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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사문난적`이 될지라도-윤휴

by 싯딤 2010. 1. 19.

 

 

          ‘사문난적’ 이 될지라도… 

 

송시열의 숙적, 백호 윤휴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반기 든 학자… 조선의 위기에 대한 복고적 해법에 반대하여 다원 사상 체제를 주창

 

양란(兩亂·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지배층의 무능을 여실히 목도한 피지배층들은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체제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의 완화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사대부 계급은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 1653년 윤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서인 학자들이 모였던 죽림서원.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인 영수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한 세력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와 신분제를 강화하는 복고적 노선을 걸었다.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이들에 의해 예학(禮學)으로 바뀌게 된다. 예란 본질적으로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의무에 지나지 않는데 행동 규범에 불과한 예(禮)가 성리학의 주류가 된 것이다. 성리학은 이제 노골적으로 지배층의 계급이익에 복무하는 학문이 되었다.

정통 성리학과 거리가 먼 가계

  백호(白湖) 윤휴(尹?)로 대표되는 일단의 사대부들은 이런 경향에 반대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효종실록> 사관(史官)의 윤휴에 대한 평은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윤휴는 소싯적부터 글을 읽어 이름이 있었는데, 논변(論辨)이 있을 때면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옳게 여겼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대부분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견해와 배치되었으나 재주가 조금 있어 늘 경륜(經綸)의 소유자로 자임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우려하였다.”(<효종실록> 9년 12월13일)

  윤휴에 대해 우려하는 ‘식자’란 정통 성리학자들을 뜻하는 것이다. 윤휴의 학문 대부분이 주자학의 주창자인 남송(南宋)의 정이(程이?) 형제·주희(朱熹)의 견해와 배치됨에도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다’는 것은 주자학에서 탈피하려는 사대부들이 있었음을 뜻한다. 백호 윤휴는 왜 주희와 배치되는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의 가계와 학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휴는 광해군 10년(1617) 윤효전(尹孝全)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해군 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북인으로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다. 윤휴의 외조부 김덕민(金德敏)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친구 성운(成運)의 제자였다. 성운은 성리학자들이 이단으로 보았던 노장(老莊)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윤휴는 양명학을 소개한 이수광(李?光)의 차자(次子·둘째아들) 이민구(李敏求)에게도 사사했다. 부친과 외조부, 이민구는 모두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학문을 배운 윤휴는 주희를 금과옥조로 떠받들지 않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했기 때문에 곧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윤선거(尹宣擧)는 윤휴를 이렇게 평했다.

  “윤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데 고인(古人)에 집착하지 않고, 독서(讀書)·강의에서 주설(註說)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언론과 식견이 실로 사람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는 데는 속유(俗儒)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여 깊이 사귀었다.”(‘윤선거 연보’)

  윤휴와 숙명적 라이벌이 되는 송시열도 한때는, “백호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전인(前人)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낸다”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윤휴가 <중용>(中庸)·<대학>(大學) 등의 경전(經傳)을 주희와는 달리 해석하면서 두 사람은 충돌하게 된다.

  여러 차례 벼슬을 거부하다

  윤휴의 일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20살(1636) 때 겪었던 병자호란이었다. <백호전서> 부록 행장(行狀)에 따르면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송시열을 만나, “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고 북벌을 단행하자는 다짐이었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문명이 높아가자 효종 6년(1655)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추천으로 세자시강원 자의(咨議)에 제수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스스로 포의(布衣)라 일컫고는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의 명성이 더욱 크게 떨치어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모두 윤포의(尹布衣)로 일컬으면서 그 얼굴을 서로 알기를 원하였다”(<숙종실록> 3권 1년 4월25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체계가 주희와 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인 내부에서 그를 둘러싼 사문난적 논쟁이 벌어진다.

  그 계기는 윤휴가 <중용주>(中庸註)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자 송시열이 비난하며 고치기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

  “윤휴가 중용주를 고치자 송시열이 가서 엄히 책망하니, 윤휴가 ‘경전(經傳)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이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단 말이냐’라고 말하므로 송시열은 노하여 돌아왔다. 또 편지로 그를 책망하여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윤휴가 끝내 승복하지 않으므로 송시열은 드디어 그를 끊어버렸다.”(<송자대전>(宋子大全) ‘연보’)

  집권 서인에게 주희는 일개 학자가 아니라 성인이었는데, 윤휴가 그와 다른 학문 체계를 수립하자 격하게 반발했다. <숙종실록>의 사관이 “(윤휴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자사(子思)의 뜻을 주자가 혼자 알았는데, 내가 혼자 모르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반적(叛賊)이다”(<숙종실록> 3년 10월17일)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서인이 윤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을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효종 4년(1653) 윤 7월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黃山書院·현 죽림서원)에 서인 학자들이 모인 것은 윤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송자대전> 부록의 ‘송시열 연보’에는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의 논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마음대로 억설(臆說)한다”고 비판하자 윤선거는 “의리는 천하의 공적인 것인데, 지금 희중(希仲·윤휴의 자)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답했다. ‘천하의 공적인 의리를 어찌 주희 혼자 독점할 수 있느냐’는 말로, 주희 혼자 경전 해석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반발이다. 이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윤선거가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경전에 주석을 달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송시열은 “윤휴처럼 주자의 장구(章句)를 치워버리고 스스로 새로 주석을 내어, 마치 서로 승부를 겨루어 앞서려고 한 것 같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중국의 다른 학자들은 주희의 주를 보충하는 수준이었지만 윤휴는 주희의 주를 대치했다는 것이다. 윤선거가 “이는 희중이 너무 고명한 탓이다”라고 말하자 송시열은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나왔다.

  윤선거 대 송시열, 학문 대 종교

  “공은 주자는 고명하지 못하고 윤휴가 도리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인가? 또한 윤휴 같은 참람한 사문난적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王莽)·동탁(董卓)·조조(曹操)·유유(劉裕) 같은 역적들도 모두 고명한 탓이겠는가?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으로서 모든 혈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한다. 춘추(春秋)의 법이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를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편당을 다스리게 되어 있으니 왕자(王者)가 나타나게 된다면 공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법을 받게 될 것이다.”(<송자대전> ‘송시열 연보’ 숭정 26년조)

  윤휴의 사상을 지지하는 자는 왕자가 나타날 때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협박이니 이미 학문 논쟁이 아니었다.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 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윤휴는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의 학설도 비판했다. 그는 율곡의 ‘이선기후’(理先氣後)나 퇴계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 등을 모두 비판하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웠다. 송시열은 이황이나 이이는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는 비판할 수 없었다. 송시열에게는 사서(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 자체보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더욱 중요했다. 송시열에게는 <논어> <중용>보다 주희가 주(注)를 달아놓은 <논어집주>(論語集注)·<중용집주>(中庸集注)가 더 중요한 경전(經典)이었다. 이런 경전을 윤휴가 개작한 것을 송시열은 좌시할 수 없었다. 윤휴는 <중용해설>(中庸解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氣)가 처음 생기는 것을 태극이라 하고 음양이 나뉘는 것을 양의(兩儀)라 하며 기가 합해서 형태를 이룬 것을 사상(四象·태양, 태음, 소양, 소음)이라 한다. 태극이 생기면 음양과 양의를 주관하고, 나뉘면 태양(太陽), 소음(小陰), 소양(小陽), 태음(太陰)이 된다. 사상(四象)은 합해지면 음양과 체용(體用)을 겸하니 태극은 기(氣)이다.”

  ‘태극은 기(氣)이다’라는 한마디는 교조화된 조선의 주자학을 전면에서 부인하는 것이었다. 만물의 근원적 존재인 태극(太極)에 대해 주희는 이(理)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송시열에게 주자학은 종교 교리였으나 윤휴에게는 일개 학문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양자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선거는 시종일관 윤휴의 사상을 지지했다. 그래서 송시열과 윤선거는 현종 6년(1665) 계룡산 자락의 동학사(東鶴寺)에서 다시 만나 논쟁을 벌였다. 송시열과 윤선거를 비롯한 이유태, 송주석(宋疇錫) 등 서인 중진들이 모였는데, <송자대전> ‘혹인(或人)에게 답함’에는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다음에 또 윤휴의 사정(邪正)을 정변하였는데 어조가 양쪽이 다 거세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내(송시열)가, ‘이렇게 한가하게 다툴 필요 없으니 시험 삼아 한마디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네. 공(윤선거)이 시험 삼아 말해보게.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또 주자가 그른가 윤휴가 그른가’라고 말하자 그가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흑백(黑白)으로 논하면 희중(希仲·윤휴)은 흑(黑)이고 음양(陰陽)으로 논하면 희중은 음(陰)이네’라고 말하므로, 내가 ‘공이 이제야 비로소 크게 깨달았네. 이는 사문(斯文·성리학)의 다행이자 친구 간의 다행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윤선거는 일이 있다고 먼저 돌아갔습니다.”(<송자대전> ‘혹인(或人)에게 답함’)

  노론과 소론의 분당을 예고해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라고 묻는데, ‘윤휴가 옳다’고 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윤선거 자신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선거가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간 것은 마음속으로는 송시열의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은 송시열과 윤선거의 논쟁이지만 그 배경에는 조선의 정치체제, 사상체제에 대한 체제갈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윤휴와 윤선거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폐기하고 다원 사상체제로 조선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인 반면 송시열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더욱 강화해 조선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조선의 방향에 대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 내재한 갈등의 싹은 숙종 때 서인이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선거의 아들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조정이 어찌 유학자를 죽이는가”

 송시열에 맞서 예송논쟁에 뛰어들고 북벌을 주창한 전사

호포제로 백성의 아픔을 덜어주려 했던 학자는 왜 사약을 들어야 했나

  1659년 북벌 군주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만 40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효종은 승하 한 달 전쯤 송시열과 독대를 자청해 북벌에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효종은 혈기와 지기(志氣)가 손상될 것이 두려워 내전(內殿)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라며 북벌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그는 급서했다. 효종의 죽음은 엉뚱하게 예송(禮訟) 논쟁을 낳았다.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예송 논쟁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당쟁망국론으로 규정지은 대표적인 소재였다. 그러나 예송 논쟁은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정쟁이었다. 바로 효종의 왕통 계승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배후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막부의 장군 계승을 두고 벌어진 싸움을 ‘싸움만을 위한 싸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통 계승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

  상복에는 다섯 종류가 있었다. 3년복인 참최(斬衰)와 1년복인 재최(齊衰), 9개월복인 대공(大功), 5개월복인 소공(小功)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麻)가 그것이다. 부모 사망시 자식은 모두 3년복인 참최를 입게 되어 있었고,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부모도 상복을 입었는데, 장자상(長子喪)에는 3년, 둘째아들(次子)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했다. 효종은 왕통(王統)을 이었지만 가통(家統)으로 보면 소현세자 다음의 차자였다. 여기에서 효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조정에서 의견을 묻자 송시열은 1년복이 맞다고 주장했고,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렸던 송준길도 같은 의견이었다. 둘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당대 최고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조정은 1년복으로 결정하려 하였다.  

이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윤휴였다. 그는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 주석의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嫡妻)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의 반론은 커다란 파문을 낳았다. 그러자 송시열은 같은 <의례> 참최장 주석의 “서자(庶子)는 장자가 될 수 없으며” “본부인 소생의 둘째아들 이하는 다 같이 서자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내세워 1년복설이 맞다고 다시 주장했다. 송시열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의례>에 가통을 계승했어도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이를 사종지설(四種之說)이라 하는데, 여기에 문제의 ‘체이부정’(體而不正)이 들어 있었다. 체이부정은 효종처럼 아버지를 계승(體)했으나(而) 가통을 이은 적장자(嫡長子)가 아닌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정태화는 깜짝 놀라, “자고로 왕가의 일은 비록 처음에는 심히 작은 일이라도 훗날 그것으로 큰 화를 입는 수가 있다”며 이를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국제’(國制), 곧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인용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경국대전>에는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모두 1년복으로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속으로는 효종을 차자로 대우해 1년설을 주장했지만 겉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장자로 대우한 것처럼 편법을 쓴 것이다.

  서인이 1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은 두 당파가 지닌 세계관의 표출이었다. 서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주자학적 정치이념은 신권(臣權) 중심의 지배구조로서, 국왕은 사대부 중의 제1사대부이지 사대부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반면 남인들은 국왕을 사대부의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 받아들였다. 송시열과 윤휴가 대립하는 와중에 남인 윤선도가,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종묘와 사직을 관장하는 임금(효종)에게 돌려보내고 적통(嫡統)은 기왕에 죽은 장자(소현세자)에게 돌려보내니 종통과 적통을 어찌 두 가지로 할 수 있습니까?”라며 송시열을 강하게 공박하고 나서 예송 논쟁은 격렬해졌다. 이는 송시열이 역적이니 죽여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상소였기 때문에 서인들이 모두 나서 윤선도를 공격했고, 현종으로서도 예송 논쟁이 왕통 계승 문제로 비화하는 것이 유리할 리 없다는 생각에 서인의 손을 들어 윤선도를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결정하고 다시는 거론하지 못하게 국법으로 금했다. 1차 예송 논쟁은 표면상 송시열의 승리로 끝난 것이었다.

  삼번의 난, 북벌을 위한 절호의 기회

  그러나 양자의 대립은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북벌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효종은 기해독대 때 송시열에게 ‘정예 포병(砲兵) 10만을 기른 다음 기회를 봐서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효종은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말했다. 효종의 북벌 계획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군의 북벌이 한족(漢族)의 호응 봉기를 낳을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효종 생전에는 그런 호기가 오지 않았지만 15년 뒤인 현종 15년(1674)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삼번(三藩)의 난’으로 불리는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그것이었다. 오삼계는 청나라와 싸우던 명나라의 마지막 주력군이었으나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점령하자 청나라와 손잡고 이자성을 멸망시켰다. 오삼계는 이 공로로 청나라로부터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도 그런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강희제는 1673년 철번령(撤藩令)을 내려 권리를 박탈하려 했다.

  그러자 오삼계는 1673년(현종 14년) 11월 윈난성에서 명(明)의 부흥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같은 처지의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尙之信)도 호응하면서 삼번의 난으로 발전했다. 윈난·구이저우·쓰촨·후난·광시 등 여러 성이 합세해 삽시간에 중국 남부 전역이 전쟁터로 변했다. 바로 효종이 예견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북벌의 기치를 든 인물이 윤휴였다. 조선은 삼번의 난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사신들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 대만에서도 정경(鄭經·정금)이 봉기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자 현종 15년(1674) 7월1일 포의(布衣) 윤휴는 비밀 상소를 올렸다. 북벌을 주창하는 상소였다. 그는 오삼계의 난을 하늘이 만들어준 기회라면서 즉각 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청했다. 윤휴는 “이때 군대를 동원하고 격서를 띄워” 북벌하자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상께서 유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우리 조종과 선왕을 감격시키거나 천하 후세에 할 말을 남길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말했다. 윤휴는 “병사 1만 대(隊)를 뽑아 북경을 향해 나아가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의 한쪽 길을 터 정인(鄭人·정경)과 약속해 힘을 합쳐서 심장부를 혼란시켜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육군을 북경으로 진군시키고 수군을 정금과 합세시키자는 전략이었다. 윤휴의 밀소가 입소문을 타고 전파되자 상당한 반향이 일었다. 당황한 것은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 대신들이었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는 현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윤휴의 밀소 때문에 바깥이 꽤 시끄럽습니다. 인조조에서는 저들(청나라)과 관계된 문제이면 ‘상소문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하신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단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현종실록> 15년 7월5일)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이라고?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문은 받아들이지 말자는 주청이었다. 서인 정권에 북벌은 말뿐이지 실제 시행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행 고교 국사 교과서는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115쪽)라고 기록하고 있다. 효종이 기해독대 때 송시열에게 “경이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보도록 하라”고 부탁하자, 송시열은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修己刑家)가 북벌의 선결 조건이라고 답했을 뿐이다. 훗날 송시열은 ‘수기형가’ 넉 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현행 국사 교과서는 마치 그가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그릇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윤휴의 북벌론은 상당한 반향을 낳았으나 다음달 현종이 갑자기 의문사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2차 예송 논쟁을 계기로 남인이 정권을 잡음에 따라 윤휴는 드디어 집권당의 일원으로 조정에 진출하게 되었다.

  집권당의 책임 있는 중진이 된 윤휴는 북벌을 계속 주장했다. 윤휴는 이를 위해 1만 승의 병거(兵車·전차)와 화포(火砲)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가 군제(軍制) 변통을 강하게 주장한 것도,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민생 안정을 위한 것이자 북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문란한 군정(軍政)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軍布)를 받는 백골징포(白骨徵布)와 갓난아이에게도 받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 대표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양반들은 군포 징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이었다. 많은 토지를 가진 양반 사대부는 군포 징수에서 면제되고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농민들만 군포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들도 군포를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윤휴가 숙종 3년(1677)에 주장한 호포제(戶布制)와 구산제(口算制)는 모든 양반들도 군포를 부담하자는 것이었다. 호포제는 양반과 상민을 구분하지 말고 모든 호(戶)에 부과하자는 것이고, 구산제는 각 호의 인구에 따라서 차등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윤휴의 이런 주장은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양반들에게도 호포를 징수하는 것은 양반과 상민들을 구분해놓은 자연의 질서와 상하관계의 질서를 부정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남인 온건파였던 영의정 허적은 호포제 자체는 찬성했으나 어린 임금 즉위 초에 민심을 동요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서인에 비해 열세였던 남인으로서 갓 집권한 마당에 대다수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포제를 실시하기에는 부담이 컸던 것이다. 윤휴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양반 사대부들의 계급 이기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 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던 삼군부총무당. 윤휴는 집권 당파의 중진이 된 뒤 북벌을 위해 병거와 화포 증설을 주장했다.(사진/ 권태균)

“호포제로 말할 것 같으면, 백골(白骨·죽은 사람)이나 아약(兒弱·어린아이)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골수(骨髓)를 부수는 가혹한 정치에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치는 근심과 괴로움과, 놀고 먹는(游食) 선비나 운 좋은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고 스스로 편하게 지내는 자의 원망 중 어느 것이 더 크겠습니까?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명분 없는 것입니까, 저것이 명분 없는 것입니까? 이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저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민심의 향배와 천명(天命)의 거취가 장차 백성들의 편안하고 편안하지 아니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운 좋은 백성이나 호우(豪右·부유층)의 편안하고 불편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숙종실록> 3년 12월19일)

  윤휴를 죽여서 청나라를 달래다  

이당규(李堂揆)와 김석주(金錫胄) 등 호포제에 찬성하는 양반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호포제는 대다수 양반들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이 미완의 개혁은 영조 때 균역법으로 낙착되었다가, 대원군 때 호포법으로 최종 결정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 넘어가면서 정국은 급변했다. 숙종은 윤휴를 사사(賜死)시키고 말았다. 과거 윤휴가 숙종에게 “대비(大妃)를 조관(照管)하라”고 말하고, 도체찰사부의 부체찰사에 다른 사람이 임명되자 어전에서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다는 등 죄 같지 않은 죄명이었다. <당의통략>은 윤휴가 사약을 마시며 “조정에서 어찌해서 유학자를 죽이는가?”라고 항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생을 포의로 지내다가 조정에 나온 지 불과 6년이 되던 해였다. 예송 논쟁에서 왕가를 높이고, 북벌을 주창하고, 호포제로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려 했던 학자 관료의 죽음치고는 허무한 것이었다.

  그런데 윤휴의 죽음은 중국의 정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숙종 4~5년 무렵부터 삼번의 난과 정경의 난은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吳世藩)이 뒤를 이었으나 현저하게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청군은 숙종 5년 웨양을 탈환하고, 이듬해에는 상지신(尙之信)이 사사됐다. 삼번의 난이 종막을 맞게 된 것이다. 숙종은 청나라의 승리가 명확해진 시점에서 북벌론자 윤휴를 사사함으로써 종전 뒤 청나라의 의혹에서 벗어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냉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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