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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5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by 싯딤 201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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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김시습(1435~1493)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읽고 3세 때 글을 지었으며 5세에 <중용>, <대학>을 배워서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보고 정말 기특한 재주라 칭찬하고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부르고 지신사 박이창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먼저 써 내려갔다.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창공을 춤추는도다"

김시습이 대구를 맞추었다.

"성주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공중에서 끔틀거립니다"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릎 위에 앉히고 여러 번 시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좋은 시를 척척 지어 내었다. 세종은 직접 김시습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소문이 나는 것을 꺼려하여 소문 없이 잘 길러서 학업이 성취된 뒤에 크게 쓸 예정이었다. 세종이 김시습에게 비단 50필을 주면서 네 힘껏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시습이 그 끝자락을 잡아매 그 한끝을 손에 잡고 끌고 나갔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이름은 천하에 진동하여 이름 대신 '오세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3세에 김반에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배우고 윤상에게 '주역'과 '예기'와 '사기'를 배웠다.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조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삼각산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단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고, 읽던 책을 불태운 뒤에 도망쳐 나와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불명佛名은 설잠, 청한자, 벽산청은, 동봉, 췌세옹이라 하였다.

그는 작은 키에 호기가 넘치고 예의 따위는 전혀 차리지 않았다. 성격이 꼿꼿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시대의 잘못을 한탄하고 드디어 몸을 숨겨 전국을 방랑하니,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천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무든 돌멩이든 잡히는대로 던지고 때로는 활도 쏘아서 거절하였다. 산에 오르면 나뭇잎에 시를 쓰고 혼자 읊조리다가 금방 울면서 그 나뭇잎을 따 버렸다.

비오는 밤이면 흰 종이 100여 장을 꺼내어 물가에 앉아 혼자 읊조리면서 시를 쓰고 쓴 다음엔 그 종이를 물에 던지곤 하였는데 종이가 다 없어져야 그만두곤 하였다. 때로는 나무를 깎아 농부의 모습을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온종일 지켜보며 목놓아 울다가 태워 버리곤 하였다. 벼슬한 고관을 만나면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앞에서 "이 백성이 무슨 죄냐?" 하며 통곡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청초한 목소리로 '이소경'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술을 좋아하여 자주 취했으며 취한 뒤에는 "우리 영릉(세종의 능호)을 다시는 못 뵙는구나"라고 한탄하며 슬피 울었다.

이때는 김수온, 서거정이 국사(온나라에서 특히 높이는 우수한 선비)로 일컬어지던 시기였다. 하루는 서거정이 조정에 가는 길에 김시습을 만났다. 김시습은 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강중(서거정의 자)은 편안하신가?"

시습이 큰 소리로 무례하게 대하였지만, 서거정은 웃으면서 대해 주었다고 한다. 언젠가 서거정이 강태공이 낚시질하는 그림을 주고 시를 부탁하니 김시습은 이렇게 썼다.

비바람 쓸쓸히 낚시터에 불어올 땐

위천의 물고기랑 욕심이라곤 모르더니

어찌하여 늘그막에 응양장이 되어서

공연히 백이 숙제로 하여금 굶어 죽게 하느냐

 

이 시가 쓰인 그림을 되돌려 받은 서거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다.

세조가 내전에 법회를 열고 김시습을 초청하였는데, 그는 몰래 새벽에 도망쳤다. 사람을 보내어 뒤따르게 하자, 그는 더러운 오물 속에 들어가 얼굴을 반만 내밀고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김시습은 47세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결혼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예전처럼 방랑 생활을 하였다. 어쩌다 소송의 일로 관가에 들어가면 분명한 잘못인데도 괴변을 늘어놓아 반드시 이겼으며, 재판이 끝나면 큰 소리로 웃으며 이긴 문서를 찢어 버리곤 하였다. 한번은 시장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데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놈이 벼슬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꺼려하여 시습과 절교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종실 수천부정 이정은과 남효온, 안응세, 홍유손 등은 끝까지 변치 않았다.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강릉과 양양 사이를 오갔다. 이때 유자한이양양군수로 있었다. 그는 김시습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가정을 찾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김시습이 사양하는 편지를 썼다.

낙백하여 세속을 살기보다는 마음대로 소요하면서 생을 보내는 것이 낫다.

59세에 죽었는데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시에 자기의 자화상 두 폭을 남기고 찬을 썼다.

네 모양은 너무도 막연하고

네 말은 너무도 미련하다

언덕 밑 구렁텅이로 너를 밀어 넣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조에 집의에 증직되고 정조 8년(178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청간이다. 홍산 무량사에서 죽었는데 절 옆에 3년 동안 묻어 놓았다가 장례할 때 보니 생시의 얼굴과 같았으므로 무량사 승려들이 부처님으로 여겼다. 화장을 하고 탑을 세웠다. ***

 

 

 

<육신전>을 지어 충의를 세상에 알린- 남효온

 

남효온(1454~1492)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이다.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종직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제나 '우리 추강'이라고 불렀다.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 안응세는 남효온을 형제처럼 대해 주었다. 성종 때 공은 18세의 나이로 상소하여 소릉(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능호)의 복구를 청하였는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세상을 단념하고 명승지를 찾아 소요하였다. 세속의 일에 분개하여 모악산에 올라 통곡했으며 위태롭고 과격한 말을 거리낌없이 하였으므로 김굉필, 정여창이 늘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김시습은 늘 남효온을 보면 이렇게 물었다.

"나는 세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공은 다르지 않은가? 어찌하여 세상을 등지는가?"

그때마다 효온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릉의 일은 천지의 큰 변일세. 소릉을 복위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네"

그 뒤로 시습은 다시 권하지 않았다. 남효온이 '육신전'을 짓자 문인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 적극 말렸으나 효온은 듣지 않았다.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현 충의의 이름을 매몰되게 둘 수 있는가?"

'육신전'은 드디어 야사가 되어 세상에 전파되었다. 뒷날 그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해 성종 11년(1480)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술을 즐긴다고 어머니가 꾸짖자 그는 지주부를 짓고 10년 동안 술을 끊었다.

성종 23년(1492)에 3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연산군 10년(1504)에 부관참시되었다. 정조조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호랑이를 타고 청량포를 건너가 단종의 시신을 거둔- 조려

 

조려(1420~1489)의 본관은 함안,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이다. 단종 원년(1453)에 벼슬길에 나왔는데 명망이 매우 높았다.

어느 날 그는 제생들을 향하여 읍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의 시에 백이 숙제의 뜻과 돈세무민豚世無民(세상에 숨어 살아도 아무 불만이 없다는 뜻)의 뜻이 나타난 것은 김시습과 마찬가지이다.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었을 때 청량포에는 아무도 출입 못하게 뱃길을 금지하였다. 이때 공은 함안에 살고 있어 영월과는 거리가 5백여 리나 되었지만 한달에 세 번씩 단종에게 가서 안부를 물었다. 잠은 원관란의 집에서 잤는데 밤마다 단종의 만수무강을 하늘에 빌었다.

세조 3년(1457) 1월 10일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가 밤에 청량포에 닿았지만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때는 벌써 새벽이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다가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걸어서 건너려고 물로 들어갔다. 이때 갑자기 뒤에서 무엇이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큰 호랑이였다. 공은 호랑이를 향해서 말하였다.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이 강을 건너야 임금의 시체를 거둘 수가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일을 이루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고 싶거늘 어찌하여 너는 나를 잡아당기느냐?"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 앞에 엎드려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조려는 호랑이 등에 업혀 무사히 강을 건넜다. 단종의 빈소에 들어가니 두 사람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통곡 사배四拜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에 문 밖을 나오자 그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가 다시 그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 주었다.

추강 남효온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호랑이가 청량포를 건너 주어서

조여는 노산의 시신을 염하였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단종 복위에 실패한 후 평범한 농부로 살았던- 성담수

성담수(?~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이수耳壽, 호는 문두文斗이다.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합격, 교리가 되었다. 단종 때 나라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자 사촌 성삼문과 더불어 왕실을 도우면서 죽더라도 마음을 변치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성삼문이 죽게 되자 성담수도 무서운 국문을 받았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서 공주로 돌아갔는데,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성담수는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묘 밑에 숨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태평이었다. 한번도 서울에 간 적이 없고 자신이 명문세족임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농부로 보았다.

그의 조카 성몽정이 경기 감사가 되어 본 고을을 순시할 때 숙부 성담수의 주소를 몰라 수소문 끝에 찾았다. 그의 집을 찾아가니 쓸쓸한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였고, 앉을래야 앉을 만한 변변한 자리조차 없었다. 탄식하고 집에 돌아온 감사 성몽정은 숙부에게 자리를 보냈다. 그러나 성담수는 곧 자리를 돌려보냈다.

"이런 좋은 자리는 우리 같은 가난뱅이 집에는 맞지 않지"

이때 나라에서 죄인의 자제들을 참봉을 시키고 그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관의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성담수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를 읊고 낚시로 소일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언젠가 성담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온종일 강변에 앉았다가

강물에 발 담그고 곤하게 잠들었네

꿈속에서 갈매기와 만 리를 날다가

깨어나니 몸은 석양에 누워 있네

***

 

 

강물을 피로 물들인 비운의 왕자- 금성대군

금성대군(1426~1457) 유瑜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인품이 맑고 아량이 넓으며 말씨에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을해년에 우의정 한확 등이 아뢰었다.

"금성대군이 모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남군, 영풍군, 영양위 정종과 서로 깊이 사귀고 있으니 서둘러서 그 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삭녕으로 귀향 가게 되었다. 세조 2년(1456)에 성삼문 등이 죽고 금성대군은 순흥에 안치되고 그 집은 적몰 당했다.

다음해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안동 감옥에 갇혔다. 어느 날 금성대군이 옷을 발가벗은 채 도망쳤다. 관청에서 그를 잡으려고 큰 수색을 벌였지만 잡지 못했다. 얼마 후에 금성대군은 자기 발로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를 잡지 못하지? 그러나 내가 어찌 끝내 도망할 수가 있겠느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신다"

그는 옷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사배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이때 이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죽계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영조 14년(1738)에 예손 이진수의 하소연을 받아들여 금성대군을 복관復官하고 시호를 정민貞愍이라 하였다.

죽음으로 옥새를 지킨 혜빈 양씨

양씨의 본관은 청주이다. 현감 양경의 딸이고, 찬성사 양지수의 증손녀다. 세종 때 후궁으로 뽑혀 혜빈에 봉해졌고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낳았다.

세종 23년(1441)에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었다. 세종이 빈 중에서 양씨를 택하여 원손을 기르게 하였다. 양씨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단종을 길렀다. 단종이 덕을 갖추어 잘 성장한 것은 실로 양씨의 공이 컸다.

세종과 문종이 차례로 승하하고 을해년(1455)에 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혜빈에게 옥새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새는 나라의 중한 보물입니다. 선왕(세종)께서 세자와 세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옥새를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혜빈은 목숨을 걸고 옥새를 지키다가 피살되었다. 그 아들 영풍군은 이때 운검으로서 입시중이었는데 동시에 죽음을 당하고 한남군은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피살되었다.

정조 15년(1791)에 혜빈에게 민정愍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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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 미치광이 흉내로 일관한- 권절

권절(1422~?)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단조端操, 호는 율정栗亭이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빼어나고 힘이 장사여서 남이장군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많은 책을 읽어 두루 박식하였다. 세종 29년(1447)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종은 그의 재주가 문무를 겸한 것을 보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더 익히게 하여 사복시 직장을 제수하고 집현전 교리로 뽑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자주 그의 집에 와서 장래의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권절은 귀먹은 척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즉위한 후 그의 재주를 아껴서 첨지중추부사로 선발하고 궁중 수의를 맡겼으나 권절은 미친 척하고 그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국가는 태평하고 성주는 만수하소서!"

그는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이렇게 보냈다.

숙종 30년(170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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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때에 따라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소한- 조상치

조상치의 본관은 창녕, 자는 자경子景, 호는 정재靜齋, 또는 단고丹皐이다. 세종 원년(1419)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핑계하여 들어가서

축하 인사를 하지 않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은 바로 군자가 경계할 일입니다"

세조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세조는 그를 예조 참의에 승진시켜 벼슬을 내렸지만 그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입궐하여 인사하지 않고 곧바로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박팽년이 그에게 "가신 길 바라보니 우뚝하여 따를 수 없네"라는 편지를 썼다.

성삼문이 그에게 편지하기를 "영천의 맑은 바람이 동방의 기수 영수되었으니 우리들은 조 선생의 죄인이다" 하였다.

영천으로 돌아온 조상치는 서쪽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으며, 단종의 '자규사'를 보고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다음과 같이 화답하는 시를 썼다.

소쩍소쩍

달 뜨는 저녁 산속에서 무엇을 호소하나

뻐꾹뻐꾹

파잠을 바라보고 날아서 건너고 싶어라

다른 새들 옹기종기 둥지에 모였는데

너 홀로 꽃가지를 향해 피를 토하고 있구나

쓸쓸한 얼굴에 초췌한 모습

즐겨 숭배하지 않고 누구를 돌아보는가

아! 인간의 원한이 어찌 나뿐이랴

충신과 의사의 가슴속의 불평이

손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단종이 죽자 사람 만나기를 일체 사절하여 식구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밤마다 홀로 앉아 잠도 자지 않고 슬피 울었다. 그는 못난 돌을 구해다가 면을 다듬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면에다 "노산군 조정 부제학 도망자 조상치의 무덤"이라고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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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장례를 치른 호장- 엄흥도

엄흥도의 본관은 영월이고, 직책은 영월군 호장戶長이다. 세조 3년 10월에 단종이 승하하였다. 엄흥도는 곧 달려와 곡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시신을 거두고, 다른 의논이 있을까 겁을 내어 즉시 장례 하였다. 이때 엄흥도의 일가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만류하자 엄흥도가 말하였다.

"선행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요"

그는 장례가 끝나자 아들 엄호현을 데리고 도망갔다. 엄흥도가 죽은 뒤에 그 아들은 몰래 영월로 되돌아왔다.

현종 10년(1669)에 우암 송시열이 엄흥도의 자손을 쓰자고 청하자 상이 허가하였다. 영조 때 정려각이 세워지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종이 제문을 지었다.

"어느 때인들 충신열사가 없으리요마는 어찌 엄흥도의 충성만 하겠는가. 아! 그때의 강원도에는 감사도 있었고 수령도 있었지만 일개 호장으로서 능히 큰 충절을 세웠구나. 아! 사육신은 마음을 다해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거니와 영월 호장 엄흥도는 무슨 요구가 있고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일가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이는 진실로 한 조각 붉은 마음 때문일 것이니, 지난 역사에도 듣기 힘든 일이구나. 백대를 전하도록 의열이라 할 만하다"

제주도민에게 장례법을 가르친 기건

기건(?~1460)의 본관은 행주이고, 집이 청파동 만리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청파靑坡라 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보니 백성들은 전복을 따먹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부모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언덕이나 구릉에 갖다 버렸다. 이를 본 기건은 고을 사람들에게 관을 짜고 장례 치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제주도 사람이 부모 장례를 치를 줄 알게 된 것은 기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기건이 꿈을 꾸었는데,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 앞에 와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공의 덕택으로 우리의 뼈다귀를 거두었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금년에 공은 반드시 어진 자손을 둘 것입니다"

과연 그 해에 손자를 낳았으며, 그는 문과에 합격하여 응교應敎가 되었다. 그 뒤로 기씨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니 그 꿈이 맞은 것이다. 그의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단종조에 벼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람을 일체 사절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으나 기건은 자기의 눈이 청맹과니라고 핑계하였다. 세조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침을 들고 그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였으나 기건은 눈

한 번 깜짝거리지 않고 끝내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 나라 풍습에 부인들이 외출할 적에 너울을 쓰지 않았는데 기건이 처음으로 너울을 만들어서 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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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괴물과 함께 살았던 - 신숙주

신숙주(1417~1475)의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그 이듬해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종 29년 중시에 합격한 뒤 서장간書狀官으로서 일본에 갔다. 일본 사람들은 신숙주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시를 지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신숙주의 시에 대하여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신이 일본에 갈 적마다 반드시 신숙주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세조 6년(1460)에 강원, 함길도 절도사가 되어 국경 지방에 깊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오랑캐들이 밤에 공격해 와서 영내가 매우 소란하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꼼짝도 않고 누워서 막료를 불러 자기가 지은 시를 받아쓰게 하였다. 병사들은 그때서야 안정을 되찾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가 있었다.

신숙주가 젊었을 적에 경복궁 정시庭試에 응시하러 갔는데 이른 새벽에 커다란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대궐 문 앞에 있어서 모든 응시생들이 다 그 입을 통해 들어갔다. 이때 신숙주는 눈을 부릅뜨고 당당히 서서 그 괴물을 응시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 하나가 신숙주의 옷소매를 잡고 물었다.

"공은 저 입을 벌리고 있는 괴물을 보았소? 그것은 내가 조화로써 만들어낸 괴물이니 공은 잘 간직하시오"

"너는 누구냐?"

"나도 사람이오. 공이 앞으로 귀한 재상이 될 것을 알고 평생토록 따라다니면서 행동을 함께 하려고 하오"

신숙주는 그 괴물과 함께 집에 돌아왔는데, 그 괴물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신숙주가 앉으나 누우나 항상 함께 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그에게 자기의 밥을 나누어주면 씹는 소리는 들렸지만 밥그릇은 줄지 않았다.

그 괴물은 신숙주의 집안에 일어날 모든 일과 과거의 합격 여부를 신숙주에게 미리 다 알려주었다. 신숙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갈 적에 이 괴물을 시켜서 먼저 뱃길의 깊고 얕음과 거리를 알아 오도록 시켰기 때문에 신숙주는 먼 뱃길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신숙주는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유언을 남겨 부탁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이 괴물에게 따로 제사를 차려 주어라"

그 자손들은 신숙주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의 제삿날이면 반드시 따로 한 상을 차려서 괴물에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신숙주 생시에 세조는 늘 말하였다.

"환공과 관중, 한고조와 장량,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나와 숙주의 관계와 같다"

세조 3년에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성종묘에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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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을 식게 만드는 사람- 권람

권람(1416~1465)의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큰 뜻을 품었으며 계책이 뛰어났다. 책을 싸가지고 깊은 명산에 들어가 한명회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35세가 되도록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세종 말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잇달아 장원을 세 차례나 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총재가 되어 '무경武經(고대의 병서)'에 주석을 달았다. 그는 수양대군의 시종이 되었는데, 대군은 그의 큰그릇을 알아주고 대우를 극진히 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장래 꿈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집을 은밀하게 드나들었으며, 한번 들어가 논의하기 시작하면 해가 늦도록 계속하였으므로 수양대군집 궁인이 공을 보면 "국을 식히는 양반이 또 온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이 공을 내전으로 불러 위로 잔치를 베풀고 정희왕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 옛날 국을 식히던 사람이오"

영의정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우리 집에도 선조의 문집이 있다고 익살을 부린 강맹경

강맹경(1410~1461)의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子章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임금이 맹경의 집을 보고 말했다.

"저 썩은 서까래를 빨리 갈아야겠다. 사람 상하겠다. 영상의 집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이계전이 중국에 갔을 적에 주객 낭중이 시를 청하였다. 갑자기 시가 떠오르지 않은 계전은 자기 선조의 문집인 '목은집' 가운데 있는 '조조대명궁시早朝大明宮詩'를 써 주었다.

활짝 열린 명당에는 새벽 공기가 차고

우뚝 솟은 깃발은 난간에서 나부낀다.

시를 본 주객은 칭찬을 마지않았다.

강맹경도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이계전이 맹경을 보고 농담삼아 말했다.

"만약 중국 사신이 자네에게 시를 청하면 대책이 있는가?"

맹경은 그 말을 받아 즉시 대답하였다.

"우리 집에도 선조의 문집 '통정집'이 있지?"

그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이계전은 목은의 자손이요, 강맹경은 통정의 후손이다. 맹경의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온종일 벌주를 마신 구 정승 구치관

구치관具致寬(1406~1470)의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이율而栗이다. 세조 13년(1467)에 영의정이 되었다.

야인 여얼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세조는 구치관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세조는 말했다.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이때 구치관은 신숙주와 더불어 세조의 신임을 받은 터였다.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구치관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다.

어느 날 세조는 두 정승을 내전으로 불러 놓고 말했다.

"경들에게 내가 질문을 할 테니, 경들은 바른 대답을 해야 한다. 만약 실수하면 벌주를 마셔야 한다"

조금 후에 세조가 신 정승을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신新 정승을 불렀는데, 잘못 대답한 것이다" 하고 신숙주에게 벌주를 먹였다.

또 구 정성을 불렀다. 구치관이 "예"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하였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 정승과 구 정승은 하루종일 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

 

남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강순

강순康純(1390~1468)의 본관은 신천信川이고, 자는 태초太初이다. 상상부원군 강윤성의 증손으로, 음직蔭職(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공로로 하는 벼슬)으로써 벼슬했다.

세조 13년(1467)에 길주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호조 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상중에 있는 허준을 기용하여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이유소를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였다. 토벌군은 홍원에서 싸우고, 또 만령에서 싸워 반란군을 대파하고, 이시애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건주의 이만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왔다. 세조는 어유소를 좌장군으로 삼고, 남이를 우장군으로 삼고, 강순을 정서주장征西主將으로 삼아 정병 2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건주의 동북쪽을 공략하여 그들을 소탕하였다. 큰 나무를 베어 하얗게 깎은 뒤에 "모년 모월 모일에 정서주장 강순과 좌대장 어유소 등은 건주위 올미부를 토벌하고, 이에 돌아간다."고 쓰고 돌아왔다.

그는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신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14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이때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입어 반란죄를 입게 되고, 국문을 받게 되었다. 강순이 영의정으로서 국문에 참석하여 남이가 정강이뼈가 부러지도록 국문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변명을 해주지 않자, 남이는 "강순이 나에게 모반을

시켰소" 하고 강순을 끌고 들어갔다.

강순은 어이가 없어 말했다.

"미천한 몸이 다행히 성군을 만나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신의 나이 지금 칠순이 넘었거늘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모의를 했겠습니까?"

예종 임금이 강순의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자 남이는 또다시 모함하였다.

"성상께서 거짓말에 속아 죄를 면해 주신다면 무슨 방법으로 죄인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을 듣고, 다시 의심이 난 임금은 국문을 시작하였다. 강순은 늙은 몸에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 허위 자복을 하고 말았다. 이를 본 남이가 강순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불복한 것은 장래를 기대한 때문이었는데, 이제 다리뼈가 부서져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살아서 무엇하겠소. 나 같은 젊은 사람도 억울하게 죽게 되었거늘 살만큼 산 노인이 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억울하오"

드디어 남이와 함께 사형을 당하게 된 강순이 남이를 불렀다.

"남이야, 너는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모함했느냐?"

남이가 대답하였다.

"억울한 것으로 말하자면, 내나 대감이나 같지 않소. 당신은 수상으로서 나의 억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한마디 변론도 하지 않았으니, 당신도 억울하게 죽어야 마땅하오"

강순은 어처구니가 없어 좌우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젊은이를 친하다가 이런 화를 당하는구려. 반역이 어떤 죄인데 장난을 치다니..."

강순의 아내와 자제들도 죽음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

 

 

얼굴에 분바른 귀신 때문에 장가든- 남이

남이南怡(1441~1468)의 본관은 의령이다. 의산군 남휘의 아들이며, 태종의 외손이다.

어릴 적의 일이다. 길거리에서 노는데 어떤 종아이가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데 그 봇짐 위에 분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귀신을 보지 못하였다. 남이는 이상히 여겨 그 아이가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 아이가 한 재상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후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주인집 아가씨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들어가 보면 살릴 수 있다"

남이가 이렇게 말했으나 그 재상의 집에서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그렇게 하라고 하여 남이는 간신히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분바른 여귀는 장자의 가슴에 올라앉아 있다가 남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즉시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서 일어났다. 남이가 문 밖으로 나가자 다시 여귀가 낭자의 가슴에 올라앉았고 낭자는 다시 까무러쳤다. 남이가 다시 들어가자 여귀는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났다. 남이가 여귀에게 물었다.

"그 봇짐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홍시인데 낭자가 먹고 기절한 것입니다"

남이는 그가 본 대로 모두 말하고 귀신 다스리는 약을 써서 낭자를 살려주었다. 그 낭자가 바로 좌의정 권람의 넷째 딸이었다. 권람은 이 일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고 남이를 사윗감으로 택하여 첨을 쳤다. 점쟁이가 말했다.

"총각은 반드시 죄를 짓고 죽을 것입니다"

자기 딸의 운명을 점쳐 보니 목숨이 매우 짧고 자식이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복을 누리고 화는 없을 터이니 사위를 삼아도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용기는 다른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북쪽에서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서쪽에서는 건주위를 정벌하였는데 모두 큰 공을 세우고 훈일 등에 녹훈되었다. 남이는 회군할 적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서 다 닳았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서 다 말랐네

사내 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그를 대장부라고 하겠느냐

그는 26세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어느 날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에 관해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펼 징조'라고 설명한 일밖에 없는데 이 말을 몰래 들은 유자광이 그 말에 다른 말을 보태어 남이가 모반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였다. 또 공주를 꾀어 간음하였다고 밀고하였다. 끝내 그는 모함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때 그는 28세로 병조 판서였다. 권람의 딸인 그의 부인은 그보다 몇 년 먼저 죽었다. 점쟁이의 말이 사실로 들어맞은 것이다.

달의 이상 현상을 보고 어머니의 죽음을 안 서거정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본관은 달성이고,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아버지는 서미성이고, 어머니는 양촌 권근의 딸이다. 서거정은 6세에 글을 읽고 시를 지었으므로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외조부 양촌의 글이 외손에게 전해졌다고 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적에 명나라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데, 이때 서거정은 종사관으로 따라갔다.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에서 자게 되었는데 저녁에 서거정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세조는 서거정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 괴상한 꿈을 꾸고 깜짝 놀라서 일어난 서거정은 땀을 몹시 흘렸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서거정이 말했다.

"달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달은 어머니를 상징한다.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 이렇게 꿈이 좋지 못하니 틀림없이 어머니에게 일이 있을 것이다"

"서거정의 효심은 실로 하늘을 감동시키는구나"

수양대군은 감탄하여 서거정을 불러 말하였다.

"편지에 그대의 어머니가 병이 위독하시다고 하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서거정은 한강을 건너와서야 그 편지가 어머니의 부고인지 알았다.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 가끔 이 꿈 얘기를 하였다.

"내가 자네를 택한 것은 비단 자네의 재주 때문만은 아닐세"

서거정은 문형에 뽑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후원을 거닐다가 미복 차림의 왕을 만나 큰소리 친- 최지

최지崔池의 본관은 전주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했다. 따스한 봄날 시를 읊조리면서 대궐 후원을 산책하다가 미복을 입고 나온 세조를 만났다. 최지는 허리를 구부려 업을 하였을 뿐 공손하게

절을 하지 않았다. 세조가 물었다.

"너는 누구이기에 감히 내지에 들어와서 이렇듯 무례하게 구느냐?"

최지가 대답하였다.

"나는 문사文士요. 궁중에는 상감 한 분만 계실 뿐인데 어찌 당신에게 특별하게 예의를 표할 필요가 있겠소?"

이때 최지는 마음속으로 그가 왕자 중의 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최지가 길가에 걸터앉자 세조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원양原壤(공자의 옛 친구. 원양이 걸터앉아서 공자를 기다렸는데 그를 만나자 공자가 막대기로 정강이를 치면서 "젊어서는 무례하더니 늙어서는 죽지도 않는구나" 하고 놀려 준 고사가 논어에 전한다)이냐? 어찌하여 걸터앉느냐?"

조금 후에 시녀와 내시가 잇따라 왔다. 최지는 놀라 떨면서 사죄하였다. 세조 임금이 그를 편전으로 불러서 경서를 강론하자 최지는 세조가 묻는 대로 척척 대답하였고 경서의 깊은 뜻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풀이하였다. 세조는 크게 기뻐하여 술을 권하였다. 최지는 술이 얼큰하게 취하였다.

"이 선비가 성리학에 밝구나.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이 한이구나"

세조는 즉시 최지를 성균관 사성에 임명하였다.

빌려 온 신숙주의 책을 뜯어 벽에 바른 김수온

김수온金守溫(1409~1481)의 본관은 영동이고, 호는 괴애乖崖이다. 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정랑으로 있었다.

하루는 그가 좌랑 김 아무개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을 잘 보네. 자네의 관상을 보니 오래 살 관상일세" 김 좌랑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비법을 함부로 전할 수 있나? 술을 한턱 잘 내면 조금은 일러줄 수가 있지"

기대에 부푼 김 좌랑은 잔치를 차려 병조의 동료들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김수온에게 다시 청했다.

"저의 관상이 오래 살게 생겼다고 했으니, 이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선생은 이미 50년을 살았으니 오래 산 것이오. 선생이 얼마를 더 살지는 내가 어떻게 알겠소"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남에게 책을 빌려 오면 책장을 떼서 도포 소매에 집어넣고 다니면서 한 장씩 꺼내어 암송하고 혹 잊어버리면 다시 꺼내서 보곤 하였으며 다 외운 뒤에는 모두 버렸다. 신숙주가 아끼는 고문책 한 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책에 책표지를 다시 만들어 애지중지하다가 김수온의 성화에 못 이겨 빌려주게 되었다. 한 달 쯤 뒤에 신숙주가 김수온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신숙주는 그 집 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책이 모두 낱장으로 뜯기어 그 집 벽에 붙어 있었다.

신숙주가 어이가 없어 하며 그에게 사연을 물어 보자 김수온은 태연하게 말했다.

"벽에 붙여 놓고 드나들 적마다 읽고 외우면 참 편리하지요"

그의 벼슬은 영중추에 이르렀다.

***

 

글짓기에는 이기고 속임수에는 진- 이석형

이석형李石亨(1415~1477)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伯玉, 호는 저헌樗軒이다. 그의 아버지 이회림은 늦도록 자식이 없어 그 부인과 더불어 삼각산에서 기도하고 그를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 중에 아버지가

꿈을 꾸었다. 꿈을 막 깨자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려 왔으므로 이름을 석형이라고 지은 것이다.

공은 출산되었을 때 푸른 보자기에 싸여 나왔다. 푸른 보자기를 째고 보니 태아의 살갗이 검고 뼈마디가 늘씬늘씬하였고 전신에 털이 있었으므로 그 어머니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아이를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보고는 "참으로 기이한 사내아이구나" 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이석형은 볼기에 손바닥만한 검은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거북 모양을 닮았다. 이석형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꿈에 볼기의 거북점이 거북으로 살아나 이석형의 몸을 맴돌곤 하였다. 이석형은 차츰차츰 자라나면서 모습이 씩씩하고 도량이 넓어졌으며 배움을 부지런히 하였다.

생원시, 진사시를 거쳐 세종 23년(1441) 문과시에 장원하고 동왕 29년 중시에 합격하였다. 세종이 팔준도八駿圖를 직접 만들고 그 그림에 쓸 글을 지어 오도록 신하들에게 명했다. 이때 이석형이 전箋의 두련頭聯을 만들었다.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이 천년 운세에 감응하고

땅의 쓰임이 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신물이 있는 힘을 다 바치네

이 글을 본 성삼문은 '이번 과장에서는 이석형의 글이 가장 우수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이석형을 보고 속임수를 써서 말했다.

"그대가 시골 학자를 본따서 이 글을 지은 모양인데 말 마馬자와 임금 군君자를 대對로 만든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

이석형은 점잖은 사람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지어 놓은 글을 버리고 다시 시를 지었다. 성삼문이 그 글을 훔쳐서 전을 만들어 일등을 차지하였다.

이석형이 성삼문을 보고 말했다.

"내 무릎은 남에게 굽힌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성삼문이 이석형에게 응수했다.

"나는 남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은 사람의 무릎을 굽히게 하는 사람이오"

이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

 

점쟁이의 아들을 살려준- 홍윤성

홍윤성洪允成(1425~1475)의 본관은 회인懷仁이고, 자는 수옹守翁이다. 천성이 사납고 잔인하여 살생을 좋아하였다. 문종 즉위년(1451)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제천정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십 명의 장사들이 배에 올라가 뱃사공을 위협하여 배가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홍윤성이 몸을 날려 배 위에 올라가 노를 부러뜨리고 그들을 모두 물에다 던져 버린 뒤 자신이 직접 배를 저어 한강을 건넜다. 이를 본 수양대군이 그를 오라고 하여 만났다. 홍윤성은 수양대군에게 절을 하지 않고 고개만 약간 숙이면서 말하였다.

"지금 임금은 유충하고 나라는 뒤숭숭하며 대신들은 임금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거늘, 대군께서 이렇게 뱃놀이에만 빠져 있고 부하들은 길가는 나그네를 괴롭히니 매우 한심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불렀습니까?"

수양대군은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그와 은밀하게 친분을 맺어두었다. 뒤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홍윤성은 정난공신이 되어 인산부원군에 봉해지고 형조 판서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홍윤성은 홍계관의 점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점을 쳤는데, 점쟁이 계관이 한참 있더니 다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말했다.

"매우 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형조 판서에 오를 것입니다. 그때에 저의 자식놈이 죄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할 신세가 될 터인데 제발 오늘을 잊지 마시고 저의 자식을 살려주십시오"

계관이 자기 아들을 불러내 홍윤성 앞에서 말하였다.

"모년 모월에 너는 죄를 짓고 감옥에 갈 것이다. 그러면 형조 판서 어른께 누구의 자식임을 말씀드려야 한다"

이 말을 들은 홍윤성은 매우 놀라고 정신이 없어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였다. 과연 그 뒤에 추국이 있을 때 스스로 점쟁이 홍계관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밝히는 자가 있었다. 홍윤성은 지난 일을 잊지 않고 그를 풀어 주었다.

세조 14년(1468)에 우의정과 영의정에 올랐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홍산에 살면서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고 홍산 수령 역시 괴로움을 많이 받았다. 세조가 온천에 갔는데, 홍산 사람 나계문의 아내 윤씨가 밖에서 울면서 호소하였다. 세조가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여인에게 그 사연을 들었다.

"홍윤성의 집 종들이 세력을 믿고 자기 남편을 때려서 죽게 하였지만 현감 최윤은 홍윤성의 권세를 겁내어 자기 남편을 직접 때려 죽게 한 사람만 가두고 다른 사람은 불문에 부쳤습니다. 또 홍윤성 집의 종들이 와서 갇힌 죄수를 데리고 갔으며, 감사 김지경은 현감에게 부탁하여 그 죄수를 사면하라고 하고 도리어 저의 아버지 윤기에게 홍윤성을 모해하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공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호소를 듣고 난 세조는 윤씨 여인을 불쌍히 여겨 감사 김지경과 현감 최윤 그리고 홍윤성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게 하고 윤성의 집 종들을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얼마 후에 임금이 홍윤성을 지난 공을 참작하여 특별히 사면하고, 이어 명하였다.

"윤씨 여인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편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절의가 가상하다. 그 여인에게 쌀 열 가마를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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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계원에도 들지 못한- 한명회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본관은 청주이다. 젊었을 적에 불우하게 살았으며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성의 경덕궁 문지기가 되었다.

명절을 맞아 관료들은 만월대에 모여 유쾌하게 놀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두들 언약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남쪽에서 이곳 개성으로 와서 벼슬하게 된 고향 친구들이다. 오늘 우리는 계모임을 만들어서 영원한 우의를 다지자!"고 하였다.

외로움을 느낀 한명회도 이 계모임에 넣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모두들 흘깃흘깃 쳐다보기만 하고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한명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끼워 주지 않은 것이다.

그 이듬해가 되자 세상이 바뀌었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한명회는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을 뿐 아니라 부원군이 되어 그 권세가 막강하게 되었는데 지난날의 송도 계원들은 모두 힘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그만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를 일컬어 '송도 계원'이라고 부르는 말이 유행되었다.

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한 이징옥

이징옥李澄玉(?~1453)의 본관은 양산이다. 형 이징석은 18세, 징옥은 14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산돼지가 보고 싶다고 하였다. 두 아들은 집을 떠났다. 형 징석은 산돼지를 잡아서 돌아왔고, 징옥은 이틀 뒤에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의아해 하며 이징옥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말이 형의 용맹이 너보다 못하다고들 하는데 어찌하여 너의 형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너는 이틀 후에 오면서 빈 몸으로 왔느냐?"

"어머니 문 밖을 보십시오"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 보니 마당에 큰 산돼지 한 마리가 누워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징옥은 어머니가 산 산돼지를 보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하고 밤낮으로 추격하여 그 돼지가 기진맥진했을 때를 기다려 사로잡아 온 것이다.

언젠가 이징옥은 길을 가다가 슬피 우는 젊은 부인을 만났다. 징옥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저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그 호랑이가 지금 대밭 속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징옥은 팔을 걷어붙이고 즉시 대밭으로 들어갔다. 칼로 호랑이 배를 갈라 보니 고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징옥은 그 고기를 보자기에 싸서 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였다. 이징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징옥의 아내가 집안의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기를 원했으므로 이징옥은 억지로 붙들지 않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뒤에 이징옥이 영남절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지 오랜 뒤였다. 이징옥은 사냥해서 얻은 수백 마리의 짐승을 시집간 아내 집으로 보내 주었다.

이징옥의 무용은 따를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인이나 오랑캐들이 모두 겁을 내었다. 그는 육진을 설치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김종서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세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징옥은 함길도 절제사로 있었다. 이징옥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세조는 이징옥에게 서울에서 내려간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 주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을 보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준 이튿날 이징옥은 생각했다.

'절제사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자리인데 박호문이 소문도 없이 갑자기 와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즉시 절제사가 있는 경성鏡城으로 달려갔다. 그는 박호문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불러낸 뒤에 그가 나오자마자 쳐서 죽이고 자기의 부하들을 모아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제 강을 건너가 내가 대금황제가 되면 만족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그 이튿날 행군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 판관 정종이 이징옥을 죽이려고 사람을 지붕 위에 매복시켜 두었다. 밤이 되어 이징옥이 의자에 앉아 잠깐 졸고 있는데 의자 밑에 있던 이징옥의 아들이 갑자기 말하였다.

"꿈에 아버지가 머리에서 피를 흘려 그 피가 다리에까지 흘러 내려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징옥은 그것은 좋은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종이 군사들을 데리고 돌진해 들어왔다. 이징옥이 그들과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그 자신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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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계를 써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

이시애李施愛(?~1467)의 본관은 길주이고, 벼슬은 회령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동생 이시합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이 길주에 도착하자 이시합은 길주의 관기로 있는 자신의 첩 소생 딸을 절도사의 침실에 들여보내어 수청을 들도록 하고 잠긴 문을 안에서 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문으로 들어온 반란군들에 의하여 절도사 강효문은 피살되었고, 이시애는 길주를 발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부총사로 삼았다. 귀성군 이준은 겨우 18세였지만 무술과 전략이 있다는 이유였다. 또 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어유소를 각각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 난의 토벌에 나섰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수령을 살해하고 반란군에게 호응하는 일이 일어났다. 함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관청을 포위하고 관찰사 신면을 공격하였는데, 신면은 누각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달려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관서지방 출신으로 벼슬이 2품에 오른 단천 사람 최윤손을 불러 효유사로 임명하고 함길도로 내려보냈다. 효유사의 임무는 반란군을 회유하고 그곳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내려간 최윤손이 반란군의 편이 되어 조정의 비밀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강순과 허종이 거느리는 관군은 홍원에서 그들과 격전을 벌이고 또 북청과 만령萬嶺에서도 크게 싸웠다. 반란군은 높은 지역으로 달아나 진을 치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 대었으므로 관군이 접근할 수 없었다.

토벌 좌장군 어유소는 작전을 바꾸었다. 정예병을 뽑아 작은 배에 나눠 태우고 풀색, 나무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혀서 보냈다. 그들은 해안을 통해 상륙하여 나뭇가지를 잡고 그들이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을 택하여 그들의 등뒤에서 징을 치고 북을 두드려 소란을 피우도록 작전을 짰다.

등뒤 높은 곳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적들은 깜짝 놀라 대오가 흐트러지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뒤따라 도착한 관군의 대부대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리에 방패를 이고 개미떼처럼 언덕을 기어오르니, 반란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용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시애는 급하게 길주로 도망하였다. 그는 가족과 살림을 꾸려 오랑캐 땅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길주 사람 허유례가 적장의 부하 이주 등을 꾀어 이시애와 이시합을 생포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진중에서 끊어져 서울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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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써 신숙주를 굴복시킨- 윤자운

윤자운尹子雲(1416~1478)의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헌落閒軒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 26년에 문과에 각각 합격했다. 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수상을 지내고, 성종조에 좌리공신에 녹훈되었다. 그의 문명文名은 신숙주와 함께 명망이 높았다. 동년同年(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이)모임에서 신숙주와 겨루어 대련對聯을 짓기로 하였다.

신숙주가 먼저 "반가운 친구는 모두가 백발이요" 하니 윤자운이 "젊은 재상은 다만 일편단심뿐"이라고 화답했다. 신숙주는 그만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윤자운을 극구 찬양하였다.

"나는 공의 정밀하고 민첩함을 따를 수 없구려!"

'흑두黑頭'와 '청안靑眼', '백발白髮'과 '단심丹心'은 멋진 대구를 이루어서 훌륭한 대련을 이루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신숙주를 감탄시킨 것은 '단심'이란 쌍관어를 절묘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쌍관어'란 한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는 말이며, 시작법에서 은유의 맛을 느끼게 하는 시의 기법이다. 그때 신숙주가 사랑하던 기생의 이름이 바로 '단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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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삼림 밑에서 죽은 윤필상

윤필상尹弼商(1427~1504)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양경陽卿이다. 세종 29년(144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3년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세조 9년(1463) 11월에 그는 형방승지로서 대궐에 들어가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날씨가 매우 추웠으므로 윤필상은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아마도 주상께서 옥에 갇힌 죄수들을 걱정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낱낱이 작은 책자에다 기록하여 두었다.

밤 오경이 되자 내시가 와서 형방승지를 급히 부른다는 왕명을 전하였다. 윤필상은 허둥지둥 의관을 갖추고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기록한 작은 책자를 소매 속에 넣고 침전 앞에 대령하였다.

임금이 창문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일렀다.

"오늘밤은 매우 추워 따뜻한 방에서 털옷을 껴입고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옥중의 죄수들이 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먼 지방은 힘이 미치지 못하겠지만 현재 도성의 감옥에 있는 죄수가 얼마인지 속히 아뢰어라"

"신의 직책이 형방승지입니다. 형옥刑獄에 관한 일은 신의 직무입니다"

윤필상이 즉시 작은 책자를 가지고 숫자를 보면서 죄목별로 죄수의 수를 소상하게 아뢰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특하게 여겨 창문을 열고 침전 안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윤필상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는데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임금은 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내전(왕비)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보배로운 신하요"

그제야 윤필상은 정희왕후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 뒤로부터 차례를 뛰어넘어 기용되었으며, 얼마 안 가서 높은 벼슬에 승진되었다. 성종 9년(147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10년에 그는 진도로 귀양갔다. 성종비 윤씨를 폐비하는 조정 의논에 참여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중종 때에 신원 되었다.

윤필상이 젊었을 적에 중국에 갔을 때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쳐 본 일이 있다. 점쟁이는 그에게 말했다.

"수명과 벼슬은 모두 높겠지만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을 운입니다"

윤필상은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이라는 찬란한 벼슬생활을 누렸지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끝내는 진도에 유배되었다.

어느 날 저녁, 이웃에 사는 사람이 김매는 품꾼들에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상림上林의 밭으로 모이십시오"

윤필상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어느 곳을 상림이라 하오?"

밭주인이 대답했다.

"여기서 5리 쯤 되는 곳에 상림上林, 중림中林, 하림下林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윤필상은 그제야 삼림 밑에서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점괘가 떠올랐다. 그는 낙담하여 허공만 쳐다보았다. 얼마 안 되어 연산군이 보낸 사약을 받았다.

용상을 가리키며 이 자리가 아깝다고 예언한 손순효

손순효孫舜孝(1427~1497)의 본관은 평해이고,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 또는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단종 원년에 문과에, 세조 3년에는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성종조에는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성종이 주연을 마련하여 중신들과 술을 마시는데 술이 거나하게 되자 손순효가 입을 열었다.

"직접 아뢸 일이 있습니다"

성종이 앉아 있는 어탑(임금이 앉는 상탑)으로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손순효가 머지않아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를 잘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용상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손순효가 또 아뢰었다.

"부녀자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려 국정을 어지럽히는 일이 너무 심하고, 바른 말을 마음대로 하는 언로가 막히겠습니다"

성종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겠소?"

"임금이 만약 그런 상황을 아신다면 저절로 그런 실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연회에 참석한 재상들이 모두 놀라며 손순효가 아뢴 내용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임금은 "내가 간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할 뿐이었다.

손순효가 술을 너무 좋아하므로 성종이 만날 때마다 그를 경계하였다.

"앞으로 세 잔 이상 마시지 마시오"

어느 날 승문원에서 올린 외교문서의 내용이 세련되지 못하여, 성종이 편전에 나아가 손순효를 불러오게 하였다. 손순효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오기는 하였는데 머리카락이 망건 밖으로 나와 헝클어져

있고 취한 기운이 온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성종이 노기를 띠고 말했다.

"표문의 글이 정교하지 못하여 경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려고 하였더니 경이 이렇게 취했구려. 그리고 또 내가 일찍이 경의 면전에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경계하였거늘 어찌하여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가?"

손순효가 답하였다.

"신에게 시집간 딸이 있사온대 못 본 지가 오래이기에 오늘 마침 지나다가 들렀더니 술상을 들여오길래 거절을 못하였는데, 다만 세그릇을 비웠을 뿐입니다"

"경이 마셨다는 술잔이 무슨 그릇인가?"

"주발로 세 번 마셨습니다"

"경은 이미 술이 취했으니 아마도 표문을 지을 수 없을 듯하오. 그러니 제학을 불러서 같이 짓도록 하오"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고 신이 고쳐 짓겠습니다"

성종이 쓰던 벼루를 가져다주게 하였더니 손순효가 곧바로 표문을 지어 바쳤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고 사용원에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마침내 한껏 마시며 크게 취한 뒤에야 물러났다.

외손 30여 명이 규장각의 관원이 된 양성지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이다. 여섯 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아홉살 때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 23년(144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조용히 주연을 마련하고 각기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더니 양성지가 나아가 말했다.

"성상께서 대신을 두터운 예로 대우하시어 매번 술잔을 기울이며 담론하게 하시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술 마시는 일을 절제하시고 옥체를 보살피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대가 나를 아끼는구나"

세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고, 홍문관 제학으로 승진시켜 임명하였다.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양성지는 나의 제갈량이다" 하며, 발탁하여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좌리공신(성종 즉위를 보좌하는 공신에게 내린 훈명)으로 기록되고, 남원군에 봉해져 대제학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글읽기를 좋아하여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며 손에세 책을 놓지 않아 상하 천년 사이의 치란흥망治亂興亡과 인물의 고하현부高下顯否를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이 알고 있었다.

장년 시절에는 군사에 관한 논의를 즐겨 하여 관련된 소疏를 10여 차례나 올렸는데,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군적에게 누락되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한 집안에서 장정이 한 사람뿐인 경우에는 군역에 세우지 않아야 하며, 한 사람의 장정이라도 재능을 시험하지 않고는 병사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평생 뜻이었다.

처음 벼슬하면서부터 집현전에 들어간 것이 16년이고, 서적의 교감을 맡은 것이 20년이며, 사관을 겸임한 것이 34년이고, 홍문관에 근무한 것이 26년이며, 문과의 고시관을 열 여섯 번이나 맡았다.

만년에는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로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사를 토론하고 간혹 동자 한 명과 말 한 필로 통진별장에서 놀았는데, 조용하기가 시골의 평범한 늙은이 같았다.

일찍이 내각(규장각)의 관제 및 조례를 편집하였는데, 매우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으므로 성종이 가상히 여겨 권장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성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 내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당하 문관 중에서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 제술 시험을 보일 때의 시험관)을 선발할 적에 이 조례를 적용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문집 3권을 출간하게 하였는데, 그때 각신閣臣 30여 명이 모두 양성지의 외손들이었다.

가집家集 6권이 있다. 68세에 죽었는데 시호는 문양文襄이라고 내렸다.

어릴 때부터 대가가 될 것이라고 촉망받은 신항

신항申沆(1477~1507)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용이容耳이다. 열네 살에 성종의 딸 혜숙옹주에게 장가들고 고원위에 봉하여졌다. 나이 7, 8세 때부터 이미 '시경'과 '서경'을 익혔으며 겸하여 황산곡의 시를 모두 외웠다.

하루는 아버지인 신종호가 시험삼아 외워 보라고 하였더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산수도를 꺼내어 절구를 짓게 하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리를 내어 응답하였다.

물은 푸르고 모래는 희어 가을 기운 드높은데

볕을 따라 날던 기러기 갈대밭에 내리네

다시 보니 연기 같은 비 창망히 내리는 저쪽 밖에

털끝같이 푸른 산이 우리 집이로다

이 절구를 들은 아버지는 매우 감탄하였다.

"이 아이는 후일에 반드시 대가가 될 것이다"

혜숙옹주를 출가시키려고 할 무렵 대상자를 선발하는데 성종이 신항을 한 번 보고 좋다고 하였다. 당시 점을 잘 치는 자가 수명이 길지 않다고 하였지만, 성종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을 취함에 있어 그가 현명한가 현명하지 않은가를 가리는 것이 마땅하지 어찌 장수하고 요절하는 것을 논하겠는가. 이 사람은 기상이 범상하지 않으니 그 마음속에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이다"

성종은 마침내 그를 사윗감으로 결정하였다. 어느 날 성종이 신항에게 물었다.

"네가 글 짓는 것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지은 것이 몇 수나 되는가?"

신항이 몇 수를 적어서 올렸을 뿐이었는데, 이때부터 성종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운명할 즈음에 동생 신잠을 불러 말하였다.

"사람에게는 근신謹愼이 첫째이고, 재예才藝가 다음이다. 이 두가지를 겸해서 갖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재예를 버리고 근신을 지켜야 한다"

잠시 후 조용히 읊조리며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좋은 집에 살다가 죽어서 산언덕으로 돌아가도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높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더라도 아내를 버리지 않겠다고 한 권경희

권경희權景禧(1451~149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번子蘩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9년(147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수찬으로 임명되자 대간이 권경희의 아내 김씨의 집안이 미천하다는 것을 들어 논박하였다. 권경희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 듣고 그 며느리를 버리도록 핍박하였으나 권경희가 사직하며 말씀드렸다.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10여 년 동안을 함께 가난한 생활 속에서 고생하며 밤낮으로 오늘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지금에 와서 버린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렇게 못할 짓을 해 가며 높은 벼슬에 등용될 수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어찌 못할 짓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보다 낫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이 말을 의롭게 여겨 역시 며느리를 버리라고 강권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또 논박을 하였으나, 임금이 감싸주며 대간의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경희가 공명을 구하지 않고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선비이다"

그러자 권경희의 처가인 김씨 집안에서 조정에 진상을 보고하여 그들의 신분이 미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져 마침내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다. 권경희의 장인은 김치운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권경희는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예악을 터득한 바가 많았는데 그가 돌아오자 모두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학식이 부쩍 향상되었다고 하였다.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과거에 낙방하고도 장래 대제학감으로 평가받은 김종직

김종직(1431~1492)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賻'를 지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런데 괴애 김수온이 대제학으로서 낙방자의 시권(시험 답안)을 열람하다가 그 속에 점필재의 시권이 있으므로 읽어보니 매우 뛰어난 글이었다.

"이 글은 참으로 뒷날 대제학을 맡을 솜씨이다"

김수온이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점필재가 낙방된 것을 아깝게 여겨 그 시권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영산 훈도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한강가에 있는 제천정 기둥에 시가 씌어 있었다.

눈 속에 핀 찬 매화와 비 개인 뒤의 산 모습

보기는 쉬워도 그리기는 어려워

시인의 눈에 띄지 않을 줄 일찍 알았다면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을 그릴 것을

어느 날 괴애가 제천정에서 유람하다가 그 글을 보고서 감탄하였다.

"이 글은 참으로 지난날 백룡부를 지은 사람의 솜씨이다"

김수온이 그 글을 지은 사람을 추적해 보았더니 과연 점필재의 작품이었으므로 시를 알아보는 지력이 귀신과 같다고들 하였다.

김종직은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승문원에 들어갔는데 어세겸이 승문원의 선배로 있으면서 김종직의 시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나로 하여금 채찍을 잡고 그의 종이 되라 하여도 달갑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성종이 그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라 내렸다. 그 뒤 연산군 무오사화 때에 그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화를 당하였으며, 문집도 태워 버리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있고 나서 억울함이 씻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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