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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일등공신-배극렴

by 싯딤 2010. 4. 21.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 일등공신- 배극렴

 

배극렴(1325~1392)의 자는 양가量可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여러 번 문하좌시중에 이르렀고, 청렴하고 근검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양왕 4년(1392) 6월 16일에 조준, 정도전 등 대소 신료들과 함께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유하여, 태조가 드디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 신의왕후는 청주 한씨이다. 6형제를 낳았는데 정종이 둘째이고 태종이 다섯째이다. 또 둘째 왕비 신덕왕후 곡산 강씨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방번이 일곱째 왕자이고, 방석이 여덟째이다.

 

어느 날 태조가 배극렴과 조준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세자 책봉을 상의하였다.

 

"평화 시대엔 맏아들이 우선이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 우선입니다"

 

신하들이 이렇게 진언하였는데, 갑자기 밖에서 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신덕왕후가 이 말을 엿들었던 것이다.

 

그 뒤 어느 날 배극렴이 또 태조에게 불려 갔는데, 이때엔 맏아들이 우선이니 공로가 우선이니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물러 나와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였다.

 

"강씨가 자기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방번은 무절제하니 막내를 세우는 것이 그래도 낫겠다"

 

배극렴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태조에게 주청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도록 하였다.

 

그의 벼슬은 좌시중으로서 개국 공신 일등에 영의정으로 특진되었으며,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궁궐 공사로 손발이 갈라 터진- 심덕부

심덕부(1328~1401)의 자는 득지得志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고려말 음보蔭補로 동정同正에 올라 부원수까지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커서 구공신九功臣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조준, 정도전과 더불어 계책을 세우고 원로 종친들과 함께 궁궐로 가서 고려 왕실의 어른인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궐과 종묘를 건축할 때 그에게 공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건물의 위치와 모양, 넓이와 크기, 성의 둘레와 높이 등이 모두 그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고, 공사는 일 년 안에 끝났다. 공사를 감독할 때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고 성의를 다해 설득하였으므로 인부들이 조금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들이 벼슬을 하게 되자 그는 터지고 갈라진 자신의 손발을 내보이면서 훈계하였다.

"나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열성을 다해 오늘에 이르렀다. 너희들도 벼슬아치 생활을 편안하게 앉아서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그는 20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으나 살림은 항상 넉넉지 못했다. 그는 늘 집안사람들에게 당부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공직에 있는 몸이니 만약 누가 문안 올적에 선물을 가지고 오거든 절대로 받지 말아라."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시호는 안정安定이다.

 

 

왕자의 난에 희생당한 당대의 석학 - 정도전

정도전(?~1398)의 자는 종지宗之이고, 호는 삼봉三峯, 본관은 봉화이다. 이색의 문하에서 배웠고,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삼각산 밑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제자들을 길렀는데, 항상 여색을 멀리할 것을 가르쳤다. 성균관 제주祭酒에 발탁되고 뒤에 자원하여 남양군수로 나갔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울 것을 태조에게 권했으며, 그 공으로 좌명공신에 녹권錄券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개국하던 해인 임신년(1392) 7월에 태조의 개국을 도운 공으로 봉화백 奉化伯에 봉해지고,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 천도와 성 쌓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밤, 태조가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훈신들을 불러들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태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인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 경들의 힘이다. 우리들은 서로 공경하고 조심하여 자손 만세토록 변치 말자"

정도전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환공이 포숙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숙이 거莒 땅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하였고, 제환공은 포숙에게 함거檻車에 갇혀 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 또한 죄를 지어 목에 칼을 썼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는 늙어서 어린 방석을 사랑하여 세자로 삼았는데, 정도전은 남은 등과 함께 방석을 옹호하면서 정안군 방원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무인년 8월, 정도전은 태조에게 중국의 예에 따라 여러 왕자를 각 도道로 나누어 분봉하자고 비밀히 건의하였으나 태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조가 정안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밖에서 논의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여러 형제들에게 조심하도록 깨우쳐 주어라"

또 점쟁이 안식이 이방원에게 말하였다.

"세자의 이복형제들 중에서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방원은 즉각 이렇게 응수했다.

"정도전을 즉시 제거할 작정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태조의 병이 위독해지자 정도전 등은 왕위 계승에 관한 일을 논의한다는 핑계로 왕자들을 불러들인 뒤 틈을 보아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자기의 일당을 궁궐 안에 숨겨 두었는데, 전 참찬 이무가 이러한 모의를 정안군에게 밀고하였다. 정안군은 즉시 익안군 방의 등과 더불어 영추문으로 달려가서 정승 조준, 김사형 등에게 백관을 소집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정도전은 이직과 함께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정안군은 이숙번을 시켜 남은의 집에 불을 질렀다. 정도전이 급히 뛰어나와 민부의 집에 들었다.

"배가 하얀 놈이 들어왔다!"

이 사실을 안 민부가 소리지르며 집을 수색하여 정도전을 찾아낸 다음 꽁꽁 묶어 정안군에게 끌고 갔다. 정도전은 정안군에게 애걸했다.

"만약 나를 살려주면 있는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너는 이미 왕씨를 배신하였는데 이제 또 우리 이씨를 배신하려느냐?"

정안군은 그 자리에서 그를 죽였다.

정도전의 저서로는 '삼봉집', '심이기편', '경제문감','경국전' 등이 있다. 진, 담, 유, 영 네 아들을 두었다.

진의 아들 문형은 성품이 온순하면서도 굳세고 단아하였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부사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다.

 

 

끝내 중이 된 태조 이성계의 친구 - 이지란

이지란(1331~1402)의 본관은 청해靑海이고, 자는 식형式馨이다. 본래의 성명은 퉁두란佟豆蘭이었다. 그는 용맹스럽고 힘이 셌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 대대로 여진 부락에서 살았는데, 원나라 말 나라가 매우 혼란하자 가족을 데리고 강을 건너 북청北靑에 와서 살았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서로 만났는데, 첫눈에 의기가 투합하여 숙식을 함께 하였다.

고려 우왕 때 일이다. 어느 날 활쏘기로써 여러 장수들이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다. 세 차례 시합에서 태조가 번번이 일등을 하자 지란이 그 실력에 감탄하면서 그 실력을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고, 태조도 이를 매우 고맙게 받아들였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미워서 태조가 영흥으로 갔다가 풍양으로 돌아오자 지란은 상소하여 중이 되겠다고 한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수염만은 깍지 않고 두었으니 대장부의 표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두문불출한 채 여생을 보냈다. 72세 때 목욕하고 앉은 채로 죽었다. 그는 아들들이 조정에서 돌아오기 전에 화장하여 그 사리로 탑을 만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그의 의관을 가지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선조 25년(1592) 이전에는 아무도 소나 말을 타고 감히 그의 묘 앞을 지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지란이 북쪽으로 돌아가던 날 태조에게 이렇게 상소했다고 한다.

"임금을 도와 나라를 정하니 군신의 의가 정해졌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 군신의 의가 끊어졌소"

그 상소문 속에 자기의 상투를 잘라 바쳤으므로 태조가 도저히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고 한다.

지란은 건주 정벌의 공으로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개국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며, 태조의 묘에 배향되었다.

 

 

살아 돌아온 함흥차사 - 성석린

성석린(1338~142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데, 태조가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았다. 계비인 신덕 강씨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정도전이 방석에게 아부하여 방원을 해치려 하였다. 이 음모를 알게 된 방원은 선수를 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정도전을 죽이고 방석을 폐출시켰다.

화가 있는 대로 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밤중에 함흥 관저로 떠나버렸다. 이때부터 문안사자가 잇달아 함흥으로 갔지만 가는 족족 다 죽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일러 '함흥차사'라고 부르는 말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이상 함흥차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성석린이 자원하고 나섰다. 태조와 친분이 있는 그는 자기가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오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태종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는 무명옷에 백마를 타고 떠났다. 함흥에 도착하자 그는 말에서 내려서 나그네가 하듯 밥을 지었다. 밥짓는 연기가 나자 멀리서 바라보던 태조가 그에게 환관을 시켜 물어 왔다. 성석린은 환관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말도 먹일 겸 투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관이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태조가 반갑게 그를 불러들였다.

석린은 조용하게 인륜의 중요함을 말하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개진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물었다.

"너는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설득하려고 왔느냐?"

겁을 먹은 석린은 엉겹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말씀이 거짓이라면 제 자손은 반드시 장님이 나올 것입니다"

어쨌든 태조는 그 말을 믿고 마음을 돌렸으며 아들 태종 임금과 화해하게 되었으나, 문제는 성린의 집에서 생겼다. 그의 맏아들 지도之道는 장님이고, 둘째인 발도發道는 자식이 없고, 지도의 아들 창산군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뱃속 장님이었다. 성린의 벼슬은 영상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새끼 딸린 말로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죽은 - 박순

박순(?~1402)의 본관은 음성이다. 함흥에 가 있는 태조에게 문안 사신으로 간 사람마다 다 죽고 살아 돌아오는 이가 없던 때였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번엔 누가 가겠느냐고 물었지만 가겠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박순이 가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떠날 때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말을 타고 갔다.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의 행재소行在所(왕의 임시 처소)가 보이는 곳에서 일단 멈추고 새끼 말은 거기에 매어 둔 채 어미말만 타고 가니 새끼말과 어미말이 서로 돌아보면서 우는 바람에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고 여간 지체하지 않았다.

행재소에 도착하여 태조에게 인사를 올리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태조가 그 까닭을 물었다. 박순은 속마음으로 바로 이때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길을 오는 데 방해가 되어서 새끼말을 떼어서 나무에 매어 놓았더니 그 야단입니다. 하찮은 미물인데도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떨어질 수 없어서 저렇게 야단입니다"

태조는 가슴이 찡해 옴을 느꼈다. 태조는 옛 친구인 박순에게 돌아가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하였다.

어느 날 태조가 박순과 함께 바둑을 두는데 갑자기 '털썩!' 하고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둘러보니 지붕에서 쥐 두 마리가 떨어졌는데 어미쥐가 새끼쥐를 안은 채 죽어 가고 있었다. 박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둑판을 밀치고 그 자리에 엎드려 태조에게 눈물로써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드디어 태조로부터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박순은 태조에게 인사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태조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박순도 예외없이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망설이던 태조는 박순이 용흥강을 다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되었을 즈음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에게 칼을 내어 주면서 말했다.

"박순이 용흥강을 이미 건넜거든 더이상 추격하지 말라"

그런데 귀경길에 오른 박순은 도중에 병이 나는 바람에 속도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추격대가 도착했을 때, 그는 막 배에 오르는 중이었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추격대의 칼에 맞아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몸뚱이의 절반은 강 위에, 절반은 배 안에 있다네"라는

시가 생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깜짝 놀라며 애통해 했다.

"박순은 좋은 친구였는데, 내가 그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태조는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화공에게 명하여 박순의 상반신을 그려 바치도록 하였다. 박순의 아내 임씨는 남편의 부음을 받고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박순의 벼슬은 판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개국공신을 조롱한 송도의 명기 - 설중매

설중매는 송도(개성)의 이름난 기생이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뒤 군신들을 위해 의정부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인 신하들 대부분이 옛 고려 왕조에서 벼슬하던 사람들이었다. 설중매는 재능과 용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색정도 강했다.

어느 정승이 술에 취하여 설중매를 희롱하였다.

"내가 들으니 너는 아침은 동쪽 사내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사내 집에서 잔다더구나. 오늘 저녁엔 나하고 자는 것이 어떻겠느냐?"

"동쪽 집에서 밥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저 같은 천한 기생이 왕씨를 섬기다 이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고 자게 되니 매우 어울리는군요!"

설중매가 이렇게 응수하니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붉혔다.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해몽한 예언자 무학대사

무학대사(1327~1405)는 안변 설봉산 토굴에서 살았으므로 산이름을 따서 호를 설봉雪峰이라 하였다. 속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하였다.

"꿈에 무너진 집 속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는데, 무슨

징조입니까?"

"경하할 꿈이올시다.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모양은 임금 왕자와 같습니다"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슨 징조입니까?"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고 하였다. 석왕이란 왕이 되는 꿈이라고 해석했다는 뜻이다. 본시 그 절에는 석왕사라고 쓴 태조의 어필이 있었는데, 불에 타 없어지고 그 글씨를 새긴 현판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서산대사가 쓴 '산수기山水記'에 전한다.

이 석왕사에는 좋은 배나무가 있어서 해마다 궁중에 진상되었다. 절 안에 이화당이 있고, 용추龍湫 30여 군데가 있는데 주변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기생을 사랑하여 눈물 흘린 - 박신

박신(1362~1444)의 본관은 운봉雲峰이다. 어릴 적부터 명성이 있던 그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 강릉 기생 홍장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가 도내 여러 군을 순시하고 돌아오자 강릉부윤 조운흘이, 거짓으로 홍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운흘이 찾아와서 경포대에 뱃놀이하러 가자고 권하였다. 운흘은 오기 전에 홍장을 불러 예쁘게 꾸미고 또 호화로운 놀잇배도 따로 준비하고는, 처용을 닮은 관리 하나를 뽑아서 홍장을

태우도록 미리 일러두었다.

박신이 운흘과 함께 경포대로 나가니 미인을 실은 호화 유람선이 호수 위에 두둥실 떠 있는데, 그 위에 채색으로 단장한 편액이 하나 걸려 있고 그 편액에 다음과 같은 시가 씌어 있었다.

태평성대 신라에서 조용하게 늙은 이 몸

천년세월 흘렀건만 풍류는 그대로일세

관찰사가 경포대에 뱃놀이 나왔으나

놀잇배에 미인을 어이 차마 태우리

관찰사 일행이 천천히 포구로 들어가서 바닷가를 배회하던 중 갑자기 운흘이 박신에게 말했다.

"이곳엔 전해 오는 신선 이야기가 있지요. 지금도 달 밝은 저녁이면 신선들이 나와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 가까이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산천과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찌 신선이 없겠는가!"

박신이 눈물을 글썽이다가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홍장이었다. 좌석엔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날의 놀이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다.

조선조에서 그의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누런 용이 옆에 누워 자는 꿈을 꾼 박석명

박석명(1370~1406)의 본관은 순천이고, 호는 이헌頤軒이다.

젊었을 적에 정종과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날밤 꿈에 누런 용이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잠을 깨니, 곁에 영안군(뒤에 정종)이 누워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영안군은 왕위에 즉위하자 더욱 박석명을 총애하였다. 태종 때 익대삼등 공신으로 평양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억울함을 참고 거위의 목숨을 살린 - 윤회

윤회(1380~1436)의 자는 청경靑卿이고, 호는 청향당淸香堂이며, 본관은 무송이다.

젊은 시절에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 주인이 투숙을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뜰 밑에 앉아 있었다. 그때 주인집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마당에서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마침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그것을 삼켜 버렸다.

집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윤회를 의심하고 그를 꽁꽁 묶어 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관가에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윤회는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주인에게 청하여 거위도 묶어서 자기 곁에 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위가 눈 똥 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너무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나서 왜 어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윤회가 대답했다.

"만약 내가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저 거위의 배를 가르고 진주를 찾았을 것 아니오? 그래서 온갖 욕된 것을 참고 아침까지 가다린 것이오"

그의 벼슬은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형文衡(대제학의 별칭)을 관장하였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백발백중 명사수 - 김덕생

김덕생의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어느 날 왕이 후원에 나갔는데, 갑자기 맹호가 나타나 왕이 탄 수레에 달려들었다. 이때 김덕생이 화살 한 발로 그 호랑이를 맞추어 죽이자,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용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를 시기하는 자가 그를 조정에 모함하여 억울하게 중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덕생은 간청하여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서 호랑이가 잡혔던 곳에 두게 하고 그 그림에 활쏘기를 하니 쏘는 족족 다 맞추고 한 발의 실수도 없었다. 그는 끝내 형장에서 죽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넘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세종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소신의 이름은 김덕생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지가 이미 여러 해입니다.

원하옵건대 저의 뼈를 고향에 묻어 주시고, 저의 자손들을 등용하시어 억울하게 맺힌 저의 한을 풀어 주소서"

이 말을 들은 세종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동지중추부사에 증직하고, 그의 뼈를 고향에 묻어 주도록 하였다. 상여가 전라도 영광 낭월산 밑에 이르자 상여채가 저절로 부러져서 더이상 갈 수가 없었다. 그날 밤에 그가 또 현몽하여 자기를 그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 - 양녕대군

양녕대군(1394~1462)은 태종의 장남으로 제일 먼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천품이 활달하고 문장에 능숙하였다. 그는 동생 세종이 임금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미친 척하며 함부로 행동하였다.

드디어 태종 18년(1418), 영의정 유정현 등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합동으로 아뢰어 세자가 덕이 없으니 폐위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태종이 세자의 아들 세손을 세우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또 반대하였다.

"상께서 세자를 그토록 잘 가르쳐 길렀는데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제 또 어리신 세손을 세운다면 어떻게 뒷날을 보장하겠나이까? 더구나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그 아들을 세우는 것은 의리에 마땅치 않습니다. 다시 어진 왕자를 택하여 세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들이 어진 왕자를 택하여 건의하라."

이조 판서 황희가 아뢰었다.

"나라의 세자는 함부로 가볍게 세울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이직도 불가함을 굳이 고집하였다. 태종은 화가 나서 황희 등을 문밖으로 내쫓고 재신들에게 말하였다.

"충녕대군(뒤에 세종임금)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아무리 춥고 더운 날에도 밤새워 글을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사리에 통달하니 나는 충녕을 세자로 삼고 싶다."

신하들이 축하를 올리며 말하였다.

"신들이 합동으로 아뢰어 어진 왕자를 택하라고 한 것도 바로 충녕을 두고 드린 말씀입니다"

태종은 드디어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고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하여 광주로 내쫓았다. 양녕대군은 이때부터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남루한 옷에 노새를 타고 산수를 찾아 전국을 유람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러 태백(주나라 태왕의 장자, 태왕이 유난히 총명한 손자 창에게 왕통을 이으려고 계력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나라의 앞날을 위해 동생 중옹과 다른 나라로 떠났다.)의 지극한 덕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은 형 양녕과 우애가 극진한 사이였다. 양녕이 관서(평안도) 지방 유람을 떠날 때였다. 양녕이 세종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세종은 여색을 조심할 것을 특별히 당부했다.

양녕이 떠난 뒤에 세종은 즉시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만약 대군을 가까이 한 기생이 있거든 즉시 보고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지방의 수령 방백들은 예쁜 기생을 골라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정주에 도착하자, 소복을 입고 엷게 화장을 한 예쁜 기생 하나가 곡을 하는데 그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소리에 마음이 끌린 대군은 곧 사람을 보내어 그 기생을 불러와 함께 잠자리를 한 뒤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달빛이 베갯머리를 엿볼 일이 없는데

바람은 무슨 일로 비단 장막을 젖히나

이튿날 감사는 그 기생을 역마를 이용하여 서울로 보내고, 그 시도 임금께 아뢰었다. 세종은 그 기생으로 하여금 그 시를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연습하라고 하였다.

양녕대군이 평안도에서 돌아와 세종께 배알하니, 임금이 대군에게 물었다.

"지난번 작별할 때 한 말씀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신이 어찌 감히 성교聖敎를 잊었겠나이까. 삼가 받들고 있나이다."

"형님이 비단 이부자리 속에서도 그 말씀을 지키셨다니 기쁘고도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쁜 여인을 한 사람 준비시켰나이다."

이어서 세종은 궁중에 주연을 차리고 그 기생으로 하여금 그 시로써 노래부르고 대군에게 술을 권하도록 하였다.

그 기생과는 비록 밤을 함께 지낸 사이지만 밤에 만났던 까닭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노래의 가사 내용을 듣고서야 알아차린 양녕대군은 그 즉시 뜰을 내려와 벌받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세종 역시 뜰 밑으로 내려가 대군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정담을 나누었으며, 그 기생을 양녕에게 돌려주었다.

이 기생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어미의 성과 관향을 알 수 없으므로 그냥 고정정考定正이라고 불렀다.

고정정 역시 자유분방하게 어물과 육류를 물물교환 하면서 살았는데 교환이 이루어진 뒤에도 혹시 고기가 좋지 않으면 그 고기가 이미 삶긴 뒤에라도 반드시 되물리고야 말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되물리는 교역을 일러서 '고정정 교역'이라고 일컬었다.

양녕대군의 후손 이명하란 사람이 어느 날 자기 부인과 더불어 장기를 두다가 떼를 써서 강제로 물리려고 하였다.

"당신은 고정정이 아닌데 어찌하여 번번이 물립니까?"

부인이 묻자 남편이 발끈 성을 냈다.

"당신은 어찌하여 장기 때문에 남의 조상을 욕하는 거요."

그 부인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였다.

중이 되어 왕좌를 양보한 효령대군

효령대군(1396~1486) 보補의 처음 이름은 우祐, 자는 선숙善淑이며, 태종의 둘째 아들이다. 세종이 성덕이 있다고 하여 맏아들인 양녕대군은 자기의 세자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부러 방탕한 행동을

하였고, 효령대군은 궐내에 있었다. 양녕대군이 저녁에 효령대군의 처소에 가보니 그는 촛불을 환히 켜고 글을 읽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너는 내게 병이 있다는 것과 충녕(세종)에게 성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양녕대군이 묻자 효령대군은 합장을 하며 말했다.

"이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이튿날 새벽에 효령대군이 합장을 하고 벽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을 본 궁녀가 임금에게 보고를 드렸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이 깜짝 놀라 직접 가서 효령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꿈에 부처님이 와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태종은 놀랍게 여기고 돌아갔다. 이후부터 효령대군은 항상 불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예법을 갖추었다.

맏형인 양녕대군이 술과 고기를 즐기자 어느 날 효령이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큰형님, 술과 고기를 끊으세요"

양녕대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될 텐데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효형은 절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북을 쳤다. 어찌나 많이 쳤던지 북맨 가죽이 하얗게 일어났다. 그래서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물건을 가리켜 '효령대군 북가죽'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 박안신

박안신(1369~1447)의 본관은 상주이다. 태조 2년(139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정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대사헌 맹사성과 함께 평양군 조대림을 국문한 일이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지 않고 국문하다가 태종에게 큰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맹사성과 함께 수레에 실려서 끌려갔다. 거리에서 사형을 당할 참에 이르러 맹사성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박안신은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그가 맹사성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나의 상관이고 나는 당신의 부하다. 그런데 이제 둘이 함께 죽게 되었으니 상관과 부하 사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전에 나는 당신을 지조를 가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어찌 이렇게도 겁이 많은가? 당신은 저 삐걱거리는 수레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또 그는 나졸에게 기와 조각을 가져오라고 하여 거기에 지남철 끝으로 긁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너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죽음이야 달게 받겠지만, 다만 간하는 신하를 임금이 죽였다는 이름을 남길까 두렵다.

안신은 눈을 부릅뜨고 옥리들에게 말했다.

"이것을 그대로 상께 보고해라. 만약에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내가 악귀가 되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잡아먹겠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욱 진노하였다. 그러나 하륜, 성석린, 권근 등 대신들이 힘을 다하여 그를 구제하였다. 그는 간신히 사면되어 곤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안신은 사신이 되어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뱃길에서 해적을 만났다. 그가 두려운 빛이 조금도 없이 태연하게 걸상에 걸터앉아 조용하게 상대하자, 해적들이 그의 위엄에 눌려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해적들에게 잡힌 일행이 모두 안전하게 풀려났다.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숙貞淑이다.

 

 

꿈을 잘 해몽하여 자라를 살려준 - 권홍

권홍(1360~1446)의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설헌雪軒이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간관諫官이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나이 들어서는 산수를 찾아 유람하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그를 찾아와서 눈물로 호소하였다.

"홍 정승이 오늘 우리 가족을 다 죽이려고 하니 제발 살려주시오"

"어떻게 하면 살게 됩니까?"

"공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홍 정승도 가시지 않을 테니 그러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조금 후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홍 정승이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홍 정승께서 오늘 살곶이에서 자라탕을 끓인다고 오시랍니다"

이 말을 듣자 권홍이 마음속으로 '아 조금 전 꿈속에서 본 노인이 바로 자라였구나' 하고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홍 정승 또한 살곶이에 가지 않았다.

뛰어난 외교관, 두주불사의 술꾼 최치운

최치운(1390-1440)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백경佰卿, 호는 조은釣隱이다. 태종 때 생원시와 문과에 각각 합격하여 이조참의가 되었다. 나라일로 중국에 들어가 일을 성공시키고 돌아온 공으로

논밭과 노비를 하사했는데, 치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하사하신 논밭과 노비를 받지 않으니 내 마음이 이렇게 좋소"

"임금의 하사를 사양하다니 복도 지지리 없구려"

그는 본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한 까닭에 이를 알고 있는 세종이 어찰을 내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치운은 그 어찰을 벽 좌우에 붙여 놓고 들락거릴 적마다 그것을 보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워낙 술을 좋아한 최치운은 밖에만 나가면 술에 취해서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그의 머리를 흔들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그러면 치운은 취중에서도 상에 머리를 박으면서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으며, 술을 깨면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상의 은혜에 감동되어 늘 술조심은 하고 있지만 술집 앞을 지나게 되면 그만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취하도록 마시게 된다"

그는 최윤덕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왕명에 의하여 <무원록>을 주석 하였다.

최치운의 아들 최응현의 호는 수재睡齋이다. 단종 2년(1454)에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대사헌을 거쳐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속세의 영욕을 그 몇 해나 겪었던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백발이 성성하네

전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버릇이 되었을 뿐

아침에 일어나면 그 자리 그대로

최응현의 아들 수성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이다.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 황희

황희(1363~1452)의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구부懼夫, 초명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尨村이다. 고려 우왕 기사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조선의 이름난 재상이다. 시호는 익성翼成이고, 죽은 뒤에 세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그는 나라 일에만 힘을 기울이고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여종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여종이 와서 호소하였다.

"저 계집종과 다투었는데 저 계집종은 매우 간악합니다"

"네 말이 맞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종이 와서 역시 이 계집종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네 말이 맞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못마땅한 말투로 말하였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너무도 심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저 아이는 저렇게 말했으니, 이 아이가 옳고 저 아이는 옳지 못합니다"

그는 역시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도 맞다"

황희는 때도 없이 글을 읽되 결코 자리를 구분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밭에서 일하다가 왕명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쓰고 있던 삿갓과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입궐하였으므로 행색이 매우 초라하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위촉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즉시 예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는 정승으로 30년 동안 있으면서 이미 있는 제도를 힘써 따랐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일을 처리할 때는 순리를 따랐고 도량이 넓어서 일을 처리함에 대신의 체모를 잃지 않았다. 세종도 그 사려 깊은 행동과 신중한 일처리를 늘 칭찬하였다. 어쩌다가 옛 제도를 변경할 경우에는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임기응변의 재주가 없어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은 감히 논의할 수가 없나이다"

그는 이론이 공평하고 항상 일처리가 너그러웠지만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시비를 가리는 데 과감하여 아무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놓은 뒤에도 국가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은 뒤에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나이에도 총명한 머리가 감퇴되지 않고 모든 제도와 문헌을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도량이 너그러워 감정을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평소 생활을 보면 자손들과 종의 아이들이 항상 모여 시끄럽게 하여도 그것을 금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어떤 때는 아이들이 수염을 당기고 볼을 때려도 그대로 다 받아 주었다.

한번은 낮은 관리 하나를 옆에 두고 붓에 먹을 적셔 편지를 쓰는데 남자종 아이가 그 서류 위에 오줌을 쌌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그 오줌을 말없이 닦아 냈다.

하루는 여자종이 반찬을 들고 공에게 기대서서 관리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술상을 내오리까?"

"천천히 차리거라"

비스듬히 서 있던 여종은 불손하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그리 늦지요?"

할 수 없이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차려 내라"

술상이 나오자 남루한 옷과 맨발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공의 옷을 밟고 깔고 앉아 그 반찬을 손으로 다 집어먹고 어떤 아이는 손으로 공을 툭툭 치기도 하였지만 공은 "아이고 아프다. 아이고 아프다" 할 뿐이고 아이들을 꾸짖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종의 아이들이었다.

밥을 먹을 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공은 아이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곤 하였다. 종들이 간혹 잘못을 저질러도 매를 치는 일이 없으며 종들도 사람인데 학대하면 안 된다고 늘 말하였다.

뜰 앞에 붉게 익은 복숭아를 이웃 아이들이 와서 따먹으면 공은 부드러운 소리로 아이들을 타일렀다.

"애들아, 다 따지는 말아라. 나도 맛은 봐야지"

조금 후에 나가 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이웃 아이가 돌을 던져서 잘 익은 배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공이 소리쳐 종을 부르자 돌을 던진 아이는 담 밖으로 도망쳐서 몰래 엿듣고 있었다. 종이 오자 그에게 떨어진 배를 주워 도망친 아이에게 주라고 하고 나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공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무를 보았는데 당시 김종서는 공조 판서였다. 그가 공조의 관원들을 시켜 술상을 차려 와서 대접을 하자 공이 벌컥 화를 냈다.

공은 공조 판서 김종서를 앞에 불러 준엄하게 꾸짖었다.

"국가가 예빈시를 정부 옆에 두는 것은 정승들을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 정승들이 배가 고프면 예빈시를 시켜 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공조가 이 음식을 차리느냐?"

정승 김극성이 이 일을 경연석에서 임금께 아뢰니, 세종은 "대신이면 마땅히 그래야만 백관을 통솔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황희 또한 김종서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비 새는 집에서 살았던 맹고불 - 맹사성

맹사성(1360~1438)의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자는 성지城之, 호는 동포東浦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열 살 때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일주일 동안 미음도 먹지 않았고, 장례를 치른 뒤에 3년 동안 산소를 지키며 죽을 먹었다.

묘 곁에 잣나무가 있었는데 산돼지가 내려와 잣나무에 몸을 비비곤 하여 말라 죽게 되었다. 맹사성이 통곡하니 그 이튿날 산돼지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려문이 서게 되었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의 곳곳이 새서 의관을 모두 적시게 되었다.

"정승의 집이 그렇게 초라한데 내가 어찌 행랑채를 짓겠는가?"

병조 판서는 집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을 다 치우라고 하였다.

맹사성의 본가가 온양에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내려갈 때면 관청에 들르지 않고 시종 한 명을 데리고 간편한 차림으로 가곤 하였다.

한번은 소를 타고 온양에 내려갔는데 양성, 진위 두 사또가 공이 내려온다는 것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웬 사람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문책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사또가 보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가서 온양 맹고불孟古佛이라고 일러라"

그 사람이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니 이 말을 들은 두 사또가 혼쭐이 나서 도망가는 바람에 차고 있던 인끈이 언덕 아래 깊은 못에 빠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못을 인침연이라고 부른다.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인에서 비를 만나 여관을 찾게 되었다. 이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은 어떤 사람이 먼저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딸린 하인들이 무척 많았고 그의 차림새도 무척 호화로웠다. 그는 영남에 사는 부자로서, 녹사綠事(기록이나 문서, 전곡 등을 담당하는 관리) 시험을 보려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구석방에 든 맹사성을 누각으로 불러 올려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고 거만스런 말투로 제의하였다. 막힘 없이 말을 주고받되 묻는 말은 '공'자로 끝내고 대답하는 말은 '당'자로 끝내기로 약속하였다. 이 제의에 따라 맹사성이 먼저 시작했다.

"서울은 무슨 일로 가는공?"

"녹사 시험에 응시하러 간당"

맹사성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공이 뽑히도록 해줄공?"

"하하, 그렇게 못한당"

뒷날 의정부에 그 사람이 녹사 입시생으로 들어와서 맹사성에게 인사하였다.

맹사성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공?"

그는 엎드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죽어지이당"

그 자리에 참석한 재신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맹사성이 그들에게 지난 이야기를 해주자 좌중은 배를 잡고 웃었다.

맹사성은 그를 녹사로 채용하였다. 그는 그 뒤 여러 고을에서 유능한 아전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는 모두 맹사성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공당문답公堂問答'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앉아서 세종의 술잔을 받은 - 최윤덕

최윤덕(1376~1445)의 본관은 통천이고, 자는 여화汝和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는 국경을 지키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최윤덕은 그 이웃 동네 양수척楊水尺(무자리, 사냥과 고리를 걸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집에서 길러졌다. 그는 차츰 자라면서 힘이 세고 활쏘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느 날 목우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윤덕이 즉시 달려가서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양수척이 윤덕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가 있는 합포진으로 갔다. 운해에게 윤덕의 재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운해가 "한번 시험해 보리라" 하고 사냥을 시켰는데, 달리면서 좌우로 쏘는 족족 다

맞추었다. 아버지 운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의 손이 제법 빠르긴 하지만 아직 법도를 전연 모르는구나. 네가 보인 솜씨는 하찮은 재주일 뿐이다"

아버지는 그 길로 아들에게 병법을 가르쳐 드디어 명장으로 만들었다. 세종 원년(1419)에 이종무와 함께 주사舟師(해군)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들어온 왜군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과가 보고되자 세종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그를 우찬성 겸 평안도 절제사 및 안주목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그는 공무가 끝나는 여가여가로 관청 뒤 빈 땅에 손수 채소를 가꾸었다. 어느 날 채소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소송을 하러 온 백성 하나가 그가 목사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향해 "지금 사또께서 어디 계시오?" 하니, 윤덕이 시치미를 떼고 "지금 관청에 있소" 하고 재빨리 가서 관복으로 갈아 입고 그 소송을 처리하였다.

어느 날 부인 한 사람이 울면서 고하였다.

"지난 밤에 호랑이가 제 남편을 물어 죽였습니다"

"내가 너의 남편 원수를 갚아 주마"

최윤덕은 호랑이를 쏘아 죽여 그 배를 가르고 뱃속에 있는 뼈를 거두어 의복으로 싸서 관속에 넣어 주었다. 그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여진족 이만주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세종 임금이 최윤덕을 보내어 정벌하도록 하니, 최윤덕이 크게 승리하고 돌아왔다. 세종은 근정전에서 최윤덕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고 직접 최윤덕에게 술을 권했으며, 또 세자에게도 술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윤덕이 일어나서 잔을 받으려고 하니 임금은 일어나지 말고 앉아서 받으라고 하였다. 세종이 군관에게 춤을 추라고 하자 술에 취한 윤덕이 일어나서 그 군관과 함께 춤을 추었다.

경원부사 송희미가 군법에 걸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윤덕은 송희미와 친구 사이였다. 윤덕은 그를 위하여 술상을 차리고 술을 권하면서 위로하였다.

"상심하지 말게. 법은 피할 수 없네 우리 인생은 한번은 죽어야 하네. 나 또한 죽어서 그대 뒤를 따르겠네"

벼슬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방안에서 우산을 써야 했던 청백리 - 유관

유관(1346~1433)의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이다.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유관은 그릇이 크고 너그럽되 공정하고 청렴하였으며, 남달리

총명하되 배움과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의 집은 흥인문(동대문) 밖에 있었는데 담장도 없는 초가삼간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태종 임금이 선공감을 시켜서 본인 모르게 집을 지어 주었다.

유관의 생활은 늘 청빈하였다. 장마비가 한 달 넘어 계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천장이 새서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유관은 우산을 받쳐 들고 방안에 앉아서 부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우산이 없는 집은 이 장마통에 어떻게 견딜까?"

"우산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준비가 있을 것입니다"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니 유관이 웃었다.

겨울에 유관의 집을 방문하면 맨발에 짚신을 신고 나오는 유관을 흔히 볼 수 있었고, 봄에는 호미를 들고 채소를 가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세종 6년(1424)에 우의정으로 벼슬을 물러났다.

유관은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는데, 막걸리 한 동이를 뜰 위에 두고 늙은 여자종을 시켜 사발로 술을 대접하게 하였으며, 술을 마시며 손님과 화락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졸들의 고통을 임금에게 낱낱이 아뢴 - 노한

노한(1376~1443)의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자는 유린有隣이다. 어릴 적부터 행동이 어른처럼 점잖았다. 뒤에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삼도 염찰사(암행어사)가 되어 해주군에서 전함을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감독하였다. 그는 서울로 복명할 때 전함 만드는 역졸들이 피부병에 걸려 몸에 벌레가 생겨 고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임금은 얼굴빛을 바꾸며 화난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진시황이나 수양제 같은 폭군이란 말이냐?"

노한은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하였다.

"신이 염찰사의 명을 수행한 이래로 오직 백성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하여 왔는데 삼도 해변의 역졸들이 겪는 고통은 더없이 비참하므로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보고 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웃으며 그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했다.

그후 벼슬이 이조 판서에 올랐다. 태종 9년(1409)에 동서 민무구의 옥사가 일어나서 양주로 낙향하였다가 14년 후인 세종 4년 부인 민씨가 입궐하여 사례 인사를 올리자 임금이 말했다.

"그것은 나의 은혜가 아니고 선왕 태종 임금의 은혜이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무죄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결한 슬기로운 - 신개

신개(1374~1146)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자격子格, 호는 인재寅齋이다. 어릴 적에는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하여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모두들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시끄럽게 변명하였는데 신개만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의 키와 벽 높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낙서한 벽의 높이가 자기 키보다 한 자나 높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슬기롭게 말없이 증명한 것이다.

이것을 본 외갓집 원씨는 기특하게 여기면서 뒷날 신씨 문중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굶어 죽은 왕자 광평대군

광평대군(1425~1444)은 어릴 적에 관상을 보았는데 굶어 죽을 팔자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세종 임금은 내 아들이 어떻게 굶어 죽을 수가 있느냐며 적전籍田(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을 많이 하사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광평대군은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 그 길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육신보다 격이 더 높은 사람 - 최덕지

최적지(1384-1455)의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가 당나라 청하淸河로부터 뱃길로 와서 전주에 살게 된 것이다. 지금 전주를 객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최담은 문과에 합격하여 참의를 지냈으며, 광지, 직지, 득지, 덕지 사형제를 낳았다.

덕지의 호는 연촌우수이고 권양촌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태종 5년(1405)에 생원시, 문과시를 거쳐 직제학을 지내고 남원부사로서 영암 영보촌에 눌러앉아 누각에 존양루存養樓라는 편액을 달고 살았다.

문종 원년에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 겨울에 나이 때문에 사직하였는데, 집현전의 학사들이 그를 위해 한강가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전송하였다. 이때 그를 흠모하여 부른 송가가 40여 편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온전히 했으니

공은 곧 나의 스승일세

당시에 국가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참혹한 화를 많이 당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김시습은 오늘의 백이伯夷요, 육신은 오늘의 방련方鍊이요, 연촌우수는 육신에 비해서 더 높은 자다"라고 하였다.

향년 72세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하늘의 조화를 부른 절개를 지킨 - 정본

정본(?~1454)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자외子畏,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태종 16년(1416)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2년(1452) 좌찬성에 올랐으며 곧 우의정에 올랐다.

계유년(1453)에 황보인 등이 죽음을 당하자 정본은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변방 지역에 안치되었다.

정본이 전경체찰사(지방에 병난이 났을 때 왕을 대신하여 평정의 임무를 띤 임시 벼슬)로서 영남으로 가는 길에 용안역에 닿았는데 거기서 자기를 잡으로 온 관원을 만났다. 정본은 즉시 말에서 내려 인사하였다.

"길에서 형벌을 받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역관사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관원이 말하였다.

"귀양지까지 갑시다"

정본은 다시 재배하고 나서 물었다.

"그러면 나를 살려주는 것입니까?"

"..."

그때부터 같은 길을 가면서 열흘 동안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관원은 옛날에 함께 있던 동료였다.

"정본과 허눌은 안평대군 용瑢의 당 조극관과 모의하여 병권을 장악하였으니 그 죄가 황보인에 못지 않다. 마땅히 같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헌납 김계우가 이렇게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단종 2년(1454)에 사사되었다. 정본이 귀양소에 있을 때 늘 선대의 사판을 모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따라온 승려를 시켜서 밥을 짓게 하고 제사한 뒤에 그 사판을 태웠다. 그리고 곧 사약을 받게 되었다.

죽음에 임해 아내가 그의 옷자락을 당기며 슬피 울자 정본이 아내에게 말했다.

"조정의 명령이라 거역할 수 없소. 나 죽은 뒤의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그는 또 사약을 마시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한탄하였다.

"나에겐 두 마음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죽자 갑자기 소나기가 몰아쳤고 하늘에 흰 무지개가 섰다. 그의 아내 변씨는 정본의 오촌 조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신臣'자 대신 '거巨'자를 써서 세조에게 항거한 - 박팽년

박팽년(1417-1456)의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인수人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세종 16년(1434)에 문과시, 29년에 중시重試(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 각각 합격하였다.

을해년에 단종이 선위하니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를 본 성삼문이 제지하며 말하였다.

"우리 상황(단종)을 위하여 뒷날을 기약하자. 만약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박팽년은 그의 말에 따랐다. 드디어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로 나갔다가 세조 2년 (1456)에 형조 참판이 되었다. 모의가 발각되어 국문 받을 적에 박팽년은 당당하게 말했다.

"성승, 유응부, 박청이 운검이 되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장소가 좁아서 운검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성공하지 못하고 뒷날 임금이 권농하러 가는 길에 일을 꾀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은근히 달랬다.

"네가 만약 나에게 돌아온다면 살려주겠다"

"..."

박팽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신이라고 일컫지도 않았다. 세조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너는 이미 나에게 신이라고 칭하였는데 이제 와서 신이라고 청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나는 상왕의 신하입니다. 전에 제가 관찰사로 있었을 적에 올린 편지에도 신이라고 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의 편지를 가져와서 확인해 보니 모두 ‘신臣’자가 아닌 ‘거巨’ 자였다.

금부도사인 김명중이 박팽년을 달랬다.

"공은 어찌하여 이런 화를 자초하는가?"

팽년은 한숨지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부득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네"

팽년은 죽음을 앞두고 그의 아버지 박중림에게 울면서 말하였다.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다가 이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박중림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임금에게 불충을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지 않느냐?"

선조 16년(1583)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옛적에 박팽년이 친구를 추천하였는데 그 친구가 은혜를 갚기 위하여 사례하자 박팽년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청렴한 사람이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정이라 하였다. 동왕 51년에 정려가 세워졌다.

박팽년의 아들 생원 헌과 순, 그 아우 분과 박팽년 부자 여덟 사람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순의 아내 이씨는 대구 관비가 되었는데 마침 임신 중이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마침 여종은 딸을 낳았으므로 서로 바꾸어 길렀다. 아들 이름은 박비라 하였다.

성종 3년(1472)에 순의 친구의 사위 이극균이 영남 도백이 되었는데, 박비에게 권하여 자수시켰다. 성종 임금은 그를 특별히 사면하였으며,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 이개

이개(1417~145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청보淸甫, 호는 백옥白玉이다. 세종 18년(1436)에 문과시, 동왕 29년에 중시를 거쳐 직제학으로 있었을 때 병자년 사건(단종 복위 모의)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이개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친구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개는 몸이 허약하여 옷무새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국문을 받을 적에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이개의 숙부 이계전이 수양대군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이개가 늘 경계하였다. 사형을 당할 때 이개는 한 수의 시를 썼다.

사직이 안전할 땐 사는 것이 중요하고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영조 4년(172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세조로부터 받은 봉록을 고스란히 쌓아 둔 하위지

하위지(1387~1456)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중장仲章, 또는 대장大章이며 호는 단계丹溪, 또는 적촌赤村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다. 과묵하고 조용하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서 대궐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아무리 비가 오더라도 길을 피해 간 적이 없었다. 시강원과 경연석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그 당시 인재를 말할 적에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한 뒤 좌사간에 올랐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고 공실公室(왕실)을 강하게 하고 내치內治를 엄하게 하며 권문權門을 막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조가 등극하여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봉록을 쓰지 않고 고스란히 쌓아 두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그 재주를 사랑한 세조가 은근히 타일렀다.

"그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면 용서해 주겠다"

하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직접 나와서 죄인들을 세 차례나 단근질을 하였다. 드디어 하위지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말하였다.

"이미 역적 이름에 올랐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음인데 또 물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조는 화가 났으나 단근질은 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성삼문과 같은 날에 죽음을 당했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하위지는 호琥와 박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때 박은 채 스무 살도 못되었다. 박은 조금도 떠는 기색 없이 금부도사에게 말했다.

"어머니께 작별인사 드릴 시간을 주시오"

그는 꿇어 앉아서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이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

또한 누이동생을 돌아보며 단단히 일렀다.

"몰수되어 노예가 되겠지만 여자의 의리는 마땅히 한 남자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절대 개돼지 같은 행동은 하지 말아라"

그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사약을 받자 사람들은 과연 하위지의 자식답다고 말하였다.

하위지의 동생인 생원 강지, 기지는 형 하위지와 함께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였고 소지는 생원이었는데 모두 함께 죽음을 당했다. 하위지의 아들 박은 뒤에 지평에 증직되었다.

 

 

세조의 공을 치하하는 글을 쓰고 통곡한 - 유성원

유성원(?~1456)의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태초太初이다. 당시 세종은 문치에 힘을 써서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사들을 모아서 고문에 응하도록 하였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경오년(1450)에 흰 까치가 와서 둥지를 짓더니 하얀 새끼를 낳았다. 계해년에 이 버드나무가 말라 죽었다. 어떤 사람이 유성원을 놀리기를 '화근은 버드나무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대로 유성원은 화를 당하고 집현전도 없어졌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승하하고 단종 원년(1453)에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였다. 백관들이 이것으로써 세조의 공을 포상하여 주공周公에 비유하고 집현전 학사로 하여금 그 내용을 초안하라고 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이 홀로 남게 되었다.

그가 위협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초안을 작성하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으나 집안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단종이 상왕으로 밀려났을 때, 유성원은 성균관 사예司藝로 있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성균관에서 말을 타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유성원은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혼자 가묘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부인이 문을 열고 보니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서생들과는 아무 일도 도모할 수 없다 한탄한 - 유응부

유응부(?~1456)의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신지信之이다. 키가 크고 얼굴에 위엄이 있으며 활을 잘 쏘고 용맹스러웠다. 또한 효도가 지극하여 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무과에 등과하여 벼슬이 2품 재상직에 올랐으나 풀로 엮은 자리로 문을 가리울 정도로 가난하여 고기 한번을 먹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를 봉양할 물건은 모두 갖추었다. 언젠가 동생 응신과 어머니를 모시고 포천에 간 적이 있는데 도중에 말 위에서 기러기를 쏘아 땅에 떨어뜨림으로써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세조 2년(1456)에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할 당시 운검으로 있던 응부는 당장 거사하자고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권람과 한명회를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지 어찌 칼을 쓰겠는가!"

이때 박팽년과 성삼문이 적극적으로 제지하면서 다음 기회를 보고 오늘은 그만두자고 하였다.

"모든 일은 신속한 것이 제일이다. 오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유응부는 자기 뜻을 고집하였지만 박팽년과 성삼문 등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 일은 중단되었고, 그 뒤에 모의한 일이 발각되었다. 세조에게 추국을 당하자 유응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종 임금을 복위하려 하다가 불행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제 말해서 무엇하겠소?"

또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서생들과는 아무 일도 도모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도다. 지난번 내가 칼을 쓰려고 할 적에 너희들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사람이 꾀가 없으면 짐승과 다름이 없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단근질을 받으면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라고 호령하면서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죽었다.

무인년에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태어날 때 세 번 묻더니 죽을 때도 세 번 신문 당한 - 성삼문

성삼문(1418~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다. 태어날 적에 공중으로부터 아기를 낳았느냐는 물음이 세 번 이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29년(1447) 중시에 장원하였다.

문종이 동궁 시절에 학문에 힘써서 매달 달 밝은 밤이면 손에 책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가서 글을 물었으므로 성삼문은 의관을 벗지 못하고 지냈다.

어느 날 밤중에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신발 소리가 들려 와서 나가 보니 문종이었다. 을해년(1455)에 단종이 선위하였을 때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세조 2년에 중국 사신을 맞는 잔칫날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거사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성삼문은 운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낌새를 챈 김질이 밀고하여 사건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삼문을 불러서 세 번 심문하니 웃으면서 그 말이 다 맞다고 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이 나를 배반하느냐?"

세조가 물으니 삼문이 소리를 질러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을 복위하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배반이오? 천하에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소?"

너는 나의 녹을 먹으면서 나를 배신하였으니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상왕이 계시는데 어찌하여 나를 신하로 여깁니까? 나는 녹을 먹지 않았으니 우리 집을 몰수하여 계산하시오"

단근질을 당하였으나 성삼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신숙주를 돌아보면서 질책하였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적에 세종 임금이 원손을 안고 뜰을 산보하시면서 우리들을 돌아보시고 '천추만세 후에 경들은 이 아이를 잘 보호하라'고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는 잊었단 말이냐?"

신숙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희안을 신문하였으나 불복하자 세조가 다시 삼문에게 물었다.

"강희안도 함께 모의하였느냐?"

삼문이 대답하였다.

"그는 우리의 모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름 있는 선비를 다 죽이지 말고 남겨 두고 쓰십시오"

이 때문에 강희안은 죽음을 면하였다. 삼문은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도 태연자약한 안색으로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자네들은 어진 임금을 잘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살게나. 나는 지하에 들어가 우리 임금을 만나겠네"

죽은 뒤에 그 집을 몰수하고 보니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받은 봉록을 한 방에 고스란히 모아 놓고 각각 어느 달 봉록이라고 써 놓았다. 집에 변변한 살림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침실에 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성삼문이 남긴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북소리는 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에 해는 뉘엿뉘엿 지려고 하네

황천에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

오늘 저녁엔 뉘 집에서 잘꼬

성삼문이 중국에 갔을 적에 어떤 사람이 가리개에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그림을 보지 않고 먼저 두 구를 썼는데, 나중에 보니 수묵도였다.

눈같이 흰 옷에 옥 같은 발뒤꿈치

연못 속 물고기를 얼마나 엿보았느냐

우연히 날아서 산음현을 지나다가

왕희지의 벼루 씻는 연못에 추락하였나

시를 본 그 사람은 매우 감탄하였다.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온이 성삼문의 시체를 수습하여 노량진 아차현 남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성삼문이 언젠가 중국에 들어가서 백이, 숙제의 묘 옆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써붙였는데, 비석에서 땀이 흘렀다고 한다.

말고삐 잡고 감히 잘못을 간했으니

그 충의 당당하여 햇빛처럼 빛나네

초목 또한 주나라 이슬 먹고 자랐거늘

수양산 고사리는 어느 나라 고사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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