통하고, 앞에는 대령강(大寧江)이 흐르고 있었다. 골짝의 안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약 20리 길이였고, 안과 바깥 골짝은 수륙 통행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적당히 깊고 옅어 숨거나 나타나는 데 모두 편했다.”(<홍경래전>)

  추호도 백성을 범하는 일 없다

  홍경래는 금광을 한다는 명분으로 장정들을 끌어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장정들에게 땅을 파게 해서 기운을 평가하고, 새끼줄을 쳐놓고 높이 뛰게 해 날램을 평가했다. 사격·기마·검술을 가르쳐 병졸의 등급을 정하고, 후한 상급을 베풀어 환심을 샀다. 홍경래는 순조 12년(1812) 임신(壬申)년을 거병의 해로 잡았다. 홍경래는 김창시를 시켜서 “일사횡관(一士橫冠)에 귀신(鬼神)이 탈의(脫衣)하고 십필(十疋)에 가일척(加一尺)하고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이라”는 참요(讖謠)를 널리 퍼뜨리게 했다. 일사횡관은 임(壬)자의, 십필가일척은 신(申)자의 파자(破字)로서 임신년에 기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의 파자가 퍼지는 가운데 다복동에 1천여 명이 몰려들자 거사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홍경래는 거사 계획을 앞당겨 순조 11년 12월15일 평양의 대동관을 불태우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2월15일 야반에 많은 장졸을 평양에 보내 내응토록 하고, 대동관(大同館)에 불을 질러 관민이 불을 끄는 틈을 타서 각 관서에 불을 지르고, 관장을 겁박하여 죽이고 평양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동관 밑에 매설했던 화약통과 도화선이 눈에 젖어서 약정한 시간에 폭발하지 않고 16일 오후에야 폭발하였다. 계획이 빗나가 성사치 못하고, 도리어 군교들의 수색이 삼엄해지자 파견했던 장사들이 위험을 느껴 각자 다복동으로 도주했다.”(<홍경래전>)

 

» 홍경래군이 마지막까지 관군과 대치했던 정주성.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져서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수색이 심해져 일부 동지들이 체포되자 홍경래는 순조 11년 12월18일에 다시 거병했다. 홍경래는 평서(平西)대원수, 총참모는 우군칙, 참모 김창시, 선봉장 홍총각·이제초, 후(後)장군 유후험, 도총 이희저, 부원수 김사용 등이 주요 지휘부였다. 출병에 앞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박기풍의 <진중일기>는 이때 김창시가 낭독한 격문을 적고 있다. “대개 서북지방은 기자의 옛 강역이고 단군의 옛 굴(窟)로서… 임진난 때 나라를 재조(再造)한 공이 있고…”라고 시작하는 격문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면서, “이러한 때 다행히 세상을 구할 성인이 평북 선천 검산 일월봉 밑 군왕포(君王浦) 아래 가야동(伽倻洞) 홍의도(紅衣島)에 탄강하였다”라고 선포했다. 특별히 진인(眞人)을 추대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인 탄강’ 운운은 천명을 강조해 민심을 얻고자 하는 계책일 것이다. 드디어 봉기가 시작되자 선봉장 홍총각은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홍경래의 본진보다 앞서 가산으로 진군해 단숨에 점령하고 군수 정시(鄭蓍)와 그 부친을 처단했다. 첫 전과였다. <홍경래전>은 홍경래군이 ‘추호도 백성을 범하는 일이 없고’ ‘본진의 장졸 가운데서 규칙을 범한 자 두세 명을 노변에서 효수하고, 각 방면에 전령하여 이 사실을 방으로 널리 알려 기율을 엄격히 지키게 하였다”고 전한다. 의군(義軍)의 면모를 보이려 한 것이다. 민심을 얻은 봉기군에게 평안도 각 현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산과 곽산은 물론 삽시간에 정주, 선천, 박천, 태천, 철산, 용천을 점령했다.

  전략적 실수로 정주성에 갇혀

  “여덟 고을이 잇달아 함락되고 도로가 막히자 인심이 물 끓듯 흉흉했다. 남북군이 홍경래의 명령대로 이르는 곳마다 옥을 파해 갇힌 자를 석방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면서도 군기를 엄히 단속하고 노약자를 위무하니 민심이 홍군(洪軍)으로 돌아와 마음으로 복종했다. 모병(募兵)에 응하거나,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하려는 사람들로 저자를 이루었다.”

  이때 전략적 실수가 발생했다. 여덟 개 군현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안주를 점령하기 위해 조기 남하했어야 하는데, 때를 놓친 것이었다. 안주는 평안병사의 본영이 있는 군사상 요충지였다. 당초 태천을 치기 전에 안주를 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사이 관군이 집결해 수성태세를 갖췄다. <홍경래전>에는 안주 공략을 적극 주장했던 김대린(金大麟) 등은 홍경래가 듣지 않자 초조해져 ‘대사는 다 끝났다’며 홍경래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려다 홍경래에게 되레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한숨을 돌린 조정은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을 관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로 삼아 현지로 급파하고, 뒤이어 이요헌(李堯憲)을 관서순무사, 박기풍을 중군(中軍) 등으로 임명해 현지로 보냈다. 12월27일 1천여 명의 관군과 봉기군이 안주 대안(對岸)에 있는 박천의 송림(松林)에서 맞붙었는데, 초전에는 홍총각이 이끄는 봉기군이 승리했지만 관군이 계속해서 증원되는 바람에 패해서 정주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관군들의 노략질에 분개한 백성들이 대거 홍경래를 따라 정주성에 입성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쫓기듯이 들어간 정주성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식량이 떨어져서 가축을 다 잡아먹고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형편이 되었다. 관군들은 성 안에 연을 띄우거나 편지를 보내 귀순을 종용하며 심리전을 펼쳤는데, 홍경래로서도 이를 방지하기 어려웠다.” 간간이 국지적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 아사자가 속출하자 홍경래는 3월23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여자 215명과 어린아이 13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홍경래전>은 이때도 홍경래는 늠름했다고 전한다. “경래는 성 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때때로 연훈루(延薰樓) 아래에서 말을 달리고 칼춤을 추어 장졸들이 탄복케 했으며, 군졸들 가운데 전사자가 생기면 직접 제사를 지내주고, 병자는 몸소 문병을 갔다. …하루는 검을 뽑아 춤을 추며 입으로 시 한 짝을 지어 읊으니, ‘천지가 뜻이 있어 한 남자를 낳았도다’(乾坤有意生男子)라는 것이었다.”(<홍경래전>)

  홍경래가 무작정 농성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경래가 고단한 성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은 벗어날 도리가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기다리던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하나는 박종일(朴鍾一)이 서울에서 난을 일으키기로 한 것이요, 둘은 북쪽의 각 고을로부터 원병이 오기로 한 것이요, 셋은 정시수(鄭始守)가 호병(胡兵)을 이끌고 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홍경래전>)

  이 중에서 ‘호병’, 즉 만주족 병사의 동원 여부가 주목된다. 정시수는 5살 때 만주로 들어가 마적 두목이 된 인물로서 홍경래의 요청시 동조 거병하기로 했으나 연락을 맡은 강계의 향임(鄕任) 송지렴(宋之濂)이 김사용의 궤멸 소식을 듣고 관군 쪽에 가담해 무산됐다.

  불사를 바라는 민중의 마음

  그사이 관군은 굴토군(掘土軍)으로 성 아래 땅을 파서 북장대의 지도(地道)에 화약을 장전시켰다. 순조 12년 4월19일 화약이 폭발하면서 관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홍경래는 이희저 등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으나 <홍경래전>은 “위에 쓴 것(홍경래 전사)은 관군 측의 기록이고 정주의 야담에는 경래가 성벽이 무너질 때 몸을 날려 성을 넘어서 먼 곳으로 달아났으며 그날 살해된 것은 가짜 홍경래였다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홍경래 실기(實記)>는 “도망?야 잡지 못?고”라고 전하고 있다. 홍경래의 불사(不死)를 바라는 민중들의 마음이 소설 속에 담긴 것이다. <홍경래전>은 “성이 함락될 때 관군들은 함부로 총질하고 창질하여 남녀 노유를 가리지 않고 죽여서 쌓인 시체가 성중에 가득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때 2천 명 가까운 봉기군이 참살당했다. 바로 이런 폭정이 홍경래를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살아 있게 한 것이다.*

 

아이처럼 즐겁게 형장으로, 천국으로

풍양 조씨의 박해에서 천주교를 지킨 정하상

  부친 정약종(丁若鍾)과 이복형 정철상(丁哲祥)이 사형당하던 순조 1년(1801) 2월25일 정하상(丁夏祥·1795~1839)은 6살에 불과했다. 부친이 사형당하던 날 정하상은 어머니, 누이동생과 함께 옥에 갇혀 있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수렴청정하게 된 정순왕후는 정조 때 성장한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순조 1년(1801) 천주교도를 역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사학(邪學) 엄금 교서를 내렸는데, 정하상의 부친이 이때 사형당했던 것이다. 재산이 몰수되면서 옥에서 풀려났지만 갈 곳이 없었다. 정하상과 모친 류소사(柳召史), 2살 어린 누이 정정혜(丁情惠)는 이리저리 유랑해야 했다. 정하상은 세례명 바오로를 따서 정보록(丁保祿)이라 불리는데, 1890년 홍콩 주교 약망(若望)이 정하상이 쓴 ‘상재상서’(上宰相書·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간행하면서 ‘정보록 일기’를 덧붙였는데, 이것이 그에 대한 기초 사료이다. 여기에 따르면 “(석방된 뒤) 향곡(鄕曲)을 유랑하다가 숙부 집에 들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당한 고초는 붓 하나로 쓰기가 어려웠다”라고 쓸 정도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숙부는 다산 정약용을 뜻하는데, 정약용은 백부 정약전과 함께 유배 중이었다.

 

» 19세기 서양의 신부들이 주로 머물던 북경북천주당. 정하상도 이곳에서 조선에 와줄 신부를 찾았을 것이다.

  아버지 사형당한 뒤 떠돌아

  숙부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밥은 굶지 않게 됐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어머니 류소사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정조 21년(1797)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에 대해 “당초에 (서학에) 물든 자취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는데 지식이 자라자 문득 적수(敵讐·원수)로 여기고, 분명히 알게 되어서는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다”라고 밝혔음에도 귀양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를 버리지 않은 일가를 따뜻하게 대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정약종이 “형과 동생은 이미 천주교를 버렸다”고 증언해서 정약전과 약용이 목숨을 건졌으므로 이들을 거두어준 것인지도 몰랐다. ‘정보록 일기’는 “정하상은 이미 폐고(廢固)되었기 때문에 친척과 노복들의 박해를 심하게 받았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실상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박해받은 것이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인 샤를 달레(1829~78)는 이때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교를 계속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달레, 86~87쪽)

  그러나 ‘정보록 일기’에서 “귀기울여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문(經文)을 배울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는 것처럼 정하상은 모친 류소사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체계적인 천주교 교리를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10대 후반의 정하상은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이던 조동섬(趙東暹)을 찾아 떠났다. 조동섬은 정씨 일가의 고향인 마재 부근의 양근(楊根) 출신으로서 역시 신유박해에 연루됐다가 겨우 사형을 면하고 북방으로 유배된 인물이었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여러 달 동안 그(조동섬)와 함께 지내면서 교리 연구와 한문 학습에 끊임없이 전심했다”며 “그에게서 자기의 크나큰 계획에 대하여 격려를 받고 돌아왔다”고 전하고 있다. ‘자기의 크나큰 계획’이란 조선에 다시 신부를 입국시키는 일이었다. 중국인 신부였던 주문모(周文謨)는 신유박해 때 국경 부근까지 도주했다가 신자들을 버리고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의금부에 자수해 1801년 5월 순교했다. 이후 조선에는 신부가 없었다.

  서울에 돌아온 정하상이 조동섬의 친척인 양근 출신의 조숙(趙淑)의 집에서 거주하게 되는 것은 조동섬의 소개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하상은 ‘자기의 크나큰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역관의 종이 되었다. 그래야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하상은 만 21살 때인 순조 16년(1816) 드디어 북경에 들어가 북경교구의 신부들을 만났으나 신부 파견을 약속받지는 못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북경으로 가서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정보록 일기’는 “처음에는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더니 다섯 번째에 허락을 받고 변문(邊門)에서 기다리면서 틈을 타 맞이하려 나갔으나 신부는 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1805년 중국에서도 천주교 박해가 발생해 성당과 신학교들이 파괴되고 중국인 신부들이 살해됐기 때문에 조선에 신부를 파견할 여력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하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숙부 집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한양으로 이주하는 한편 계속 북경으로 가서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 정하상이 순교를 각오하고 작성한 양심선언인 ‘상재상서’

  중국에 가서 신부를 요청하다

  1824년부터는 역관 유진길(劉進吉)이 가세하면서 상황이 호전됐다.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유진길의 장문의 편지를 받은 교황 레오 12세가 조선을 독립된 포교지로 지정해서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포교사업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나서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9일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조선이 독립 교구로 격상된 것이다. 1832년 7월 자신이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사실을 알게 된 브뤼기에르는 곧바로 조선으로 길을 떠났다. 여비가 부족했으나 그는 싱가포르와 필리핀·마카오를 거쳐 사천(四川)으로 오는 도중 모방 신부를 만나 합류시켰고, 샤스탕 신부도 합류했다. 브뤼기에르는 조선 입국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조선 신자들과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쉽지 않았다. 순조 33년(1833) 겨울 유진길은 노비 출신 조신철(趙信喆)과 함께 로마 유학 출신인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유방제는 로마 교황청 포교성의 허락을 받아 조선에 입국한 것인데, <일성록>(日省錄) 헌종 5년(1839) 8월7일조는 유방제가 서울 정하상의 집에 묶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유방제 신부가 “북경 주교의 관할 밑에서 혼자 조선 포교지를 맡아가지고 있기를 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자신이 조선 포교를 전담하려 했기 때문에 브뤼기에르 신부 입국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만주에서 조선 입국길을 기다리던 브뤼기에르 신부는 1835년 10월 사망하고 말았다.

  헌종 2년(1836) 1월 모방 신부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내로 드디어 조선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는 주로 수문을 통해 성을 통과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한양 근처까지 이르렀다. 모방 신부는 한양 도착 이틀 전에야 유방제 신부가 보낸 조선 천주교도 5명을 만나는데, 정하상을 ‘중심이 되는 인도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하상은 조선 천주교도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것이다. 모방 신부 역시 정하상의 집을 숙소로 삼았다. 모방은 유방제의 문제점을 추궁한 뒤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1836년 4월 교황은 앙베르 신부를 새 주교로 임명했다. 헌종 3년(1837) 1월에는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고, 그해 12월에는 앙베르 주교까지 입국함으로써 신부는 3명으로 늘어났다. 모방의 입국 당시 6천 명이 채 되지 못했던 교인 수는 헌종 4년(1838)에는 9천여 명으로 팽창했다. 조선인 신부 양성의 필요성이 더욱 커져갔다. 신부들은 신학생 후보들을 모집했는데, 정하상이 적임이었으나 해외로 나가 공부만 하기에는 조선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헌종 2년(1836) 김대건·최양업·최방제가 신부 후보로 선발됐는데, 국경까지 이들을 인도한 인물도 정하상이었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마카오로 가서 신부 수업을 받게 된다.

  조선 천주교는 1801년의 박해를 딛고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모친이 전해준 신앙의 씨앗이 크게 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세가 다시 어두워졌다. 신유박해를 주도한 노론 벽파 정순왕후가 1805년에 죽은 뒤 정권을 잡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노론 시파로서 천주교 억압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부인으로 풍양 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맞아들이는데, 풍양 조씨는 천주교 배척에 적극적이었다. 순조가 재위 27년(1827)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을 계기로 조만영·조인영(趙寅永) 형제를 중심으로 풍양 조씨가 세력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순조 30년(1830) 효명세자가 죽고 1834년 순조마저 죽으면서 효명세자의 아들(헌종)이 즉위했으나 8살의 미성년이어서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조정은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 세력과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갔는데, 헌종 9년(1839·기해년) 조만영이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조인영이 이조판서, 그의 조카인 조병현이 형조판서가 되었고, 우의정 이지연까지 풍양 조씨에게 가담해 풍양 조씨가 우세하게 되었다. 이들은 순원왕후 김씨에게 천주교 억압을 계속 요구했다. 드디어 헌종 5년(1839) 4월18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내려졌다. 40여 년 만에 다시 중앙 정부 차원의 천주교 박해가 재개된 것이다.

  천주교가 여색을 유통한다고?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정하상의 묘. 그는 형장으로 갈 때 흔쾌히 웃으며 수레 위에 매달려 즐거워했다고 한다.

오가작통법이 강화되면서 천주교도 검거 선풍이 일자 정하상은 주교 앙베르를 지방으로 피신시켰다. 서울로 다시 올라온 정하상은 체포가 임박했음을 느꼈다. 그는 체포를 각오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상재상서’, 곧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다. ‘상재상서’는 순교를 각오하고 작성한 양심선언이자 신앙고백으로서 이벽의 ‘성교요지’(聖敎要旨), 부친 정약종의 ‘주교요지’와 더불어 조선 천주교도들의 천주교 인식과 신앙관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정하상의 예상대로 헌종 5년(1839) 6월 초하루 포졸들이 집에 들이닥치자 스스로 집안에서 붉은 오라로 결박하고 나갔다. 모친과 누이동생이 함께 체포됐다. 정하상은 미리 준비한 ‘상재상서’를 전했다. ‘정보록 일기’는 관원이 “너는 어째서 조선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리를 행하는가?”라고 묻자 “다른 나라의 훌륭한 물건은 사람들이 모두 골라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천주 성교는 다른 나라의 도리라고 말하면서 그 참되고 올바르며 훌륭한 것을 채택하지 않습니까?”라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상재상서’도 마찬가지 견해로 쓰여 있다.

  “옛날에 군자는 법을 세우고 금령을 제정할 때 반드시 그 의리가 어떠하며, 해롭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안 연후에 마땅히 금할 것은 금지하고, 금지하지 않을 것은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조정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조정은 천주교를 ‘임금도 없고 부모도 없다’(無父無君)고 비판했는데, ‘상재상서’는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가 효도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라며 “충과 효는 만대가 흘러도 바꾸지 못하는 도리”라고 설명했다. 또한 천주교가 “여색(女色)을 서로 유통한다”고 비난받은 것에 대해선 “이른바 여색을 유통하는 것은 짐승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거룩한 교회에 그것을 돌립니까? 십계명 가운데 여섯 번째가 ‘간음하지 말라’이고, 아홉 번째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라며 정면에서 반박했다. 그는 천주교의 하느님이 <주역>(周易)이나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상제(上帝)나 공자가 말한 천(天)과 같은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미 논리 싸움이 아니어서 그는 무수한 곤장을 맞고 주뢰(周牢)형을 당했다. ‘정보록 일기’는 “두 넓적다리와 살갗은 모두 벗겨져 떨어져나가고 뼈가 드러났다”며 “피는 용솟음쳐 땅으로 흘러들었지만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헌종 5년(1839) 8월14일 조선 천주교회의 중심 인물이던 정하상은 역관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에서 사형당했다. 3명의 프랑스인 신부 범세형(范世亨·앙베르), 나백다록(羅伯多祿·모방), 정아각백(鄭牙各伯·샤스탕)은 새남터에서 사형당했다. <헌종실록>은 “정하상은 신유사옥(辛酉邪獄·1801) 때 사형당한 정약종의 아들로서, 양술(洋術·천주교)을 가계(家計)로 삼고 유진길·조신철과 서로 얽어서 양한(洋漢·서양인)을 맞이해 와서 신부·교주를 삼았으며, 또 김(김대건)·최(최양업) 두 어린이를 서양에 보내어 그 양술(洋術)을 죄다 배울 것을 기필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보록 일기’는 “정바오로가 형장으로 나갈 때 수레 위에 매달려 서서 흔쾌히 웃으며 즐거워할 따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정하상은 1984년 성인으로 시성(諡聖)됐는데 모친과 여동생도 함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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